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끝
이근호 2020년 5월 13일
본문 말씀: 호세아 10:12-15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0:13)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10:14)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훼파되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훼파한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미와 자식이 함께 부숴졌도다
(10:15) 너희의 큰 악을 인하여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멸절하리로다
예언은 도중에 취소되거나 무효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언을 지키지 못하면 예언이 흐지부지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언은 기어이 나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성취되어 버립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 굳이 나에게 유익과 혜택하는 말씀하는 이해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나름대로 믿음 생활을 꾸준히 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란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의 자신이 될 때까지 늘 조심스럽게 자기 관리에 소홀함이 없었기에 이런 괜찮은 결과를 낳고 있다고 믿습니다. 즉 자신의 판단을 굳게 믿으니 하나님이 주신은 예언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생존을 넉넉하게 할 힘으로 가득차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와 긍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인간들은 힘만이 실효성있고 실제적인 유익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움과 긍휼하심이 들어 있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의식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서에서 긍휼이란, 바람난 아내를 돈으로 값을 주고 다시 데려오는 작업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구원되지 못할 자에게 구원이 되게 하는 작업이요 긍휼을 입을 수도 없는 자가 긍휼을 입는 작업을 말합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른 것을 요구하십니다.
인간들이 나름대로 믿음 생활을 얻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결정과 판단의 탁월함’입니다. 즉 ‘나는 옳다’라는 것을 자기로 인해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일에 집중합니다. 그 집중되어서 나타난 자신을 사랑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그것은 죄악이요 거짓 열매라고 규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갈아 엎으라”고 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시편 85:10-11에서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줄곧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갈아엎고 오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어 진리가 나오는 땅을 만들었고 그 진리성은 마지막에 하늘에서 의가 와 서로 만남으로써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진리로 갈아엎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갈아엎을 수가 없습니다.
줄곧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을 보내어 갈아엎게 하셨습니다. 어미와 자식이 함께 죽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난관이 오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신의 착실함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너무 심한 조치를 취했다고 반항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은 ‘구원의 때’란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몰아세우려는 절차입니다. 끝의 끝으로 데려가기 위한 조치입니다. 인간들은 끝까지 자기 판단과 선택과 결정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난관이 찾아들면 본인이 몸소 감당할 수 없는 영역 판단을 합니다. 즉 “하나님이시여, 어려움이 이 선 안까지는 들어오지 않게 지켜주옵소서”라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선을 그어버립니다.
그 선마저 돌파되면 또다시 자기쪽으로 더 밀리는 경계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나님, 정말, 제발 이 선에 있는 것마저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옵소서”라고 하소연합니다. 인간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 가장 믿음직(곧 신앙의 내용삼기)에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킬만해서 지켜놓고,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지켜내었다’고 여전히 자신의 판단력에 힘을 실어주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믿는 것은 ‘많고 큰 것에 대한 무한신뢰’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세로 지내는 것이 ‘거짓 열매’에 눈독들이고 사는 생활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란 인간은 ‘끝의 끝’, ‘망함과 망함의 끝’, ‘종말과 종말’의 경우가 발생되는 그 시점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아의 끝이 오지 아니하면 자기 고유의 것을 기어이 기키기위한 몸부림을 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 끝이 아닙니다.
열왕기하 18:30-32에 보면, 앗수르 왕이 유다나라를 찾아와서 협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앗수르왕을 대신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한 랍사게는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저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정녕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않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숙이 자리잡은 본심을 노출시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하는 신앙생활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생활이 아니라 끝까지 요령껏 자기 단도리하는 생활입니다.
