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욥기 17:1-7 / 격막 본문
격막
이근호
2020년 12월 6일
본문 말씀: 욥기 17:1-7
(17:1)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17: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17:3)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17:4)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아니하시리이다
(17:5)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지니라
(17:6)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17:7)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욥은 이제 자신을 곧 죽는다고 여깁니다. 자기 관을 저기 놓여 있는 것같고 그 관까지 거리를 너무 짧아 다른 경우의 수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위로할 줄도 모르고 끝까지 욥이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고 말합니다. 그래서 욥도 참지 않습니다. 친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그 자식이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지금 자신의 당하는 고통을 악담 속에서 대등하게 표출해주고 있는 겁니다. 당한만큼 당해보라는 식입니다. 욥의 이러한 발언을 통해서,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이 결코 자신이 하나님에게 악한 짓을 해서 받는 징벌적 차원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신의 처지를 시원하게 해명할 그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가 모르고 있는 것이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간이 존재할 권한이 없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죽음에 대해서 ‘인생에게 닥치는 일 중, 가장 나쁜 경우다’고 여기는 겁니다. 저주의 끝이 죽음이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살아 존재하는 것은 그만큼 정당성이 있기에 보상으로 살아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두 번째 그들이 모르는 것은, 자신들에게 해석할 있는 권한이 있다고 여깁니다. 세상을 해석하고 자기 자신을 해석하고 그 해석으로 하나님마저 해석할 권한이 있다고 여깁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이 각자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입장에서 타인을 해석합니다. 욥의 친구와 욥은 서로를 향하여 제대로 안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여긴 반면에, 욥은 자기에게 고통이 찾아드는 이번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도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두 그룹 사이에 격막이 생기게 됩니다. ‘격막’이란 상호 넘을 수 없는 두 공간으로 질적 구분이 되게 하는 겁니다. 욥은 아직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에 욥은 그저 격막 노릇하는 자리에 처해있는 겁니다.
이 모든 문제가 스스로 해석 가능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그 격막 사이의 구분은 신약에 오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한쪽은 ‘해석 불가능한 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사도들입니다. 반면에 평생 자신이 자신을 해석할 권한이 있다고 우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마저 조작할 자들입니다.
즉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다’와 그리고 ‘그 있는 나를 해석할 권한이 있다’고 우깁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해석을 제대로 한다’를 것이 아니라 ‘해석할 권한은 갖고 있다’는 점을 불신자들은 주장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2:5-9에 보면,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에게는 본인이 본인을 해석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해석자를 자기 앞에 모인 많은 자들에게 증거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후서 1:16-17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의 의식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욥’이라는 격막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해석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말고 달리 해석자가 욥에게 고난으로 등장했다는 그 자체를 욥의 친구들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할 권한도 없습니다. 이는 그 존재를 해석할 권한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출생은 ‘불가능성, 불처분성’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사도들은 알았고 욥은 과도기적 인물로서 구약에 등장한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존재할 수도 없고 스스로 해석할 권한도 없다면 어디에 쓰려고 이 세상에 나타나야만 했을까요?
마태복음 4:18-20에 보면,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마치 도넛 가게에 다 튀겨진 도넛 덩어리를 건지지 위해 뜰채를 동원한 것과 같습니다. 뜰채는 그 자체로서 별 내용이 없고 그저 텅빈 구조체입니다. 그래서 도넛만이 건져낼 수가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내실 때에, ‘떨기나무에 불붙는 모양새’로 나타났습니다.
