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한윤범 20191101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끈 떨어진 자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4장 10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 된 자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 중에서 싸우다가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미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방금 읽었던 이 말씀, 레위기 24장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 훼방한다는 말은 망령되이 일컫는다, 또는 모독한다, 그런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모독하면서 우습게보면서 또 저주했어요. 저주했을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 이름을 저주한 사람을 데리고 모세한테 갔고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니까 확실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 명령은 뭐냐 하면, 저주하는 말을 들은 사람에게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은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돼있어요. 그리고 말하기를 이게 법칙이 되어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반드시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그 다음에 법칙으로 법령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 이 대목을 풀면서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인간 대 인간에서 원, 투가 있다면, 인간1, 인간2, 제3의 하나님의 개입이 들어간다는, 제3의 요소. 제3의 요소에 의하면 1도 어떤 자격이나 권리가 없고, 2 인간도 자기 권리가 없고 오직 권리는 누구한테 있느냐? 하나님에게만 권리가 주어져서 상황이 종결됩니다.
그런데 여기 죽었던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면 저주하고 모독했던 피해자가 누구냐? 하나님이고, 죽은 자가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은 목격자가 되지요.
제가 이렇게 설명하니까 어려운 게 없지요. 별로 어렵지 않지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냥 목격자일 뿐이지 저 사람을 죽일 권리도 그들에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피해자고 가해자는 돌에 맞아 죽은 이 사람이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자기를 처리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별 어려운 게 없는데 뭘 하나 지우면 이야기가 복잡해져요.
제3의 요소, 하나님을 지워버립니다. 왜 지우느냐 하면,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이 사람은 죽은 걸로 돼있는데 죽은 걸로 하지 말고 이야기를 처음으로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있지요. 이 사람이 누구와 싸우다 화가 나서 여호와를 저주했을 때 1과 2는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권한이 없지요. 그냥 인간들 사이에 능히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중 하나가 돼버려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한다. 우리는 뻘줌하게 있다. 이게 뭐냐? 2019년도 울산의 상황이에요. 방금 하나님의 개입을 치워버렸다는 말은 레위기 24장 10절에서 16절을 치워버린 거예요. 성경을 치워버린 거예요. 성경을 치워버리니까 이 사람이 돌에 맞아 죽지도 않고 아주 신이 났어. 하나님 욕하는데 재미를 붙여서. 교회 가는 인간들은 뻘줌하니 서있고. 여긴 저주하고. 지금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레위기 24장을 여기다가 투입한다고 칩시다. 투입이 됩니다. 투입이 되면 이 사람은 계속 저주하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주님을 욕하고 살아갑니다. 자, 제가 질문 드립니다. 이 사람이 살았어요, 죽었어요? 성경이 없을 때는 이 사람은 산 인간으로 간주되는데 레위기 24장이 오게 되면 돌에 맞든지 안 맞든지 상관없이 이미 이 사람은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죽은 자이기 때문에 레위기에서는 저주를 하니까 돌로 쳤는데 그거는 이 사람의 본성을 하나님께서 양쪽에 있는 이스라엘로 확인케 하기 위해서 돌로 쳤을 뿐이고 이 사람은 천성이 태생이 하나님한테 언제든지 저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산 자가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21세기 울산바닥에서 성도는 누구와 같이 산다는 말입니까? 죽은 자들과 같이 사는 거예요.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요. 문제는 죽은 자들이 99.99%가 된다는 것, 온 천지에 죽은 자들뿐이라는 사실, 온 천지가. 여러분 이러한 현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래도 이 세상이 지옥 아닙니까? 온 천지가, 눈에 밟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아가거든요.
하나님께서 레위기 24장 상황에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돌로 이 사람을 쳐 죽이라 했다고요. 그런데 2019년도 울산바닥에 있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을 절에 간다고 돌로 쳐 죽을 수 있습니까? 경찰에 잡혀가는 데요? 아무 감각 없지요. 욕을 하나마나 감각 없지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1번과 2번도 역시 죽은 자에요. 평소에 돌을 때려죽일까 하는 분노 같은 게 전혀 일어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2019년도 울산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 밥벌이 돈벌이에 바쁘고 애새끼나 잘 키우려고 생각하지 이렇게 두리번두리번 안 살핀다 말이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이 혹시 있나 살피지 않아요. 혹시 있을 리 있습니까. 전부 다 인데. 전부 다 저주하는데 달리 또 혹을 찾습니까? 전부 다 인데.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다 저주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요. 레위기 하면, 그것 어디서 들어본 적은 있는데 레위기가 뭐지? 성경이구나. 성경을 워낙 안 보기 때문에 레위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레위기를 안 보니까 분통을 터뜨릴 이유도 없고 그냥 나는 밥이나 먹고 살면 천당 가겠지 하는 이런 미신에 빠져서 아무 생각 없어요. 결국 1, 2, 3번 인간들 다 돌에 처 죽을 인간들이에요. 성경이 투입되지 아니하면.
그래서 성경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내가 누군지 몰라요. 자기를 정상으로 봐요. 멀쩡하다고 여긴다고요. 성경을 안 보면 복음을 안 듣게 되면 자기는 아주 멀쩡해요. 남들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하하 호호 이러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교회 다니고 성도인데 사돈네가 교회 안 다니고 절에 간다 합시다. 그러면 상견례 할 때 주머니에 짱돌 서너 개 들고 갑니까? 오늘 너, 나한테 돌에 맞아 죽어봐라. 그렇게 안 가잖아요. 오늘 말조심해야 돼. 자칫하면 결혼 파토 나는 수가 있어. 요새 아들, 딸들 결혼한다 하면 웬 기적이냐 하는데 이번 찬스에 내가 말실수해서 깨지면 안 되는데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지.
