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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20강, 321강) 울부짖음 , 숨소리 200720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20강, 321강) 울부짖음 , 숨소리 200720

정인순 2020. 7. 21. 08:48

320강 음성 동영상

321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20강-YouTube강의(울부짖음 마태복음 8:29)20200720-이 근호 목사


제320강, 제목은 ‘울부짖음’. 울부짖음은 자기의 예상대로 세상이 안돌아갔을 때 뭔가 폭발하는 거죠. 사람이 화를 내고 분노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세상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를 상대하느냐 하면 사람하고 사람을 상대해요. 사람하고 상대하게 되면 그 가운데 예의라는 게 있습니다. 배려, 예의, 예의범절, 에티켓 이런 게 있단 말이죠. 그런 게 있어줘야 사람 사는 관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죠.

그런데 그렇게 예의 차림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좋게 보고 사귈만한 사람이라고 호감을 갖도록 유도하죠. 벌써 그 때부터 세상을 잘못 읽기 시작한 겁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잘 보여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그것을 일굴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아닙니다.

울부짖을 때에 여러 가지 생각도 많이 하겠습니다만 마태복음 8장 28절에 보면,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드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이 점을 제가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 안했으면 이 세상은 누구 세계냐 하면 귀신 세계, 마귀 세계 맞아요. 그들은 울부짖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딱 지나가니까 그 쪽에서 귀신들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 질러 가로되”. 절망적이다 이 말이죠. 자기 미래는 끝난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귀신같이, 마귀처럼 자신의 미래를 알았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이 왔을 때는 ‘이 땅의, 이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다’ 라고 행세할 수 있는 시효가 만료되었어요, 끝났어요. 주인도 아닌 게 그동안 주인 행세한다고 꽤나, 경상도 말로 참 ‘욕봤다’ 이런 말 있죠, 욕봤다. 헛수고 했다 이 말입니다. 수고는 많이 했는데 다 헛짓이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남을 만날 때 이 세상 자체가 세상 신인 악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너도 욕보고 있고 나도 욕보고 있고 둘 다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믿을만한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인간은 믿을만한 대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둘 다 복음을 모른다 칩시다. 그러면 이 세상 사는 것이 만만하지 않잖아요, 힘들죠. 자기의 욕망은 높은데 세상은 자기 뜻대로 안되는 겁니다. 들었던 이야기인데 여자나이는 36이고 남편나이는 39이에요. 여자는 필리핀 여자고 남자는 놈팽이쯤 돼요. 나이 39인데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39에 물들였어요, 젊을 때 물들였으면 말을 안해요, 귀걸이 딱 하고. 그것도 연예인 쪽이 아닌데 다른 데인데.

남자는 그냥 엄마 집에 대충 얹혀서 살고 36살 먹은 필리핀 여자하고 결혼했는데 이 필리핀 여자는 한국말 잘 못해요. 할 줄 아는 게 뭐냐 하면 “우리 남편 돈 없어. 나 돈 쓰고 싶어.” 그 말밖에 못해요. 아무 일도 안 해요, 아무 일도. 애 하나 놓고 또 임신해놓고 돈은 혼자 있는 늙은 시어머니가 열심히 벌어서 아들 내외 다 먹여 살리는 그런 형편이에요. 여자는 그저 돈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필리핀 여자인데.

그럴 때 필리핀 여자가 갖고 있던 심정을 ‘우리는 이해못하겠다’ 라고 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이 땅에 태어나서 그냥 인간의 내면에 갖고 있는, 툭 치면 그냥 나오는 이야기가 “돈 쓰고 싶어요. 그러나 돈 벌기는 싫어요.” 나도 한국말 잘 못한다면, “돈 벌기 너무 힘들어요. 그러나 돈 쓰고 싶어요.”

