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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9:5-6 / 성도의 거주지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9:5-6 / 성도의 거주지

정인순 2021. 4. 8. 14:48

음성 동영상 Youtube

 

성도의 거주지 

 

이근호 목사
2021년 4월 7일               

 

본문 말씀: 아모스 9:5-6

(9:5)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무릇 거기 거한 자로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으로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자요

(9:6)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다 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하늘에 하나님의 거주지가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지상에 엄연히 자기 거주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편안하게 해줄 자기 거주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없다고 여기면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자기 것 확보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생각해 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될 사항은, 인간들이 사는 그 땅에 하나님에게 적대적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의견을 묻을 수 있는 있는 대상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포괄적으로 다루십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주지를 하늘을 두기 위해 필히 거쳐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놀지 않고 지금도 부지런히 움직이십니다. 하늘에 하나님 자신을 위한 거주지를 만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은 필히 이 세상을 엎어버리는 일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거주지를 만드시면서 반드시 땅을 멸망시켜야만 하는가요? 그것은 땅에 대한 징벌이 하늘이 거주지의 터전이 되고 기둥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 기초를 두려고 하십니다. 그 기초에 입각해서 하늘의 하나님의 궁정에 만들어집니다. 그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만드신 겁니다. 이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은, 인간 세계에서 통해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기대한 것을 얻기 위해 본인이 행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범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만족하면 그것으로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줄 압니다. 즉 본인이 원인이 되고 본인이 결과를 낳는 권한이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창세기 27:36에 나오는 에서의 탄식처럼, 여전히 자신이 복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여깁니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하소연하기를 “왜 저를 위한 복은 남기지 않았습니까?”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어느 인간이든 복받을 자격자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유일하게 알려지게 되는 나라가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거주하기 위해 세우신 나라입니다. 어떻게 어디에서 하나님께서 만날까요? 요한복음 20:27-29에 보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마가 천국에 들어서기 위해 주목해서 봐야 할 곳은 예수님의 전신 신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창자국입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분노를 받아 죽게 된 그 사건의 흔적이 있는 겁니다. 그곳을 보고 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로서 도마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들어설 수 없는 곳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즉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설 자는 지상에서 벌어진 유일한 사건 속으로 들어온 자에 국한됩니다. 시편 84:10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본질을 보여준 특별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민수기 35장) 그 도피성은 일체 인간들이 자의에 의해서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들어오게 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은 본인 입장에서 난감하고 난처한 일을 당한 자입니다.

그 난처한 일이 민수기 35:22-23에 나옵니다.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즉 아무런 감정없이 본인의 무심코한 행위로 타인을 죽이는 사건에 휘말린 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 입장은 죽은 자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죽은 유족의 입장은 분노가 일어날 일입니다. 그래서 유족은 살인자에 대해서 보복에 나설겁니다. 이 난처하고 난감한 일을 통해서 도피성에 온 자는, 그동안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가꾸어나간 그 전의 삶의 방식이 아무짝도 소용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즉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억울한 사태에 휘말린 겁니다.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조치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졸지에 남을 죽인 살인자 신세가 되고 만 겁니다. 이로서 이 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도피성에 살게 된 겁니다. 이 도피성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 궁정이 지상에 세워진 만남의 장소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살인자가 다시 도피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 뿐입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내내는 도피성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도피성은 단순히 고의없는 살인자를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비로소 의미가 생겨나는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허락된다면 그 사람은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하는데 그 방식은 하나님에 의해서 ‘고의가 아닌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의 궁정은 지상에 기초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 세상 변화의 중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5:6에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일찍 죽음을 당했다’는 뜻은 역사 밖의 인물께서 이 인간 역사에 자신의 죽음사건을 기획해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방식은 인간들의 잘남으로 유도된 분노에 의한 죽음입니다. 이로서 이 땅은 하나님의 분노를 당연히 받을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도피성에 들어가는 살인자가 더는 자신이 살던 곳에 살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에 참여된 성도의 거주지는 이제부터 십자가 안입니다.(갈 2:2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참새와 제비도 성전에 집을 짓는 것처럼 저희의 거주지도 성전 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2강-암 9장 5-6절(성도의 거주지)2104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9장 5-6절까지 입니다.