즉 끝까지 나에 대해서 책임자는 나밖에 없음을 굳게 믿습니다.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아는 랍사게 장군은 집요하게 인간의 본심에 호소합니다. 성문만 열면 살려주겠다는 겁니다. 이 세상 그 어느 신도 앗수르가 항상 이긴다는 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첫날 밤을 치러는 신랑, 신부의 행동은 상대방의 옷매문새를 푸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인간들이 대외적으로 나서면서 자기 단도리를 마감하는 지점이 윗저고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점을 공략해서 ‘끝의 끝자리’까지 몰아세우십니다. 인간의 해체하십니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헛된 짓을 했음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종이 함부로 찢게 되면 찢어진 자리가 거칠게 됩니다. 이 거친 면에서 양쪽이 서로 하나됨을 유일하게 증명할 수 있는 접촉면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 방식은 ‘십자가’라는 거친 모습이고 백성은 자신의 거칠게 죄인으로 살아왔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서로 만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인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성과가 남지 않게 함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나를 위한 고민거리와 걱정거리가 없도록 몽땅 주님께 다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1강-호 10장 12-15절(끝의 끝)2005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0장 12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5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0:12-15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훼파되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훼파한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미와 자식이 함께 부숴졌도다 너희의 큰 악을 인하여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멸절하리로다.”
역시 예언의 말씀을 호세아를 통해서 듣게 됩니다. 예언의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뭘 하라, 하는 그 말씀까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지 않고 싶어도 그렇게 하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고 예언하시는 겁니다. 예언이라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 예언을 무시한다고 해서 예언이 취소되거나 무효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지시를 내린다. “너희는 예배당 청소를 하라.” 이렇게 했을 때 “하기 싫어요.” 하고 예배당청소 안하고 집에 갔다 합시다. 그런데 그 다음 주 수요일에 와보니 예배당 청소가 깨끗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한테 묻지요. “하나님이 분명히 저보고 예배당 청소하라고 했는데, 저는 하기 싫어서 청소를 안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예배당이 깨끗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예배당 청소를 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예배당 청소를 하라, 할 때의 그 너, 너에서 다른 사람으로 ‘너’가 바뀐 거예요. 너희는 예배당 청소를 하라, 할 때 지금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되거든요. 우리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하기 싫어요, 라는 결정을 내리고 예배당청소를 안했어요.
안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어이 다른 사람을 불러다가 예배당청소를 시켰다는 말이지요. 시켰을 때 처음에 너희는 예배당청소를 하라, 할 때의 그 너희가 우리는 꼭 나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예배당청소라는 일의 완결에 참여된 사람이 처음부터 ‘너희’라고 예상하고 그렇게 예언하신 겁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우리 자신을 그냥 하나님께 드리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한순간도 우리의 결정과 선택을 중지한 적이 없습니다. 내 선택과 내 결정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는 말은 이미 우리에게는 나름대로의 믿음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일에 집중하고 그래서 그 일이 오늘날 자신을 있도록 지금 이상태가 있게 했다. 내가 나에게 결정하고 선택한 것 그리고 내가 나에게 공들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이 믿음, 이러한 확신 그 확신이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는 믿음이 있어요. 신앙체계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내가 나를 믿는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는다는 말은 지금의 내가 있기 까지 꾸준하게 나를 믿어왔고 그 덕분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신앙이 없는데 신앙이 있으라는 말이 아니고 기존신앙이 이미 있어요. 기존신앙이 있기에 그 신앙으로 호세아 10장 15절 말씀도 이해하고, 성경의 다른 구절도 이해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죽어서 천국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신앙을 신앙으로 간주를 하지 않아요.
