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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4:6-8 / 여호와의 변형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4:6-8 / 여호와의 변형

정인순 2020. 10. 29. 11:03

음성 동영상 Youtube

 

여호와의 변형

 

이근호
2020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아모스 4:6-8

(4: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4:8) 두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약속의 땅에 내려진 자연현상은 ‘약속 위주’로 세상이 운영됨을 나타내는 징조들이 나타나는 땅입니다. 이 ‘약속위주’란 결코 ‘인간 생존 위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먼 옛날,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원칙을 견지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악마의 부추김을 받고 인류의 조상은 이미 하나님의 지시 위반이라는 관계성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죽음을 말하기 위해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악마의 부추김을 받는 인간들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우깁니다. 약속의 취지와 인간의 자기 이해가 서로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되는 이스라엘과 함께 있음을 알리기 위한 조치입니다. 즉 율법으로 결속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율법을 버리고 율법이 없는 신을 찾는다면 이는 ‘하나님과 같이 있지 않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속에는 ‘창세가 3장의 원칙’ 즉 ‘선악과 따먹은 자는 죽은 자’라는 원칙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 죽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죽은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율법이 살아있게 한다는 조건 하에 동행해주신 겁니다. 인간이 숨을 쉬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있는 자가 되는 이유는,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는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입니다.

홀로 산다는 것은 ‘나의 선택으로 나를 살릴란다’는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선택’이 있을 경우에만 ‘사람답게 산다’라고 느낍니다. 그 누구의 간섭없이 자주권을 본인이 행사하는 한 살 맛이 난다고 여깁니다. 여기에 적합한 신(神)이 바로 성경에서는 우상(偶像)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이 믿고 신봉하는 신이 우상이라고 내놓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이라고 우깁니다. 우상의 특징은 인간들의 자기 선택을 옹호해줍니다. 인간의 의지나 각오나 결심이나 회개를 흔쾌히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신이 우상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11:35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선택으로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는 인간 구원의 근거도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체적으로 갖추어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거짓되고 악한 것들입니다.

창세기 3장의 원칙에 준해서 이미 죄로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모두 죽을 이유에 해당됩니다. 이미 죽은 자들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광야길에 동행하셨습니다. 동행하시는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인해서만 그들이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필히 이 광야라는 환경통과가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인간의 선택’ 자체를 부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말해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미 약속의 땅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때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선택권을 주님의 선택권 앞에서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선택권 안에 있는 자는 근심이나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이유는 자신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주님의 선택의 작용에 의해서 매일 살아가고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근심, 걱정은 실은 주님의 선택 앞에서는 교만이요 자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자 그 땅에 죽음의 징조가 내려집니다.

즉 홀로서는 살 수 없는 곳임을 알려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 없이는 죽음 목숨임을 분명히 알려주는 조치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자기 선택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결심과 판단으로 죽은 자기를 산 자기로 바꿀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율법에서 돌아서서 우상에게 간 것은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 없는 길로 나간 겁니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주체적 선택을 가동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을 가동시켜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그 방법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의 자기 선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하나님과 함께 한 자는 어떻게 된 자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자기 변형’의 혜택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추방하시고 이방나라에 포로잡혀 가게 하시면서, 그 포로잡혀 간 이스라엘 행렬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서 그곳을 성소되게 하십니다. 즉 율법을 위반한 자기 백성이 받는 저주의 벌 안에 하나님 자신이 뛰어드시는 겁니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겔 11:16) 이렇게 되면 다시 돌아오는 길은 인간들의 자기 선택에 의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길을 만드신 결과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발생된 원칙이 그대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완성이 됩니다. 즉 율법에 의한 자기 백성과의 결속을 복음으로 완성되어 결속됩니다. 따라서 신약 때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자들은 십자가와 더불어 돌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서 성도는 ‘죽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택’조차 죽은 선택이 됩니다.

이로서 신약에서는 인간의 육으로는 구원될 길이 없고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완성된 주님의 선택의 혜택에 의해서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만이 더 이상 죽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겁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 돌아오겠다는 자는 다 떠나고 오직 이미 돌아온 자들만 남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쪽에서 내민 모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 우리 안에 남아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9강-암 4장 6-8절(여호와의 변형)2010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4장 6-8절까지입니다.

