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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25:9 / 시간의 심판성 / 200306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25:9 / 시간의 심판성 / 200306

정인순 2020. 3. 6. 23:3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한윤범

20200306a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시간의 심판성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5장 8절부터 12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 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오늘 우리가 해야 될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레위기 25장 24절에 보면,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라고 돼있지요. 같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용을 위해서 중요한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을 어디에다 집어넣느냐 하면, 모든 이스라엘의 절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이 내용이 되고, 절기는 겉포장이 되는 겁니다. 포장지지요. 안의 내용은 안식일이 들어있어요. 그렇게 돼있습니다.

모든 절기에 안식일을 집어넣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두 번째, 기업이 나와요. 기업이란 말은 요즘 잘 안 쓰는데 기업이란 회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상속, 또는 상속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상속이란 요즘엔 전부 다 돈으로 상속하잖아요.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상속은 뭘 뜻하느냐 하면, 바로 백성 그 자체를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있어서 자식을 낳는 건 자연스러운데 하나님은 그게 자연스럽지 않고 마치 모든 시간에 안식일을 집어넣듯이 하나님이 만든 백성 안에 안식일의 취지를 집어넣은 인간 만들기, 안식일의 취지가 담겨있는 인간 만들기. 안식일이 들어있는 인간들, 이걸 달리 표현한다면, 언약이 들어있는 인간들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만약에 미래에 인공지능이 너무 발달해서 이제는 자식 낳는 것도 귀찮다. 회사원 뽑는 것도 귀찮다. 그러면 겉모습은 알루미늄으로 만들고 안에는 인공지능을 다 심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공장에서 인공지능을 장착한 휴먼로이드, 인간 같은 로봇을 생산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인간들은 공통점이 있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하면, 개인적인 개성 같은 것, 특징 같은 것은 일체 없습니다. 인공지능에 준하는 지시와 명령에만 따르게 돼있어요. 기계지요.

언약이 들어있는 인간들, 앞에 뭘 집어넣을까요? 새 언약이 들어있는 인간들. 새 언약은 무엇을 새 언약이라 하느냐 하면, 언약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완성이 될 때 그걸 새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구 언약은 날아가 버리니까 새 언약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히브리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십자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거든요. 요한복음 19장에서 다 이루었지요.

이 그림을 보겠습니다. 빨리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인간이 여기 있는데 십자가의 능력이 들어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설명해드리면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죽었다가 의인으로 사흘 만에 살아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 맞지요. 혹시 강의 중에 아니면 아니라고 하세요. 그냥 죽은 게 아니고, 그냥 죽을 리가 있어요? 죄 때문에 죽고 의로 사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4장 끝에 보면 나와요. 이삭이야기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죄 인하여 죽고 의로 인하여 산다고 돼있거든요.

그러면 십자가 능력이 죄로 인하여 죽고 의로 인하여 산다는 이런 기능이 인간에게 찾아오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기존의 인간의 육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이거는 죄가 되겠지요. 아니면 아니라고 하세요. 인간은 아담에 속해서 아담의 죄가 되겠지요. 따라서 이 몸은 죽어야 돼요, 살아야 돼요? 이건 소실, 소멸돼야 되지요. 없어져야 되지요. 없어지는 동시에 여기에 새로운 몸이 생기겠지요.

죄로 죽이는 능력이 의로 새 사람 만드는 능력과 동일한 능력, 죄로 죽이는 능력이 그 사람을 의로 만드는 새 사람 만드는 능력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성령에서 나와요. 십자가의 효과로써 나오는 겁니다.

여기 옛 사람을 신천지 교회라 합시다. 신천지 교인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는 이유가 옛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는 거예요. 이 몸이 죽어 마땅한데 이 몸을 자꾸 구원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 몸이 사그라지고 이 몸이 없어지는 걸 좋아해야 되는데 이 몸에서 나오는 어떤 행함, 이런 것으로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다보니까 십자가 능력 없이 다른 아이디어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제 말이 신천지 이야기했지만 사실 신천지만 그렇겠어요. 모든 한국교회가 마찬가지지요. 나 잘났다 하고 싶은 거예요. 죽으라고 이야기했는데 안 죽는 거예요. 죽으라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보냈는데 안 죽는 거예요. 원래 신종 코로나는 감기 바이러스에요. 모든 인간은 평소에 코로나가 다 있어요. 함께 살고 있는 겁니다. 이번엔 좀 유별나서 그렇지 다 있어요.

인간에게 병균, 바이러스가 있고 결국 인간은 암이든 치매든 뭐로 죽는다는 말은, 이게 무슨 역할이냐 하면, 모든 일은 십자가 지신 새 언약을 지신 주님이 홀로 주관한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여깁니다. 주께서 제대로 일을 지금 잘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반기면 된다 이 말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죽이는 것도 주님이 죽이는 것이고 나를 죽이신 그분이 나를 살리신 분이라는 그 약속이 믿어지게 되면 알게 되면 그게 바로 복이란 말입니다.

이게 어려운 말이 아니고 굉장히 쉬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걸 안 들으려고 해요. 기존에 자기 몸에 대해서 너무 애착이 심해요. 병적이에요. 그것을 저는 환자라고 이야기하는데 주님도 나는 환자를 부르러 왔지 멀쩡한 사람 부르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환자인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신약이고 오늘은 구약을 하니까 레위기 25장을 하니 ‘새’는 빼버리고 언약이 들어있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이게 뭐라고요? 이게 하나님의 작품, 하나님의 생산물, 상속물, 기업이라는 거예요. 이걸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란 인간들이 설친다고 백성 되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무엇이 장착돼야 되고 무엇이 들어와야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는 거예요.

언약이 들어오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안식일이란 내용, 안식일의 취지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일 번과 이 번 이해되시지요. 일 번은 모든 창조의 안식일이 절기 속에 들어온다. 절기는 레위기 23장에 쭉 나와요. 여러 가지 절기의 특징이 뭐냐? 절기 때마다 항상 안식일 지키는 것처럼 지켜요. 절기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고 속에는 안식일의 취지가 담겨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쉰다, 또는 내가 논다.” 이게 맞을까요? “안식일은 나를 심판한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a, 안식일은 내가 쉬는 날이다. b, 안식일은 나를 심판하는 날이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a일까요, b일까요? 방송 보는 사람들 답변해보세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언약의 내용이 안식일이라 했지요. 그러면 신약에서 안식일 내용의 완성이 십자가라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능력은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몸으로 교체하는 거죠. 바꿔치기하는 거죠. 그러면 안식일에 내가 쉰다면 내가 교체되는 게 없잖아요. 그냥 쉬는 거잖아요. 6일 일하고 하루 쉰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안식일이 나를 심판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교체가 되는 겁니다. 이 교체가 노동의 교체에요. 네가 일해서 네가 살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해서 살아가는 몸이 교체된 몸이라는 거예요. 우리 몸이 안식일의 완성에 의해서 영원히 천국에 살 때 우리가 천국에 온 원인과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노동해서 들어온 게 아니고 누가 노동한 거예요? 예수님이 노동해서 들어온 몸이라는 것을 신약에 오기 전에 구약 때 안식일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안식일은 이렇게 지키는 것이라고 해서 안식일은 주인님이 오셔서 구원할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진정 안식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에서 살리는 것도 그날이 안식일이었어요.

