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안목
이근호 2020년 5월 6일
본문 말씀: 호세아 10:9-11
(10: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에 서서 흉악한 족속을 치는 전쟁을 거기서 면하였도다
(10:10) 내가 원하는 때에 저희를 징계하리니 저희가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저희를 치리라
(10:11)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의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지니는 나라이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에는 계시지 않고 오직 택하신 자신의 나라에만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일한 안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 안목이란 세상을 심판하고 저주하시는 안목입니다. 저주하심이 지극히 당연한 조치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은 갖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각 사람의 마음에 이방민족과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저주 안목이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이방민족과 유화적으로 친해지면서 이스라엘로서의 특이함과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차이됨’을 상실해 버린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의 적’이 지닌 요소를 끄집어내십니다. 그 방식은 이스라엘과 적인 이방민족을 통해서 실시하십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스라엘을 죽거나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닙니다. 치욕스러운 상황으로 이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1절에 나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힘든 밭농사를 암소라는 짐승에게 길들려 시켰습니다. 자신들은 그 암소 위에 올라 타고서는 곡식을 밟거나 밭을 일구는데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이 형편이 이 암소 형편처럼 됩니다. 이방민족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암소 다루듯이 다루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게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방민족들이 너무 공포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깊은 공포를 통해 이스라엘은 넘치는 수치에 휩싸이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징벌을 통해 이스라엘의 각성을 유도하십니다. 도대체 자신들의 여호와 섬김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방민족의 문화에 대해서 현혹되면서도 형식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이 마음은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저주하시겠다는 단호함이 없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내부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징벌 받을 요소가 있다는 말은 곧 세상은 벌써 망하도록 되어 있고 인간은 죽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세상이 망하고 각 개인이 죽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물이 빠져 죽든지 아니면 차 사고도 죽든지 아니면 병들어 죽든지 모든 인간의 죽음은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이런 계시를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의아해하고 이상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말씀을 전하거든 누구를 만나거나 누구를 방문하거나 일상의 행동을 하면서, “이 일이 끝나고 내 목숨이 끝이다!”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앙이란, 자신의 행한 일 이후에 그 어떤 여지를 남겨두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자꾸 여지를 만드는 것은 ‘과거를 계속 이어가는 삶’이 됩니다. 인간의 몸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로 자꾸 채워지는 몸’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몸은 ‘미래의 낯선 요소로 채워지는 몸’입니다.
‘미래의 낯선 요소’란 하나님의 안목으로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육적인 안목은 그저 과거 삶의 반복입니다. ‘과거 삶의 반복’이란 자꾸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신을 말합니다. 이왕이면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 식으로 계속 살아남아야 마땅하다‘는 정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저주의 안목‘에 대해서 반항하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죽어 마땅하다고 보는 반면에, 인간의 내부 반항세력은 ‘나는 계속 살아 있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고집 부립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찾아 목사로부터 듣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안목입니다. “상처받은 여러분의 지난 날을 이제는 보상받아야 하고 치유되어야 하고 정정이 일어나야 하고 개선되어야 합니다.”라는 안목입니다.
