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모스 9:1-4 / 파괴 본문
파괴
이근호
2021년 3월 31일
본문 말씀: 아모스 9:1-4
(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9: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9: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파괴란 모든 유기체가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상황입니다. 생각같아서는 있음이 그냥 없어지면 그만이라고 여기겠지만 이미 ‘있음’에는 ‘나’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육신이 없어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나’가 없어지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즉 육신의 아픔에는 한계가 없지만 공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파괴를 피하고 싶어합니다. 이게 이방민족들의 성향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마저 이 이방성향을 닮아버렸습니다. 이방민족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국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국가를 지켜주기 위해 신이 필요했던 겁니다. 자신이 파괴되지 않기 위한 현실적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이방민족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보다 성전이어야 했습니다. 국가란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면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 펼쳐짐을 보호하고 실질화시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이 우선인지를 모르고 이방민족을 모방했습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국가만 든든하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본래의 뜻을 작동하려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건축물인 성전이 마치 누가 손대는 것처럼 움직임을 보이게 됩니다. 성전의 센터라 할 수 있는 법궤있는 곳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는 성전 모두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전이라는 건물만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붕괴해서 무너집니다. 이스라엘 전체 백성이 이 세상 어디에 가든지 살육당합니다. 하늘에 갈지라도, 죽은 자들이 간다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찾아내어서 사살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움직이는 성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성전은 마치 다이나마이트와 같습니다.
터져버리고 난 뒤, 그 현장에는 폭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뻥 뚫린 벽만 나타나고 그 벽너머에 비로소 천국이 보입니다. 이는 성전 자체에 스스로 파괴되는 성질이 들어있었던 겁니다. 성전 안에서 매일같이 진행되던 제물 살육에 의한 제사가 성전 밖으로 전 이스라엘에게 확대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전에 의해서 인간을 지켜주리라 믿게 되는 국가 체제 자체가 파괴되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국가보다 성전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즉 국가가 너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너를 지켜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켜주는 대상이 ‘나’가 아니라 ‘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창세기 3:7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라는 말은 이미 인간은 이 때에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기보다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만 챙기는 존재가 된 겁니다.
즉 “나는 나를 지키고 싶다”가 근원적인 본성이 된 겁니다. “남의 자식보다 더 자식부터 먼저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겁니다. 신에게 빌든지 자연에 빌든지 어떻게든 나는 나를 최종적으로 지키고 싶은 대상이고 싶어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비정상적인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재앙의 시작입니다. 재앙의 발단이 됩니다. 괜찮은 내 인생을 만들려는 고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파괴 대상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파괴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절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자체가 스스로 파괴가 되듯이, 구원이란 파괴의 현장에서만 나타납니다. 인간에게 있어 파괴가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이 산산조각 나서 다시 그 조각들이 하나로 조립할 수 없어, ‘나’이 사라질까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나를 다시 조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20-21에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저주받아 흙이 되어가야 하는 이 부부를 위하여 가죽옷을 입히시는 이유는, 그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여자의 이름과 아담의 이름을 하나님의 약속 속에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나뭇잎 옷을 만든 것은 순전히 자신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죽옷은 죽을 병든 인간을 지켜주기 위함이 아니라 여자에게 있는 ‘생명’을 지켜주기 위함입니다. 즉 이 세상에 나타날 생명은 ‘가죽옷’과 상관있다는 겁니다.
이는 더 이상 인간이 자기 잘남을 증명하지 못하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요한복음 2:19-20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지어놓은 성전은 자기네들을 지키기 위함입니다만 성전 자체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어야했습니다. 구약의 사사 삼손이 마지막 순간에 발휘한 힘은 자기를 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가 죽어버리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적의 신은 다곤의 신전에서 말입니다. 그때 적들은 승리가 구가했습니다.
성도는 이런 세상의 승리를 탐내거나 부러워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섬기는데 정상들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은 하나님의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자기 지킴’을 파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성도의 몸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따라서 성도는 믿음으로 이겨낼 생각을 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파괴를 기꺼이 반기고 주님께서 찬미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킬 생각을 품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31강-암 9장 1-4절(파괴)2103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9장 1-4절까지 입니다.