그 필리핀 여자는 가장 근원적인 것을 표내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이해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누구나 동일하게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 땅에서 울부짖는다는 것은 결국 뭡니까? 돈 없어서 마음대로 못써서 울부짖고 또는 돈 있어도 자기 몸이 아프면 병원에 누워있고 약 들어가면 팔팔하게 활동 못하는 게 서러워서 또 울고불고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이 본문 마태복음 8장 28-29절 말씀에 의하면 이 귀신이 울부짖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에요, 차원이. “지금껏 우리가 이 세상 주인노릇 했는데 왜 당신이 오셨습니까?” 그것 때문에 울부짖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좀 더 이어봅시다. 귀신의 이러한 울부짖음에 대해서 귀신의 오야붕이 사탄이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네 아비는 악마라 했습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제발 우리 눈앞에서 좀 사라져 줘. 그래서 그들이 공모해서 죽였잖아요. 이것은 귀신의 울부짖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분노를 갖고 있는 겁니다.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아까 제가 얘기한 필리핀 여성을 보고 이해 안되는 게 없죠? 우리 속에도 그런 마음 들어있으니까. 철이 없어 그렇지 우리도 사실 내면에 그런 게 있죠. 이해를 한다 이 말이죠. 나는 시집왔는데 왜 이 집에 돈이 없냐고 화내고 울부짖는 것은 이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도 똑같은 입장에서 울부짖고 있으니까. 애써 그걸 억누르고 참고 있을 뿐이죠.

그런데 귀신이 울부짖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껏 우리 판인데, 우리 마음대로 인간을 갖고 놀았는데 당신 오시면 우리 일이 방해되고 끝장났으니까 울부짖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되죠.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뭐 천당 가려고 온갖 아양을 떨면서 “주님 사랑합니다” 뭐 찬송 부르고 뭐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온갖 것 하죠. 하지만 그러한 그 표현이나 표정 속에 못마땅함, 주님에 대한 떨떠름함, 주님께서 나를 너무 홀대한다든지 무관심하게 방치한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 이런 것이 섞여 있을 수가 있어요.

그걸 애써 감추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너무 고마워요.” 말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 마음속에는 주님에 대한 서러움, 울분, 이게 아까 이야기한 부르짖음. ‘주님, 내가 주인인데 주님 와버리면 내 뜻은 좌절되니까 섭섭합니다.’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마태복음 8장에서 귀신이 주님 앞에 이런 태도를 가진다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내 죄를 내가 안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들은 바로 자기의 내용이 속속들이 다 까발려지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그 점을 주님께 감사한다는 거예요. 그냥 건성건성 예수 믿는 게 아니고 까발려지면서 아, 이런 죄까지 용서했다는 것, 제대로 주님의 하신 일이 이해가고 그걸 인정하고 수긍이 되는 사람. 감사로 이어지죠. 울부짖음에서 감사로 이어지기 바랍니다.


321강-YouTube강의(숨소리 시편 104:29)20200720-이 근호 목사


제321강, 제목은 ‘숨소리’. 보통 숨소리라고 하면 살아있는 물질만 숨을 쉰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숨을 쉴 때는 과학적으로 산소를 받아들이고 탄산가스를 내뿜는다. 그런데 식물은 반대가 되어서 산소를 내놓고 광합성활동하면서 탄산가스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서 과학은 무엇을 해명하지 못하느냐 하면 ‘왜 이 세상은 숨 쉬는가?’ 그런 것을 그들은 몰라요.

왜 숨 쉬는가? 그리고 숨 쉰다는 범주를 사람, 동물, 식물까지 할 것인가, 그보다도 더 작은 것에도 숨 쉰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까지는 과학에서 주춤하는 경향이 있어요. 왜냐하면 과학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는 몰라요. 남겨진 게 너무 많아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숨 쉬고 있습니까? 산소호흡은 안하는데 그냥 움직이죠. 그러니까 전염되잖아요. 옛날 서양의 신화 만화 같은 걸 보게 되면 뿔 달린 악마가 활동하는 것이 꼭 메뚜기 같아. 여기서 구부려서 팔짝 뛰어서 탁 갖다 붙고, 스파이더맨이 이쪽 건물에서 저쪽으로 팔짝 뛰는 것처럼 악마는 재빠르게 사람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저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달라붙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서양 신화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동양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것은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소제되었다고 우기지만 친구 일곱 명 데려와서 달라붙는 것, 그런 것을 연상하면서 ‘아, 귀신이나 사탄은 자기 원하는 대로 메뚜기처럼 폴짝 달라 붙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신종코로나도 비슷하죠.