따라서 교회 설교자도 이런 고객들의 요구에 만족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취지로 설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에서 망쳐버린 인생을 이제라도 수정해서 바른 관계를 회복하시면 여러분의 아픈 지난 과거도 넉넉하게 회복됩니다.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르십니오”
하지만 이것은 악마를 모시는 교회입니다. 악마에게 예배하고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살아남기를 독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아나 벧아웬에서 한 행위로 징벌받는 것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유지하려는 과거적 삶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거+과거+과거…의 연속성으로 하나님과 합류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완료된 미래 상황에서 찾아오시는 식의 미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에서, 사도는 이렇게 자기 심정을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35-36절에 연이어 소개합니다. 오히려 반문하듯이 말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즉 ‘부활하지 않을 몸이 있느냐?’는 식으로 현재 목숨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가려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즉 성도의 삶이란 ‘죽음’과 ‘다시 삶’ 사이에 하나님의 개입되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겁니다. 죽는 것은 죽어 마땅하니까 죽는 것이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살게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즉 ‘과거로서는 이미 죽었지만 미래의 낯선 개입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의 뜻이 있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이의 걸 수없고 반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집에 손님으로 온다면 그로 인해 나는 죽은 목숨인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생에 있어 모든 고민과 걱정은 “내가 나에게 근원적으로 실망한다”는 마음으로 다 해결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지신 ‘저주 안목’입니다. 기브아 시절, 이스라엘의 11지파는 자신들에게 베냐민 지파를 처단할 정의로움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악을 척결한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쟁을 하다가 도리어 자신들이 더 많이 죽게 되고 베냐민 지파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안에 이런 계시의 구조가 담겨 있으므로서 말씀이 성도 안에 지금이 작동합니다. 이를 위하여 성도는 하루하루 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0강-호 10장 9-11절(저주안목)2005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0장 9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5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0:9-11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의 시대로부터 범죄하였거늘 무리가 기브아에 서서 흉악한 족속을 치는 전쟁을 거기서 면하였도다 내가 원하는 때에 저희를 징계하리니 저희가 두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저희를 치리라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의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북쪽나라 이름이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 하나님이 택해서 애굽에서 데려왔던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주께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갖춰야 될 것은 뭐냐?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민족을 저주케 하는 역할을 하게 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을 저주함으로서 이스라엘만이 참된, 복된 나라인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계획을 하나님께서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민족과의 차이성을 유지하면서 저주를 하려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워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자체 내에서 하나님께 저주받을 요소가 발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하나님은 보시는가? 하나님이 이방민족을 저주할 때 그 저주한 안목, 저주의 안목이지요, 저주하시겠다는 그 안목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되는데 이스라엘은 그런 감각이 상실되었습니다.
세상을 저주할 수 있는 안목이 없어졌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한다는데 심판하는 하나님의 그 심정과 마음가짐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지 않게 된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만 저주의 대상인 이방민족을 오히려 선호하고 특히 부러워한 겁니다. 그들에게 미혹되고 유혹받아서 그들과의 차이성,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차이성이 날라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방민족적인 요소가 발견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의 적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의 적을 끄집어내요. 10절에 “저희가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라고 되어 있어요.
두 가지 죄는 10장 5절에 보면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해서 벧아웬의 우상을 섬긴 죄와 또 한 가지는 9절에 나옵니다. 기브아에서 있었던 범죄, 그 두 가지 범죄를 하나님께서는 눈여겨보신 겁니다. 잊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상당히 함축적이라서 그냥 봐서는 무슨 내용을 연결했는지 잘 모르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기브아시대 때 너희가 범죄 했을 때는 처벌하지 않았다. 그 때는 흉악한 나라가 이스라엘을 치도록 허락하지 않고 흉악한 전쟁을 면하게 해줬다. 하지만 때가 되면 너희가 우상숭배와 기브아에서 있었던 범죄에 대해서 이방민족을 몽둥이로 사용해서 내가 너희를 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되느냐? 11절에 보면, 당시가 농경시대니까, 너희가 농사지을 때 암소를 길들여서 편안하게 농사한 거예요. 암소로 하여금 곡식을 밟게 하고 암소로 하여금 밭을 갈게 했던 겁니다. 사람이 암소를 길들이고, 암소로 하여금 밭 갈고, 곡식 밟고, 그래서 힘든 일은 암소한테 다 시켰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방민족이 너희들을 암소처럼 다룰 것이다. 이방민족이 너희를 암소처럼 간주해서 너희위에 타고 힘든 곡식 밟기와 힘든 밭 갈기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한테 시킬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거지요.
11절에 보면 “내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의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여기서 사람이란 이방민족이지요. 무서운 적들입니다.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힘든 노동 노예생활을 내가 하게 만들겠다, 그렇게 한 겁니다.
