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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25:13 / 값 치름 / 200403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25:13 / 값 치름 / 200403

정인순 2020. 4. 3. 11:36

음성1                   음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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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200403a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값 치름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레위기 25장 13절부터 하겠습니다.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라 희년 후의 년 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 살 것이요 그도 그 열매를 얻을 년 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년 수가 많으면 너는 그 값을 많게 하고 년 수가 적으면 너는 그 값을 적게 할지니 곧 그가 그 열매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 속이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요. 속인다는 말은 서로서로 사이에 다른 제3의 존재가 개입했다는 뜻입니다. 여기 한 사람 있고, 또 한 사람이 있을 때 속인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절대적인 기준, 제3의 어떤 분, 하나님이겠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심, 하나님이 계심, 이것을 배제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대화를 한다든지 상관을 한다든지 그렇게 될 경우를 속인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속인다, 안 속인다는 기준이 각 개인에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속인다는 개념이 첫째는, 인간 대 인간이 속고 속인다. 이런 개념의 속인다. 이건 우리가 보통 아는 속인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기준을 배제하면 인간 대 인간이 서로 속이고 않고 정직하게 할지라도 그건 속이는 것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특이성, 또는 특수성이란 이방민족과는 달리 모든 매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그 개입은 기준점, 속인다, 속이지 않는다. 옳다, 그르다. 죄다, 아니다, 라는 그 기준점 자체를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다는 사실이 이방민족과 다르죠. 그러면 그 기준점을 주셨다면 기준점이 있음이에요. 그 기준점이 확산이 되고 확대가 되면서 여기에 기준점 자체의 있음 더욱 더 확대시키게 되면 제대로 있음과 없음의 구분조차도 이 기준점에 준해서 있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어린아이를 낳았다. 또는 자식이 있다. 이것이 옳은가? 옳은 게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다. 집이 있다. 국가가 있다. 이런 것은 옳은 게 아닙니다. 있음을 있다고 해서 옳은 게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이 있음을 있다고 해서 옳다고 보지 않고 기준점이 있을 때만 옳다고 보는 겁니다. 기준점과 연관되어서 관련지어서 있을 때만 옳다 또는 바르다, 복되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다른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곧 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의 있음을 기준으로 해서 내가 있는데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또는 영생 얻기 위해서 나의 있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차용해보겠다, 하나님을 믿어보겠다는 것은 옳은 게 아니에요. 이건 잘못됨이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속이는 짓이 됩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짓이 되게 되면 하나님께선 이 있음도 없음으로 간주해버리죠. 있으나마나하다.

세상에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게 세상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특히 과학적 안목에선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있는 것은 없고 없는 것이 있게 된다. 뭐가 있게 되는가? 없는 것인데 뭐가 없는가? 인간들 기준에서는 하나님이란 없는데 어떤 기준점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이것이 가치를 결정하는 표준으로써 기준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성도. 성도는 누구나 알겠지요. 성도는 천국 가는 사람, 천국 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성도라 하지 않습니까. 성도가 하나님께서는 나 여기 있으니까 있음이니까 성도 되게 해 달라, 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성립될 수 없어요. 성립되지 않습니다. 성도란 이 땅에 없어요. 없는 성도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기준점이 나타나고 기준점 안에 성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은 이미 내가 있다고 여기는, 나를 어떻게 조작하고 나를 관리하고 나를 붙잡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예상 못한 도저히 터무니없이 들릴 거예요. 그러나 모든 개념, 교회, 천국, 지옥 이란 것도 기준점이 등장해서 비로소 기준점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교회, 새롭게 만들어진 천국, 새롭게 만들어진 지옥, 이것이 성경에서 원하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준점이 먼저 있고 기준점에 의해서 확산하고 확대되면서 거기에서는 기준점에 부합되는 새로운 있음이 그제야 만들어지는 거예요. 기존의 있음은 있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기준점이 있고 그 기준점과 관련됐을 때 기준점이 없었을 때가 있으니까 기준점이 없었을 때 없다고 여겼던 것이 기준점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있다고 등장하는 겁니다.

그 기준점이 오늘 본문에 희년이라는 겁니다. 희년, 기준점이죠. 희년이란 7x7+1=50년입니다. 인간들의 시간 개념으론 아주 간단한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어요. 희년이란 50년이다. 어떻게 50년이냐? 순차적으로 7x7+1해서 50년이다. 50년을 분석하면 7과 7에 +1해서 모든 요량한 의미가 같이 복합적으로 해서 50이 되는 겁니다. 7이란 7년째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되고 49로 마감돼야 되는데 49로 끊어지는 이것을 한계를 초과해서 이 모든 것의 목적을 둔 새로운 해가 오는데 그게 바로 50년 되는 희년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해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준점으로 한다면 인간들은 그럼 우리가 이걸 지키면 되잖아. 일곱 번째 해는 농사 안 짓고 그렇게 일곱 번 지나서 그 다음 해 칠월 십일에 희년 행사 돌리면 되지, 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는데, 희년이란 인간들의 시간개념으로 지킬 수 있는 그러한 율법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이미 또 다시 설명합니다만 있음이 문제에요. 본인이 없다고 여겨야 되는데 자꾸 있다고 여기니까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율법을 차용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럼 기준이 뭐냐? 율법이 기준이 아니고 내가 있음이 기준이 돼버려요. 내가 더욱 더 잘 있기 위해서 멋있게, 행복하게 영원히 있기 위해서 율법을 가져온 셈이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점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기준점이란 내가 없음이 될 때 기준점만 있음으로써 없음이 있음으로 바뀌는 그러한 현상을 나타내야 그게 바로 제대로 기준점 노릇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희년으로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50년이 기준이 돼요. 그러면 50년이 되지 않고 45년 또는 30년째, 20년째 이럴 경우에 50년이 기준이기 때문에 여기서 계산을 50번째 날부터 시간을 계산해서 의미를 부여하란 말이죠. 그래야 50이란 기준점이 의미로서 기존의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의 시간개념에 흡수가 되고 포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50년째 뭘 해야 되느냐? 각자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받았던 자기 땅으로 돌아가라. 이게 기준입니다. 50번째 되는 날은 하나님께 선물을 받은 또는 기업으로 받은, 상속으로 받은 그 땅으로 되돌아가라. 그냥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땅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경우에는 가만히 갖고 있으면 되죠.

하나님께 부여받았다는 말은 조상으로부터 부여받은 거예요. 부모가 자식한테 상속하면서 이 땅은 아버지 땅이 아니고 하나님 땅이라고 분명히 그 실체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자식에게 주게 되면 받는 자식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게 돼있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는 백성, 이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기 때문에 언약백성, 또는 약속의 백성, 약속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부각이 되는 그런 관계의 백성이죠.

그래서 이 백성은 본인이 밥 먹고 사는 게 목적이 아니고 자기가 나타내야 될 약속을 보여줘야 돼요. 약속을 보여줌으로써 약속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는 걸 자인하고 그렇게 해서 내 안에 나를 주도하는 것은 나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럴 경우에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뭔가 준 게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게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이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죠.

