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모스 4:11-13 / 안개 본문
안개
이근호
2020년 11월 11일
본문 말씀: 아모스 4:11-13
(4: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 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4:13)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자연을 총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만나려 오시는 일입니다. 이는 인간쪽으로 하나님 만나기가 성공되지 못함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대자연 속에서 아무리 관찰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던 불심판 사건에 그때에만 적용된 극히 국소적인 일인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이 세상 어느 곳이든지 불심판 내릴 권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룰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5:18-20에 보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 세상의 자기 삶에 진지합니다. 심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 지를 모릅니다. 즉 자기 쪽에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한다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뭐로 막혀 있는지를 모릅니다. 히브리서 12:18-20에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만나보니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서는 하나님쪽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마치 옛날 고구려 무덤 안에 벽화처럼 무서운 불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 세상은 무덤 앞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아무리 살아있다고 느껴도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시급하게 알아야 될 일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은 미이라가 될 뿐이라는 점입니다. 오므라들고 바짝 말라비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가상적인 신이 계신 쪽으로 계속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쪽은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는 쪽이요 다른 한 쪽은 본인이 신을 찾아나아가는 쪽입니다. 본인이 신을 찾아나가려는 자는 자꾸만 뭔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할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사들이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은, 인간이 아무리 해도 해내지 못하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7:27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 세를 내는데도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일을 통해 돈을 만들어내십니다.
이는 인간들의 그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꾸만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일을 통해 본인이 ‘살아 있음’을 스스로 감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본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기 위해 목적을 갖고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 달성에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삶이 됩니다.
반면에 직접 주님이 찾아온 사람같으면,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이 주님과 상관없는 ‘죽은 자의 일’임을 압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아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이 고구려 무덤 같은 세상에 들어오셨기에 다른 이들과 같이 죽음으로 생을 끝냅니다.
하지만 주님에게 더 중요한 죽음은 목숨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심판을 뚫고서 자기 백성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심판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을 돌이키시는 선지자가 먼저 오셔야 합니다. 말라기 4:5-6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오셔서 엘리야같은 선지자 기능을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권능에 대해서 자신이 저주받아야 함을 아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1:23-24에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은 실은 주님이 허락하신 권능 같은 것들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더 살려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왜 어제로 죽이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해야 될 처지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그저 안개 같은 것입니다.
뭔가 있어보이지만 막상 그 시점이 되면 안개 속에 투과되는 것처럼 그 시간들을 지나쳐갈 뿐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 허상이요 오락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심은 십자가에서 출발하기에 정작 주님이 찾아온 것들은 십자가 세계의 찾아옴입니다. 그속에서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호수 가에 둘러친 풍경들이 실재같지만 그 풍경들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다 호수 안에 처박혀있습니다.
죽음과 함께 한 그 세계가 불로서 재로 변할 이 세상보다 더 깊고 풍성합니다. 그 세계에서는 감사만 무한히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세계는 그 누구도 건들릴 수 없는 정도로 고정되고 확정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오직 ‘약속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장만된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마태복음 11:25-27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딪쳐는 모든 것들이 안개같은 것들이니 우리네 인생을 가볍게 흘러 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강-암 4장 11-13절(안개)201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4장 11-13절까지입니다.
