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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9:15-17 / 현실 착오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9:15-17 / 현실 착오

정인순 2020. 4. 15. 22:10

음성      동영상     Youtube

현실 착오  

 

이근호
2020년 4월 15일            


본문 말씀: 호세아 9:15-17

(9:15)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 그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 방백들은 다 패역한 자니라

(9:16) 에브라임이 침을 입고 그 뿌리가 말라 과실을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9:17)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사람들이 물건이나 물질을 힘을 주어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사물을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이게 하신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비록 신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신은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시스템은 만들어놓고 나머지는 인간에게 맡겼다’는 식으로 현실을 이해하려 합니다.

이 말은, 인간들이 아무리 신에 대해서 힘주어 섬긴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양보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자’라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고 신을 섬기는 것이 그다지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악’이라는 것은 ‘길갈’이라는 지명과 관련지어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십니다.

기본적으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차이를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 차이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기어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살지 못하게 하시겠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까지 나오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작을 태어나서 생존해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부터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 어떤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민족에게 있어 ‘신’이란 인간들의 ‘자기 목숨을 구심점’으로 삼는 경향에서 나온 신입니다.

즉 ‘신에게 잘해 줄테니 신도 나에게 잘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신을 구상해 낸 겁니다.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성과나 결과를 바라고 합니다. 신을 잘 섬기면 본인의 인생이 행복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목숨을 구심점’으로 한 생활자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찾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을 찾습니다. 이방인들, 바알 같은 신에게는 하나님이 중복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이 중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내려가신 하나님을 찾으시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기 목숨 구심점’으로 살아서는 아니됨을 말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 친히 이스라엘 속으로 오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위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길갈’이 핵심 지명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삿 2:1)

사무엘상 7:15-16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는 정기적으로 길갈을 순회합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이 길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수아 5:9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애굽의 수치’라는 말이 나옵니다. 애굽은 히브리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이방민족과는 달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인간 세계에 출현된 낯선 민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애굽은 곧 생존의 환경이었습니다. 현실의 전부였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 열심히 애를 씁니다.

이것에 대해 자신들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조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런 식으로 살다가 약속의 나라에 들어가면 그만’이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를 지내오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을 40년 동안 지내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현실 조정’을 시도하신 겁니다. 즉 ‘자기 목숨을 구심점’으로 여기고 사는 자들이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 그런 기적을 이스라엘이 받은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 못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40년 동안 사막에서 살아남은 겁니다. 뿐만아니라 요단강을 건널 때는, 홍수가 난 요단강이 이스라엘이 건너는 노선에는 바짝 말랐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자기 생존 위주’로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 아님을 유일하게 알아야 될 민족이었던 겁니다. ‘애굽의 수치’를 뜯어내어 멀리 굴러가게 만드는 방식은 바로 ‘할례’였습니다. ‘할례’란 혈육 관계에 의하지 않고 혈육과 결별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연합체를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목숨 부지 중심’의 현실관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을 유발하십니다. 사무엘상 15:21에 보면,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제사지내는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그 길갈에서 사울왕은 아말렉 민족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사울왕이 충분하게 승리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할례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겁니다. 사울왕은 아말렉의 아각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둡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힘’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길갈이라는 장소는 ‘인간의 모든 목숨을 버리는 쓰레기장’이어야 하고 소각장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장소를 여기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떠벌린 겁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왕이 죽이지 못한 아각왕을 길갈에서 과감하게 처리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삼상 15:33)

아각왕을 죽인다는 것은 곧 전체 이스라엘의 의식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길갈의 장소적 개념은 다윗에게 와서 인격적 개념으로 전환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그 아버지의 대를 새로운 의미로 잇게 하므로서 인간들로서 전혀 예상 못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십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삼하 12:13-14)

즉 다윗의 차기 왕인 솔로몬을 나타내기 위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다윗의 자식이 죽습니다. 이것은 곧 오늘날 예수님의 존재가 내 존재를 대신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대신 죽으심’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찾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바알이요 이것이 있으면 여호와의 백성으로 분류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는 현실은 나 중심으로 곡해한 가짜 현실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7강-호 9장 15-17절(현실착오)2004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9장 15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4페이지입니다.