마태복음 12장 7절에 보면, 나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자비를 원한다고 돼있거든요. 안식일에 제사하게 돼있단 말이죠. 구약에는. 그런데 마태복음은 구약이 아니고 신약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죠. 새 언약이니까 완성이잖아요. 완성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자비가 되는 거죠. 그런데 안식일을 완성시키는 주인공은 예수님이란 말이죠.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손 마른 사람이 있어서 병을 고쳤고, 또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져있으면 그걸 끄집어내는 것이 안식일 취지에 맞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식일이란 뭐냐 하면, 주인공 되시는 분이 자비를 베풀어서 현재 죄(십자가는 죄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에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빠져있는 인간이 노력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약속대로 자기가 던져놓은 안식일 취지대로 하나님이 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 그 효과로써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것 그게 안식일의 취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건져낼 때 과정이 뭐냐? 십자가의 과정을 밟겠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는 죄를 지은 몸은 포기하라는 게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마저 심판 받았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심판 받는 그것이 뭐다? 심판한다는 말씀이 곧 구원 시작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죄인으로 지적해서 심판한다는 게 구원에 돌입된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자기 노릇한다고 해봤자 거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설쳐봤자 이미 죄 이외는 아무것도 안 나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하나도 없는 죄인 주제에 기도하고 예배하고 성경공부하고 뭘 해도 그게 뭐가 된단 말입니까? 죄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기침하면 계속 침이 튈 때마다 바이러스가 계속 나오듯이 날 때부터 죄인 된 자가 뭘 설쳐봐야 죄의 범주만 넓혀질 뿐입니다.

그게 123456일이에요. 인간은 6일 동안 노동을 해야지요. 죄를 지어야지요. 죄를 짓고 안식일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는 어떤 일? 제사는 죽음을 표현하는 거죠. 제사할 때 맹숭맹숭 제사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린양을 잡을 때 그냥 붙들고 있으면 됩니까? 칼로 제사장이 목을 따지요. 기어이 거기서 뭘 끄집어내요? 양을 바치는 게 아니에요. 뭘 바칩니까? 양의 생명을 바치기 위해서 피를 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십자가의 피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기 피, 다른 말로 예수님의 자기 생명을 걸고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거예요. 기업이란 것은 예수님의 언약의 정보를 인공지능을 로봇에 장착, 넣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를 집어넣어서 언약의 백성들을 생산하면 그게 바로 기업이란 말입니다. 그게 상속물이란 말이죠. 우리의 상속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상속으로 그게 이스라엘 백성이란 겁니다.

그 안의 내용은 뭐다? 안식일이에요. 그래서 안식일은 뭘 하는 행위다? 나를 이 세상을 심판하는 거예요. 구원이란 것은 심판의 대상이 없으면 구원 자체가 안 돼요. 먼저 심판 받을 만한 대상이 만들어져야 그 죄 속에서만 의가 나오는 거예요. 죄가 없이 의가 안 나오게 돼있습니다. 중립에서 의가 안 나와요. 죄가 있는 데서 의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자기 행위로 선한 일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생명을 모독하는 건데, 자기가 갖고 있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생을 살 때 자기 우수함을 지키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선한 것들을 축적하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천지고 한국교회 아닙니까.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할 때 일 번, 이 번, 삼 번 알겠지요. 사 번 들어갑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 언약. 두 번째는 상속, 기업. 세 번째는 안식일이란 심판하는 것. 왜냐하면 심판 자체가 구원의 개시, 구원이 발동 걸린 거예요. 구원이 출발한 겁니다.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이렇게 죄이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안식이 없이 왜 스스로 구원이 안 되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현실적으로 인간이 세 가지가 있는데요. 인간이 신이고 싶다. 하나님이고 싶다. 이건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창세기 3장에서 누가 제안한 겁니까? “너는 신과 같이 될 것이다.” 악마, 뱀이 제안하지요. 너는 신이고 싶어 해야 돼.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목적은 뭐냐? 내가 절대자가 되는 게 사는 목적이고 이 세상사는 보람이라는 거예요. 최고가 되는 것 있잖아요. 만약에 자녀가 있는데 “너, 커서 뭐할래?” “머슴살이할래.” 이러면 부모가 쥐어박아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나, 대통령될래.” “오오 대통령돼야지.” 머슴살이와 대통령 중 어느 것이 최고냐 하면, 대통령이 더 최고지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굶으시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현장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악마가 나타났지요. 여기서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가 나타난 걸 우리가 아는데 악마가 나타났다는 걸 지우세요. 악마가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옆에 다정한 이웃, 아주 인정 넘치는 사랑이 넘치는 이웃이 와서 예수님에게 위로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첫째는 지금 예수님이 굶고 있잖아요. 이웃에서 와서 하는 말이, “아이고, 기도도 좋지만 밥 잡숫고 하세요.” 그 말이 인간미가 넘치는 말이지 누가 그 말을 악마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고 있는데 또 어떤 아저씨가 와서, “하나님 아들 맞지요. 하나님 아들이라면 인간이 행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행할 텐데. 성경말씀에 보니까 메시아가 오게 되면 천사가 와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신체를 보호한다는데 그것 한 번 보여줘요. 저 성전 꼭대기가 높은데 일단 올라갑시다.”

그래서 예수님 데리고 성전 꼭대기 올라가서, “여기서 뛰어내려 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진짜 메시아, 엄지 척.” 지금 마귀란 말 안 했어요. 어떤 팬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 정도 솜씨 부리면 당신 추종 세력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베풀면 당신은 큰 목회할 것이고 사람들이 아마 십사만 사천 이상으로 모일 것입니다.”라고 했고.