아모스 4:6-8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또 추수하기 석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하는 모든 일에는 일관된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은 동일하지만 각 시대에 원칙을 적용하는 방법은 다 다릅니다. 아모스시대에는 어떤 원칙을 적용했으며 그 적용하는 원리는 창세 때의 원리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너희가 이, 이빨이지요, 이를 한가하게 했다는 이 말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이빨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양식 먹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양식을 먹어야 씹는 일이 생길 텐데 이빨이 놀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로 먹을 것이 없다는 그 말이에요. 이빨 사용 안한지 오래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양식이 떨어졌음에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원칙을 나타낼 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과거로, 확정된 과거사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양식 떨어지면 너희가 돌아올래, 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고 “양식이 떨어지든 뭐가 되었든 너희들은 아예 나에게 안돌아올 종자들이다. 내가 미리 알고 있었지.”라고 확정짓는 겁니다.

또 여기 7절에 보면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보통 이스라엘은 이른 비, 늦은 비라고 해서 여기서는 늦은 비를 말하는데 12월에서 2월까지 비가 왕창 쏟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여행갈 갈 때는 선선하게 비 오는 2월에 가면 좋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제가 갔을 때는 비가 하나도 안 왔습니다만 그다지 덥지는 않았어요.

비가 내려줘야 3, 4월에 추수를 넉넉하게 할 수 있는데 어떤 마을에는 비가 오고 어떤 마을에는 비가 오지 못해서 비가 오지 못한 마을이 물 마시러 갔다가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올 정도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비를 내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조치하시는 이 조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속이 되어 있는 관계임을 너희가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통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하고 살래, 혼자 살래?” 하면 “혼자 살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혼자 살고 싶어서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물론 악마가 그걸 부추겼지요. “언제까지 하나님 앞에 지시받고 살래? 하나님 눈치보고 살래? 저것만 따먹으면, 선악과 과실만 따먹으면 너는 눈치 볼 것 없이 네가 최종 너의 선택에 의해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런 기회가 있을 때 잡아라.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그 엄포에 주눅 들지 말고 아예 그 엄포자체를 따먹어서 없애버리면 그런 지시사항도 없을 것이니 너는 자유다. 너는 최고의 자리, 신의 자리가 된다.”

악마가 인간들을 유혹을 했지요.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 여자는, 마음은 역시 남자도 마찬가지고, ‘하나님 없이 한번 살아보자’ 그런 마음으로 이미 변하고 만 거예요. 그래서 흔히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결속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율법을 내렸고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야 되는 결속관계, 그게 함께 사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에서 그들이 다른 신을 따랐습니다. 바알신을 따랐는데 거기에는 율법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 언약 같은 것이 없어요. 그 신은, 인간이 해 달라고 하면 해주고, 정성 다해 빌면 복 주고, 좀 여유 있으면 안 빌어도 되고, 인간이 주고 되고 신이 하나의 종, 시다바리, 객이 되는 사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신은 전부 다 인간 나를 위해서 믿는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주가 되고 그 신이라 하는 것은 나를 도와주는 정도, 보조, 보조역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선악과 따먹고 주인노릇 하는데 적합한 신은 우상만한 것이 없어요. 우상적인 신이 여전히 나의 가치를 지키고 유지하는, 나의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견지할 수 있는, 유지시킬 수 있는 신은 우상만한 신이 없어요. 우상이 최고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어떤 신을 믿을 때 “나는 내 원하는 대로 우상을 믿는다.” 이렇게 우상이라는 말을 붙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나는 참된 신을 믿는다.” 이렇게 하지요. 여러분이 참된 신이냐, 아니냐를 볼 때는 그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라는 거지요. 나에게 여전히 주도권이 있으면 그게 예수가 되었든, 삼위일체가 되었든, 여호와가 되었든, 명칭을 어떻게 부르든, 그게 성당이든, 교회든, 안 그러면 절에 가든, 이슬람종교를 믿든 관계없이 그것은 백 프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진다는 말은, 인간의 선택은 일체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기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꾸준히 실천에 옮기겠다. 그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을 줬거든요. 그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 있어요.

