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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8:11-14 / 맹세와 성령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8:11-14 / 맹세와 성령

정인순 2021. 3. 25. 10: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맹세와 성령

 

이근호
2021년 3월 24일

 

본문 말씀: 아모스 8:11-14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8: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8: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8: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은 단순히 신의 이름이 다르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현실성과 말씀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애굽에서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일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애굽의 술객들도 흉내어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맙니다.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8:19) 즉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을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는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민족같으면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사고 사고 팔고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돈 벌어 가정꾸미고 자식놓고 오순도순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을 리없습니다.

누가복음 17:27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약속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름대로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며도 그것 자체가 천국밖의 생활입니다. 곧 지옥 그 자체이지요.

반면에 이스라엘은 홀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시 않습니다. 레위기 23:10에 보면, “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소산물을 자기 소유로 돌릴 것이 아니라 그 소산물의 원천과 결부된 삶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단순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한 바에 이스라엘을 참여시키시는 방법입니다. 브엘세바와 단은 이스라엘은 북쪽과 남쪽의 경계를 말합니다. 이 공간 안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삼상 3:19-20) 그 영토에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제공해주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민족과의 차별성을 유지해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주어지지 않고 그 말씀 대신, 다른 것들이 동원하게 필히 갈증과 결핍이 생기게 되는 것이 본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원천을 찾아가게 하십니다.

말씀없이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을 범죄케 한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홀로 사는 재미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브엘세바라는 말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이 나타나게 하나님께서 조치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맹세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말씀이라는 것도 홀로 계속 그 말씀을 듣고 지킨다고 해서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분명히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홀로 모든 말씀을 자기에게 끌어당겨 성취해내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에 그동안 인간들의 말씀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 방식인 것이 드러난 겁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은 인간들의 자기 의미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집념과 집중력을 나타낼 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없이는 일을 못하십니다. 성령님의 주선 하에 악마가 마주하게 되는데, 그동안 악마는 인간들을 다음과 같이 길들여놓았습니다. 즉 ‘악마 존재 생각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식으로 무장시켜 놓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는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결사적으로 말씀을 백성들에게 유포시켜놓았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성전 제사를 대신해서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므로서 오실 메시야를 맞이 할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0에서 당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즉 아무리 하나님을 만날려고 준비해 두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투입하여 말씀을 지켰지만 하나님에게는 천국 탈락자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해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취한 것을 성령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주십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하신 언약은 ‘아들 신분’이 아니면 참여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4-15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되기 위한 그 어떤 자격증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모든 일에게 공평한 겁니다.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아드님이 이루신 모든 일에 참여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4:6에 보면, 마귀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동안 악마가 인간 세계에 대해서 이미 말씀 공부까지 시켜가면서 자기 통치 하에 두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포기 못하는 존재입니다. 말씀이 누락되게 하려고 애쓸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맹세란 홀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취된 맹세 안에서 성도는 압니다. 자신의 천국행은 자기 능력으로 불가능했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성도가 어떤 점으로 만족해야 하느냐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0강-암 8장 11-14절(맹세와 성령)2103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8장 11-14절까지입니다.

아모스 8:1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11절에 “보라 날이 이를찌라.” 시간입니다. 그리고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할 때 땅은 공간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조건은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추진하기 위해서 준비된 배경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만 나타나야 되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그러한 인간,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말씀을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에 위배 되는 식으로 그들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위배 된다는 것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위배 된다고 할 수 있느냐 하면, 양식이 있으면 배부르고 물이 있으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단지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밥 먹고 살면 그게 사람 사는 것이다. 아주 단출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왜 만들었는지 전혀 감이 없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들이 살았다, 하지만 완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계가 없이 죽은 상태에서 인간이 바라보는 시간과 공간은, 그냥 물이 있으면 갈증 해소되고 양식이 있으면 사는 것처럼 살고 게다가 젊어서 마음에 맞는 여자나 마음 맞는 남자를 찾아서 결혼해서 자식 낳고 단란한 가정 이루면 그게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방 민족에게나 통하는 것이고요.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공간의 경계를 북쪽으로서는 단이고 남쪽은 브엘세바까지를 이스라엘로 보고 있습니다. 14절에 단 나오지요. 그 다음에 역시 14절에 브엘세바가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국토를 단과 브엘세바 사이에 두는 이 경향은 사무엘상 3장 19절에도 나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이 본문 말씀에서 단에서 브엘세바,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생존이나 자기 밥벌이 자기의 사적인 행복에 치중하며 살아가는 민족이 되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사무엘상 3장 19절 오늘 말씀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그러니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선지자가 있어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 말씀이 담긴 그 내용이 실현되기 위해서 그 나라가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현실화되는 거기에 참여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겁니다.