아모스 9:5-6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무릇 거기 거한 자로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으로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자요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다 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고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 쪽에서 나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안다고 할지라도 직접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줘야 비로소 우리는 천국에 가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 이 땅에서 그곳에 가려면 어떤 식으로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 계시는 곳으로 우리가 합류할 수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보면서 여러분들은 이걸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은 한시도 노시는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손 놓고 계시는 적이 없었다. 늘 부지런히 뭔가 활동하고 계시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활동, 오늘 본문 5-6절에 나오는 이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와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5절에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하나님께서는 사적으로 카페에 앉아서 구원에 대해서 상의한다든지 상담하신다든지 그런 식으로 만나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전 땅을, 인간이 사는 땅 전체를 일관성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의도하신 바가 여기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6절에 보면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하늘에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거주지를 만드시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그 기둥의 기초를 땅에 두시면서 하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설하시는 이 일관된 계획, 지금도 주님은 대단히 바쁘십니다.

사적으로 주님 만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듯이 합의를 보고 이러지는 않습니다. 우리 손이 심심하고 우리 인생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부지런하시면서 일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뭐가 우리에게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대충이라도 감도 못 잡고 있고 자기 자신의 잘되는 것만 자꾸 고집하니까 하나님이 그냥 노시는가, 이렇게 자꾸 오해하게 될 소지가 많은 겁니다. 5절에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무릇 거기 거한 자로 애통하게 하시며”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그 온 땅으로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시는 그 대상이 인간들이 기대하는 바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땅을 애통하게, 슬프게 만든다. 그리고 땅이 녹는다. 그 땅 위에 강물이 넘친다.

그리고 6절에 “바다 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지런하심, 쉬지 않는 활동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늘의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거주지를 세우는데 있어서 이 땅이 대치하는, 적대적 관계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식으로 일해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궁정을 만드는데 있어서 땅은 도움은커녕 이것은 반드시 손을 봐야 되고 작살을 내야 될 대상이라는 사실, 그것을 드러내는 것과 동반해서 하나님의 자기 궁정이 세워지는 거예요. 이 말은 아주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적으로 만나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적대적 관계, 원수 관계다 그 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인간들이 모르고 있어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런 일을 모르고 평소에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 생활로 ‘하나님 잘 계시겠지. 내가 하나님 믿으니까 앞으로 좋은 일, 내가 구원받는 일이 있겠지.’라고 가볍게 여기시는데 사람의 모든 생각은요, 하나님 집부터 생각하는 법이 없어요. 자기 집부터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거주지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요. 그 관심사가 내 집부터 시작해서 우리 동네 이야기, 이번에 시장 누가 되느냐는 그 이야기,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넓혀가서 같은 지역, 그다음에 국가, 그다음에 회사, 그리고 좀 넓게 되면 전 지구적으로 지구의 생태가 어떻고, 지구온난화가 어떠니 걱정하는 것처럼 하고, 북극 빙하가 녹는다느니 그런 식으로 굉장히 관심사가 상당히 주변을 배려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요.

자기 머리카락 빠지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빙하 녹는 것 생각하는데 거기다 우주까지 관심을 두거든요. 이렇게 자기 집부터 시작해요. 자기 집부터 해서 나이가 좀 들고 그리고 세월이 더해가면서 범위가 넓혀져 간다 그 말이지요. 그것을 가지고 학문이라 합니다. 학문, 지식이라 하는 거예요.

내 몸 아플 때는 의학에 대해서 그리고 건강식품에 관심 좀 두다가 몸 좀 건강하다 싶으면 허블 망원경이 어떠니, 안드로메다가 여기서 얼마나 떨어졌느니, 우주의 끝은 뭐가 있을까,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 하는데, 아무리 관심을 가지고 아무리 진리에 대해서 탐구를 해도 하늘에 하나님의 궁정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라요.

