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18강, 319강) 내기, 시공간 200707 본문
녹취:이하림
318강-YouTube강의(내기 욥기 1:9)20200707-이 근호 목사
제318강, 제목은 ‘내기’. 도박이죠. 하나님께서 내기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잘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욥기 1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누구하고 내기하느냐? 악마와 내기하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악마는 어떤 식으로 성도한테 나타나느냐? 하나님하고 내기했던 그런 관계 속에서 악마는 인간을 건드린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죠.
하나님하고 내기한 상태에서. 그것을 인간은 몰라요.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서, 아, 악마가 인간을 건드릴 때는 하나님하고 내기했구나. 결국 하나님이 악마하고 내기한다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 본인 손에 달린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인간 구원되는 것은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지 인간이 용쓰고 애쓴다고 본인 구원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기여가 없어요.
만약 중간에 악마의 내기가 없다면, 하나님과 악마가 내기했다는 사실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중립으로 여길 거예요, 중립으로. 여기서 내가 잘하면 천당가고 못하면 지옥간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하나님하고 악마의 내기가 없었으면 ‘내가 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러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전적으로 기여하겠죠. 자기 구원이 자기 책임으로 돌아오겠죠.
그래서 욥기의 내기라는 것이 사실은 엄청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죠. 하나님께서 악마와 내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 쪽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결정했는데 악마가 뭘 건드리느냐 하면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이 변화의 여지가 있다고 시비거는 겁니다. 하나님이 확실하게 구원하고 싶어도 인간이 제대로 바짝 정신 못 차리면 하나님이 확실하게 한 구원도 취소가 될 수 있다. 무효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누가? 악마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오늘 이 <내기>라는 강의에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알아야 될 것은 악마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중점을 두셔야 됩니다. 악마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결정한 그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건드려 보는 거예요. 욥기 1장에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욥의 구원의 확실성을 언급합니다. 1장 8절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하나님께서 욥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의도적으로 악마한테 그걸 넌지시 제시한다는 겁니다. 욥이 구원이 확실히 된 것을, 그냥 하나님께서 가만히 마음에 두는 것이 아니고 악마한테 그걸 알린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악마야 사탄아, 네 할 일 해야지. 이제 슬슬 건드려봐. 내가 확실하게 구원시킨 인간에 대해서 건드려봐야지. 네가 하는 일이 그 일이잖아. 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바꾸어서 이 세상에 유포하는 일이 너의 일이잖아. 자, 너의 일의 개시를 내 쪽에서 너한테 한번 시비 걸어봐?” 해서 욥을 자랑하는 것처럼 악마에게 제시하는데 사실은 욥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욥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이 “확실하게 내가 구원시키기로 작심했다” 이 확실성에 대해서 사탄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 진행과정에 대해서 여러분이 악마라면, 뭐 여러분이 악마 될 필요는 없지만, 여러분들이 악마다운 성질이 있다면 뭐라고 그 다음에 이야기하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자, 여기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이미 구원하기로 결정했는데 악마의 노림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결정해도 인간들의 결심이 오래 안가면 구원탈락입니다.” 라고 악마는 인간을 건드리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약함을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확실하게 구원해도 인간이 그 하나님의 확실함에 대해서 제대로 호응 못하면 그 인간은 탈락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악마는 말합니다. “내가 인간에 대해서 잘 압니다. 인간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인간은 자기 구원도 보존하지 못하는 그런 어설픈 존재라는 걸 내가 너무 잘 압니다.” 악마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아신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아마 인간에 대해서 더 잘 알걸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건드려라. 자, 건드려라.” 이렇게 되는 거죠. 여기서 내기가 진행되는 겁니다.
성도가 뭐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해보죠. 성도라는 것은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는 이미 종결된, 확정된 구원이 찾아온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미 인간들은 악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미 구원이 확정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과분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인간의 입장에서.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가 구원받는데 한 게 없거든.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말씀을 지킨다든지 순종한다든지 실천한다든지 이런 게 없어요. 없으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악마의 지배를 받는 육신의 속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악마가 흔드는 그 흔들림에 대해서 범죄한 아담의 속성을 받은 인간의 속성으로 이제는 여지없이 갈등과 흔들림이 생기는 겁니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다른 거예요.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구원받은 걸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내가 나를 관찰하고 분석해보니까 아무리 봐도 구원받은 사람 같지가 않아요, 내가. 왜? 어설퍼도 너무 어설프니까. 법적인 기준에 못 미치니까. 최선의 노력은 하지만 최선의 노력이 온전한 건 아니잖아요. 늘 미흡함을 남기죠.
