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욥기 18:12-21 / 육의 한계 본문
육의 한계
이근호
2020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욥기 18:12-21
(18:12)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8:13)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며
(18:14)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8: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8:16)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
(18:17) 그의 기념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며
(18:18) 그는 광명 중에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8:19)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
(18:20) 그의 날을 인하여 뒤에 오는 자가 앞선 자의 두려워 하던 것 같이 놀라리라
(18:21)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그러하니라
빌닷이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욥이 말과 태도가 빌닷이 내부를 건드린 겁니다. 점잖게 자신을 정돈시키려는 그 한도를 넘어셨습니다. 노골적으로 자기 내부를 다 드러냅니다. 그 내용을 압축시켜서 말하면 이러합니다. “무섭다!” 즉 자신의 내부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공포가 찾아드니 자연적으로 자신의 전부는 거기에 대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포를 잠재우는 방식은, 자기가 자기를 공격하는 공격성을 원인을 제공했다는 상대에게 퍼붓는 겁니다. 이는 욥의 공격하는 것인 동시에 자기 내부의 괴물성을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단속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괴물을 지키는 하수인으로 변해져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 의해서 살해당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예수님 자리에게 온갖 욕설을 다 얻어맞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저주스러운 소망들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즉 욥의 친구 빌닷은 욥을 향하여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제발 죽어라!”고 말입니다. 나의 허점을 지적하는 상대가 죽여야 내가 사는 것처럼, 번듯하고 폼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악마의 노림수의 대상입니다. 창세기 4:7에 보면,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 즉 우리 안에 들어 앉아있는 괴물은 우리를 늘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 왔습니다. 즉 “네 안에 귀한 것(=괴물=악마)이 있으니 너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나(=악마)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는 식으로 교육받아 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릴 때부터 받는 교육들이 다 이런 내용입니다.
즉 결코 “나에게 문제있어. 내 속에 괴물 들어있어”라는 식으로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물은 과연 인간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욥기에서 욥이 보여주는 바가 이 사실입니다. 인간 속에서 들어있는 괴물은 인간의 힘으로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괴물로 교육받은 바가 ‘나의 건전함’이기 때문입니다. 즉 괴물은 ‘괴물’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바로 그 상태 자체를 건점함과 거룩함과 참됨과 의로움을 쟁취할 수 있는 구조라서 불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44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과 만났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겁니다. 같은 인간들 끼리 백날 만나봐야 자신 안에 귀신들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귀신이 나가도 곧장 채워진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욥의 친구가 욥에게 퍼붓는 악담은 지금 본인이 그런 저주지경이 될까봐 두려워서 내뱉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귀신의 나가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자는 어떤 식으로 평소의 삶의 모습을 보일까요? 사무엘하 16:11-12에 보면,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일체 권력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미 자신의 죄인임을 압니다. 죄인이기에 이스라엘 왕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죄인인 것을 알게 된 자’만이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왕이 될 자인 것을 압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자기로 희생된 자로 통해서 자신을 의로운 관계로 맺어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압살롬과 그 추종세력들은 다윗이 힘을 가져서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는 반대로 ‘자신의 힘’이 더럽고 그 어디에게 사용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하나님의 이스라엘 통치에 방해됨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다스림은, 죄인에게 희생물을 봐서 용서해주시는 방식입니다.