오늘 본문대로 하늘에 하나님의 자기 거주지가 있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아무리 다가가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과학이라는 것, 철학이라는 것, 학문이라는 것은 실컷 천문학으로 우주까지 다 연구하고 화성에 로켓을 몇 개를 올리고, 목성까지 가니 어쩌고 하는데 가 봤자 그게 하나님 집입니까? 주님 계시는 곳이에요?

슬슬 자기한테로 돌아오는 거예요. KAIST나 MIT, 어릴 때부터 나는 공룡에 관심 있었어요, 나는 수학 잘하니까 이과로 가서 과학 하겠다, 해서 미국 유학 갔다 와서 한국에 교수 자리 따 놓고 일하다가 나이 한 50 넘어버리면 철학책 보고 있고 소설책 보고 있어요.

결국 과학을 한다는 그 이유가 뭐냐? 교수 자리 얻어서 또박또박 월급 나오고 돈 벌어서 자기 가족 먹여 살린다. 관심사가 자기 가족,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맨날 아이디어가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을 생각해도 하나님과 나 사이가 적대적 관계, 오늘 본문처럼 아예 하나님께서 땅을 작살 내시는 그런 취지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도 몰라요. 아는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이 하늘에 자기 집 짓는데 왜 물로써 땅을 박살 내야 되는가? 왜 녹아버리게 하는가? 인간을 왜 애통하게 만드는가? 그냥 좋게좋게 가지. 인간을 왜 분노케 하면서 꼭 그래야 하나님 집이 지어지는 겁니까?

유명한 영화 대사처럼 “하나님께서 하늘에 궁정을 세우는데 꼭 땅을 뒤집어 놓아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아니 자기 집 짓는데 땅을 왜 뒤집어 놓아요? 그게 무슨 관련성이 있다고? 그만큼 인간들이 하나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인과율, 인간들이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율, 그 인과의 관계를 따르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하고 친합니까? 친하지도 않은데 인간들이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성을 주님이 왜 따라야 됩니까? 엎어버리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뭐냐?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땅을 엎어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집을 짓는 것과 땅이 완전히 작살나서 엎어지는 것, 이게 도대체 무슨 관계있느냐 그 말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과학이고 철학이고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네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 들은 그러한 경우가 성경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보게 되면 도마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라고 물어요.

도마가 뭘 봤느냐? 도마가 뭘 봤기에 “이제 네가 보고서 믿느냐?” 할 때 도마가 주목한 것, 예수님을 보면서 집중해서 주님이 보여주는 것, 그리고 도마가 보게 되는 것, 그게 뭐냐는 거예요. 그걸 봤을 때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만났다, 하나님이 아는 사람 되었다, 하나님이 너를 아는 사람 되었다고 규정할 수 있는 무엇을 본 겁니까?

그것이 바로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했습니다. 못 자국난 손과 내 옆구리의 창 자국을 네가 손가락을 넣어보라 했습니다. 내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네가 손을 넣어보라.

그럴 때 도마가 하는 말이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지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류가 되려면 봐야 될 것을 봐야 돼요. 봐야 될 것을! 인간 때문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죽었던 그 지점을 봐야 돼요. 그 지점에서 만나야 돼요. 예배당 지어놓고 거기서 만나지 말고. 자기 가정 챙기고 그런 데서 만나지 말고 우리 가정 잘되게 하옵소서 그런 식으로 만나는 게 아니에요.

교회 70 평생 다녀도 하나님 못 만나는 이유가 뭐냐? 만날 장소에서 만나야지요. 하나님께서 접촉하는 그 장소에서 만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그 사태, 그 사건 안에 발을 들여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안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른 짓 있잖아요. 몹쓸 짓, 인간이 하나님께 한 몹쓸 짓에 발을 들여놓은 자만이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소용없어요. 50년, 60년 신앙생활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기도해서, 기적 받아서 몸 낫고, 건강하고, 가정 화목하고, 아무 소용없어요. 선교한다고 멀리 가도 소용없어요. 봉사한다고 수도꼭지 고치고,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뭐냐?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것에 인간들은 관심이 없어요. 왜? 자기 거주지에 관심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거주지에 인간이 어떻게 합류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살고 나는 나 대로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처럼 땅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때는 하나님께서 횡포 부린다, 이런 식으로 악한 감정을 갖게 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나는 장소는 이 땅에서 우리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인과,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하나님 쪽에서, 만날 수 없는 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다가 만남의 장소를 친히 마련했잖아요.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민족은 상상도 못 하는, 정말 상상도 못 하는, 터무니없는 어떤 하나님의 만나는 장소가 생겨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걸 만들어줬어요.