그 신앙을 쪼개보면 예언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 대해서 미리 내 생각으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본인이 만들어낸 거예요. 본인이 만들어내고, 자기의 이상적인 모델도 스스로 상상하고 그걸 규정해서 그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것, 이미 자기 자신을 교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이 그 교주에 엎어지는 신자로 간주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음이 있고, 자기에 대한 잘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고,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니까 믿음 소망 사랑 다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믿음 소망 사랑은 씨도 안 먹히지요. 먹힐 수가 없지요. 자기가 자기결정과 선택에 대해서 인정하고, 그걸 긍정하고, 그것만이 자기가 수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예언은 먹히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갈아 엎어버려라, 하지요. 12절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기경이란 묵은 땅을 갈아엎는 거예요. 자기해체지요. 모든 것을 풀어버리는 겁니다. 무엇을? 묵은 땅을. 네가 평소에 너의 신앙체제, 나는 나만 믿는다는 그 신앙체제, 그것을 괭이나 호미나 삽이나 도끼로라도 자꾸 부수고, 그걸 기경, 갈아엎어버려라. 왜 갈아엎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은, 사람이 그리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름대로의 계획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자기가 친히 만든 나라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2절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의를 심고 긍휼이 거두어지는 그러한 나라, 그 나라가 하나님께서 그리워하고 보고 싶고 그걸 목표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둔다는 이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평소에 인간이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평소에 원하는 것은, 자기가 힘을 가지고 많은 힘을 가지고 자기가 신처럼 군림하는 것, 자기가 최고가 되는 것, 최고 가치자가 되는 것, 모든 의미가 나에게 쏠리는 것,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 그런 것을 인간은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런 것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는 내가 최고가 되고, 나만이 우뚝 서는 상황을 인간들이 고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믿음의 목표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13절에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실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악을 밭 갈았고 죄를 거두었다는 것, 그리고 거짓열매를 먹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하면,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많다는 것, 힘이 강하다는 것, 숫자가 많아서 내 편이 많다는 것, 내게 능력이 많다는 것, 그런 방식으로 원래 내 내부에서 올라오는 욕망의 내가 되기를 우리는 너도 나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가 그걸 밝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참 백성 이스라엘을 원하건만 현재 북쪽 이스라엘, 남쪽의 유다도 마찬가지지만, 이 이스라엘은 세상 사람하고 조금도 차이나지 않고 힘을 갖고 싶다는 것, 남에게 꿇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목표를 향하여 평소에 자기가 계획 잡고, 결정했고, 선택했고, 그래서 그들은 얼추 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지금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겁니다.
결정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방향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영접할 사람은 영접하되 배척하고 거절할 사람은 거절하겠다, 라는 식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해 온 겁니다. 그런데 영접하고 거절할 때 어떤 의식이 드느냐? 내 인생을 내가 가꾸어 나가는 나에 대해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믿음이 있어요.
그 믿음이란 나는 내가 지키고, 내가 키우고, 내가 생존케 한다는 그런 믿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절대적인 자기종교지요. 이 종교에 대해서 자기가 거기에 모든 것을 열중하고 거기에 몰입을 하고 있으니까, 집중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나 됨에 대해서 책임감도 같이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건 상당히 중요한데요. 내가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자꾸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게 충실했는가, 내가 정말 열심히 나다운 목적에 내가 게으르지 않고 봉사충성 다했는가, 라고 돌아보면서, 자기 목표와 비교하면서 스스로 책임감을 떠안는 거예요. ‘내 인생에 내가 책임지자.’
자기 인생에 책임져야 하기에 항상 긴장되어 있어요. 그리고 또 선을, 경계선을 쳐버려요. 그래서 지난 부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항상 대인관계에서 남을 볼 때에 자기가 자기에게 신자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교주고 신자니까 뭐라고 하느냐?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이게 항상 전제되어 있어요. 선을 그어놓고 이 선 넘어 오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묻는 것은 뭐냐? 너희에게 의와……, 공의죠, 의와 긍휼이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만들기 위해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의와 긍휼을 집어넣는 거예요. 긍휼이라 하는 것은 호세아 1장부터 나오지요. 바람난 자기 아내를 값을 주고 데려오는 것이 긍휼이고 사랑이지요.
그러한 요소가 너희에게 들어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어떤 이스라엘이라는 목표가 있고,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내 인생은 내가 구축한다는 목표가 있고, 그 두 목표 사이가 맞지를 않는 거예요. 서로 다른 겁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이만큼 살기까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고, 착실하게 내 관리를 잘 했다는 자기의 자기공로만 남기를 바라는 이 인간의 마음, 그러니 인간이 자기에게 신자가 되지요. 믿음체제가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그게 바로 네가 힘을 원하는 것이다.” 힘을 원한다는 말은 진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너는 힘만 있고 네 사람 많으면 네 인생 성공한 것처럼 착각하는데 호세아를 통해서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내가 네 속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뭐냐? 공의, 의와 그리고 긍휼을 찾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찾는 것은 없고 본인이 본성적으로 갖고 싶은 것만 갖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두고 거짓열매, 죄고 악이라고 그렇게 규정을 해주시는 거예요. 12절에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그리고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는 것은, “너는 그동안 거짓 열매를 먹어왔고, 그동안 너희들은 죄를 거두고 악을 밭 갈았다. 약속의 땅을 악으로 대체했고, 죄를 거두고, 거짓열매를 먹어왔다.”라고 하면서 “네 자신의 마음 네 모든 것을 엎어버려라 파헤쳐버려라. 그러면 하늘에서 의를 비처럼 내려주시겠다.” 하는 겁니다.