이 율법은 이스라엘이 요청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라는 인간 쪽에서 요청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냥 숙제를 줘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믿는 이유가, 그 숙제가 싫은 거예요. 숙제가 없다면 내가 신이 될 수 있으니까 내가 내 인생의 주인노릇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너는 너 자신의 주인이 되어라” 그런 이야기가 인문학에서, 철학에서, 심리학에서 굉장히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거에요. 이 세상 모든 교육의 핵심은 뭐냐? 이 세상 주인은 네가 되어야 된다. 그거잖아요. 과학이나 철학이 전부 우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여호와를 보내신 겁니다. 율법을 주신 거지요. 율법으로 결속되어 있고.

율법을 벗어나게 되면 벌 받고 저주받는 거지요. 그것도 다 하나님 일방적이에요. 선악과는 따먹어서 없앴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은 따먹을 수가 없어요. 율법대로 시행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 자신이 현재 하나님과 결속되어 있는지 아니면 따로 지금 독자적으로 홀로 살고 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나의 선택이 여전히 남아 있으면 우리는 매순간 매일같이, 시간당 또 분당 우리는 근심과 걱정을 계속 하게 됩니다. 왜냐? 선택을 해야 되기 때문에, 내 선택으로 내 인생을 꾸려 나간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힘든데 직장 그만둘까? 몸도 아픈데.’ 이것은 본인이 직장 그만둘 수도 있고 안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선택이 나에게 있다고 보는 거지요. 그 자체가 근심과 걱정이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의 선택에 우리가 놓여져 버리면 근심과 걱정 자체도 이게 자만이고 교만이 되는 겁니다. 근심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인생 만드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보고 무엇을 던져 주느냐? 이게 약속의 땅이거든요. 우리 대한민국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의 특징은 율법에 위반이 되게 되면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본의 아니게 비가 안 올수도 있고 가뭄 들 수도 있고요.

다음 시간에 나오겠지만 엄청나요. 곡식이 다 말라비틀어지는 일도 있고,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이게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 있다, 가 우선이 아니라 약속이 살아 있다, 가 우선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 있느냐가 아니라 말씀이 살아 있느냐를 하나님께서는 주목하는 특수한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죽음의 징조를 흔적을 나타내는 거예요. 이가 한가하다, 씹을 양식이 없다는 말은 너희들은 지금 죽음을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는다. 이것은 곧 죽게 된다. 죽음의 시그널 신호를 계속 보내시는 거예요.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이 좀 어려운데요. 이 말은 뭐냐? 보통 사람 대 사람, 율법 없이 인간 대 인간, 각자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면 어떤 조건을 이야기할 때는 돌아올 수 있는 여지와 조건을 부여하면서 이야기하거든요.

“너 어디 가거든 우리 집에 들러라”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내비 찍어줘” 이렇게 하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했는데 주님한테 돌아가려면 내비를 찍어야 됩니까? 지금 이 본문에서 아니하였느니라, 과거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나가기는 나갔는데, 주님을 버리고,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신, 우상신에게 나가기는 나갔는데 그렇게 나갔을 때 그렇게 간 이스라엘이 다시 못 돌아오는 방식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모르는 거예요.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돌아오라는 말로 들리는데 어디로 돌아올까요?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내비 찍어 봐야 됩니까? 하나님 어디 계신 것을 알아야 돌아가든지 말든지 하지요. 어디 계신데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어디 가서 찾을까요? 어디 가서?

이미 그들이 떨어져나갈 때 자기선택권을 사용했잖아요. 자기선택권을 사용해서 우상에게, 바알에게 갔다면 우상에게 갔던 자기선택권을 발휘해서는 여호와께 돌아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율법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내 선택으로 주님 멀어졌다고 내가 내 선택으로 다시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죽어야지요. 원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이들이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광야를 지나오는 겁니다. 죽은 상태였습니다. 죽은 상태기 때문에 외부에서 양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본인의 선택에 의해서는 양식을 구할 길이 없는 환경, 그게 광야의 환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를 경과하게 했어요. 약속의 땅을 놔두고 중간에 사막을 집어넣는 이유가, 내가 죽었다는 그 관계, 나는 죽었다는 말은 내 선택권도 쓸모 짝이 없다는 거거든요. 죽은 인간이 자기선택 해봐야 무슨 쓸모가 있어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은 자는 자기 선택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하고, 그 전제로 한 상태가 견지되고 유지되는 상태에서 그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돼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오는데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미리 정탐을 했지요. 거기에 아주 장대하고 군사력이 막강한, 이스라엘은 잽도 안 되는 그러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본토박이들을 만난 거예요. 또 살기는 얼마나 잘 사는지. 펜트하우스 같아요. 그야말로 포도에다 젖과 꿀이 흐르는. 탐은 나지만 이미 그걸 접수하고 있는 막강한 자들이 있어서 그 정탐꾼 열 명은 통곡하고 난리가 났지요. 그야말로 좌절했어요.