아모스 9:1-4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찌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 ‘단’이라 하는 것은 제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제단이 아무 사람들의 손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단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1절에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이 말은 제단에 궤가 있는데 제일 중심부에 있는 그 궤가 무너지는 겁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그러니까 이것은 성전과 보이지 않는 인격의 결합이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인격체가 성전을 덮치고 성전을 깨니까, 그 성전이 깨지는 여파에 의해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전 지역과 그 모든 백성을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가게 하고 몰살시키는, 살벌하게 다 죽여버리는 그러한 현실이 앞으로 전개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제단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에 있다는 것, 그 제단이 단순히 건축구조물이 아니에요. 벽돌로 만든 건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어떤 인격체, 인물과 연결되어 있고 결합 되어 있는 상태가 되지요. 파괴대상이 되지 않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상당히 신기하다, 이렇게 보이지만 당사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신기한 것이 아니고 심각한 문제지요.
왜?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셔서 성전 만들라, 해서 만들었고 섬기라, 해서 섬겼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으면 모든 것이 만사가 형통이어야 될 텐데 그리고 잘 되리라는 그러한 기대를 줬는데 왜 이 성전이 무너지느냐 그 말이지요. 그리고 성전이 무너지면 성전만 무너져야 되는데 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다 같이 하나님 앞에 파괴당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상당히 이상한 일이지요.
예를 들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지붕이 무너졌습니다. 지붕이 무너져서 머리 깨질 사람은 깨지고 깔릴 사람은 깔리고 나머지는 엄마야, 문 열고 나갔더니만 한 열댓 명은 죽고 일곱 명이 머리를 다치고 앰뷸런스가 오고,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거든요. 지붕 무너져서 죽은 자는 순간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차라리 덜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예배에 참석했던 그 사람이 미국에 이민 갔는데 마트에 가다가 덩치 큰 흑인 남성한테 얻어맞아 죽었다든지 이런 식으로 저주가 저주의 꼬리를 물면서 어디에 가도 단기간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저주를 받는다고 해봅시다. 원양어선을 타도 배 뒤집혀 죽고요. 심지어 바다에 가도 하나님께서 바다뱀을 명해서 배는 뒤집어 버리고 물게 한다는 그 말이지요. 그리고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찾아내서 너를 파괴 해버리고 저주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언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야, 이거 하나님께서 성전을 무너지는 이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그걸 계기로 해서 전체 이스라엘을 다 무너뜨릴 때 여기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성전이 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성전이 뭔지를?
사람들은 성전이 뭔가를 평소에는 생각을 잘 안 해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이 누구신가를 별로 생각 안 하듯이. 성전이 뭔가를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뭘 우선으로 생각하느냐 하면, 나를 보호해줄 어떤 큰 든든한 품 같은 국가가 우리에게는 먼저 가장 즉각적으로 와닿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성전이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성전 우선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지키려고 한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그 국가가 우선이 되었기 때문에 성전에 의해서 그 이스라엘 나라가 처참하게 파괴가 되어버려요. 파괴되면서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성전 자체가 무너져 버리지요.
성전 자체가 무너졌다. 여기서 성전 자체가 뭐냐, 할 때 쉽게 생각하면 이게 돼요. 다이너마이트를 생각해 봅시다. 다이너마이트는 손에 쥘 수가 있잖아요. 이렇게 형체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 심지가 있을 것이고 불을 붙일 것이고 15초 뒤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피하세요, 라고 작업현장에서, 터널 공사나 토목공사현장에서 그렇게 하잖아요.
폭탄을 설치해서 멀찌감치 피한 상태에서 터트린다는 그 말이지요. 신호에 맞춰서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난 뒤에 그 현장에 가면 다이너마이트가 없어요. 당연히 없지요. 논개처럼 자기 몸 하나 불살라서 터뜨려버렸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 자체를 터뜨려버렸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가 있을 리가 없지요.