그 점을 누가 아느냐? 악마가 너무 잘 아는 거예요, 악마가. 그래서 악마는 이 내기에서 하나님한테 지기 싫은 거예요. 지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는 악마의 그 속성을 왜 하나님께서 부추기는 겁니까? 인간의 나약함을 주님께서 모르겠어요? 아시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확정했다는 것은 조건을 인간에게 찾지 않는 거예요. “인간아, 너는 결심이 대단할거야. 너는 각오가 대단할거야. 너는 한결같을거야.” 라는 식으로 새삼스럽게 하나님이 구원받은 인간에게 요구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결정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아이, 실망했다. 나 너 후회한다.” 이런 식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욥을 구원하기로 결정할 때는 욥이 어떻게 나오든 관계없이 결정된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악마로 하여금 수단껏 흔들기에 나서게 만들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확실성은 흔들기 속에서 더 빛이 나는 겁니다, 흔들기 속에서.
만약에 어떤 인간이 흔들릴대로 흔들려가지고 주님의 약속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면 그건 애초부터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구원받으려고 용쓰고 애쓴 사람이죠. 그러나 하나님께 욥처럼 구원받기로 확정된 사람은 흔들기가 아무리 멀미날 정도로 흔들어대도 결국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쇠가 지남철에 붙듯이, 흔들기를 하더라도 어디에 갑작스럽게 딱 붙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에, 언약에 달라붙게 되어 있어요.
내가 나된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아닙니다. 이상하게 거기로 딱 돌어서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그 생각에 얼마나 흔들렸다고요. 그런데 어느 날, “참, 하나님은 나한테 물어서 나를 구원한 게 아니지. 주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창세전부터 선택해서 구원됐잖아.” 라는 쪽으로 딱 갖다붙게 되어 있어요, 그 약속으로.
그러면 그 성도는 약속만 증거하게 됩니다. 자신의 불확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증거하는 것은 주님의 확실성만 증거하는 거죠. 이것은 인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319강-YouTube강의(시공간 마태복음 26:64)20200707-이 근호 목사
제319강, 제목은 ‘시공간’. 시공간이라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과학. 과학적으로 세상을 볼 때 시공간으로 본다. 이렇게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어디서 활동하는가? 시공간. 이것이 과학적 안목이죠. 누가 바이러스를 퍼트렸는가? 우한. 그것은 시공간이에요.
절대로 “하나님이 하셨다” 이렇게 안나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나가지를 않습니다. 왜? 시공간은 눈에 보이는 그 전체를 전부다 총괄해서 표현한 게 시공간이에요. 시공간을 다른 말로 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전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연장을 시켜요. 그것은 이제 수학에서나 과학에서 점선으로 찍죠. ‘…’ 우주의 크기는 이것만 하다 해놓고 … 또는 +α. 여지를 남기는 겁니다. 하지만 그 여지 남기는 것하고 눈에 보이는 것하고 연결되어 있어요. 끊어져서 다른 세계, 다른 시공간? 이것은 사람들이 욕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지식의 한계라 하는 것은 시공간입니다. 그렇게 이제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목적은 죽음 이후가 아닙니다. 왜? 죽음 이후는 시공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없는 걸로 보거든요. 그래서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인간들은 ‘모르겠다’가 돼요. ‘…’이 되든지 ‘모르겠다’가 돼요.
그러면 아는 것만 생각할 때 죽음까지 안다는 거예요. 어디냐 하면 장례식장까지는 알아요. 대구의 장례식장 우리 동네에 어디 있다. 그것까지는 알아요.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셔가지고 장례식으로 간 건 아는데, 화장터 간 건 아는데 그 다음에 어디 간 것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디 묻은 것은 아는데 그 다음에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평소에 ‘안다’의 수준이 고 정도 수준이에요, ‘안다’의 수준이.
그래서 코로나 19에서 죽은 사람 숫자를 세고 또 이태리 같은 경우에는 지역신문 부고란이 넘쳐가지고 힘들어서 기자들이 도망가고 뭐 그랬답니다. 부고란이 한두장이 아니고 서른 몇장 되니까. 그 죽은 사람이 어디 갔는가는 생각 안해요. 다만 죽었다 안타깝다. 우리는 저렇게 죽어서는 안된다 라고 움츠러들겠죠.
그래서 시공간의 특징은 늘 조마조마하며 살아갑니다. 안절부절하면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어떻게 해서든 좀 더 버틸 수 있도록. 100세 노인이 코로나 나았다 하면 아이고, 대단하다. 마치 100세가 한계 같아요, 한계. 100세 넘으면 뭐 덤으로 더 사는 것 같고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죠.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서 오느냐는 겁니다. 시공간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가 있고 엄마가 있다. 엄마는 마리아고 아버지는 요셉이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해서 잉태한 자가 예수님이어야 하는데 성경에 보니까 결혼하기 전에 약혼한 상태에서, 그리고 동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이나 8장, 5장에 보면 나는 하늘에서 왔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2장도 마찬가지고. 하늘에서 왔다. 그러면 그 하늘이 어디냐? 인간이 아는 시공간을 넘어서죠.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왔다’가 중요하지만 더욱더 다급한 문제는, 시급한 문제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시공간을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시공간 너머 있는 주님의 세계를 위해서 하루하루를 일하고 밥 먹고 사느냐?’ 본인들을 한번 돌아봐야 되죠.