“괜히 애굽에서 나왔다. 그냥 거기서 살걸.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봤다.” 이렇게 나왔다 이 말이지요. 그럴 때 갈렙과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느냐? 그들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눈으로 봤어요. 봤으면 인간입장에서 어떤 선택이 있다는 말이지요. 열 명의 정탐꾼은 눈에 본 것으로 자기선택권을 그대로 사용했어요. 우리는 못 들어간다고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우리 자신, 인간의 선택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걸 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홀로 살게 되면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나의 선택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나의 선택은 있더라도 나의 선택을 내가 스스로 무시해야 된다는 조건하에, 그런 조건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내가 선택해서 예수 믿는 것은 백 프로 지옥 갑니다. 왜? 반드시 나의 선택은 내가 죽은 자라는 인식에서는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내가 천국에서도 살고 싶다. 이것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 있으면 자기선택을 포기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들의 양식이 말라버리고 그들에게 비가오지 않게 함으로서 너희들을 죽음 쪽으로 가는 그것이 너희들이 살길이다, 그 말이지요.

주제파악이 되는 거예요. 나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머리가 있는데 하나는 사기 치는 머리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 찾는 머리가 있어요. 하나님 찾는 머리는 성령 받아야 가능하고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전부 다 사기 치는 머리만 있어요.

남만 보면 사기를 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의 딱 하나만 남아 있는 근원적인 인간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내가 설치지 아니하면, 내가 나대지 아니하면 내가 살길이 없다. 그래서 사기 치는 머리의 특색은 항상 그 밑에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깔려 있어요. 나는 어찌하든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와버리면 나는 이미 죽었음을 즐거워하는 거예요. 참……, 죽었음을 즐거워한다는 것. 모순되지만 이런 문장이 성립이 돼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가지면. 신나는 죽을 맛, 신나는 죽을 맛, 나 자신에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쪽쪽 뽑아내는, 뭐 고구마 라떼라든지, 커피라든지, 쪽쪽 뽑아내는 그 맛, 죽을 맛을 먹는 그 즐거움, 신나는 맛,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결속되어서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에요.

왜냐하면 율법으로 결속된 것이 오늘날의 뭐냐 하면, 복음으로 결속된 겁니다. 율법으로 결속되게 되면 거기에는 처벌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못 지키면 저주, 지키면 복. 그러나 복음으로 결속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모든 죄를 넉넉하게 다 용납해주는 그러한 그 요건이 갖춰져 있어요.

왜냐하면 복음 안에는 우리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겠다는 조건이 들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 사람이 범죄 했다. 우리의 잘못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우리의 조상에게 다 돌려버렸다는 거예요. 복음 안에서는.

로마서 5장 19절에 보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내가 죄인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예배나 회개나 기도나 금식이나 십일조나 어떤 것을 해도 그게 죄기 때문에. 전도를 해도 죄가 되고 강의 설교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가 막 퍽퍽 튀어 나오는 거예요.

공장 옆에 폐수나 오염물질 내보내는 하수구는 늘 시커먼 물이 퍽퍽 쏟아지잖아요. 인간에게서는 죄만 퍽퍽 쏟아지는 거예요.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19절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더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함이라. 이것을 번역하면 “율법을 준 것은 네가 이미 율법주기 전부터 창세기 3장 네 조상 때부터 너는 죽었어. 너는 죽은 거야.” 왜 네가 죽은 것을 모르냐는 말이지요. 소크라테스, 테스 형한테 물어봐야 압니까? 너는 죽었다, 그 말이에요. 죽었어요. 죽었으니까 죽는 거예요. 늙어죽는 거예요.