그래 놓고 예수님이 하는 말이, “너는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측정하지 말라. 시험하지 말라.” 네가 측정해서 믿는 하나님 같으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다. 손에 딱 쥐어주는 하나님은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죠. 아담에 속한 우리의 모든 걸 심판하시는 분이지 의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앞에 죄라는 것이 있지요. 죄라는 것은 우리의 의논 대상이 아니에요. 죄가 있는 곳에 뭐가 있습니까? 심판이 있지요. 심판 대상이 우리와 협의대상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뭐 되고 싶다?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고 문제 있다는 말씀을 지금 제가 드리는 겁니다.

문제 있다는 걸 말씀드려도 우리 마음은 항상 저 최고를 지향해요. 최고를 향하지 바닥은 싫어요. 우리는 뭐라고 더 남보다 뛰어나고 최고 인물이 되고 싶어요. 영웅 있지요. 히어로, 영웅이 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신이 되고 싶다. 이것 죄입니다. 없애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돼요. 없애란 말이 아닙니다. 죄가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의가 만들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과학적으로 관찰해 볼 때 인간은 흙이 됩니다. 종교적으로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요.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기독교나 이슬람, 힌두교를 통해서 인간은 절대자가 되고 싶어요. 모든 종교는 인간을 절대화시키는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기독교, 천주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와 악마는 한 패 먹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신천지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그래요. 교회 안 다녀도 종교가 없어도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남한테 간섭받기 싫은 겁니다. 잔소리 듣기 싫은 거예요.

어떤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선배가 물었어요. “네가 결혼하고 난 뒤에 어떤 점이 달라졌나?”라고 물으니까 새로 결혼한 남자가 딱 한 마디 했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하면 모든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혼하니까 이게 싫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아내의 잔소리. 이거는 결혼하기 전에는 생각도 못했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잔소리가 듣기 싫은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누구로부터 간섭과 지시를 받기 싫어합니다.

두 번째. 인간은 흙이다, 라는 것은 과학입니다. 과학에서 관찰해보니까. 눈으로 관찰한 거예요. 과학은 눈으로 관찰한 것이 진리기 때문에 인간은 흙이다. 그러면 과학은 흙 다음에 뭐다. 이런 건 없어요. 흙 다음에 뭐가 돼요? 몰라요.

세 번째, 성경에선 뭐라고 합니까? 인간은 죄인이다. 죄인이면 그냥 죄인입니까? 받아야 될 게 있지요. 죄인이 받을 것은 저주지요. 저주와 심판. 인간이 악마한테 매인 것도 저주에요.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저주고 심판. 그리고 흙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지옥이죠. 그러나 과학에선 지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흙으로 멈춰버립니다. 살다가 죽고. 죽는데 죽는 수명을 좀 늘여볼까, 이런 식으로 연구할 뿐이지 죽고 난 뒤는 모르지요.

죽고 난 뒤의 사실을 모르면서 죽기 전에 안다는 것은, 이거는 논리적으로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죽고 난 뒤를 모르면 죽기 전에 안다는 것도 모르는 것에 지배를 받아야 돼요. 죽고 난 뒤를 모르면 죽기 전에 알았던 것도 죽고 난 뒤의 사실로 인하여 전부 다 오류가 된다는 생각을 그들은 가져야 됩니다. 내가 죽어보니까 인생 잘못 살았다는 그런 것을 각오를 해야 돼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지요. 거지와 부자가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과학적으로는 부자가 영웅이지요. 부자가 좋고 거지는 싫은 거예요. 모든 인간이 싫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1번에 의해서 거지가 인간의 소원이 된 사람이 있어요? 없잖아요. 몸 아픈 것이 소원입니까? 어느 인간이 자기 몸 아프기를 소원합니까? 없지요. 왜 예수님께서 비유를 하시면서 건강하고 잘 사는 부자와 가난한 정도가 아니고 몸이 아파요. 몸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왜 이렇게 대비했을까요?

그 대비는 천국과 지옥이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역전된 의미로 나타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몸 아프고 거지 되면 천당 간다는 말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몸 덜 아프고, 아예 안 아프고 돈도 너무나 많은 것을 인간이 추구할 때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믿음과 구원과 천국은 인간에게 밉상을 받는 그러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죠.

성경에서의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이 안 되고 구원이 없어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구원이 아니고 반대로 저주가 주어져야 하나님 원칙에 맞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되고자 하는 것은 1번 때문에, 인간이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거지만 사실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에 해당이 없어요. 그럼 구원은 어디 있느냐? 구원은 언약 안에 담겨 있어요.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기억해보세요. 인공지능이 있지만 그걸 인간의 모습으로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놓게 되면 인공지능이 장착된 휴먼로이드, 로봇이 계속 생산된다고 이야기했지요. 그걸 제가 2번에서 하나님의 상속, 상속자, 또는 하나님의 백성, 더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로 보면 됩니다.

그 안에 장착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주인공이니까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그래서 자비를 베풀 게 되면 예수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서 죄를 죄 되게 하고 그 죄 속에서 의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예수님 혼자서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이 거든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구원은 언약 안에 있다. 이걸 신약에서 십자가 안에 있다. 그래서 구원의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십자가에 있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걸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은 안식일에 바치는 어린양 몸체 안에 들어있는 피.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피는 곧 생명이니까. 유월절에 피를 바름으로써 이 집안은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해서 심판의 천사들이, 심판의 천사들은 무서워요. 융통성이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의 착함이고 의로움, 이런 것 안 봅니다. 우리의 착함, 성실함 보지 않고 그냥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요.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하나님께 계시를 받고 예수님을 볼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죄가 있어줘야 무슨 개념이이 구성되느냐 하면, 어린양이 구성이 돼요. 죄가 없으면 어린양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앞에 뭐가 붙어요. 어린양이 어떤 어린양이냐 하면, “일찍 죽으신 어린양”, 일찍 죽으신 어린양이 성전이 천국에 있습니다. 기념물로. 일찍 죽었다는 말은 이미 이 세상은 기대할 게 전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결론내면, 안식일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시간, 하나님의 시간 이걸 저는 천상의 시간. 하늘에서 주어졌으니까. 천상의 시간의 용도는 하나님의 심판이죠. 하나님의 심판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대단히 쉽습니다. 이제부터 상당히 어려워요. 여기까지는 쉬우니까 단단히 기억해주시고요.