아모스 4:11-13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멸망했는가, 이스라엘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같은 상태가 되게 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유황불 내린다, 라는 사실을 그들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에서 죄지었던 사람은 자기들과 다른 인간인줄 알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기를, 소돔과 고모라가 옛날 일이 아니고 너의 현재일이 되도록 그렇게 조치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불바다 만들어서 그야말로 예루살렘이 다 불바다 되었지만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인간의 한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맘도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겁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요.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왜 인간은 인간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가? 마태복음 15장 18-20절에 보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이렇게 내부적으로 계속 더럽게 하는 것이 뿜어져 나오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손을 씻는 그러한 외형적인 폼을 내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손 씻는 것이나 교회 참석하는 것 남보란 듯이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자기 속에 진짜 더러운 것이 있음을 극구 감추기 급급한 행위들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고 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 이유가 그 다음에 아모스 4장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갈게. 너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갈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찾아가서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이러한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자연 대자연 의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라도 기어이 성사시키겠다고 합니다. 그게 13절에 나오지요.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쉽게 말하면 “산을 지으신 분이 너희에게 찾아갈게. 바람을 창조하신 분이 너희에게 찾아갈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산을 통해서 갈 수 있고 바람을 타고 갈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그 분이 너희에게 다가갈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만한 근거가 있었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범죄 했을 때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졌다고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늘에서 그냥 불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지 하나님이 손댄다는 생각을 누가 하겠어요?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그냥 유황불이 떨어졌다,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이 대자연은 대자연 자체적으로 그렇게 움직였다고만 생각하지 배후에 어느 손길이 있다는 생각을 어느 인간도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직접 천지를 다루신다, 라고 우리가 이론상 그렇게 알더라도 무엇을 위해서? 왜? 왜 다루시는가? 그 다루시는 방향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다루시는 그 초점은 어디냐? 그것까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모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다루는 방식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찾아갈게. 찾아가는데 거기에 대자연의 변화가 동원된다. 이 대자연의 모든 움직임은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내 백성 찾아가는 그 일에 내가 모든 것이 응집되도록 하겠다.” 분명히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대자연은 그냥 대자연이 아니고 대자연의 움직임을 다 추리고 추려서 모으게 되면 이것은 간단하게 ‘하나님의 자기백성만남’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찾아오심’ 그렇게 돼요.
거기다가 대자연의 움직임을 입히면 되는 겁니다. 이 대자연의 모든 움직임, 낙엽이 떨어지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가고, 봄이 되는 이 모든 움직임, 하나님이 자기백성 찾아오심, 그렇게 돼요. 마태복음 1장에서는 그걸 임마누엘 하나님 ‘하나님이 자기백성과 함께 있다’는 그 하나님의 의지가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꺾이지 않았다, 중단된 법이 없었다, 관철시켰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입니다.
너희들이 자연구경이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찾아오신 하나님을 영접하라, 그 말이에요. 대자연을 통해서.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그 방법이 뭐냐, 어디서 만나야 되느냐, 하는 그런 의문이 자동적으로 들겠지요. 11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올 때에 그 인간에게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시면서 찾아오십니다.
“너희들이 만약에 너희들 쪽에서 자발적으로 이 하나님을 만나러 온다면 그것은 너희들은 불과 마주할 것이다. 무서운 불과 마주할 것이다.” 오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오는 것처럼 너희들이 알아서 뚜벅뚜벅 생명나무 있는 곳에 간다면 거기는 너희들이 불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2장 18,19절에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 시내산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마주하는 이 세상, 이 자연, 인간이 마주한 지상의 천장의 모습은 불붙는 모습이에요. 마치 고구려벽화를 대하듯이. 고구려벽화는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무덤 속에 가야 만나요. 그러나 인간들이 갈릴레이 갈릴레오때부터 망원경을 만들어서 목성이나 행성을 보고 다 봤는데 보니까 불이 안보여요.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 만나려면 한참 멀었다는 뜻이에요. 분명히 옛날 이스라엘은 하나님 만날 때에 불붙는 화산, 시내산 꼭대기에서 불붙는 것과 마주하면서 불 저쪽에는 하나님계시고 불 이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모세가 하나님 만났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는데 그 찾아오는 방법은 불붙는 떨기나무였습니다.