다윗에게는 자기에게 속한 고유의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압살롬편을 든 사람은 이방민족과 같이 힘과 힘의 우열을 통해 권세를 잡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처사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선으로 바꿔주신다는 겁니다. 이는 전에 다윗이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다윗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를 다윗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육체는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3:2-3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두고 성령님은 인간의 육체성과 다투고 계십니다. 육체의 일을 결코 영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노래를 잘한다’에서 ‘그러니까 음반을 내자’했을 때, ‘노래 잘함’과 ‘음반내기’는 연결이 되지만 노래 잘함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겁니다. 같은 이치로 ‘율법지킴’이 ‘구원받음’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와 율법의 만남에서 무엇이 발생될까요?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육체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저주할 수밖에 없는 괴물이 인간의 육체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구원이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육체는 분화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육체의 한계입니다. 저주 퍼부음을 우리 육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주님의 십자가 영이 다녀간 구원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자신의 육신을 욕한다고 해서 상대를 저주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63강-욥기 18장 12~21절(육의 한계)2020122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8장 12~21절입니다. 구약성경 778페이지입니다.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며,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 그의 기념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며, 그는 광명중에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 그의 날을 인하여 뒤에 오는 자가 앞선 자이 두려워하던 것같이 놀라리라,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그러하니라”
욥의 친구 빌닷이 아주 뿔이 대단히 났습니다. 네가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다는 겁니다. 욕을 하고 분노를 터트리고 저주를 퍼붓는 것은 뭔가 외부에서 자기를 건드려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욥에 빌닷의 이러한 악담과 욥에 대한 저주는 오늘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우리 자신 안에 어떤 괴물이 들어있는지를 빌닷이 대신해서 제대로 잘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나를 건드린 자는 내가 용서치 아니하리라. 그러한 정신이 우리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마귀가 이런 악담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그냥 악마의 외피라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도는 예수님의 외피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깥 껍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욥도 만만치 않아요.
욥도 욕을 안 해서 안 한 것이 아니고 욕을 못 해서 안 했죠. 사람은 건드리면 언제 배웠는지 모르게 욕이 온 세상에 돌아다니는 욕이란 욕은 그 점잖은 입에서도 나오기 시작하면 마구 쏟아지죠. 메두사입니다. 메두사는 수천 마리의 뱀이 머리에서 막 나오죠. 그런데 우리가 보통 때 언제 이게 나오냐 하면 요양병원에 들어갈 때 나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몇십 년 안 남았습니다.
요양병원 들어가게 되면 드디어 메두사, 뱀 대가리가 되는 겁니다. 안에서 뱀이 다 나오는 거죠. 욥도 자기를 건드렸으니까 욥도 만만치 않게 그들을 저주했고 둘 다 핵미사일을 쏘아대는 겁니다. 그렇게 공격을 해대는데 여기서는 이러한 반발 공격의 핵심을 빌닷이 이야기합니다. 길게 구절을 읽었지만 하나를 끄집어내면 그 안에 다 집약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공포’.
알 수 없는 공포, 무서움, 엄청나게 겁나는 거. 엄청나게 겁나기 때문에 밀어내는 거예요. 도대체 뭘 지키려고 그렇게 밀어내는가.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데 왜 죽이는가. 겁나서 죽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차마 죽이진 못하고 하나님과 결탁되어 있는 자를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기 7절에 보면 뭐냐 하면
창세기 4장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가 강아지처럼 문에 엎드려 있는데 그것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러니까 악마는 우리 인간에게 소원이 있어요. 우리 안에 들어오고 싶은 겁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그걸 성공했고.
악마의 소원은 아담이고 인간입니다. 악마가 인간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아무리 청소해놔도 일곱 귀신 친구 데려와서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하여튼 악마는 거리 띄우기도 몰라. 다섯 명 모이면 안 되는 것도, 2.5단계도 모르는 모양이라. 친구 일곱을 데려와서 이미 내보냈는데 또 그 자리에 들어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걸 아시고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네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럽다고 하시죠.
다시 말해서 인간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각자가 내놓은 구토물들, 라면 먹고 토해서 내놓는 그런 구토물들 쏟아낸 구토물들을 철벅철벅 밟으면서 인간 사회가 구성되고 있습니다. 식구가 네 명이라면 매일같이 네 명이 토해 놓는 거예요. 다섯 명이면 다섯 명이 토하고. 이런 욥을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괴물을 인간의 힘으로 또는 인간이 애쓰고 기도한다고 이 괴물이 나가겠느냐는 겁니다. 욥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욥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욥은 자기 목숨, 쉽게 말해서 자살이죠, 내가 자살할 때 마귀 나가겠는지를 물으면 주님께서는 자살해도 안 나간다고 하시죠. 자살해도 마귀가 안 나갑니다. 자살해서 나갈 것 같으면 가롯유다 천당 갔겠지요. 아무리 붕붕 뛰어나 안 나가요. 이 괴물이요. 그래서 욥의 친구와 욥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욥은 괴물이 들어있음을 아는 거고 욥의 친구는 이게 나가야 할 것인지도 모르고 너무 그렇고 그런 것으로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나 건드리면 죽인다는 것은 이건 하나님이 봐도 당연하고 이건 마땅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바로 교육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세상에서 무슨 교육을 받았는가와 같은 말이 ‘악마로부터 당신은 어떤 교육을 받아왔습니까’라는 거예요. 악마의 교육은 이겁니다.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나의 사랑의 대상은 이미 나로 결정 났어요. 그래서 나를 건드리면 죽여버리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온 악담들은 욥에게 죽이라고 하는 거예요. ‘죽여! 죽여!’라고 하잖아요. 부부 싸움할 때 많이 해보셨죠. ‘죽어! 죽어!’라고 하면서 휴지 막 던지고 안 깨지는 거 던지면서 ‘죽어! 죽어! 죽어!’라고 하잖아요. 그런 남자는 때릴 수도 없고 돌아서서 ‘답답해라, 답답해라, 돈 벌어줬는데 그게 뭐가 나쁘다고. 저게 돈 못 버는 남자를 만나봐야 정신 차리지. 돈 벌어줬는데’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둘 다 괴물들입니다.