자, 이 세상의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걸 단선형(선이 하나밖에 없지요) 시간관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데 과거라는 것을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기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니까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비유하느냐 하면, 흘러가는 강에 비유한 거예요. 시간은 마치 유수와 같다. 또는 흘러가는 강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정한 안식일 또는 하나님의 시간은 흘러가는 강 또는 달리는 열차,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달려가는 시간에 하나님의 안식일은 거기에 올라타 버려요. 올라타서 갉아먹습니다. 왜 갉아먹느냐 하면, 이게 심판이니까요. 따라가면서 심판해버려요. 인간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하루 또는 한 달 또는 일 년이 되잖아요. 단순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생각이 이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유일하게 하나님의 언약이 장착된 민족은 언약을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시간은 뭐냐 하면, 아까 레위기 25장 8절의 말씀처럼 7x7+1 이게 희년이 되는 겁니다. 기쁘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7년은 123456, 7이거든요. 그 다음에 곱하기 7이라는 것은 반복이에요. 7의 반복, 다른 말로 하면, 7의 주기성이에요. 주기란 말은 공전한다. 뭔가 중심점이 있고, 중심점에서 시간이 나오고 그 풀려나오는 시간이 다시 중심점으로 회수되는 식으로 공전, 반복이 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강이 흘러갔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어붙은 강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에서는 나이 몇 살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네가 안식일에 나무 안 한 것이 중요한 겁니다. 네가 나이 몇이냐, 생일이 언제냐, 이게 아니라 다가오는 안식일에 네가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가 중요해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안식일은 뭐하는 무슨 날이라 했습니까? 안식일은 심판이죠. 심판은 교체지요. 교체의 진짜 원형은 십자가라 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고 죄로 죽은 죄 안에서 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상속되는 천국 가는 백성을 거기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뭐냐?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이거는 우리 몸속의 의식이 기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 과거를 포기 못해요. 그리고 그 과거의 끄트머리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치 핵탄두에서 탄두 있잖아요. 시간을 계속 생산하는데 과거가 계속해서 밀고가면 과거의 뾰족한 총알 끝, 탄두 끝이 현재에요. 현재의 내용은 실은 전부 다 과거입니다. 현재는 그냥 점에 불과하고 뒤돌아보면 전부 다 내 과거에요. 자기의 과거입니다.

그렇다면 미래가 있다는 데 미래는 상상이죠. 현재가 시간의 끝이기 때문에 미래는 없는 거죠. 미래를 구상하는 것은 어디를 근거로 상상하는 거냐 하면, 인간은 과거 밖에 기억 밖에 모르기 때문에 기억을 기억해서 상상하니까 이게 미래가 되고 이게 꿈이 돼버리죠. 헛꿈이죠. 다른 말로 개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혜를 통해서 과거에 한 것을 미래에 되풀이하려고 애쓰게 돼요. 반복을 하려고 애씁니다. 예를 들면 내가 앞자리에서 기도하니까 응답이 되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뒤에 앉지 않고 앞자리에 앉게 되면 지난 날 은혜 받은 것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돼버리면 아까 안식일에서의 되풀이, 하나님 뜻의 되풀이는 뭐냐 하면, 심판의 되풀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현재 내게 있는 기억을 갉아먹는 행위의 되풀이에요. 내 모든 기억을 부정해버리고 죄로 규정하는 되풀이인데, 세상적인 되풀이는 뭐냐 하면, 나 잘난 기억을 미래에 또다시 뽐내려고 하는 되풀이에요. 이 기억의 덩어리를 자아, 또는 자아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자아라고 하니까 어렵습니까? 그러면 인간의 나.

인간의 나라는 것을 뜯어보면 기억이 들어있고 그 기억은 어떤 기억이냐 하면, 나 잘났다는 기억이에요. 잘났다는 기억이 아까 지워버렸지만 1번이 뭐였습니까? 나는 신처럼 된다. 인간은 어떤 것을 기억하느냐 하면, 본인이 남한테 내세울 때에 꿀리지 않는 것들만 기억이 되고, 그 다음에 어떤 것은 기억하되 감추는 기억이 되느냐 하면, 잘난 척하다가 개 피 본 것 있잖아요. 실패한 것, 잘난 척하다 창피당한 것은 감추는 용도로 기억 돼요. 못난 것은 감추고 잘난 것은 내세우고.

이게 죄인이 아니라 나는 계속 잘난 존재로 가고 싶은 거예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잘났느냐 하는 그 이야기에요.

그래서 그걸 제가 알기 때문에 아까 안식일이란 심판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다 갉아먹는 거예요. 그걸 다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죄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죄를 언급해줘야 돼요. 죄가 있어줘야 의가 나오니까요. 죄가 없는데 의가 안 나오거든요. 죽음 속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어야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죽지도 않았는데 구원의 능력 없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서 계속 한 것이 뭐냐 하면, 죽지 않고 메시아 하라는 거예요. 뭐로? 힘으로. 돌이 떡 되게 하고, 뛰어내렸는데 희한한 재주를 부리고, 그리고 세 번째가 세상 부귀영화를 다 가진 모든 걸 갖고 싶어 하죠. 그게 유혹이니까. 그래서 죽음이란 걸 입 밖에 내지 말고 잘 된다, 잘 된다.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마인드. 네 몸으로 잘 된다. 네 몸 교체하지 마. 그냥 네 몸으로 건전하게 경건하게 거룩하고 보존하면 천국 가, 라는 식으로 자꾸 악마는 우리에게 심어준 본성을 격려하고 독려하고 칭찬하는 쪽으로 계속 나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있어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무슨 종이 아니라 했습니까?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나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을 나한테 기대하지 마라. 너희들의 듣고자 하는 말은 나한테는 기대하지 마라. 왜?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니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사람의 종이 아니다. 그리고 심지어 나라 할지라도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안식일이란 마지막 때 창조의 완성으로 준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창조의 취지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회하시고 완성시키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을 집어넣습니다.

우리 성경 한 번 찾아볼까요. 민수기 14장 33절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라고 돼있지요.

지상에서는 며칠입니까? 40일. 40일 맞지요. 그런데 천상에서는 40일입니까, 40년입니까?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 됐지요. 그렇게 환산시키고 바꾸는 취지가 뭡니까? 뭐하기 위해서? 심판하기 위해서지요. 심판한다는 말은 인간의 시간에 대해서 하나님의 시간적 차원에서 심판하는 거예요. 인간의 시간 자체가 심판 받을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개념이.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시간은 뭘 하나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하늘에선 그렇게 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10분 쉬고 이야기하겠습니다.



20200306b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시간의 심판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민수기 14장 33절, 34절 말씀을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루를 생각하고 40일 동안 정탐한 것을 하늘나라에서는 40년으로 계산해서 그걸 지상에 다시 적용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루를 1년으로 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봐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혹독하게 얼마나 힘들게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어요. 하나님의 시간 계산에서 하루를 1년으로 쳤다는 것은. 고생 좀 해라. 그런 뜻이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무심코 정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심코 한 인간의 행위에 깊이를 더한 겁니다. 죄가 어느 정도로 깊은지 체험하게 만드는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은 조성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40일 다닌 겁니다. 어디를 다녔습니까? 약속의 땅을 정탐했습니다. 가나안 땅이죠.