이것은 아마 이스라엘이 자기가 하나님의 후은을 입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건성건성 하나님 믿는다는 그것을 하나의 사상으로 여기고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을 때 다른 민족들은 속아 넘어갔지만 하나님은 자체적인 목적이 있어서 “이스라엘은 내가 용납하지 않고 기어이 하나님께서 너희의 죄를 끄집어내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서 죄를 끄집어내면서 그 두 가지 죄를 언급했잖아요. 죄가 있으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이 망해야 되는 거예요. 택한 이스라엘백성을 통해서 이방민족이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외치고 싶은, 널리 알리고 싶은 소식은 뭐냐? 인간은 이 땅에서 죽게 되어 있고 이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조차도 결국은 이 세상 유혹에 넘어간다는 말은,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죽도록 되어 있고 처음부터 이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망하고, 그냥 죽으면 안 되겠지요. 인간이 죽는 죽음을 하나님은 잘못된 죽음으로 보시고 그 죽는 이유, 망하는 이유를 찾는 그 작업을 하시면서 이스라엘과 관련을 시키는 겁니다.
이방민족들, 우리 대한민국 같은 단군의 자손들, 자기가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서 찾아봐야 돼요. 이스라엘의 과거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어떤 요소 때문에 그들을 망하게 하고, 죽게 하고 이방민족에까지 그 원칙이 확대되었는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호세아라는 이 계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원칙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볼 때에 인간은 원래 망하게 되어 있고 원래 죽게 되어 있다면 그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냥 죽여 버리지 그냥 망하게 해도 되는데 왜 꼭 이방민족을 가지고 치게 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그 과거사가 자신의 자존감이 된 거예요. 자기의 우월감을 보장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 겁니다.
‘이래 뵈도 우리는 택한 백성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몰랐거든요. 이방민족의 유혹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고 그들이 얕잡아본 이방민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처참하게 노예생활 하도록 만듦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무엇을 발생시키느냐? 수치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징벌이 뭐가 되느냐 하면, 수치를 유도하는 것이 징벌이 되었어요. 수치스러움이 넘쳐남, 수치에 푹 잠기게 해서 거기서 각성효과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각성할 수 있는 효과.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 그리고 더 무서워하는 것은 뭐냐 하면, 수치스러운 거예요.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더 수치스러운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자살하거든요. 자랑스러운데 물이 빠져죽는 사람 봤습니까? 자랑스러운데 번개탄 피우고 그러지는 않지요. 너무 자랑스러워서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사는 것이 죽음보다 더 혹독하다고 느낄 때는 수치가, 부끄러움이 자기에게 넘쳐날 때 그런 거예요.
그 부끄러움을 하나님은 징벌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못 죽게 만들어요. 부끄럽게 만들지 결코 자기가 알아서는 숨 끊어지지 않도록 만들어버려요. 꼴좋다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은혜 주셨다.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라는 말들을 남발했는데 주위에서 수군대기를, 수군대는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참 꼴 좋다! 고소하다.”
이러한 수치스러움은 뭘 동반하느냐? 무서운 공포감과 더불어 수치가 오지요. 순수한 공포와 순수한 수치를 우리 안에서 연막탄 피우듯이 확 피어오르게 만들어요. 우리가정 안에서, 우리 집안에서, 모든 우리 일상 속에서 수치가 확 올라오도록.
여러분이나 저는 술을 모릅니다만 술 먹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소주 한 다섯 병 먹으면 열기가 확 올라온대요. 얼굴이 벌게지면서. 여러분은 술 먹는 사람 구경도 잘 못했잖아요. 술기운이 뜨겁게 올라온답니다. 그렇게 인간에게 수치스러움이 확 올라오도록 만들지요. 그 부끄러움이.
어떻게 자신의 장래를 대처할 어떤 방안도 없어요. 장래에 대해서 대비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럴 때 다시 한 번 묻게 하지요. 그 수치 앞에서 도대체 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나님이여 제가 잘못되었는데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서 절망적입니까?” 하나님이 답변하지요. “왜? 네 인생 네가 보기에도 부끄럽나? 네 장래가 무섭고 부끄럽나?”
그 이유는, 네가 네 자신의 내부를 몰라서 네가 네 자신을 저주할 안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나를 저주할 안목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내 속의 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화를 낼 줄을,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도 미처 깨닫지를 못한 거예요. 각성하지를 못한 겁니다.
하나님을 등신처럼 취급한 거예요. 미국의 치킨 영감쟁이처럼, 혹은 금복주 영감쟁이처럼 하나님은 그저 웃기만 하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마냥 웃기만 하고 아무 매가리 없는 분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쪽에서 함부로 대한 거예요. 우리 내부에서, 우리가 망하고 저주받을 이유가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는데.