백성이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이란 기준점에 의하면 있으나마나 없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선 그것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지요. 그냥 물질로 보지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언약을 줄 때 하나님의 언약은 항상 어떤 현상을 동반하느냐 하면, 부수적으로 버려야 될 자,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오지 말아야 할 자를 버리는 작용이 계속 일어나요. 취할 백성은 취하되 버릴 백성은 버린다. 그게 바로 기준점 아니겠습니까. 기준에 부합되는 자와 부합되지 않는 자를 구분 짓는 작용을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겁니다.

보통 인간의 시간은, 지금 내가 여기 있음이니까 지금 내가 계산하는 시간, 이 시간 속에서는 뭐가 있느냐? 지금까지 내가 나답게 된 기간, 지금까지 내가 이만큼 살아오면서 내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시간, 그것이 인간들의 시간이 되겠지요. 추억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시간. 그것에 준해서 나는 현재 땅을 소유하고 있다, 또는 가옥을 소유하고 있다. 약속의 땅에 하나님이 주신 땅과 하나님이 주신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내가 여기 어떤 지역에 살고 있는데 내가 조상께 받은 기업은 지금 이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 열두 지파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만들고 그 땅을 열두 지파에게 인구수에 비례해서 평등하게 나눠줬다고 볼 수 있어요. 특수한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인구수에 비례해서 한 거예요. 레위지파 경우엔 특수하게 각 지파 속에 파견근무하게 돼있어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땅을 분배했다. 그러면 이게 왜 상속이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홀로 용사가 되시고 전쟁을 하셔서 분배된 땅이기 때문에 이게 상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땅을 어떤 기준으로 분배했느냐 하면, 약속에 준해서 약속이 없는 비-약속 민족, 원래 가나안 땅의 토착민이죠. 약속이 없다는 이유로 추방시켜버리고 그 빈자리에 약속이 있는 자기 사람을 거기다 심어서 약속의 땅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러한 전쟁 가운데서 그 약속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핵심이 되고 기준점이 됐다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선교나 전도라도 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을 소개하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이 없는 사람은 극구 반대하겠지요. 그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약속을 주게 되면 버림받는 내어버려두는 작용이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안 받아들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마귀 뜻인가, 라고 생각하는데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여기 ‘망하는 자들’이라고 규정된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안 믿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죽은 자고, 죽은 자라는 사실이 더 이상 숨기거나 감춰지지 못하도록 복음을 전하란 말이죠. 너는 지옥 가야 될 죽은 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기능으로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입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을 때 인물 좋게 하려고 찍는 게 아니잖아요. 안에 자기가 모르고 있는 어떤 질환 같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사진을 찍듯이 인간은 자기가 장래에 죽어서 정말 지옥 갈지 천국 갈지 본인은 모르지요. 그냥 희망은 있지요. 천국 가고 싶다. 하지만 천국 가고 싶다고 해서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사전에 미리 하나님께서 기준점을 제시해요. 십자가 복음을 전파해서 거부하는 사람은 그게 원래 망하도록 돼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는 악취가 되는 겁니다. 향기가 아니고 악취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냄새라고 돼있어요. 냄새는 외부적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자기가 일부러 만들어내는 게 아니잖아요. 복음은 외부에서 다가오는 어떤 냄새인데 그게 악취가 될 수 있고 향기가 될 수 있고.

그 복음 우리 자신의 정체성, 진짜 우리 자신의 본질을 까발려주는 그런 향수를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서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널리 전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화생방 전쟁하는 전쟁터라고 볼 수 있어요. 그걸 먹고 토하는 사람, 복음을 거부하는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상스럽게 그 복음에 대해서 충격을 받고 눈이 떠지면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것이 내 위주로 살았구나. 그게 바로 악마가 나를 속여 왔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희한한 현상도 일어나지요. 참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다는 것, 우리 보기에는 모세가 설교했겠지, 이 정도인데 사실 따져보면 희한한 일이에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보이는 것만 있다고 여기거든요. 보이는 산이나 들이나 산에 있는 짐승이나 보이는 인간이나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달, 별, 천문학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다 보이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존재는 없다고 여기거든요. 없으니까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여기겠지요.

그러면 인간의 삶이란 보이는 것들만 붙잡고 상대하고 거기서 울고불고 행복하니 불행하니 이 모든 것은 보이는 것들에 준해서 우리가 그렇게 단정 짓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것의 개입이다. 그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희년을 인간이 만들었어요? 안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희년을 준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만들어준 희년이란 법이 있다고 적혀있는 그러한 책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도 희한한 존재에요. 그까짓 것 안 봐도 괜찮잖아, 라는 식으로 우리는 그동안 줄곧 살아왔어요. 누구에 의해서? 내가 기준점이에요. 보이지 않는 기준점이 아니라 보이는 내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내 방식이 나의 삶의 미래의 기준점이 됐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희년은 이런 인간들의 미래에 대기하고 있어요. 어서 오라는 식으로 지금 대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이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조상한테 받은 상속받은 토지가 있다. 각각 토지에서 살면 돼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갑자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벌여서 이 사람이 가족이 있는데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하게 만들었어요. 전사하면 남는 것은 과부된 아내가 남겠지요. 그런데 아내가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농사를 짓지 못하니까 나한테 와서 돈 빌리고, 빌리다 나중에 돈 갚을 길이 없어서 그만 이 토지 자체를 나한테 팔아버려요. 그러면 이 사람한테는 하나님이 주신 상속이 날아가 버리죠.

물론 상속이 날아가는 것은 자기가 노름해서 나쁜 짓해서 그 보상해주느라 날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건을 일으키고 부부가 다 죽어버리면 고아 된 자식만 있겠지요. 또는 아들도 죽고 딸만 남을 때 이들이 기업을 유지하지 못해서 밥은 먹고 살아야 되겠고 해서 토지도 팔고 심지어 자기 몸까지 나에게 노예로 팔았단 말이죠.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사주는 게 이웃사랑이에요. 내가 돈 안 받겠습니다.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게 중요해요. 내가 남한테 동정한다고 그냥 봐주는 식으로 해선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결국 봐줘도 그 다음에 처음에 전쟁 나서 가정이 파탄 난 것이 한 5년 되었다. 그래서 내가 돈 안 받고 그냥 사세요해도 그게 5년 더 가서 10년 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요. 노예로 삼고 토지는 내 소유 토지로 하고. 그렇게 하는데 이걸 언제까지 보유할 것인가? 여기에 미래의 기준점이 있는 거예요. 50년째가 되게 되면 그냥 돌려줘야 돼요. 원상복귀가 된다고요.

