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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26: 34 / 나의 오류 / 201106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26: 34 / 나의 오류 / 201106

정인순 2020. 11. 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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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취:한윤범

20201106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나의 오류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 33절부터 보겠습니다. 33절부터 보면,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 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일단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에 이런 질문이 성립이 안 될 정도로 당연한 질문인데요. 사람이 채우려고 삽니까, 비우려고 삽니까? 채우기 위해 사시는가, 비우기 위해 사시는가? 안 그러면 하나 더, 더 채우기 위해 잠시 비우는가? 어느 쪽이겠습니까? 사람이 사는 이유가 채우기 위해 사시는가, 비우기 위해 사시는가, 더 채우기 위해서 잠시 비우며 사시는가? 어느 쪽일까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집에 있는 것 거덜 내기 위해서 살진 않잖아요. 거덜 난다는 것은 텅텅 비었다는 것이고, 꽉꽉 채우는 것, 치매 걸린 노인이 온 동네 쓰레기를 자기 집에 갖다 안길 때 인간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채우는 맛이 사는 거예요. 텅텅 비워있는 맛에 사는 게 아니고.

아이를 하나 낳고, 둘 낳고, 셋 낳고, 계속 낳는 이유가 허전한 나의 과거, 뭔가 풍성한 가족애가 그리웠던 지난 나의 성장과정에서 맛보지 못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이라도 풍성하게 낳고,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낳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자식을 넷 낳았는데 셋 죽고 하나 남았다. 이걸 복이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집을 보니까 좁은데 애 넷 낳았는데 셋 죽고 나니 속이 시원하죠?” 이걸 위로라곤 할 수 없는 겁니다. 집이 비좁더라도 많이 꽉꽉 채워지길 원하지요. 방이 몇 개 되지 않더라도 누가 준다면 거절할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이 꽉꽉 채우길 원하시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나가시는 겁니다.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땅의 안식에 있었고, 그 땅의 안식이 되는 방식은 다 비우는 거예요. 들어가 살지 말아야 될 것을 다 비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식을 위해서 다 나가라, 이렇게 되는데요.

그것을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 평소에 일상의 나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 일상에 있어서 우리의 기준은 ‘나’입니다. 나거든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필요한 기준을 하나님 쪽에서 제공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➀➁➂ 다시 보면, 채우기 위해서 사는가, 비우기 위해서 사는가, 더 채우기 위해서 잠시 비워놓는가? 할 때 나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냐 하면, 비우는 것이 아니고 자꾸 채우고 싶어 하지요. 내가.

채우고 싶어 할 때 비워있는 나의 뭔가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 그것을 우린 누구한테 호소하느냐 하면 타인에게 호소해요. 타인 중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계시겠지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가 채우려고 기도합니까, 있는 것 다 가져가라고 기도합니까? “주여, 내 목숨이고 뭐고 다 가져가세요.” 이렇게 기도합니까? 아니지요. 채우려고 기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기도라는 것을 하기 전에 내가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채우고 싶다는 그 기준이 계속해서 내 안에서 활발하게 작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오늘 본문 레위기 26장 33절, 34절, 35절, 36절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고,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기준을 제시하느냐는 아는 바 없고 그냥 교회 와서나 기도를 하든지 뭐든지 하나님께서 내 원하는 걸 채워지기를 바라는 거지요.

만약에 내가 만족스럽게 채웠다면 그것은 내가 나답다고 할 수 있는 그 목표에 이를 때까지 이 정도하면 더는 안 주셔도 됩니다, 하나님, 라고 할 때까지 꽉꽉 하나님이 내 기도의 응답이라든지 내 봉사의 응답이라든지 보상이라든지 뭔가 꽉꽉 채워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기준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하면, 이 땅이 안식하기 위해서 다 나가라, 이거에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다 나가라는 거예요. 그러면 다 나갈 때 저 예쁘니까 남아있어도 되지 않습니까, 라는 저는 착하니까 약속의 땅에 그냥 있어도 되지요, 라는 내 기준이 써먹을 데가 없어요. 내가 사는 기준과 하나님이 사는 기준이 서로 맞지 않는 겁니다. 주님의 기준은 나가라는 거예요.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는 게 기준이에요. 내 나라에서 쉽게 말해서 천국이죠.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나가라는 게 하나님의 기준이에요. 나가라, 다 나가라.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타인을 모시고 싶은 거예요. 나+타인, 나와 타인이 결합하게 되면 이게 우리가 된다 이 말이죠.

사람이 남을 찾는 이유가 필요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씨나 총각이 혼자 살지 않고 결혼하겠다는 것은 혼자 사는 것보다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같이 사는 것이 나의 나다움에 충족시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하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보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우리가 된다고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떼놓고 생각하잔 말이죠. 하나님을 떼놓고 생각할 때 가동이 되는 우리의 삶의 기준은 무엇이냐? 윈윈, 서로가 서로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내 모자란 걸 네가 채워주고 네 모자란 걸 내가 채워주자. 그러면 우리로서는 나 혼자 사는 것보다 너 혼자 사는 것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 행복이 우리의 기준이라면, 그 기준의 주님의 기준에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지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빨간 걸로 주님의 기준이 뭔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기준이 뭐냐? ‘안식+인간의 배신’입니다. 이게 주님의 기준입니다. 주님의 기준에 레위기 26장 33절에서 36절, 37절, 38절 뒤에 나오는 기준에 부합하려면 필수조건으로서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배신이에요.

인간이 배신하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인간이 나를 위한 기준이 필히 배신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만을 위해서 남을 찾더라도 내가 꽉꽉 채우기 위해서 살고 싶다는 그 기준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님답게 되는 기준에 포함되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원하는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게 하나님 쪽에서 배신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찼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신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조건을 전제해서 하나님께선 안식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옛날에 이 땅에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들의 있었는데 내가 속이 상해서 확 쫓아내버렸더니만 땅이 드디어 만족스럽게 안식이 되었다.

