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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14강, 315강), 상처, 회상 200602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14강, 315강), 상처, 회상 200602

정인순 2020. 6. 3. 06:27

314강 음성 동영상

315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14강-YouTube강의(상처 아가 5:8)20200602-이 근호 목사


제314강, 제목은 ‘상처’. 상처가 2개의 원인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어요. 하나는 내 뜻대로 안될 때 상처 받아요. 내 마음대로 안될 때 상처받죠.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자기애, 자기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자기사랑을 하게 되면, 조금 사랑하게 되면 그걸로 사람들이 만족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무한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뭐 이만하면 됐다고 멈추는 그러한 계기가 없습니다. 죽도록, 죽을 때까지 사랑해도 인간은 자기사랑을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상처는 반대죠, 남을 사랑할 때. 남을 사랑할 때 그래도 상처를 받아요. 방금 제가 상처이야기를 하면서 첫 번째 경우도 그렇고 두 번째 경우도 제가 무슨 단어를 사용했느냐 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면 상처를 통해서 사랑의 유무가 느껴지게 되어있어요.

상처가 없다면 밋밋함이에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알 도리가 없어요. 내 뜻대로 안되도 허허 웃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안되면 화가 나게 되어있고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전부다 남 탓으로 돌리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립니다. 화가 단단히 났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사랑이 있고 안그러면 또 다른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는 거죠. 결혼을 한다고 할 때 흔히 세상에서 하는 말이 “왜,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습니까, 두 사람이?” 그러면 바로 딱 나오는 답변은 항상 이렇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누가 들으면 인간을 이렇게 오해해요. 내 사랑을 멈추고 그 다음부터 나를 사랑한 그 모든 사랑을 상대방에게 퍼주기로 나는 마음먹고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그런 소리했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이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말이 맞다면 내 뜻대로 안돼서 상처를 받겠어요, 아니면 상대방이 아파하는걸 보고 더 상처받겠습니까? 상대방이 아파하는 걸 보고 상처받기 마련입니다, 그 말이 맞다면, 결혼이라는 게. 그래서 결혼하게 되면 자기 사정이야 어찌됐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고 슬퍼한다면 같이 울어주고 같이 달래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기가 생겼다 합시다. 아기가 생기게 되면 상대방을 사랑했던 그 사랑이 어디로 쏠리느냐 하면 아기한테 쏠리게 되어있어요, 특히 여자들은 그렇거든요. 그러면 그걸 보고 누가 의아해하느냐 하면 그 아기아빠, 남편이 의아해하는 겁니다. 내 아내는 결혼 때는 날 사랑한다고 했다가 가만 보니까 우리 가정의 우선순위가 집안의 개만도 못하나? 서열상 개 다음에 내가 있는. 관심사가 그쪽으로 가면서 약간 질투 같은 걸 느끼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를 소홀히 대한다 느끼면 남편이 갑자기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상처를 받아요.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상처라 하는 것은 결혼하고 난 뒤에는 나야 어찌됐든 간에 상대방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으로 같이 느껴진다 했죠. 그런데 분명히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상대적으로 차별받는 느낌을 받으니까, 결혼한 뒤에 나는 내 사랑이 없다고 여겼는데 막상 결혼하고 돌아가는 모든 걸 보니까 지독하게 내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결혼을 해도. 그러면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는 말은 전부다 빈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상처>라는 제목의 이 설교는 먼저 우리가 어디서 상처받는가부터 살피자 이 말입니다. 살피고 내 상처에서부터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을 일단 우리가 분명히 아셔야 돼요. 알고 그 다음에 무엇을 알아야 되냐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가슴앓이하는 그 상처에 우리가 같은 성령을 통해서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과 우리 사이가 제대로 된 사랑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러면 자기 생명을 사랑안하는 사람은 자기로 인하여 상처를 받겠어요, 안받겠어요? 아까 처음에 설교한 대로라면? 내 뜻대로 안되도 상처 안받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래요. 더 큰 사랑이 나한테 덮쳤기 때문에,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도시합할 때 꼬마하고 강호동처럼 아주 덩치 큰 사람하고 유도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유도하다가 강한 사람이 힘이 세니까 엎드려서 누르기를 하겠죠. 덮어버리겠죠. 그러면 그 안의 꼬마는 팔딱거려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누르는 덩치에 꼼짝도 못하죠.