나갈 수가 없다. 못 나간다. 답답해한다는 이건 경계선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주님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그거예요. 아이스께끼입니다. 아이스께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이스께끼를 아낀다고 안 먹고 놔두면 밑으로 다 녹아버려요. 팥이 들어간 아이스께끼가 결국 녹습니다. 녹으면 중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작대기가 나와요.
욥의 친구든 욥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꽂아 넣은 것이 있어요. 그 꽂아 넣은 것이 하나님의 형상, 곧 주님을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졌거든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작대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욥 친구의 잘못은 작대기가 안 보이는 것이 잘못이에요. 그리고 자기 잘났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이제 다 녹아버리니까 남는 것은 악에 받친 나 자신이 남는 거죠. 제가 아까 괴물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 하는 것은 어떤 작대기라 했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 겁니다. 만약에 악마가 나갔을 경우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물으시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분화구가 되어요. 뭔가 나갔다는 그 흔적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빠져나간 흔적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빠져나간 흔적. 그러니까 분화구 생각하시면 돼요. 마그마가 떨어져 나가고 있는 텅 빈 백록담, 백두산 천지, 그처럼 중앙이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이 비어있음이 바로 구약의 욥,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까불다가 주님에게 당했다. 그런데 그 당함을 나는 자랑한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은 내가 의로운 줄 알고 내가 남에게 안 질려고 하고 버티려고, 버티려고 나의 착함을 유지하려고 하다가 십자가 뾰족한 것에 찍혀서 주님께서 나를, 나의 의로움을 빼낸 흔적 그 흔적이 예수의 증인인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에 오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죠. 중앙을 비워놓으라는 겁니다. 중앙 중심부를.
거기는 너의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필요해서 너는 거기 외피로써 바깥 껍질로써 우리가 존속되는 겁니다. 이러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분화구처럼 화산처럼 그런 모습으로 자기 고유의 것이 떨어져 나갔다고 보시면 되는 건데 이 과정 속에서 욥의 친구는 욥을 가만두지 않고 핍박을 많이 하죠.
사무엘하 16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다윗이 나오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다윗을 진짜 너무 심하게 오해했어요. 뭐냐 하면 다윗이 왕이니까 왕은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윗은 분화구에 불과한데 다윗은 텅텅 비어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비어있는데 사람들은 뭔가 권세로 가득 찼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그걸 탐을 낸 거예요. 그 권세를.
참, 여기서 제 입으로 차마 정치적 발언이 나올 거 같은데 많이 자제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정치적 발언은 아니라도 비슷한 근처까지 가면 압살롬이 권세자 아버지 다윗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백성들에게 사과하라고 해요. 백성들에게 사과해라. 왜 오만하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정치적 발언과 연결 한번 시켜 보세요. 왜 오만하고 건방지냐. 사과해라. 탄핵해버릴까.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벌써 노골적이죠.
다윗은 자기가 죄인입니다. 그럼 자기가 죄인이라면 자기가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쥐고 있는 겁니다. 그럼 어쩌라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 제사나 번제나 그런 걸 힘이 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닌데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힘이 되고 그 힘이 집약된 것이 왕 자리라고 여긴 겁니다. 그런 것들은 이방 민족에게 찾으세요. 이방 민족에게.
