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레위기 26:17 / 율법의 결백 / 200904 본문
녹취:한윤범
20200904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결백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레위기 26장 17절,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그렇게 돼있지요. 그 조건이, “네가 모든 명령(법도)을 준행하지 아니하면” 이 명령을 내리시는 장소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을 몇 가지 알아야 하지만 이것부터 먼저 알아야 해요.
약속의 땅은 막힌 땅이다. 약속의 땅은 사방이 막힌 땅이에요. 그 증거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나올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 사람과 차단시켜놨습니다. 약속의 땅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들어왔던 사람이 나갈 수도 없어요. 그래서 약속의 땅은 인간이 생각도 못한 상상도 못한 땅입니다.
보통 땅은 출입이 자유롭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함부로 나갔다가는 큰 화가 일어나지요. 약속의 땅이 막혀있는 땅이라면 거기에 사는 백성은 약속의 백성이 되겠지요. 약속의 백성은 막혀있는 인간들이 되는 겁니다. 땅만 막혀있는 땅이 아니고 백성들도 특수한 백성들이에요.
집에서 생닭을 마트에서 사는 것과 비비큐에서 닭 살 때 모양새가 다르지요. 비비큐는 생닭에다 무슨 짓을 했어. 뭘 입혔어요. 조건이 붙어있어요. 비비큐 치킨 집만의 노하우에 닭 위에 덮여있단 말이죠. 생닭이 아니고 집에서 아무리해도 그 맛이 나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른 민족과 달라서 주님께서 무슨 짓을 하셔서 손을 댔어요. 유월절 어린양부터 해서 언약으로 요단 강 건너올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 하나님께서 꾸준히 뿌려준 게 있어요. 그 뿌려준 조건으로 인하여 이 백성은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드러내야 될 책무가 있는 겁니다. 자기 위주가 아니고 율법 위주에요. 본인이 살아 있다는 위주가 아니고 율법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백성이 막혀있는데 이 막혀있다는 것을 초반부터 제가 어렵게 가면 이렇습니다. 막혀있다는 인간은, 스스로 본인의 체면이나 위신이나 명예라든지 그런 것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 약속의 백성은 있는 그대로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이 세상에 있을 때 진짜 있다는 게 어떤 식으로 있는지를 유일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의 이스라엘이에요.
보통은 개인적인 명예나 체면, 잘 먹고 잘 사는 행복 위주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도대체 이 세상은 무엇이냐, 이 세상 자체가 무엇이냐, 어떻게 있느냐? 그걸 신약에서는 진리라 하는데 진리를 위해서 있는 사람들이에요. 요즘 인간들이야 자기가 잘 먹고 잘 사는 걸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진리는 따로 있고 그 진리를 진리 되게 드러내야 될 인간이지만 인간들은 자기 개인적인 사적인 행복과 자기 위신과 체면에 몰두하다 보니까 자기 자신만 붙들고 있을 뿐이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어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진리를 알려드릴 테니까 모이시겠습니까?” “아니요.” 이러지요. “좋은 투자처 있는데 투자하게 되면 은행이자 열 배인데 오시겠습니까?” “예.”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요.
그래서 이걸 좀 더 난해하게 이야기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존에 이스라엘 백성의 특수성, 비비큐 치킨 집 이야기했듯이 특수한 조건이 여기에 붙습니다.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이건 다른 색깔로 쓰겠어요. 꿈에서 시작된 백성, 창세기 37장. 창세기 37장에 보면 거기 누가 나오느냐 하면 요셉이 나오지요. 그것도 어른 요셉이 아니고 어린 요셉이에요.
어린 요셉이 꿈을 꿉니다. 자, 요셉의 꿈이 무엇과 차이 나느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해야 될 것을 본인이 선택해요. 본인이 결정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 그림들, 그리고 그 세계를 여러분들의 선택했습니까, 아니면 꿈꿈대로 꿀 수밖에 없는 겁니까? 어느 쪽이에요? 꿈꿀 수밖에 없지요. 그걸 주체가 부재, 주체가 없는 상태에서 등장하는 세계, 결정해야 될 내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부여되는 것, 주어지는 세계. 이게 꿈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꿈에 의해서 요셉이 선택당합니다. 어린애가 뭘 알겠어요. 지가 꿈을 이런 식으로 꿀래요? 이런 것 없지요. 꿈에 의해서 선택 당했기 때문에 요셉의 나머지 인생도 꿈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바로 그 꿈에 의해서 조성된 가족이 야곱의 가정이에요. 그 야곱의 가족을 야곱약속대로, 또는 야곱언약의 결과로 생겨난 가족이 야곱언약입니다.
야곱언약으로 생겨진 야곱가족은 꿈에 의해서 조성된 가족이에요. 본인이 선택한 가족이 아닙니다. 그 야곱의 가족에 아들이 열두 명이 있었고, 그 열두 명이 새끼를 까서 그러니까 자식을 낳는데 그 열두 지파가 애굽 나라를 가득 채웠다면, 애굽 나라에서 번성했다면 그것은 애굽 나라 따로 있고 꿈의 나라가 따로 있어서 같이 섞여 있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한쪽은 본인이 선택하는 그러니까 내가 선택하는 삶이죠. 그게 애굽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의 자기 일을 뭘 할지 어떻게 할지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이거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내 위신과 체면과 내 행복과 나의 건강과 수명연장, 그리고 내 가족, 그런 걸 생각하겠지요. 꿈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면 내 위신 같은 체면, 명예, 이것이 우선된단 말이죠.
그런데 꿈에 의해서 선택당한 민족은 주도권이 어디 있느냐 하면 꿈에 있거든요. 꿈이 내부적으로 바라보는 그 목적에 준해서 야곱의 가족과 그 후손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특이하죠. 다시 복습합시다. 자, 꿈의 가족의 특징이 꿈이 없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뭐라고 했습니까? 본인이 주체적으로 선택 안 하고 선택당한다고 했지요. 주체가 부재, 없는 상태에서 선택당하는 거죠.
본인이 선택당하지 않고 꿈에 의해서 선택당한다면 거기서 조성된 그 세계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꿈꾸는 세계에요. 그 꿈꾸는 세계에서 애초부터 꿈에 의해서 선택 당했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 의사결정 같은 것은 빠지겠지요. 꿈의 세계에서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걸 쉽게 말해서 이렇게 됩니다. 파란 걸로 쓸게요. 누군가를 위한 나.
‘누군가를 위한 나’ 이 말은 같은 말로 나를 위한 인생 아님. 나를 위한 인생은 소용없음, 또는 하나님께서 용납 안 해주심.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군가를 위한 나.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 26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율법을 주신 것은 이런 뜻이에요. 너희가 나를 찾아봐라. 내가 진리이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나를 위한 인생은 소용없어요. 그거는 내가 선택하기 때문에 인생 없습니다. 내가 부재해야 되는데 내가 존재하지 않아야 되는데 꿈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면 고로 나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를 있게 한 그 꿈의 세계의 주인공, 그걸 저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누군가에요. 그 누군가를 위한 인생이 돼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명예, 나의 체면, 나의 위신, 나의 행복, 이런 것은 우리에게 용납이 됩니까? 용납이 되질 않는 거예요. 그러한 누군가를 위한 사람을 집결시켜놓고 땅을 봉쇄시켜버린 겁니다. 막혀있는 땅이 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빼도 박도 못해요. 아무나 올 수 없고 아무나 빠져나갈 수 없어요. 토관처럼 갇혀있는 거예요. 봉쇄된 거예요. 막혀있는 땅이에요, 이 약속의 땅이.