성전은 이와 같은 겁니다. 성전은 하늘나라와 그리고 하나님 계시는 곳과 인간이 있는 세계와 그 경계선에 성전이 위치 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성전을 보면서 성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뜻, 그 나라의 의, 그걸 생각을 해야 될 텐데 성전을 박아 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지킬 것이다, 보호할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 못 줘서 아주 환장 하는 분이기 때문에 굳이 우리가 하나님 생각 안 해도 하나님은 사랑이 너무 넘치기에 사랑 주신다, 하고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이 집에 가면서 예배당 생각합니까? 봉사하는 사람들 빼놓고는 예배당 생각 안 하지요. 사람들은 예배당 생각 안 한다고요. 자기 집구석이 있는데 예배당 생각을 왜 합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잘 있는가, 그냥 살피지요. 잘 있겠지요, 잘 있겠죠. 그러다가 만약 예배당 지붕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예배당 지붕이 무너졌지 내 집 지붕은 멀쩡하거든요.
20층 아파트의 5층에 사는 사람이 지붕 무너지려면 20층부터 시작해서 다 무너져야 돼요. 순서가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1층이 아니고 5층에 산다면 무려 15개 층까지가 지붕이 되니까 그래서 지붕 무너질 리가 없으니까 예배당 무너지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든지 수리하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배당은 예배당이고 나를 지켜주는 지붕은 우리 아파트는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택한 백성은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 신전 따로 내 인생 따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를 먼저 생각해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줘야 하고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성전이 인격화되면, 성전이 인물과 결합이 되고 성전이 인격화되면 성전의 성전 됨이라 하는 것은 성전 스스로가 파괴될 때 가장 성전다운 거예요. 성전 스스로가 파괴될 때. 다이너마이트처럼.
이 말은 파괴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네가 정녕 구원받고 싶으냐? 그러면 네가 갖고 있는 너 자체를 이 성전처럼 파괴해 버려라.” 파괴하면서 구원이 있는 겁니다. 파괴에서 오는 어떤 공포, 파괴에서 오는 그것들, 산산조각 나서 더 이상……, 떨어져 나간 조각들, 내가 다 찢어져 나간 그 조각들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이 완전히 황폐하게 파괴된 것, 그걸 주님께서 다시 주워 모아서 구원해 주시는 거예요.
스스로 내가 나를 조립할 수가 없게 만드는 그 순간이 와야 됩니다. 또 다시 나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그런 식으로서는, 그것은 구원이 없어요. 왜냐하면 성전을 닮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성전이 본질을 보여주는 그 본질과 동일한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하나님 말 안 들어서 그동안 하나님께 매 맞았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하나님께 매 맞았다, 하나님께 휘둘렸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매 맞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세상을 너무 부러워해서 그래요. 세상을 너무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세상처럼 되고 싶은 거예요.
요한일서 2장 15절에 보게 되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어요. 아버지의 사랑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도 없는 것을 그토록 좋아하고 있다는 말은, 소위 말로는 성도라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을 못닮아서 환장을 한 거예요. 세상 사람처럼 못살아서 환장을 하는 겁니다.
세상의 특징은 안 무너지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자기의 가치나 자기의 의미가 안 무너지게 하려고. 저는 이걸 변비라 하는데요. 변비, 내 몸에서 나의 것이 빠져 나와야 되는데 안 빠지고 걸려 있으니까 이게 지독한 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흔히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거든요. 이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알려줬듯이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약속된 백성을 끄집어내 줄 때 출애굽, 끄집어낼 때 그걸 구원이라 한다는 말이지요. 구출, 구원, exodus,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느냐? 지금 이스라엘이 이렇게 멸망을 당하는데 멸망 당하기 전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전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성전과 대비되는 국가 위주로 생각한 거예요. 국가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 이방 나라들이 자기를 보호해줄 국가를 더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그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그래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본받았으냐? 이방 민족을 본받았다면 그 이방 민족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압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느끼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나는 나를 지키고 싶어. 나는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는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을 먼저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는 내 것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를 지키고 싶다고요.