그건 이방 민족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방 민족이. 예를 들어서 대구 동부 공산동 부녀회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거거든요. 부녀회장이 구름다리 반대에 나섰다고 합시다. 동화사 구름다리 반대하고 나섰다고 합시다. 플래카드도 붙고 했거든요. 그때 총무가 왜 너 혼자 네 마음 대로 하냐고 해버리면 장부 내놓으라고 하면 보기에는 정치적 싸움이 되어버린 거예요.
여기 다윗은 아무것도 없어요. 없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이 쿠데타에 성공해서 다윗은 지금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추종자가 한 400명이나 되는가. 하여튼 초라한 모습으로 쫓겨났어요.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압살롬 쪽에서 하는 말이 ‘다윗 네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사 왕에서 쫓겨난 이유가 너에게 탄핵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쫓겨날 요소가 있기 때문에 너는 쫓겨날 만해서 쫓겨난다고 해서 힘을 가진 쪽에서 이참에 마음껏 다윗에게 욕을 못 했던 거 다 하자’
‘힘 빠지고 맥빠진 자에게 우리가 무슨 소린들 못하랴’라는 식으로 저주를 퍼부었거든요. 저주를 퍼부으니까 거기에 아비새라는 장군과 신복들이 “저 아무것도 아닌 죽은 개 같은 인간이 왕 앞에 저렇게 저주하는데 우리 좀 처분할까요. 그 정도는 아직 힘이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다윗 하는 말이 “놔둬라.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저주하는데 아들도 아닌 남이 나를 저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나에게 선으로 바꾼다”라고 다윗이 말했어요.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그러니까 다윗이 뭘 아느냐 하면 반드시 복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힘을 추구하는 자로부터 오해 사서 마치 내가 뭘 가진 것처럼 여기는 자로부터 오해사서 공격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게 하나님의 그릇되는 거예요. 주님의 외피가 되고 주님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다윗에게 이러한 억울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욥의 친구들을 색출하듯이 마지막 때는 이거는 모든 인간에게 이런 원칙을 가지고 색출에 나섰습니다.
여러분 오후 되어서 힘들겠지만, 이 부분을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힘들지만 어려워요. 그 대목이 갈라디아서 3장 3절 나옵니다. 3절 말씀이 뭐냐 하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그다음에 어려운 말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갑자기 육체가 등장했어요. 이 말은 인간의 육체 속에 괴물이 들어있으며 그 괴물의 노림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서 내 육체로 그 율법을 사용함으로써 나에게 나만의 고유한 잘남과 의로움과 거룩함과 경건함과 순결함을 내가 힘으로 포집할 수 있다. 이것을 내가 모을 수 있다. 내 안에 저장할 수 있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육체가 육체 다울 수 있는 생각이고 그 육체를 모든 인간은 타고난 겁니다. 나이가 돌 지나서 몇 개월 된 아이도 마찬가지고, 이제 막 서서 꺼떡꺼떡 돌아다니는 아이도 마찬가지고 어떤 일을 해도 그 아이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 떼고 그냥 육체예요. 누나 가진 거 다 뺏는 그냥 육체입니다. 자기가 가질 만하다는 겁니다. 육체는 육체의 본성을 감출 수가 없어요.
그 괴물의 본성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괴물인데 괴물이 괴물 지적하고 그것을 부정해서 자기 죄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악마가 파놓은 보이스피싱이에요.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노력, 몸부림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어떤 것을 해도 악마의 발목 잡힌 데서 벗어나질 못해요. 주기도문에 나오는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누구에게. 네가 하지 말고 누구에게 나의 아버지에게, 우리 아버지에게 구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하는 방식대로 하란 말이죠. 예수님이 하는 방식대로. 예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자기의 육체. 예수님은 죄 없이 죄 있는 육신이 되었지만 우리는 죄 있는 채 죄 있는 육신이 되었잖아요. 죄 있는 육신은 갖다 버려야 해요. 그걸 움켜쥐면 안 됩니다. 우리는 분화구가 되어야 한다고요.