반갑게 맞으면서 먼 길에 이렇게 만나게 됐는지 무슨 하나님의 인연인지. 이렇게 살살 빌지요. 살살 빈다고요. 무슨 짱돌 갖고 이 사람 저주하면 때려죽인다고 돌 들고 짱돌 들고 가는 상견례 없어요. 좋은 게 좋다고 흔히 말하는 은혜 아닙니까. 그냥 넘어 가. 좋은 게 좋은 거야. 하나님이 알아서 천당 가고 지옥 보내겠지. 내 소관 아닌데 난 몰라.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벼락을 내려 죽이는 게 아니라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들고 심지어 그 사람에게 안수를 해서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런데 24장 10절에 보면, 죽었던 사람의 어미가 나오지요. 이름도 나와요. 11절에 그 어미의 이름은 슬로밋이라고 돼있지요. 왜 여기서 어미를 강조하느냐 하면, 인간의 육신적인 본성에 있어서 자식은 내 목숨보다 더 귀해요.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어미 입장에서 자식 살리는데 있어서 얼마든지 희생할 각오가 돼있어요.
유복자라 하지요. 아버지 죽고 난 뒤에 태어난 아들, 유복자. 유복자 있다고 해서 주위에서 어떤 아줌마가 여자가 지지리도 재수가 없어서 남편 일찍 보내고 네가 들어와서 집안이 망했다고 하니까 그 여자가 화가 나서, 그래 네가 내 남편 죽는데 보탠 준 것 있느냐, 하면서 물바가지 확 부어버리고, 네가 뭐라 해도 내 자식 지킨다. 얼마든지 모든 어머니들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특히 고두심부터 해서.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내 아들 내가 지킨단 말이요. 내가 지금껏 사는 존재의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막내아들 용식이 너 하나 지키기 위해서 어미가 있었다. 형들이 뭐라 하니까, 가만있어라. 너희들은 아버지 얼굴은 봤잖아. 야는 아버지 얼굴도 못 봤어. 쟤 건들지 마라. 나는 쟤 때문에 지금까지 식당일하면서 버티고 살았다. 자식은 내 생명이에요.
그런데 자기 자식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저주했다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미라면 돌로 치겠습니까? 아니면 철이 없어서 그런 걸 그럴 때 있지요. 사춘기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왜 성경에서 어미 이름을 그렇게 강조했냐 하면, 인간인 이상 아무리 하나님이 대단해도 나보다 대단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사랑이 많고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하심 해도 아무리 고귀해도 아무리 하나님이 숭고해도 나 자신보다 덜 숭고하고 나 자신보다 덜 대단합니다.
나보다 더 대단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 자식이 얼마나 대단해요. 우리가 주님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내 가치 선 바깥에서 소중해요. 만약에 하나님이 아무리 훌륭하고 소중하고 가치 있다 해도 내가 지키고자 하는 선을 넘어서게 되면 그때 인간은 분노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슬로밋의 아들이 그냥 평소의 버릇대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독했습니까? 뭐 때문에 모독했어요? 여기 본문 10절에 나오지요. 평소에 그렇게 하나님을 저주하는 게 취미라서 그런 겁니까? 아니죠. 울컥했지요. 지금 싸움이 일어났잖아요. 싸운다는 것은 내 가치를 양보 못하겠다는 싸움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거든요. 멱살 쥐고 싸우고 부부싸움하고 이게 뭡니까? 너보다 내가 더 가치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욱하니까 모독한 거예요. 화가 난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물어봅시다. 어려운 문제 아닌데 막상 제가 질문하면 괜히 어렵게 생각하는데 아주 문제 내겠습니다. 사람은 왜 화를 냅니까? 쉬운 문제인지 어려운 문제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왜 화를 내지요? 화 낼만 해서 화내지요. 어떤 경우에 화를 냅니까? 크게 쓰겠습니다. 잊지 마시라고. 날 무시해서 그래요. 글자 하나 넣을까요? 개 무시해서. 오용익 목사님이 우리교회 와서 한 설교제목이 ‘개’지요. 참.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 들이대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성경 들이대면 물려고 달려듭니다. 태어날 때부터 개 버릇이 있어요. 누구든지 내가 지키는 선 넘어서면 그게 누가 됐든 물어버립니다. 심지어 철딱서니 없는 자식은 그렇게 키워줘도 부모는 남들 앞에서 내 생명보다 내 자식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옹야옹야했던 자식은 극단으로 넘어가면 부모마저 물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쳐 죽이라는 그것도 하나님이 죽였다는 게 아니고 네가 돌 던지되 그냥 던지지 말고 책임 있게 안수하고 돌 던져라. 여기 14절에,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그러면 돌로 쳐 죽여 버리면, 세월호입니다, 세월호.
제가 아까 그림 그릴 때 하나님이 개입해서 돌로 죽이라 했잖아요. 레위기 24장. 그림 다시 그려볼까요. 인간1 있고 인간2 있잖아요. 여기 죽은 사람 있다 했지요. 기억나십니까? 하나님이 개입해서 죽였다 했잖아요. 그런데 2019년도 울산에는 뭐가 없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개입이 없지요. 그러니까 이 인간은 죽을 리 없고 돌에 맞을 리 없고. 돌 던지면 경찰에 잡혀가고. 멀쩡하게 있으면 하나님을 저주하잖아요. 그렇지요.