원상복귀가 된다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기준점이 이 땅에서 확대하는 그것이 목표가 아니고 확대된 기준점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귀환하는 것, 원래의 자리로 귀환함으로써 원래 희년이란 기준점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로 그 많던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류하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희년이란 시간이 나중에 인물이 돼요. 시간이 인물이 되면 시간은 여기서 날아가 버리죠. 인물이 되면 모든 시간은 인물 안에 허수가 되기 때문에 인물은 어떤 인물이냐? 영원한 인물, 시간과 공간, 영원한 시간으로 있는 인물. 전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나중에 있을 인물, 그 인물로 모든 것이 흡수가 되는 겁니다. 참 신기한 일이에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떤 해답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이렇게 보게 되면 지금껏 내가 나를 공들여가면서 살려고 애썼다. 옛날에 있었던 내가 지금도 있기 위해서 그만큼 고생 고생했다. 이게 정답이 아니지요. 정답이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버려지는 내침을 당하는 천국에서 쫓겨나가는 이스라엘에서 버림받는 존재가 돼요. 지옥 가야 될 존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이만큼 고생했다는 것이 자기의 기준점으로 고집을 부리고 우기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희년의 취지를 공격하는 바가 돼버려요. 이걸 대드는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희년이 오기 전에 이 사람이 여유가 있으면 돌려줘야 되는데 땅을 산 나는 손해가 되지 않겠느냐, 할 때 손해가 되지 않도록 50년부터 계산해서 시간이 많이 남으면 값을 많이 쳐주고 작게 남으면 적게 쳐주란 말이죠. 49년이라 1년 후에 희년이라면 값을 적게 쳐주고 희년 돼서 돌려주면 된다는 뜻입니다. 기준이 내 시간기준이 아니고 50년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는 부자가 땅장사해서 더욱 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 남에게 불행한 사건을 기회로 삼아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내가 부자가 되고 부가 부를 낳고 자본이 자본을 낳아서 더욱 더 자본을 낳고, 그래서 이 사람의 노동 가치는 떨어지는 식으로 부자가 더 많아지고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걸 차단시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원래 하나님께 받은 대로 되돌려줘라. 이것은 경제상으로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분배받은 적이 있음에 동등하다. 하나님께 뭔가 상속받은 점에서 동등해야 되지 어떤 재산을 재화로 재물을 양으로 측정해서 내가 너보다 부자다. 그런 뜻에서 차등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취지에 위배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희년에 대한 인물에 대해서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여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는 게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가난한 자가 돈이 없어 가난한 게 아니고 가난한 자가 뭐가 빠져있냐 하면, 하나님이 적용하는 기준점, 희년이라는 기쁜 소식, 이것이 없는 자를 가난한 자로 보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모든 가치나 의미라는 것은 하나님 빼고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그 기준으로 가난과 부요를 논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준점으로 가난과 부를 논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포로 됐다는 말도 기준점이 상실된 사람. 눈먼 자도 마찬가지에요. 눈먼 자도 장님이란 뜻이 아니고 기준점을 보지 못하는 자. 눌린 자도 마찬가지에요. 억압받는 것도 기준점이 없어서 억압받는 사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 그렇게 된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예수님께서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을,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사야의 말씀을 펴놓고 만약에 예수님 방식이 아니고 현재 내가 옳다고 여기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들끼리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이사야 예언을 그대로 적용시켜 보라고 하면, 혁명이 일어날 거예요.

가난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월 백만 원을 준다든지 재해기금을 준다든지 그렇게 해서 해결 지으려 하고, 눈먼 사람한테는 안과 병원 세워서 눈 뜨게 해준다든지, 옥에 갇힌 사람들은 사면조치해서 풀어준다든지, 눌린 자들은 혁명을 일으켜서 눌린 계급을 지배 계급으로 바뀌게 한다든지, 그래서 자유를 준다. 이런 방식을 사용할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방식으로 안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해하는 복음이란 것, 그리고 자유라는 것, 희년이란 개념과 예수님이 알고 있는 희년, 자유, 복음 개념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그 개념을 예수님은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여기 누가복음 4장 25장에,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는 대목이 나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희년, 기쁜 날이라 할 때 그게 왜 기쁘냐? 하나님은 50년째가 기쁘다 하는데 인간은 기뻐할 이유를 모르지요. 그 해가 그 해고, 그 해가 그 해고, 봄여름가을겨울, 봄여름가을겨울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게 뭐 기쁘냐 말이죠. 작년에 진달래 피고 또 피는데 그게 기뻐요? 49는 안식일의 취지가 축적이 되고 +1은 그 완성이 되는 겁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완성이 되기에 특혜를 베푸는 날로서 50번째 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이 해가 하나님은 기쁘다고 희년이라 했는데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어딜 봐서 기쁘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그 기쁨을 공감해야 되는지 근거가 뭐냐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고. 다시 말해서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많은 과부, 불쌍한 과부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뭐라 하느냐? 아무도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라고 이야기해요. 아무에게도.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 갔다는 그 사실은, 왜 아무에게도 안 갔습니까? 한 사람에게는 갔잖아요, 라고 하게 되면 기쁨이라는 요소가 상실돼요. 아무에게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이 이 기쁨을 요청하거나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먼저 확실하게 깔아두는 겁니다. 은근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은근히 예수 믿고 천당 가버리면 천당이 그렇게 좋은 세계가 아니에요. 기쁨의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 지 할 일 하고 우리는 그 혜택 입으면 되잖아. 자기 숙제하겠지. 이런 식으로 하면 기쁨이란 게 솟구치지 않지요.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았다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이 세상에 은혜 받을 존재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 인간, 구원받을 자격 있는 인간 없는 겁니다. 구원받을 인간 없어도 괜찮아요. 또 없는 게 마땅하고, 또 없어야 하고.

그러면 아무도 없음을 아무도 없음으로 고수하지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았다고 단정하면서도 왜 시돈 땅에 사렙다 과부에게는 찾아가는가? 그게 바로 특혜가 되는 겁니다.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혜를 베풀어도 죄인을 의로운 나라에게 들어가려면 정당한 근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 근거가 안식일의 완성을 통해서 이미 확보되었다는 거예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옥 가야 마땅한데 지옥으로 보내지 않고 천국으로 보내는 합당한 근거가 안식일을 통해서 마련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고 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정의로움,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는 그 심판에 위배되지 않고 죄를 심판하고 지옥 보내는 그 원칙에 준해서라고 이게 맞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안식일을 통해서 플러스알파, 희년이라는 것을 제공할 때 이건 처음부터, 희년이란 원래 자리로 돌아오니까, 애초부터 하나님이 준비된 사랑을 확대시켜서, 백성이 없다 했지요. 없는 백성을 하나님의 사랑이 확산되면 없던 백성이 생겨나는 거예요. 사랑을 안 받아도 되는데 사랑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본래 준비된 사랑의 자리, 희년의 그 자리, 원래 상속된 땅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의 작업을 희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고 오직 사렙다 과부에게만 베풀었기 때문에 왜 우리한테는 천국 안 보냅니까, 우리는 왜 은혜 안 주십니까? 그렇게 닦달내지 말라는 말이죠. 인간은 원래 없던 존재인데 과부 하나가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증거하기 위해서 그 여자는 태어나야 했고 그 여자는 과부가 돼야 됐고 그 과부된 시기가 3년 6개월 동안 비오지 않던 그 시기에 타이밍 맞추어서 그 과부는 엘리야를 만나는 혜택을 입은 겁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 이러한 사상이 어우러질 때 그게 바로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희년이 희년답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끽되기 때문에 활짝 피기 때문에 그래요. 만개되고. 그리고 그것이 기준점이죠. 희년이란 기준점이 활짝 피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희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이 기준을 이스라엘 백성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시키는 게 아니고 특혜를 받는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레위기 25장 29절에 보게 되면,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주년 내에 무르지 못하면 그 성내 가옥은 산 자의 소유로 확정되어 대대로 영영히 그에게 속하고 희년에라도 돌려보내지 아니할 것이니라”