비처럼 내려주겠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없고, 의는 하늘에서 내려와야 된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시편 85편 10절-11절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하강이지요, 하강. 레펠 타듯이.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땅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의 진리가 개시가 된 거예요. 개시가 되고 그 마무리가 뭐냐 하면, 의가 하늘에서 내려오게 되면 땅에 있는 진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의와 만나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은 수직적으로 위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솟아나면서 만나고 그러면 이 땅의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장차 의를 모시는, 의가 활동하는 무대, 또는 의를 모시는 무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속에 하늘의 요소, 하나님의 요소가 다른 민족에는 없어도 이스라엘 속에 계속해서 일을 벌여온 거예요. 낯선 하늘의 요소, 땅의 요소가 아니고 하늘의 요소가 땅에서 진리로서 일을 벌여온 겁니다.
일을 벌였다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세아 선지자, 땅에 있는 기존의 인간들의 평균적인 희망사항, 그들이 스스로 자기를 믿는 의를 부정해버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부합되는 진리만 외치는, 진실만 중요시하는 선지자가 여기서 등장한 겁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가 하는 일은 뭐냐? 상대방에게 으샤으샤, 하면서 위로하거나 상대방에게 아부하는 일이 아니고, 그 사람 마음을 공격해서 그 사람마음을 파헤쳐서 본색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겁니다.
본색을 드러내는 일을 선지지가 할 때 ‘그거 뭐 어렵나? 주여, 죄인입니다, 하면 되지.’ 하는데 “죄인입니다,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그걸로 마음을 기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을 기경하고, 죄를 엎어버리고, 묵은 땅을 기경하는 방법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땅을 엎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없는 이유가, 아까도 했지만 인간의모든 선택과 결정에는 노림수가 있어요.
이런 일을 하게 되면 내가 기대하는 목표, ‘내가 완전한 자로 점차 달라지겠지요.’ 라는 자기 자신을 최종적으로 믿는 그 믿음을 스스로 없앨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 할지라도 오히려 자기목적을 달성하는 재료로, 비료, 사료로 자꾸 집어넣지 이 자체가 해체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살기로 했다.’라고 본인이 결정을 그렇게 내리고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본인이 지는 거예요. 이것은 곧 죽어도 지금의 내가 되는데 내가 기여한 바가 있다는 그 점을, 자존심과 자긍심을 인간은 버릴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제가 국민학교때 단체로 가서 본 영화가 있어요. <성춘향>이라는 영화인데 춘향전중에서 제일 먼저 우리나라에 영화로 나왔던 작품인데 한 5십 몇 년 전 영화입니다. 성춘향과 이도령이 첫날밤을 보내는 장면이 나와요. 춘향이는 굉장히 쑥스러워하고 있어요.
등잔불이 켜 있고, 밖에서는 창호지문에 구멍을 뚫어서 그걸 보려는 눈동자들이 보이고, 춘향이는 수줍은 듯 앉아 있습니다. 그 때 이도령이 춘향이를 공략하는데 있어서 윗저고리의 옷고름을 삭 당기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이건 뭐냐 하면, 평소에 춘향이가 여자로서 자기가 대외적으로 남 앞에 나설 때 마지막 마무리지점이, 옷고름을 단정히 함으로서 그동안 내가 나에게 했던 모든 것을 지키는 자물쇠역할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했지만 마지막은 옷고름을 단정하게 쫙 잡아당기는 그것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 도령은 춘향이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는데 있어서 춘향이가 했던 그 행동의 역순으로 들어갑니다. 그 마무리 지었던 윗저고리의 옷고름을 잡아당기는 거지요. 자물쇠를 푸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취하는 조치가 인간이, 자기가 이정도 하면 의젓하고 누구한테 내놔도 욕 들어 먹을 일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단정하다고 여기는 그 마지막 마무리 마감재, 그것을 해체시키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동안 해온 모든 것이 다 끝을 향하여 가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미리 상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다가오게 되면 선을 그어요. 선을 긋는 것은 이 이상 넘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더 쑥 다가오지요. 또 선을 그어요. 그러면 더 다가오지요. 그러면 도저히 감당 못할 거예요. 자살해 버립니다.