 

말씀 전하는 사람에 의해서 말씀이 주어지는데 그 말씀은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지고 어린 사무엘이 바로 그 일이 되었다고 하는 거지요. 다른 민족 이방 민족 같으면 ‘말씀이 밥 먹여주나.’ 하고 비꼬겠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말씀이 밥 먹여줘요.

레위기 23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약속의 땅에서 농사지을 때 나오는 그 소산물 그 곡식의 첫 이삭을 너희들이 처분하고, 너희들이 취급하면 안 되고 그 땅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들이 있어요. 거룩한 자들, 제사장에게 갖다 바쳐라, 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갖다 바치지요. 이 말은 뭐냐? 원천을 찾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곡물을 생산하고 이 땅을 풍족한 땅으로 만든 이유는 이 땅이 사람의 땅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땅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하면 천국이지요. 그래서 천국 만드는 작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황송스럽게도 그들이 참여되어 있는 겁니다.

 

천국 만들기는 주님의 뜻이잖아요. 주님의 뜻에, 미천한 인간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그 일에 합세하게 되었다는 이 사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입니까? 바로 레위기에서 그걸 언급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은 모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에요. 이스라엘 만들기 전에 모세가 애굽에 찾아갔을 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습니다.

 

출애굽기 8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열 가지 재앙이 계속 일어나요. 개구리가 올라오는 것부터 여러 가지 땅의 티끌을 치니 이가 범람해서 힘들었지요. 출애굽기 8장 18절에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인간의 재주 가운데 제일 뛰어난 재주를 가진 술객들이 이러한 여호와의 능력을 흉내 내 보려고 그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못했다는 겁니다. 할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되었으면, 정말 성도라면 항상 마음속에 ‘이것은 나나 인간들이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내가 참여했다.’ 잠을 자나 깨나 밤이나 낮이나 한시라도 이걸 놓치면 안 돼요. 놓치면 안 된다고요. 숨 쉬는 것도 이것은 내 능력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 8절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사도바울이 주의 일을 하니까 그걸 반대하는 인간들이 있었지요. 사람이 사도바울이 하는 일을 왜 시답지 않게 여기고 반대하고 조롱하느냐 하면,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너 하는 일 나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을 겉으로 봐서 그래요. 사람이 너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는 일 같으면요, 교회 와도 지옥 갑니다. 교회 와도 지옥 가요.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 그 일이 바로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자부심을 가져야 되고, 자신감을 가져야 되고, 당당해야 돼요. 성령받은 사람은 당당해야 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13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세상 사람들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 세상의 모든 일은, 경제이론은 있는 것, 밑천이 있어야 더 주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있는 것이 있어야 더 주어진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너나 나나 가질 수 있는 그 있는 것, 그것 기초로 해서 경제가 이루어지고 거기에 모든 혼과 정신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천국 가는 것, 구원받는 것, 교회 일도, 신앙도 전부 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디모데후서 3장 8절에 보면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얀네와 얌브레가 바로 애굽의 술객이에요.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를 고백했던 그들처럼 그 당시 사도바울이 하는 일을, 성도가 하는 일을 꼭 이렇게 반대하는 자들이 꼭 등장합니다.