땅은 50년째에 돌릴 수 있지만 가옥은 50년 돼도 주인이 돌려줄 필요가 없다. 땅이 중요하지 인간이 잠시 거주하는 주택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초점이 어디 있다? 땅에 있는 겁니다. 땅이 하나님의 기준점, 하나님이 지은 시간, 50년째 되는 땅은 돌려줘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강의를 처음부터 새로 하게 되면, 시간에 기준점이 있다는 자체가 굉장히 기이한 발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인간으론 그렇게 생각할리 없지요. 시간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기준점으로 삼았다는 이 말은, 보이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 종속돼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런 뜻이 거기에 포함돼있어요.

그러면 50년째 되는 날, 그러니까 인간보다 무엇이 우세하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신약에 오면 이 시간은 인물이 된다 했지요. 누굽니까?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이죠. 예수님으로 인물이 되는 거예요. 희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보다 우세하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태어남과 죽음, 활동은 하나님의 활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종속돼야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실을 이방만족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이 사실을 알려준 거예요.

그렇다면 시간에서 점차 인물로 바뀌면서, 이것이 너무 급작스럽지요. 중간에 제사장을 집어넣습니다. 일반인과 차이 나는 제사장. 일반인들은 가옥을 50년째 되도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일 년 내에는 주고받고 하겠지만 50년째는 안 물려줘도 되는데 제사장의 가옥만큼은 50년째에 반드시 돌려줘야 된다는 것이 여기 레위기 25장 32절에 나옵니다.

“레위 족속의 성읍 곧 그 기업의 성읍의 가옥은 레위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나 레위 사람이 만일 무르지 아니하면 그 기업된 성읍의 판 가옥은 희년에 돌려보낼지니 대저 레위 사람의 성읍의 가옥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얻은 기업이 됨이니라” 그러니까 레위사람을 다른 일반인과 부각시켜서 레위사람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하는 것과 희년을 만든 취지와 관련성이 있다 이 말이에요.

레위인도 인간이고 일반인도 인간이죠. 그러다보면 저 사람과 나와 별 차이 없네, 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레위인을 함부로 나와 별 차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레위인이 하는 업무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농사짓는 것과 별 차이 없다고 여기는 그러한 무관련성이 돼버려요. 종속되고 비종속이 날아가 버려요. 그러나 레위인이 하는 일이 뭡니까? 제사 드리지요. 안식일도 제사 드리고 평소에도 제사 드리고. 제사하는 업무가 일반인들이 살기 위해서 농사짓는 업무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희년 안에도 이걸 새겨넣어버린 겁니다.

자, 시간에서 인물까지 오기 전에 제사장을 집어넣는다면, 결국 예수님은 제사장 계열을 따라서 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일이 뭐냐?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뭐예요? 목수였습니까? 예수님 아버지가 목수지요. 예수님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죽는 게 일이에요. 이 땅에서 모든 율법을 이룬 것이 일이거든요. 율법을 이루게 되면 율법을 이뤘다는 그 답은 곧 예수님 스스로의 죽음입니다. 희생이에요. 세상 죄를 지고 어린양으로 가는 것이 예수님이 하는 일입니다.

죽음을 보편화하는 거예요. 죽음을 원칙화하는 겁니다. 살았다고 너희들이 생각하는데 산 게 아니고 사실은 죽어 있음을 제대로 말하는 기능을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그 영을 받은 모든 사람은 이 사실을 압니다. 우리 삶 위에 죽음이 찾아오는 게 아니고 죽음의 바탕 위에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간다는, 우리는 죽음이 뭔가를 알리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죠.

이게 바로 희년 앞에 안식년, 다시 말해서 제사 잡는 모든 일의 마감의 결과로서 기쁜 날이 온다는 말은, 이 제사의 본질과 제사의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있을 경우에만 이것이 천국이 되고 약속의 땅이 된다는 겁니다. 삶의 취지가 아니라 죽음의 취지. 더 정답에 가까운 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가 계속 살아있을 경우에만 그게 약속의 땅이 되고 천국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내가 여기 살아있음이 천국이 아니고 내가 여기 행복하다가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생을 높이세, 그것을 찬미하세. 그게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멋진 세계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건 마귀가 조작한 거예요. 예수님의 희생의 완성이 모든 혜택으로 주어진다면 안식일, 안식년, 이런 모든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앞당겨서 거기에다 새겨 넣는 거예요.

레위기 25장 초반 3절에 보면,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땅 자체를 땅이라는 공간보다 희년을 향하는 시간의 의미를 더 우월하게 봐서 공간을 시간 안에 종속하게 만들었다 이 말이에요.

21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가 만약에 평소대로 농사 안 지으면 먹을 게 없는데 만약에 농사 안 지으면 우린 못 먹잖아, 라는 그런 걱정이 있을 것을 주께서 예상하시고, 20절에 보면,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

제 육년에는 복을 내려서 삼년 분량의 양식을 한꺼번에 주겠다는 겁니다. 마치 옛날 광야에서 안식일에 만나를 줍지 못하게 하면서 다음날까지 충분하게 먹을 양식을 채우는 것처럼 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겠다는 이 사실이 미래에 주겠다는 거잖아요. 인간이 기껏 아는 것은 전부 다 과거 것이란 말이죠. 쭉 살아왔던 과거만 알고 있던 인간에게 미래에 주겠다고 하면 인간은 뭘 걱정하느냐 하면, 안 주면 어떻게 하느냐? 실제로 세 배 소출이 안 나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걱정한다는 자체가 약속의 백성으로서 약속이 기준점이 되지 않고 내 생존이 기준점이 되었다는 것을 그냥 여과 없이 티내는 바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믿어도 나를 구원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용서하셨다는데 진짜 용서 안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런 걱정은 자기 구원욕에 빠져있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으면 나는 챙길 것 다 챙겼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건 구원도 아니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기준점에서 시작된 것이 구원이고 천국이고 복이지 내가 기준이 되어서 뭔가 하나님의 이런 정보를 얻어서 내가 계속 잘 되겠다고 하는 그것은 기준점을 모독하고 반항하는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10분 쉬겠습니다.