만약에 이 사람이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우리가 돌로 치는 정도가 아니고 욕이라도 한 마디 했다고 하면, 이 사람에게 레위기 24장은 없잖아요. 없으니까 이걸 누구 탓으로 돌리겠습니까? 바로 우리한테 되받아 공격한다 이 말이죠. 이게 이 사람이 이미 죽은 티를 내는 거예요. 죽었다는 건 숨이 끊어졌다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이 말을 하거나 행동하거나 숨 쉴 때마다 하나님을 모독할 수밖에 없는 죄가 마구마구 침 튀듯이 튀어나오는 기능을 이 사람이 발휘하는 거예요. 2019년도 울산바닥에서.
내가 이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했지요. 죽은 자지요. 죽은 자가 요양병원에 가만히 누워있는 게 숨 끊어진 게 아니고 온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저주하고 거리낌 없이 모독해도 나, 벼락 안 맞잖아. 큰소리치고, 나, 예수 안 믿어도 부자 됐고 행복했고 고난도 없고, 시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죽을 때도 아프지도 않아. 애들은 어찌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지, 땅 던져놓으면 열 배씩 땅 값 올라가고 주식하면 주식 대박 나고. 하나님은 안 믿어도 만사가 형통해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 중에서 분류해봅시다. 첫째, 부유한 사람. 두 번째,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이 착한 일 많이 해요, 가난한 사람이 착한 일 많이 해요? 이건 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어느 쪽이 착한 일 많이 합니까? 돈 많은 쪽 착해도 착해요. 여윳돈이 있거든요. 가난한 사람은 밥 먹을 것도 없는데 뭘 남을 도와줘요.
가난한 사람은 지도 못 먹고 사는데 일가친척 오게 되면 건사하지 못합니다. 부자 된 사람은 일가친척 오면 섭섭지 않게 차비라도 오만 원 주고 가요. 이쪽은 오면 욕바가지로 너 때문에 일이 안 돼. 가라, 가란 말이야. 네가 와서 되는 일이 없어. 옛날 cf처럼 낙엽 집어던지면서 가라, 가란 말이야. 네가 와서 되는 일이 없단 말이죠. 내 꼬라지 봐라. 뭘 뜯어먹을 게 있다고 왔느냐. 그래서 없는 사람은 항상 조마조마해요. 나보다 더 가난한 일가친척 올까봐 벌벌 떨고 있다고요.
부자는 일가친척한테 자랑하려고 기마이 쓰는데 바빠요. 국밥 이천 원짜리 자기가 낸다고 인심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가 착한 사람이에요. 돈이 있어야 착해지지 돈도 없는 주제에 뭘 착해요. 그러니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을 수밖에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요. 사회에서 인정받는데요. 아까 했잖아요. 자기의 가치, 자기의 고귀, 자기의 대단함, 자기의 잘남 그게 유지되는데 구태여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교인들도 하나님 믿는 이유가, 사실은 하나님한테 벗어나려고 믿어요. 왜? 부자만 되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부자 되면 기도 안 해도 되잖아요. 아쉬운 게 있어야 기도하잖아요. 빨리 교회 나와서 잘 보여서 부자 되고 난 뒤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나님은 부모 같아서 자식들 소원이 뭡니까? 부모로부터 독립 아닙니까. 은근히 노린다 이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 목격자로 하여금 돌을 들어 치라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저주 사건, 죽음 사건, 심판 사건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마치 문신할 때 받아서 문신 새기지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으로서 새겨지는 이스라엘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벼락 쳐도 죽일 수 있는데 그들로 하여금 돌로 쳐 죽여라.
인간 대 인간들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적어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려면 보이는 인간이 주가 아니고 제3의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그것도 말씀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너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이스라엘이라 이 말입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가는데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소경 한 사람이 등장했지요. 제자들의 열두 명입니다. 많습니다.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많은데 여기에 소경 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이 사람은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떠야 되는데 눈 뜨기 전에 사람이에요. 오니까 제자들의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소경됐습니까, 조상의 죄 때문에 소경됐습니까,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럼 여기는 살아 계신 하나님은 빠져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비교한 거예요. 하나님의 제3의 요소, 말씀의 요소란 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눈을 어디로 두게 하느냐 하면, 나와 너를 비교하는 그런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됐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유해서 다시 보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보게 하고 그 다음에 제자들 스스로 보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경유해서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됐지요. 자기가 소경이라 하니까 주의 영광에서 보게 되지만 니가 본다고 하니까 너희들은 도리어 소경이 된다 이 말이죠. 이 말은 하나님을 경유하게 되면 인간 대 인간으로 봤던 그 모든 의미가 완전히 뒤집어진다 이 말이에요. 반대로. 반대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모르면 우리는 내가 생각한 그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거꾸로 지금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천국 간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천국 간다는 말은 간단한 거예요. 지금 죽기 전에 네 생활이 천국 생활이냐? 그걸 물어서 지금 천국 생활이면 천국 가고 지금 천국 생활 아니면 천국 못 가요. 죽고 나서 말고 지금, 지금. 아무나 넣어주는지 압니까?