 

이 말은, 내가 성도라고 우겨도 성도지만 성도 아닌 자들이 눈치를 채요. 노골적으로 너 성도 맞지,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자존심 상해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왜 사람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 함으로서 나는 불신자다, 라는 것을 완전히 티를 내버려요. 천국과 지옥의 분류를 불신자들이 마귀가 해줘요. 우는 사자같이 해서 분류를 시켜 준다고요. “너는 우리 과가 아니다. 너는 우리 과가 아니야.”

 

직장에서 회식하는데 전부 다 “위하여!” 하면서 마시고, 소주잔 뒤집어서 탈탈 털고, 폭탄주 섞는다고 주르르 떨어뜨리고, 그런 식으로 하는데 “신입! 너도 한 잔 해야지.” “저는 칠성사이다 먹을 겁니다.” 하면 “쟤 우리 과 아니다.”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부심입니까?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나오고, 맹세한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누가복음에는 이 대목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7장 26, 27절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 뒤에 28절에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이것 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방 민족들이 다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이것이 전부고, 사람 사는 이유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 잘 키우고 행복하다, 그걸로 모든 것이 종결되었어요. ‘더’ 가 없어요. 더 다른 생각이 없다고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돌아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사는 것 같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다루시는 방식이 아니겠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11절에 분명히 기근을 땅에 보냈는데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지를 않았어요. 그 이유가, 그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그들은 바꿔치기를 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겨야 될 것인데 이방 민족의 하나님을 섬긴 거예요.

 

이방 민족의 하나님의 특징은 뭐냐 하면, 뭐든지 끌어모으고 소유함으로서 그것에서 사람 사는 재미와 보람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이방 민족이에요. 오늘 본문에 브엘세바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맹세의 우물이에요. 맹세의 우물.

 

맹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한 사람 가지고 본인이 본인보고 맹세하지는 않아요. 맹세는 반드시 상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 그러니까 브엘세바가 맹세의 우물 된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그런 것인데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그 아브라함 때 이야기거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했다는 것은 아브라함 혼자의, 아브라함 본인의 나름의 인생관을 하나님께서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성도에게서 불가능한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릴까요? 성도의 자부심은 뭐냐 하면, 본인의 계획이나 본인의 스케줄대로 본인의 인생을 가는 그것이 내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다른 의미에 초대받은 거예요. 초청받은 겁니다. 선택받았으니까 이것은 부름 받은 거예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히브리서 6장에도 나오지만 아브라함은 맹세하는 사람이에요. 무슨 맹세냐? 하나님의 맹세가 덮여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맹세가 완전히 거기 꽉 차 있는 사람, 그래서 아브라함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 지상에 남기신 하나님의 계획과 스케줄과 맹세가 아브라함이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 움직임으로 인하여 아비멜렉과 맹세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브엘세바라는 겁니다.

 

따라서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그 사이가 전부 다 하나님이 맹세한 이스라엘의 시간과 공간만 남아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맹세를 드러내는 시간과 공간.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모스가 예언한 바에 의하면, 그들이 분명히 양식이 있고 먹을 물이 있다 할지라도, 젊은이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이상하게 그게 행복하지 않고 이게 사람 사는 것 같지가 않은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원천적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는 그 의미는 그 말씀 빼놓고 다른 것으로 아무리 대체하려고 해도 인간의 목마름과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람은 원천적으로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먹을 것 있다고 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으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애초에 말씀 없이는 비참하게 되도록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 때 그런 내용, 본질을 집어넣고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참, 요즘 거꾸로 되어서 말씀 없는 것들이 사람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가관이에요 가관.

 

온 동서남북 온 사방 매스미디어,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이나 전부 다 한결같이 마치 목욕탕에서, 요새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만 탕에 들어앉아서 흘러간 옛날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었어요. 목욕탕에서는 조그마한 소리만 나도 왕왕 울리거든요. 크게 울린다고요.