그게 민수기 35장에 나오는데 다른 민족에는 있을 수 없는 특이한 장소가 나옵니다. 한글로 해서 도피성, 영어로 하면 shelter죠. 피난처,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나와요. 그런데 그 도피성은 그냥 관광차 구경하라고 ‘여기 누가 사노? 한번 가볼까? 사진 찍으러.’ 이런 장소가 아니고 도피성의 첫째 중요한 것은……, 첫째 하니 걱정이 돼요. 첫째 하면 두 번째 할 때 첫째는 또 잊어버리기 때문에.

첫째 중요한 것은, 절대로, 아무도 그 도피성에 못 간다는 겁니다. 도피성에 갈 수가 없어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그 이삭한테서 에서와 야곱이 복을 받아낼 때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가져갔잖아요. 그 때 에서가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요구를 해요. “그래도 내게 남겨줄 복이 왜 하나도 없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고요.

창세기 27장 36절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그 의미가 뭐냐 하면, 그 의미는 인간적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에요.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처음부터 복이라는 것은 에서나 야곱 둘 다 복을 받을만한 인간들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저주만 있는 인간들이에요. 둘 다.

그런데 야곱은 그 복을 거짓말로 따냈거든요. 그래서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오는 방법을 인간에게 제시할 때 인간들이 모든 지혜를 끄집어내도 저건 거짓말이다, 하는 방식을 제시한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사람들이, 에서가 “아버지가 내게 줄 복이 없습니까?” 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그다지 나쁜 존재가 아니잖아요, 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복을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나는 거짓말 하고 사기 치는 아예 나쁜 놈이라는 데서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에서가 보기에 야곱이 복을 가져가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해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세계에서 거짓말로 규정 받는 거예요. 그 거짓말 자리에 발을 들여놓은 자만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인간들은 본인을 괜찮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오면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느니라, 하고 막 절규를 해요. 내가 알고 있는 그 방식 외에 왜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지, 그러면 나는 완전히 무가치한,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절규합니다. 절규하든 말든 처음부터 네 주제 파악이 안 되었으니까 당연한 거거든요.

그 도피성에는 첫째,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곳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베풀어진 특별한 사건을 입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이 민수기 35장 22절, 23절에 있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건에 휘말려야 되느냐 하면, 아무 원한도 없는데 우연히 그 사람이 에스컬레이터 타고 가다가 “기차 시간 때문에 좀 지나가겠습니다.” 하고 어떤 사람을 약간 밀었어요. 죽으라고 밀친 것이 아니고 그저 살짝 스치듯이 했는데 그 사람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두 바퀴 반 돌면서 밑으로 떨어져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캔을 툭 던졌는데 그게 기저질환이 있는 97세 할머니의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다. 그거 안 맞았어도 5분 안에 돌아가실 분, 기저질환이 있는 분인데 우연히 맞아 죽었다든지, 또는 돌을 던졌는데 우연히 맞아서 죽었다든지, 아무 원한도 없는데 그 사람이 죽게 되는 그런 사건일 때 그 사람은 난감하고 난처한 사태에 휘말린 겁니다.

난감하고 난처하다는 뜻은 뭐냐 하면, 그동안 자기 자신을 잘나게 지켜왔던 그 원칙과 삶의 방식이 아무짝도 소용없게 된 상황입니다. 그동안 내가 이만큼 나라는 인간을 괜찮은 인간으로 유지해 왔던 그 나의 철저한 원칙이, 하나님이 주신 사건에 휘말려 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졸지에 살인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내가 지켜온 내 자존감과 내 명예와 내 위신과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그 모든 근거가 일거에 다 날아 간 사람이고 그 사람만 도피성에 올 수가 있어요. 도피성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하나님이 사건을 줘야 들어올 수 있어요.