내가 모른다고요? 왜 그걸 몰라요? 교회 가면 다 아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내가 알리이까, 노래 불러 가면서. 같은 죄인인 소크라테스에게 물어야 뭐 알 리가 있습니까? 똑같은 인간들에게 뭘 물어요?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사기 치는 마인드를 가지고 계속해서 자기선택, 내 선택, 내 선택, 자기선택으로 자기인생을 자꾸 끌어가는 거예요. 책임져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내 가정 내가 책임진다고 하고.

남자들이 군에 갔다 오게 되면……, 내가 지금 군대 갔다 온지 몇 년이 되었나, 제대가 77년도니까 제대한지 43년이 되었네요. 그래도 어제도 군대 꿈 꿨어요. 단체 급식하는 꿈 꿨습니다. 오늘 설교준비하기 위해서 주신 꿈같은데. 남자들이 나이를 먹어도 계속 군대 꿈을 꾸는 이유가, 군에 있을 때 유일하게 나의 나됨이 아니었거든요.

다시 말해서 사람답게 사는 것, 원래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사람이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것이 본질인데 군대는 강제로 이걸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어제 꿈에 밥을 먹을 때 식기 들고 줄 서서 먹었거든요. 군대 갔을 그 때만이 내 반찬 내 밥, 내가 먹고 안 먹고를 내가 결정 못하고 강제로 기계처럼 밥을 먹었던 것을 생각하게 되면 너무나 그게 마음에 트라우마로 남아서 아직도 꿈을 꾸는 거예요.

어떤 영화 보면 어떤 남자가 나이가 40중반인데 다른 소년하고 박치기를 해서 나이가 19세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이 그거 보면서 젊어져서 좋겠다고 하는데 본인은 정말 죽을 지경이에요. 왜? 이미 갔다 온 군대를 한번 더 가야 된다는 그것이 꿈같아요. 나를 상실해 버리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나를 상실해 버렸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군대처럼 나를 상실하게 되면 인간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과의 결속이에요. 살아 있는 주님과의 결속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너를 없애러 온 예수님”이라는 거지요. 없앨 때는 뭘 없애느냐 하면, 갑자기 장님이 되고 말았어요. “네가 눈 뜨고 보고 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네 선택을 했느냐? 자, 장님 되었다. 네가 선택할 수 있나?” 장님 되었으니까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아나니아라는 사람한테 안수 받고서야 비로서 비늘이 떨어지면서 눈을 떴지요. 이게 종속이에요. 다시 말해서 제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다시 돌아오는 법도 모르고 떠나버린 거예요. 다시 돌아오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냥 가버린 거예요.

돌아오라, 가 아닙니다. 너는 돌아오지 못하는 지경으로 가버린 거예요. 길이 험해서가 아니라 우리마음의 각오와 결심이 덜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는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데 만약에 독자적으로 독립해버리면, 다시 말해서 나는 나 혼자 살아버리면 다시는 주님께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끊어져버려요.

내 선택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전부다 사기 치는 마인드에요. 사기 치는 마인드.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힘을 의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사야 58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금식하는 것을 가지고 이사야 선지자로 책망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너희는 금식 날에 오락하느냐, 금식 날에 찢고 싸우냐고 책망하는데 이 대목을 유대인들이 다 알겠지요. 마태복음 9장 14절에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지금도 유대인들이 그래요. 이슬람도 마찬가지고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금식을 해요. 바리새인들은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되니까 금식을 더 열심히 하겠지요.

금식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사야에,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했고 금식하는 날에 서로 싸웠잖아, 하니까 그 당시에,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날에는 아무 소리도 안하고 오락은 물론 tv도 안보고 그냥 부족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낮추는 식으로 금식을 하게 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걸 문제 삼으니까. 그 때 금식 때문에 우리나라 망했으니 이제 금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그들은 다시 자기 나라를 로마에서 회복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16절에 보면 그들이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했다고 그들의 행동을 표현했거든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그런데 누가복음 18장 12절에 보면 바리새인이 나오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옆에 있는 세리 돈만 아는 세리를 비교하면서 하는 말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정말 이 사람은 스스로 자기한테 보기에 토색하지 않고 불의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았어요. 바람피운 적도 없어요. 그리고 12절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게다가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따박따박 십일조 드렸다 이 말이지요. 진실로 드렸고 진실로 금식했어요.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보고 하는 말이 “그게 바로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냐. 독자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냐.” 그 말이지요.