분명 나무에 불은 붙었지만 나무가 타지는 아니했습니다. 이는 나무 자체가 에너지 근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외부의 불이 떨기나무에 덮친겁니다. 이는 앞에서 모세의 위상을 말해줍니다. 출애굽기 4장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주목합니다. 모세가 일의 주체냐 아니면 지팡이에 종속되어 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지팡이가 모세를 부리는 양상입니다. 모세가 지팡이에게 철저하게 종속된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난 뒤에 달라진 변화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가 모세를 해석하고 일 시키시는 겁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성도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0:15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뜰채로서 보냄을 받은 자는 본인이 본인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얇은 그림자’같습니다. 따라서 전도 성과를 미리 고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격막기능을 통해서 누가 개/돼지인가가 복음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무 것도 판정을 내리지 말고 하시고 그저 쓰시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60강-욥기 17장 1~7절(격막)2020120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7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77페이지입니다.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 되었구나,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아니하시리이다,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찌니라,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자기가 죽을 관을 옆에 짜놓고 그걸 옆에서 곁눈질하면서 ‘다 되었다. 나는 이제 간다’라고 되는데 그때까지도 친구들은 옆에서 네가 죽을만해서 죽는다고 옆에서 그런 식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서. ‘조금도 너에게 미련 없이 그리고 너는 무가치한 것을 네가 알아라’ 하는 식으로 옆에서 놀리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내가 가치 있는데 자꾸 주변 사람들은 내가 가치가 없다고 했을 때 그 차이가 상당히 괴롭지요. 그 괴로움을 욥은 이렇게 표시합니다. 아주 악담하는데 “나를 해롭게 하는 자들의 자식들은 장님이 되어라”라고 5절에 이렇게 악담합니다. 인간이 내가 아픈 것보다 더 아픈 것은 내 자식이 아플 때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식 건드리면 법이고 뭐고 없다. 이제 주먹이 앞서는 거죠. 그처럼 욥은 말하기를 “나만 억울하게 죽을 수 없다. 너도 죽기 전에 내가 당한 이상으로 인생의 처절한 저주스러움과 심판을 같이 맛보아야 공평하지 않으냐”라고 저주를 해버립니다. 그리고 6~7절에 보게 되면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라고 합니다. 인간에게서 얼굴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전부죠.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왔다고 자기 자랑할 수 있는 그러한 창고가 얼굴인데 그 얼굴에 더러운 침으로 도배를 했을 때 이건 죽기 전부터 이미 죽음이 주는 아픔을 살아있는 채로 건딥니다. 특히 7절에 표현 아주 대단한 표현입니다.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그다음에 나온 표현이 이건 우리가 평생 간직해야 할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겁니다. 존재의 가벼움. 나는 실체는 없고 그냥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림자가 원래 무겁지 않잖아요. 얇지요. 그림자가 얇아요. 나는 나 나름대로 어떤 두께를 가지고 싶은데 그래서 남들 앞에 나는 이렇다 저렇다 내세우고 싶은데 얇아도 너무 얇아요. 그림자 같아요. 그림자처럼 전봇대도 올라가고 꽃잎에도 올라가고 어떤 상황 가리지 않고 어디에도 질질 끌려가는 그러한 팔자, 그림자 같은 팔자죠.
그러면서도 아프다고 말할 대상도 없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래서 자기표현을 나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얇은 막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점이 중요해요. 욥이 그림자 같다는 말은 이게 진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걸 그림자라고 하지 말고 다른 표현으로 격막. 격막이라 하는 것은 두 다른 장소를 가로막아 구분 짓는 막이 격막이죠.
욥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류를 두 쪽으로 나누는데 나누는 격막으로 사용하시려고 욥에게 고난을 준겁니다. 욥에게 고난을. 지금 욥에게 고난을 준 것이 왜 욥이 격막 역할을 하느냐 하면 인간은 세상을 이렇게 둘로 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도 되는 일과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누가 정하느냐 하면 본인이 정해요.
이건 본인은 격막이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고 나라는 것이 있는데 나라는 것을 계속 내가 되고 싶은 되는 일에다가 투자를 하고 노력을 해서 안 되는 일은 버리고 되는 일은 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인간에 있어서 되는 거 안 되는 걸 구분시키면 이건 다른 말로 불가능한 일과 불가능하지 않은 일을 내가 정한 것이 돼요.