그냥 관상용나무 아니었어요. ‘이 나무 예쁘네. 불이 붙었네. 집에 가서 땔감 할까?’ 그 정도가 아니에요. 갑자기 나무에서 소리가 났어요. “신발 벗어라.” ‘후다닥’ “네가 머문 곳은 거룩한 곳이다.” 평소 그 떨기나무 주님이 찾아오지 않을 때는 어느 인간도 염소새끼나 양 새끼나 아무나, 쥐라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임재한 그곳은 졸지에 거룩한 장소가 되고 만 겁니다. 거룩한 장소는 하나님이 일을 벌이는 그 타이밍 맞춰서 늘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타난다면 그 장소는 거룩한 장소가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불이 있는 것처럼 히브리서 12장 29절에도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하나님 = 불’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냐? 불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4장 24절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 쪽에서 시작해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분이에요. 그래서 교회나 세상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만났다는데 본인이 찾아가서 하나님 만났다는 사람도 있고 주님이 찾아왔다는 사람도 있어요.
본인이 찾아갔다는 하나님은 백프로 가짜 하나님입니다. 저는 목사를 볼 때 믿는 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에요. 믿는 자는 목사가 될 수 없어요. 몸에 불이 붙었는데 누가 오겠어요? 믿음이 없으니까 목사가 된 거예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전부 다 내게로 오라, 이렇게 된 거예요. 시작을 나부터, 나 자신의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존재부터, 나 여기 있음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은 어디 계세요?” 하고 하나님 찾아가는 사람들 전부다 교회 나옵니다. 절에는 부처 찾아가는 사람들이 가겠지요. 하나님 찾아가는 사람, 천국에 계시다는 하나님 찾아가는 사람 전부 교회로 오거든요. 그러면, 성경대로 한다면 여러분이 내가 시작해서 찾아가는 모든 하나님은 결국은 불의 심판만 만나요.
성경 여러 군데 많이 나와요. 사람들이 이걸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데 마태복음 3장 11,12절에도 그가 오시면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도 불이 나오잖아요. 이 말은 “주님이 찾아가는 방식 아니거든 구라라고 여기라.” 거짓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말라기 4장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 선지자중의 선지자, 마지막 선지자, 그게 바로 두 번째 나타난 엘리야 곧 세례요한이겠지요.
그 선지 엘리야가 하는 일이 뭐냐? 6절에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이 모든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생각이 있어서 보내신 엘리야를 통해서만 아비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움직여서 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움직여야 돼요.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이 따라다니다가 결국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다 도망친 것 여러분, 다 아시지요.왔는데, 그들이 왔는데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가버렸습니다.
찾아오신 분, 누가 찾아왔는가? 예수님께서 찾아왔어요. 부활하셔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가지고,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주님이 먼저 움직였다고요. 주님이 찾아왔다고요.
그렇게 될 때 이미 예수님과 인간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열 두 제자, 열두 제자와 예수님 사이에 이미 결별이 먼저 있었어요. 그 결별을 굳히는 것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인간도, 3년 동안 온갖 기적을 다 받는다 할지라도 결국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들은 나를 싫어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 맘속에 싫어하는 마음, 원래부터 본인이 어떻게 끄집어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 자신의 주도권을 쥐고 다루는 것은, 주도권을 쥐고, 그것은 그들의 맘도 아니고 악마의 마음이었다. 악마의 마음이 주도권을 쥐고 악마가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고 그게 인간의 한계다.”
그걸 예수님께서 분명히 해주시고 그 다음에 주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처소에, 천국에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요. 두 종류의 인간, 하나는 주님이 찾아오시는 사람과 본인이 찾아가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고 그걸 달리 하게 되면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내 옆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되잖아요.
주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십자가의 영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에 내 쪽에서 어떻게 해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나로 인하여 주님이 버림받았기 때문에 주님 찾아오시면 점차 내가 버려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찾아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를 지워버리는 것, 나를 버리는 사람이 돼요. 나를 지워버리는 사람.
