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욥기 19:7-12 / 참된 기도의 응답 본문
참된 기도의 응답
이근호
2021년 1월 10일
본문 말씀: 욥기 19:7-12
(19:7)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19: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19:9)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19: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9: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9: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 쳤구나
욥은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철저하게 자기 원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바로 이점이 욥이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하나님에게 기도했다는 증거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드리는 모든 기도를 모조리 무산시켜 주시는 하나님이기에 참된 하나님인 겁니다.
즉 ‘기도 응답이 안 됨’ 자체가 참된 하나님의 기도응답인 것입니다. 욥이 신앙이 아니라면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욥으로 하여금 자기 뜻대로 응답되지도 못할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그래야지만 인간의 한계를 욥을 통해서 보여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는 곧 ‘있음’의 한계입니다. 인간들은 ‘있음⟶있음’으로 줄곧 나아간다고 여깁니다. 즉 비록 자신이 죽어도 ‘나 여기 있음’이 그대로 저기 죽음의 세계에 ‘나 거기 있음’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한 말씀의 정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중에 노선변경이 일어나게 합니다.
즉 있음⟶없음이 되게 하십니다. 그 예언이 이사야 7:14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종족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처녀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현 인간들의 ‘있음’에 대해서 그 기본환경에 대해서 문제삼습니다. ‘있음의 토대’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마땅한 토대는 지금 ‘있음’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의 ‘있음’에 있지 않는 토대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다 부모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처녀로부터 출생한 아들’은 없습니다. 이 ‘없음’이 중요합니다. 즉 ‘없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처녀의 아들’만이 참된 천국백성의 타당한 토대입니다. 이 토대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이 바뀌어질 때까지 인간들이 욥처럼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의 ‘있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의 고백 중에 중요한 구절이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원수처럼 대했다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10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 백성의 특징은, 자신의 ‘있음’이 ‘원수의 자리’를 토대로 깔아둔 ‘있음’이라는 겁니다. 이 ’원수의 자리를 토대‘로 둔 있음이기에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자기에게 와서 종결시킵니다. 쉽게 말해서, 뭘 해도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가 모든 의미의 종착점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도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대꾸하기를 “예수 믿으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데?”라고 반문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의 토대는 ‘하나님의 원수’가 마련해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다른 예로서, “나는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겠다”고 나온다면 이 또한 원수의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13:37-3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주를 위해 바치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곧 베드로 ‘있음’의 경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도리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베드로가 몰랐던 것은, 인간의 ‘있음’이 ‘‘하나님의 원수’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쳐놓은 인간계의 경계선을 인간의 힘으로 구멍을 뚫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 경계선조차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욥도 그렇게 절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인간의 ‘있음’의 토대가 되는 ‘존재의 바탕’의 어두운 힘을 누구에 의해서 처리되고 구멍 뚫릴까요?
시편 110:1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밝리고 그 힘을 이기기 위해 ‘있음의 힘’보다 더 센 힘이 도입됩니다. 그것은 죽었다고 다시 사신의 부활의 힘입니다.
이미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예수님은 처녀의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새 몸은, 기존의 몸처럼 모든 의미가 자기 자신으로 최종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즉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심’입니다. 즉 최종 의미가 ‘나’에게 귀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계신 주님을 위한 몸으로서 살기 위해 새로운 토대환경이 마련됩니다. 과연 누가 이런 삶을 보여줄까요?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산파 둘이 나옵니다. 그들은 바로의 왕을 따르지 않고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나자마자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8:4에 보면 오바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아합왕의 신하입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하지만 아합왕의 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종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죽음보다 더 센 힘’입니다. 신약에서 부활의 힘이 이런 겁니다. 자기 존재를 살리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 센 힘’ 속에서 활동합니다.
이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조성된 마땅한 토대환경, 즉 주님과 더불어 있는 백성입니다. 이들만이 악마의 권세권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요리조리로 주님 자신의 기도의 응답대로 낯선 죽음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다른 ‘새로운 존재’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친히 주님께서 우리가 무서워하는 주님이 가신 그 죽음 속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65강-욥기 19장 7~12절(참된 기도의 응답)2021011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9장 7~12절입니다. 구약성경 778페이지입니다.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 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하나님이 욥에게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욥이 하는 이 이야기가 실은 모든 성도가 기도의 응답으로 외쳐야 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했더니만 응답은 없고’라는 것이 응답이어야 해요. 그게 유일한 응답이어야 해요. 다른 응답은 없습니다. 8절에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라는 이게 기도의 응답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제대로 기도한 거예요.