그건 공간입니다. 공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여기다 어떤 성질을 부여한 거예요. 공간이 있어서 공간이 아니고 혹독한 시련을 줄 수 있는 공간임을 이야기할 공간에다 천상의 시간관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시간관은 두 종류가 돼버려요. 하루를 하루로 보는 시간관. 이건 누구 시간관입니까? 인간의 습관에 의해서 과거의 기억에 의해서 알고 있는 하루는 하루에요. 해 뜨고 해 지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확대시켰습니다. 너희들의 공간에서 하는 행위가 질적으로 얼마나 죄의 깊이를 품고 움직인 행위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기다가 천상의 시관을 집어넣지요. 그러면 하루가 1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 년이 편안한 일 년입니까, 혹독한 일 년이에요? 혹독한 일 년이고 그 40년이 지나면 그들은 죽지요. 그러니까 40년은 죽이는 시간의 간격을 이야기합니다. 죽으라, 이 말입니다.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돼요. 죄의 깊이를 알고 죽어야 돼요.

하나님이 개입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시공간이 개입했다. 그런데 공간은 우리 보기에는 빈 공간인 줄 알았더니 하나님의 시간이 덮쳐버린 공간이죠.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오므라이스 알지요. 자, 볶음밥과 오므라이스의 차이점은? 이건 제 마음대로 하니까 그냥 이해해주세요.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밥을 볶는 것은 동일해요. 그런데 여기에 노랗게 계란 판이 덮여 있지요. 이게 오므라이스가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보통 맛을 더한다고 케첩을 지그재그로 뿌리잖아요. 여기다가 시중에선 짬뽕 국물 한 그릇 나오지요.

오므라이스는 공간이 얇은 계란 판으로 덮여 있잖아요. 그러면 약속의 땅은 뭐로 덮여 있는 거예요? 광야가 뭐로 덮여 있습니까? 40년 동안 죽으라는 그걸로 덮여 있지요. 그 정신이 바로 약속의 땅,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공간의 성질이 바로 심판을 받되 어디까지? 결국은 죽어야 된다는 그것이 그러한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그 취지, 그 의미가 가득 찬 그 땅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가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예 목을 조르는 하나님이라니까요. 이 땅에 제발 죽되 그냥 죽으면 소용없어요. 죽는 이유나 알고 죽어라. 왜 죽이십니까, 하면 안식일, 다시 말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그 사실을 네가 다 버려놨잖아. 너란 인간이. 창조 때 보시에 심히 좋았더라. 그래서 하나님이 기분 좋아서 안식하신 그 안식일을 하나님은 기분 좋은데 이 세상의 형편은 마귀 천지가 되었지요.

그걸 계속 지적하는 거예요. 안식일로 지적하는 거예요. 그 안식일이 확대되면 안식년이 돼요. 안식년이 일곱 번 되면 49년 되고 플러스 하나가 되면 기쁨이 되지요. 여기서 하나님이 세운 공식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추궁하는 겁니다. 그걸 아까 갉아먹는다고 이야기했는데 추궁하시는 겁니다. 7년+7년, 안식년이라는 것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곱 째 안식일.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그 다음에 안식년. 안식년을 일곱 번하면 49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고 심판해야 될 이유가 있음을 언급하는 거죠. 레위기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25장 9절에 보면,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 되”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죠. 속죄일이란 우선 죄가 전제돼야 되고, 그래야 속죄가 되니까. 죄를 모르는 데 무슨 속죄일을 알아요. 자기 죄를 모르는 데 속죄일을 압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몰라요. 왜? 인간의 기억 속에는 지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죽어 마땅하고 신종 코로나 걸려 마땅하다고 생각을 절대로 안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스크 쓰는 이유가 뭡니까? 안 걸리려고 마스크 쓰잖아요. 안 죽으려고. 죽으라고 바이러스 보냈는데 인간은 안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요모조모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병에 걸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것은 무조건 죄인이라는 뜻으로 보여줬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무조건이라는 데 우리가 그것을 수긍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여기에 사단 난 거죠. 그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악마의 유혹에서 우리가 발을 뺄 수가 없어요. 매일같이 우리는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 노인정에서 하는 이야기가 전부 다 자식 자랑이고 손자 손녀 자랑하잖아요. 그것 왜 그렇습니까? 내가 고생고생해서 잘 키웠다 이 말이죠. 네 자식보다 훨씬 좋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왜 돌아가시죠? 그걸 모르겠다. 그렇게 잘났는데 왜 돌아가시느냐 말이죠. 왜 성경에서는 그걸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느냐 말이죠. 도대체 납득이 안 돼. 앞뒤가 안 맞아.

레위기 25장 3절 봅시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오므라이스 생각해보세요. 밭이라는 것은 공간입니까, 시간입니까? 공간이죠. 밭은 공간입니다. 공간에 뭐가 덮쳐졌습니까? 6년 동안이라는 하나님의 시간이 덮쳐졌지요.

지금 우리가 두 번째 시간에 할 것은 뭐냐 하면, 하늘의 시간은 무슨 중심으로 돌아가느냐? 우리가 그걸 파악해야 돼요. 나는 누구 중심으로 뺑뺑이 도는지 그걸 파악해야 된다고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인간이 생각한 시간은 도는 게 아니고 중심이 있는 게 아니고 그냥 과거, 지금은 현재, 그리고 미래, 헛된 꿈. 단선으로 간다고 했지요.

40일이라는 것도 우리는 40일로 여기지 어느 인간이 40일을 40년이라고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정탐을 40일 했어요. 40년 한 게 아닙니다. 40일=40일이에요. 40일은 40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0일=40년으로 봤지요. 이게 40년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고마운 줄 알아야 되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생각이 다르구나. 이렇게 하나님과 생각이 다름을 안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지가 죽어가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돼요.

그런데 40년 광야에서 죽은 사람 가운데 누가 포함돼있습니까? 40년 동안 홍해에서 건너간 사람 다 죽을 때 같이 죽게 된 사람 중에 유명인사가 있어요. 힌트 드릴까요? 옆에 지팡이 들고 있는 사람, 누굽니까? 모세가 40년 동안 사람들 죽을 때 같이 죽어요. 그럼 모세 지옥 갔습니까?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 옆에 두 사람 등장해요. 하나는 엘리야고 하나는 모세지요.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하늘나라 갔습니다.