20200403b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값 치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희년의 취지는 하나님에 원래 상속한 땅으로 항상 50년째 되거든 되는 날을 기준해서 돌아가라. 그럼 50년 되기 전에 땅을 팔았으면 어떻게 되느냐? 팔았으면 땅을 산 그 사람에게도 손해 끼치지 말고 값을 쳐주고 땅을 팔아먹었지만 그 땅을 다시 하나님께 상속받은 네 땅으로 돌아오너라.

원래 땅이 하나님 주신 땅이기 때문에 내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란 말이죠. 그게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 하나님의 기준점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 것을 무른다고 합니다. “물어내라. 내 거잖아. 근데 네가 왜 갖고 있어. 물러 내.” 이럴 때 무른다는 이야기를 하죠.

레위기 25장 23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토지에서 농사짓고 있는 이스라엘은 뭐냐? 레위기 25장 마지막 5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일종에 임대차 계약한 거죠. 품꾼이란 일꾼이지요. 땅주인 따로 있고 남의 땅에 일해서 품삯 받고 빌어먹는 자,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특징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나는 내가 주인이 아니다. 참 이거. 사람이 자기가 주인 노릇하게 되면 여기서 평가와 판단을 하게 돼있어요. 그때 전제로 깔려있는 것은 나는 주인이다. 어디까지나 계속해서 영원히 나는 내게서 주인이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권리, 권한이 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내 인생이니까 내가 최종 책임자로서 알아서 하겠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인생이니까 간섭하지 마라. 그러한 사상이죠. 이걸 나에게는 나밖에 없다. 또는 나에게 있어 내가 최종 의미를 지닌다. 나에게 있어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 도대체 이런 사상 이런 생각들이 지극히 당연해보이지만 성경으로 봐서는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을 때 이런 사고방식을 집어넣은 거예요. 옛날에 아담과 하와를 이용했던 뱀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주장 못해요. 본 적은 없지만 이미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네 속에 악마 있고 귀신 있다는 말입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정신병 환자로 보면 됩니다. 마귀 들린 거예요. 귀신 들린 겁니다. 이렇게 산다는 게.

그러나 모두 다 이렇게 사니까 전부 다 자기가 정상인 줄 알아요. 모든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니까 이렇게 안 살면 정상인 줄 알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속고 있는데 이것과 달리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예라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빌어먹고 사는 거예요. 그걸 광야에서 이미 배웠잖아요. 체험했잖아요.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솜씨가 있고 해도 인간은 만나 없이는 못 산다. 이미 체험한 겁니다. 만나 없이는 못 산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위에서 뿌려주지 않으면 못 산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못 산다. 살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생존은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으로 의미를 종결하지 마시고 주님이 계시니까 내가 살아있다고 이해를 해주셔야 돼요.

그래야 성경에서 광야라는 의미가 있지요. 성경에서 보통 기적들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기적 따로, 율법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졌다는 이 자체가 기적의 집대성이에요. 율법=기적의 집대성. 기적을 다 끌어 모으면 바로 율법이 있다,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벨사살 왕 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쓰지요. 그 글로 인하여 바벨론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국가의 운명도 주님의 글씨에 달렸어요. 하물며 나의 운명도 하나님의 법에 달려있습니다. 말씀에 달려있어요. 모든 인간은 풀의 꽃 같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존속되고 실현되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현실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그 말씀의 완성이 새 언약이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했고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죠. 따라서 성령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것은 그 완성된 모든 말씀의 완성상태인 십자가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으키는 겁니다. 나는 죽었고 주님은 살았고, 다음날 되면 또 나는 죽었고 주님은 살았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사건들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유발시킨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그런 사건들로 채워지는 나날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걸 아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품꾼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소유권은 따로 있고 그 소유된 분으로부터 온 혜택을 입으면서 나는 살고 있다, 라고 할 때 인간이 같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쪽은 이 기준점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기에 주인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살아있다고 하는 것과 내가 주인이고 내가 알아서 내가 산다고 살아있는 것과 인간들에게는 동일하게 보이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되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내어버려두는 것과 그리고 취하는 사렙다 과부를 찾아가듯이 찾아가서 데려오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기준점이 되어서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을 다시 보게 되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토지는 내 것이라 해서 인간이 사적인 자기만의 재산을 갖는 것을 주께서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가 공들여서 얻는 재산이 곧 내 것이라는 건 맞는 말인데 그게 나다, 이렇게 돼버리면 안 된다는. 재산이 곧 나다. 다른 말로 하면, 소유가 있는 것이 나다. 나는 소유를 지닌 채로 나는 나답다. 이렇게 되면 이건 안 된다.

소유의 마지막을 나로 마감시키면 안 되고 소유를 내가 가졌지만 나는 또 누구의 소유다? 주님의 소유가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소유의 마감이 되고 의미의 마감이 돼버리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구 영광을 위해서? 내 잘났음을 드러내는 증거물로서 활용이 돼요.

“너는 팔십 평생 살면서 재산 얼마야?” “나는 10억이요.” “와아.” “너는 얼마야?” “빚이 5억이야.” 이러면 네 인생 질이 떨어졌구나,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나 우리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알듯이 거지가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없었고 몸도 아팠어요. 하지만 그런 거지조차도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거지 나사로는 알았고, 부자는 자기의 소유됨이 곧 나가 되는 그걸로 의미가 마감되었어요.

그러니까 부자는 지옥을 알아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을 몰라서 천국 몰라서 천국 못 가는 게 아니라 천국, 지옥을 아나 모르나 상관없이 모든 의미는 나 좋으라고, 나는 내가 소중하다고 의미가 마감되었기 때문에 지옥 간 거예요. 지옥은 이처럼 지 잘난 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이방민족이고.

그래서 이스라엘한테는 이방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이런 소식, 토지는 내 것이다. 팔지 못한다. 너는 품꾼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에 관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소유로서 의미가 마감되지 않고 소유를 뛰어 넘어서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내 소유가 될 경우에는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인간의 소유로서 마감되지 못하도록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선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발생시켜놓고 소위 가진 자들의 이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희년이라는 것이 오기 전에 빨리 자기 땅을 되돌리기 위해서 뭔가 전에 토지를 사 간 사람에게 돈을 주고 다시 되돌려 받아서 원래 하나님 주신 상속분으로 와야 되는데 그만한 여력이 있으면 괜찮은데 그만한 여력이 없는 사람은 토지 주인이 50년째에 아무 대가 없이 그냥 돌려줘야 돼요. 이유도 없이.

그것이 바로 25장 후반부에 보면 나옵니다. 47절에,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부요하게 되고 그 곁에 사는 너희 동족은 빈한하게 됨으로 너희 중에 우거하는 그 이방인에게나 그 족속에게 몸이 팔렸으면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 삼촌이나 사촌이 속하거나 그 근족 중 누구든지 속할 것이요” 속한다는 말은 값을 주고 되돌려 받으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전에 35절부터 보게 되면, 동족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하게 되면 빈손으로 있게 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이자도 받지 말고. 그 다음에 39절부터 보게 되면,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가 함께 있을 때는 희년까지 그로 섬기게 하고 희년에는 본래의 곳으로 돌려보내라. 본 땅으로 돌려보내라. 돈 받지 말고 그냥 주라고 이야기해요.