호세아 9:15-17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 그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 방백들은 다 패역한 자니라 에브라임이 침을 입고 그 뿌리가 말라 과실을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어떤 일의 결과에 있어서 사람이 물리적으로 손을 대서 움직인다는 것은 전혀 신기하지 않습니다. 물건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을 줘서 밀어내고 잡아당기면 물체가 움직이지요. 그런데 본인이 어떤 물체를 밀거나 잡아당겨놓고 이것은 하나님이 하셨다, 하면 어떤 사람은 비웃을 겁니다.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선지자의 말씀을 보게 되면, 15절에 “내 집에서 쫓아내고”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낸다는 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와 닿지를 않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그게 왜 그런가 하면, 평소에 내가 나가고 들어가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은 전부 다 내가 나에게 힘을 써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내가 나를 조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떠민다든지, 당긴다든지, 쫓아낸다든지 그것이 잘 믿기지 않지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힘센 어떤 짐승이 인간에게 강압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는 것, 마치 인간이 살아 있어서 떠미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 와 닿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온통 마음이 세상움직임에 대해서 인간이 하기 나름이다, 하는 생각으로 흔들리고, 마음이 심란해지고, 평생토록 거기에 신경 쓰고, 자신의 정신도 혼이 나간다든지 혹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든지 하는데 그것은 그 모든 기준을 인간의 움직임에다가 두었던 겁니다.

거기서 인간들 본인이 자기행동을 결정해놓고 조금 짬 내서 하나님말씀을 듣는다든지, 하나님 섬긴다든지, 또는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든지, 약간의 대목만 시간을 할애해서 그렇게 하면서 자기는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한 양 뿌듯해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시는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유난떨지 마세요.

해야 될 일을 하는데 그게 무슨 착한 일이 돼요?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게 무슨 착한 일입니까? 이게 선택과목이에요?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힘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러니 나 예뻐해 줘.’ 한다든지, 안 해도 되는데 구태여 나라는 인간이 너무 착해서 한다는 그런 발상을 가져서는 안돼요.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그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면 안돼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놓고는 자꾸 대가를 원하는데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것은 어떤 대가나 성과를 바랄 필요도 없는 거예요. 계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에 계시다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이 계시기에 섬기는 것인데 거기에 뭘 대가를 또 요구합니까?

한우가 맛있다는 것은 맛있다, 하면 맛있는 것이지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합니까? 맛있는 것은 맛있는 거지요. 하나님 계셔서 피조물로서 마땅히 섬겼다. “하나님, 모든 것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거 한다고 점수 더 주고 그런 것 없어요. 어떤 성과를 얻어내려는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어떤 행복을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행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거기서 뭘 행복이에요?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인데 무슨 행복입니까? 망해도 하나님이 알아서, 그동안 참 오래 살았다고 망하게 하시는데, “예, 잘하셨습니다.” 그러면 되는 문제지요. 그걸 C, O, O, L, ‘cool’이라 하는 거예요. 쿨하게, 그동안 누린 것도 하나님이 봐줘서 누린 겁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하나님이 자기 맘대로 흔들기도 하고, 망하게도 하고, 부도나게 하시는데 우리는 뭐 아무소리 말고 있어야지요.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잖아요. 정상적인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세상이 뭐라 해도, 선거가 어떠니 해도 우리는 선지자 말을 들어야 돼요.

호세아 선지자가 지금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신다는 그것을 귀담아 들어야 되는데 그 놈의 mbc, kbs, tv에서 온통 선거 이야기를 하니까 호세아 앞에 뭔가 모기약 뿌려놓은 듯이 흐릿해졌어요. 다시 걷어내야 돼요. 이구동성으로 모든 인간이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귀가, 성도가 하나님 섬기는 것을 훼방 놓기 위해서 그 짓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16절에 나옵니다. “에브라임이 침을 입고 그 뿌리가 말라 과실을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죽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보고 “내가 과실을 맺지 못하게 하고 자식을 낳을지라도 그 자식을 죽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호세아를 통해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의 시작은 죽임부터, ‘죽는다’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죽음을 끝 지점이라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끝점이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이 상상하는 하나님, 나를 계속 살려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끝점으로 데려가서, 죽은 자리에 데려가서 일을 개시하게 함으로서 나를 위한 내가 되지 못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을 위한 나로 살게 하지 내 행복을 위해서, 나 잘되게 하기 한 그런 하나님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이 갖고 있는 사적인 목적성이 있는데 그 목적은 상위목적의 하위구조가 돼요. 인간들은 코앞에 있는 것, 선거라든지 신종코로나, 이게 전부다 작은 이야기라는 것을 몰라요. 하나님은 큰 이야기를 하십니다. 호세아는 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인간들은 작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코앞에 있는 이야기 그것밖에 몰라요. 작은 이야기는 뭐냐? 작은 이야기의 시작점은 ‘나 아직도 살아 있잖아.’라는 것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작은 이야기에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내 목숨이 구심점이 되는 것이 작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큰 이야기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부터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이야기입니다. 죽일 수 있는데 지금 안 죽이고 있는 것은, 네가 기대하는 그 성과 기대하고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은 일하신다. 이게 큰 그림이고 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죽인다는 것,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할 때에 “왜 죽이십니까?”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왜 이렇게 저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큰 그림에 의해서는 이런 행위가 죽을 수밖에 없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동안 이스라엘을 살려 온 거예요.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름대로 번창 하게 하신 것은, 흔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잘 아는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신다는 것을 제가 염두에 두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못살게 굴고 죽이려고 하느냐, 하고 짜증내지 말고 하나님의 주신 그 은혜를 회수를 하는 거예요.