그게 너의 선택이었다는 거예요.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주께 돌아와야 되는데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서 나쁜 짓하고, 선택해서 착한 일 해서 돌아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돌아올 때는 십자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주께 돌아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돌아올 여호와의 자리가 변형되기 때문에 그래요. 맨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에요.

대구시 지묘동, 거기 빌라에 계속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독립해서 나가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하는 말이 “네가 어렵거든 언제든지 오라” 했는데 그 말 철석같이 믿고 돈 떨어졌을 때 다시 가보니까 그 집이 이사 갔어요. 연락도 없이. 주님이 이사를 가버린 거예요. 왜? 못 돌아오도록. 나갈 때의 선택으로 그 선택을 그대로 작용했을 때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여호와 쪽에서 변형하신 겁니다. 어떻게 변형하는가? 버림받았던 그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안에 여호와께서 직접 거기에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들은 저주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저주 속으로 더 들어가 버렸어요.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했다 이 말입니다.

이사야 53장에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4, 5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그가 찔림은,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 그러니까 그 허물 안에 그분이 함께 참여한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그들의 자리를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자신의 자리로 그걸 수용해 버린 겁니다. 그들이 받을 그 모든 징벌을 주께서 대신 받은 거예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게 여호와의 변형입니다. 그냥 율법주고 큰소리만 치는 하나님인줄 알았지요. 그 율법의 저주 안에 같이 참여하시는 하나님으로 변형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 와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들은 계속해서 자기선택에 의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행함으로 지킴으로 다시 여호와께 돌아올 수 있다는,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나의 선택으로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시도,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 예수님을 못 알아봐요. 왜? 자기 결심으로 예수를 믿고, 예수님 말씀대로 율법대로 지키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그래요. “회개하겠나이다.” “회개? 누가 하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가! 저리 가!” “헌금 했습니다” “누가 했는데? 저리 가! 가버려!” 너는 예수라는 우상을 믿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수를 해도 갈 수 없는 곳에 주님이 계셔요. 갈 수 없는 곳에.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을 이야기해줍니다. 방법을 이야기해 주게 되면 그 방법 자체가, 이야기한 것 자체가 못 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니고데모야 네가 살았냐? 그러면 네가 죽어야 돼. 네가 죽어서 네 선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야 돼.”

주님의 창세기 3장의 원리원칙은 지금도 양보가 없어요. 이미 죽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죽었다는 조건하에 어린양의 피로 함께 결속되어서 동행이 되었었는데 이스라엘이 점점 더 이방나라 근처에 살다보니까 이제는 죽음이라는 타일조각이 떨어져 나간 거예요.

타일 조각들, 죽음이라는 조각들이, 죽음이라는 조각이 다시 맞춰져야 “나는 죽었지만 동행하시는 주님이 살아서 결속되어서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이런 원칙이 성립되어야 되는데 나갔던 인간들이 전부다 자기 잘난 맛에 다 나가버린 거예요. 그리고 또 뭐가 가관이냐 하면, 그 잘난 맛에 나가가지고 또 이제는 회개한다고 난리라. 회개한다고, 금식한다고, 밥 굶었으니 봐주겠지, 이런 식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그들이 어떻게 신을 불렀습니까? 자학했잖아요. 자기를 찌르고 때리고. 요새 그거 내놓고 하는 데가 천주교 수도원, 수녀원이에요. 참기름 만들고, 된장 간장 만들어서 팔아먹는. 맨 날 도 닦아.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동안거 그런 것, 겨울철에 굴속 같은데 들어가서 혼자 벽에다 점찍고 종일 쳐다보는 것, 그거나 40일 연속 새벽기도나. 성경쓰기, 인쇄 다 되어 있는데 그거 왜 씁니까? 성경글자 쓰는 것. 글자 몰라요? 도대체 한글 연습합니까? 그걸 왜 써요?

“주여, 나 살아 있습니다. 나를 천국 보내주소서” 이런 발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존재가 파닥거려요. 파닥파닥 거린다고요. 피라미인가? 주님은 우리가 건너갈 수 없는 곳에 계셔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계속 보게 되면 니고데모도 참 끈질기지요.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 천국을, 하늘나라를 가겠다면 내가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기어 나올 용의가 있습니다, 라는 투로 자기가 말해놓고 말이 안 되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지요.