이런 내용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소위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본래 취지가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출애굽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재산도 없었고 있어봐야 소소한 재산이고. 그리고 노예 생활했고. 권력이 없단 말이죠. 국가가 되려면 힘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 힘이 없고 다 빼앗겨버렸어요.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노예가 되게 했을까요? 그들에게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언약이 힘이 안 되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 힘이 소유하는 식으로의 힘으로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힘이 없는 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란 사실은 히브리인들은 알아야 되고, 그리고 히브리인들을 붙잡고 있는 이방민족은 알지 못해서 멸망당해야 되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에 인간이 노동해서 인간을 만든 건 아니잖아요. 아마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인테리어해서 만들라 하면 분명히 거기에 선악과나무를 심을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자기한테 해가 되는 나무를 왜 심겠어요. 먹는 날엔 죽으리라, 그것도 아름답게 꾸며놓고 죽으리라고 한 나무를 인간이 의도적으로 심진 않았을 거란 말이죠. 그저 생명나무나 많이 심어놨을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가 있다는 말은 인간 이상의 창조주, 창조주를 위하여 인간이 종속돼야 될 관계가 유지될 때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그것이 인간에게 무시당하는 말이 됐습니다만 진리란 모든 인간에게 반겨지는 게 아니에요. 진리는 핍박받고 배척받고 무시당하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모습으로 진리가 나타나지요.

현재 이스라엘 내부니까 그냥 실현되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그동안 정당하게 값 치루고 산 모든 토지를 다시 무상으로 되돌려준다는 것은 부유한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실현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유한 자에게 주위에 가난한 사람을 배치하는 것은 네가 잘나서 가난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네가 훌륭해서 부자 된 게 아니란 말이죠. 얼마든지 지금이라도 부유한 너를 한 방에 쳐서 가난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안 했다는 겁니다. 왜 가난한 자의 모습의 나의 진짜 모습인 것을 네가 인정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부유한 것도 주께서 은혜라고 할 것도 없고 부유한 채로 인생을 살라고 그런 기능을 맡겨서 부유하게 됐고, 가난한 사람도 나쁜 짓 많이 해서 가난하게 된 게 아니고 가난한 채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가난하게 된 거예요. 그런 점에서 평등하단 말이죠. 하나님의 기준점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평등한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인간세계가 어떻게 됐습니까? 지가 복 받아서 부유하다고 그렇게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달리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고 만나를 먹고 거지처럼 빌어먹고 살면서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는 자기의 본모습을 감추고 잊어버리는 거예요.

제가 그걸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를 주께서는 그냥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있는 상태로 있는 존재로 만든 겁니다. 그것이 율법 안에 담겨있고 율법을 실행하면서 함축된 율법의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의 실체를 통해서 이게 이스라엘 전체로 퍼져나가서 몸으로 체험케 하는 겁니다. 그러나 체험케 하는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불만과 불평이 나오겠습니까.

37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 이자 받지 마라. 어려운 사람에게.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그러니까 그만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앞으로 가나안 땅에 살만하다하면 하나님의 기준점을 잊어버리고 이방사람들과 똑같이 힘, 무슨 힘이라 했습니까? 내 소유의 힘을 발휘해서 그것으로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이스라엘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그 언급이 레위기 26장부터 계속해서 27장까지 끊임없이 끝까지 계속 나갑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어떻게 망가져서 어떻게 율법을 위반해서 이방민족과 합류되고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구분 안 되는지 내다보고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율법을 이룰 수 없어서 저주받아 마땅하고 하나님 앞에 고생해도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미리 당겨서 주신 거예요. 율법이 우리 내면이 노출되니까요. 그리고 그 사회의 실상이 노출됩니다.

그 다음에 44절에 보면, “너의 종은 남녀를 무론하고 너의 사면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살 것이며” 이방인의 자녀 중에서 종을 취득할 수 있는데 그들은 너의 소유가 된다.

레위기에 방금 여러 가지 희년을 통해서 가난한 자를 이렇게 하고 레위인들은 이렇게 하고 돌려받을 때는 어떤 식의 값을 치루고, 그리고 희년이 되게 되면 가난한 자에게 그냥 무상으로 돌려주고, 이런 이야기, 이방인들은 종으로 삼고 그리고 만약에 이방인에게 노예로 팔린 사람이면 같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값을 치룰 때 삼촌이나 가까운 일가친척이 값을 치러서 자기 동족을 이방인 손에서 빼내라는 모든 내용들이 그리고 신약에 오게 되면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데 작용요소로써 모아지게 됩니다. 집합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것을 구출이죠. 구출이 되려면 어디에서 구출이 되느냐? 이게 설명이 돼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구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라는 것은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죄가 있기 때문이죠. 그럼 죄는 어떻게 아느냐? 율법이죠. 율법을 통해서 죄가 드러나고 그 죄로 진노 받아 저주받아야 마땅한 그것으로부터의 구출입니다. 구출되면 기쁘지요. 이게 희년이에요.

어떻게 기쁘냐? 율법대로 못 살아서 죄라 하는데 율법대로 살게 되면 기쁘지요. 왜? 율법대로 살게 되면 영생이 되고 의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니까 기쁘지요. 그래서 죄에서 구출할 때는 율법대로 살 게 된 상황 또는 상태가 우리에게 덧입혀지면 되는 겁니다. 율법대로 된 그 상황이 우리에게 덮치면 되는 거죠. 그게 기쁜 소식이죠.

그러면 여기서 율법대로 산다는 게 뭐냐? 율법대로 못 사는 게 뭐냐? 이걸 이번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그걸 위해서 룻기를 볼 필요가 있어요.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룻기인데 여기 룻기 1장 1절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이렇게 돼있어요. 사사들이 치리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율법대로 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런 뜻이에요.

율법대로 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대로 못 살게 되면 율법에 준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저주를 받는데 그 저주가 뭐냐? 이방나라한테 압제를 받는 식으로 저주를 받아요. 이방나라마저 하나님의 손에 다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사는 뭐냐? 사사는 그들의 율법을 모르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일단 건져놓고 그 다음에 너희들이 율법대로 못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이런 화가 미쳤다. 너희들이 압제당하는 처참한 경우를 자초했다. 그걸 알려주시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 일방적으로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냥 하나님의 구원자 노릇을 하면서 율법과 상관없이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민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거죠.