어디에 막혀있냐고 여러분 물으신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돼있어요. 어디에 막혀있냐 하면 바로 율법에 막혀있어요. 사방팔방 율법에 막혀있는 그러한 땅, 약속의 땅입니다. 율법에 막혀있는 땅을 설명하려면 율법이라는 여러분이 늘 쓰는 단어 대신 다른 단어를 집어넣으면 좋겠지요. 율법이라는 이름의 기호에 막혀있는 땅, 그런 세계가 바로 약속의 땅이에요.
왜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기호라는 말을 제가 쓰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본인들이 선택하는 모든 선택을 물질화시켜요. 자기 자신을 물질화시킨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상화시킨다는 말도 되고요. 인간은 나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의 추상적인 절대기호처럼 사용해요. 기호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남에게 나타낼 때 나 이런 사람이라고 이걸 아주 함축해서 응축해서 보여주는 게 기호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 제가 기호란 말을 쓰냐 하면 기호란 그 안에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설교했습니다. 다메섹, 아람나라의 수도 다메섹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죄는 무의미한 것이 의미를 부여하는 그것이 죄라고 했어요. 의미가 없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거예요. 인간이 물질화시킨다는 것은 자기 가족, 자기 아파트, 차나 이런 것, 뭔가 사물을 끌어 모으고 소유화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왜 그걸 의미 있게 보고 그게 왜 죄인 줄 모르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인간 본인이 존재하고 본인과 의미 있게 연관돼있는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란 기호와 관련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게 되면 여기 레위기 26장 16절 봅시다.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찾았습니까, 16절. 여러분 보셨지요. 여기에 ‘눈’이라는 것은 물질이죠. 열병, 재앙, 폐병. 다 물질과 관련돼있지요. 이 물질이 누구 말 듣습니까? 우리 말 듣습니까, 율법에 준해서 폐병이나 열병, 코로나가 오는 거예요? 누구 말 들어요? 일단 우리 인간의 말 안 듣지요. 폐병 달라고 누가 기도하겠어요? 우리 말 안 듣지요.
나라는 것이 폐병 없기를 바라는 상태, 건강한 몸이니까 제 표현대로 하면 그건 물체와 물질이죠. 우리는 건강한 육신, 육체란 물질을 원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 때문에 뭐로 바꿉니까? 폐병으로 바꾸죠. 눈이 어두워지는 거예요. 눈이 어둠침침하고. 눈이 침침하고 어두워진다. 우리는 아니 되옵니다. 그래선 안 돼요. 내가 사는 데 불편하다 하잖아요. 그게 꿈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그런 거예요.
자, 이야기 다시 합니다. 꿈의 세계의 특징은 내 존재하지 않는 내가 부재 상태에서 꿈이 먼저 나타나서 나를 선택했을 때, 선택하게 되면 나를 위한 인생은 없고 뭘 위한 인생이다? 누군가를 위한 몸이어야 되고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시작했느냐 하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것은 너희들이 나를 한 번 찾아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주인 되시는 분을 찾아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뭘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달리 말해서 율법과 연관된 물질을 통해서 찾아보란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괭이나 호미로 뭘 하겠어요? 땅에다 손질해서 거기다 농사라는 걸 짓겠지요. 농사라는 걸 짓는 그 행위가 뭐냐 하면, 진정 폐쇄된 이 땅에 누군가가 계시다는 것을 찾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분이 우리에게 율법을 줬고 율법대로 살게 되면 농사를 지어도 칠 배나 30배, 백배나 농사가 잘 되게 된다는 이건 무슨 세계냐 하면 이 세계가 율법의 세계, 율법이란 기호의 세계, 기호는 의미를 낳으니까 율법이 의미 있게 작동하고 작용하는 작열하는 그런 세계, 그것이 요셉에게 준 꿈의 세계, 약속의 세계, 그 세계에 우리가 들어왔고 우리는 그 꿈의 세계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여기 17절에 보니까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그 다음에 19절, 20절을 보게 되면, 재앙을 내리고,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찌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그 다음에 25절에 보면,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찌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라는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아까 조건이 뭐라 했습니까? 그것은 14절에 보면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너희가 내 말을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조건 하에 이런 파탄 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러면 이것은 갇혀있는 세계, 폐쇄된 세계, 닫혀있는 이 세계에서 그들은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예요. 힘들면 도망치면 되는데 도망칠 수 없다 했지요. 왜 들어올 때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인간이 재현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애굽 군대와 구별시켰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라는 신체에 대해서 몸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중요한 몸이라는 것을 자각했어야 돼요. 그들이 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닌 걸 그들이 알아야 돼요. 보통 밥 먹고 살고 자기 위신이나 찾는 그 일에 종사하는 게 아니에요.
기존에 약속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세계는 없는 거야. 어딜 구라를 쳐. 그런 세계는 없어. 그런 세계는 없다고 하는 그 세계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통해서 있음을 증명하는 중차대한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겁니다. 얻어터져 가면서, 굶어 가면서, 쫓겨 가면서, 염병 들어가면서, 농사졌는데 소출이 없어가면서, 자식 열 명 낳았는데 다섯 명 죽어가는 그런 경우를 통해서 뭘 증거 한다고요? 이 땅에 누군가가 계심을 증명하는 거예요.
이건 뭐 내 위신이나 체면을 살리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자기 위신, 체면 누가 안 차리겠어요. 다 챙기겠지요. 하지만 강제성 있는 폭력을 겪을 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서게 돼있어요. 17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가 강제성 있는 폭력입니다. 강제성 있는 폭력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율법이란 객관적 결백이다. 율법은 아무 죄가 없다. 결백하다. 객관적으로. 율법에 의해서 그들이 농사가 안 되고, 율법에 의해서 그들에 전염병이 오고 코로나 오고, 율법에 의해서 그 가족들이 죽고 개인적으로 행복과 체면과 위신을 차리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주께선 전혀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그걸 아주 묵사발 격파해버리고 파기시키고 하신 말씀이, 율법은 객관적으로 결백하다. 아무 죄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은 뭡니까? 율법의 객관적 결백성을 자기 인생을 통해서 몸을 통해서 증명하죠.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17절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여기 28절에 보면,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이렇게 돼있지요.
여러분들이 산당과 태양, 산당에서 빌고 태양의 주상을 섬기는 게 뭐가 그렇게 나쁜 일입니까?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의 민족, 꿈의 백성이라 했지요. 꿈의 특징은 내가 꿈을 꾼다고 해서 꾸어지는 게 아니고 꿈은 일방적으로 꿈 세계를 우리에게 줘버려요. 밤중에. 그러면 우리는 꿈의 세계에 대해서 선택당한 겁니다. 이거는 내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세계를 우리에게 부여하신 거예요.
그러면 꿈의 세계가 유지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존재하지 말고 뭐 해야 돼요? 부재해야 돼요.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때 꿈은 꿈대로 고상하게 남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처벌을 통해서, 아까 처벌을 뭐라 했습니까? 강제적 폭력이라 했지요. 폭력을 행사해서 우리의 사적인 공간, 사적인 생각을 완전히 격파하고 박살내가 작살낼 때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 겁니까?