그런데 그런 종류가 있는 반면에 자기가 찾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달리 이야기해서 그 다른 종류는 어떤 사람이냐? 주님 때문에 버려지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어요. 같은 교인들 속에서도. 주님이 찾아와서 강제적으로 자기를 버리게 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사람을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어요. 안됐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구경하는 것을 되게 좋아합니다. 특히 싸움구경 좋아하고요. 특히 남 망하는 구경은 왔다지요. 삶의 활력소입니다. 남 망하는 것 구경하는 것. 그런데 본인이 망하지 않으면 자꾸 뭘 하려고 해요. 자꾸 계획 잡고, 목표 세우고 기대하고 하는데 여전히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고, 기대를 한다는 자체가 나 못 버리겠다는 이야기거든요. 때려죽여도 나 못 버리겠다, 하는데 사람이 당하는 고통 가운데 제일 힘든 고통이라 한다면 너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런 상황이 사람이 참 고통스러워요.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게 되면 살맛이 없습니다. 살아야 될 이유도 없고요. “부모님은 연로하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이게 부모 효도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도끼로 부모 죽이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 아무것도 못하게 묶어놓아 버리면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어요. 왜 교도소의 독방이 여럿이 지내는 것보다 더 괴로우냐 하면 아무것도 할 게 없기 때문에.
인간은 나 자신을 과시하는 재미로 살거든요. 과시하려면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나 하는 행동을 봐주고 있는 타인들이 있어줘야 돼요. 부부가 있는데 한쪽이 일찍 죽었다. 그러면 나머지 한 배우자는 어쩔 줄을 몰라요. 삶의 의욕이 싹 사라져버려요. 내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누가 해줘야 되는데 있는둥 마는둥으로 만들어버리면 내가 살 이유가 없잖아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계속 묻는 것이 있어요. “네가 이거 할 수 있어?”라고 물어요. 그런데 그 묻는 것이 제자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도 할 수 없는 일만 골라서 시켜요. 예수님의무리가 가는데 성전세 내라고 누가 시비를 걸었던 겁니다.
24절에 성전세 받는 자들이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하니까 예수님께서 25절에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하니까 26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남에게 받습니다, 했지요. “내가 성전세를 받아야 될 입장이지 낼 입장이 아닌 것을 네가 알고 있지?”
마태복음 17장 27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반 세겔 내는데 예수님과 베드로 두 몫의 세금을 내겠다고 한 겁니다. 내는데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제자들이 흉내도 못내는 겁니다. 그냥 돈 빌려서 그 돈 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유별나요. 고기를 잡아서 고기 아가리를 벌리니 두 세겔도 세 세겔도 아니고, 오만 세겔도 아니고 딱 필요한 한 세겔만 딱 물고 나오는 고기가 물에서 노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20절에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기를 팍 죽여 버려요. 주님께서 니고데모한테는,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묻는 것이 마음을 낮춰라, 자기를 부인하라, 그런 이야기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구체화시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부터 출발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일체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혀 너는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그것을 구체화시켜가고 그것을 분명히 해가는 그런 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찾아가겠다, 접근해 가겠다.
사람은 일 해봤자 이 대자연의 움직임을 가지고 응용해서 하거든요. 그러나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 대자연은 사람의 요구조건 들어주려고 있는 세계가 아니고 ‘인간 쪽에서는 천국에 오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시기에 찾아가서 그들을 건진다.’ 에 동원되는 대자연이에요.
오늘 아모스 4장 13절에 나오지요. 모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창조의 모든 힘을 자기백성을 자기사람을 찾아가는데 그 역량을 다 쏟아 붓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물고기 한 마리가 한 세겔을 머금고 주님한테 찾아오지요. 낚시 잘 해야 돼요. 한 세겔 물고 있지 않은 엉뚱한 고기 잡지 말고. 딱 잡으니까 한 세겔이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은, 이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열어줘야 되지 인간이 열어주세요, 하고 문 두드린다고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제자들이 갈 때 그 전도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러한 취지를 살리고 전도하게 되면 아무도 자력으로 예수님 받아들일 사람 없어요.