지금 천국 생활이란 뭐냐 하면, 자기를 비춰볼 수 있는 그런 분과 동행하고 있어야 돼요. 독자적으로 내가 남을 평가하기 이전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늘 비교할 수 있는 주님이 계셔야 돼요. 함께 있어야 돼요. 쉽게 말해서 성령이 함께 있다 이 말이죠. 십자가와 함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 모습은 뭡니까? 진즉에 돌로 처 죽임을 당해야 될, 레위기 24장의 돌로 처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지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안 믿고 하나님을 욕되게 한 그 사람이 남의 자식 같으면 대번에 돌 던져서 자기 믿음 있다는 것을 돌로 침으로써 상대적으로 내 믿음 있음을 남한테 과시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만약 내 아들이라면 내 딸이라면, 아니 아들딸보다 더 귀한 게 있어요. 내 손자라면 내 손녀라면, 어린애가 노골적으로 저주하지는 않겠지만 평소에 돌로 칠 마음자세가 돼있습니까? 안 돼 있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돌로 칠 마음의 준비가 없다 이 말이에요. 나는 나한테 쳐들어오는 하나님을 돌로 칠 만반의 준비는 돼있지만 하나님 앞에 나를 돌로 칠 만반의 준비는 안 돼 있어요. 우리가 어딜 봐서 신자입니까? 무엇에 근거해서 우리가 신자라 할 수 있어요? 엉망진창이죠. 신자 아니에요. 신자랄 게 있어야 신자지요.
그래서 구약성경은 그 누구도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책이 구약입니다. 야곱 신자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신자지요. 아브람은 신자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신자에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 것은 본인의 노력이 아닙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본인의 노력이 아니에요. 거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하나님이 밤중에 얍복강에 찾아왔잖아요. 그래서 야곱은 죽고 그 죽은 자리에 누가 시작됩니까?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거예요.
자, 왜 그러면 그 깨끗하고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받았다는 이스라엘 내에서 하나님을 저주하는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10절 봅시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 된 자가” 이스라엘과 애굽이 결합해서 어느 게 우세다? 이스라엘이 우세가 아니고 애굽이 우세가 되는 거예요.
아담의 몸을 지닌 우리가 살아가면서 뭐가 우세냐 하면, 아담이 지녔던 그 죄가 나의 복음적 지식보다 우세하게 터져 나옵니다. 오죽했으면 주께서 이렇게 했습니까? 너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담는 그릇이 못 됐다 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담긴 복음과 우리가 그걸 감당하기 위해서 받는 육신이 좋게, 좋게 가는 법이 없어요.
십자가의 능력과 우리의 육신이 그냥 조용히 그냥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실제로 작용하는 십자가는 안 받아들이고 십자가에 대한 지식으로 육신과 연결시켜버리죠. 그러면 아무 탈이 없지요. 그냥 지식이니까. 그냥 이론일 뿐이니까 실제가 아니라 하지만 만약에 실제로 십자가의 능력이 닥치게 되면,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아까 무시당하니까 뭐가 일어났습니까? 화가 분노가 일어났지요. 보통 교회에서는 이런 것도 강제로 시킨답니다. 옆에 나란히 앉아있으면, 여러분 맹숭맹숭 교회 오지 마시고 사랑의 교회 만듭시다. 전부 다 서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 보면서 인사를 나누세요. 그러면 갑자기 앞에 보고 있다가 어색하게 옆 사람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면서 자매님을 형제님을 사랑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색한지 마치 콜센터의 여자 같이, “고객님, 사랑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와 같이 너무 기계음 같아.
그래서 기존교회처럼 사랑한다 하지 말고 진짜 십자가 교회는 이제부터 옆에 있는 교인을 약을 올려봅시다. 당신은 못 생겼군요. 당신은 차라리 교회 오지 말고 절에 가지 무엇 때문에 왔습니까? 다 같이 한꺼번에 합시다. 상대방 개 무시하기, 시작. 그러면 개 무시하는 걸 멈출 수 없어요.
안 그래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아예 기회를 주니 안 그래도 너한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차라리 잘 됐다고, 당신 말투가 왜 그래. 당신 아침에 머리 안 감고 왔어, 안 감고 왔어? 당신 옷 입은 꼬라지하고는. 준 것도 없이 참 밉네. 차라리 죽어, 죽어, 죽어. 교회 나타나지 말고 죽어 버려. 그렇게 인사 3분하고 할렐루야. 생각만 해도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약 자체가 율법 앞에서 어떤 인간도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모형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죽어 마땅한 요소를 하나님께서 일으켜서 거기다가 저주 사건을 새겨버려요. 그 다음 이 시점부터 이스라엘은 뭐가 포함됐느냐 하면, 하나님께 욕하다가 누가 돌에 맞아 죽었다는 그 사건이 함유된 채 한 발짝 더 전진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이스라엘 사람들 깜짝 놀라게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모독하지 말라, 훼방하지 말라, 같은 뜻이에요.
이게 십계명 안에 있으니까 하나의 이론이지요. 교과서에 있는 글자지요. 그 교과서의 글자들을 하나님께선 생생하게 역사적으로 실제적인 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모독하는 자는 죽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말에 그 협박에 누가 겁낼 줄 아나.” 그런데 실제로 사건을 일으켜버린 거예요.