아까 강의대로 하면 우리가 이렇게 공격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의 공격은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물질성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 물질성 안에는 뭐가 들어있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사적으로 있어야 될 그 의미, 그리고 그 가치, 내가 이 땅에 있어야 될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나의 정당함, 나의 이유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음에 이런 인생 살겠다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바로 부당한 전제가 되는 겁니다. 정당하지 않은 전제, 우리가 삶의 전제, 내가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이 부당한 전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 살라고 약속의 땅에 보내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놓쳤다는 것은 뭘 놓쳤다는 거예요? 시작을 나로부터 시작하면 안 된다는 그 점을 놓친 거예요. 세상에 내가 살아가면서 나는 나를 위한 인생이어야 한다는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 용납이 안 되는 겁니까? 꿈의 세계에선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약속의 세계에선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주님께선 우릴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나의 것도 없어지잖아요. 그걸 원하는 거예요. 나의 것이라는 것은 내가 공들여서 만들어낸 물질들, 피아노고 의자고 모든 내 육신도 건강한 육신. 필라테스 해서 근육 만든 것 있잖아요. 필라테스 대회도 있지요. 포즈 취하고 폼 잡고 사진 찍은 것 있잖아요. 모든 근육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고 굶어야 되고 심지어 대회 앞두고는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말아야 근육에 탄력성이 광이 빛이 나는 거예요. 그게 물질성이에요.
그 물질성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나의 존재하는 의미와 직결되는 겁니다. 나 저것 때문에 살았어. 내 인생 사는 보람은 저거였어. 저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 살아왔어야 했었어. 이게 주님이 생각한 꿈의 세계입니까? 그건 애굽이죠. 그건 애굽의 세계에요. 이런 인간의 물질성은, 무엇 때문에 인간이 물질성을 추구하느냐, 라고 제가 강의 초반에 이야기했는데……
왜 인간은 물질성을 추구한다 했습니까? 물질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방금 이야기했어요.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들어있어요. 나의 성과, 평생 고생한 성과에요. 세상에 나온 모든 노래를 보세요.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그런 희망을 주는 노래들 아닙니까, 모든 노래가. <걱정말아요 그대> 그런 노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모든 물질은 무엇과 관련돼있다고 했습니까? 자꾸 복습하는데 할 수 없어요. 자꾸 잊어버리니까. 무엇과 관련돼있다고 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율법에 의해서 됐다 했지요. 염병이고 폐병이고 건강이고 우리의 몸이고 신체고 머리카락 하나 우리의 발톱 모든 물질은 무엇과 연관돼있어요? 율법과 관련돼있어요.
율법을 기호라 한다면 기호 안에 의미가 담겨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율법이 품고 있는 그 의미와 연결돼있는데 세상 사람들, 인간들은 그 율법의 의미를 뭐로 막았습니까? 나 여기 존재한다는 것으로 막아서버린 거예요. 애들은 내 자식이라는 거예요.
어떤 서른일곱 살 아주머니는 애가 여섯 명이에요. 그런데 이혼했어요. 아이들 자기가 다 키우겠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많이 낳았습니까? 낳을 때마다 예쁘다는 거예요. 이제는 남편과 이혼했기 때문에 낳고 싶어도 못 낳아요. 몰라, 새 시집가면 또 낳을 수도 있을 거예요. 여섯인데 일곱 명, 여덟 명. 특히 그 여성이 필라테스 강산데 그 사람 어깨에 문신이 있어요. 여섯 아이 이름을 문신으로 다 적어놨어요. 이건 대제사장 같아. 여섯 명 내가 책임진다는 거예요. 그게 kbs <인간극장>에 나왔던 거예요.
그걸 보고 여러분 이상한 생각 안 들어요? 이상한 생각이 안 들지요. 왜? 나도 그렇게 살아가니까. 내 주변에 끌어 모은 모든 물질, 아파트부터 해서 차, 모든 물질은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끌어 모은 거예요. 다시 묻겠습니다. 내가 산당을 섬기든 내가 태양주상을 섬기든 내가 섬기겠다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거죠.
내가 선택했다는 게 문제에요. 나는 부재해야 되는데 나는 없어야 되는데 내가 아침에 눈떠서 꾸미고 낮이고 밤이고 스물네 시간 나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문제에요. 나를 잊지 못해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부활한 사람만 모여 살게 돼있어요. 일단 죽고 다시 산 사람만 모인 곳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왜? 유월절 어린양이 그거니까.
주님의 율법의 기호적으로 연결된 물질, 모든 산에 있는 나무나 들이나 모든 것이 주님의 율법이 살아 있음을, 네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율법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모든 게 주어졌는데 인간은 거기서 헤헤거리며 새치기해서 나도 살아 있지롱, 하면서 지가 살아 있는 채로 가로막은 거예요. 중간에 새치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 26장 17절부터 쭉 보게 되면 우리가 30절까지 봤지요. 무슨 내용이냐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거예요.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겠다는 죽여 버리겠다는 거예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죽이는 것에 대해서 그것도 뭐로 죽이느냐에 따라서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율법으로 약속으로 죽는 자만 약속으로 사는 사람이에요.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 뉴스 보니까 어느 기도원에서 사람 병 고친다고 때렸는데 뭐로 때렸느냐 하면 십자가로 때려서 사람 죽여 버렸어요. 뾰족한 십자가로 패버렸어요. 이건 십자가를 위한 기적이 아니고 그 환자가, 나는 안 아파야 됩니다. 제발 낫게 해주세요, 하는 그 목적으로 한 십자가가 수단으로 동원된 게 문제가 된 거예요. “나는 하나님 덕분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그건 십자가로 안 죽어도 늙어죽게 돼있어요. 맞아 죽든지. 미리 앞당겨서 죽은 거죠.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필히 살아 있어야 돼. 그게 나다운 거야.” 그게 바로 율법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으면 날마다 우리는 나를 위한 선택만 나오기 때문에.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 이것만 나와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나는 이 땅에 하나의 기호가 됩니다.
기호란 말을 제가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요. 율법이 기호지요. 말로 언어로 돼있으니까 기호 맞지요. 그렇다면 율법과 상대가 되려면 우리 몸도 기호가 돼야 돼요. 우리 몸이 응축하게 되면 하나의 기호가 되게 되면 이 기호는 어디에 내다 파느냐 하면 시장에 나갑니다. 내가 나를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는다 이 말입니다.
애들 교육시킬 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네가 그런 식으로 공부해선 아무도 널 안 찾는다. 그러잖아요. 여자 애가 조신해야지. 여자 애가 함부로 나대면 누가 널 시집오라 하겠느냐? 이 말이 뭔 뜻입니까? 신부감 시장에 네가 상품가치가 제대로 됐는지 스스로 파악해보라고 엄마가 딸에게 그렇게 충고하는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죠?
우리가 천국 가겠다고 할 때 남 천국 가는 게 그렇게 관심 있어요. 나 천국 가는데 관심 있어요? 나 천국 가죠. 그럼 천국 가려면 나를 뭐로 시켜야 돼요? 이 나라는 기호를 천국시장에 주께서 팔릴 만큼 괜찮은 상품으로 만들어내야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수요일 설교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구원 없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생각한 구원, 없습니다. 인간이 선택한 구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와 통해요. 출애굽과 통하고 요셉의 꿈의 세계와 같은 맥락이에요. 네가 구원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은 하나님께선 우상숭배로 여겨서 받지를 않아요.
주님께서는 내 몸에서 기호되는 이것을 율법에서 기호에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이 몸을 죽여 버려야 됩니다. 이 땅에서. 율법으로 죽이고 율법으로 살려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죽을 때는 내 몸이 죽지만 살려냄을 당할 때는 누구의 몸이 되느냐 하면 그 누군가의 몸이 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의 주인님과 관련돼있어요.