회수해버리면 그냥 죽는 겁니다. 전에 에스겔 16장을 이야기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요새말로 해석하면 노숙자로 여기는 거예요. 노숙자로 여겨서 그야말로 헐벗은 채로 추운 날씨에 아무것도 가릴 것도 없이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 노숙자, 거지떼쓰리, 걸뱅이라 하지요, 거지떼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포대기를, 거적때기를 덮어준 거예요.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 거지떼를 거적때기로 덮어주니까 그 거적때기가 자기 것인 줄로 알고 오해를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적때기를 줬다가 네가 그걸 받을만한 입장이 안 된다, 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거적때기를 다시 회수를 해가니까 이번에는 죽겠다고 난리인 거예요. 처음부터 얼어 죽을 인간이에요. 하나님 자기 것을 회수했을 뿐입니다.

집안에 잔치가 있는데 그릇이 모자라서 “아주머니, 오늘 우리 집에 손님이 많이 와서 그릇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그릇 20개만 빌려주세요. 곧 돌려드리겠습니다.” 해서 옆집에서 그릇 20개를 빌려줬다는 말이지요. 행사가 끝났어요. 그릇 주인이 와서 그릇 20개를 도로 가져가니까 “우리 죽으라는 말인가?” 하고 뒹굴고 발악을 하면서 “그걸 가져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걸 옆집에서 보기에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저러지? 자기 것도 아닌데.’ 갑자기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해버렸어요. 어떤 남자가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요새 그런 사람 많잖아요. 그렇게 혼자 버티고 있었는데 옆집에 어떤 아가씨가 이사를 왔어요. 혼자 산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아, 저 여자 같으면 내가 결혼하고 살아야지.’라고 해서 여자에게 잘해주고 가방도 사주고 다 했는데 6개월 뒤에 그 여자가 미국으로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남자는 지하 노래방에 가서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합니까~!” 뭘 어찌해? 처음부터 그 여자는 그냥 왔다 간 거거든요. 처음부터 그 여자는 없었어요. 잠시 왔다가 자기 볼일보고 다시 도로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 나타나서 총각 마음을 흔들었냐?” 하는데 흔들린 네가 잘못이지. 흔들렸다고 해서 “어찌 합니까……, 그 여자만 허락하신다면 목숨도 바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올라가지도 않는 보이스로 목 컥컥거려가면서 <고해> 노래 부른다고, 못살겠다고.