그러면 그렇게 정해버린 나는 항상 가능한 존재가 되어요. 가능한 존재. “저건 내가 가능해. 이거는 불가능해”라고 말하는 당사자는 나는 여기 버젓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셈이 된다고요. 제가 어렵다고 했죠. 무슨 말인지.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식으로 가능과 불가능을 한다는 말은 그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나는 나에 대해서 만큼은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이러이러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그 말이에요. 감이 잘 안 잡히시지요. 내가 해석되어 버리면 이미 내가 해석한 것은 내가 가능한 거고 그게 내가 정답을 결정해 버리면 내가 해석했던 해석 가지고 누구를 만나느냐면 눈에 보이는 남을 만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 우리 본 모습인 것을 욥의 친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냥 욥에게 친구가 있었다. 세 사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왜 욥의 친구 이야기가 이 거룩한 성경책에 왜 이렇게 박혀 있는가. ‘나는 욥 할래’라고 하지 마시고 욥의 친구를 통해서 한번 욥에게 건너와 보세요. 못 건너옵니다. 건너올 수가 없어요. 욥은 불가능이고 욥의 친구는 가능인데 어떻게 건너옵니까.
십자가 질 때 옆에 두 강도가 있었지요.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 믿는 것이 불가능인데 옆에 지옥 간 강도는 본인 해석을 본인 쪽으로 해석해서 본인이 가능한 해석을 가지고 누구를 해석했느냐 하면 옆에 중간에 계신 예수님을 해석한 거예요. 세 사람이 십자가 달리다 보니 강도 둘에게는 누구나 예수님은 옆자리가 돼요. 그러니까 내가 해석한 대로 예수님을 해석하게 되는 것이 이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욥의 친구가 욥에게 건너올 수가 없어요. 욥의 친구도 답답해요. 참 답답합니다. 저는 교회 다니기 전에 술집에 가본 적이 있어요. 그것도 억지로 구경하러 가보긴 했는데 그 이후에는 술집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적인 발언이 왜 튀어나오느냐 하면 술집에서 술 먹으면서 선술집에서 하는 인간들의 주고받는 내용이 술김에 나온 내용이 어떤 내용이 있는가를 간접적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보게 되거든요.
그럴 때 주고받는 술김에 취해서 횡설수설 나오는 그 내용들이 공통점이 있어요. 술 취해서 얼굴 벌게져서 눈동자 내리깔면서 상대방 보지도 못하고 내리깔고 “내가 한마디 할게. 내가 너 아는데”라고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너 아는데.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아 취한다” 그들의 공통점이 술 먹으면서 기왕 하고 싶은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럴 때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내가 너 아는데”
지금 욥과 욥의 친구들이 술집에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거예요. 답답하다는 거예요. “내가 너 아는데.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네가 뭐 나쁜짓 했잖아. 했으니까 이번에 큰 벌 받은 거야. 진짜 내가 친구 아이가~. 친구로서 답답해서 하는 소리인데 너는 너 모르지. 나는 알거든”이라는 이게 해석입니다. 이게 해석이에요. 해석은 격막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욥 본인도 본인에 대해서 모르고 있어요. 욥 본인도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요. 다시 말해서 나에게 왜 하나님이 이런 벌을 주시는지 욥 본인도 모르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욥과 욥 친구의 차이는 뭐냐 하면 욥은 내가 나를 모르겠다고 욥 친구는 내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아까 어려운 거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첫째는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두 번째는 그 존재하는 것을 내가 해석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입니다. 주일학교 설교할 때 한 이야기를 다시 할게요.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독립운동하다가 쫓겨나서 자기 장인의 농장에 일꾼으로 40년 동안 일하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났어요. 하나님께서 나타났을 때 떨기나무를 통해서 나타났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떨기나무가 실체냐 불이 실체냐가 문제가 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느냐 아니면 떨기나무가 불을 냈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떨기나무가 타지를 않았다고 나와 있어요. 타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에너지를 소비해서 불붙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떨기나무는 그대로 있는데 불이 다가온 거잖아요.