레위기 25장 볼까요. 55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호와의 품꾼의 입장에서 약속의 땅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땅에 사는 한 본인이 품꾼이 주인공 됩니까, 안 됩니까? 주인 될 일은 없습니다. 주인이 아니에요.
언제 제가 춘천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 하나님께서 우릴 진멸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예속시킨다. 예속이란 말은 독단적으로 따로 내 것을 챙기는 법은 이젠 없다. 예속되었다, 종이 되었다, 누구에게 소속되었다, 속했다. 그분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것뿐이다. 주도권은 내게 전혀 없다. 그런 뜻이에요.
내가 주인공 노릇한 나를 죽여 버리고 다시 살릴 때는 예전처럼 내가 주인공 식으로 살려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코로나 후유증입니다. 완치됐다 했는데 후유증이 있어서 머리카락 빠지고 냄새도 못 맡고 속이 쓰리고 기억력 감퇴되고. 바이러스가 없다는데 그게 계속 남아있다는 말은 바이러스한테 예속된 거예요. 어떻게?
바이러스는 없는데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징후, 징조, 또는 징조보다도 다른 말로 하면 증상, 나에게 코로나19가 다녀갔습니다, 라고 증거하는 증인, 코로나 증인된 거예요. 평생토록.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둘 다 서른 쯤 됐어요. 생전 찾아오지 않던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반갑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주먹이 날아와서 죽으라고 막 패는 거예요. 맞는 친구가, 동창생아 맞더라도 때리는 이유나 알고 맞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실컷 때려놓고 하는 말이, “내가 초등학교 때 공부 일등 했잖아, 너 알지?” “알지. 공부 잘했지.” “그때 나 퇴학당한 것, 알지?” “알지.” “공부 잘해서 장차 의사 된다고 했던 내가 왜 퇴학당한 줄 아나?” 그제야 맞은 사람이, “미안해.” “공부 잘한 내가 과학실에 불 안 지른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불 질렀다고 네가 고자질해서 퇴학당했잖아. 그때부터 인생 끝나서 의사 될 수 있는 머리를 갖고 있으면서 지금은 깡패 됐다. 네가 내 인생 조져 놨다. 내 인생 책임져라.” 해서 팬 거예요.
그래서 때리면서 하는 말이, 그때 내가 과학실에 불 안 질렀는데 네가 왜 내가 과학실에 불 질렀다고 거짓말했느냐고 물어보니까, 얻어맞은 친구가 하는 말이, 그 순이 있잖아. 같은 반의 순이가 불 내놓고, 여기서 중요합니다. 코코낫 과자 여섯 개 주면서 내가 불 지른 건 입 다물고 공부 일등 하는 걔가 불 질렀다고 대신 이야기하라고 해서 어릴 때 철이 없어서 코코낫 과자 여섯 개 먹고 거짓말해서 네가 퇴학당하고 그 다음부터 너는 인생 종쳤다. 드디어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듣고 처음에는 때린 사람이 폭력적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했는데 가만 들어보니 인생 시작하는 초반기에 일이 잘 안 됐지요. 억울하잖아요. 때릴 만하고 맞을 만하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생각해보세요. 나는 공부 일등 한다. 공부 이런 식으로 하면 장차 의사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 누가 선택한 겁니까? 본인이 계속 기대했지요. 본인이 희망한 거잖아요.
그런데 코코낫 과자 여섯 개가 개입할 줄 상상했습니까? 몰랐지요. 그게 지금 와서 걔를 때릴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전 세계 인간 자체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선택당한 처지란 것을 알아야 돼요. 모든 인생이. 인생이 원인분석하고 내가 그때 그런 일만 안 했으면, 쓸데없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모든 인생의 갈 길은 내가 정하거나 내가 결정할 게 아니란 사실을 대표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거예요.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체면과 나의 위신과 나의 행복, 나의 건강, 그것 다 허구에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 진리에 관심 있어야 돼요. 내 체면, 위신, 명예, 행복, 내가 얼마나 돈을 버느냐? 그런데 관심두면 안 돼요. 도대체 이 세상은 뭐냐? 뭐긴 뭡니까? 누군가가 계시죠.
그럼 내 인생은 뭡니까? 나를 위한 인생은 없고 누군가가 있음을 그걸 찾아봐야 될 그러한 업무가 주어진 인생. 참. 그분을 알아야 나를 알아요. 그분부터 먼저 알아야 나를 안다고요. 사람이 아무리 살고 싶어도 늙어죽잖아요. 결국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는 순간 되게 되면 오래 살았으니까 넉넉하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구십까지 살아보세요. 아까워 죽어요. 오늘 오후에 죽는다는 사실이 나는 절통하고 분통해. 내가 백 살까지 살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오래 산다고 사람이 넉넉해질 줄 압니까?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위반함으로서 그들을 처단할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딱 한 가지입니다. 네가 땅에서 사는 자체가 기적인 줄 알아라. 살 수 없는 땅에 너는 지금 살아오고 있다. 살 수 없는 땅이에요. 내가 누구를 만나는 것도 기적이에요. 만날 수 없는 인간을 만나고 경험할 수 없는 걸 경험하고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도 기적이고. 나를 죽이는 율법 앞에서 죽이라고 말하는 것도 기적이에요.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런 말 할 것 아니냐.
우리는 물질입니다. 나라는 물질의 의미는 나한테 찾지 마세요. 율법에서 찾아야 됩니다. 율법에서 나를 죽이고 그 죽인 율법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그게 율법 자체가 하나의 기호로서 우리를 물질로 만든 거예요. 우리 자신이 물질의 작품이에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계속 살려낸다는 말은 우리 안에 율법이 작용한다는 뜻이고 율법이 작용하게 되면 율법은 우리에게 뭐를 날마다 주느냐 하면 새로움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여합니다. 그 새로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10분 쉬고 해야지요.
20200904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결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그 새로움이라는 것, 율법 자체가 스스로 율법을 꾸려나가요. 이렇게 보면 율법은 하나의 기계인데 어떤 기계냐 하면 죽여서 살리는 기계. 죽이는 것으로 벌벌 떨고 원망하지 마시고 죽이면서 살리는 기계. 그걸 압축해볼까요? 죽이는 자체가 사는 길,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모양새.
그러니까 미국의 넓은 영토에 트랙터 있잖아요. 뒤에 구멍으로 벼를 자르고 앞에서는 이미 탈곡되어 알곡이 막 나오잖아요. 인풋, 아웃풋이 돼야 된단 말이죠. 율법은 하나의 기계지요. 유월절 어린양이 그거잖아요. 어린양 죽이고 어린양 살리고. 그런데 그 어린양이라는 기호적 의미가 인물화 되게 되면 그게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할 때 어린양은 누구십니까? 첫째 시간에 보면 누군가죠.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이 뭐냐 하면, 바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어린양의 몸이 교회 된다고요.
코로나 사태 때문에 교회가 뭔지 사람들이 놓치고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몸입니다. 제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 그리스도 몸이죠. 그리스도 몸은 이미 죽음을 이긴 몸이에요. 이 말도 맞지요. 그리스도 몸은 이미 죽음을 이긴 몸이잖아요. 그러나 코로나 오게 되면 그리스도 몸, 교회가 보일 모양새는 뭡니까? 죽음을 이겼음을 죽이는 코로나를 통해서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교회의 할 일이란 말이죠.
레위기 26장 17절 봅시다.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여기 대적이 나오지요. 적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기 위해서 적을 보내죠. 자, 교회의 적이 뭐예요? 교회의 적이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 몸의 적이죠. 그리스도 몸은 어떤 몸이라 했습니까? 이미 죽음을 이겨서 등장한 몸이 그리스도 몸이잖아요.