자살하는 것은 마지막 남은 나의 것이라도 건지자, 이 마음으로 자살해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타인이니까, 자기만이 자기고, 타인이 올 때에 인간들은 하나님이라니까 무서워서 주춤 뒤로 물러가요. 물러가면서 선을 딱 긋습니다.
‘이것까지는 해드리겠습니다.’ 더 오게 되면 ‘이것까지는 해드리겠습니다.’ 계속 주춤주춤 뒤로 물러가면서, 자기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고이고이 가꾸어놓은 이것이 무너지는 것을 내가 나에 대한 신자기 때문에, 신도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포기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드라마에 보게 되면 남자친구가 여자 친구를 만날 때 자기 차 있다고 자랑질 하면서 차 태워서 여자 집에 데려다 주잖아요. 안전벨트 잘 매셨습니까, 하면서 작업 걸다 그것은 실패하고, 차에 태워 데려다 주면서 그냥 돌아가기 뭐해서 어정쩡하게 있으면서 “잘 들어가세요.” 하고 곧바로 차에 타고 자기 집에 가면 되는데 안가요.
옛날 집은 주로 옆에 전봇대가 서 있어요. “우리 다음에 언제 만날까요?” 하는데 아가씨가 겁을 내면서 주춤 뒤로 물러가지요. 물러가면 더 다가가서 이야기하는데 또 물러간다고요. 여러분도 나중에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다 나중에는 옹벽에 닿아서 더 이상 물러갈 데도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상상해 보라는 거예요. 마감 너머의 마감이 어떤 상태인가? 끝 그 뒤에 있는 그 끝은 어떤 상태인가? 주님께서는 바로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헌금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때 이것은 본인의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직까지 내 것으로 내가 숨통 틀만 하고, 숨 쉴 만 하고, 내가 인간답다고 누구한테도 자랑질 할만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 헌금 받으시고 내 봉사 받으세요.’ 이것은 아직 끝의 끝이 아니고 마감의 마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직도 자기에게는 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잘하고 있다는, 자기가 잘한 행동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끝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마치 이것은 이 도령이 춘향이의 옷고름을 풀어보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갑옷으로 철갑을 입은 새로운 옷이 등장했어요. 그 옷을 전기용접으로 벗겨보니까 그 안에 철판으로 또 깔린 옷이 나오네요. 그걸 또 벗겨내니까 이번에는 티타늄으로 만들어서 강철의 일곱 배나 강하다는, 희토류 광물에서 추출해낸 것을 덧댄 더 강력한 토치카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게 오늘날 교인들 모습 아니에요? 12절에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에서 그 ‘때’라는 것, 여호와의 찾을 때 또는 여호와를 만날 때, 라는 것은 최종적 더 이상 마감의 마감, 끝의 끝, 그것도 모자라면 끝의 끝의 끝, 내 것이라는 것은 전부 다 어떤 경우라도 13절의 말씀처럼 내가 그동안 나를 품고, 내가 구축하고, 내가 형성하고, 이것은 내가 한 업적이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거짓열매요, 악이고 죄라는 것이 발각될 때, 그 순간이 될 때까지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백성 되게 하기 위해서 밀어붙이는 거예요. 옹벽 밑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게 싫어서 도중에 자살해버리지요. “하나님 내가 이처럼 수치스러울 것 같으면 차라리 하나님을 믿느니 죽겠습니다. 나의 수치를 내가 용납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뭐냐? ‘내 끝을 주님 앞에 나는 노출시키지 않겠습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얼마나 악마적인지.
전에는 천하의 천사처럼 살았지요. 악마가 달리 뭐겠습니까? 경계선을 계속 만들어서 구석으로 몰더라도 그 마지막 구석에는 내 인생 나름대로 잘 살았다, 하는 그것이 요만큼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아니고 뭡니까?