그러면 모세의 경우는 뭐냐. 모세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못합니다. 나는 말도 잘하지 못하고 내가 수배자가 되어 쫓겨난 입장에서 내가 못합니다”라고 할 때 떨기나무성을 그대로 고백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게 주님 일에 적합하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모세는 모세 옆에 지팡이를 쥐고 있거든요. 지팡이가 실체냐 모세가 실체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장 끝나고 4장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지시하신 것이 모세보고 지팡이를 던지게 했어요. 모세는 뭘 생각했겠어요? 나는 실체고 지팡이는 내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쥐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그 지팡이 던져 봐야 지팡이 되는 겁니다. 이건 내가 나를 안다는 건데 첫째 나는 존재 한다는 것과 둘째 나는 해석할 수 있다는 내가 아는 해석 가능과 존재 가능으로 지팡이는 내가 소유한 지팡이라고 생각한 거죠.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었어요. 모세는 그동안 자기가 뱀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알지 도저히 그전까지는 몰랐던 겁니다. 지팡이가 뱀이 될 수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주의 일꾼 되게 하시는 거예요. 나는 못 하는 것이 너무 명확한데 나에게 찾아오신 분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내가 했다는 조건을 일체 달지 않기.
너는 계속 무능한 자로, 내가 해석 불가능한 자로, 내가 존재함을 유지할 그러한 권한이 없는 자로, 더 살고 싶다고 요청하지 않는 자로. 너는 너의 존재에 대해서 불가능한, 그걸 어려운 말로 ‘처분 불가능성’이라고 하는데 자기는 오후 5시까지 살겠다고 나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성경에 모세 이야기 왜 나오고 떨기나무 이야기 왜 나옵니까.
지금 인간은 자꾸 홀로 살려고 해요. 홀로 살아도 된다고 악마가 자꾸 부추겼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나를 해석할 수 있고 나는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너 아는데”라는 이 이야기를 평소에 내가 나에게 한 거예요. 우리는 주께서 허락하신 존재이지 내가 알아서 지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허락하셔서 이빨 아픕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나를 해석하면 안 됩니다.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에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그러지 마세요. 나를 해석하지 마세요. 나를 해석하면 선악으로 해석하게 되어있어요. 나는 못났다. 겸손해 보이죠? 나는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하고 하면 굉장히 겸손해 보이고 고상해 보이고 할 것 같지만 그것도 건방짐입니다. 오만이에요.
지팡이처럼 달라붙어 있습니다. 주님이. 주님이 실체란 말은 주님이 주인님이십니다. 우리는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걸 욥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욥은 자꾸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죽는구나”라고. 욥도 문제예요. 본인이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 죽을 때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주님은 욥에 대해 죽일 계획이 없어요.
욥 마지막에 보세요. 마지막에 호강 잘하고 죽어요. 그 호강이 댕기면 좀 알려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 누가 건빵을 주셨는데 건빵이 보리건빵이에요. 나는 해석도 불가능하면서 또 해석한 거예요. 이름이 보리건빵이니까 그냥 건빵 아니고 보리건빵이니까 보리가 98% 섞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자세히 보니까 2%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보리라는 말을 넣으면 안 되죠. 밀가루 건빵이지 보리건빵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회사에서 보리건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정해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니까 우리가 누구를 상대하게 하신 거예요. 모세에게는 떨기나무를 상대해서 지팡이 존재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상대하게 해요. 예수님을 상대할 때 예수님이 내게 도움 주시는 분이신지 아니면 내가 98%이고 예수님은 2%인지 아니면 전부가 예수님 것으로 내가 여기에 등장된 것인지를 교체시키는 겁니다.