싸우다가 무심코 하나님을 저주한 사건을 일으키니까 결국 그 사건에서 돌로 쳐 죽인다는 처벌까지 앞으로 이스라엘이 진전하는데 요소로서 동력원으로 들어갔다는 이 말은 결국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있는 게 아니고 이것이 실제 현실을 꾸려나가는 하나의 소스가 된다는 거예요. 소스란 말 아시죠. 원천이 되는 거예요.
전기가 있어야 콘센트에 선풍기든 마이크든 꽂으면 작동될 것 아니겠습니까. 전기가 나오는 소스에다 꽂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게 안 꽂으면 이론 돼요. 지식이에요. 나는 십계명 잘 외운다. 마태복음 19장에 어떤 부자 청년 십계명 잘 외웠던 사람 나왔어요. 어릴 때부터 다 외웠다는 겁니다. 자기 말은 외운 게 아니고 아예 행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십계명 만드신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출제자 앞에 나온 거예요. 나와서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걸 다 팔고 날 따르라 하니까 겁나서 도망갔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그 소스, 전기 콘센트에 꽂히질 않은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제목 후보감으로 쓰겠습니다. 끈 떨어진 자. 여러분이 친구끼리 오늘 점심값 누가 낼까하고 제비뽑기를 합니다. 끈을 열 개 준비해서 하나는 손에 꽉 쥐고 아홉 개는 안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씩 뽑기를 하는 겁니다. 뽑히면 점심값 안 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연히 당겨도 안 당겨지는 거예요. 왜? 추첨을 주도하는 그 사람 손이 꽉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십자가게 꽂혀있는 사람은 이 울산바닥에서 환난과 곤고나 핍박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에서 뽑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건 사랑의 양태에요. 사랑의 모양태가 되는 거예요. 인생이 어떻게 되던 간에.
그런데 지식으로 교회만 한 사십 년 다녔어. 해서 온갖 감투는 다 썼어. 승진할 것 다 했어요. 여자의 최고 승진은 권사, 남자의 최고 승진은 시무장로. 올라갈 때까지 다 올라갔어. 거기 올라가려고 돈 얼마나 냈는지 교회에 얼마나 목돈 바쳤는지 몰라요. 나중에 천국 가서 뽑아본다고요. 이게 십자가와 연결이 안 돼서 뽑혀버렸어요.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모습은 표가 안 나도 결국은 티가 들통 나게 돼있어요. 우리 인생이. 조금만 기다려요. 한 오십 년만 기다려요. 들통 다 나게 돼있어요. 십자가에 꽂히지 않고 십자가 지식, 뭐 안다는 소리는 다해요. 피가 어떠니 십자가가 어떠니 언약이 어떠니 들은 건 있어서 다 이야기해요.
하지만 그 사람 사는 걸 보면 바닥이 십자가 피가 안 묻어있어. 붉은 잉크, 피, 인생의 뿌리에 피가 올라오질 않아요. 지옥에서 올라오지. 지옥은 뭐냐? 주님보다 자기가 더 가치 있다는 게 지옥이지 딴 게 지옥이겠어요. 그걸 앞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말은 물론 여기서는 애굽의 요소에요. 하지만 성경의 다 끝나고 난 뒤에서는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그렇게 하게 된 원형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17장 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광야는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마귀가 나타난 그 광야 아닙니까.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 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신에 대한 모독들이 가득하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바로 음녀에요. 음녀가 둘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음녀로 하나의 음녀로 통합돼있어요.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모독에 합당한, 다시 말해서 왜 이런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한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누구지? 나다. 내 새끼 내 자식 내게 속한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필요할 때 이용은 하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최종 소중한 것은 나다. 하나님이여, 내가 설정한 내 선을 넘어오지 마세요. 넘어오면 교회 안 다닐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요한계시록 17장은 뭐냐 하면, 음녀에요. 악마에요. 옛 뱀이라니까요. 모든 인간은 악마에 매여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악마를 이 세상 신이라 했어요.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우리는 전에 이 세상에 신에 의해서 내 멋대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악한 신에게 지배받던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출신을 말합니다. 우리의 출신은 중립지역이 아닙니다. 악마의 손아귀에 있었던 거예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그냥 놀고 있던 사람 데려오는 게 아니고 악마의 집에 가재도구로 사로잡혀있던 입장이었는데 주께서 담을 타넘고 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 다음에 주인과의 관계를 끊어놓고 가재도구인 우리를 주의 나라로 천국으로 데려가는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아담이 죄 지을 때 우리는 이미 죄 안에 있어요. 그리고 그 죄는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 힘으로 탈출이 안 됩니다. 우리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제대로 늘 정리하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 본색은 뭐냐?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우리의 본색은 해골이에요. 해골인데 육신의 껍질을 뒤집어쓴 거죠. 지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뒤집어쓴 거예요.
제가 무심코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그냥 이야기했거든요, 옳다고. 그런데 이게 영화화 돼있어요. 제 말한 것이. 최근에 개봉된 영화가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라는 새로운 터미네이터가 등장했어요. Rev, Revelation 요한계시록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계이름이, 요한계시록이 영어로 Rev이거든요. 계시록 9장에 나오는 그 모습을 따서 인공지능이 만든 기계. 전에 터미네이터 영화시리즈는 그냥 몸이 하나인데 시커먼 기름 뒤집어쓴 해골 모습으로 삐걱거리며 돌아다니고 바깥에는 인간의 경찰복장을 하고. 평소에 이렇게 다니다가 뭔가 공격받으면 이게 분리돼요. 해골과 이중으로 분리된다고. 이 사람에 제 아이디어를 써먹었는가.