이 인간의 육체를 아주 코믹하게 우스갯소리로 쉽게 이야기하면 아마 이 이야기가 적절한 겁니다. 조선 시대에 죄인을 칠 때 사형수가 있어요. 그때는 전기의자 앉혀서 죽인 게 아니죠. 아주 큰 칼을 들고 죽인다고요. 덩치 크고 인상 더러운 망나니가 막걸리 물고 칼에 뿜으면서 온 천지에 다 튀기게 만들어서 칼 들고 술김에 춤추면서 죄수 앉혀놓고 단칼에 쳐야 하는데 내리치니까 이게 칼이 들지를 않아요.
칼이 들지 않으니 자기 정당성이 보장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칼을 갈아달라고 해야 하는데 누구에게 부탁하느냐 하면 그 죄수를 살짝 풀어주고 망나니가 마지막 부탁을 죄수에게 하는 거예요. 사형 집행자가 사형수에게. “네가 기왕 죽는 마당에 내 부탁 들어줘” “뭐요?” “칼 좀 갈아줘” 코미디에서 나왔어요. 칼 좀 갈아달라는 거예요. 그 칼 갈아서 뭐 하려고요? 칼을 갈아서 내가 너를 단칼에 죽일 수 있게 갈아달라는 말이거든요.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자기 업무수행에 너무 지장이 되니까 그거 부탁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이 망나니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 육신이 나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이 육신이. 이 육신이라는 괴물이 우리에게 뭐라고 부탁하느냐 하면 어쨌든 저쨌든 간에 내가 안 죽어야 하고, 나는 잘나야 하고, 나는 천국 가야 하는데, 네가 힘들지만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도록 네가 기도 좀 해줘. 네가 헌금 좀 해줘. 네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티를 좀 내줘.
그것 때문에 우리 육신에게 내 자아가 늘 시달려요. 코미디는 재미있기라도 하지 이건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3장 2~3절이에요. 다시 읽어 볼게요.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말이거든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그냥 허투루 보내기가 싫은 거예요. 왜? 내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그 찬스를 내가 놓치기 싫은 거예요.
우리 육신이 율법이라는 미끼를 물은 거예요. ‘그래, 저 법만 있으면 나는 누구에게 잘난 척을 할 수 있다. 나 이 법 지키고 저 법 지키고 말씀 다 지켰어. 성경 말씀 누구보다 오랫동안 다 외우고 다 잘 지킬 수 있어’라는 그 찬스를 못 놓치는 거예요. 못 놓치면 못 놓칠수록 결국 누구를 밀어내느냐 하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주님의 구원방식이 다른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방식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 그냥 죽지 마시고 내가 잘났다는 소리를 해주고 죽으라는 거예요. 정말 못된 망나니죠. 망나니를 대신 엎어놓고 죽이고 싶어요. 쉽게 가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예수 믿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십자가 믿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제가 지난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부활이 진실 된 것이 아니고 부활을 들으면서 뭐가 진실로 여기냐 하면 부활이라는 소식, 그 대단한 소식을 믿는 내가 이렇게 괜찮고 진실했다는 것을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그거 미친 거 아니에요. ‘십자가마저 내가 믿어줬으니까 하나님이여 저를 무시하지 마세요’라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걸 육체에 포함 시켜 버립니다. 그게 바로 네가 몰랐던 육체 속에 괴물이 바로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네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보내느냐 하면 성령이 와버려요. 성령은 욥과 마찬가지로 육신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분의 영이에요. 성령은. 따라서 성령 받은 여러분들도 육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욕 얻어먹을 준비를 하세요. 준비가 아니라 이미 욕 얻어먹고 있죠.
따라서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나옵니다. 네 육신이 너를 저주 아래 있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육신이 있으니까 율법을 못 버리고 계속 법에 호소하는 거예요. 그 법을 통해서 자기 정당성을 잊지를 못하는 거예요.
제가 20년 교회 다녔습니다. 제가 공부해서 목사 되었습니다. 뭐 어쩌라고요. 그게 다 뭔데요. 하여튼 북한 조선 인민주의 공화국 보면 신천지랑 똑같거든요. 그 군인들 높은 사람들 보세요. 훈장을 너무 많이 달아서 옷이 늘어지려고 해요. 이건 장군 따먹기를 어릴 때 일곱 살 때 끝냈을 장군 따먹기를 세상에 나이가 60, 70이 되어도 하고 있어요. 훈장을 주렁주렁 달아서 소 젖같이 축축 늘어져요.