그래서 주님의 예언은 여호와를 만날 때를 찾는데 그 여호와를 만날 때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돈 주고 힘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의와 긍휼을 주시는 분이고, 의와 긍휼을 주시는 분을 알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동안 가꿔놓고 내가 유지했던 것은 의와 긍휼에 정반대되는 것, 대비되는 것 그게 뭐냐? 내가 그동안 죄악으로 거짓 것만 보물인양 여기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들통 나는 시점,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때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걸 밝혀주셨는데요. 마태복음 9장 16절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생베조각, 오늘 본문 같으면 묵은 조각이지요. 새롭게 주어진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결합을 시키면 낡은 것이 다 해체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사람은 단백질로 되어 있지요. 단백질인데 시한폭탄은 금속으로 되어 있어요. 딱딱한 물질로 되어 있지요. 인간의 몸에다가 금속으로 된 시한폭탄을 묶어놓고 시간에 맞춰서 스위치가 눌려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단백질이 폭탄에 의해서 완전히 해체되겠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 몸에다 각각 폭탄을 장착한 거예요. 폭탄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참되고 진실되게 사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알았던 겁니다. 자기가 죄의 거짓된 열매를 맺으면서도 참된 열매고, 하나님 사랑하고, 좋아하고, 믿음 소망 사랑이 있다고 여겼어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그것은 구원이 되지를 못한 상태에요. 아직 구원의 때를 못 만난 거예요. 아직 구원의 때가 이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9장 17절에 보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가 터진다는 말은 옛날 부대가지고 새포도주를 감당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새포도주가 들어왔다는 말은 옛 부대가 찢어져버린 거예요. 해체되는 거예요. 첫날밤에 이 도령이 성 춘향 옷고름을 풀 때 이미 이 도령도 알고 성 춘향도 알고 둘 다 공감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네 것이고 나는 너를 접수하겠다.’ 이미 합의하에 그렇게 옷고름을 해체시키는 거예요. 마지막 자기 자신을 지키는 자물쇠를 상대에게 허락한 거예요.
사실은 강제로 했지만. 이 도령 앞에서 성 춘향이 옷고름을 쥐고서 “이것 풀어드릴까요?” 하면 이것은 과거가 있는 여자지요. “가만 있거라. 내가 풀게.” 우리가 풀 수는 없어요. 우리가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좋게 보고 긍정적으로 보기에, 이 마음 같으면 어디에 가도 참 믿음 좋다는 소리 듣는다, 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나의 최후를 우리는 자꾸 거부해 버린다고요.
그동안 이만큼 신앙생활 한 것도 어딘데? 얼마나 공들였고 애를 썼는데? 나쁜 짓 피하고, 술 담배 안하고, 화투도 안치고. “화투가 뭐예요?” 할 정도로. 전혀 화투니 포커니 구경도 못해보고, 나이트클럽은 상상도 못하고, 부비부비? 그게 뭔지도 모르고,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남진이 누군지, 나훈아가 누군지 그것도 모르고, 그저 신앙의 가정에서 찬송가만 불러대고 ‘주여, 죄송합니다. 가스펠송이라도 부르고 싶습니다.’ 하는 그 정도는 하지만, 그 정도로 자기가 자기의 완벽에 완벽을 기해서 자기 선택과 자기결정, 그런 식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놨는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짓열매 그리고 그것은 죄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동안 천국가기 위해서 힘 모아놓은 거예요. 힘을 적금든 겁니다. 어디가 더 힘이 될까? 축협은 2.2프로, 농협 1.0프로, 새마을 금고는 1.56프로, 이처럼 자기비축, 하나님에게 나 이정도로 의로웠습니다, 하고 내놓을 수 있는 적금을 부은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그래가지고는 안 되겠지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보고 예배당청소하라고 했는데 청소를 안 하든지 대충 하고 가버렸는데 수요일에 와보니 예배당이 깨끗하게 청소되었더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겨서 당연히 나에게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는 그것을 곡해해서 들을 수밖에 없어요. 나 잘나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이용한 거예요. 그러면 이 모든 말씀은 누구에게 준 것인가? 장차오실 왕에게 준 겁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훼파되되 살만(살만에셀이라는 앗수르 왕입니다)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북쪽 어느 지역인데 지금은 정확히 모릅니다)을 훼파한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미와 자식이 함께 부숴졌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국가대 국가의 전쟁, 국가단위로 전쟁을 하는데 거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왕이 대표자로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장차 하늘의 의, 그리고 땅의 진리 이 모든 역할을 꾸준히 이스라엘 속에서 왕이 되시는 분이 행하셨고 지금 이 말씀도 어떤 왕이 오셔서 한다는 거예요. 왕이 오시게 되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왕을 기대해야 되겠지요. 그게 구원의 때인데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내가 믿었던 왕들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본문 15절에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멸절하리로다.” 새벽에 멸절한다는 말은, 저녁에 분명히 살아서 코골면서 잤는데 아침에 “임금님 기침 하셨습니까?” 하고 문열어보니 죽어 있다는 말이지요. 언제 죽었겠어요? 새벽에 죽었지요. 이것은 사람이 암살을 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밤에 잘 때는 하나님이 관여하잖아요. 하나님이 죽인 거예요.