에스겔 37장에서 우리는 해골입니다. 해골인데 아담의 육체로 붙지요. dna 조사해보면 전부 다 아담의 dna를 갖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해골이 우세하기 때문에 바깥은 후패해지는 겁니다. 우리 몸이 점점 쇠약해져가요. 안쪽이 우세하니까. 바깥쪽은 세월 가게 되면 사그라지고 와르르 와해되는 겁니다. 전도서 마지막에도 그렇게 돼있고. 나훈아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청춘을 돌려달라고 그렇게 해도 안 돼요.
그런데 세상은 악을 쓴다고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구십 넘어서? 돈이 있어야 사랑하지 돈도 없는 주제에. 아주 발악을 해요. 살려고. 해골은 해골답게 살아야지. 해골을 해골답게 살아야 돼요. 지금은 건강해서 그렇지만 나중에 조금만 나이 들면 삐걱거려요. 해골, 일어서지도 못해. 모든 게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이 말은 아까 말한 처음부터 인간은 본성 가운데서 하나님을 훼방하고 싶은 그런 힘이 작용하고 있어요. 악마의 사슬에 매야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정상적이에요. 왜? 그래야 악마다우니까. 그래야 악마의 권세 아래 놓여있는 티를 팍팍 내는 거니까요.
오히려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게 진짜 지식인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오는 것인지 그것을 아우라로 이야기해요. 아우라는 뭐냐? 내가 예상도 못한 어떤 다른 힘이 악마의 힘을 뚫고 나오는 고백, 그 고백은 뭐냐? 나는 개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맞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 세상에 나는 오십 년 다녀서 알 것 같다. 이게 아니고 나는 목사니까 죄인 아니다. 이게 아니고 지금 죽어도 전 상관없어요.
지금 죽으나 오십 년 전에 죽으나 오십 년 후에 죽으나 죽는 날은 맨 그 날이에요. 죽는 그 날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자주 이야기하지만 그냥 하루치만 사세요. 일용할 양식 주신 걸 감사하면서 하루치만 사시라고요. 어제는 과거는 잊어버리고요,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는 거고, 미래는 주님의 미래지 우리 미래가 아니에요. 우리는 운명이라는 것도 없어요. 운명은 주님 운명이지 나한테는 운명이라는 것도 주면 안 돼요. 내가 운명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10분 쉽시다.
20191101b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끈 떨어진 자 (강의: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Revelations 9장에 나오는 모습을 상상해서 인공지능 만들어놨는데, 두 번째에 악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악마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이것부터 알아야 돼요. 악마가 십자가를 압니까, 모릅니까? 알아요. 그게 근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으로 시험했어요. 그 말씀이 시편 91편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91편 말씀을 통해서, 이걸 어려운 말로 말씀을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이 세상이 있단 말이죠. 말씀을 주게 되면 세상이 세속으로 바뀌어요. 세상이라면 가치중립적, 가치기 있을까, 없을까 하는데 세속이 돼버리면 완전히 이거는 뭐냐? 더러운 동네에요. 말씀이 주어짐으로써 세상에 대해서 어떤 희망과 어떤 기대를 완전히 좌절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누가 접수를 했어요? 악마가 접수를 했단 말이죠.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이 세상, 주님 보시기에는 세속이죠. 더러운 곳이죠. 세상을 인간은 더러운 곳이란 생각이 안 들어요. 이 세상없으면 자기가 못 사니까 생계의 터전이 되니까. 땅이 얼마나 좋아요. 부동산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에서 잘될 생각을 하라 이 말이죠.
그럼 잘될 방법은 뭐냐? 선악으로 하는 거예요. 선악 지식을 동원해서 악은 멀리하고 선을 하게 되면 네가 복을 받아서 세상에서 잘 될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온 천지 교회가 그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다녀갔단 말이죠. 예수님이 다녀가신 땅이 두 종류가 돼버렸어요. 세속이 된 땅이 있는 반면에 주님이 있는 시공간에 주님 따라 같이 만들어진 시공간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는 새 백성이 만들어지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세속에 있는 더러운 땅에 사는 자기 백성을 데리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겁니다. 이건 누가 발목을 잡겠어요? 이 세상의 악마가 발목을 잡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데려갈 때 어떤 절차를 보여주느냐 하면, 하늘에 살던 악마가 땅에 떨어진 그 절차를 그대로 돼 보여주는 거예요. 그들이 알기는 알았지만 그들은 거기에 전혀 순복하거나 따를 의사가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악마는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악마를 더욱 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기를 쓰고 못 듣게 하는 거예요. 교회를 앞장세워서.
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돈이 있어야 되고 부동산, 토지 있어야 되잖아요. 대한예수교 간판 내야 되고. 이게 전부 다 뭡니까? 눈에 보이는 걸 조립한 거죠. 눈에 보이는 의자 있고 마이크, 피아노 다 있잖아요. 조립한 거라고요. 그럼 이런 의자, 피아노가 우릴 구원합니까? 인간 대 인간의 모임이고 단체지요. 모임, 단체 그냥 모이면 안 되잖아요. 예배는 몇 시에 드리고 집사 뽑을 때 전체 인원의 삼분의 이가 어떻게 만들겠지요. 그럼 그게 인간을 구원합니까? 못하잖아요.