그게 작은 그림이에요. 자기 목숨이 구심점이 된 겁니다. 이방민족 같으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자기가 만들어내니까 구심점이 내 목숨이고, 신을 만들어낸다는 말은, 내가 만든 신은 어떤 역할이 있는데 내 구심점이 되는 내 목숨을 행복하게 튼튼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여유롭게, 부자 되게 잘 지켜주는 그런 역할을 하라고 이방민족은 신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방민족의 신이란 대표적으로 호세아당시에는 바알인데요. 바알의 특징은 뭐냐? 바알의 특징은 신이 중복된 신이 아니에요. 신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이 자기가 중심이니까 자기 좋으라고 신을 만들고, 그 신과 자기가 거래하면서 뭘 바치면 복주고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은 신이 한분이 아니고 중복되어서 두 분이에요. 신이 두 분으로 중복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더 정확히 말해서 신의 속성이, 서로 모순되는 두 속성이 한 자리에 함께 있는 신이 여호와에요. 생명을 주시고 도로 뺏는, 생명과 죽음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 속성이 둘이지요.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실은 하나님이 둘이라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신은, 그 신이 선택한다는 것은 신을 만든 나를 선택해줄 때 비로소 좋은 신이고 사랑의 하나님이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이방신이라고 거창하게 할 것도 없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수, 여호와, 하나님, 삼위일체 그게 전부 다 이방신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믿어주는 나를 위해서 행복하게 해주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성과를 제공하고,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때리고 벌주는 그런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나를 인간으로 생각해서 좋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한다. 이게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바알신이에요. 그러나 진짜 여호와 하나님은 누굴 선택하느냐? 인간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나님 본인을 선택해요.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선택한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특징이 바로 그거예요. 이스라엘은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먼저 찾아와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만드실 때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하나님의 여호와의 요소를 뽑아내고자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여호와의 요소. 여호와는 여호와를 찾거든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다 그 말이지요. 구약적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은 여호와 이름을 찾는다. 그렇게 보면 돼요. 여호와는 자기 이름을 뽑아내고자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뭔가 내놓을 것이 있어야 되는데 내놓을 것이 없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원하는데 이스라엘이 여호와라고 내놓은 것을 보니 전부다 바알이에요. 껍데기는 여호와고 안에는 다 바알종교에요. 자기목숨이 구심점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내 목숨 건사하고 유지하는 것이 구심점이 되어 있는, 그런 것만 박혀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작은 이야기 하면 안돼요. 큰 이야기로 넘어가야지요. 그게 뭐냐? 구심점을, 인간이 바들바들 떠는 자기목숨을 구심점으로 하지 않고 그 인간 속에 박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구심점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5절에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악이라는 말은 하나님 여호와언약에 준해서 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악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고 그들이 자식을 낳을지라도 죽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악이 나온다, 안 나온다, 그 판정을 어디서 하는가? 길갈에서 해요. 길갈이라는 것이 오늘 이 시간에 제대로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길갈에 대해서는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길갈이라 하는 것은 ‘굴러간다.’ 그러니까 그동안 좋지 않은 것이 덮여 있었다. 덮여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뜯겨져 나가서 덮여지지 말아야 될 것이 굳은살처럼 덮여 있으니까 그 덮여 있는 것을 강제로 떼 내서 “저리가!” 하고 갖다 버리는, 굴러가게 하는 일이 벌어진 장소가 길갈이에요.

뭐가 굴러갔는가? ‘애굽의 수치’가 너희에게서 굴러갔다는 겁니다. 애굽의 수치, 부끄러움이. 히브리인이 애굽생활하면서, 애굽은 요즘으로 하면 세상이지요, 세상살이 하는 것이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우기면서 그게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거예요. 왜? 체질화되어 있으니까. 애굽에 오래 살면서.

4백 년 동안 거기 살면서 완전히 체질화된 거예요.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하는 이것이 뭐가 부끄러운 일인가? 부끄럽다, 안 부끄럽다, 왜 사람들은 그걸 모르느냐 하면, 아까도 말했지만 자기의 마음의 구심점이 자기목숨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어떻게 하면 목숨이 더 유지되느냐? 그러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고 절대로 부끄럽지 않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너희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준 것이 소용이 없이 돼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히브리인들의 조상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약속을 주셨다는 말은, 그 약속이 그냥 빈말이 아닙니다. 주고 난 뒤에 그냥 흐지부지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약속만큼 확실한 것이 없어요. 그 약속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실재화 되는 거예요. 그게 실제로 나타난다고요.

나타난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히브리인들이 번창하게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는 겁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4백 년 동안 있었던 그것도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다 약속하신 바에요. 그만큼 약속의 효과가 대단하다는 말이에요. 약속의 효과를 철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창세기 15장 13절에 보면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라고 나와 있거든요. 이미 시나리오가 다 짜여 있어요. 작가가 대본에 이미 다 썼다는 말이지요. “너는 4백 년 동안 애굽에 살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을 이 땅에 역사화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걸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화된다.”고 했는데요. 은혜가 그냥 허황한 것이 아니고 실제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거예요. 실제로 인자가 구름타고오시고 모든 것이 실재에요. 지금 선거라고 정신이 없어서 이게 실재인지 아닌지, 민주당이 몇 석을 얻는다든지 그런 것이 실재인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실재도 아니고 작은 이야기라니까요.