이게 레위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26장 34절부터 38절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우리는 내가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협조하면 하나님 기뻐하실 줄 알고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기쁨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쫓겨나가는 것이 조건인데 우린 달라붙는 게 조건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여태껏 지금껏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게 좋지 않습니까? 너나 좋지. “하나님 좋은 게 좋습니다. 하나님 봐주세요. 하나님 살고 싶어용.” 하고 재롱을 부리면서 달라붙으면 하나님이 되게 좋아할 것 같지요? 하루 종일 맞벌이하는 아들과 며느리 대신해서 할머니가, 자기 할아버지는 집에 내팽개쳐버리고, 아들 집에 와서 아들이 낳은 손자, 손녀 둘을 저임금에 하루 18시간 근무할 때 그것도 모르는 손자가 하는 말이,

“나 할머니 좋아요. 나 할머니께 딱 들러붙고 싶어요. 이러면 할머니가 되게 좋아하지요?” 이러면 할머니가, “좀 떨어져라. 떨어지는 게 좋다. 나 좀 쉬자. 지금 팔다리가 다 끊어질 고통에 놓여있다. 너 좀 떨어져. 나이가 몇 살인데 달라붙어있나. 떨어져주면 그게 내 안식이다.” 그게 안식이에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이 하는 유일한 표준입니다. 기준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과 십자가 믿는 걸 구분해주셔야 돼요. 예수 믿는다 하니까 제자들은 철이 없어서 예수님을 버렸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이렇게 제자들보다 우리가 더 우수한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고도 예수님을 떠났다면 제자들의 배신뿐만 아니고 그 배신이 오늘날 우리들이 배신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배신한 이유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대하기 때문에 십자가 없이 주님과 우리가 사이좋게 이웃사람처럼 친구처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십자가를 빼버리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는지 알아요? 비우려고 찾는 게 아니고 채우려고 한 거예요. 이 땅에선 고생했지만 죽어선 천국 가겠다. 자꾸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채우려고 하다보니까 결국은 마지막 예수님에게는 설마 그런 일이 안 벌어질 것이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대목인데 새삼 제가 읽어드리는 것도 민망스러운데 읽어드려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많은 고난을 받고, 이것까지는 제자들도 각오했을 거예요. 그 다음에 죽임을 당합니다. 고난 뒤에 낙이 있는 게 아니고 고난 뒤에 뭐가 있다? 죽음이 있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십자가에 죽기 전에. 제자들에겐 산 예수님이 의미가 있고 유용한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유용한 거예요. 자식도 죽은 자식 말고 살아 있을 때 내 자식이라니까요. 자식으로서 예쁘다니까요. 손자, 손녀도 마찬가지고.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살아 있을 예뻐요. 말로는 나가 죽어라 하지만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게 아마 나을 거예요. 뭐든지 살아 있는 것이 선이고 죽으면 악이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따를 때 죽는 예수 보고 따랐습니까? 나 죽는다 할 때 빈말인 줄 알았지요. 제자들이 필요한 예수는 산 예수에요. 죽는 예수 아닙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산 예수를 원하지 죽은 송장 예수를 원하지 않잖아요. 그게 얼마나 인간들 사고방식이 하나님 쪽 거꾸로 돼있다는 걸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안 돼요.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십자가 빼버리고 대단한 예수를 믿어버리면 그건 더 채워달라는 자기 뜻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억지를 부리고 강요하고 뒤집어씌운 거예요. 내 기준을 충족해주시기 바란다고 억지를 부린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이쯤해서 네 뜻 알고 내 뜻 알고 갈라서자. 베드로야 오지 마라. 우리 갈라서자. 내 뜻 모르는 베드로야, 너와는 빠이빠이다. 헤어지자. 영 사고가 안 맞는다는 거예요.

제가 어떤 문장을 말씀드릴 테니 이 문장이 어디가 잘못 됐는지 보세요. 당신 나와 결혼하게 되면 물에 손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라는 문장을 날렸다면 어디가 잘못된 문장입니까? 지금 저녁때라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물에 손 한 방울 대는 것은 없어요. 손에 물 한 방울을 대야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때에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 그런 예수님을 좋게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예요. 이건 내가 설정한 기준이 하나님께 통할 것이라고 아주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물에 손 한 방울 못 대게 해줄게, 할 때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그 기준을 들어줄 애초에 그런 뜻은 일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물에 손 한 방울 못 댈게, 이렇게 해버리면 이런 문장은 이걸 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한테는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어요. 예수님, 반대로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자꾸 반대로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모든 성경말씀, 오늘 본문 레위기 이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반대로 이야기하신 게 아니에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야 일이 되는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어 버리면 모든 일이 다 깨진다는 거예요. 주님은 그게 깨져야 돼야 된다는 겁니다. 너라는 작자가 너라는 인간 자체가 죽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다 깨져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커튼(요새 말로 휘장인데)이 있다는 걸 몰라요. 커튼이 그게 끝인 줄 알아요. 커튼 뒤의 세계가 있는 줄 모르고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최종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해가 여러분 안 되시면, 오늘 본문 자체가 파격적입니다. 제가 예를 들 테니까 이런 말씀은 어떤지 들어보세요.

로빈슨 크루소 들어봤지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와서 살다보니까 해안가에 사람 발자국이 있는 거예요. 첫째 이 발자국은 자기 발자국이다. 두 번째, 자기 외에 다른 사람 발자국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해안가에 발자국을 발견할 때 이 섬은 무인도에요. 주인 없는 낯선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본인이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운지 몰랐어요. 너무너무 겁난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사람으로 왔으니까 같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사는 기준은 뭐다? 비우는 게 아니고 채운다. 채울 때 여력이 없으면 타인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 타인 가운데 누가 있다고 했어요? 타인 중에 제일 힘센 타인은 누구라 했습니까? 하나님.

따라서 나라는 걸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날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날 지옥 보내라고 지옥 가서 나를 죽여 버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아니라, 이게 참 중요한 건데, 인간은 그냥 내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는 동시에 내가 갖고 있는 기준도 함께 있어요. 심지어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할머니 몸 아픈 건 생각 안 하고 자꾸 달라붙어서 뭐라고 변명하느냐 하면, 할머니 제가 옆에 붙어있으니까 좋지요, 라고 일방적인 생각으로 할머니한테 치댄다 이 말입니다. 참 딸이 멀리 있으니 천만다행이지. 가까이 있으면 도와 달라할 때 안 갈 수도 없고. 전도사님 많이 시달려보니까 경험자 아닙니까.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관계없어요. 그냥 내가 여기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나는 나답게 되기 위해서 어떤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 기준과 더불어 내가 있는 거예요. 비우는 게 아니고 채우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뜻은 뭡니까? 다 나가라는 거예요. 하나님 뜻과 인간 뜻이 맞질 않는 거예요.

그 맞질 않는다는 것이 제가 그냥 한 소리가 아니라 이 말씀이 주님도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 있고 인간도 양보할 수 없는 두 기준이 충돌한 사건이 신약에서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예수 믿지 말고 십자가를 믿으란 말이 뭔 뜻이에요?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예수, 내가 초정하는 그런 예수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대신하는 주님이 나 보고 죽어라, 나가라고 하신 그 기준을 우리가 수용하라 이 말입니다. 십자가를 수용한다는 말은 주님이 나를 내쫓는 그 기준에 동의하라 이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추방하려고 한단 말이죠.