여러분이 설교를 하든지 남에게 전도를 하든지 기본 요소는 그거예요. ‘내가 이 말 전하고 내 인생 쫑난다. 나 이 설교하고 살해당한다.’ 그걸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세요. 아버지가 자식들 앞에 두고 복음 전할 때 ‘이걸로 아버지는 너희에게 맞아죽는다. 나는 이제 죽었다.’
사도들이 성령을 통해서 설교할 때는요, 매순간 ‘이 행동과 이 태도 이 설교 그것으로서 내 목숨을 찾을 생각하지 말자. 나는 여기서 내 목숨은 종결되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그 진리하고 자기목숨하고 바꾸는 것을 자기는 영광스럽게 생각했어요. 너무나 황송스럽게 생각했다고요.
그 진리를 위해서 내 목숨을 사용해주시는 것, 이 진리를 전하고, “진리를 전했으니까 이제 네 목숨 빼앗는다.” 할 때 너무나 그것을 황공무지로소이다, 고맙게 여겼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다시 살 여지를 남기지 않았어요. 사도들은.
어떤 집에 손님이 온다면……, 이것은 설교만이 아니고 성도의 마음자체가 그래요. 신앙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손님이 온다면 그 손님으로 인하여 내 목숨은 오늘로 끝이에요. 그리고 내가 마트에서 라면을 사도 라면 사는 이 행동으로 내 목숨은 끝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이런 겁니다. “확실하게 내가 여러분에게 내 심정을 까뒤집어서 이야기하겠는데 여러분이 나를 보고 ‘당신은 무슨 맘으로 살아갑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확정지어서 말씀드리겠는데 나는 날마다 죽기 위해서 삽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기를 “사도바울 당신은 무슨 배짱이 있어서, 대체 무슨 근거에 의해서 날마다 죽기를 그렇게 소원하느냐?” 고린도전서 15장 35, 36절에 보면,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반문합니다. 바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되레 상대를 공격하지요.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어떻게 죽는 자들이 안살아날수가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정말 제대로 반문하지요. 공격하는 거예요. 어떻게 죽을 몸이 안살아날수가 있느냐,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살아난다는 것에 비해서 현재 갖고 있는 이 목숨 이것은 오히려 살아남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살고자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보시는 그 저주의 안목, 저주의 시선을 우리가 지금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가져야 그것이 신앙이라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거든요. 공통적인 것이 통해야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보고 “죽으면 살려줄게” 이렇게 나오시는데 우리는 “아니 되옵니다. 기어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기존교회에서 교인들이 교회 가서 목사의 설교를 수십 년 들어요. 목사들의 설교의 취지는 이런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제가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인생을 수정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개선하고 유지하고 지속시키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살고 싶지요? 그러면 사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설교대로 믿고 따르시면 여러분은 소원대로 개선된 상태에서 여러분 과거의 아픔을 치유……, (그놈의 치유라는 말 듣기도 싫어요) …… 치유, 치료된 상태, 나아진 상태에서 하나님께 영광도 되고 거룩도 올리면서 여러분에게 복 받는 인생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내 식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키시면 여러분의 장래를 희망찹니다.”
그 설교를 수십 년 동안 들어왔었어요. 기존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지금도 듣고 있고요. 그거 속으신 겁니다. 목사가 여러분을 속인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나를 속인 거예요. 그런 소리가 듣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안 죽고 싶은 거예요. 안 망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몸을 보여줍니다. 과거가 들어 있는, 과거가 꽉 차 있는 몸. 토속적으로 말해서 똥이 가득 찬 몸, 과거로 가득 차 있는 몸. 과거의 기억, 추억. 또 하나는 뭐냐? 미래가 와서 나를 갉아먹는 몸. 과거에 내가 주님의 마음보다 내 내부에 있는 악마가 외치는 대로 따라왔던 그런 심보로 살아온 그 과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뭐냐? ‘어쨌든 간에 나는 살아남아야 된다. 살아남는 것이 남는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하나님이든 누굴 믿든 날 살려주게 되면 나는 땡잡은 것이다. 어쨌든 살아야 돼. 이왕 사는 것 잘 살아야 돼. 인기도 얻고.’ 전부 다 그런 식으로 ‘떡을 먹든, 인기를 얻든, 온 천하를 얻든 무조건 일단은 살아야 그게 가능해.’