그러면 왜 그렇게 나를 지키고 싶은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무서움, 공포. 고통은 한계가 있지만 공포는 한계가 없어요. 무서움이 주는 그 무서움, 그걸 인간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항상 초조한 가운데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 무서움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면, 나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오늘 본문 다시 보면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죽음의 세계)로 들어갈찌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찌라도……”
이 산이 아주 유명한 산이지요. 엘리야가 850대 1로 싸워서 이겼던 그 갈멜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그 산, 거기에 숨는다 해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너는 살육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아모스를 통해서 이 말씀 하는 것은, 이 파괴가 너에게 무서움으로 느껴지는 그 자체가, 네가 문제라는 거예요. 성전 자체가 파괴되었잖아요. 그러면 너도 당연히 파괴되어야지요. 파괴 안 되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내 것이 산산조각 깨지고 찢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멀쩡하게 구원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성전을 박아놓은 하나님의 취지와, 완전히 다이너마이트를 박아넣는 그 취지와는 너무 안 맞는 거예요. 어떤 벽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거기에 구멍이 생겨야 그 구멍을 통해서 이 세상이라는 벽 뒤에 있는 하늘나라가 보이는 거예요. 훤~하게.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잖아요. 일종의 파괴 아닙니까? 복음 전했는데 주어지는 결과는 감옥 갇힘, 사형당함. 이거 뭐예요? 로마 시대 때 사람들 순교 당했다.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를 풀어서 그리스도인들을 막 뜯어먹게 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생각해요. ‘사자가 와서 살점을 뜯을 때 얼마나 아팠겠나.’
아픈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주님께서 아픈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공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서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자한테 뜯기지 않아도, 심지어 모기한테 뜯기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크루즈 여행 다니고 재미나게 꽃구경 다녀도 그 순간에도 떨어지지 않는 그 무서움.
지금 시내 도로 제한속도 다 시속 60킬로로 바뀌었는데 괜히 70킬로 속도로 달리다가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그 무서움, 뭔가……. “걸리면 왜 안 되는데요?” “걸리면 돈 나가거든요.” “돈 나가면 왜 안 되는데요?” “돈 나가면 내 돈 나가잖아요.” 네 돈 나가는데 그게 왜 무서우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그 돈 벌려면 내가 더 고생해야 된다.” “고생을 왜 안 해야 되는데?” “고생 많이 하게 되면 결국 내가 파괴되잖아.” 그래 파괴되면 될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파괴되면!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으로 이기려고 생각한다고요. 믿음으로 이기려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파괴될 생각 하세요.
제발 변비……, 나 자체가요, 참 저녁에 이런 소리를 해서, 아직 저녁도 안 먹었는데, 이 똥 같은 내가 좀 내 몸에서 빠지게 해 달라. 산산조각 나서! 빠질 때는 설사가 나야 빠지지요. 내가 나한테 골칫거리인 것을 왜 그리 모릅니까?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해요.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세상을 어떻게든 닮아가려고. 그냥 아무 일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그렇게도 부러운 거예요.
남자들의 객기라 할 수 있는데요. 20대에 해병대 동기생들이 같은 날 제대할 것 아니겠습니까? 제대하고 난 뒤에 바닷가 바위 위에서 웃통 다 벗고 우리는 강철부대 출신이다, 해서 기념사진 찍는 거요. 알몸, 알통 내보이면서, 폼 내면서 우리의 우정은 절대 변하지 말자. 우정 안 변해서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나중에 세상 살면서 힘들 때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면 인생이 풀린다는 거예요. 이게 파괴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생각해야 돼요.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되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되게 보고 싶은 사람, 낮이고 밤이고 보고 싶은 사람, 일종의 스토커라 할 수 있지요. 짝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 그리운 사람, 그리고 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게 굉장히 자기 인생이 참 괴롭다, 참 힘들다, 하지만 도리어 주님께 감사해야 돼요. 왜? 그 그리움과 보고 싶음, 그리고 되고 싶은 사람, 되고자 하는 그 순간, 그 순간순간이 나를 파괴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주님께 찬미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나를 파괴 시켜요. 나를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나를 벌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태양은 싫어, 태양은 싫어, 태양을 피하는 방법, 아니 아니요, 없어요. 그냥 태양에 쪼이세요. 나를 바짝 말려 죽이도록 할 때 도리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골칫거리에요 내가. 나에게 내가 필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해야 됩니다. 나에게 나는 아무 필요 없어요. 내가 쪼그라들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야 더는 내가 나를 증명할 생각을 안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스라엘은 애굽에 있을 때 죽은 자였어요. 거기서 나올 때 이미 죽은 자였어요. 이미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의 튜브로, 하나의 관으로 사용해서 내가 이미 죽은 자, 내가 이미 파괴된 자인데 그 파괴된 자 안에서 하나님이 그걸 재료로 사용해서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으로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증명하는 거예요. 이게 성전화 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에 성전을 심어놓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에 심어놓은 거예요.