그걸 제가 기적이라 했지요. 그런데 기적은 어디에 모아지느냐 하면, 율법의 내용으로 쏠려야 되고 모아져야 돼요. 왜 기적이 필요하냐? 그만큼 죄를 지었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거예요. 기적이란 것이 필요치 않는 것이 좋은 시절이에요. 왜?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려주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말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살아있는 나라기 때문에 누가 감히 그 나라를 건드리겠습니까? 안 건드리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혜택은 혜택대로 입고 하나님은 모르고 이방나라처럼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의 아주 폭력적인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압적인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 개입이 일단은 이방민족한테 그들이 살고자했던 모든 걸 다 빼앗기게 하시고 그 다음에 다시 엉뚱한 사사를 통해서, 사사가 훌륭하지도 않아요.

하여튼 사사 본인도 너무 당황스럽고 난감해요. 내가 왜 사사합니까, 할 정도로 엉뚱한 사사를 보내서 아무것도 아닌 율법과 상관도 없는 그 사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했다는 말은,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들은 평소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심하게 여겼다는 것을 새삼 알려주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란 말은 다 같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율법도 버리고 하나님 버리고 살던 그 시절이란 뜻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흉년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풍년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 어떤 생산물이 난다는 것은 인간이 애쓰고 노력한 덕분이란 뜻이 아니고, 그건 이방민족인 경우고요. 이스라엘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 라는 증거로써 생산물이 나고 그런 생산물이 되기 위해서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빛과 단비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거든요.

그런데 그게 끊어졌다는 말은, 네 본래의 모습은 은혜 받을 가치도 없어. 율법을 위반했으니까 너는 남의 자식과 마찬가지야. 내 백성 아니야,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흉년이 온 거예요. 흉년이 왔을 때 여기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란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이 흉년이 들어 못 사니까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갑니다. 모압 땅은 베들레헴보다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거예요.

지중해 있고 이스라엘, 이집트가 있고 홍해 있고 시나이 반도가 있습니다. 여기 암몬, 모압. 갈릴리 바다에서 내려와서 사해에 암몬, 모압. 이스라엘 땅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시기로 허락하지 않은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엘리멜렉이란 이 가정은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약속의 땅이 아닌 땅으로 갔는데 그것은 내 몸 내가 살기 위해서 갔지요.

살기 위해서 갔는데 죽어요.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여 버립니다. 아들 둘 데려갔는데 아들 둘 다 죽어요. 남는 것은 아내와 며느리 둘밖에 남지 않았지요. 자, 이 이야기와 오늘 희년 이야기와 무슨 관계있느냐?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이란 의미는 탈출을 의미하는데 무엇의 탈출이냐 하면, 저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죄로부터의 탈출이에요.

약속의 땅은 죄인은 올 수 없어요. 의인들만 여기 약속의 땅, 천국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인간치고 죄인들밖에 없지요. 죄인밖에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점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점이 다가옴으로써 그들은 죄인 되었고 기준점에 준하면 이들은 백성이 될 수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준점을 여기다가 주게 되면 이 사람들이 기준점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기준점에 의해서 기준점을 드러내도록 증거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그들은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흉년을 줬어요. 흉년을 주는 것은 율법을 어길 때는 저주받는 것이 지극히 율법의 원칙 가운데 있기 때문에 당연한 거죠. 그렇다면 흉년이 오면 백성들이 가만있습니까? 나름대로 몸부림치겠지요. 어떤 행동을 보여주겠지요. 그 행동을 추적하게 되면, 희년의 취지가 거기서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그 취지가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간 거예요. 자기 땅은 없는 거예요.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으니까.

그런데 룻기 4장에 보면 3절에,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삼촌이나 가까운 친척이 땅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것도 서열로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나오미 친척인데 보아스는 모압 여자 룻을 사랑해서 어쨌든 사랑하는 여자가 고생하는 걸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시아버지 땅, 곧 자기 땅이 되겠지요. 그래서 보아스가 그 땅을 되돌려주고 싶은 거예요. 그러려면 땅주인에게 돈을 주고 받아와야 되는데 그것도 순서가 있어요. 그래서 먼저 앞선 순서 가진 사람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네가 살래?” “나, 안 산다.” “그럼 내가 살게.”

그래서 자기가 돈을 내고 그 밭을 사서 나오미의 원래 땅, 엘리멜렉의 땅을 돌려줍니다. 이걸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구원에 여기에 보아스라는 기사, 일가친척이 등장해서 뭘 하느냐? 값을 치러요. 값을 치르게 되면 다시 나오미 가정, 그러니까 엘레멜렉의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상속분을 그대로 다시 거기서 살 수 있어요. 하나님의 품꾼의 자리를 회복된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주인이 되고.

구원이란 것은 원래 위치, 원래 관계로 되돌아가는 거죠.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품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삽니다. 이게 바로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이러한 의식을 하나님의 백성은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내 것 건졌다 하지 말고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희생의 취지를 알아야 돼요. 희생은 값을 치룬 희생이에요.

왜 값을 치렀다는 말을 해야 되느냐 하면, 너는 전에 네가 빼앗긴 그 주인한테 네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값을 치렀다는 것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인간은 자력으로 현재 마귀한테 속한 형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바리새인들이 논리적으로 시비를 거는 거죠.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절)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니까 바리새인들 논리의 전제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단이거든요. 이건 마귀 들린 자란 말이에요. 마귀 들린 자가 더 힘이 세니까 약한 귀신을 쫓아낸다. 이렇게 논리의 정당성을 폈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떻게 같은 나라가 분쟁이 일어나느냐. 분쟁하게 되면 그 나라가 무너지게 돼있는데. 마귀 나라가 그렇게 내부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는 나라가 아니다. 마귀 나라는 마귀가 꽉 쥐고 있다. 그걸 먼저 언급을 하면서 진짜 마귀 나라에서 벗어난 사람은 마귀 나라를 이미 이긴 자에게만 그런 능력이 나온다 해서 예수님 자신을 마귀 나라를 이긴 자로 소개합니다.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구원을 뭐로 보느냐? 늑탈한다. 강제로 빼내는 걸로 봤어요. 구원은 뭐냐? 늑탈행위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하고 아무리 구원을 생각해도 그것은 구원받은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지 나름대로의 구원을 상상한다는 겁니다. 진짜 구원받은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무엇을 의식하게 되느냐 하면,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빠져나왔다는 인식이 유지가 돼야 돼요. 그게 발생되는 겁니다.

구원받아놓고 자기가 굉장히 신기해하는 겁니다. 내가 왜 세상 사람과 같지 않지,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만 제일 중요하고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데 어떻게 해서 나는 내 행복 같은 것은 날아가고 주께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왜 이런 생각이 들지. 돈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건강을 잃어도 건강이 원래 내 것 아니고, 건강해도 원래 내 건강 아니고, 아파도 주께서 아프게 하셨고. 모든 것이 주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왜 나한테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느냐, 라고 본인을 보면서 본인을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여겨야 됩니다.