이상하지요. 약속의 땅에서는 못 갔는데 하늘나라에는 왜 갑니까? 아까 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장착된 사람은 천국 갑니다. 언약이 장착된 언약을 이해한 사람은 천국 가는 거예요. 본인의 개성이나 이런 것 필요 없어요. 본인이 얼마나 훌륭했다,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게 되지 내가 노력한다고 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안식일이란 언약은 언약을 주신 당사자가 그 언약을 완성함으로써 그 완성의 효과를 봄으로써 우리가 안식의 나라,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뭘 생각하느냐?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관과 우리가 이 시간에 하려는 하나님의 시간과 이게 맞는 거예요, 틀린 거예요? 이게 일단 틀리고, 우리의 시간관은 하나님의 시간관에 의해서 공격을 받을 대상이 된다는 것을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겨야 된다 이 말입니다. 감사히 여겨야 돼요.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지요. 8절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이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들 너희들이 생각하는 시간관에 푹 젖어있지. 정신 차려라. 그것 백날 해봐야 주님 오신다는 것이 안 좋아져. 내가 더 살고 싶어 하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안 돼요. 우리의 시간관에서는. 이번 8월 이후에 주님 오셔야 될 텐데. 왜? 8월에 우리 딸 시집을 보내야 되니까. 재림하셔도 딸 시집보내고 재림하라는 거죠. 내 시간관을 주께서 부정하고 갉아먹고 심판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꾸 내 것을 고상하게 지키려는 강렬함이 있어요. 내 잘남과 고상함을.

그러면 지금부터 할 것은 하나님의 시간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느냐, 라는 말씀을 드릴 텐데요. 그전에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왜 이걸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시간은 누구를 중심으로 한 시간인가를 밝혀야 되니까요.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이 공간이죠. 연못에 돌멩이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1초 후에 돌멩이 떨어진 연못 중심으로부터 파동이 퍼지겠지요. 2초 후에 파동이 아까보다 더 확대되겠지요. 3초 후에 연못의 파동이 점점 더 커지겠지요. 충분히 이해되지요. 갑자기 연못이란 공간 생기고 1초 후 2초 후 3초 후 여기에 뭐가 생겼습니까? 시간이 생겼지요.

그래서 연못 지워버리고 파동 지워버리고 이걸 단순화시켜서 그림으로 하게 되면 무슨 형이 되냐 하면, 이런 원뿔형이 돼요. 돌멩이 떨어진 것을 사건 p로 잡고, 파동을 연결시켜보면 갈수록 파동이 커지니까 파동이 넓혀지는 만큼 시간이 그 만큼 흘러갔다고 보는 거예요. 지금 인간의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인간에게 시간은 뭐냐? 변화를 보고 시간을 생각한다는 것을 이 예로서 제가 설명 드리는 겁니다. 변화가 없으면 인간에게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아까 연못에 돌멩이 떨어진 걸 생각했습니다. 파동이 퍼졌지요. 이번에는 어렵게 이 시간, 빛이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빛을 비췄다. 빛이 우주로 나가든지 나간다고 봅시다. 인간의 시간에 빛이란 것을 왜 동원시키느냐 하면, 인간은 현대물리학에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빛의 속도는 1초에 300,000km로 가는 이 속도는 변함이 없다, 라는 사실을 밝혀냈어요.

여기 지구가 있고 태양이 있다면 지구에서 태양까지 빛이 몇 분 걸리느냐 하면, 이게 8분 걸려요, 만약에 지구에서 태양으로 가는 8분 동안 태양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8분만큼 늙어지는 거예요. 태양 자체가 시간이 흐르는 거예요. 변함이 없다는 것은 누가 발견했는가? 인간이 발견했어요.

물리학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론들을 다 생략하고 중요한 점만 이야기만 해본다면 빛의 속도가 불변하게 되면, 사건이 퍼져나가는 이것을 기본 광원, 특이성이라 하는데 그냥 사건이에요. 이 원뿔은 미래광원이 돼요. 그리고 사건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은 반대로 과거광원이 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빛의 속도로 가게 되면 원뿔의 지평선으로 가게 되면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빛의 속도와 동일하게 가게 되면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동일한 빛의 속도에 따라서 정해지기 때문에 빛의 속도로 가게 되면 시간이 흘러 늙게 된다는 그것이 성립이 되지 않아요. 늙는다는 게. 그 이유가 이렇게 확정된 빛이 시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빛이 시간을 만들어내거든요. 그런 공식이 있어요.

어떤 나무꾼이 동굴을 발견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보니 허연 신선 둘이 바둑을 두고 있더란 말이죠. 바둑 구경하다 여기서 하루를 보냈어요. 그리고 하루 지나서 마을 사람을 만났어요. 혹시 나무꾼 아십니까, 하니 자기 증조할아버지라는 거예요. 이쪽 마을에서 흐르는 시간은 신선놀음하는 여기서는 하루지만 벌써 수십 년 지난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되느냐 하면, 빛의 속도가 동일하게 되면 우주에 흐르는 모든 시간은 질량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무거운 쪽에 별이 끌리면 굉장히 속도가 빨라요. 속도가 빠르게 되면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돼요. 그러니까 가만있는 사람보다 설치는 사람이 빨리 늙어요. 실제로 보면. 이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공간이 시간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전부 다 시간관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질량이 무거운 곳의 별은 굉장히 빨리 빠집니다. 질량이 무거운 곳을 블랙홀이라 하는데 여기에 들어가서 시간이 각 좌표, 자리마다 흐르는 시간이 다 차이 나요. 그래서 시간은 뭐냐 하면, 보편적인 게 아니고 상대적이에요. 자기 동네에만 통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현대물리학에서. 이건 물리학문제기 때문에 제가 깊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만 말씀드릴게요. A라는 지역과 B라는 지역이 따로 시간이 흐르게 되는데 따로 흐르는 것끼리 연결이 되게 되면 이걸 (양자)중첩이라 하는데, A와 B 지역의 시간이 따로 놀게 되면 한쪽은 과거인데 한쪽은 미래가 되고 또는 그 반대가 되고. 그 시공간을 통일할 수 없어요. 아까 신선놀음하는 그 동네와 이쪽 마을 사람들의 시간이 서로 달라요.

이 모든 논리에 딱 한 가지 주장할 수 있는 그걸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증명해서 노벨상을 받았는데 확실히 그렇거든요. 딱 하나밖에 없는데 빛은 시간은 동일하다. 이것 하나로 이런 시공간을 다 한 거예요. 옛날에는 시간도 동일하다. 공간도 동일하다, 했는데 빛의 속도가 동일하면 시간도 변하고 공간도 변해요.