건물성전은 하나의 건물이기 때문에 꼼짝 마라, 하는 성전이지만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움직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 하나하나는 움직이는 성전이에요. 그 성전 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겠는가? 천사가, 빛을 내면서 훤하게 인물 좋은 미륵보살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는 매일같이 파괴의 되풀이에요. 파괴행위의 되풀이, 죽음의 되풀이, 흠 없는 제물이 매일같이 죽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겁니다.
보호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호받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튜브니까 그 안에 하나님의 뜻, 성전이 갖고 있는 본래의 뜻, 죄를 파괴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천국에서 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 죄를 인정하지 않는 그것이 의라는 것, 죄를 일체 받지 않는 그것, 그러니까 다이너마이트의 요소가 항상 네 몸 안에 살아 있으면 그 몸 안에 있는 다이너마이트 요소가 터지면서 그 백성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움직이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내려오면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 성전을 헐라는 거예요. 제가 그 성전에 가봤거든요. 제가 사흘 만에 헐어보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 돼요. 엄청나게 큰 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그 바위, 통곡의 벽에 모자 쓴 유대인들이 몸을 흔들면서 기도하는데 거기 난 틈새에 기도문을 집어넣거든요. 그래도 바위는 끄떡도 없어요. 풍화되어서 2밀리 3밀리 닳아져도 그걸 어떻게 사흘 만에 헙니까? 헐 수가 없지요.
20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자,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할 때 왜 그들이 46년이나 지었느냐 하면 든든하게 짓기 위해서지요.
성전을 든든하게 짓는다는 말은 그 의미가 뭐냐 하면, 그 든든한 성전처럼 나도 든든해졌으면 참 좋겠네, 라는 뜻이에요. 나도 이 몸이 파괴되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고, 조각조각 나지 아니하고 이 몸 이대로 좀 든든해서 든든한 채로 하늘나라 갔으면 좋겠네, 하는 그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21, 22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 육신이 성전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육신이 성전이냐? 아니요. 죽었다가 살아난 그 기능을 머금은 육신이 성전이에요. 파괴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되찾게 되는 그 성전, 죄된 몸으로 죽었다가 의의 영광으로 되찾은 그 성전, 그 성전이 되지 아니하면 누구도 하늘나라 못갑니다. 무슨 수로? 우리가 신학을 해야 됩니까? 목사가 되어야 됩니까? 무슨 수로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립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너를 포기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 민족들은 그 포기가 안 돼요. 안되기 때문에 자꾸 자기 몸을 움츠리는 겁니다. 고통은 버틸 수 있어요. 억지로 이 깨물고 버티면 되는데 고통도 없는데 찾아오는 이 무서움, 두려움, 공포, 내가 무너지면 어떻게 해, 내가 망가지면 어떡해, 내 것, 내 자식 아프면 어떡해, 내 하는 일이 다 실패로 끝나면 어떡해……,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주는, 이 세상이 공통적으로 다 갖고 있는 그런 무서움이에요.
그 무서움에서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달라야 된다는 거예요.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눈이 밝았다는 말은 인간이 정상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길다가 다른 사람에게 난폭하게 얻어 맞았어요. 그래서 정신이 돌아 버렸어요. 너무 처참하게 얻어터져서 정신이 나가버렸어요.
정신이 나갔는데 깨어나서 하는 말이 “아, 이제 보인다.”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봅니까? “이제 보여?” 하면 “다 나았습니까?” 합니까? 정신병자가 하는 말이 “이제는 보인다, 보여. 내가 보인다.” 이러면 그걸 정상으로 봅니까? 아, 네가 본다고 하는 그것이 정신병 들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지요.
아담과 하와가 그런 겁니다. 정신이고 뭐고 다 죽었어요. 다 죽어서 눈이 밝히 보인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게 바로 세상이거든요. 그런데 그 정신병 걸려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눈이 밝아서 자기만 쳐다보는 그것을 왜 그렇게 부러워합니까? 왜 그렇게 부러워하지요?