그렇다면 그들이 못 알아 듣는다는 것 때문에 그냥 봐주느냐? 그런 것은 없어요. 마태복음 11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받아 챙기기는 받아 챙겼는데 이것이 자기가 잘나서 주시는 줄 알고 있어요. 인간이 무능하고 소용없고 천국가지 못한다는 그러한 징조로서 하나님께서 권능을 베풀어 줬거든요.
오늘 낮에 점심 드셨지요. 그게 주의 권능입니다. 점심 드시고, 아침도 드시고, 지난밤에 잠 잘 주무시고 오늘 잘 걸어 다녔잖아요. 이게 주님의 권능이에요. 그 권능은 뭐냐? 네 힘으로 되는 게 없음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권능이에요. 살아 있다는 게 권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 있구나, 생각하지 말고 ‘내가 꼭 살아 있어야 해? 아직까지?’ 이런 반추하는 것이 있어야 돼요. 거기서 다시 의심을 품어야 돼요. ‘살아 있을 능력이 없는 게 오늘도 왜 살아 있지? 우리는 대자연을 호흡을 심장을 뛰게 할 능력이 없는데 왜 또 심장은 뛰지?’ 이걸 의아해 해야 되고 정말 누구한테 감사해야 될지 감사할 분을 찾아야 돼요.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한 그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3,24절에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불 심판을 당했다고 소돔 고모라가 그렇게 유명세를 떠는데 너는 그보다 더해.” 그 때는 메시아가 안 왔잖아요. 하나님은 오지 않았다고요. 하나님 오지 않고 불심판이 왔지만 지금은 그 불심판이,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는 그 모습 자체가 왜 불심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느냐, 혜택 입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심판이 왔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거지요.
살아 있다고 좋다고 하지 말고 살 가치도 없는 것을 꾸역꾸역 살려준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라, 그 말입니다. 왜 안 살려주느냐고 닦달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왜 아프냐고 따지지 말고. 인간이 살려고 죽기 싫어하는데 주님 앞에서는 심판이 단순히 숨 끊어지고 숨 이어지고, 그것은 의미 없습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얇은 안개막 같은 것이라서 안개는 죽 지나가면 그냥 투과되잖아요. 죽음은 그냥 안개 같은 것이라서 현장에 가보면 그냥 쑥 들어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고 심판이라고요, 심판. 심판을 떼버리고 죽음이라면 자살 안할 사람 없어요. 급하면 다 자살하면 되지요. 중요한 것은 죽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 뒤에 무서운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불심판.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부터 보면 참 이거, 참 인간으로서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가 있지요. 27절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너희들 쪽에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안받아준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다가가야 되지요. 주님 쪽에서 자기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택함 받은 자만 구원받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자기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어요. 전부 모든 인간의 출발은 꼭 자기로부터 출발해요. 그러면 찾아오시는 주님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바로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죽음, 이 고구려 무덤 같이 갇힌 이곳, 저주받은 이곳에 주님이 찾아오니까 구멍을 뚫고 찾아온 셈이 되지요. 예수님께서 저주 안 받아야 될 분이 고구려 무덤 같은 이 세상에 오니까, 갇혀 있는 이 폐쇄된 공간에 오니까 자신도 그만 허약한 죄인의 모습으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들어오게 되니까 이 세상의 모습을 온 몸에 품고 아버지께 가면서 남긴 흔적이 뭐냐 하면 무덤이에요.
무덤,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그렇게 겁내는 죽음으로 갔어요. 모든 인간은 다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갇혀 있음 자체가 죽은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이 고구려무덤을 못 빠져 나간다고요. 벽화라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의 심판이에요, 불심판. 소멸하시는 불, 그걸 인간의 힘으로 못 빠져 나온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냥 죽은 상태에요.