이게 바로 늑탈된 사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성령 받았다고 해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의 특징이 성령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변화에 대해서 자기가 기이하게 여기는 겁니다. 전에는 내 잘난 맛에 살았고 내 자랑하면서 살았는데 지금은 주님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값이 되기 때문에. 주께서 저런 값을 치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천국 못 간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자처하면서 여기서 또 진짜와 가짜가 갈라지겠지요. 구원받은 자로서 자랑거리가 구원받은 나를 자랑한다면 이건 백 프로 가짜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받기 전에 소망한 게 있었어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구원을 상상한다고. 너무나 세상사는 게 힘드니까 천국이 좋은 곳이라니까 죽어서 어떤 식으로든 가고 싶은 거예요.

예수를 믿든지 예수의 피를 믿든지 십자가 믿든지 어떡하든 간에 구원받는 나를 상상해서 결국 그 사람의 자랑거리가 구원받으려고 애썼는데 구원받았어가 돼버려요. 이 자랑하는 것은 백 프로 가짜입니다. 성령 안 받은 거예요. 성경을 백독을 했다든지 레위기를 봤다든지 기도를 열심히 했다든지 교회에 충성봉사 주님께 찬미를 했다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원했던 것을 내가 가졌다, 이렇게 되면 가짜지요.

구원은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내가 상상한 그것조차도 이게 죄가 되고 이게 엉터리라고 인식하는 자가 구원된 자에요. 내가 상상한 천국, 내가 상상한 구원마저도 내가 조작한 것이고 엉터리고 마귀가 내게 시킨 일인 것을 깨닫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럼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뭘 자랑하느냐?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지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이 십자가도 자랑하고 부활도 자랑한다는 말이 아니고 ‘외’란 말을 해서 십자가에요. 부활도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에 잔뜩 기대를 거느냐 하면,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된다니까 자기도 부활되고 싶어서 부활을 부각시키는 거예요. 십자가를 중간과정으로 여겨서 한 번 거친 걸로 끝, 땡, 종쳤다는 거예요. 그건 잊어버리고 결과적으로 부활됐으니까 부활된 걸 자랑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성령 받은 사도는 부활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것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해서 이중부정으로 그만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 외에는.

왜 사람들이 자꾸 부활을 강조하느냐 하면, 일반인들이 죽어서 영생하고 싶어 하니까 이건 마귀 들린 모든 자들의 희망사항이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사람들은 꼬이기 위해서 십자가를 감추고 죽어도 산다고 부활을 강조하다보니까 자기는 부활에 마음이 뺐기는 거예요. 부활을 자랑한다는 말은 뭐냐? 구원받은 나를 높이고 싶다, 나는 구원받은 나를 자랑스러워한다. 그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는 뭐냐 하면,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을 자랑하는 거예요. 값은 내가 치르지 않았다. 나의 봉사나 희생 어떤 것도 내 구원에 대한 값이 될 수 없다, 그런 뜻이에요. 값에 개입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이것을 오늘 레위기 25장 결부시켜 봅시다. 레위기 25장에서 내가 분명히 정당한 값을 치러서 어떤 토지나 가옥을 상가 같은 건물을 매입했단 말이죠. 그런데 후손들 50년 돼서 개인에게 준 것도 되지만 그 가문의 가족에게 그 지파에게 하나님이 상속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죽고 자식이 그 땅을 돌리려 할 때 “주인님, 돌려주세요.” 할 때 그 후손이 돌려주겠느냐는 말입니다. 값을 치렀는데. 값을 안 주고 도둑처럼 탈취했으면 돌려주지만 탈취한 게 아니고 값을 받고 줬단 말이죠.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 값이 무슨 값이냔 말이죠. 인간들은 내 노동의 값, 내 노동 시간이 모아져서 값이 치러졌다고 하지만 주님은 그게 아니고 천국에선 그게 아니라 네 노동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노동 시간이라는 거예요. 주님이 희생했던 그 노동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이 빠져버리면 그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요.

희년을 통해서 희년이 있다. 돌려줘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둘려주고 받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색, 하나님의 희생의 것을 놓쳐버리고 잊어버리고 이방민족 된 이스라엘의 미래상, 그걸 미리 앞당겨서 레위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이 주인인데 어느새 주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본인이 주인돼있는 그러한 변화, 그러한 타락, 그것은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타락도 동반해서 그 현장에 드러나게 마련이에요.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것 맞아요. 하나님이 거저 주지만 우리는 거저 받기를 원하는 게 있기에 거저 주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받을 것 다 받겠다고 하시면서 거저 주세요. 하나님은 거저 줄 걸, 이런 기대했기에 거저 주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의 것 일체에 대해서 법대로 처벌하겠다는 그 마음에서 나온 거저 주심이에요.

49로서 처벌하겠다, +1. 처벌마당하다고 하는 자에게만 납득이 되고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는 그 희년, 이 희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처참하게 망가져야 되고 처참하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얍삽하고 간악한 완고한 자인 것을 폭로되는 절차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희년을 이야기했던 이스라엘, 이방민족과 달리 희년의 율법을 받았던 그 이스라엘이 결국 희년을 증거 하기 위해서 포로 잡혀 갑니다. 약속의 땅에 있을 자격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희년이란 율법이 이스라엘을 힘들게 왔던 그 땅에서 추방시켜버리고 만 겁니다.

이스라엘이 추방되었다.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서 애굽으로 앗수르로 온 나라로 쫓겨나갔지요. 그러면 여기는 비어있습니다. 사실은 비어있는 게 아니고 율법이 살아있지요. 율법이 살아있기 때문에 율법에 위반된 백성들은 백성이 아니라고 추방된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살아있는 땅이면 다시 모집될 때는 율법이 가서 율법의 완성이 됐을 경우에 율법 완성의 취지로 가서 데려오는 거죠. 이게 바로 희년사상이 되는 겁니다. 기쁨이죠. 우리가 쫓겨나야 마땅함을 알 때 희년의 기쁨도 같이 거기서 제대로 대우를 받는 겁니다. 희년의 기쁨이 체험이 되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은 누구로부터 들려지는가?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소식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49에서 멈추는 게 아니고 +1이 되는 거예요. 1의 시기에요. 그러면 이 49년이 뭐냐? 기준 시간이 되지요. 기준 시간, 공간, 기준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희년에는 율법이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뭐였습니까? 인물이죠. 인물이 되어서 예수님이 노동했던 희생했던 모든 율법을 이루신 바는 예수님이시다, 라는 사실이 성령을 통해서 가서 주님께로 가게 하는 겁니다. 아무나 가는 게 아니지요. 그 많은 과부가 있지만 사렙다 과부한테만 가는 것이 성령께서는 백성 되어야 될 사람에게만 가서 성령이 주어져서 성령을 통해서 오직 뭐만 자랑하는가?

그 값 치르심을 자랑하고 그 도착지점은 희년의 세계에 도달했음을 감사하면서 그 다음에 뭐냐?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서 그리스도가 다 이루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의 자랑거리는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값을 치렀다는 이것이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해방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이다, 라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희년 주셔서 우리의 속마음에 마귀의 마음이 들어있음을 폭로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폭로 당함이 희년을 위한 필수절차인 것을 또한 감사하게 하시고 기쁘게 되어서 오직 십자가 값만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