그러면 그리스도 몸의 적은 뭐냐? 아직 죽음을 이기지 못한 모든 사고방식, 죽음을 겁내는 모든 사고방식, 이게 바로 그리스도 몸의 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19를 보낸 이유는 교회의 적이 뭐냐를 알려주라고 보내신 거예요. 그리스도 몸의 적이 뭐냐? 불교신자, 천주교? 불신자? 아니, 아니, 너야. 교회 다니는 네가 그리스도 몸의 적이 되는. 왜? 코로나19를 무서워하니까. 죽는 게 무서워하니까. 그리스도의 적을 적으로 노출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렇다면 제가 만약에 이런 이야기하면 미쳤다고 하겠지요. “당신은 미친 사람이오.”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예배당 건물 짓고 간판 걸어야 그걸 교회라고 아는 사람한테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런데 출애굽기 7장 끝에 22절 누가 읽어보세요.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지요. 결국 적이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하는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미쳤나, 돌았나, 어디서 구라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때 그게 뭡니까? 강퍅이 되겠지요. 자, 강퍅한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애굽이죠, 애굽.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 강퍅한 나라에서 죽음을 통과해서 나온 나라가 이스라엘이죠. 요즘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이죠.
십자가란 것은 강퍅한 인간들 속에서 나오신 분이 지신 십자가잖아요. 주님께서 우리 보고 이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율법으로 모든 인간은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동시에 율법에 죽임을 당한 우리가 뭐가 돼요? 부활의 백성이 되는 거죠.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레위기 27장 감사해야 돼요.
진리가 나를 죽이고, 나를 죽여야 진리에요. 나를 격파하고 박살내야 내가 나를 폭파시켜야 진리에요. 그러면 진리의 새로움은 내가 폭파돼야 되거든요. 그 진리의 새로움은 어디서 나오느냐? 갈라진 심연, 깊은 곳. 여러분들이 그런 것 생각해보세요. 밝게 빛나던 별이 마지막 최후를 맞이할 때 과학 잡지나 영화에 보면 이미지가 나와 있어요.
별이 자기 중력을 못 이겨서 압축하게 되면 별은 최후를 맞이하는데 지구만한 별이 깨지면 그게 블랙홀이 된데요. 천문학자의 주장에. 그게 깨지면서 밝게 빛나던 표면은 연탄재처럼 시커멓게 변하고, 전체가 연탄재처럼 시커먼데 그게 갈라지면서 잠시 잠간 뭐가 보이느냐 하면 뜨거운 불빛이 보이지요. 여러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폭발하는 거예요. 그 안에 있던 에너지 바깥으로 쏟아져 다 튀어나오지요.
그게 바로 새로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새로움이 아니고 순간순간 또 다시 말씀이 살아 있어서 역동성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그 입 다물라, 하고 터져 나오는 그 무엇, 그게 새로움이에요. “우리 애가 또 성적이 내려갔어요.” 그 입 다물라, 터져 나오는 거예요. 나의 위신과 체면과 나의 행복과 나의 건강이 저 인간 때문에 방해받는다고 할 때 그 입 다물라 할 때 터져 나오는 것.
너는 너를 위한 네가 아님을 새삼스럽게 막 박하사탕 깨무는 것처럼 확 속이 시원할 정도로 아, 내가 나를 위한 인생으로 태어난 게 아니잖아. 누군가를 위한 인생으로 태어났잖아. 왜 이래. 요새 내가 정신이 없어. 왜 자꾸 또 내가 희미한 안개 속을 헤매고 있지? 왜 나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이 늘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늘 우리를 뭉개버려야 돼요. 눌러버려야 된다고요. 우리의 모양새, 어떤 형태를 박살내버립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아까 시간에 한 것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장에 내놓는 하나의 기호로서 사용됩니다. 기호라 했는데 경제학에선 이걸 상품이라 합니다. 이 상품이 시장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려면 상품으로 이동한다, 이것보다도 하나의 기호로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설명하는데 더 함축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호는 뭐가 실려 있다고 했습니까? 여기 의미가 실려 있다고 했지요. 인간의 이미, 기호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기호는 의미 안의 내용과 플러스 형식, 이게 기호란 말이죠. ‘칼’ 같으면 (ㅋ, ㅏ, ㄹ) 이렇게 있잖아요. 내용은 뭐냐? 뭔가 써는 것, 찌르는 것을 칼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돼있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은 나의 의미는 기호화할 때 분명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의미가 ‘기호=상품’이라 한다면 인간은 상품을 어디에 내놓는다고 했습니까? 시장에 마켓에 내놓지요. 왜? 남이 나를 필요로 하기를 원하면서. 이혼했는데 애가 둘이다. 함부로 똥배 튀어나오고 하면 안 됩니다. 관리를 잘해야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우연히 재벌 3세와 재혼할 수 있어요. 애 둘이면 어때요. 나와 삽시다. 이렇게 팔자 고칠 수 있으니까 항상 자기 몸 가꾼단 말이죠. 왜냐하면 상품화되니까.
그런데 왜 상품이 의미냐 하면 여기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인간은 욕구가 담겨있어요. 누구의 욕구냐 하면 이게 허구의 욕구입니다. 이게 참 어려워요. 인간은 나라는 것을 허구적인 나를 상상해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물질화된 몸 밖에 없어요. 그 몸을 내가 거울 앞에 비춰보면서 뭘 가미시키느냐 하면 여기에 욕구가 가미된다고. 이렇게 이해가 잘 안 될 거예요.
어떤 여자가 자기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역시 참 황신혜는 잘 생겼지.” 자기가 황신혜래. 물론 자기 이름이 있지만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가 이상으로 삼는 어떤 이상적인 모델이 있잖아요. 모델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근사치를 갖고 있다고 그렇게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왜요? 그게 나의 욕구기 때문에 나의 욕망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이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갑자기 병원에 이틀간 누워있다고 한다면 식구들의 와서, “아이고, 아프지. 고생했지. 너 원하는 것 사줄게. 뭐 먹고 싶어?” 이럴 때 그때가 만약에 12월이라고 봅시다. “엄마, 나 수박 먹고 싶어.” 12월에 무슨 수박이 있습니까. 뭘 구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게 아니고 딸의 욕구를 물은 거예요. 네가 지금 뭘 먹고 싶으냐. 수박이 먹고 싶다. 엄마가 질문을 잘못한 거죠. 지금 이 계절에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하면 말이 너무 길어지잖아요. 그래서 뭐 먹고 싶으냐고 했는데 수박 먹고 싶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아픈 애한테 따집니다. 네가 왜 이 계절에 수박 먹고 싶다고 하느냐 할 때 애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게 언어로 설명이 안 돼요. 먹고 싶은 걸 먹고 싶다고 하는데 왜 먹고 싶은 걸 말도 못하느냐, 이렇게 나온다 이 말입니다. 네가 어딜 봐서 황신혜를 닮았느냐? 그건 그렇게 따지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닮았다고 하면 닮은 거지 왜 말이 많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허구고 실제로 있는 것은 자아가 아니고 제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자아가 아니고 욕망이 기호화된 거예요. 인간의 욕구가. 여러분들의 모든 생각을 보게 되면 남이 나를 보는 것과 내가 나를 보는 게 달라요. 하나님이 나를 뭐로 보는지 보라는 거예요. 이 성경은. 네가 너를 어떻게 보느냐는 때려치우고 지금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너를 어떻게 보느냐를 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우리의 착각이 아니고 우리의 관념이 아니고 허구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나이 팔십 넘은 할머니를 자기 자신을 아가씨로 느낄 때가, 내가 그 나이 안 돼서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많데요. 팔십은 넘었지만 아가씨를 흉내 내는 그런 버릇과 모양새를 그대로 살아 있다는 거예요. 팔십 넘어도 젊은 임영웅이라든지 영탁이 좋아하고 있단 말이죠. 왜, 좋아하면 안 돼요? 그걸 욕구라 해요.
