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모스 3:9-12 / 죽음 속에 남은 자 본문
죽음 속에 남은 자
이근호
2020년 10월 7일
본문 말씀: 아모스 3:9-12
(3:9)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3: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3: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3: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단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변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도록 만들어버리십니다. 이런 상황은 에스겔 36:4에서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과 황무한 사막들과 사면에 남아 있는 이방인의 노략거리와 조롱거리가 된 버린 성읍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이것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을 우선적으로 겪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인류는 자기네 운명이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인간의 앞길이 희망적이라고 여깁니다. 지금 열심히 하면 미래는 저절로 더 나은 세상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의 앞일을 미리 이스라엘에 맞닥뜨리게 하셨습니다. 즉 그 어떤 민족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온 인류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입니다. 인류는 막혀있습니다. 가봤자 맹렬한 하나님의 분노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 점을 하나님께서는 짐승 사자로 표현하십니다.
무자비한 사자, 모든 인류는 그 맹렬한 분노가 기다리는 그 목구멍 속으로 쏟아지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미리 심판을 받는다는 바로 그 점이 지속적인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하는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심판 속에서 구원받을 자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자’입니다. 이 ‘남은자’의 특징은 사자에게 물려서 몸통은 날아가고 두 다리만 겨우 건졌다는 증거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맹렬한 심판의 흔적을 지닌 자만이 진정은 구원된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요 20:25) 사도 바울에게도 이 십자가 흔적이 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서 무엇을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자신을 아들만 챙기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하십니다.
‘인류의 일부’가 되어야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일부’가 되어야 구원된 자입니다. 하지만 이 ‘아들’은 오직 심판을 경유해서 심판의 흔적을 지닌 자를 말합니다. 이 아들 만들기 작업을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추진하십니다. ÷ 6=1 … 1에서 에 해당되는 숫자는 6×1+1=7이 됩니다.
즉 6을 심판받을 세상이라면 이 6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단지 하나의 일반인의 죽음으로 취급당해서 소실되어야 마땅한 분이 부활이라는 ‘나머지’를 낳았다면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세상은 마땅히 잘못되어 심판받기 충분함을 드러내는 증거자로서의 아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구약에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리 심판받아 죽은 상태가 되면, 이스라엘이 내뿜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 37:2-5에 보면,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짝 마른 뼈의 특징은, 뼈 자체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말씀에 입각한 죽음을 당한 자만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언약적 죽음’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체적으로 활발하게 스스로 자신을 가치를 지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인간이나 하나님이라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조건을 자체적으로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합니다. 그만큼 자신만큼은 의롭고 착하고 거룩하다고 여기고 그 증거를 쌓고 모으려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 앞길을 미리 막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리 멸망시켜버립니다. 이로소 이스라엘의 시간은 최종 약속 성취를 향한 새로운 시간으로 카운트가 됩니다. 기존의 자신이 살아있는 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과 연결시키고자 하면서 측정하는 시간과 다릅니다. 사무엘하 7:14에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오직 ‘아들 만들기’입니다. 이 아들은 기존의 인간들과는 달리 심판을 통과하신 분입니다. 심판 속에서 도로 살아나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분의 영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5-16) 아들의 역할은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겁니다.
즉 ‘아들 외에는 영원한 저주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증거하는 겁니다.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결코 자신의 성실과 노력과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 세상 구석구석에 깔려있는 인간들의 ‘자기 의’를 찾아내면서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력으로 심판을 통과해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을 산자로서 계속 사수해야지만 자신이 자기를 최후까지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자신을 구별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모두 다 온 인류로서 어느 누구도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모두 한통속으로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아들이 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속으로 끌려들어가서 더 이상 자신을 자기의 조치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내세울 일체의 ‘자기 의’가 없음을 반겨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심판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그 안에서 죽은 자임을 늘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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