작은 이야기는 큰 이야기의 하위구조에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목적은 상위목적의 하위구조에요. 그런 인간들의 목적을 통해서 주님이 큰 목적을 이루는 겁니다. 이 땅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인간들은 작은 일에, 자기목숨에 연연하다 보니까, 큰 그림을 모르니까 내가 뭘 하면 먹고 살 수 있느냐의 거기에 온통 신경을 다 쓰는 겁니다.

그러면 이 길갈에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껍데기가 벗겨지는 거예요. 벗겨지게 되면, 애굽의 더러운 것에 눌려 있었는데 그걸 뜯어내게 되면 그 안에 진짜 하나님이 거기에 집어넣어준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걸 얻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뜯을 때 그냥 뜯으면 안돼요. 어떤 방법으로 뜯어야 진짜 하나님의 것이 거기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뭘 로 뜯느냐? 여호수아 5장에서 길갈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것은 할례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육신생활의 결별, 혈육에 대한 결별, 내 몸이 구심점이 된다는 것과의 결별, 빠이빠이, 그것이 바로 애굽의 수치, 그리고 광야의 수치입니다. 광야생활 동안에는 그들이 할례를 아직 안했어요.

그러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이 다른 민족이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경험을 했는데 그것은 뭐냐?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월을 4십년 동안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적적이라는 말은 뭐냐? 내가 아는 방식으로 내가 기적적으로 산 그 기적이 아니고, 내게 기적 좀 줬으면, 하는 방법을 일체 주지 않고 내가 모르는 방식에 의해서 4십년간 그들은 살아왔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거지요.

만나를 줄 때 내 목숨이 구심점이 되면 기적이라는 것이 뭐냐? 내 목숨 살리려고 기적을, 이렇게 은혜로 만나를 주셨구나, 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오해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현실은 이 세상 인간들의 망할 세상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두고 이야기해요. 다른 현실, 인간들이 생각도 못한 현실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내 목숨이 아니고요, 내 목숨은 갖다 버려야 돼요, 내 목숨은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베푼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현실의 착오를 일으키면 안돼요. 지금 신종코로나가 대구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을 때에 많은 전국의 의사들이 자진해서 사명을 가지고 자원봉사로 많이 왔잖아요.

그런데 왜 김 희애는 안 온 거예요? 의사잖아요.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에서 김 희애가 의사역할로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가만 보니 김 희애가 의사가 아니에요. 이것은 현실착오를 일으킨 겁니다. 그 역할이 의사지 실제는 의사 아니잖아요.

이방민족에게는 이런 착오가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이 곧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돼요. 그러나 그 이야기가 이스라엘에게는 현실착오가 되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이 이게 애굽의 수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뜯겨져 나가야 될 문제입니다. 길갈은 바로 할례를 행함으로서, 진짜 너희들이 그동안 살아온 것이 너희들 목숨 위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요단강 건너는 이야기 나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에 있지도 않은 홍수를 갑자기 일으켜서 도저히 다리를 만들 수도 없고, 배를 띄울 수도 없고, 그래서 도저히 약속의 땅에 건너갈 수 없게 의도적으로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내 목숨이 중심이다, 나는 내 목숨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약속의 땅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그 의지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들어서니까 죽일 듯이 달려들던 그 요단강물이 스톱이 되면서 길이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갔잖아요.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벌벌 떨면서, 요단강 한가운데서 버티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빨리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요. 그 때 백성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 제사장들이 얼마나 졸았겠습니까? 물론 홍해처럼 물이 벽처럼 서지는 않고 말랐다고 했지만 언제 또 물이 몰려올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이게 뭐냐? 예상 밖이에요. 내가 내 목숨 살리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아이디어는 작은 이야기에요. 이런 작은 이야기 가지고는 천국에 가지를 못해요. 이런 작은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큰 이야기가 되어야 돼요. 뭐냐 하면, 내 목숨 구원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신 자기의 그릇이 있어요. 그걸 회수하겠다는 겁니다.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집어넣어주고, 그 집어넣어준 것을 회수하면서 그 천국의 삶이라는 것은 내 행복, 내 목숨 부지하는 것이 천국의 삶이 아니고 그게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목숨은 죽어야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할례언약이라 하는 것은 혈육으로 내려오던 모든 혈육과의 결별을 말합니다. 이것은, 길갈은, 곧 인간이 내 목숨을 위하는 모든 그것은 쓰레기장이다, 또는 종교재판소다, 그렇게 보면 돼요. 쓰레기장이에요.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 없는 쪽은 제켜놓고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이 들어 있는 것만 골라서 하나님 쪽으로 당기는 것. 바알 편에 속한 사람은 끝가지 바알 편으로 내쫓아버리고 여호와께 속한 사람은 여호와께로 가려내는 작업, 그것이 바로 길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요단강, 길갈, 기적적으로 살아왔지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사기 2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요새 말로 드론이지요. 하나님께서 드론을 띄워서 시가지를 위해서 보게 하는 거예요. 좍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끄집어냈다. 이것은 바로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 내 언약을 위함이다.” 언약의 완성이 예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거예요. 역사화 된 하나님. 인간의 몸이 된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 찾아내는 겁니다.