그 섬에 새 발자국이 새로운 주인 없는 발자국이 등장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공포에 휩싸였어요. 왜? 여기는 누구만 있어야 된 기준입니까? 무인도니기 때문에 나만 있어야 되고 발자국이 있더라도 내가 남긴 발자국 외에 일체 다른 발자국이 있으면 안 돼요. 그런데 발자국이 있었던 거예요.

인간세계에는 인간의 기준만 동의하는 인간들만 고스란히 인간들의 세계가 돼야 돼요.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인간이 살아보려고 애쓸 때 하나님이 힘을 보태줘야 된다는 것이 인간들의 합의에요. 인간세계의 합의라고. 오늘날 교회의 합의고요. 우리가 그걸 선뜻 합의에 동의했고요.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죽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어요,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사람으로 간주 안 했지요. “어디 내 앞에서 사탄을 들이밀고 있어. 악마야 저리 가! 가. 베드로야 저리 가.” 가라 이 말입니다. 너는 십자가 질 때 갈 사람이야. 그런 뜻이에요. 열두 제자 몽땅 갈 사람이에요. 우리고 마찬가지고.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하나가 될 수 없고 우리 뜻이 나라는 자아, 나를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우린 주님과 하나 될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냥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답게 되는 기준을 우리는 포기 못하잖아요. 그냥 내가 하루아침에 내가 됩니까? 계속 나답게 뭔가 채워야 나답게 되잖아요.

성경말씀이 이렇게 나와도 사람들은 거부해요. 이 기준을 표준을 안 믿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발자국을 찍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이 땅에 와서. 로빈슨 크루소의 해안가에 발자국 찍듯이 발자국 찍어버리는 겁니다. 실제로 그 소설에서는 로빈슨 크루소가 굉장히 이성적이에요. 자를 가지고 발자국을 꼼꼼하게 체크합니다. 재보니까 이게 내 발자국이 아니었어요. 자기 발자국보다 컸어요. 나중에 보니까 이 섬이 무인도가 아니고 거기 원주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이름이 없어요. 왜? 인간이 기준이기 때문에. 무인도에 있는 로빈슨 크루소 본인이 기준이기 때문에 없어야 되기 때문에 나만 있어야 되고 그 외에 없어야 되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이름이 그 섬에 일체 필요치 않았던 거예요. 필요하지 않았는데 원주민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뭐라고 지었느냐 하면, 그 사람 위주로 원주민 고유의 특성을 살리는 이름을 짓는 게 아니고 내가 너의 이름을 지었다는 특성을 살리는 이름을 주는데 그 이름이 뭐냐? 프라이데이, 금요일.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당신을 예수라 믿어줌으로써 비로서 당신은 나에게 의미가 되었다는 겁니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조건 하에 나는 당신을 믿는다는 뜻이에요. 이 믿음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하나님을 여호와를 여호와라고 인정하기 위해서 여호와는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내가 추방되기 전까지는. 내가 주님과 좋은 관계에 있다고 스스로 착각을 할 때까지는. 이게 나의 오류입니다.

물에다 손 한 방울 묻힌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고 해야 인간들 사는 우리 동네에선 통하니까 하나님 당신도 우리 인간이 사는 법에 따라달라는 요청을 우리가 은연중에 하게 됩니다. 우리 없이 하나님 홀로 안식한다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건 전혀 하나님답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사는 걸 소원했잖아요. 따라서 이스라엘을 내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이스라엘이 나중에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 쫓겨나갔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추방됨으로써 어떤 분이 저한테 물을 수가 있어요. 목사님, 우리가 하나님께 강제로 추방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뭡니까, 라고 물을 수 있을 거예요. 로빈슨 크루소에서 발자국을 재보니까 이 발자국은 자기 발자국이 아니지요. 그러면 1이 되던 그 섬 주민이 몇 명 됐습니까? 1이 아니고 두 명이 됐지요. 두 명이 되면 평등할까요, 여기서 누가 센가, 누가 높은가, 누가 잘났는가, 투쟁이 있게 마련이겠지요.

내가 알아서 패배하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두 번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나는 그에게 주인이 되고 지배하고 내 뜻대로 다뤄져야 내가 만족해요. 기도를 하든지 아부를 하든지 뭐 헌금을 하든지 간에 어떤 방법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다뤄질 때 비로소 나의 나다움은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이것은 나의 안식이 되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안식을 놓고 주님의 안식이냐, 나의 안식이냐 대결하는 구조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땅,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우리가 출생한 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출생해놓고 이 땅이 누구 땅이라고 우깁니까? 내 땅이라고 우기지요. 집사님 출생지가 어딥니까, 서울입니까? 의성. 그나마 잘됐습니다. 나의 출생지가 의성이다, 라고 했을 때 내 출생에 대해서 의성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는 설명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건 의성이 아니야. 이건 하나님이 나의 땅이야, 라고 한다면 졸지에 집사님은 출생지를 하나님께 빼앗긴 셈이 돼요. 의성에게 쫓겨난 게 돼요.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나는 의성에서 태어났다는 것 말고 나는 가을에 태어났다. 상당히 낭만적이 아닙니까. 단풍이 들 때 가을에 태어났다. 주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은 어디서 태어났어요?” 주님은,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아버지께로 왔다는 게 낭만이 아니고 나는 이 땅을 접수하러 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따라서 이 땅의 사람은 나 빼놓고 아무도 이 땅이 내 출생지라고 할 사람은 없게 만들겠다, 나가라 인간아. 이 땅은 내가 접수한다. 이 예수님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아들이 자기 땅에 왔는데 영접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으라고 오신 거예요. 인간 같은 인간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함께 살 그러한 권한이나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아무도 없음을 알려주려고 온 거예요. 자기 땅에 왔어요. 그러면 누가 나가고 누가 머물러야 돼요? 주님이 머물러야 되고 나머지는 이 땅에 살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땅을 자기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반대로 이야기해버리지요. 나는 아버지께로 왔다. 너희들은 이걸 아버지의 세계로 생각하는데 내가 그 아버지께로 왔다. 그런데 네 생각과 내 생각이 안 맞지. 과연 너희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와 내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걸 틀려도 한참 틀렸다고 알려주려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생각을 잠시 접고 인간들 생각을 해보겠어요. 여고동창회 한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40년 됐다 합시다. 열여덟에 졸업했으니까 쉰여덟 됐겠지요. 40년 만에 여고동창회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친구들끼리 제일 궁금한 게 뭐냐 하면 넌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왜냐하면 졸업할 땐 똑같은 교복을 입었으니까.