그리고 내 영광을 수치로 바꾸시고, 나를 작살 내시고, 나를 부끄럽게 만드시고 세상의 놀림거리로 만드시고, 이게 기도의 응답입니다.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주님의 기도는 주님이 필드하키 선수가 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몰 듯이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시느냐 하면 죽음의 길로 요리조리 몰고 가는데 그게 내 기도에 어긋나서 주님 자기의 기도의 응답을 결과로써 우리로 하여금 늘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합니다.
죽음에 가까이 가게 되면 무엇이 상실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무겁게 짐이 되는 구나를 깨닫게 되죠. 쉽게 말해서 가까운 거리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볼 때 거리를 두고 봐야지 가까이 쳐다보면 “왜 이러십니까”하고 물러서죠. 가까운 거리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요. 왜? 존재의 유입이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멀찍이 띄워서 보면 되는데 주님께서 너무 가까이 와버리니까 주님이 가까이 온다는 것이 바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 죽음의 힘이 나에게 내가 다룰 수 없는 거리 내로 죽음이 들어오는 거예요.
손 놓으라는 말이죠. 네 인생에서 손 놓으라는 이야기. “미란다원칙 고지해줘? 너는 체포되었어. 너는 이 하나님에게 체포되었어. 나에게 체포되었어. 나 하나님도 이 세상에서 죽었어. 너는 내 죽음에 같이 동참해야 해”라는 이것보다 대단한 확실한 기도의 응답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홀로 있다가 홀로 죽어버리면 지옥인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죽음에 살아생전에 미리 겹쳐지게 된다면 합쳐진다는 것은 곧 이건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영생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더는 내가 발버둥 쳐도 영생의 길 말고 다른 길은 내가 갈 수 없도록 주님께서 장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지금 욥은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하나님께 기도했더니만 하나님에게 응답이 왔는데 응답이 뭐냐 하면 내 기도에 응답 없는 응답으로 오셨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전부 다 내가 예상하고 내가 객관식 문제 낸 문항은 전부 다 배제해 버리고 나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머리 두지 못하고 내가 남에게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은 전부 다 묵사발 만드시고 수치스럽게 되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고 10절에 보면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라고 되어있는데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무를 확 뽑듯, 감자를 고구마를 뿌리째 뽑듯 뽑으시는 거예요.
“이게 주제에 무슨 소망이야? 네가 소망을 언급할 쨉이 돼?”라는 식으로 소망 자체가 나오는 그 뿌리째로 뽑아버리는 거예요. “앞으로 소망 같은 소리하지마. 너는 소망할 권리도 그럴 자격도 없어. 어디 땅에 터전을 박고 살려고 꼼수를 부리고 있어. 너의 모든 소망은 땅에 뿌리박고자 하는 은근한 마음으로 네가 소망을 부리는 거야”라는 식으로 소망을 뽑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나그네요, 이삭도 나그네요, 야곱도 나그네요, 예수님도 물론 나그네죠.
11절에 보면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진노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이야기했고요.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적으로 보는 거예요. 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이 자아의 존재를 놓지를 못하고 붙들고 있으니까 네가 무슨 근거에 의해서 나의 나답다가 어떤 근거 어떤 그라운드에 의해서 너는 너답다고 그렇게 주장을 하느냐는 거죠.
주님께서 이렇게 뽑는 이유가 인간에게 마땅한 기본 환경을 제공하는 거예요. 인간은 내가 나 되고 싶은 나는 마땅한 기본 환경이 아니고 그건 조작된 것이고 악마가 심어준 것이고 그거 뽑고 그 바탕에다가 진짜 인간에게 마땅한 환경이 뭣이냐를 대체해서 집어넣는 겁니다. 욥이 이렇게 말을 잘 안 들으니까 12절에 보면 “그 군대가(천사들이)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 쳤구나”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욥이 일종의 알박기를 한 거예요.
알박기를 하니까 시에서 용역을 사서 철거 명령 떨어졌다고 알리고 전부 다 가서 “야, 작업해”라고 깡패 같은 사람들 용역이 와서 전부 다 TV고 냉장고고 가구고 몽땅 다 강제로 가져가는 거예요. “아저씨는 가만히 있고. 당신은 벌써 한 달 전에 나갔어야 해. 어디 알박기하면서 고집부려. 보상금 받았으면 나가”라고 강제 철거반 동원해서 다 뜯어가는 거예요.