그게 복음이고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우리 구원하는 그런 계획은 없습니다. 내 목숨건지는 것이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거기에 부응을 해야 될 텐데요? 사무엘상 7장 15, 16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선지자가 사무엘이거든요, 선지자가 계속해서 순회합니다. 드론 띄운다고 보면 되지요. “너희민족은 이방민족과 달라. 하나님의 것을 너희들이 잘 간직하고 있지, 그지?”라고 묻는 거예요. “네가 만든 것 말고, 네 목숨 부지하려고 애쓴 것 말고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 네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데, 삽입되어 있는데 그걸 잘 유지하고 있는가를 율법으로 점검할게. 선지자를 보내서, 사무엘을 보내서.” 하고 뱅뱅 돌면서, 순회하면서 계속해서 율법을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는 애굽 땅에서 어린양의 대신죽음으로서, 대신 피흘림으로서 살아왔다는 그 사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때문에 우리는 천국 간다는, 장차 세례요한이 외쳤던 그 말씀을 사무엘은 자기시대에 앞당겨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그 말이에요.

우리자신 안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를 대신한 분이 존재해야 돼요. 예수님이 내 존재를 대신하니까. ‘통합당 찍었는데 정권이양도 못하고.’ 그렇게 불평할 필요 없어요. 그 인주 찍으신 분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찍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거 찍으면 내 뜻대로 됩니까? 절대로 내 뜻대로 안되지요. 왜? 투표하는 것조차 내 뜻이 아니기 때문에. 내 뜻이 아닌 그 뜻이 주의 뜻이에요. 내 뜻대로 뭘 주는 것이 아니고요, 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내 뜻대로 안 돼.’ 그게 뜻이에요. 그게 목적이에요.

내 인생에서 내가 손을 놔야 되는 겁니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그릇 스무 개 빌려준 거라니까요. 회수한다니까요 그냥.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길갈이 그 정신을 보여주지를 못한 겁니다. 그 당시 길갈이라 하는 것은, 타락한 북 이스라엘이 정책적으로 백성을 위해서 정부가 서비스 한 거지요. 정신적인 공간을 만들어준 겁니다. 거기에는 신전이 있었어요.

BC490년 마라톤 전쟁에서 그리스가 3백 명으로 바사나라를 이겼거든요. 아하수에로 왕을 이겨서 기념으로 세운 신전이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BC 438년엔가 다 지어졌다는. 그래서 그 신전중심으로 ‘아고라’라 해서 광장을 만들어요. 아테나 여신덕분에 우리가 이겼으니까 그 여신을 기념한다고 신전을 세운 거예요.

원래 길갈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너왔다는 그 사실, 할례언약, 다시 말해서 내 육신을, 내 목숨을 쓰레기로 여기는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그 당시 그들은 바알을 섬기는 자리로 만든 거예요. 눈에 보이는 나, 눈에 보이는 내 몸뚱이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들처럼 대다수가 믿는, 우리보다 잘 사는 그 이방민족의 그 신을, 하나님이 할례를 지시했던 그 장소에 바알신전을 세운 겁니다.