왜 그리 정치인들 재벌들을 그렇게 부러워해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정신병자인데! 자기 눈이 밝아 가지고 내 재산이 얼마인지, 내 것이 얼마나 있는지, 맨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여기 인간들이 눈이 밝아서 하는 말이, 눈이 밝았을 때 초점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나님께 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최종 초점의 마감은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 자신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재앙은 아무것도 아닌 자기 인생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 고집이 재앙의 시작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인생은 코미디거든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영화 보다가 여러분이 좋아하는 주인공이 칼에 찔려서 마지막에 장렬하게 죽으면 여러분도 영화 끝나고 진짜 죽을래요? 좋아는 했지만 그것은 그냥 영화거든요, 영화. 영화라 그 말이지요.
내 인생이라는 게 일종의 단막극이에요, 단막극. 내 인생은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나한테 없습니다. 이걸 우리는 몰랐지요. 몰랐는데 성전이 자폭하는 바람에 그걸 안 거예요. 성전이 스스로 무너짐으로써 성전은, 하나의 눈에 보이는 이 성전, 사람이 만든 성전은 다 조악한 것, 다시 말해서 조잡한 것이고 이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illusion, 환상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은.
그래서 그들이 한 게 뭐냐? 눈이 밝아서 한 것, 눈이 밝아서 탈이 난 거예요, 눈이 밝아서 옷을 만들어요. 치마를 만들어서 자기의 하체를 가렸거든요. 가렸는데 창세기 3장 21절에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 가죽옷은 지어 입히는 이유가 뭘 위해서 가죽옷을 입혔느냐 하면, 20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나님이 아담의 부인 하와에게 준 게 있어요. 생명이거든요. 죽어가는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 생명을 생명 되게, 보이지 않는 생명을 가시적인 모양새로 드러내는 것이 뭐냐? 가죽 옷이라 그 말입니다. 너는 죽을 몸에 생명 걸쳤다. 생명 걸쳤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죽옷을 입힌 거예요.
주님께서는 하와를 오래 살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아담을 오래 살게 살게 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아담도 파괴 시키고 하와도 파괴 시키는 그 방식을 통해서 생명 되는 가죽옷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뭘 지키려고 해요? 여러분은 뭘 지키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건강, 가정의 행복, 뭘 지키고 싶은 거예요? 변비스러운 내 인생 나를 지키고 싶어요.
그런 것은 이방 민족, 정신병자들이나 하라고 하세요. 성도가 교회 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은, 헌금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것은, 전도하는 것은 그 와중에 나를 파괴하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나를 지키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사자성어로 ‘영구 없다’고 하는 거예요. ‘영구 없다’에요, ‘영구 없다’ 내가 없는 거예요. 없는 것을 자꾸 지키려고 하니 여기서 세상이 주는 알 수 없는 공포와 무서움을 우리는 감당을 못하면서 감당을 하려고 애를 쓰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암에 걸리지요. 스트레스로 암에 거리는 거예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뭐냐 하면, 이 이 국가가 그리고 연결되어 있는 모든 관계들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를 지키고 싶어서 혼자 저 무인도에 가서 산다든지, 지리산 깊은 산속에 산다든지, 아예 남의 나라 그것도 큰 나라, 큰 나라 가는 이유는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크게 품어줄 국가를 찾아서 미국이나 캐나다 큰 나라 가는 거지요.
그러나 그렇게 도피하듯이 가봤자 참 그놈의 얽히고설킨 그 관계들이 있어요. 그 관계들이 나의 소박한, 이 무서움에서 내가 멀리 해방하고 싶다는 이 소박한 꿈을 내 관계들이 나를 파괴합니다. 열심히 운동해서 그래서 배구 너무 잘해서 국가대표, 그것도 자매간에 다 대표선수가 되었어요. 쌍둥이 자매가 다 국가대표가 되어서 지금 올림픽경기에 나가야 하는데 그놈의 과거에 있었던 학폭, 과거 중학교 때 좀 까불고 놀던 것, 담배 피우고 애들한테 돈 뺏고 패고 한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게 내 인생 앞길을 막잖아요.