인간은 악마 안에서는 어떤 방법을 써도 구원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못한 것을 누가 한다? 인간이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걸 믿는 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안 되는 일을 주께서 되게 하신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일이 아니고 구원 자체가 누구 일이다? 주님의 일이라고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일에 우리가 걱정할 게 없어요. 내 일이 아닌데 왜 걱정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성도 만들어놓으니까 여기에 닥터피시처럼 달려드는 거예요. 각질 뜯어먹는 고기처럼 막 달려드는 거예요. 마구 달려들어서 그것 하지 말고 선악적인 네 자질과 능력 있으니까 지식 있으니까 스스로 구원받는 방도를 모색해보라는 거예요. 자꾸 매일같이 우리한테 그걸 주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temptation 우리말로 하면 시험이에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뭐라고 돼있습니까? 시험 들게 마옵시고. 그 시험의 전형적인 모델이 예수님 광야에서 이미 받았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공격을 받은 거예요. 말씀을 실제화 시켜보라는 거예요.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쳐준다는 겁니다. 시편 91편에. 한 번 뛰어내려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마귀 시키는 대로 안 했을까요? 마귀가 시켰기 때문에. 마귀가 시키게 되면 나는 내 행함으로 구원을 성사됐다는 그 사실이 남아요. 뿌듯한 자부심이 남는다고. 자부심은 사적인 개인적인 자부심입니까, 아니면 남한테 줄 수 있는 자부심이에요? 오롯이 누구한테 모이는 자부심이에요? 나만의 자부심이죠. 나만의 자부심이니까 스스로 날이 가면 갈수록 그걸 부정할 수 없는 거예요. 너무 귀해서.
죄인 같은 소리하고 있네. 죄인 아니야. 점점 더 괜찮은 사람 되고 말았어요. 마귀가 노리는 건 그거였습니다. 거봐. 네가 하니 되잖아. 기도하니 되잖아요. 니가 약 안 먹고 기도하니까 병 낫잖아. 암 낫잖아요. 앞으로 기도해. 그래서 자식들 어릴 때부터 기도원에서 기도시키니 사춘기 있을 리 있어요? 내가 하면 된다고 믿는 믿음을 그게 믿음이라고 한국교회는 다 가르친 거예요. 네가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걸 네가 믿어라.
그러면 그 구원은 누구 소원이 되느냐 하면 나의 소원이 돼요. 나의 소원이 되는 구원은 어딜 가느냐? 지옥을 가십니다. 지옥밖에 갈 데가 없어요. 왜냐하면 변화된 게 없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그것이 계속 꾸준히 유지되게 되면 그대로 그것은 악마와 더불어 있던 악마의 습성이기 때문에 그대로 지옥으로 가지요. 악마가 가는 곳에 합세해서 가게 되는 겁니다.
뭔가 도중에 달라져야 돼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소경된 것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그런 고백 같은 게 있어야 돼요. 사람들은 소경된 것이 죄가 지었다 하거든요. 죄가 지었다는 게 아니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는 존재로 사는 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우리는 해골이니까.
공식 들어갑니다. 기계+언약=천국 백성. 우리는 해골, 기계거든요. 거기에다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 사람들이 천국에 갑니다. 언약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죠. 기계+주님의 긍휼과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의 나라에 갑니다. 이 공식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돼야 돼요? 해골 돼야 돼요. 그다지 아무 가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여기다 뭘 붙이느냐 하면, 기계에다 언약에 반대하는 반-언약을 입혔어요. 반-언약이 뭐냐 하면, 선과 악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것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웠어요. 악마가. 선과 악이란 바이러스를 집어넣었어요.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선 용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에 파괴하는 것도 누구 권한입니까? 하나님 권한이죠. 만드신 분이기에 부셔버릴 수도 있는 거예요. 부셔버릴 거야.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실효성 있게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에요.
천국을 만드신 분이기에 어떤 특정인을 천국 보내주고 지옥을 만드신 분이기에 어떤 특정인을 지옥 보내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한테 있는 거예요. 그 모든 일을 언약으로 일하는 겁니다. 선과 악이 아니고 십자가 피에 끈이 연결돼있는지, 피에 담겨있는지 피에 담겨있지 않는지, 그걸로 결정한다니까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네가 연결된 끈,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이 외쳤던 복음 아닙니까.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당신은 복음을 주장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복음이 다가 아니잖아. 나는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내가 구상하는 내가 원하고 있는 인생에 조금이나마 목적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걸 제가 도표로 그리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태어나서 사는데 이게 죽습니다. 도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눈을 과거로 보지 말고 미래로 봐서 가만 되는데 인간은 과거를 보거든요. 인간의 기억 속에는 과거뭉치입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이쪽을 보고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복음을 안 보니까 제자리걸음을 하는 거예요. 안 가는 거예요. 만약에 빌딩을 하나 샀다면, 빌딩 산 걸로 스톱이 된 거예요. 이게 다인 거예요. 왜냐하면 과거에 집 없던 설음이 자기 빌딩으로 마감됐기 때문에 지금은 그 자체로 과거에 비해서 뿌듯한 거예요. 본인이. 프랭크 시내트라가 불렀던 한 평생 나는 떳떳하게 후회 없이 살아왔다. 마지막 커튼이 쳐질 때 나는 자랑한다. 나는 다 이해한다. 한 평생 후회 없이 살았노라.