뜯어가는 거기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고 아름다운 나의 기억이 있어요. 뜯어갈 때. 십팔 세 순이도 거기 있고, 홍시 따먹던 그 나무도 있고, 진리를 알기 위해 테스형 찾았던 그런 것도 있고, 그런 테스형이고 뭐고 다 뜯어가는 거예요. 몽땅 다. 도대체 나라는 것이 언제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게,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있음에서 계속 있음으로 버티게 되면 그 있음은 어떤 잘못된 그라운드, 잘못된 토대 바탕 위에 있음이기 때문에 그 있음이 저주받은 있음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옥 가도록 방치하지 않는 겁니다. 그쪽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일단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이게 지금 구약 이스라엘 언약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예언되어 있어요. 이사야 7장에 보게 되면 14절에 크리스마스 때 하는 이야기 나오죠.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징조가 뭐냐 하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세상에 아들이 얼마나 많아요. 정말 많거든요.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스물다섯 먹은 새댁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안고 8층에서 투신자살했어요. 산후우울증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이는 죽고 엄마는 중태예요. 아마 죽게 될 거예요. 자기가 아이를 안고 같이 8층에서 뛰어내린 거예요. 2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면 다시 살 마음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8층은 아예 죽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아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그게 뭐냐 하면 그런 생각, 자살의 생각이 뭐냐 하면 이건 없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있음에서 나온 거예요. 그 있음은 자기 아버지가 그 새댁을 낳았을 것 아니에요. 자기 아버지는 자기 할아버지가 낳았을 것이고. 모든 있음과 있음의 사슬 고리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그런 있음은 얼마나 많아요. 많지요.
굉장히 많아요. 많은데 이걸 한꺼번에 있음으로 놔두고 이걸 없음으로 바꾸는 이유가 처녀가 아기를 낳는 거예요. 처녀가. 이 세상에 처녀가 아기 낳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아무도 없습니다. 이태도 해당 안 돼요. 처녀가 아기 낳는 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부모로부터 아이가 나오지 처녀로부터 태어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있음을 부정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처녀가 아기 낳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걸 욥은 모르고 이스라엘 언약사 속에 하나님의 예언 속에 이게 들어가 있는 거예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이 말은 이것은 이 세상에 진짜 천국에 있을 사람은 현재 인간들은 일단 아니에요. 인간들은 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안 돼요.`그러면 처녀가 아기를 낳는데 그 아기가 하나님일 경우에만 지상에 이 땅에 있음말고 있음이라는 그 분류 말고 따로 새로 나온 존재하는 있음,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보면 15절에 보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이라고 되어있어요.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분간하느냐 하면 뱀의 후손이 발꿈치를 물어뜯는 것을 보고 여자의 후손인 걸 알아요. 여자의 후손이 나타났을 때 이 여자의 후손과 그리고 기존 모든 인간의 있음, 존재, 여기 사는 거와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것은 마태복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냐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는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함께 계신 백성의 출현, 그런 사람의 출현이죠. 하나님이 함께 있음. 그러니까 뱀의 후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최종적으로 모든 의미가 어디서 스톱 되느냐 하면 절대적 나로 모든 의미가 스톱이 되어요.
뭘 해도 나 잘되는 것으로 끝이에요. 나 잘되는 것에서 넘어서 버리면 내가 용납을 안 해요. 모든 것이 나 잘되는 것에서 끝나버려요. 왜냐 하면 나의 있음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나만 잘되는 식으로 내가 여기 있도록 악마가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하면 “왜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라고 물으면 “하나님을 믿으면 네가 잘 된다”라는 이런 거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면 네가 잘되고 네 가정이 잘된다고 하면 “그러면 믿지”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까지라도 마감이 어디서 스톱 되고 최종 지점이 되느냐 하면 내가 잘되면 내가 뭐든 하지 이겁니다. 그래서 8층에서 뛰어내린 우울증 걸린 여자는, 산후우울증은 조선 시대에는 없는 병인데, 그냥 자살이죠. 그 자살한 새댁은 왜 뛰어내렸느냐 하면 이렇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내가 없어지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의미가 마지막 의미가 나로 종결되는 겁니다.