 

요새 전부 목욕탕 같아요. 말씀 무시하고 살자, 왕, 왕, 왕~, 스물네 시간 매일 들려오는 소리가 말씀 무시하고 살자. 뭐 어쩐다고 50대에 인생 끝내버리고. 말씀이 갈급해서 목숨 끊었습니까? 말씀이 없어서? 아니에요 해답이 없어요, 해답이!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해답이 없어요. 인터넷이고 방송이고 어디서도 그걸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드디어 서울시장선거운동 들어갔다. 그런 이야기나 했지, 말씀 없이는 인간은 죽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합니까? 어디서 해요? 성경 말씀에는 이 세상에는 말씀이 누락 되었다. 말씀이 누락 되었으면 이것은 누락 된 그 값을 톡톡히 치러야 돼요. 그들은 목말라 헤매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뭐가 목마른지도 몰라요. 선지자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말씀을 끊어버린다고요. 수도 터지면 물 안 나오잖아요. 선지자 터지면 생수가 안 나옵니다.

 

말씀 전하는 자의 그 중요성을 사람들이 모르고 아주 개무시하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준해서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제대로 말씀 전하고 제대로 하나님의 맹세, 맹세는 언약이거든요, 언약 된 맹세,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는 사람 같으면 그들은 물이 없음과 양식이 없음과 세상적인 인간의 즐길거리보다도 뭘 더 사모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더 사모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날 겁니다.

 

그들이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말씀이 없어 기근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참으로 진짜 말씀과 생명의 말씀 준다면 12절에 있는 대로 그들은 비틀거리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바다 이 바다 북에서 동까지 어디에도 주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면 그들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맹세 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에 참여 되었다는 그 기쁨과 환희와 보람과 즐거움을 세상 어떤 것에도 빼앗기기 않을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거든요.

 

그러면 이러한 아모스의 오늘 본문의 현상이 어디서 성취가 되겠는가? 우선 아모스의 모든 율법이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방금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으로서는 지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이 사람들은 뭘 추구했느냐 하면, 사두개인같은 경우는 성전 추구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아모스의 말씀이라든지 또는 이사야의 말씀 선지자의 말씀에 입각해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속 주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것은 유대나라가 로마에게 망하고 난 뒤에 겨우 명맥을 잇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이스라엘 의 존재감을 얻기 위해서는, 이미 성전이 완전히 박살난 상황이니까, 성전을 대신해서 말씀을 가르침으로서 말씀으로 자기가 이스라엘이다 하는 것, 그래서 메시아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 오늘날 유대교입니다.

 

유대교, 유대교인은 회당에 모이는데 그 회당은요 성전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 말씀대로 말씀이 없어 기갈이니까 그들은 말씀을 연구해서 주는 사람, 랍비라 하는데 스승 랍비가 있어 가지고 랍비가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유대인의 동질성, 정체성,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약속된 택한 민족이라는 그 자부심을 말씀을 통해서 계속 지금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생각한다면 ‘아, 말씀을 보고 성경을 백 독 천 독하고 매일같이 매일 성경 펼쳐놓고 QT하고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양식 먹는 것보다 낫구나.’ 라고 여러분이 생각하겠지요. 그것은 오늘 제일 처음 설교할 때의 그 대목을 여러분과 연관시켜 보세요.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공부, 성경 통독, 그런 식으로 성경 읽기 한다고 해서 구원받고 영혼이 만족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모스의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누락 되었다. 맞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가 누락된 거예요.

 

맹세라 하는 것은 단독적으로 성경 읽는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같이 더불어 함께 있어야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떤 자만이 이 말씀 안에서 만족을 얻고 갈함이 없는 사람이 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유용이에요.

 

여기서부터 약간 어려워지는데요. 어떤 귀신 나오는 영화인데요. 애가 귀신들려서 모가지가 홱 돌아갔어요. 180도 돌아갔습니다. 만약 신앙 있는 사람의 애 같으면 모가지가 돌아가도 돌아간 채로 그냥 주께 찬미하면 되는데 이게 귀신들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퇴마사지요, 귀신 쫓아내는 천주교 신부가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 애 방을 성경 말씀 다 찢어서 도배를 했어요. 성경 말씀으로 도배를 해놨다고요. 말씀의 힘으로 귀신 나가라고요.