제가 말한 것은 인간의 자아보다 뭐가 앞선단 말이에요? 인간의 욕구가 앞서요. 그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원리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인간아, 너는 이렇게 살라고 이야기한 적 없어요. 그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이야기고, 선악과 따먹은 후에는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흙에서 왔으니 어디로 간다? 흙으로 갈 수밖에 없다. 너는 저주받은 고통스러운 인생 살아야 돼. 끝. 그걸로 끝났지, 뭐. 뭘 새삼스럽게 명령을 해요.
주님께서 율법으로 명령하는 것은 명령대로 살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명령대로 못 살면 그때 벌칙내릴 게. 이게 아니고 벌칙은 율법 줄 때 같이 주어진다는 게 뭔 뜻이에요? 어느 인간도 현 상태로서는 율법을 못 지킨다는 것에 내가 손에 장을 지질 게. 그런 뜻이에요.
기어이 레위기 26장 말씀 그대로 너희들은 이방나라한테 쫓겨서 남의 나라 포로생활 할 것이고 약속의 땅에서 추방될 것이다.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나중에 레위기 다시 보란 말이죠. 너희들 이스라엘 운명은 딱이지, 뭐. 딱 그대로 되는 거예요. 죽이는 거예요, 율법이. 우리는 내 운명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아까 물질이란 말을 했는데 이걸 과학적으로 규정하면 물질의 운명에 대해서 과학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운명에 관해서 과학이 내세우는 법칙은 무엇이냐? ‘엔트로피’라 하는 거예요. 엔트로피란 법칙은 모든 물질은 쇠퇴한다. 간단하지요. 모든 물질은 시간이 흘러가면 시간 요소가 가미되면 가미될수록 이게 쇠퇴한다. 인간이 됐든 숟가락이 됐든 젓가락이 됐든 머리카락이 됐든 의자가 됐든 어떤 것도 전부 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바닷물도 강물도 다 이렇게 쇠퇴하는 거예요.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이게 과학이 설명하는 물질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과학에서 신기해하는 게 있어요. 모든 물질은 다 혼란스럽고 갈수록 쇠퇴해야 되는데 자식은 어떻게 해서 자식이 태어나고 왜 닭은 병아리라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가? 이것은 바로 엔트로피 법칙에 저항하는 법칙이 이 안에 스며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 출몰이에요. 출몰해봐야 또 시간 따라 마찬가지로 살겠지만 어쨌든 간에 군데군데 출몰한다 이 말이에요.
이걸 성경에다 적용시키면 모든 세상은 율법에 의해서 멸망하지요. 그런데 율법에 의해서 멸망하는 군데군데에 빵에 건포도 군데군데 있는 것처럼 군데군데에 뭐가 솟아나오느냐 하면 새 생명이 거기서 나오게 돼있어요. 그게 바로 새로움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자아라는 걸 그냥 그대로 고수해서 나의 인생 체면과 명예와 위신과 나의 행복을 쥐고 있으면 율법의 법칙에서 이것은 우상이 돼버립니다. 이건 저주거리가 돼요. 우리가 쥐고 있다는 이것 때문에 점점 더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물질화되고 우상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그게 뭐냐? 자살행위의 반복입니다. 자살의 반복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라는 육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르면서 죽어가는 그걸 기어이 자기 자신을 못 놓고 있어요. 왜냐하면 어떤 것이 와서 자기를 깨트리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뭐 십 년 전에 잘 믿었다, 이십 년 전에 교회 다녔다. 이것 소용없거든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전부 다 쇠퇴하고 이미 자기 자신이 우상화됐다는 고백 밖에 안 돼요.
그런데 이것을 모든 인간은 스스로 엔트로피 법칙을 극복할 수 없어요. 인간은 살고 싶어 하지 죽고 싶어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 누가 오느냐? 바로 레위기 26장 17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이걸 설명해야 되겠지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의 자아성, 복습 들어갑니다.
자아성보다 먼저 뭐가 있다 했습니까? 욕구, 욕심이 먼저 있지요. 욕구가 자아성을 통해서 뭘 만든다? 물질성을 만드는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물질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물질을 위해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지켜줄 것을 간곡히 기다려요. 누가? 욕구가. 왜냐하면 살고 싶어서.
이스라엘 체면이 있잖아요, 위신이 있잖아요, 명예가 있잖아요. 그리고 나의 행복이 있잖아요. 이걸 어떻게 내가 포기해? 포기 못하거든요. 왜? 이미 욕구에 의해서 내가 정립된 이상은 욕구에 의해서 정립된 나기 때문에 이건 내가 나를 없애고 싶어도 욕구가 나를 가만 두지 않아요. 물질화시키죠.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 법칙은 뭡니까? 이 물질화시킨 이스라엘에 누가 온다 해요? 적들이 오지요. 아까 대적이 온다 했잖아요. 적들이 올 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킨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이 나를 지키는 좋은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적들이 오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봅니까? 악한 하나님으로 이해되겠지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악한 분이 아닌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해온 거예요. 자, 악한 하나님이 대적을 몰고 올 때에 그들이 그동안 믿었던 여호와는 여호와 아니었고 이건 본인이 선택한 여호와지요. 여호와 위한 본인이 아니고 나를 위한 여호와로 쓰겠다는 이 낭패가 그냥 노출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하면 엔트로피가 가야 되는데 역 엔트로피를 그들이 원했던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적들을 보내서 어떻게 하나. 아까 원칙대로 한다면 이 적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달래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깨지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별이 마지막에 최후 될 때 갑자기 밝은 별이 시커먼 연탄재로 변하면서 안의 빛이 순간적으로 미친 듯이 깨져버리는 겁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광기의 초상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날마다 광기의 초상화 같은 모습을 해야 돼요. 예수님 자신이 한국 땅에 나타나면 미친 분이죠. 광기에 휘몰린 분입니다. 그럴 수 없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 이야기를 모든 교회한테 해보세요. 교회가 그 사람을 가만 두겠어요?
그동안 예배드린 것, 헌금 드린 것, 예배당 세운 게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게 되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 아버지께서 보냈다는 그 말을 잘라버리면 결국 뭐가 남습니까? 아무도 예수님께서 올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나를 분석하고 나를 탐구해서 내게 오는 사람은 일체 천국에 못 간다. 이 말이에요. 신학박사 돼서 주님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나 이제 예수 믿을래, 하는 사람은 안 받아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손잡고 보내줘야 예수를 알지 그렇지 않으면 가짜 예수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하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종교적 사회에서 예수님은 광기적 존재지요. 귀신들렸구나, 이런 표현을 받지요. 예수님은 곧 광기의 초상화된 거예요. 사람들 앞에 미친 사람이라면 저게 미친 사람이 아니고 뭐냐를 보여주는 모나리자 같은 초상화로 등장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대적이 이렇게 올 때에 적들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뭐냐 하면, 율법은 율법에 의해서 이것이 한 걸음, 두 걸음 개선되게 돼있어요. 그걸 보통 신학에서 갱신이라 하는데 갱신하니까 갱국이 생각나고. 주께서 부수는 작업이 바로 율법 안에 있는 율법대로 택한 백성을 살리는 작업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잘 들어보세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깨지길 원하는 사람 없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꿈이라 하는 것은, 주체가 부재한 가운데 꿈이 덮친다 했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이미 주어져버리면 이스라엘은 없는 존재가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하면, 율법에 반대되는 성향, 허구적인 욕구가 가득 차있는 매 맞아도 싼 그러한 주체가 있지요.