우리 때는 똑같이 단발머리 했거든요. 옛날에 두발자유화 되지 않았을 때 왜 단발머리 하느냐? 머리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똑같이 단발머리 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자유화되면 비교가 되니까 오직 공부만. 고등학교란 통과하는 곳이니까. 영원히 고등학생 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영원한 자리는 나중에 성인 되어서 정하고 고등학교는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거기다 인생을 걸고 그러지 말란 말이죠. 일종에 튜브 같은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여고동창생 가운데 A, B, C, D 있는데 기니까 예를 들어 네 명만 하겠습니다. 일단 이 사람들 나이는 몇 살입니까? 전부 다 동갑이죠. 58. A라는 여자는 자기 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결혼을 안 했다. 결혼 안 했음. B라는 여자는 20대 초반에 눈에 불이 붙어서 동갑인 남자 만나서 결혼했는데 5년도 안 돼서 깨져서 혼자 산다. 애도 없고. C라는 여자는 남자와 결혼해서 애 셋 낳았는데 중간에 남자가 바람 펴서 50살부터 8년 동안 혼자 산다. D라는 여자는 애 둘 낳고 여태껏 한 남자와 가정을 산다.

그리고 A란 사람은 결혼 안 하고 성공하겠다고 미국 가서 산다. 남자와 헤어져 혼자 사는 여자는 전라도에 산다. 이 사람은 경상도에 산다. 이 사람은 충청도에 산다. 이렇게 될 때에 이걸 선으로 표현해보자. A라는 사람은 줄곧 결혼 안 했으니까 이렇게 가겠지요(⟶). B라는 사람은 결혼해서 신나게 가다가 올라갔다 내려가서 살겠지요. 내 마음대로 그리는 거예요. C라는 사람은 이리 갔다, 이리 갔다, 이리 간다. D라는 여자는 이렇게 갔다.

이것을 영화에 보면 미국의 LA 야경을 보신 적 있습니까? 보게 되면 정방향의 선들이 있지요. 거기에 가로수부터해서 새까만데 불빛이 있고 다운타운의 고층건물에는 불빛이 많고 나머지는 주택가라서 적은 불빛이 정방향으로 선이 보이는 게 있을 거예요. 이 선 하나하나가 우리 인간 자기 살아온 인생 하나하나로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뭐냐? 바로 이것을 위에서 볼 수 있는 드론 띄워서 전체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 속했습니까, 속하지 않았습니까? 성도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거예요. 여고동창생이든 남고동창생이든 뭘 만나도 이 땅에 속하지 않는 겁니다. 방금 A, B, C, D라는 여자들에겐 뭐가 없느냐 하면 수평적으로 LA란 적막한 야경처럼 하나의 선만 표시되는 선으로 표현되는 자기 인생역사, 선으로 표시는 것만 있지 그걸 초월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은 이 여인들에겐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구구절절 소설책 열권으로도 모자란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어요. 물론 남편 있는 사람은 빨리 가야 되지만 남편 없는 셋은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밤새도록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이건 벌레처럼 무당벌레, 자벌레처럼 땅만 기어가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나이 58까지 평생을 두고 피부 다 늙고 모든 것이 몸은 몸대로 갱년기에 망가질 때까지 오직 땅에 기는 자기의 선과 선을 그냥 수평적인 지상의 선, 평지의 선을 조금씩 이어가는 것, 그 외에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아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전혀 없는 거예요.

혹시 A, B, C, D 여고동창생 가운데 교회 간 사람도 있을 거예요. 교회 가면 뭐합니까? 교회 가서 내가 지상의 인생 잘 피게 해 달라, 채워 달라 그것 기도하다가 복음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자기 잘되게 해 달라고 교회 왔다갔다하다 그게 끝이지요. 뭔가 훌쩍 독수리처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여유분이 전혀 없는 거예요. 대부분 사람들이.

제가 LA 야경을 이야기한 이유가, 울산도 마찬가지에요. 밤 되면 전부 다 죽은 도시에요. 도로에 자동차 불빛만 있을 뿐이지 가로등으로 하여금 여긴 주택가라고 표시할 뿐이지 사람은 집구석 다 기어들어갔는지 깜깜해서 보이질 않아요. 그게 사는 겁니까? 그게 주님께서 그런 안목이나 유지하라고 교회 다니라 했겠어요?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영접치 아니했다는 말, 아무도 주님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 뭔 뜻입니까? 주님의 안목은 독수리 안목이에요, 드론 안목이에요. 위에서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로 성령 받아서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볼 때 위에서 볼 줄 알아야지요.

세상을 볼 때 얼마나 깜깜하고 어둡고 낮에도 전부 다 평지를 기어 다니는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거예요. 생각하는 것, 사고방식, 아침에 눈 뜨고 하는 게 전부 다 오늘 하루하루 밥 먹고 살아야지, 하고 벌레 기어가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러한 존재, 이 땅에 참여한 주님의 안목과 공통성이 하나도 없는 그런 존재가 오늘날 인간들입니다. 자기 기준밖에 몰라요.

하나님 채워줘서 남은 인생 편하게 살라, 행복하게 살라, 건강하게 살라, 그런 요구조건 외에는 내 자신이 누구냐고, 내 자신이 어디서 잘못 되어서 주님께서 십자가 피 흘려 죽어야 됩니까,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어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인간 같으면 사람 다 됐지요. 그건 일단 내 인생 기준에 문제 있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이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배신해요. 그것은 인간이 인간들 본인이 배신한 것도 모르고 이미 주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간과 약속은 이스라엘과의 약속은 이미 틀어진지 오래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 나가라고 하시는가? 여고동창생들 왜 다 지옥 보내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새로 모집하기 위해서예요.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제자 뽑을 때 제자 숫자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죠.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언약, 그 다음에 이삭언약, 그 다음에 무슨 언약입니까? 야곱언약. 야곱언약의 축복의 결실, 자식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죠. 야곱의 이름의 뭐로 바뀌지요?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완성된 야곱언약을 품은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을 한 겁니다. 선택의 의미는 너는 구원받을 자격 없다는 걸 명시해버리는 겁니다. 선택을 했다는 말은 협조를 구하는 게 아니에요. 일방적이거든요. 선택은 일방적으로 선택해버리는 거예요.