그 왕, 하나님이 손대면 곧장 죽을 수밖에 없는 왕 중심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동안 자기가 죄짓는 것도 모르면서 살만 하니까 살았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그 사는 방식이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다른 나라에 대해서 자기도 힘으로 대처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어야 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도 없고, 긍휼도 없고, 이방나라와 동일하게 힘을 의지해서 나라를 이루고, 그 나라덕분에 본인의 소기의 목적인 생존을 이루려고 시도했던 겁니다.
이제는 그 조건과 그 체계를 와르르 와해시켜서 없애는 겁니다. 없애는 방법이 열왕기하 18장에 나옵니다. 열왕기하 18장 전체 내용은 이렇습니다. 앗수르가 북쪽 이스라엘을 쳐부숩니다.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앗수르가 보기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 의미가 없어요.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똑같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먼저 북쪽을 삼켜서 접수하고, 남쪽 유다까지 삼켜서 히스기야 왕 때 유다의 많은 성읍들을 훼파해서 다 접수하고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해서 큰소리치는 대목이 바로열왕기하 18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살려고 애를 썼는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 느후스단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우상시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없애버리고, 그 많던 산당이나 우상을 없앱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에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이렇게 다 깨트려버린 거예요. 믿음대로 살려고. 6절에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다나라 남쪽의 이스라엘은 ‘히스기야 왕만 있으면 이제 든든하겠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고 믿음대로 안 살았을 때는 안 나타난 것이 믿음대로 산다고 보이는 그 순간에 앗수르가 쳐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유다백성 입장에서는 ‘괜찮은, 신앙 좋은 왕이 있기 때문에, 그 왕 때문에 우리는 편하게 살 것이다.’ 하고 하나님이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때가 아니에요. 끝의 끝이 아닙니다. 마감의 마감, 그 끝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신앙대로, 믿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비로소 끝의 끝, 마감의 마감을 보여주는 겁니다. 믿음대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상당히 어려운 말이지요. 우리가 믿음대로 살게 되면 ‘믿음대로 살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살만하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걸 지금 열왕기하 18장에서 깨트리는 겁니다.