주님의 사랑이 이런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그동안 내 하소연, 내가 짜증냈던 것이 주님의 그 사랑에 다 덮치어 버리죠. 우리가 결혼한 배우자나 다른 사람에게 해줄 때 소위 생색낸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딴에는 양보하고 자기 딴에는 희생할거 다 하면서 내가 평생 결혼생활동안 너한테 이만큼 해줬다고 자기 한 것을 잊지 않고 얼마나 생색을 내겠어요.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의 어떤 선행이나 행함보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할까요? 나는 의인하고, 잘난 체하는 인간하고 나는 혼인하지 않겠다. 나는 못난 처자하고 하겠다. 내가 살리지 아니하면 누가 와도 못살리는 그런 인간하고 나는 혼인하겠다. 내 신부로 맞이하겠다. 그 사랑이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이게 아가의 5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사랑을 하니까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느 정도로 했습니까? 나로 인하여 병난 게 아니라 찾아온 사랑으로 인하여 내가 병이 날 정도로, 끙끙 앓을 정도로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누가 가르쳐서, 성경에 이렇게 나오고 교회 나올 때는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누가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성경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 지킵시다. 순종합시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주님이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뭐냐 하면 천하에 못난 존재라는 것이, 이상하게 그게 느껴져요.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이 왔기 때문에 내가 나를 챙길 마음이 들지를 않아요. 내가 못났잖아요. 그러면 못난 대로 그냥 내버려둬요, 자꾸 수습하지 말고.

아, 내가 옛날에 이정도로 못나진 않았는데. 자꾸 요령부리고 자기를 꾸미고 하지 마세요. 관리하지 마세요. 주님이 아주 싫어하십니다. 네가 만약에 잘났으면 주님한테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 맨날 자기 생색낼 거 아니냐. 그런 사람은 필요 없어요.

자기를 미워할 정도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나로 인하여 상처받지 않는 관계.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더 이상 나로 인하여 상처받지 마세요. 나의 못남으로 인하여 끙끙 앓지 마세요.


315강-YouTube강의(회상 사도행전 2:36)20200602-이 근호 목사


제315강, 제목은 ‘회상’. 회상할 때 우리가 이방인이잖아요. 유대인 아니죠, 이스라엘 사람 아니고 이방인이죠. 이방인들은 이렇게 보시면 돼요. 이방인의 특징은 자기 개인주의입니다.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1순위가 나의 행복이에요, 아니 0순위가 내 행복이에요. 그러면 지금이 행복하다 또는 불행하다를, 본인이 그 주관심사니까 그걸 점검에 나서겠죠. 점검에 나서면서 ‘지금은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를 비교대상을 찾으면서 그걸 정립해요.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오랜만에, 학교 다닐 때 늘 잘난 체하고 나보다 낫다고 자랑질하고 자기가 참 좋은 데 장가가고 시집갔다고, 우리 집안 빵빵하다고 그렇게 자랑질하던 동창생을 만났는데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쫄딱 망했어. 그때 얼마나 기쁘면서 행복한지 몰라요. 얼마나 행복한지.

집안 파탄 나고 이혼하고, 집안 부도나고 아내는 아프다고 할 때 좋은 기색을 하면 실례잖아요. “그래, 힘내. 그래도 네가 하나님을 믿어봐. 하나님께서 다시 옛날처럼 너 보상해 줄 거야.” 밑도 끝도 없는, 근거도 없는 그런 횡설수설을, 기분 좋은 것은 강제로 억누르면서 친구로서 위로하고 “다음 볼 때는 네가 나보다 훨씬 좋게 되어 만나길 원한다.” 속으로는 ‘네가 그럴 리가 없어.’ 이런 이중성을 보이면서. 어째든 간에 기분 좋아요. 이게 뭐냐 하면 비교하면서 되는 거예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자기보다 공부도 못하고 항상 바보소리 듣고 왕따 당했던 애가 뭐 갑자기 길가다가 빵빵 소리 나서 보니까 벤츠에서 창문열고 “어이, 잘 있나?” 하고 갔을 때, “응, 잘 있다. 다음에 만나자.” 하고 간 시간이 12초 5인데 그 12초 5가 그날 하루 기분 다 잡쳤어. 이 나이 먹도록 도대체 난 뭐했나? 난 이거 중고차 타고 이게 뭐야? 쟤는 새 찬데. 갑자기 기분이 싹 안 좋죠.

그래서 이방인들의 개인주의 같으면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 방금 동창생 만났다 했죠. 그게 과거입니다. 인간은 과거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져와요. 과거에서 지금이 보다 더 발전했다 싶으면 지금 행복이라 여기고, 과거에 내가 기대한 것보다 소기의 목적에 영 미달하게 되면 아무리 지금 내가 한 달에 수천만원씩 돈 벌어도, 과거에 내가 이정도보다 더 된다고 만약에 과거에 꿈을 너무 많이 키워버리면 자기가 어떤 서글픔을 느껴요, 불행을 느낀다고요.

이게 이방인, 모든 인간의 기본입니다. 그러면 방금 제가 이방인 이야기했다고요. 회상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유대인의 회상은 어떻게 하느냐? 유대인은 말씀, 율법을 가지고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택함 받은,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시시하게 개 같은 이방인하고 비교 안합니다. 안하고 하나님이 세워준 그 기준에 도달했느냐, 미흡하냐 가지고 자기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측정하거든요. 그 기준에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자, 그러면 과거에 율법이라 할 때는 모세오경도 포함되지만 구약 전체를 봅시다. 선지서 이런 걸 다 봅시다. 그러면 구약 전체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사사기나 역사를 딱 보게 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요. 말씀을 주는데 그 말씀을 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고자 해도 그 말씀을 못 지키고 결국 위반해요.