일단 살고보고, 그 다음에 그런 것을 획득하고. 그런 식으로 빌기 위해서 교회 다녔기 때문에 그런 목사가 그런 소리 하기도 전에 내가 나를 속여 온 거예요. 과거의 내가 계속 현재를 유지하고 미래도 그런 과거와 모순되지 않고, 비틀어지지 않고 연결연결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대형마트에 보면 카트가 있지요. 물건 담는 카트가 죽 서 있지요. 집어넣으면 쑥 들어가요. 연결연결이 된다고요. 같은 거니까요. 애들 기차놀이도 마찬가지고요. 엉덩이에 머리를 박고 그런 식으로 연결해서 기차놀이 하고요. 말 타기 놀이도 맨 마찬가지고. 과거에 했던 버릇이 그대로 이어져가는 거예요.
중국집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자장면을 다 먹었어요. 자장면을 다 먹고 난 뒤에 “자장면은 먹었고 다음에 뭐 먹을래?” 하니까 “간짜장!” 이게 뭡니까? 같은 춘장인데. 자장면을 먹었으면 다음에는 탕수육을 먹어줘야지. 탕수육은 면이 아니잖아요. 돼지고기 아닙니까? 자장면이나 간짜장이나 같은 춘장이니 그 맛이 그 맛이잖아요. 안됩니다. 그 때는 말려야 돼요. 탕수육 시켜 줘야 돼요.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과거의 연속밖에 없어요. 안에 과거의 그 똥 같은 것만 가득 들어 있는 거예요. 과거의 그 살아야 된다는 그것이 우세하기 때문에 내가 망할 이유가 없다고 아주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나는 망할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 두 가지 죄라는 것이 뭐냐? 벧아웬, 벧엘이지요,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전에도 봤는데요. 열왕기상 12장 28, 29절에 보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신은 나를 살리는 신이에요. 그 신에다 예수니 성령이니 다 대체해서 넣어보세요. 예수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어떤 단어라도 나를 살리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바로 악마입니다. 악마를 교회에서 증거 한다는 말은 곧 예배하는 것인데 악마 모시고, 금송아지 모시고 11시에, 오후 2시에 예배드리고 있는 겁니다. 전도하면 악마전도 한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으면 살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요? 여러분 과거에 예상 밖의 낭패를 당했지요? 인생 몸은 아프고 가정은 깨지고 희망 없지요? 곧 죽고 싶지요? 살아계신 하나님 계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여러분의 인생을 보상해주고 회복시켜 줄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까지라도 우울증에서 치유할 겁니다. 전인격적으로……” 어디서 그런 단어는 또 알아가지고, “……전인적으로 치유하실 겁니다.”
그게 바로 과거에 했던 행세를 그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속의 죄를 끄집어내는 하나님이에요. 너는 죽어야 마땅하고 이 세상은 망해야 마땅하다는 그 요소의 증거가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네가 왜 몰랐느냐, 하는 겁니다. 따라서 저주받아야 되는데 은혜로 살아온 거예요. 망해야 되는데 안 망하는 게 이상해요. 안 망하는 게 이상하다고요.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 해야 돼요. 어제쯤 죽었어야 돼요. 오늘 또 살아서 지금 침 튀기고 있잖아요. 뭐가 이상해.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좋아하잖아요. 기뻐하지 마세요. 오히려 당황해야 됩니다. ‘저 사람이 왜 나를 좋아하지? 내 내부를 저 사람이 알 리가 없지. 나는 나만 챙기는데 나만 챙기는 나를 뭐가 좋다고 좋아하지?’ 오히려 의아해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은 이유가 있어요. 죽이는데, 아까 사도바울처럼 날마다 죽는데 살아났잖아요. 그러면 죽고 살아남, 죽고 살아남 속에서는 죽어야 될 인간을 살려내는 그 근거가 과거의 우리의 체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체험되지 않은 미래가 죽은 우리를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미래요소가 날마다 죽어야 되는데 살았다는 그 사이, 그 틈에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하심의 그 하나님의 개입이 들어 있는 거예요. 죽어야 되는데 살아났으니까 의아해 해야 돼요. 의아해 하는 그 양만큼, 그 부분만큼 주께서 자비를 베푼 거예요. ‘주께서 살려내셨구나.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어서 살려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아셔야 됩니다.