산헤립의 부하 랍사게가 이렇게 합니다. 19절부터 나오는데 기니까 축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는 말이,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지켜준다고 너희 백성들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그렇지? 그러나 그거 믿지 마. 너희들이 역사적으로 알다시피 이 앗수르의 대군을 쫓아낸 적이 있느냐? 각 민족마다 신이 있는데 어느 신이 우리 앗수르를 이긴 신이 있느냐? 있어, 없어? 있어, 없어? 있어 없어? 없지? 그거 봐. 너희가 여호와 믿는다고 해서 너희를 지켜주지 않아.” 라고 몰아세우는 거예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끝을 보고, 나의 마음을 보라고 신앙을 주는 거예요. 여기에 종이가 있어요. 이걸 찢었습니다. 찢고 난 뒤에 청소하다가 찢어진 한 부분을 주워서 나머지 찢어진 부분을 찾으려고 한다면 이 경계선에서 맞으면 처음부터 하나인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을 구원하는데 구원의 때가 되기 위해서는 이 종이를 찢어버리지요. 찢어버리고 그 찢어진 경계선 날카로운 이 경계선 끝의 끝, 마감의 마감을 보여주는데 그 마감이 뭐냐? ‘내가 아무리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도 역시 힘이 있어야 마음에 안심이 된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내가 목사가 되고, 신앙생활 50년 해도 역시 믿을 것은 돈밖에 없더라. 돈과 건강과 그리고 날 사랑하고 위로해주는 친구, 친척, 가족 잘 되는 것, 나는 그게 더 기뻐. 나는 하나님 믿고 구원받은 기쁨보다, 나는 내 가족이 평안하고, 잘되고, 아들 사법고시 합격하고, 딸은 의사되는 그것이 더 좋아. 나는 승진하고. 투자만 했다 하면 50배 백배로 값이 오르고. 나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더 좋아. 추상적인 하나님보다 그게 더 좋아.’
그 마지막 죄악 된 본성이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예언으로 인도해주심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계속 지겠다, 하는 이상은 옹벽으로 밀어붙이십니다. “너는 네 손을 떼야 돼.” 네가 마감, 마감의 마감이 되든 끝의 끝이 되든 네가 아직도 네 마감에 대해서 주저하고 끝 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한다면 네가 너에게 신자지 그것은 나를 믿는 신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랍사게가 와서 얼마나 고마운지 인간의 본색을 다 드러냅니다. 29절에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 이야기에 속지 말라. 하나님을 이용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말라. 믿으면 너만 손해다.” 그 말이에요.
‘죽으면 부활된다고? 죽으면 너만 손해야. 부활 안 해주면 어쩔 건데?’ 이런 생각이 끝의 끝에 와서 그 진실됨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 경계선에서, 그 거친 경계선. 하나님 만날 때는 십자가로 만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질 의사가 없어요. 주님은 십자가로, 거친 모습으로 왔는데 우리는 참한, 매끈한 것 가지고 만나니까 이게 만날 수가 있어요? 이게 한 백성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고린도후서 6장 1, 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선교단체에서 애들에게 얼마나 외우게 했는지 이거 안 외우면 짜장면도 못 먹잖아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때다. 손들고 나오라는 말이지요. 예수 믿음이라고 쳐줄 테니까. 구원의 때라는 것은 뭐냐? “내가 끝의 끝, 마감의 마감이라도 좋습니다.” 하는 그 때가 구원의 때에요. 왜? 마지막에 십자가와 십자가의 만남, 죽음과 죽음의 만남이 아니면 다른 만남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히스기야에게 일부러 최후의 최후를 우리에게 맛보게 하십니다. 그럴 때 히스기야는 이사야를 찾아가서 하소연하지요. 그러면 이사야가 하는 말이 “내가 다 들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랍사게가 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다 들었다.” 하는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이게 기쁨이에요.
내가 결정하고, 평생 내가 선택해서 이만큼 했다는 그것이 기쁨이 아니라 손을 놔버리라는 말이지요. 주님한테 마지막 최후의 단단하게 나의 나됨을 마감하는 그 윗저고리를 주님의 손에 맡기라, 그 말입니다. 이게 풀리도록, 내가 해체되도록, 주님의 손에 의해서.
열왕기하 18장 35절에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그 많던 군사들이 하루아침에 다 죽었어요. 그 많던 힘, 그 많던 의지하던 힘, 우샤우샤 해서 사람들 많아야 안심이 되는 그 거짓믿음의 마감,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리와 긍휼을 우리에게 찾고자 하지, “내가 이만큼 착실했습니다. 훌륭했습니다. 성실했습니다. 자기관리 잘했습니다.” 그것은 안 찾습니다.
주께서 찾으시는 것은 주께서 친히 심어주신 것,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진리요, 십자가가 값을 대신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긍휼, 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행함과 자기책임감을 믿으면서도, 그게 진짜 거짓믿음인지 몰랐습니다. 저희들 마지막의 마지막, 우리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주님이 하시는 대로 할 정도로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죄짓는 그 자유함, 그 신비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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