그 사건은 뭐냐 하면, 그동안 지켜왔던 모든 나의 가치가 일거에 다 허물어지는 거예요. 다 허물어져요. 내가 나를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들어온 사람은 들어왔다 치고 그 기저질환을 갖고 있던 97세 할머니, 침방울만 튀겨도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 할머니에게 아주 지극한 효자가 있다 칩시다.

그 효자가 자기 할머니가 커피 캔에 맞아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그 죽인 살인자에 대해서 가만두겠어요? 거기에 대해서 민수기 35장 21절에 보면 “피를 보수하는 자”가 등장해요. 분노를 품은, 그러니까 돌아가신 자의 일가친척이나 가족은 고의든 아니든 그런 것은 듣기도 싫고 어쨌든 내 가족을 죽인 살인자이기 때문에 내 손으로 친히 복수하겠다는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도피성에 온 사람의 특징은 뭐냐? 자기가 살아왔던 그 거주지에서 분노를 유발시킨 분노유발자가 돼요. 분노유발자로서 도피성에 들어갑니다. 그 도피성이 어떤 성이냐 하면,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주하는 그 궁정이 지상에 만남의 장소로서 내려온 것이 바로 그 도피성이에요. 그 도피성은 이스라엘 땅에 있지만 이스라엘 아무 땅에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총 여섯 군데 있어요. 민수기 35장에 보면 6절에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 이 성읍이라.” 레위 지파에 48개의 성읍을 주면서 그중에서 도피성이 함께 있는 장소는 여섯 군데밖에 없어요. 그 여섯 군데에 도피할 때 바깥에는 “내 가족을 죽인, 내 사랑하는 어머니를 죽인 이 살인자 나와! 내 손으로 쳐 죽일 테니까.” 이런 식으로 화를, 분노를 갖고 있어요.

피해자 가족 입장에서는 살인자는 안 죽었어요. 그러니까 화가 더 나는 거지요. 그러니까 도피성에 간 사람은 도피성 바깥에 있는 가족들의 분노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도피성에 갈까요? 아닙니다. 이 도피성은 고의가 아닌 채로 살인했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고, 즉 자기를 위한 도피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장소로써 도피성이 있는 겁니다.

네가 나를 만날 때는 그런 억울함을 지니고 만나라, 그 말이지요. 억울함을 지니고. 그것도 네가 고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한 그 사태에 휘말려서 난감하고 난처한 입장을 가지고. 난감하고 난처한 입장이라는 것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어떻게 내 인생에 대해서 관리하거나 처리할 수 없어서 손을 놔버리지요. 손을 놔버린 형편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뒀느냐 하면, 창세기 3장의 선악과와 관련되어 있어요. 염소가 얼마나 아둔한지 염소는 줄로 매놓으면 자기가 까불다가 줄에 감겨서 나중에 꼼짝도 못하고 제풀에 발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염소는 진행 방향이 자기 할 것만 생각해서 기억이 없어서 그래요. 뒤로 역순으로 풀고 나오면 되거든요.

감겼으면 감긴 역순으로 도로 풀어서 나오면 전처럼 줄 안에서 까불거릴 수 있는데 꽥꽥 고함만 지르고 있다는 말이지요. 매~ 매~, 하면서. 매~는 무슨, 자기가 알아서 기어 나오면 되는데. 염소 못지않은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따먹고 죽었잖아요. 죽었으면 그대로 뒤로 가면 되잖아요. 뒤로 가는 방법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못해요. 계속 살려고 하는 거예요. 염소의 아둔함보다 곱하기 제곱을 한 것이 인간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죽으면 되는데 ‘죽어 마땅합니다.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고 인간 사는 것이 저주입니다.’ 이러면 되는데 어쨌든 간에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 부르면서 이왕 사는 것 안 아프고 행복하고 불편함 없이 살려고 하니 염소의 아둔함 못지않게 계속해서 자기 발등을 저주를 유발시키는 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가, 내가 뭐가 모자라는가, 이 정도 하면 지혜롭지, 이 정도 하면 착하지, 이 정도 하면 점잖지.’ 여러분, 성도는요, 점잖은 역할 하라고 성도 되는 게 아니에요. 성도는 억울함을 품고 세상으로부터 분노유발자 되라고 성도 된 겁니다.