그걸 퇴행, 정신분석학에서 유아기로 퇴행하는 거예요. 아이들 놀이하는 거예요. 놀이. 철없는 아이 하나 지도자로 만들어 놓고 그게 무슨 짓입니까. 철딱서니 없는 서른 몇 살 먹은 뚱뚱이 하나 세워놓고 밑에는 늙은 군인들이 훈장 달아놓고 그 인간도 참. 그거 괴물들 아니에요? 그 괴물 못지않게 저와 여러분도 괴물입니다만.
항상 아침 눈만 뜨게 되면 나는 얼마나 또 정당할 수 있느냐. 자꾸 자기 육체를 신뢰하는 거예요. 육체를 신뢰. 나쁜 짓을 내보내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나 자체가 배설물이에요. 이거 뭐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뭐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죠. 나 자체가 배설물이에요.
보통 12 월달 12월 21일 되면 팥죽을 먹는데 팥죽 먹으면서 어릴 때부터 우리 할머니에게 들은 소리가 있어요. 네가 이 팥죽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우리 집안 법이 그래요. 팥죽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거. 그래서 제가 어릴 때 두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팥죽을 안 먹으면 지난해 나이를 그냥 유지하는 문제와 둘째는 팥죽을 두 그릇 먹으면 한꺼번에 두 살로 승진하느냐는 그 문제.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런 답변 없이 돌아가셨어요. 이것이 눈 감고 아웅 하는 겁니다. 육신을 속이는 거예요.
육은 절대로 영을 만날 수 없다. 이것이 오늘 욥이 보여주는 거예요. 육은 아무리 발악해도 괴물 있다고 소리쳐도 주께서 꺼내주지 않습니다. 육은 육이에요. 육이 있어 줘야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빛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빛나는 거예요. 그 역할이 우리 역할입니다. 왜 자꾸 내 구원받으려고 합니까.
내가 근사하게 이 몸뚱아리가 천당 가려고 합니까. 그런 건 법륜스님에게 이야기하세요. 혜민 스님은 사기꾼이니까 법륜스님에게 이야기하세요. 법륜스님인지 교회가 조계종인지 예수장로회인지 분간도 안 돼요. 전부 다 자기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뭐 증거 장막, 성막 장막하는 신천지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나를 버리세요. 육체를 버리라고 성령이 온 겁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끄집어내니까 ‘아, 나는 내가 알아서 버릴 위인이 아니구나’를 알게 되고 율법의 역할이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저주 아래 있다는 거, 이미 저주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거, 밥을 먹어도 팥죽을 먹어도 저주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고 그다음에 구원은 뭐냐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았거든요. 우리 속에 누가 왔어요. 우리 속에 누가 왔다는 사실을 왔다가 떠났다는 그 사실을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눈치챌 수가 없어요. 그때부터 육은 절대로 영과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노래를 잘한다면 천국 갑니까? 아니죠. 노래를 잘하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음반 내라고 하죠. 음반 내는 것과 노래 잘하는 것과 육은 육을 만나요. 그러나 노래 잘하는 것과 천국 가는 것은 만날 수가 없어요. 청국장해도 이건 천당 못가요. 그러니까 기도 잘한다고 해도 천국 못갑니다. 헌금했다는 거 천국 못갑니다. 성경 천 독, 만 독 맨날 쓰고 해도 천국 못갑니다. 왜? 육이니까.
영은 뭐냐 하면 이거, 그 자체가 내 잘남을 뽐내는 저주였음을 이야기하는 분화구 역할 할 때 그 사람이 바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왜 오셨는지를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자체가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귀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성령의 능력인 것을 알게 되었사오니 우리는 속을 텅 비워놓고 하나님의 감사와 은혜의 충만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 19:7-12 / 참된 기도의 응답 (0) | 2021.01.10 |
---|---|
욥기 19:1-6 / 존재의 뿌리 (0) | 2021.01.03 |
욥기 18:1-7 / 타인의 평가 (0) | 2020.12.20 |
욥기 17:8-16 / 저주유발자 (0) | 2020.12.13 |
욥기 17:1-7 / 격막 (0) | 2020.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