그게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하는 정신적서비스, 정신적공간이 되는 거예요. 지금도 모든 나라에 보면 도시 한 가운데가 비어 있잖아요. 광장이 있고 광장에는 유명한 독립투사의 동상 같은 것이 있어요. 서울광화문광장에 이 순신 장군 동상이 있지요. 황 교안은 거기서 반드시 이기리라 했다지요. 기도를 했는지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광장이 이 순신장군 덕분에 이만큼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거예요. 그것을 결국 작은 이야기라는 것, “내 목숨만 챙기면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천국가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주님이 제켜놔 버립니다. 그게 바로 바알종교에요. 이름이 예수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관계없어요. 그게 바알종교에요.

자, 그런데 길갈 할례의 정신적 의미가 나중에 다윗에 오게 되면 인격화돼요. 인격화되면서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는 그것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그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네요. 사무엘이 아말렉 민족과 전쟁하면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는데 그 장소가 길갈이에요. 사무엘상 15장 33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길갈이라는 자리가 뭐냐? “인간의 힘으로 우리는 구원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적들을 쳐부쉈다는 겁니다. 아말렉왕 아각을 잡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적 아말렉을 못 이겨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충분하게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로로 돌리지를 못한 거예요.

충분하게 이겨서 아각 왕을 체포해 왔는데 그 아각 왕을 안 죽이는 거예요. 왜? 사울왕이 ‘내가 이정도로 괜찮은 왕’이라는 것을 떠벌이기 위해서. 사무엘은 가차 없이 죽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항상 나의 어느 점에서 교만하고 내가 얼마나 잘난 체 하는 것을 완전히 충분하게 들통 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게 길갈이에요.

만약에 길갈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도 건너고, 요단강도 건너오고, 적들도 물리쳤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교만으로 치달을 뿐이에요. 이것은 하나님, 하나님, 거론했지만 결국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기의 욕망, 내 중심, 내 목숨 부지하겠다는 중심을 그대로 유지한 체 그냥 가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방민족이지요.

하나님은 높인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역시 자기목숨이 구심점이 되는 그런 식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일 안하십니다. 그것은 바알, 이방종교, 내가 만든 신이 그렇게 하지요. 아각을 찍은 그 길갈의 정신이 나중에 사무엘하 12장에서 인격화가 돼요. 장소가 특정장소, 모든 것을 쓸어 담는 쓰레기장, 모든 인간들의 자기중심이 다 버려야 될 쓰레기장이지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도착되지 않는 지점 그게 바로 길갈이에요. 이 장소적 개념이 나중에 인격적 개념으로 바뀝니다. 사무엘하 12장 13, 14절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밧세바와 간음했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인 그 죄지요.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당신이 낳은 아들이 정녕 죽으리이다.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6절에도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죽이십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밧세바하고 다윗 사이에 간음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아예 잉태치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세요. 태어나게 해놓고 죽여 버려요.

그것은 뭐냐 하면, 솔로몬이라는 것을 낳기 위해서 대신 먼저 죽어야 돼요. 솔로몬은 ‘다윗이 죽어 마땅함’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 상태에서만 솔로몬이 의미 있게 이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새생명이라는 것은 길갈 같은, 내 중심의 목숨이 죽었다는 그 과정을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 안에서 내 목숨이 아니고, 예수님의 목숨이 거기서 새롭게 우리라는, 육체라는 틀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내용은 그리스도고 껍데기는 우리 아담의 몸이에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죄를 지어서 죽어 마땅한데 그 다윗의 낳은 자식이 대신해서 다윗을 살리고, 다윗만 살린 것이 아니고 그 살려낸 다윗의 첫 번째 자식이 누구냐? 솔로몬이거든요. 밧세바와 다윗이 간음해서 낳은 자식이 솔로몬을 솔로몬답게, 솔로몬의 뜻은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그 자식은 대신 희생당한 겁니다. 죽은 거예요.

그게 바로 길갈이지요. 길갈의 정신이죠. 이게 십자가의 정신이고요. 따라서 우리 자신은 늘 길갈을 떠나면 안돼요. 나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다. 주님이 돌아가신 그 자리를 우리가 비우면 안돼요.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잘남이 아니라 내 대신 누가 죽었느냐? “죽으신 분을 네가 아직도 유지하고 간직하고 있느냐?”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찾아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천국으로 분류 받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나 잘나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대신 죽으심으로 간다는 이 사실, 이걸 믿는 것이 우리의 착한 일이 아니라 마땅히 당연히 해야 될 것을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