그러한 주체는 꿈의 세계에서 온 율법이 그것을 부셔버리는 거예요. 부셔버리면 숨겨진 심연이 등장하는 겁니다. 갈라진 심연, 이걸 제목으로 할까. 중심부가 갈라져요. 갈라지게 되면 거기서 새로움이 나온다 했습니다. 그 새로운 백성이 되는 재료가 돼요. 왜? 이미 심판 받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맞기는 맞았는데 새로운 백성이 되는 재료로써 얻어맞은 겁니다.
이 원리가 분명히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지요. 버림받은 아들이 구원되는 아들의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바탕이 되고 유일한 근거가 돼요. 그래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망가진 내 조각을 들고 완전히 박살난 나의 조각들 들고, 버리지 말고 그걸 그대로 주님한테 내놓으면 주님이 그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예속시키는 부활시키는, 내 몸은 없어요. 영원히 없어요. 그리스도 몸으로 조립시키는 일을 주님의 부활의 영, 성령을 통해서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에 내가 생각했던 그 세계와 다른 세계기 때문에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꿈의 세계에요. 요셉을 선택했던 그 꿈의 세계, 어린 요셉이 요구하지 않은 내가 요구하지 않은 세계, 내가 예상 못한 세계에 일원이 되는 겁니다. 그게 새로움으로 우리를 통해서 율법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오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날 나밖에 모르는 우리는 율법의 현장화, 율법이 살아 있는 현장화시키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듬어 나가기 때문에 항상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이죠. 합리와 이성이 만나게 되면 이게 지성이 되고, 지성이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게 되면 여기서 윤리가 나오고 도덕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에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나름대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이 윤리적, 도덕적인 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게 누구 것이냐? 내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걸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 순서를 다시 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율법을 기호로써 활용해요. 하나의 정보, 지식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우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돼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지성이다.
“사람이 지성적으로 살아야지. 술만 먹으면 개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술 안 먹으면 지성적으로 산다는. 지성적인 것이 우리의 끓어오르는 감정들, 동물적인 감정 있잖아요. “정신 차려야 돼. 이러면 안 돼. 남한테 피해주면 안 돼.” 이런 식으로 감정을 컨트롤, 통제하게 돼있어요. 통제하는 그걸 윤리라 하는 겁니다.
윤리란 남한테 대하기 전에 자기가 자기 자신부터 다독거리는 걸 윤리라 해요. 그걸 개인적으론 도덕이라 하고 남과 관계에선 윤리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짐승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까 제가 바로 강퍅은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애굽의 왕이면 얼마나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겠어요. 타의 모범이 돼야 되니까.
그런데 바로 왕이 강퍅하다는 것은 누가 앞에서 그런 거죠? 예상 못한 다른 인물이 등장했지요. 누가 등장했지요? 지팡이 들고 모세가 등장했지요. 모세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보낸 거죠. 나중에 모세가 율법과 만나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보낸 거예요. 율법을 보내니까 바로 왕이 강퍅했지요. 강퍅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뭐냐? 모세, 네가 미쳤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무슨 초상화라 했습니까? 광기의 초상화란 우리가 예상 못했다. 합리적인 내가, 윤리적인 내가, 도덕적인 내가 예상 못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말입니다. 뭐가 깨지면서? 윤리, 도덕, 합리, 지성 다 깨지면서.
이게 깨졌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모든 합리와 이성과 지성과 감정, 윤리, 도덕이 다 어디에 소모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과 관련돼있지요. 그렇잖아요. 살아도 그냥 살면 안 되고 짐승처럼 살면 안 되고, 참 괜찮은 인간이다, 그 소리 듣고 싶은 거예요. 그게 나의 체면이고 나의 위신이고 명예다, 이 말입니다. 나의 훌륭함이고 나의 침착함이고 관리 잘했고 최종 관리자는 나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딴 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게 성령을 방해하는데 십자가 영을 방해하지요. 내가 원하는 나 아니에요. 누군가를 보여주는 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라는 그분이 마치 요셉의 꿈처럼 우리에게 뭔가 주어지는 겁니다. 네가 기껏 아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우리는 그 세계를 성경에서 들었어요. 그 세계를 뭐라고 합니까? 그 세계를 두 자로 ‘천국’이죠. 천국의 백성이라 하죠.
그럼 그 천국을 아는 순간 우리의 육신이란 물질성을 나를 위한 육신이 아니고 천국을 위한 육신이 되겠지요. 그런데 육신 내부에 아직 우리 육신이 죽기 전까지 살아 있잖아요. 육신 내부에 하나님의 대적,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대적이 육신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깨어질 때는 우리는 육신임에도 불구하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시간이 흘러가면 엔트로피 작용되지요. 엔트로피는 점점 더 혼란스럽고 엉망이 된다는 말입니다.
육신이 천국의 종이 돼야 되는데 갑자기 뭐가 됐어요? 자기가 어느새 주인공이 돼버린 거예요. 나는 천국 백성이다. 나는 구원받았다. 이래 된 거예요. 그러면 처음에 은혜 받았던 이틀 전 사고방식은 그 기쁨은 어디 있습니까? 감사와 기쁨은 고마움의 어디 있어요? 다 날아가 버린 거죠.
이제는 천국을 내가 소유하려고 그 다음에 뭐가 등장합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지성적이고 윤리, 도덕으로 버티는 거예요. 내게 찾아온 천국을 지키기 위해서 내게 찾아온 성령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기 때문에 다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대적을 우리한테 보내지요.
보내면 성령을 통해서 바로 아, 저 인간이 그리고 나란 인간이 주님 십자가의 원수라는 사실을 화들짝 놀라는 순간이 다시 찾아옵니다. 이게 육신이 있는 한 계속 평생 반복되지요. 우리가 광기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될 텐데 광기에 의해서 은혜 받으면 갑자기 개뿔도 아무것도 없었고 월급도 별로 없는데 갑자기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합리적 논리에선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돈이 좀 있고 건강해야 감사가 되는데 몸 아파고 돈도 더 들고 사기 당했는데 주여, 이런 은혜를 주시다니. 이건 미친 거예요. 아니겠어요? 이것 미친 거잖아요. 감사할 이유도 없는데 감사하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터무니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며칠 가지 않고 다시 미쳐야 될 우리가 갑자기 사람이 돼버렸어. 다시 제 정신 돌아오는 거예요. 제 정신 돌아와서 “난 이틀 전부터 구원받았지, 참. 앞으로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나온다고요. 내가 내 관리에 들어가요. 또 갈라져야 돼. 그 감사와 기쁨은 벌써 며칠 전에 것이고 지금은 그런 게 없어져버렸어요.
자,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레위기 26장에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율법 주시면서 벌칙도 같이 줬지요. 물론 상도 축복도 줬지만 축복은 상관없어요. 왜? 벌칙이 많다는 말은 우리는 받을 상과는 전혀 상관없고 벌칙에 해당된다는 것을 이미 익히 알아야 돼요. 그러면 이건 이미 확정적이죠. 고정적입니다. 벌칙은 고정적이에요.