그걸 자기로부터 출발하니까 인간의 모든 것은 그냥 꿈같은 겁니다. 꿈이라 하는 것은 야고보서 4장에도 나오지만 그냥 안개 같은 거예요. 안개가 되어서 그냥 지나가게 되면 다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안개 무섭다고 돌아가자, 하는 것이 있습니까? 안개 가봐야 멀리서는 부옇더라도 통과하게 되면 어린아이라도 얼마든지 죽죽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엷은 막 같은 것들의 중첩이에요. 하루도 죽음의 안개비가 아닌 것이 없어요. 전부 다 그렇게 나아가는 거예요. 나아가는데 문제는 안개기 때문에 갈 곳을 모른다는 거예요.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몰라요. 깜깜한 안개니까.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어디를 가든지 너는 폐쇄된 무덤 안에 있다는 겁니다. 주님만이 그 무덤을 일찍이 뚫고 지나간 거예요.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그런 게 있잖아요. “시몬, 너는 아느냐. 네가 망하는 소리를.”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자기가 망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돼요. 몸부림쳐봐야 소용없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 아모스로 돌아와서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같은 벌로서 자기백성 자기가 찾아갈 백성을 일단은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 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찾아와요. 이것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두 제자 다 내쳐버리고 홀로 빠져나가서 다시 그 주님이 자기백성에게 찾아올 때는 온 우주의 창조하신 그 능력을 총동원해서 주께서 찾아오신다고 아모스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우주의 모든 힘이 죽음세계마저 뚫고 나가는 십자가의 힘으로 작용해요.
이래가지고는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쉽게 설명하게 되면, 캐나다 로키산맥에 가면 푸른 호수가 있어요. 그 호수에 가면 그 주변 산들, 단풍 든 그 모든 경치, 좋은 풍경이 전부 다 호수에 같이 비취게 되어 있지요. 모든 풍경에 호수에 다 처박힌듯한 그런 겁니다. 우리보기에는 호수 안에 무서운 퍼런 물 안이 죽음 같고 여기 생생하게 옆에 있는 2천 5백여 미터의 설산들이 실제로 있는 것 같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실제로 있는 설산, 그게 꿈이고 진짜 리얼리티가 어디에 있느냐? 그 호수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 죽음 속에 있다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가 삶보다 더 풍성하고 더 깊다는 거예요. 죽음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멈출 수 없는 영원히영원히 샘솟듯이 무한대로 나오는 감사와 찬양과 찬미가 그 죽음 속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장점은 뭐냐? 그 호수 안, 그 죽음안의 세계는 이미 확정되고 고정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는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시는 그 능력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사람에게 찾아온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면 영원토록 오는 세계에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자체가 성령자체가 캐나다의 산악지역의 호수처럼 새로운 세계를 따로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자체가 하나님이 마련한 처소에요. 베드로에게 마련한 처소입니다. 그게 성령의 세계에요.
그게 죽음의 세계, 그게 뭐냐? 십자가 안 세계, 그걸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세계, 죽음 안,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 약속의 세계라는 겁니다. 약속으로만 구성된 세계.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서, 하나님, 주님이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여러분, 버림받았다, 배척받았다는 것을 한번 감안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눈에 보이는 세계, 눈에 보이는 인간들 세계에서 하나님 자신이 배척받았다면 하나님이 따로 마련한 세계는 그러면 어디다 마련하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어디다 마련하겠습니까? 인간들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밀어냈잖아요. 그러면 죽음을 통해서 밀어낸 세계, 아무도 올 수 없는 그 세계에 따로 하나님이 천국을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천국을 만들었으면 밀어낸 그 세계는 오늘 말씀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을 맞아도 그건 당연한 세계지요. 그것은 실재세계가 아니에요. 불로서 태워질 없어질 세계에요. 허상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 속에 나라는 것은 그 자체가 허상이에요. 꿈이에요.