선택에서 효과적인 것은 뭐냐? 제비뽑기에요. 제비 뽑히지 않은 자가 억울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이죠.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뽑히지 않은 사람과 뽑힌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독수리의 안목으로 새롭게 이스라엘을 구성하고자 하시는 거예요. 인간의 기준이 왜 문제 있으면 왜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의 기준과 합치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기준에 준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 작업이 뭐냐 하면, 내 땅에서 너희들 이스라엘 다 나가라, 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20201106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나의 오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36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잎사귀 소린데 칼이 있는 줄 알고 경기 나 도망간다 이 말이죠.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천답하여” 천답이라는 것은 함부로 서로소로 밟아버리는 거예요. 미답(未踏,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음)이란 말 있잖아요. 함부로 천하게 밟아버리는 거죠.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있으나마나한 있어도 있는 둥 없으면 그만인 그런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누가요? 원래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이스라엘이.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이 망했습니까, 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스라엘이 망했습니까, 여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느냐고 걱정스럽게 질문하게 되면 이 질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성립되지 않습니다. 너 지금 누구 편드느냐고 나와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분은 안 망했잖아요. 활동함을 나타냈잖아요.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명백하게 확실하게 보여줬으면 그게 바로 성공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실재성이 됩니다. 실재성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 리얼리티reality냐, 무엇이 실제로 있는 것이냐를 놓고 인간과 하나님과 경쟁했다 이 말이죠. 인간은 인간이 노력한 문명과 역사로 실재로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라고 할 수 있는데 복잡한데 어쨌든 간에 진짜 있는 게 뭐냐? 진짜 있는 게 무엇이며 누가 뭘 해서 없는 게 여기 나타났느냐? 거기에 대한 인간의 모든 해답은 인간이 노력해서 여기 있게 했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해와 달 누구 만들었느냐, 그런 것은 인간에게는 질문대상이 안 돼요. 거기 있다가 중요하지 달이 있고 별이 있다가 중요하지 누가 만들었다는 말을 인간세계에 하게 되면 실례입니다. 왜? 해답 없는 말은 꺼내지 말란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누가 만들었다고 해도 증명이 안 되니까. 실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실용성이 떨어지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질문조차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이 노력한 것, 내가 애쓴 것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집에 애가 있는데 손자가 있든지 누가 있던지 간에 애가 커가는 걸 보면서 엄마는 거기서 자기역사를 뽑아내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하고 자기역사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게 실재고 그게 진짜로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계획이란 게 전부 다 어떻게 돼요? 인간들의 노고와 수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열망, 이런 것 때문에 다 가려지겠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 때 뭐로 만든다고 했지요? 제비뽑기, 선택을 한다 했지요. 특히 이삭언약 같은 경우에 이삭은 누굴 밀어줬습니까? 복을 주는 당사자 이삭은 누구를 복의 실재로 봤습니까? 에서입니까, 아니면 야곱입니까? 큰 아들 에서를 밀어줬지요. 그래서 이거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했잖아요.

복을 주면서 그냥 복 주면 되는데 에서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킵니다. 노골적으로 너한테 가게 돼있어, 말을 이렇게 해도 되는데 같은 말로, 나는 사냥한 고기를 먹게 한 아들에게 주겠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미 이삭은 누굴 선택했느냐 하면 이삭 자기의 권한으로서 에서를 선택한 거예요. 그럼 에서와 이삭은 동질이라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굴 선택했습니까? 야곱을 선택으로 말미암아 야곱과 하나님이 동질 됨으로 말미암아 이삭과 에서는 동시에 이 동질성은 주님 앞에 버림받는 겁니다. 너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다르다는 거예요. 네가 생각한 언약의 실재성과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이뤄나가는 언약의 실재성이 일치하지 않고 대립된다는 겁니다. 그게 쌍둥이로 남들 보기에 같은 아버지, 엄마에게서 태어났다고 누구나 다 같은 운명으로 갈 것이라고 단정 짓는 쌍둥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안에서 서로 복싱하고 있는 거예요. 서로 붙들고 씨름하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원칙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 있느냐? 아니요. 그럼 하나님 뜻이 인간에게 있느냐? 아니요. 그럼 하나님 뜻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과 인간이 싸우는 그 와중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안 되고 십자가를 믿어야 될 이유는 뭐냐?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는 인간과 하나님과 대치되는 뜻을 지니고 있음을 투쟁의 형식으로 보여주거든요.

인간은 하나님은 죽이려 했고 밟으려 했고, 하나님은 인간이 밟은 예수님을 인간이 싫어서 밟은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는 좋다고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인간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고 인간이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지 않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싫어하고 인간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고.

그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합치했다는 것은 어디가 실재성이 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존재가 실재성이 아니라 십자가가 실재성 돼야 돼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어느 악마를 너를 꾀더냐? 악마는 인간 편이거든요. 악마는 모든 걸 다 양보해도 딱 하나는 양보 안 합니다. 십자가에 다 이루심에 대해서는 악마는 제발 그 이야기만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법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네 행동을 일치시키라고 닦달 내는 그 일은 악마가 시켜요. 그걸 강남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양심의 소리라 해요. 양심의 소리는 뭐냐 하면 강남강의 보시면 나옵니다만 양심의 소리가 악마의 소리거든요.

“네가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어?” 이거에요. 악마는 계속 나에게 치중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백성으로서 네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 말씀에 순종해야지.” 계속 순종될 수도 없는 목표에 대해서 인간이 파닥거리면서 계속 추적해서 따라가서 일치하도록 악마가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평생을 해도 할 수도 없는 그 과제를 숙제를 인간에게 주는 겁니다. 지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복음 믿고, 예수 피 믿고 하다고 나중에는, 철봉에 매달리다가 나중에 진이 빠져서, “하나님 나 복음 그만 믿을래요. 십자가 그만 믿겠습니다. 그냥 가끔은 주일 날 교회만 나올게요. 나 보고 더 하라 하지 마세요. 내가 지쳤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것도 지쳤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하려고 해봤는데 안 되겠습니다.”

언제 주님께서 하라 했어요. 마귀가 시킨 걸 마치 주님이 시켰다고 마귀가 그렇게 거짓말한 거예요. 주님은 우리 보고 하라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선택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면 끝까지 사랑하거든요. 주님의 선택의 우리의 행함을 이깁니다. 주님의 제비뽑기의 가치를 자꾸 악마가 모독하는 거예요.

“네가 할 수 있는데 왜 주님의 선택에 의지하려 하느냐. 네가 열심히 하면 괜찮은 인간 될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소질 있어. 순종할 수 있어.”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은 전부 다 악마 편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악마의 뜻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율법을 지켜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은 뭡니까? 나가라, 다 나가. 안식을 방해한 죄목으로 처벌이 점점 더 정교해지는 겁니다. 철저하게 가는 겁니다. 가혹하게. 더는 나의 가능성, 내가 순종할 가능성, 말씀 지킬 가능성이 never 전혀 없음을 나는 너의 자질과 재질에 대해서 애초부터 기대한 적이 없음을 네가 알 때까지 밀어붙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면 나는 나에게 제발 이 고백을 하세요. 나는 끝났다. 어떤 것도 나에게 기대하면 안 돼요. 믿는 놈이 바보에요. 나를 믿는 내가 나쁜 놈이에요. 내가 악마에요. 오늘 어떤 분의 글에 댓글 달았습니다만 왜 인간이 자기를 관찰합니까? 뭐가 걱정돼서 관찰하는 거예요? 자꾸 자기가 자길 지키려고 해요.