배후에는 악마가 있죠. 악마는 항상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고 너에게 이익되는 것이 뭐냐? 네가 제대로 챙겼느냐?”라고 묻죠. 사람들은 그것은 안 들킨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기도해보면 오늘 욥기에 나오는 기도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내가 기도해도 소용없고, 응답 없고, 내가 기도하는 것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하는구나’라는 이런 기도는 아예 기도 응답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귀가 나를 힘들게 하려고 마귀가 새치기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선지자입니다. 욥은 지금 해답을 모르는 상태에 있고 지금 이스라엘은 해답을 알고 있어요. 처녀가 아기를 낳을 것인데 그 아기는 지금의 나처럼 모든 것이 나의 이익, 내 좋은 것으로 끝, 나만 잘되면 되고 나만 천국 가면 된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 함께 사는 거예요. 함께 사는 거.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유명한 처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처소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지 마. 아직 네가 올 때가 아니야”라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신이 목숨을 바치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대단한 일이거든요. 내가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종적인 장렬한 일이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실패라는 거에요. 네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너의 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꼭 찾아갈게. 내가 처소 마련되면 네가 오지 말라고 해도 갈게”라고 단언을 하십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다시 올게.
그러면 베드로의 질문은 이거예요. “왜 지금은 안됩니까? 왜 지금은 못 따라갑니까?”라고. “네 존재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가게 되면 이건 자기 이름 걸고 따라가는 거예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늘 본문 보세요. 하나님이 원수처럼 보시잖아요.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베드로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지금 모르는 거예요. 그냥 다가가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상주 위에 문경에 공갈못 이라는 것이 있어요. 못은 못인데 물이 있는 둥 없는 둥 공갈빵처럼 그렇게 못이 있는데 그 근처에 가기 전 마을에 할머니들이 모여서 70~80 넘은 할머니들이 모여서 화투를 쳤는데 화투 칠 때 화투 치면서 너와 내가 한 자리에 친하게 같이 있을 관계라고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화투를 칠 때.
그런데 마을회관에서 화투를 치면서 어떤 할머니가 좀 욕심을 부려서 좀 속였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다른 할머니가 요구르트에다가 농약을 탔습니다. 옛날에 농약 광고문구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 농약은 잘 죽습니다. 사람도 죽습니다’ 아무튼 농약을 요구르트에 타서 사람 여러 명 죽이고 그 할머니는 끝까지 자기가 안 죽였다고 우기는데.
교회 나와서 주님께 찬양하면 주님과 한자리에 같이 있다고 같은 처소가 마련되었다고 여기는 겁니다. 뭔가 처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주님 앞에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흔쾌히 나의 성의와 기도와 모든 것을 받아 줄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시편 110편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인간은 이미 원수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처리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수라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원수 된다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지옥 가는 것이 이익이 안 되기 때문에 자기는 지옥 가기 싫어해요.
하나님의 원수는 마땅히 지옥 가야 하는데 본인이 지옥 안가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누가 처리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주께서 주를 보내서 주께서 사람이 모습으로 오셔서 이 하나님의 원수 됨을 드러내야 해요. 베드로는 이것도 모르고 예수님 따라가게 되면 주님과 천국에 같이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어디로 돌려보내냐 하면 “저리 가. 너는 하나님의 원수 자리에 합류해. 거기서 기어 나오지 말고. 다른 사람은 원수고 나는 원수 아니라고 하지 말고 같이 하나님의 원수 자리에 돌아 가 있어. 너도 똑같은 인간이야. 너는 하나님의 원수 악마의 힘을 네가 이겨 낼 수가 없어”
이겨 낼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나의 죽음보다 더 강렬한 힘이 인간에게는 없는 겁니다. 나의 죽음을 이길 힘이 나에게는 없는 겁니다. 그 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걸 사도행전에서 복음으로 전한 거예요. 있다. 있다. 죽음보다 더 강렬한 힘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냈다는 이야기를 지금 사도행전에서 설교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죽어도 괜찮아. 코로나로 죽어도 괜찮아. 좀 아프기는 하겠지만 괜찮아. 죽자” 죽어도 좋아서 말한 내용과 바꿔버리자. 그런데 그럴 때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예수 믿지 말고 나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죽자. 나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죽는 것은 마땅하다. 이 있음이 있음이 될 때는 마땅하다. 이것이 마땅 자리예요.
우리 원래 있었던 마땅 자리예요. 우리의 기본 환경입니다. 욥은 지금 그 자리에, 그 근처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예요. 죽으면 안 되는데. 욥은 지금 복음을 모르니까 아직까지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모르기 때문에 그냥 거기서 안타까워서 벌벌 떨면서 친구에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지금 기도 응답 없는 것은 이건 기도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응답이 없게 했고, 의도적으로 내 가는 길을 막았고, 의도적으로 나를 흑암의 어두움에 두었으며, 의도적으로 내가 자랑거리로 갖고있는 모든 영광을 다 빼앗아갔다. 자식 열 명 잘 키웠죠, 부자였지요, 그런 나를 천하 없는 환자로 만들어 버렸어요.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내가 쌓은 모든 것을 헐어버리고 그러면서도 욥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왜 이런 경험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어요. 그게 있음의 이유가 있거든요. 있다는 거.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이좋게 지내다가 사이좋게 천국 가거든요. 왜 제자들은 버리고 왜 제자들은 홀로 죽음의 길을 갔느냐. 심지어 베드로가 따라오겠다고 했는데도 그것도 마다하고 홀로 가셨습니까.