시킬 때 주께서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면 매사를 해석 불가능한 자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하나의 욥으로 만들어버려요. 욥으로 만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본문 1~7절 같은 내용이 거침없이 우리 속에서 나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인간, 나를 가만두지 않는 인간 저주받아라. 이게 뭐, 욕을 못 해서 안 하지 사실은 행동과 표정을 통해서 이게 늘 나옵니다.
어떤 분이 어제 멀리서 집에 오셔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교회 여러 군데 다녀 봤는데 사모들이 특징이 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많이 어둡다는 겁니다. 사모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많이 어둡다는 거예요. 마이~어둡고 뭉개지는 것 같이 어둡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들었죠. 신앙도 개뿔 없으면서 있는 척이라도 하려고 하니까 그게 얼마나 힘드냔 말이죠.
주님과 상대할 사모가 저 집사, 권사, 형제는 나 사모를 어떻게 보는지 맨날 그것만 신경 쓰는 거예요. 사람이 누구와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자기가 억지스러운 인생을 살다 보니까 감출 수가 없죠. 감춰지질 않는 겁니다. 욥을 오늘날 신약 시대로 당겨보겠습니다. 이러한 욥을 가지고 신약 성경으로 그대로 당겨버리면 신약 시대 성도가 되겠죠.
욥처럼 이렇게 성도가 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여러분 잘 아시는 사도바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냐 하면 다들 선지자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지만 이번엔 사도바울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천부장 앞에 섭니다. 천부장이 사도바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여러분이 귀담아들어야 하는데 “뭐야? 너”
네가 뭔데 우리 공동체 내에서 해석하는 우리가 해석하는 그 해석에 네가 뭔데 어긋나느냐 하는 겁니다. 천부장이. 천명의 부하를 다스리는 자를 천부장이라고 해요. “뭐야? 너” 사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로 예상해서 우리는 평소에 어디를 가더라도 늘 대답할 준비를 하잖아요. 나는 이 정도라는 어떤 대답. 어쨌든 간에 사도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모독을 받은 거예요. “네가 뭔데 이렇게 분란을 일으켜”라고 재판에 세운 겁니다.
“좀 조용하게 살자. 조용하게 살아. 너도 세상 해석하고 나도 해석하는데 우리 해석 안 틀렸어. 그런데 너는 왜 자꾸 어깃장 놓느냐. 뭐냐? 너”라고 이야기할 때 사도행전 22장 5절에 사도바울이 아주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5~6절에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라는 이런 이야기를 해버려요.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이 “뭐야? 너”라고 물으면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욥이 “욥아, 너 나와 친구잖아. 그런데 왜 유별나. 뭐야? 너”라고 할 때 욥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유도 없이 고난을 줬어”라는 말을 외부적인 요소를 말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동안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해석 자체가 해석 불가 자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욥은 자꾸 해석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신약 성도인 사도바울은 내가 해석을 할 필요가 없어요. 욥은 어떤 분이 등장 안 했잖아요. 이 본문까지는 하나님이 안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미 예수님이 나타나 버렸잖아요. 예수님이 나타나서 해석을 다 해주는데 왜 내가 해석을 해야 합니까. 무슨 이야기 했는가. 다메섹 내려갔는데 갑자기 빛이 비치는데 그 뒤에 7~9절까지 보면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제가 사도행전 9장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22장을 의도적으로 언급해요. 9장에서 사도바울이 물론 체험한 걸 반복해서 하는데 이건 뭐냐 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거예요. “뭐야? 너”라고 할 때 나는 이렇다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 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라고 나와요. 해석 불가입니다. 그들은 사도가 아닙니다. 사울과 함께 가던 사람은 사도가 될 사람이 아니고 사도가 될 사람 성도가 될 사람은 누구밖에 없는가. 사도바울 본인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미치는 거예요. 남에게 격막을 뚫고 격막을 넘어서서 남에게 소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차단된 사람이 성도입니다. 전에 교회 목사가 말하기를 “너는 왜 교회 나가려고 하는데”라고 물었을 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목사는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건데 왜 나가려고 하느냐 하겠죠. 뭐라고 설명해야 해요? “주께서 빛이 임하매 너는 나를 그동안 왜 핍박했느냐 하시는데”
남들 보기에 엉뚱한 소리 하는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뿐만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17절에도 나옵니다. 성경해석 못 한다고 베드로가 그러니까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성경 해석하느냐?”라고 했을 때 다른 말로 “네가 뭔데?”라고 하니까 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실 때 이것은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네가 뭔데 세상을 해석해?”라고 하니까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났거든”이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해석 안 해. 지팡이가 해석해.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해석해. 나는 주제넘게 해석 안 하고 싶어. 해석해봤자 나는 좋은 대학 나온 것도 아니고 나는 모르겠고 나는 해석 안 해. 그러나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해석해”라고 자신있게 여러분들이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그걸 왜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마태복음 4장 19절에 나와요.