그러면 공간의 힘이라는 건 없고 어떤 물질에 질량이 있으면 질량이 무게에 따라서 빛이 휘어져올 때 계곡이 생기고 출렁하고 늘어질 때 빛은 빠른 길로 오기 때문에 빛이 직진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휘어져 보이는 거예요. 따라서 중력으로 인하여 시간도 변하고, 제 말은 중력에 의해서 곡면에 따라서 시간도 변하고 공간도 변하고 시간과 공간은 상대성이지 절대적인 통일된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에선 정설로 보고 있어요.

그러면 왜 이 이야기를 제가 하느냐 하면, 인간의 시간은 무슨 중심으로 흐르느냐 말이죠. 안드로메다 성운이 지구로부터 250만년 떨어져있다 합시다.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는 250만년 이전의 안드로메다지요. 그래서 가게 되면 벌써 늙어버린 안드로메다가 된단 말이죠. 그만큼 시간이 흘러버리니까요.

그러니까 시간은 동일한 게 아니고 시간이 빛의 속도에 따라서 자꾸 변하고 중력에 따라서 변한다는 말을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국 인간이 우주를 볼 때 우주라는 것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고 왜 그렇게 생겼느냐? 현재 세상사람, 과학자들 결론이 뭐냐 하면,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우주는 스스로를 측량하고 계산하고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게 결론이에요.

아무리 인간이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이 우주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거예요. 우주의 시간을 137억년이라고 하거든요. 우리 인간이 우주를 볼 때 137억년으로 보이게끔 우주가 우리 인간을 농락이라고 해도 되고, 그렇게 보이도록 배치가 그렇게 돼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현재 인간에서 시간 중심은 누구 중심입니까? 인간 중심이지요.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고 아무리 연구해도 인간이 보고 연구하는 그 모든 것에는 무슨 중심이에요? 나 잘났다 중심이에요. 고린도후서 10장 찾아봅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4,5절)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자기가 있는 좌표계, 자기 자리의 특수성을 주장하고 보편성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시간이란 누가 만들어낸 거예요? 별이 만들어냈습니까? 달이 만들어냈어요? 시간은 누가 만들어낸 거예요? 우리 인간들이 자기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주를 상대로 내 자신이 진짜 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라고 증명하고 싶어서 물리학, 생물학, 모든 과학들을 모든 이론들을 만들어낸 거예요.

40일이 40일이다. 성경에 나오지요. 40일 동안 정탐했으니까. 이게 이방민족에게는 40일이 40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40일 뭐가 돼요? 40년이지요. 이게 현대물리학에선 용납이 안 돼요. 어떻게 40일이 40년 되는가. 갑자기 뻥튀기를 했어요? 40일이 40년 됐다는 근거를 대라.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 인간들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안 뭐가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간 것이, 모든 절기에 뭐가 들어간다 했어요? 안식일이 들어가지요. 안식일은 인간을 정죄하지요. 심판하는 거죠. 심판하면서 마지막에 7x7=49, 49년 칠월 십일이 무슨 날입니까? 이게 대 속죄일이고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갑자기 날이 있는데 그 날이 50년이라 해도 되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희년이에요.

희년을 풀이하면 기쁜 날, 모든 것에서 해방된 날 벗어난 날이 희년이에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계에서 벗어나서 무슨 중심으로? 언약 중심의 신세계, 주님 중심의 세계로 들어왔을 때 이 모든 시간은 처음부터 어디서 나왔다?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자기 백성만 시간을 통해서 다시 자기 품속으로 예수님한테 거둬내기 위해서 안식일, 하나님의 천상의 시간이 꽂히는 겁니다. 백성한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안식일이란 언약이에요.

인간의 시간에서는 우주의 물질 분포에 따라서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그게 뭐냐? 빛은 항상 300,000km로 달리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우겼어요. 그 말을 인간이 내뱉었지요. 그 말이 모순돼요. 왜냐하면 빅뱅, 초반기에 팽창해서 온 우주가 생겼다는 겁니다. 빅뱅의 흔적이 블랙홀이라는 거예요. 블랙홀을 허블망원경으로 사진 찍어보면 거대한 천체 꼬리가 뭔가 어두운 쪽으로 향하고 빨려가는 모습을 띄어요.

이건 뭐냐? 블랙홀은 어둡기 때문에 그 형체가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주변의 별이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통해서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거든요. 계산을 해보니까 블랙홀에서 어떤 빛도 못 빠져나와요. 만약에 블랙홀에서 태양만한 질량, 그 무게가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는 탈출속도를 계산해보니까 1.7광년이에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빛의 속도에 1.7배가 되어야 블랙홀에서 빠져나온다는 거예요. 태양만한 질량을 가진 별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까 전제가 뭐예요? 어떤 것도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게 없다고 했는데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려면 빛의 속도보다 0.7배나 더 빨라야 빠져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어떤 점에서 모순되는지 감이 안 오십니까? 물리학에서 이 세상에 변치 않는 진리는 뭐냐? 빛의 속도는 300,000km로 변함이 없음을 가장 기본 전제로 해서 한 거예요. 그리고 변함이 없음을 측정해보면 다 맞아요. 빛의 속도는 변함이 없다. 시공간도 다 틀어진다. 중력에 의해서 시공간이 휘어진다. 각자마다 계의 특수성에 의해 다 달라진다.

맞는다고 하는데 빛의 속도는 동일하다고 해놓고, 그럼 이 블랙홀은 어디서 만들어졌습니까? 분명히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게 나와야 블랙홀이 만들어졌다는 걸 설명을 하는데 1.7배나. 그런데 1.7배라는 것이 성립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우주가 빅뱅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놓고 빛의 속도보다 더 많아야 빅뱅이 성립된다는 것을 스스로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빅뱅 할 때는 예외로 봐주자.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고 해주자. 이걸 빅뱅인플레이션 이론이라고 하는 거예요. 빅뱅 할 때는 그냥 빛의 속도보다 빠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고요하게 되니까 빛의 속도가 원칙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싶은 이유가 뭘까요, 그렇게 연구하는 그 의미와 목적이 뭐냐? 뭘 주장하려고 우주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까? 우주는 인간에 의해서 관찰되어야 마땅해. 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니까.