인생은 하나의 오락이고 농담이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여기서 악마는 선악을 심어줘서 선악에 따라서 너는 안개를 마치 실재처럼 갖고 착각하게 만드는데, 이 세상의 나는요, 나 인 듯 나 아닌 나 같은 나, 나인 것 같은데 나가 아닌, 어차피 죽게 되면 없어질 나, 그 나를 내가 지탱하고 억지 쓰면서 ‘나 꿈 아니야.’ 실재라고 버티게 만드는 것은 뭐냐? 악마가 준 지식, 선과 악의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줘가지고 너희가 그렇게 선과 악을 안다면 이거 한번 지켜보라고 율법을 줘버려요.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해낼 수 없는 모든 과제에요. 아무리 해도 할 수 없는 과제, 이룰 수 없는 거예요. 지치게 만들어버렸지요. 좌절되고 말 수밖에 없어요. 이 땅, 우리는 지도 없이 항해하는 존재같은 겁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국민학교 때, 그 때는 초등학교가 없고 국민학교니까요. 영화에 보게 되면 40대 어른들이 사무실에 소파 놓고, 난로도 피워놓고, 큰 책상 놓고 거기에는 높은 사람이 앉고 작은 책상들도 놓여 있고요. 소파에 앉아서 김 마담 불러서 커피 배달시키고, 계란 얹은 상화차 시켜놓고 다리 꼬고 앉아서 오후의 시간을 때울 때 아, 어른들은 다 저렇게 놀면서 돈 버는 줄 알았어요.
사무실, 소파 있는 사무실,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양복 입고 오후에 커피 마셔가면서. 그렇게 해도 퇴근하면 앞치마 입고 있는 아내가 “오늘도 고생했지요!” 하고 인사하고 다음 날 되면 또 그 사무실에 가지요. 사무실에서 일하는 자가 성공한 사람인 줄 저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아, 그런데 얼마 전에 제가 그 사무실 가본 적 있어요. 화장실 찾아간다고 갔더니만 재개발사무실이었어요. 보니까 제가 어릴 때 영화 같은데서 봤던 꼭 그 모습이에요. 진짜 거기서 커피 배달시켜 놓고 잡답하고 있어요. 그 사무실에 앉아 있는 그 인간 몇 십 년 안가도 미이라 되어서 오그라져 있어요. 다 구부러져 있고 바짝 말라 있어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김 마담에게 쌍화차 시킬 때가 좋았지요.
조금만 세월 지나면 바짝 말라서 오그라들어요. 미이라들이 그래요. 죽은 인간이 지금 사무실에서 다리 꼬고, 다리 꼬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건만,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앉아서 커피 마시고 있는 겁니다. 다 허상입니다. 오락이에요. 승부 걸 필요 없는 게임 같은 겁니다. 시간은 남아돌지, 이 세상 어떻게 시간을 통과하는 그것, 힘듭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한마디 하지요.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해도 소용없기 때문에,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할 거야.” 주의 일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날마다 내가 뭔가 목표하고 기대하고 목적 삼는 이것이 다 헛된 꿈에 불과한 거예요. 한낱 소용없는 꿈인 것을 알 때 우리는 굉장히 인생이 가벼워집니다. 진짜 미이라처럼 가벼워지고, 무게 나가지 않는 먼지처럼 가벼워지고, 안개처럼 가볍지요
“네가 하지 마. 내가 다 할 게.” 아니 “내가 다 할 게”가 아니라 “내가 이미 다 했었어.” 그 이야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본격적인 인생은 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닙니다. 죽음 뒤에서 우리가 주님의 영생을 얻을 때 바로 캐나다설산의 풍경이 아니고 그 아래 호수 밑 죽음 안에 있는 세계, 무한한 감사와 찬미와 찬양이 터져 나오는 그곳, 그곳이 바로 주님이 계신 천국입니다.
꼭 죽지 않더라도 이미 성령 안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이쪽 세계, 허망한 세계와 진짜 허망하지 않은, 죽었다가 부활한 세계 둘 다를 중첩해서 우리가 느낀다면 그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헛된 꿈꾸다가 맨 날 실망하고, 세상 원망하고, 낙담하고, 그런 식으로 헛되게 인생 다 보내고 있는 저희들 아니옵나이까?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주셨사오니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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