마태복음 4장 18~19절을 보면서 제가 느낀 그림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도넛 만드는 가게예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있거든요.
주체가 지금 지팡이가 주님이에요. 지팡이가 모세를 찾아오듯이 주님을 베드로가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라고 할 때 왜 도넛 가게가 생각나느냐 하면 시장에 보면 오래된 기름에다 도넛 튀겨서 파는 가게 있잖아요.
그때 보면 뜰채가 있어요. 도넛을 밀가루 반죽해서 기름에 넣어놓으면 나중에 좀 익었다 싶으면 뜰채로 뜰 때 그 뜰채 역할을 주께서 하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베드로지만 모든 성도는 다 남을 낚아서 건지는 뜰채입니다. 뜰채 특징은 별 내용이 없어요. 구멍이 숭숭 뚫려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주께서 사용하는 대로 뜨는 거예요.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나오거든요. 이 말은 내가 신학 배워서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보내실 때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아무 내용도 없는, 그걸 두 자로 허당 이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뜰채로 가서 툭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이 구원이라는 것이 주님이 와서 하는데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방법은 내가 가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 하셨다’라는 것의 강조법입니다. 그게 더 강조에 강조를 한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죠. “네가?!!!”라고 하죠.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죠. 웃기죠. 그러면 이렇게 말하죠. “나 아니거든”이라고. “그러면 네가 왜 나대?”라고 하면 “뜰채”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나도 이상해. 나도 너를 구원 안 하고 싶어. 그러나 주께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냥 손 털고 나갈 뿐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러면 건짐이 됩니까. 아니죠. 제가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격막. 욥이 격막 역할을 하죠.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제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요. 제가 여러 번 계속하고 싶지만 듣는 사람 기분 나쁠까 말을 못 하는데 마태복음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라고 나옵니다. 복음이 오가는 그 현장에 개는 맛있는 거 먹겠다고 막 짖을 때 개는 복음도 모르고 이게 맛있는 건지도 모르고. 오전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복음 아니면 만나지도 말라고. 물론 사적으로 만나야지만 진지하게 만날 필요 없다는 거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걸 함축하면 개돼지입니다. 개돼지인지는 사정 보고는 모르고 뜰채 동원해 봐야 아는 겁니다. 모세가 일한다고 애굽의 바로 왕이 회개하고 하나님 믿고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허접한 모세를 허접하게 사용했는데 결과는 누가 했느냐면 주님이 알아서 하신 겁니다.
아예 주변에 개돼지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기대를 하지 마시고 욕심을 많이 내지 마시고 다만 중요한 것은 누구를 몇 명 건지냐가 아니라 내가 절대로 나를 주제넘게 해석하지 마세요. 두 시간 죽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을 뭘 해석합니까. 해석하지 마시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주의 계획이 있어서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뜰채인 줄 모르고 내 성과를 챙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나를 해석했고 멋진 나냐 못된 나냐 내가 판정을 함부로 내렸습니다. 주여, 이런 건방짐을 용서해 주시고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임 받는 그 관계 자체를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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