“내가 이 나이에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로 하늘나라 보고 싶은 것은 굴뚝같은데 이미 늙어버린 이 나이에 다시 엄마 만나서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주님께서 하는 말씀이 “아직도 네가 육이구나. 내가 육을 죽이라고 안 하더냐? 육을 죽이라는 말이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야.” 육이 살아있다면 육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어떤 것을 해도, 찬양을 해도 뭘 해도, 기도를 해도 그건 육이야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늘나라는 볼 수가 없다.”

요한복음 3장 4, 5절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완전히 없다는 뜻이에요.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었어요. 채택이에요 채택, 그냥 일방적으로 택한 거예요. 한쪽은 진노의 그릇으로 한쪽은 긍휼의 그릇으로 택했잖아요. 왜 택함을 계속해서 악마 쪽에서는 그걸 모독하라고 인간을 부추기느냐 말이에요.

로마서 11장에 이런 말씀 나와요. 이 진리, 이 원칙,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으면 이미 죽은자라는 그 원칙은 하나님이 양보가 없다고 했지요. 일관되게 가기 때문에 일관된 가운데서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 말은 “누가 먼저 자기 선택으로 자기가 먼저 하나님께 뭔가 드려서 그 대가로 영생 얻고, 구원 얻고, 천국 가는 그런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할 리가 있겠느냐? 없지! 없지!”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밀면서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면서 없지 없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런 방법은 없어요. “네가 행함으로 기도하고 예수 믿고 뭘 해도 네 쪽에서의 어떤 믿음 소망 사랑도 천국으로 가는 방법이 되지 못해.” 왜냐하면 성령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오는 거거든요. 십자가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도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로 확정 난 게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의 취지가 살아서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게 되면, 나는 이미 죽은 놈이라는 말이에요. 죽었잖아요. 죽은 자가 어떻게 살고자 노력하겠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만약에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산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뒤의 말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는 이 말은 앞에 무슨 요건이 충족되어야 하느냐 하면,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조건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산다”가 돼요.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날마다 나의 선택을 개무시하는 거지요. 날마다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선택과 나의 결심과 나의 목표와 기대치를 박살내는 겁니다. 왜? 인간은 선악과 따먹어서 자꾸 독자적으로 혼자 살려고 하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늘 방송이나 세상에서 들은 것은 뭐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뭐냐, 뭐냐, 뭐냐? 그것은 홀로 사는 것이다. 그것에 익숙해 졌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내 결심, 내 결정에 의해서 내 인생 내가 꾸려나가는 이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게 바로 전부 다 사기 치는 마인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해서 나에게 얼마의 이익을 얻을까, 그것만 챙기는 거예요.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게 악마가 준 원칙이었어요. 악마가 우리에게 심어준 겁니다. 이게 본질이에요. 육이 있는 한 못 고칩니다.

홀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아가씨들이 결혼을 해도 결혼이 뭔지도 몰라요. 그냥 혼자 사는 식대로 사는 그것이 결혼인줄 알아요. 결혼할 때부터 헤어질 준비하고 결혼합니다. 와, 남자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오래 가는 것은 뭐냐? 결혼할 때 ‘나는 저 남자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 이런 생각을 가질 때는 좀 오래가고, ‘여차하면 발 뺄래’ 이러면 오래 가지도 못해요. ‘나는 저 여자만 있다면, 나는 저 여자에게 어떤 무시를 당해도 나는 과분해. 나는 당신만 있다면 내가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 이러면 좀 오래가요. 그렇지 않은 이상은 본성이 자기 혼자 사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선택이 작용하는 다시 말해 십자가와 더불어 주께 이미 ‘돌아온’ 사람이에요. ‘돌아올’ 사람들이 교회 오면 안돼요. 이미 ‘돌아온’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버리면 돌아오려는 사람들은 가짜지요. 사기 치는 사람들이지요. 다 가요. 돌아오려고, 천국 가려고 온 사람들은 다 가버립니다. 이미 돌아온 사람은 남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조치에 의해서 이미 영생을 얻은 자만이 우리의 진짜 마음이 어땠기에 주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채찍을 맞으시고 고난을 당했는가를 늘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주님이 하신 그 일만 계속해서 우리에게 남아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