 

그런데 모가지 더 돌아갔어요. 이제는 침대까지 들썩거리게 만들었어요. 근본 원인이, 인간이 왜 불가능하냐? 말씀 보고 지키고 해도 이게 구원이 안 되고, 영광이 안 되고, 영혼의 갈함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아담이 죄를 지었다는 말은 모든 어떤 행동을 해도 나 중심으로 모인다는, 응집된다는 이게 근원적인 사달 날 오류의 원천입니다. 잘못이에요.

 

성경 말씀을 아무리 봐도 전부 다 나에게로 쏠린다는 거예요.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성경 보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애 병 낫게 하겠다고 할 때 그 병 낫는 목적이 뭐냐? 우리 애가 옛날처럼 멀쩡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것은 맹세가 아니에요. 둘이 아니에요. 마지막, 최종 목적, 혜택은 본인이 몽땅 다 가지는 겁니다. ‘성경 봐야 되겠다.’ 주님께서 “왜 보려 하는데?” “은혜받으려고요.” “누가?” “제가요” “네가? 네가 은혜받아서 뭐하는데? 은혜받아서 뭐할 건데?” “성경 봐서 천국 가려고요.” “그 천국 너 혼자 가라. 너만 덜렁 가거라.”

 

천국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초청한 사람이에요. 따라서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만 지킬 수 있고 다른 인간은 지킬 수 없어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악마가 성경 말씀을 다룬다는 그 점이 나와요. 4장 1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꼭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뭐냐? “성령에게 이끌리어” 예수님마저도 성령 없이는 일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은 성령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뭐냐? 성령이에요.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 성령을 주시고자 하는 이유는, 이 모든 말씀이 아버지를 닮은 아들에게만 맹세가 성취가 돼요.

 

“너는 참 네 아버지 닮았다.” 이 말이 같은 문장, 같은 멘트지만 가만 들어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어요. “꼭 지 애비 닮았어. 쯧쯧…….” 이렇게 나오면 나쁜 것이고 “세상에, 어떻게 네 아버지와 그렇게도 닮았나! 네 아버지도 바람의 아들이었어. 그런데 너도 야구천재잖아.” 이때는 아버지하고 동급으로 쳐주는 거예요.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하지 않는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맹세는 사람을 빼는 거예요. 사람은 그 언약 맹세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아닌 주제에 백날 성경 천 독이니 만 독이니,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 만 독 했다는 사람이 있어요. 무슨 천지인가, 신천지인가, 그런 사람이 있어요. 교주 그가 만 독을 했다던가? 뭐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을 천 번을 외워서 방언이 터졌다는 거예요.

 

이거 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이 가능한 일이에요. 식음을 전폐하고 주기도문 천 번 외워 보세요. 혀가 널널널 해져서 입만 떼면 랄랄라 나온다고요. 세계에서 유명한 가수가 있었어요. 그룹 퀸의 가수도 방언했습니다. “라리라리라라라~”하면 다 따라 해요. 그런 것은 몰라도 되고요. 공연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말씀의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성령이 와야 되는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이 말씀의 일에 참여가 돼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의 일이에요.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종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냥 말씀 주시고 알아먹어라, 이렇게 해도 되는데 말씀을 주시면서 아들의 성령이 왜 따로 와야 되느냐? 말씀도 주고 율법도 주고 왜 성령도 따로 와야 되느냐 하면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일에 참여 되어야 천국의 일에 참여가 되고 하나님 일에 참여가 되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되지 않고 율법이나 성경 말씀이 와버리면 이 성경 말씀은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의미를 다 삭제해버려요. 왜? 말씀은 우리의 처음 자리에 데려가기 때문에. 우리의 처음 자리가 뭐냐 하면, 죽어 마땅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져서 네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아도 너는 죽었어, 라는 것을 알려주는 자리에요.

 

성경해석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숨겨진 자기의 죄를 오히려 더 부각하는, 드러내는 그러한 시간 밖에 안 돼요. 이 성경 보는 것이 성령 없이 그냥 성경 보게 되면 다 나 좋아라, 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이 성경을 가르쳐서 기껏 행한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간다’는 예수님의 결정적인 판정을 내리게 만들었잖아요.