주님이 우릴 지킬 것이면 약속의 땅에서 내쫓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한 이유가, 맛 봤나? 나가라. 전부 다 나가. 너희들 있음 자체가 하나님의 기준을 모독하고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율법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저주되게 하고 심판받게 하고 내보내 일을 하기 위해서 약속의 땅이 있는 거예요. 다른 이방민족은 손도 안 대고. 약속의 땅에서 자기 민족을 내쫓아 보내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나는 남들 보기엔 그럴싸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개뿔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거든요. 뭐 헌금 좀 했다고 기도했다고 주님이 그 꼬라지 보게 되면 같잖아서.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것밖에 안 나오는데 뭐 했다고 복 주세요, 장래일 잘 되게 하옵소서. 진짜 LA 야경 비춰줘야 돼요? 사람은 안 보여요. 점들 빛만 있을 뿐이에요. 정방향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그 어두움에 모든 인간이 묻혀버리고 없는 거예요.

열두 제자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 그 열두 제자에게 뭘 가져다 입히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을 입힙니다. 아브라함언약이 뭐냐 하면 내 몸에 난 자식이란 이유 때문에 이건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다. 육에서 나온 자식이기 때문에 육에서 나온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 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너라는 것, 나라는 것에서 나온 것은 육밖에 나올 게 없어요. 나의 자식도 육이에요. 육에서 육을 낳은 거예요.

따라서 나에게서 나온 어떤 것도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누굴 낳게 했느냐 하면 약속의 자식을 낳게 하는 거예요. 약속의 자식과 육의 자식은 동거할 수 없어요. 한쪽을 내쫓아야 돼요. 서로가 서로를 구박하고 핍박하고 싸우고 난리도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로 하여금 복을 받지 육의 자녀는, 복의 반대말이 뭐지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선택을 아주 쉬운 예가 요즘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쉬운데요. 개표하는데 미국의 아나운서나 전 세계 모든 언론에서 크게 잘못된 주장을 해요. 뭐냐 하면 트럼프가 우세한 지역인데 바이든이 역전했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역전 같은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표에서 아직 개봉이 안 됐을 뿐이지 역전은 없어요.

개표란 이미 투표가 끝난 상태에서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둘 드러나는 것이지 무슨 역전이 됩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표는 이미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을 개표로 확인할 뿐이지 역전이란 말은 뭐냐? 둘이 달리기하다가 앞서가다 뒤에 가다 역전이잖아요. 그건 수평적 안목이에요. 수직적 안목에서 보게 되면 이미 여기는 확정된 거예요. 누가 천국 가고 누가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이미 끝난 거예요. 이미 확정된 거라고요.

복음을 주시는 것은 개표에요. 누가 영벌 받고 누가 영생을 받는지 개표하는 거예요. 그 개표할 때 오시는 게 성령입니다. 성령이 와서 뚜껑을 여니까 너는 천국이네. 너는 지옥이네. 우리가 뭘 했습니까? 하나님 두 분이 투표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선거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했을 뿐이에요. 인생 역전 없습니다. 우리는 될 사람이 될 뿐이에요.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역전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는 몰라도 괜찮아요. 주님이 아시잖아요.

어떤 분이 이번 주일 제 동영상 밑에 거의 댓글이 안 달리는데 댓글이 하나 달려서 저도 댓글 둘인가 셋 달았고 그분도 두세 개 단 게 있어요.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십자가마을 집사님들 이야기를 끄집어냈어요.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복음대로 십자가마을 사람들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보니까 죄만 이야기하고 불교신자인지 구분도 안 되고 감사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그것은 목사님이 설교에서 뭔가 빠진 게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책망하듯이 댓글을 달아놓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댓글을 이렇게 했습니다. 목사는 설득용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 구원받고 아니고는 제 소관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주님의 소관이지 제 소관 아닙니다. 그리고 난 뒤에 감사하다고 끝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그걸 여러분 인생에다 적용시켜 보세요.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관찰한 그 자체가 잘못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아직도 포기 못하는 것은 내가 사는 기준을 포기 못한다는 이야기에요. 아주 고집스러워요. 마귀적 고집이에요. 세상 망해도 나는 살겠다는 거거든요. 세상 망해도 나는 살겠다는 그 기준은 어디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지요? 네 기준 옳아, 라고 남 다 죽고 나만 살겠다는 기준은 이 세상에서 그걸 정당화할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있습니까?

만약에 집사님 아드님이, 나는 세상 다 망해도 살아야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그럴 자격 있어. 아버지는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있어, 이랬다면 그 다음에 집사님이, 너 죽고 나 살아야겠다고 이야기해보세요. 쑥 들어가지요. 세상 다 망해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그런 주장, 그런 본성을 누구나 다 갖고 있는데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이 옳다고 누구한테 추인 받고 허가받은 거예요? 누굽니까? 나만 옳다는 누가 심어준 마음이에요. (악마)

악마를 거론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이건 악마가 아니면 다시 말해서 악마가 집어넣어준 마음이 아니면 내가 이렇게 돛대처럼 나만 챙기는 그런 못돼먹은 사고방식은 그 어디에서도 올 수 없어요. 그래놓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차라리 마귀를 지키세요. 악마를 품에 안고 악마를 보호해주세요.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중심에 독한 괴물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모든 말씀을 다 주신 거예요. 그런데 또 악마는 악마대도 세기 때문에 우리 보고 격려하기를 네가 설교 듣다가 너를 채우려는 것에 대해서 별로 도움이 안 되거든 그 말씀을 다 밀어내라. 또 악마가 시키는 대로 밀어내네.

복 주시는 예수님은 받아들이고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는 끝났다는 그 이야기하거든 밀어내라고. 또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해요. 왜? 악마는 우리 편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단짝이니까. 나는 의성에서 태어났다. 아니지요. 가을에 태어났지요. 다시 말해서 땅 없이 태어났지요. 혹시 생일이 가을입니까, 봄입니까? (봄이요) 그럼 다른 분 이야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고 새로운 언약공동체, 언약적 성공, 열둘을 뽑았다는 말은 아까 뭡니까? 제비뽑았다, 또는 선택했다. 주님이 열두 명을 선택했어요. 열두 명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것은 무엇을 내다보느냐 하면 언약의 승리에요. 언약의 실재성, 이 세상이란 커튼에 있는 문양, 무늬는 이게 주저앉으면 그 안에 진짜 세계가 나타나지요.