따라서 “목사님, 인생문제 어떻게 풉니까?” 딱 하나만 있으면 다 풀려요.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할 것이 없어요. 모든 고민, 모든 상담, 상담도 더 이상 할 필요도 없어요.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자기한테 절망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자기 자신한테 절망하세요. ‘주님, 저는 더 이상 살 필요도 없습니다. 왜? 나에게는 어떤 기대나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절망을 즐기고 자기의 깜깜함을, 자기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오히려 수용하고 용기 있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왜? 절망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이 나를 보는 안목을 나도 공통적으로 갖고, 내가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브아 사건에서 이스라엘에게 그것이 없었어요. 전에도 했었지만 한 번 더 이야기하면, 기브아 사건이라는 것은 사사기 19장 29절에 보면,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베들레헴에 자기 처를 찾으러 갔던 레위인이 처를 데려오는 도중에 불량배를 만나서 윤간을 당해서 살해를 당했어요. 그 나쁜 짓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나쁜 짓 했다는 증거물을 자기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열 두 토막을 내서 열 두 지파에 다 날렸어요.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래가지고 이스라엘이 하나님 뜻대로 되겠느냐? 정의를 세우자. 이 땅에서 정의를 세워서 올바름이 유지되도록 하자.” 그래서 레위인이 처의 시체를 열 두 토막 내서 지파마다 보내니까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베냐민지파를 제외한 열 한 지파가 분개를 하면서 그런 흉악한 놈들을 그냥 둬서는 단체로 우리가 하나님께 벌을 받겠다, 싶어서 정의로운 전쟁을 감행하기로 그들이 합의를 본 거예요.
문제는 그들이 그들의 적을, 베냐민 지파에 있는 기브아 불량배가 악하고 흉악하고 나쁜 놈이라고 그들의 죄를 바깥에서만 찾을 줄 알았지 자기 내부에 그들과 동일한 죄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를 못한 겁니다. 자기 안의 죄를 모르면서 바깥의 죄에 대해서 그들이 정의를 외치면서 징벌에 나서겠다, 하는 이것이 이스라엘이 살아야 될 이유가 없으면서도 살아야 되겠다고 우기는 오해였던 겁니다. 잘못된 것이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죄를 알 수 있는 실력은 없어요. 그러한 능력은 없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과거의 노선에서 계속 이탈하지를 못하고 과거의 노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노선 한 번 더 상기시켜 드릴까요?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면 과거의 아픔과 모든 것이 회복이 되고 보상이 되고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아지겠습니까?’
자장면 먹었는데 간짜장 또 시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간짜장 먹고 난 뒤에 쟁반 짜장 시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같은 류에요. 계속 그 노선 외에는 다른 노선을 생각을 못해요. 왜? 자기는 살아야 될 만한 정당성이 자기내부에 가득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가 죽어? 내가 망해? 내가 수치스러워? 내가 왜 수치스러워?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
이런 고집, 이런 똥고집, 황소고집 같은 것이 인간에 가득 차 있었던 겁니다. 이건 손으로 후벼내지도 않아요. 그냥 잘난 재미로 살아요. 남은 죽어도 자기는 안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거예요. 이런 조치는 너무 과한 조치라고 하나님 앞에 따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외부의 어떤 적이 등장하니까 “저런 나쁜 놈! 내가 얼마나 정의로운지 본때를 보일게.” 이래서 열한 지파가 기브아에 있는 흉악한 인간들 처벌한다고 전쟁을 벌였는데 오히려 열 한 지파 연합군이 첫째 두 번째 전쟁에서 대패를 한 거예요. 아주 피를 봤어요.