인간을 티끌 같다, 먼지 같다. 아무리 물리학에서 이야기해도 우주를 관찰하는 나는 절대자라는 악마적 생각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욥기 10장 5절에서 6절 봅시다.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여기 보면 주의 날과 인생의 날이 같다고 돼있어요, 다르다고 돼있어요? 다르지요. 다른 거예요.

주님께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왜냐하면 인간의 중심으로 세상이 안 만들어졌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기 위해서. 그러면 누구 중심이냔 말이죠. 아까 고린도후서 10장에서 봤지요.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에요. 과학들의 아무리 연구해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안 나와요. 창조과학회가 그래서 문제에요. 아무리 연구해서 예수님이 안 나와요.

하나님은 나오는데 하나님 나와 봐야 그건 종교고요. 종교라는 것은 마귀와 협잡해서 만든 거예요. 신이 있다는 것은 마귀가 한 주장이고요. 중요한 것은 마귀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부정하라는 거예요. 모든 세상 중심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 예수님이 나옵니까? 문자로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안 나오니까 모든 시간은 십자가로 거꾸로 가는 거예요.

천지창조가 방향이 있어요. 어느 방향이냐? 십자가로 방향이 있어요. 천지창조와 십자가 사이에 뭐가 촘촘히 개입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노아언약, 모세언약,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그 새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이란 계시를 보여주신 거고, 우리는 지금 레위기 25장을 통해서 안식일이 모든 절기에 삽입돼있다는 것을 압니다.

자, 절기의 특징은 뭐냐? 주기적이다. 언약의 특징은 주기적이죠. 주기란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뭔가 중심을 뺑뺑이 돌 때 주기가 돼요. 뭔가 미지의 것으로 시간을 뺑뺑 도는 겁니다. 7의 순환. 7이란 창조의 완성이죠. 하나님께서 완성했지만 인간은 따먹지 말라는 그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기적으로 심판하시는 거예요. 안식일로 심판하는 거예요.

안식일이란 시간으로 인간들의 시간을 공격하는 겁니다. 아까 인간들의 시간은 단선이죠. 과거, 현재, 개떡 같은 미래, 미래는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 그냥 가는 거예요. 이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옛날에 하나님이 멸망한다고 했지만 자연은 그대로 있잖아. 그걸 이야기한 사람이 성철스님이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게 불로 변한다는 것은 그 불교 고승이 모르는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은 누구 중심입니까? 내 중심의 시간에서는 내가 심판받는다는 걸 내가 몰라요. 내가 중심인데 누구 심판해. 내가 날 지키겠다는 데 누가 감히 날 심판해요. 요새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잘난 맛에 오고 나 지키기 위해서 교회 오는데 감히 누구 심판하겠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심판이 있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가 지금 버티고 살려고 하는 이 세상을 공격하고 나의 잘남을 보여주는 나의 잘난 기억, 시간성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기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이여 내 인생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이 있는데 거기에 무슨 시간이 덮쳤다? 주님의 시간이 나에게 덮친 거예요. 왜 덮쳤습니까? 나로 하여금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도마에 펴놓고 죄가 어디 있는지 그걸 다 뽑아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도마 위에 내 인생이란 도마 위에 펼쳐놓고 하나둘 주님께서 나를 뽑아내는 거예요. 니 죄가 여기 있지롱.

9절에 봅시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그러니까 실컷 욥의 인생을 깔아놓고 죄는 죄대로 다 끄집어내게 되면 욥은 쓸모없지요. 쓸모없으면 어디로 보낸다 해요? 티끌로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과정, 주님의 그 일을 통해서 욥이 중심이 되겠어요, 아니면 죄를 끄집어낸 분이 중심이 되겠습니까? 죄를 끄집어낸 분이 중심이 되겠지요.

욥은 구약이니까 아직은 언약 중간에 있다고요. 그런데 언약이 마감이 되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누가 몸소 보여줬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줬지요. 예수님이 뭐로 보여줬습니까? 그냥 죄 있다고 보여줬습니까, 어떻게 보여줬어요?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매달고 피 흘림으로써 모든 육은 죄다, 라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는 뭐냐 하면, 너 나랑 같이 죽자는 거예요. 같이 죽으면 같이 살고 안 죽으면 너는 영원한 지옥이다. 이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자비 베푼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고 나를 죽이는 게 자비에요. 그냥 죽이면 자비가 아니고 주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해주면 그것보다 더 큰 자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중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 중심이 아니라고 할 때 누가 여기서 극구 반대하겠어요? 그동안 너는 네 중심이야, 라고 누가 그렇게 힘을 주고 우리를 그런 식으로 몰아세운 세력이 누구겠어요? 악마지요.

악마는 뭘 합니까? 악마는 십자가의 원수기 때문에 맨날 뭘 해요? 자꾸 우리를 격려하고 너는 지켜야 될 귀한 거야. 자꾸 그렇게 우리를 기쁘게 하려고 했지요. 제가 아까 사람을 기쁘게 하면 뭐가 아니라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했습니다.

끝으로 누가복음 4장 보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17~19절)

주의 은혜의 해죠. 주의 자비의 해죠. 이게 희년이에요. 희년은 그냥 보는 게 아니고 앞에 안식일을 집어넣어서 심판하는 죄를 갉아 먹히게 하는 추궁 당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반복성, 주님의 십자가를 반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십자가의 심판성이 안식일이란 시간성으로 이 땅에 주어진 겁니다. 십자가에서 나온 것. 십자가에 죽어야 해방되니까.

십자가가 꽂혀있어야 예수님의 생명이 있어야 그것이 하나님의 완성된 언약이 장착된 주의 백성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다 이루었다는 내용이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중심의 시간관, 내 잘남을 뽐내려고 기억하는 나의 시간관을 전부 다 갉아먹고 부정해버리죠. 그게 바로 우린 인생을 살아온 걸 자랑하는데 자랑해봤자 그게 40일이면 40년 돼요. 그러니까 40년 심판의 날이라고요. 죽으라고 주시는 기간이라고요.

이게 진짜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하늘나라는 질서지요. 그러나 지상에는 범죄로 인하여 무질서지요. 질서 있는 안식일이 무질서를 찾아옵니다. 무질서 됨을 충분하게 보여주지요.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질서가 밉상 받고 희생당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질서가 장착된 사람은 무질서 속에서 질서와 연결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누구냐? 바로 언약이 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하나님의 정말 백성이지요. 그들은 고백하기를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주인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내 중심이 아니고 나는 이미 죽어 마땅하고 내 안에서 예수님이 중심이 된 완성된 시간이 우리 안에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여주기 위한 택한 민족이기에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와 진행상태가 나타나니 이제는 그 언약이 오늘날 저희에게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