이 세상은 하나의 커튼지에요. 펄럭이는 커튼이라니까요.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히브리서 11장 3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게 아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 배후에 보이고 나타난 것은 커튼이에요. 커튼 뒤에 무슨 세계가 있는 게 아니고 커튼 뒤에 누가 계셔요.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예수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에요, 이 세상은. 그 말은 뭐냐?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은 아니란 말이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왜? 수평으로 기어 다니는 이 땅에 흠만 내는 그런 거니까요. 인간은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 봅니다. 로빈슨 크루소에요.그런데 그 해안가 모래사장에 내가 찍지 않은 발자국이 나타나니까 로빈슨 크루소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나 있기 전에 먼저 계신 분, 나타난 내가 처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이 땅에 주인 되신 분, 그분을 내가 만난 것만 해도 여러분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존재를 낯선 발자국 발견한 것으로 가슴 철렁 내려앉든 말든 간에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일방적인 객기와 일방적인 판단을 우리가 스스로 부정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뭔가 개뿔도 모르면 아는 척했다. 전부 다 나 살려고 하는 꼼수를 쓰면서 그게 진실이고 진리인 줄 알았지요.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주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일을 나가십니다. 마태복음 10장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보는 것은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여기에 너희들은 이방 길로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으로 가라, 하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깝다고 말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8~10) 이렇게 쭉 나오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 뜻을 길게 쓰겠어요. “그동안 나를 규정해온 것을 철거당해도 상관없음” 이것을 물으시는 거예요. 선택이 내 스스로 인간답게 사는 조건보다 더 우열하니까 더 우선되니까. 주님의 선택하심이 내가 이 세상에서 밥 빌어먹고 살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먼저 선행되니까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 규정해온 모든 것을 하나둘 철거시킨다 할지라도, 주여 괜찮아요. 괜찮아유, 뭐. 하는 것처럼 괜찮다고 여길 마음의 준비가 돼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달리 이야기할 때 빨간 걸로 써볼게요.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제당하고 무시당해도 견딜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제자들은 천국만 주신다면 주님 악착같이 따라붙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아까 제자들이 왜 철없는 소리인줄 아시겠지요. 예수님의 언약에는 필히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져야 돼요.

그럼 다른 제자들은 뭐냐? 배신 때려서 도망가야 돼요. 그게 조건이에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조건 하에서 십자가에요. 그게 언약의 성공입니다. 제자들의 달라붙는 언약 성공은 없어요. 예수님만 홀로 남아야 언약이 성공 돼요. 왜? 다른 이름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안 시켜주니까.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시켜주니까. 예수 이름만 남아야 돼요.

우리 이름은 철거당해야 돼요. 우리 이름은 이게 무너져야 돼요. 무너지는 것을 내 인생의 실패로 보지 말고 성공이라 보세요. 나의 성공이 나의 이름이나 나의 가치, 나의 의미가 무의미로 바뀌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주님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그래서 성도는, 이건 파란 걸로 쓸게요. “성도는 주님이 가신 길을 답습한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모든 사람으로 밀침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누가 답습한다고요? 바로 제자가 답습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지요. 그래서 누가 오느냐 하면 그 길을 가신 분의 영이 오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주님 가신 길로 가게 하십니다. 주님 가신 길이 뭐냐 하면 아까 말한 남이 나를 공격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나의 나다움으로 갖고 있던 기준과 규정이 주님께서 그걸 일체 허망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그 서글픔이에요. 나다운 게 잠시도 하나님께서 용납이 안 돼요. 나답다는 게 용납을 안 해요.

전에도 그런 예를 든 기억이 나는데요. 옛날 초등학교 때 놀이 가운데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데 같은 방향으로 가는 친구가 있을 때 심심하잖아요. 하나가 앞에 가면 뒤에서 눈 감고 따라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왔나, 묻는 거예요. 미장원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문방구까지 왔다. 이렇게 묻듯이 자기는 눈 감고 있기 때문에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철저하게 종속되는 거죠.

지가 눈 뜨고 가면 될 텐데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목자한테 모든 걸 일임하는 거예요. 목자님 어디까지 왔습니까? 지금 미장원까지 왔다. 목자님 어디까지 왔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가야 될 길을 나는 모르는데 누군 아십니까? 주님은 아시거든요. 주께서 친히 길을 열어줘야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을 아시는 분이 아니고요. 예수님 자신이 길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따로 그 길을 알아 버리면 안 돼요. 우리는 계속해서 어느 길이 천국 길인지 몰라야 돼요. 몰라야 누구만 의지합니까? 예수님만 잡고 의지해서 물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물을 때 알려주는 게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드론처럼 이 세상을 떠서 보는 안목을 계속해서 심어주는 사태와 상황을 우리에게 만들어줘요.

만약에 딸이 하나 있는데 전교1등 했다. 그럼 엄마가 LA 야경을 보는 드로처럼 떴다면, 딸아 그것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 해봤자 나중에 의사 밖에 더 되나. 너는 사람이 뜨질 못해. 그러니까 네가 공부 잘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 라고 엄마 아이한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백점 맞을 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 이제부터 좀 더 난해한 걸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난해한 건 아닌데 오늘 레위기 26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안식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쫓는다는 그것이 언약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기준이거든요. 그러면 언약의 승리, 언약의 승리는 언약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완성 안에는 언약 안에는 조건의 완결, 조건이 충족된, 같은 뜻이에요.

그러면 언약 조건이 충족되려면 자기 백성이 어떻게 돼요? 자기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한다는 내용이 필히 언약 완성 속에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참 고생 많이 했어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알려주는데 시범조교로서 많이 애썼습니다. 왜? 택함 받아놓고 버림받았으니까.

그들을 택했을 때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그들은 선택되어서 선택된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그래서 그들이 해야 될 역할은 뭐냐? 추방당하는 일을 해야 돼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그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 역할을 할 때 결국 이 언약은 이런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런 조건을 포함해서 완성이 된다면 오늘날 십자가가 십자가답게 완성된 모습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돼야 됩니까? 이 조건에 충족되는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늘 뭐가 되느냐? 나는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아니죠. 여러분 아무 것도 아닐 때 내 인생이 가벼울까요, 안 그러면 짜증나고 무거울까요? 가볍지요. 근심걱정은 사치입니다. 왜 내가 나를 관찰합니까? 나를 관찰하니까 악마가 달라붙는 거예요. 날 파리가 달라붙는 거예요.