제사 지낼 때 쓰는 동양화 그려진 병풍 있지요. 그 동양화 자세히 한번 보세요. 삿갓 쓴 사람 있는데 얼굴도 안 보여요. 몸체만 있고 낚시하는 도인들이 그 동양화에 나와요. 어릴 때 제사는 재미가 없어서 병풍만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제가 국민학교 때, 병풍 보면서 동양화에 나오는 낚시하는 도인들 그 사람들 보면서 어릴 때 제일 궁금했던 것이 저 사람이 저 바위에서 한가롭게 낚시하는데 저기에 어떤 길로 들어갔는지 그 길이 대단히 궁금했어요.

이발소에도 그림이 있거든요. 한적한 초가집이 있는데 저 초가집에 가려면 대체 버스를 몇 번을 타면 되는지? 찻길이 안 보여요. 배도 안 보여요. 어떻게 해서 저 절벽에 올라갔는지, 드론을 띄웠는지, 그것이 제일 궁금했는데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 믿고 유유자적하라고 성도 된 것이 아니에요.

지금껏 자기가 인생 살 때 착실하고 철저하게 살아왔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그걸 고집한다면 어떤 경우라도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자기 잘났다, 나 잘났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도 그걸로 가는 거예요. 남한테 미안한 것도 없어요. 잘났는데 뭘 미안해요. 자기가 잘났는데.

도피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만남의 장소, 다시 말해서 하늘의 궁정이 땅에 내려올 때 첫째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사건으로 휘감아서 그냥 잡아당겨 줘야 되는 겁니다.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처럼 쉭, 쉭, 채찍을 날려서 몸통을 감아서 잡아당기잖아요. 꼼짝 못하도록. 십자가 사건 안으로.

사람들의 분노가 유발되는 그 십자가 사건 그 안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시편 84편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이렇게 해 놓고요. 그다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의 궁정을 “악인의 장막”과 대비시킵니다.

십자가에 참여 된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그 순간부터 도마가 있는 그 장소, 그 장소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자기 거주지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 제자 도마가 아파트 어디에 삽니까? 삼익 아파트에 살아요? 삼익 아파트, 참 옛날이야기입니다. 요새 더 좋은 집 많지만. 도대체 도마가 어느 아파트 몇 평짜리에 삽니까?

도마의 거주지는 이 땅에서 나그네예요. 그의 거주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입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요. 이 장소는 첫째는, 사람은 자기 의사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의사로 들어가 버리면 그 장소는 계속 자기 잘남이 유지되는 장소에요. 난처한 장소가 아니고 의기양양한 장소가 된다고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허용한 이유가, 천국의 자리는 야곱은 에서로부터 분노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모든 성도의 표준인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 주의 궁정이거든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 맞아요.

하나님의 거주지에는 한 날이 세상에 있는, 그 궁정 바깥에 있는 모든 악인의 장막의 천 날보다 낫다고 되어 있어요. 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그다음에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 문지기로 있다는 말은, 이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때 너무 악한 일을 해서 상급을 못 받아서 합격은 했지만 “너는 저기 가서 보초나 서.”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 자기 가치를 자기가 챙길 의사가 기쁨으로 전혀 없어요. 자발적으로 전혀 없어요.

왜? 들어올 수 없는 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지금쯤 만약 이곳 하나님의 궁정에 안 들어왔으면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자기 잘난 맛에 살걸요? ‘나 이렇게 철저해. 나 건드리지 마. 나 괜찮은 존재야.’ 그 자랑하면서 으스대며 살아갔을 거예요.