그 있음을 떼어내기 위해서예요. 떼어내고 처녀가 잉태해야 여자의 후손에 소속되는 겁니다. 이걸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봤자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거예요. 여러분, 죽음보다 더 큰 힘, 더 센 힘이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작용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산파 이름이 나와 있는데 거기에 보면 15절에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라고 되어있어요.
법입니다. 국법이에요. 국법을 어기면 죽지요. 교회 폐쇄당합니다. 그런데 산파가 말을 안 들어요. 이거 어기면 죽잖아요. 그러나 죽음보다 더 센 힘이 죽어도 상관없는 힘이 산파들 속에 역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21절에 보면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라고 짧은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건 뭐 이 땅에서 나라는 있음이 어떤 이익이냐 손해냐를 자기는 안 따지고 싶다는 거예요. 이 산파는. 이게 뭐냐. 마땅한 우리의 토대, 하나님의 백성의 마땅한 토대가 그렇게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아침에 이야기했죠. 하나님의 계심은 힘으로 자기 증명을 한다고요. 살아있는 힘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증명한다고요. 같이 화투 친다고 같은 편 아닙니다. 언제 화투에서 돈 잃었다고 요구르트에 뭐 집어넣을지 모르죠.
그리고 모세 어머니 요게뱃도 마찬가지로 말 안 듣지요. 열왕기상 18장 3절에 보면 거기에 오바댜라는 왕의 신하가 있는데 이 사람은 선지자를 전부 다 멸하라고 했는데 여기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완전히 북한 김일성체제 속에서 주의 종을 숨겨주는 현상 같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죽음보다 더 센 거예요. 그런 힘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미 구약 때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계심입니다. 장차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있으니 그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법이 아닌 이상은 이건 세상 법은 마귀로부터 나온 법이기 때문에 이건 어기라고 준 법으로 이해를 한 거예요. 어기라고.
왜냐 하면 어기라고 준 법이 뭐냐 하면 세상 탓하지 말고 내가 살아있는 있음이 이참에 나보고 죽으라고 주신 법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법을 어기는 거예요. ‘고맙다. 내가 어겨줄게. 또 3단계? 오케이. 내가 어겨줄게’라고 아주 반갑듯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이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던 것이 예수님의 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다른 존재,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부모가 나를 만들어 주지 않은 나, 그 나에 해당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 영생이거든요. 생명나무 아닙니까. 선악과를 이기는 영생에서 나오는 효과가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 법을 거역하는 이 복음에 대해서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세상 법에 놀아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감사하면서 기뻐한 거예요. 세상 법에. 그러니까 세상 법을 자꾸 듣고 싶은 거예요. 앞으로는 4명이 한 자리에 못 앉거든요. 이 말은 아빠, 엄마 있고 아이 세 명 있으면 탁자를 2개 준비해서 4명은 식탁에 앉고 막내는 따로 앉아서 식사하면서 서로 모르는 척해야 해요. 가정 내에서. 왜냐 하면 가정 내에서 다섯 명 이상 예배를 못 드리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막내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 열어놓고 찬송하고 나머지 네 명은 밖에서 찬송해야 해요. 재밌잖아요. 인민군들이 내가 벗어놓은 옷에다가 총질할 때 우리는 굉장히 재미있잖아요. ‘천국의 틈’이라는 책 뒷면에 나오는 글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어요. 안 그래도 죽으려고 환장했는데 죽을 자리 마련해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사도행전 18장 10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주께서는 자기가 택한 백성이 누구인지를 다 알아요. 절대로 이걸 빠트리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준 자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게임을 즐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게임이 죽음보다 더 센 힘으로써 작용하는 그 게임에 내가 말려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내 기도가 응답 되지 않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쪽쪽 쪽 날 때 주님의 판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을 우리는 마음껏 즐거워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아는 사람의 기도 상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즐기라고 준 상황을 우리는 짜증 내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느냐고 얼마나 화를 냈는지요. 그 화가 처녀의 몸에서 나신 분을 모독하는 일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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