예수를 안 믿는다면,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에 의해 동침해서 낳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뭐 죽음 뒤에는 가봐야 하는 문제고 그것은 중요한 문제 아니고 이 땅에 오래 사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되겠는데 만약에 예수를 믿는다면요. 예수를 믿는 것도 다들 안 믿지만. 예수를 믿는다면 뭐가 바뀌느냐 하면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과 원인과 출처, 다 바뀝니다. 다 바뀌어요. 그러면 이 땅은 중간과정에 불과하거든요.
창세전이니까 예정되어 있으니까, 시공간 바깥에서 와서 시공간을 잠시 들렀다가 시공간 바깥으로, 다른 시공간으로 같이 빠져나가는 거예요. 성도의 인생이라는 게.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지나가는 거예요. 패스, 인생이라는 것은.
패스하는 경우에는 이 땅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 그렇게 애닳을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나가는데. 답변 안해도 여러분들 아시겠죠? 잠언서에 보면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라는 게 있거든요. 어떤 데이트 커플이 싸운다. 중년 아저씨가 집에 가는 길이라면 그냥 가면 되요. 그런데 그냥 안가고 “어이, 너희들 왜 싸우냐?”고 이렇게 간섭하면 그 커플들이 싸우다가 갑자기 휴전해요. 그리고 둘이 이구동성으로 아저씨보고 뭐라고 합니까? “아저씨, 가시던 길로 그냥 가시죠.”하죠. 가시던 길로 아저씨 그냥 가세요.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그냥 가시던 대로 가면 돼요, 성도는.
마태복음 26장 6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금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스쳐가는 게 아니고 이 땅에서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들이에요.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 땅에 메시아가 왕으로 오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땅에 오실 왕. 그들의 시공간적 입장에서는.
“당신이 왕이냐? 당신이 이스라엘 왕이냐?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거예요. 이 묻는 것은 ‘너 아니잖아’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묻는 거예요. 네가 거짓말했다면서? 유대인의 왕도 아니고 이스라엘 왕도 아니면서 네가 사람들에게 ‘내가 왕으로 왔다’고 얘기했다면서? 그걸 추궁하는 겁니다, 재판장에서, 공회에서, 가야바 제사장 앞에서 추궁을 하는 거예요. 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느냐? 지금 이 백성들을 봐라. 메시아 오는 것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메시아도 아니면서 메시아 왔다고 해가지고 지금 사람들이 현혹되어 있다. 책임져야지. 네 죄값은 치러야지. 이런 식으로 재판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나 왕 맞아. 아까 64절 말씀처럼, 내가,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 그러니까 너희들 눈에 보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전체 이 우주의 왕으로 올 때는 거창하게 오시는 거예요. 대단하게 오시는 겁니다. 엘리야가 이 땅을 떠날 때 약간은 거창했죠. 하늘나라에서 준비된 불마차가 왔습니다. 누가 대리운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늘에서 불마차가 내려와서 모시고 갔죠. 대단하게, 거창하게 왔어요.
그러나 엘리야보다 더 거창하게 주님께서는 왕으로 오십니다, 구름타고. 왜? 인간이 알고 있는 한계 내의 시공간이 아니라 그 너머까지 왕이시기 때문에.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왕이지만 주께서 이 세상을 넘어선 왕 같으면 지옥에서도 왕이에요. 지옥 갈 사람을 지옥 보낼 권한이 왕한테 있고 천국 보내는 것도 왕이에요. 천국 갈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하나 놓치지 않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다 살리는 그러한 왕의 능력이 예수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 모습은 우리처럼 스쳐 지나가는 거죠. 우리는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주님은 스쳐 지나가면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 권세와 능력을, 파워를 갖고 있죠. 그러면 그 파워가 오늘날 성도에게 고스란히 다 주어지는 겁니다.
성도의 인생에 있어서, 성도의 팔자에 있어서 일어나는 모든 세세한 일, 애가 뭐 아프다든지 감기 걸렸다든지 이 모든 세세한 일도 누구로부터 온 권세입니까? 예수님께서 인도한 권세에요.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픈 것도 다. 그 모든 일어난 일은 성도로 하여금 주께서 왕과 내가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 마음대로 하지 않고 주님 마음대로 왕 마음대로 할 때, 우리는 수시로 이것은 왕이신 주님의 솜씨라고 그렇게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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