시편, 같은 84편 3절에 보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참새와 제비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닌데 문제는 참새가 그 많은 집들 가운데서, 아파트 주택 가운데서 이 참새가 어디에 집을 지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에다 집을 지으니까 그게 이 신앙인이 보기에 너무 부러운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참새도, 아무것도 아닌 제비도 저렇게 성전에다 자기 집을 짓는데 나도 주의 집에 거주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시편 84편이에요. 자 그렇다면 이 도피성에 누가 있느냐 하면, 레위지파가 있고 그 레위지파중에 제사장이 있어요.

그러면 도피성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호함이 아니고 거기 누군가가 계십니다. 어떤 죽어야 할, 살아 있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죽는다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의미가 완성되는 어떤 분과 이 억울하게 살인자가 된 인생, 망가진 사람이 만나야 돼요.

그걸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일찍 죽임을 당한 분이라고 해요. 요한계시록 5장 5, 6절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찍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역사 속의 죽음이 아니고 초월 된 분이 역사 속에 자기 죽음으로 옴으로서 그 죽음은 역사에 편입되지 않는 죽음, 모든 역사 이전부터 이미 기획된 계획된 죽음, 일찍 죽은 죽음이에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죽기로 계획된 그 계획이 실행에 옮겨져서 역사 속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역사에 묶이지 않아요. 역사 바깥에 다니는, 마치 자유전자같이 마음대로 활동하는 그러한 요소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일찍 죽음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죽지 않고서는 네 어린양의 궁정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땅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 분노를 유발시켜서 인간들 손에 의해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제사장으로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궁정이 땅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역사를 이용하신 겁니다.

그 이야기가 시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74편 6, 7절에 보면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이방 민족이 이렇게 실제로 주의 성전을 불태웠고, 자기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은 주의 성전을 정신적으로 더럽혔고. 아주 무시했으니까 멸시했으니까. 그래서 심한 모욕을 스스로 받아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오신 그 결과가 뭐냐? 요한복음 20장, “도마야” “누구십니까?” “얼굴 보지 마. 얼굴 보지 말고 내 손자국 못 자국을 보고, 얼굴 보고 판단하지 말고, 이 사건의 현장, 못 자국 보고 창 자국 만져라.” 도마가 만지고 난 뒤에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에 통하는 원인과 결과, 인간들이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 과학적 사고, 이 모든 것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사태 사건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잘남과 자기 가치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난감한 사태, 이것은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에요. 예상 못한 난감한 사태로 인해서 자기 모든 가치와 명예와 한꺼번에 다 허물어진 것, 그것이 복이 될 줄이야. 전에는 상상도 못했지요. 전 같으면 그저 아찔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물로써 세상을 다뤄요. 물이라는 것은 세상을 덮어버리는 겁니다. 이걸 쉽게 말해서, 인간의 문명과 문화 인생살이가 아무리 요란스럽더라 해도 바다에 녹는 하나의 소금, NaCl, 염화나트륨 같은 거예요. 인간 평생이란 이 세상에 지구 표면에 오줌만 지리다가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만 이 지구를 더럽혔지요.

인간들이 더럽힌 세상,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초를 그 더러운 세상에 두시고 그 기둥을 박고 하늘에 하나님의 자기의 궁정에 거주하셨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지금도 하나님은 아주 부지런하시고 쉬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하늘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바로 기획된 십자가 중심, 일찍 하나님이 죽으신다는 그 계획에 의해서 난감하고 난처한 일 그것에 휘말리는 사람, 휘말릴 때 여러분이 그게 섭섭하겠습니까, 아니면 굉장히 황홀하겠습니까?

더 이상 나 잘남, 이것은 내 것, 이것은 나의 가치다, 그딴 것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소금끼 같은, 염화나트륨 같은, 바닷물에 녹으면 아무 표도 안 나는 그런 데에 이제는 신경도 안 써. 신경 쓰지도 않아요. 주님의 궁정에 문지기로 있는 것도 좋사오니 주와 함께 있는 기쁨을 여러분이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데 걱정했고, 쓸데없는 걸 지켜내기 위해서 고민했고, 내 잘난 맛에 살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 잡아놓은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휘말려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그 자체를 주님의 못 자국이요 창 자국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