우리는 지상에서 시간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 벌칙이 한꺼번에 오는 게 아니고 군데군데 오거든요. 군데군데 계속 주어지는 것,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율법을 위반할 때마다 주어지는 거예요. 주어질 때 이 주어지는 모습을 제가 이렇게 표현해보겠습니다. 아까 우리 몸이 하나의 상품, 기호됐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리 몸이지만 남한테 나설 때 상품화한다. 시장에 내놓을 때에 나는 적어도 아파트 한 채 안 사주면 너한테 시집 안 간다. 이렇게 혼인시장에 내놨다 칩시다. 그런데 어떤 남자와 선을 봤는데 첫눈에 보자마자 둘 다 너무 호감이 가요. 너무 호감이 가서 누가 커피 값을 냈는지 기억도 안 나. 그리고 그 사람의 직업, 옷차림, 키 하나도 안 보였어. 다만 그 사람의 얼굴만 바라보고 표정만 보고 눈만 봤을 뿐이에요.
둘 다 끌렸어요. 그래서 일어설 때 둘 다 엎어지고 자빠져도 부끄럽지 않아요. 왜? 너무 감사하니까. 당신이 학교 어느 정도까지 나오고 현재 수입이 얼만지 묻고 싶지도 않아. 딱 저 사람이 내 남자다. 저 여자가 내 여자다, 라고 왜 말을 못하냐는 것처럼 둘이 뿅 갔다고 칩시다.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간 거죠.
그게 바로 시장에서는 사용가치라는 겁니다. 나는 저 사람의 아내가 된다면 아무것도 안 해줘도 저 사람한테 시집갈래, 라고 사용가치, 저 사람은 나한테 필요한 남자라고 해서 갔는데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도중에서 옆 테이블에 더 멋진 남자를 만났어요. 그때 정신이 드는 거예요. 내가 지금 이 남자의 이름도 직업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미쳐서 따라 왔구나.
그런데 옆 테이블의 더 멋있는 남자가 자기보다 못 생긴 여자와 선보고 있을 때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럴 때 이 남자 버리고 다른 남자에 갈 때 그걸 교환가치라고 합니다. 뿅 갔던 사용가치가 상대적으로 다른 멋있는 남자 봤을 때에 교환가치가 되는 거예요. 그걸 욕구라 해요. 인간의 욕구는 본인이 걷잡을 수 없어요. 내가 천국, 예수님만으로도 족해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이건 본인을 몰라도 너~~~~~너너너 너무 모르는 이야기에요.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그때 그 순간이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후에 택한 백성을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께서 계속 예수님께 보낼 때 어떻게 하느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거미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거미줄에 어떤 먹잇감이 있으면 온 몸으로 느끼는 진동으로 감각 잡아서 줄 위를 걸어서 그 먹이를 낚아채게 돼있어요. 미세한 진동, 떨림이에요, 떨림.
사도행전 9장 봅시다. 거기 36절에 여자 이름 나오는데 뭐죠? 다비다죠. 여러분 다비다가 어떤 사람인 줄 아시죠. 다비다가 베드로 만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비다가 죽었는데 살려낸 여자 이름이 다비다고, 다른 이름이 도르가에요. 자, 물어봅시다. 다비다가 베드로에 의해서 다시 살림을 당하고 그 다음에 영원토록 살았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이 땅에서 또 죽었지요.
그러면 여기서 봅시다. 베드로는 사람 만나면 다 살렸습니까? 공동묘지 가서 사람 살리는 게 취미였습니까? 아니지요. 베드로가 장례식장 돌아다니면서 죽은 사람 다 살렸습니까? 아니지요. 베드로는 뭘 보고 다비다를 살렸습니까? 와 이것 보통 어려운 질문 아니지요. 감이 왔다?
히브리서 12장 16절, 17절 보면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고 돼있어요. 떨린다고 돼있거든요. 떨린다는 어떤 인간이 이건 내 자리라고 허락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이 세상도. 성도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 성도를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고야 맙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가만있지 않고 그 사람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예수의 증인되게 해요.
예수의 증인이란 말은 나의 증인은 아니에요. 나의 이성과 합리성의 증인, 나의 윤리, 도덕의 증인은 성령께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걸핏하면 누구의 증인됩니까? 내 증인되지요. 그럼 주님께서 이걸 떨게 만들어요. 예상 밖에 떨게 만들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베드로다. 다비다가 죽어있다. 내가 사도인줄 알고 죽은 사람 낫게 해달라고 할 때 이것 참 합리적 이성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다면 이건 정말 기가 찰 겁니다. 무슨 재주가 있어요.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낫게 한 재주도 없고요, 죽은 자를 살려낼 재주는 아예 베드로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에 의해서 죽었고 베드로는 성령이 임해서 옥에 갇혔고 물론 거기서 잠을 잤지만. 베드로는 또 고넬료를 천사가 임해서 만났고.
또 베드로는 사도행전 9장에서 누굴 만났어요? 다비다를 만난 거예요. 그러면 다비다 거기 있고 베드로 여기 있다면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면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누가 개입했겠어요? 성령의 떨림. 베드로가 정신 바짝 차려서 살렸습니까, 아니면 그냥 살렸어요? 베드로는 다비다를 그냥 살린 게 아니고 주께서 살린 거예요. 베드로는 목격자일 뿐입니다.
베드로가 정신 바짝 차리자, 정신 차리자. 내가 딴 생각하면 못 산다. 이게 아니에요. 그냥 살게 된 인간을 베드로가 목격했을 뿐입니다. 목격해봐야 다비다는 또 죽었어요. 몇 년 더 살았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베드로가 아는 것은 다비다 산다가 아니라 이 땅 자체가 우리가 사는 땅이 죽은 자도 살리는 작업을 주께선 지금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베드로가 알게 된 거예요.
다비다를 살게 된 것을 알게 된 게 아니고 베드로가 알게 된 것은 주께서 살리고자 하면 언제든지 살릴 수 있는 그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누굴 위한 삶입니까? 누군가를 위한 자기에요.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맞닥트리고 만나고 자기가 헤어지고 하는 모든 일들은 베드로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이걸 쓰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본인만 있어서는 절대로 여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내일 되면 딴 생각할지 그건 내일 문제고 내일은 또 주께서 일할 게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할 것 없고. 우리가 순간 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의 말씀 받을 때 도대체 세상은 뭐냐? 이 사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뭐냐?
네가 아무것도 아님을 통해서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용도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게 하신 하루하루가 지금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기적입니다. 지금 부활된 거예요, 우리가. 매일 살면 매일 부활된 거예요. 어제 죽어도 우리는 할 말 없어요. 그런데 오늘 살았다는 것은 다비다처럼 부활된 겁니다. 이 부활이 언제까지 갈지 우리는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내 소관 아니니까.
우리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살아 있는 거예요. 바로 그 땅,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게 아니고 그 땅, 요셉이 꿈꾸던 그 땅, 율법이 우리보다 먼저 작용하는 그 땅, 율법이 부활을 제공하고 생명을 제공하는 그 모든 원리가 율법이 있기에 너희들은 너희 힘으로 율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내가 율법대로 너희를 죽여줄게. 율법에 죽은 가운데서 십자가로 널 죽여줄게. 나는 죽어야 마땅하고 하지만 죽이시는 그분이 바로 살아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 사람이 오늘날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눈을 뜨게 하옵소서. 그저 보이는 대로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을 다스리고 있음을 저희들이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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