얽히고설킨 그것, 철없을 때, 아이고 철없을 때 한 일을 가지고 뭘 그렇게 하느냐고 하면 나이 77세 되면 철납니까? 나이 80 되어보면 77세 때가 철없어요. 95세 되면 철납니까? 인간은 죽어도 철 안 나요. 왜? 태양을 피하는 방법, 공포를 피하는 방법은, 모든 생각이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성전 입장에서는 철딱서니 없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약속도 언약도 모르고 그저 세상 못 닮아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세상 못 닮아서 지장이 있으니까 나 하나님께 매 맞았다? 매 맞기는 뭘 맞아요. 그래, 맞아야지요. 안 맞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매 맞는 나를 부러워해야지요. 무너지는 나를 부러워해야지요.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우리는 성도라면 그 다음부터는 감사와 찬미와 고마움이 주님께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무너지면 이제는 무너질수록 자기 집착이 더 심화 되지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구나.’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나뭇잎 옷을 벗기려 하는데 나뭇잎 치마는 뭐냐? 나를 지키기 위함이에요, 나를.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까짓거 필요가 없거든요. 주께서 필요한 것은 약속이다, 그 말이지요.
이름이 여자가 아니에요. ‘하와’예요. 생명이에요. 그 생명의 어미예요. 생명계열의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가죽옷과 연계시켜서 입혀 놓았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가죽 옷은 휙 벗어 던지고 계속 내가 만든 내 치마 어디 갔나, 이러고 있다고요.
성전 자체가 무너지는 이경우는 사사기 16장 23절 그리고 29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삼손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머리가 다 밀리고 눈도 빼버렸거든요. 눈을 파냈다 그 말이지요. 삼손은 눈이 빠져버렸으니 예쁜 여자는 이제 다 찾았어요. 이제는 뭐가 보여야 말이지요. 눈이 빠져서 아예 없는데. 눈 빠지고 머리카락 잘리고 했을 때 거기서 그들은 승리를 구가한 겁니다. 블레셋 민족이 승리를 구가한 그 현장이 바로 삼손이 죽는 현장이에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세상 권세자들은 승리를 외쳤습니다. 바로 소위 교인이라 하면서도, 성도라 하면서도 세상이 누리는 그 승리를 못 누려서 환장들을 하고 그 승리를 달라고 교회 와서 기도하는 이런 형편에 있는 거예요, 지금. 무너지면 되는데 안 무너지려고 하는 거예요.
아모스의 예언이 그겁니다. 성전이 무너지는데 너는 무슨 통뼈라고 안 무너지느냐, 그 말이지요. 그럴 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놀리면서 재주를 보여 봐라, 했을 때 그 보여준 재주가 뭐냐? 신전 기둥에 묶였던 삼손이 오지게 제대로 한 번 재주를 보여준 거거든요. 우락부락한 강철부대 사나이처럼, 혹은 UDT 출신이랄지.
물론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머리카락에 힘이 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던 거예요. 삼손이 기둥을 잡아당겼어요. 이건 뭐냐? 삼손이 살았다는 이름으로 승리하고 저거 내 힘으로 죽인다, 그 승리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삼손은 다곤신전에서 보여준 거예요.
이게 뭐냐? 바로 이게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 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죽어가고 지옥 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십자가의 영을 주셔 가지고 십자가가 나보다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죄와 사망과 모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거예요. 어느 누구도, 성령이 있는 성도를 질책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하늘에서도 없고, 땅에서도 없고, 지옥에서도 없고, 마귀에도 없어요.
일방적으로 용서받고 하나님의 의가 된 그 사랑, 그 사랑을 훼방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 사실을 우리 자신이 세상을 부러워하면서 방해하니까 성령관리 차원에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좋아하는 나의 모든 포부와 계획과 기대를 무너지게 하는데, 우리는 그걸 우리 자아의 파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모스 말씀대로 나의 것, 내가 지키던 것이 무너질 때 도리어 주님 앞에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왜? 주께서 주님 것만 끄집어내는 방식이 그 방식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도리어 성전이 성전 된 것처럼 날마다 우리를, 나의 것을 무너뜨려서 죽어도 상관없는, 아니 죽어서,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의를 드러내는 그 하나님의 작업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현장인 것을 나타내는 그 자체를 주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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