5년간 말씀 지켰다. 그런데 5년 그 다음날 단 하루에 말씀 어겼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만 있습니까, 가만 있지 않습니까? 5년 간 지켜왔는데. 그거 안 봐줍니다. 단 하루 어기면 이방민족 보내가지고 작살내거든요. 네가 나를 버렸다고. 그러면 이야기를 해봐요. 10년간 잘 지켰다. 그런데 11년째 1주일동안 완전히 엉망으로 살았다.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라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을 주고 난 뒤에 뭐가 포함되느냐? 말씀을 위배한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방식도 말씀 안에 같이 결합이 되어 있어요, 결속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 후대의 사람들이 그 말씀을 대할 때 무엇을 겸해서, 같이 겹쳐서 대하느냐 하면 “이 말씀에 대해서 선조들은 실패했다. 실패했는데 하나님께서 추가적으로 그 실패에 대해서 용서하는 새로운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되겠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아직 살아남아 있잖아요, 지금 신약말고 구약 때에.

그렇다면 말씀을 볼 때 무엇을 회상하겠어요? 이 말씀 줄 때 우리 선배는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겨서,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줬다 또는 구원자를 보내줬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다 추가해서 사사, 또는 사무엘 선지자 나오죠, 사무엘이 기도해서 블레셋 이겼잖아요. 그 내용이 추가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말씀에.

그러면 말씀 자체가 뭐냐 하면 “인간이 실패했다”를 보여주는 회상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회상의 내용. 이게 이스라엘의 회상이에요. 자, 이방인들의 회상 다시 말씀드릴까요? 이방인들의 회상은 집단적이다 아니면 개인적이다? 개인적이죠. 개인적일 때 목표는 내가 행복하냐 행복 안하냐. 개인적이니까 행복하냐 안하냐의 기준은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내가 어릴 때 꿈꿨던 그 행복 있잖아요, 그 기준. 그 기준을 과거의 것을 자꾸 회상해서 지금 그 기준에 내가 맞느냐 안맞냐 자꾸 따지겠죠.

그래서 이 이방인의 회상은 목적이 지금 내가 어느정도 행복하냐 안 그러면 내 미래가 어느정도 확보되어 있냐. 너무나 개인적이에요.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상이라 하는 것은 “과거에 실패한 것을 돌이켜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또 그런 예를 들면, 시편 같은 데 보면 시편 105편도 나와 있고 그런데요. 그게 뭐냐 하면 시편에서 예언자들이 계속 이야기할 때,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원망해서 망했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은 그때처럼 돼서는 안된다. 그렇게 당부하는 내용이 시편에 나와 있어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 나오죠. 스데반 집사가 설교한 설교가 길게 나와 있습니다. 자, 그 설교내용 뭡니까? “옛날에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줬건만 우리 민족,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광야에서 원망했고 그 뒤에도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아서 오늘날 이 모양 이 꼴로 이방민족에게 억압되었다.” 그 내용이 나와 있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방금 한 것을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십자가가 뭘까요? 방금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율법의 완성이에요, 모든 예언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안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잘났다’만 나오겠어요, 아니면 ‘인간들이 이렇게 실패했다’도 같이 포함되어 있겠습니까? ‘실패했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같은 경우에 “채찍에 맞음으로” 할 때에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야 될 이유,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자기 백성이 성공했다, 실패했다? 실패한 그것을 주님이 껴안기 위해서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양 같아서 지옥 갈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 책임을 누가 진다는 말이죠? 예수님 자신이 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경 말씀 안에 압축되어 있어요, 녹아져 있다고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회상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보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보면 그 성경 말씀 안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간의 실패담이 그 안에 다 녹아져 있으니까 이방인들처럼 사적인 자기 욕망이나 욕심 그걸 기준으로 해서 회상하면 안되는 거예요.

오늘같이 날이 이렇게 꾸물하다. 꾸물한데 옛날 젊을 때 좋아했던 노래가 나온다. 팝송이 나오던지 옛날 젊을 때, 20대 때 좋아했던 노래가 나올 때 갑자기 무슨 생각이 확 떠오릅니까? 과거, 그 때 내 모습이 확 떠오르죠. ‘그 때 참 내가 잘나갔었는데’ 라든지, ‘그 때 참 내가 거리낄 게 없었는데, 그 땐 참 꿈도 컸었는데’ 그런 이야기 나오겠죠. 그게 바로 순간순간 이방인의 회상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 들었으니까 이방인의 회상이 나오더라도 우리는 그걸 통해서 또 어디로 가야돼요? 이스라엘의 회상.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모자라고 못났느냐. 그래서 주님께서 기어이 용서를 해야 된다는 그 환경이 말씀 안에 녹아져 있으니까 말씀을 볼 때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의도하시는 택한 백성의 회상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