좀 더 잘하지. 그때 실수 없었으면 좋았잖아. 그때 정신 차려서 더 기도하고 애썼으면 헌금했으면 복 받잖아. 이런 식으로 악마 와락 달려드는 거예요. 악마는 나의 성공을 원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성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준의 성공이 아니고 내가 있는 내 기준의 성공을 악마는 간절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 옮겨봐. 기도해서 복 받은 교인들 많은 교회 가봐. 이런 식으로.

여기에 나는 가난하다. 나는 상대적으로 부자다. 이런 것 자체를 신경 안 쓰면 되는 거예요. 나는 아프다, 건강하다. 이 자체를 신경 안 쓰면 돼요. 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아파도 아무 것도 아니고 건강해도 아무 것도 아니고 부자나 가난해도 아무 것도 아니니까. 여기서 뭐냐 하면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는 바보 같아. 나만 믿고 살아온 이 바보 같은 착한 사람아. 고맙고 감사하지요. 나 하나 믿고 바보 같이 살아온 이 착한 사람아. 남자는 말합니다. 고마워요. 이걸 반대로 하면 나 하나 믿고가 아니라 너 하나 챙기고 살아온 이 독종 같은 여자야. 난 너한테 말한다. 악하고 저주받으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지요. 그리스도의 색시지요. 주님 남자 하나 믿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사야에 보면 이스라엘을 맹렬하게 심판한다고 해놓고는 나는 색시를 원한다고 나와요. 나는 나의 신부를 원한다고 돼있어요. 그건 선택이 기본이고요. 그러면 신부는 남자 하나 믿고 했기 때문에 나의 야망이라든지 야심 같은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고개 숙여서 자기를 쳐다볼 이유가 없다고요. 사람이 언제 가벼우냐 하면 자기 안 쳐다볼 때 제일 가벼워요. 자기만 쳐다보게 되면 아무리 가져도 욕심나게 돼있어요. 좀 더 완벽할 수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좀 더 큰 것 가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된다고요.

그래서 오늘 쫓아내고 하는 조건을 이루는데 있어서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이런 게 좀 복잡하고 난해하다 할 수 있어요.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압축시켜서 단시간 내에 다 보여줍니다. 그 열두 제자 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주 중요한 인물이 있지요. 이름은 들어봤나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사탄이에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을 누가 선택했다? 사탄을 선택해서 뭘 이루려합니까? 언약을 이루는데 사탄의 선택이 필수요건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같은 말이 뭐냐? 인류는 왜 망해야 되는가? 같은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인류의 표본으로 뽑아낸 거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사탄이 들어와 있다는 말은 악마가 들어와 있다는 말은 악마가 어떤 짓을 해도 그 짓은 결국은 언약의 승리를 굳히게 하는 조건의 범위를 못 벗어나요. 그러니까 악마가 무슨 짓이라도 하면 할수록 언약의 다 이루심은 요지부동으로 확실한 사실이 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그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다 이룬 거예요.

자꾸 나를 쳐다보니까 여기서 결핍이 생기고 모자람이 생기는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짜증이 나는 겁니다. 너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그런데 우리의 역할은 주님으로부터 추방당한 거예요. 우리의 역할은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고 주님은 우릴 배신 때리는 것이 주의 역할이고. 그러니까 제가 역할을 말하는데 이 역할이란 것을 이해한 사람은 이미 다 이루었다는 예수 안에 포함된 사람이에요. 이 역할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데 가룟 유다는 역할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역할은 맡겨놓고, 네 입장에서 볼 때 차라리 안 태어난 것이 너에게 낫다. 이렇게 하지만 태어나고 안 태어나는 것도 가룟 유다 본인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그걸 비자발적이라 하는데 본인도 태어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태어나다보니까 태어난 거니까. 그게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나는 끝났다. 나는 망했다로 우리가 웃을 수 있어야 돼요. 나는 잘됐다고 웃어버리면 여기에 마귀가 꼬입니다. 날 파리가 꼬여요. 너 그러다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이렇게 협박 공갈이 들어온다고요. 십자가는 너 망했다고 기정사실화시킵니다. 이게 얼마나 그러니까 나를 망하게 한 그 십자가만 믿는 거예요. 십자가만 붙드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망했음을 늘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아요.

최고의 자랑은 뭐냐? 내가 십자가 믿은 걸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 그 자체를 자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 빠져버리면 아는 안 망하려고 애쓰는 그런 무의미한 짓을 또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깔아버리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의 언약에 관련된 일만 나에게 일어나는 거예요.

네가 어느 학교 나왔으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이걸 LA 밤 야경에 드론 띄워서 보게 되면 내가 그렇게 살아야 되고 그렇게 이만큼 와야 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예수님이 선택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이미 투표한 거예요. 개표 이전에 이미 투표함 안에 들어있는 내용인 겁니다.

이제는 그것을 40대면 40대에 개봉 되어서 알았고 50대면 50대에 개봉되어 어떤 것을 개봉해도 주께서는 이미 그 선택 자체가 완성이란 것을 알려주는 일들만 계속해서 내가 주님 품에 갈 때까지 끄집어내는 거예요. 너는 다 이루었어. 너는 죄 사함의 대상이 되었어, 라는 것을 계속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은 일어나야만 할 일들만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단독적으로 나의 나다움의 규정을 따로 할 필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여기에 남은 자들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말씀드려서 그 남은 자들이 이방나라에 가서 허무한 존재가 되었고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은 자들이 이방나라로 쫓겨 가서 노예가 되고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그들은 시편 107편 같은데 보면 누굴 아느냐 하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추방됨으로써.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시편 107편을 잠시 보게 되면, 107편이 아니고 126편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찾아오셔서 어디에서 어디로 돌려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망하고 주님의 기준에 부합됨을 아는 사람한테는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왔는지 알아요.

다시 말해서 죄 사하는 모든 체제를 다 갖추고 내 백성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오시는 그 찾아오심을 아는 거예요. 마치 사도 바울이 주님 만나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이 되는 것처럼 구원의 완벽한 조건은 주님 쪽에 가져오시는 것이지 내 쪽에서 마련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찾아올 때는 이미 십자가 피로 다 이룬 거예요.

이건 뭐냐? 나, 너를 용납했다는 겁니다. 하는 걸 봐서가 아니라 용납해주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모든 걸 용납해주기 위해서. 무엇을 더 말하리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아쉬운 것을 다 갖추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성도라 불러줬는데 아직도 우리가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습니다. 주여 여러 가지 일으킨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조건으로만 구원됨을 깨닫게 해주시고 따로 우리의 조건을 만들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