그런데 그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마귀가 숨 쉽니까? 귀신이 숨 쉬어요? 그것은 숨 쉰다고 말하기가 곤란해요. 왜냐하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아무리 작아도 영적존재는 아니죠. 영적존재는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숨 쉰다고 말은 못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인간은 과학적 인식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는 인간의 범주를 인간이 알지 못하는 범주까지 모든 것을 확대시켜 버립니다.

시편 104편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여기 보면 ‘호흡을 취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여기 ‘저희’가 누구냐 하면 그 앞에 보면 땅에 있는 짐승들, 그리고 바다에 있는 여러 가지 동물들, 그리고 악어, 온갖 식물들 다 포함돼요. 동물들 주로 이야기하고, 30절에 보면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식물, 동물 할 것 없이 모든 세상이 살아있게 하시는 거예요, 활발하게.

그런데 시편 104편의 이 대목을 보면 누가 그렇게 하게 하느냐 하면 ‘주의 영’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새가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잡초가 만년동안 있는 게 아니고, 호흡을 취하시면 잡초든 참새든 간에 죽게 되어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그렇다.

그러면 왜 성경에서는 모든 만물에 대해서, 짐승들이 숨을 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느냐.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주의 영을 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숨 쉬게 하고있고 살아있는 걸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주의 영이 있는 자들은 이 말을 알아듣는다, 그런 취지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주의 영이 있는 사람과 주의 영이 없는 사람과의 차이는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내가 태어날 때부터 호흡에 대해서,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호흡에 대해서 호흡이 유지되고 중지되고 하는 것이 자기 의지, 선택이나 결정에 의해 마음먹은대로 된다, 안된다? 안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사람이 어디 놀러간다. 밥먹고 싶다. 일단은 뭐가 되어야 돼요? 숨을 쉬어야 되는 거예요. 호흡이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가장 기본적인 것을 주의 영이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뜻이 있다면, 주의 영을 가져가게 되면 그 사람 나름대로 어떤 거대한 계획이 있다할지라도, 심지어 내일모레 예식장 잡아놓고 결혼한다 할지라도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게 되면 네 색시는 누구의 신랑이 되겠냐? 그렇게 되겠죠.

그래서 시편에서 이 말씀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네 가슴 쪽에 쿵쾅쿵쾅 뛰는 이것부터 한번 손대봐라. 하나님이 깊숙이 네 인생에 지금도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네 눈에 토끼가 뛰어가고 고라니가 물을 마시고 모기가 윙~하고 날 물려고 달려들 때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이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 모기가, 파리가 윙~하고 날아가는 것도 누가 개입했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무것도 아닌 미물에게 개입했듯이 아무것도 아닌 너를 내가 이렇게 개입해서 계속 살려두고 있으니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시편 104편 34절에 보면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아까 식물이든 동물이든 주께서 호흡 데려가면 죽어버리죠. 하나님께서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는 분이에요.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십니까? 아, 코끼리를 하나님께서 인도해서 하신다. 그거 이야기하려고 하시는 게 아니고 ‘너’ 이야기, 너. 네 안에서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는 것을 네가 늘 상기하고 있느냐. 매일같이 그걸 끄집어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도 내 뜻대로 안될 때. 시험쳤는데 시험 성적이 안나올 때,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을 때,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멀쩡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다 해서 “나 요양병원 갈란다. 내 배 째라. 돈 내놔라.” 이렇게 나올 때.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하나님,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꼬이게 하시다니 너무 합니다.’ 이렇게 되겠죠.

그러나 시편 104편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줄 때 생각해보세요. 바로 그게 악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본을 까먹었어요. 근본을 까먹어버렸어요. 왜 까먹냐? 남들하고 비교하느라 분주했거든요. 저쪽 학원은 아무것도 안하면서도 넓혀 있고 우리는 복음으로 모여도 좁아서 뭐 이거는 이 동네에서 다시는 안한다.

뭐든지 사람은 평소에 툭 튀어나오는 말이 자기가 지금 정신을 어디 팔고 있는가가 여과없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날라다니는 침방울, 비말 속에 바이러스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내뱉는 것 속에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그 악인과 죄인의 사고방식이 바이러스처럼 섞여서 남들과 주고받고 주고받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뭐냐 하면 다시, 다시 네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의, 하나님의 개입이다.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의인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