“아, 우리가 남보고 ‘나쁘다. 저건 우리보다 악하다.’ 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구나.” 왜 권한이 없는가? 나쁜 놈들 친다고 연합군이 많이 죽었어요. 죽일 놈은 안 죽고 죽으라고 외치는 본인들이 죽은 거예요. 죽으라는 김 정은은 안 죽고 죽었다고 외치고 다니던 두 사람은 검찰에 고발당했어요. 90퍼센트 이상 죽었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인간이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인데 우리는 이것을 마땅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못 끄집어내는, 우리 죄를 모르고 있는 이유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거예요. 살아 있는 이걸 이상하다 여기고 기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진즉에, 2개월 전에 죽었어야 되었는데.
‘세월 호 그 때 우리 애도 같이 빠져죽었어야 돼.’ 뭐 이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신종코로나에서 살아남았다. 이제는 거리두기 같은 것 없다니 마음 놓고 활개치고 살아야지. 그놈의 것 우리나라에서 잘 물러갔다.’ 자꾸 자기 살아남은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수치스러운 징벌을 유도해서 도리어 얼굴 못 들게 만들어버립니다. 자기백성들, 유다와 이스라엘이. 이게 어떻게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면서 그 징벌이 집단으로 당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집단입니다. 너 나 각자각자 누가 잘났다, 못났다, 할 잽이 못돼요.
생선회를 얇게 썰어놓은 것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회 한 점을 먹으려 하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생선회의 살점들이 갑자기 단합이 되어서 “손대지 마라 우리는 광어다.” 하면 “이게 미쳤나?” 분명히 회 살점을 얇게 하나하나 저며 놓았는데 이게 하나가 되면서 스크럼을 짜서 “어딜 감히 내 몸에 손대느냐? 우리는 절대로 이 소비자에게 먹히지 말자. 고추냉이에도 섞이지 말자.” 하고 하나의 광어모습으로 등장한다면 기절초풍하겠지요.
이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이 보는 안목을 모르고 있는지. 하나님이 보는 안목은, 아무리 회를 떠도 하나로 봅니다. 우리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만 살면 되거든요. 우상의 특징이 나만 살면 돼요. 나는 독특하다고 보는 거예요. 다른 사람하고 내가 다르지 않고 같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나만 유독 잘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개인구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똑같다고 보는 거예요. 그 우상 섬기는 자나 안 섬기고 보류된 자나 나중에 결국 섬기게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부모로부터 동일한 아담의 죄를 받았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나는 특별합니다, 라고 우길 그런 과거들이 없어요.
모든 인간의 과거는 어떤 인간도 동일합니다. 동일한데 마중을 나오는 새로운 미래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과거는 마땅히 지옥가야 되고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신 그분에 의해서 새로운, 각성되는 안목은 목사나 집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똑같습니다. 누가 더 낫고, 누가 덜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고 있는 이런 터무니없는 은혜의 혜택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과거의 똥 같은 것은 다 긁어내고, 미래의 마중 나오시는 주님의 구조, 호세아의 구조, 말씀의 구조를 그대로 우리 안에 담아버립니다.
담아버리면 그 안에 있었던 구조가 나와요. 유다와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겨서 마땅히 처벌되고, 부끄러워야 되고, 징벌 받아야 된다는 요소와 짝을 이루어서 주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망하게 해놓고 예수님을 보내서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 용서와 죄가 쌍을 이루어서, 그게 구조화되거든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고, 저주된 자는 어떤 이유로도 나는 마땅히 구원되어야 될 권한이 없음을 통보해주는 주님의 용서와 짝을 이루어서 우리 내부에 미래의 구조로서 꽉 차게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부의 구조가 성경의 구조와 일치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 내부가 말씀으로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이제 죄 없다’가 아니라, 내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죄는 이것이고, 그것을 지적해주신다는 그 자체가, 지적하기 위해서 죽고 살고, 죽고 살고, 그 사이에 주님의 사랑으로서, 용서로서 늘 개입한다는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 받은 성도는, 성경의 구조가 문자에서 우리 내부로 들어와 동일한 구조를 이루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자리에요. 성도의 자리는 곧 진리의 자리니까 우리 안에 작용하시는 주님의 손길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과거 이야기로 듣지 말고 지금 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인 것을 우리가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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