 

고생 많이 했는데 지옥 가거라. 고생은 많이 했는데 천국에는 도달하지 못한 그 수준 밖에 안 돼요. 인간이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반드시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하게 되어있어요. 어떤 분이 물었어요. “집사님은 친손자가 좋아요, 외손자가 좋아요?” 이렇게 물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집사님 말씀이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을 댔어요.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은 뭐냐?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누가 더 낫다? 친손자가 엄지 척이다.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런데 다 들어보니까 이게 성경 말씀에 나온 거예요. 집사님은 워낙 성경 많이 봐서 그 대목이 나온 것으로 생각이 나는데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성경 말씀은, 이 땅에 친손자고 외손자고 간에 천국의 기쁨은 어느 손자가 예쁘냐와 비교 대상도 안 된다, 가 되거든요.

 

그처럼 인간의 세상을 보는 모든 해석은 꼭 자기의 욕망을 경유해서 해석하게 되어있어요. 자기 좋은 쪽으로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우리의 죽음 자리를 경유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 해석은 내가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해석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해석이에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이것은 마귀 들렸으니까 마귀 들린 티를 낼 수밖에 없지요.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하고 붙을 때 의도적으로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악마와 대결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서 악마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악마가 인간들을 어떤 존재로 만들었느냐 하면, 악마를 몰라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고, 인간답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천국 가는 소망. 천국 갈 수 있는 가짜 인간으로 전부 다 만들어버렸어요. 심지어 악마는요, 인간에게 교회 다니고, 말씀 공부하고, 말씀 늘 보고, QT 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충성하게 되면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악마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그러한 자질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악마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에서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냥 말씀을 다 끌어당기는 거예요. 새벽기도 다니고, 모든 성경공부 다 다니고, 모든 예배 다 참석하고, 아무도 나오지 않는 수요예배 한 가정이 꼬박꼬박 나오고, 이런 식으로 무조건 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도록 악마가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성령만 빼고 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은 뭐냐?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은 이제부터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어요. 아까 본 것 다시 보셔도 되겠지요.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미 아들이 된 상태기 때문에 그 아들은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 것이 있을 이유가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이, 맹세가 이미 성취된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희한한 시험지를 받았다 칩시다. 보통 시험지를 받으면 거기에 이름 써야 되고 문제만 딱 나와 있는데, 시험 치려고 딱 보니까 내 이름이 이미 있고, 문제에 해답 체크 다 되어있고, 또 보니 점수까지 백 점이 되어 있고, 뒤에 보니 “참 잘했어요” 도장 찍혀 있어요.

 

이런 시험지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뒤늦게 송달되었어요. “합격! 참 잘했어요.” 뭐 했는데? 뭘 해야 잘했지 잘한 것도 없는데. 그게 바로 맹세입니다. 맹세의 완성이에요. 이게 언약의 완성입니다. 사람이 미흡하게 되면 자꾸 갈구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미 다 들어와 버렸다 그 말이지요. 성령이!

 

그래서 아까 누가복음 11장에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거예요. 그게 주의 일에 참여시키는 겁니다. 13절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어떤 식으로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 아들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는 양자니까 친아들, 맏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말씀을 보면서 ‘아, 주께서 내가 죄인이라서 못한 것 이것을 하셨네. 또 이런 것도 하셨네. 아, 이것도 하셨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진짜 참된 모델, 인간다운 모델은 예수님이 모델이 되시고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아서 천국에서 같이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맹세라는 의미는 뭐냐 하면, 결국 어떤 인간의 잘잘못 재주나 능력 그런 것이 필요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누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완성된 것,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것을 만끽할 수 있는 일에 본격적으로 참여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안에, 주께서 다 이루신 그 말씀이 우리에게서 터져 나가면서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나는 불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나의 불가능과, 죄인 됨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함께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말씀,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없었던 그 말씀을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다 이루시고 성령을 주셔서 본격적으로 우리 안에서 말씀의 완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도록, 천국이 나타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할 것은 없지만 주께서 이루었음을 자랑삼아 이 땅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