인간은 자기가 마감을 지어버려요. 본인 서있는 자리에서 마감이 돼버렸어요. 누가 이런 짓했어요? 마귀가 그런 짓하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악마가 왜 하나님께 대드느냐 하는 하나님께선 성도를 통해서 그걸 밝혀주는 거예요. 악마가 하늘에 살지 않고 땅에 왜 떨어졌느냐 말이죠. 그것은 뭐냐 하면, 천사면서도 지음을 받았으면서도 지음 받은 자의 행세를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견주려고 한 거예요. 이게 이사야에 나와요. 하나님과 동등 되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게 계속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거예요. 나도 알만큼 안다 이 말이죠. 천사니까 모를 리가 있어요. 십자가도 알고 선악과 따먹으면 안 되는 걸 알지요. 인간보다 월등하잖아요. 천사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단 말이죠. 뱀처럼 지혜롭다 했잖아요.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능가해서 인간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뱀에서 못 벗어나요. 악마의 수완이 더 높기 때문에.
그럼 악마가 왜 하느냐? 악마는 알고도 항상 뭐가 우선이냐 하면, 자기 절대성이 우선이기 때문에 장차오실 주가 되실 예수님한테 굴복하기 싫었던 거예요. 그게 욥기에도 나와요. 욥기 다음 주일 오후에 설교할 거예요. 하나님 하신 일에 자꾸 티를 내고자 하는 겁니다.
보통 성도님들이 저한테 질문 가운데 제일 많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데 이참에 정리하고 가실게요. 히브리서 6장 4절.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여기 타락했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원형은 누굽니까? 하나님이 하늘나라에 살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면서 살았던 그 천사가 이미 타락했다 했지요. 그럼 다시 회개할 수 있다, 없다? 없지요. 악마가 십자가를 알아요. 십자가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만 거기서 끈 떨어지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알면 뭐합니까? 끈은 떨어졌는데. 그래서 교회 나와서 복음 들으면 무슨 소용 있어요. 끈 떨어졌는데.
십자가 지식 안다고 그걸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구원을 주님이 직접 손을 대야 되지 내가 성경 지식을 알고 내가 관리한다고 해서 그걸로 내가 변화되고 그런 것 없어요.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아무리 큰 능력을 봤지만 결국 십자가를 현저히 욕을 보였단 말은,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렵게 하면 어렵지만 쉽게 하면 쉬운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진 것이 영광스러워요, 욕 받은 사건입니까? 욕 받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자기 아들을 악마가 하는 태도와 정반대로 가져가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시키신 일은 뭐냐? 어쨌든 간에 악마가 하는 일을 정반대로 가져가버려라. 처음부터 악마는 영광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대적했다면 예수님 너는 어떻게 해야 된다? 차라리 그들에게 심한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그리고 비자립적이에요. 스스로 할 수 없어요. 스스로 살려고 하지도 않아요.
주기도문에 보면 기도하라 했잖아요. 이건 예수님이 아버지에 하는 기도가 다 들어있어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마태복음에 보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할 때 아버지 뜻 이전에 무슨 뜻을 먼저 언급해요? 내 뜻을 언급하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뜻이 이런데 내 뜻이라 하는 그것 찢어버리세요. 내 뜻이 있는데 주여, 그것 개 무시해버리세요. 아버지 뜻이 내 뜻을 아예 짓밟아버리세요.
그때 제자들은 뭐 했지요? 남남이었지요. 자고 있었다니까요. 주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마음은 원이로되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안 되지요. 그럼 안 된 거죠. 주님의 기도에 동참 못한 겁니다. 언제 동참합니까? 예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겟세마네를 그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다 전달해버려요. 그러면 제자들은 뭡니까? 내가 원치 않는 길을 가죠. 베드로에게 했잖아요.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말해서 예수 믿고 난 뒤에 여러분 원하는 대로 되던가요? 저는 아예 원할까봐 겁나요. 원하면 그건 뭐로 바뀝니까? 실망으로 바뀌고 좌절로 바뀌게 돼있어요. 참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 받은 사람이에요. 날이 가면 갈수록 나의 가치가 내가 지킬 가치가 점점 쪼그라들고 나중에는 푸석푸석해져요. 가을의 낙엽처럼 밟으면 밟히고 손에 쥐면 다 부셔지고. 어차피 우리의 육신은 낙엽 따라 가버린 육체니까.
결국은 다 우리 고모 살았데. 그런데 얼마 전에 죽었데. 다 사라져버려요. <풍문으로 들었소> 함중아, 오늘 죽었잖아요. 나보다 한 살 많은데. 폐암으로 죽었답니다. 옛날에 67세면 살만큼 살았다 하는데 요새 67세면 대번에 묻는 게,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같이 살아있을 때는 함중아 가수가 어떻게 하지만 죽고 난 뒤에는 10년 뒤에 보세요. 누구 말이야? 다 잊어버려요. 낙엽과 똑같아요. 잠시 있었어요, 잠시. 너나 나나 잠시 있다가 할 역할 다하고 손 털고 없어지게 돼있어요. 왜? 창조주가 쓸 만큼 쓰고 이제는 파괴하시는 일만 우리에게 작용하시면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뭘 아느냐? 왜 악마가 지옥 가는지 아울러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들은 모든 알았지만 역시 자기 절대성 때문에 그 지식이 악마도 구원하지 못했다. 왜? 악마는 악마다워야 되니까. 그렇다면 악마 붙잡힌 우리 인간도 온갖 지식을 다 얻어 챙기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악마와 똑같은 성질과 성격과 사고방식과 본질을 지녔기에 문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동행하고 성령이 동행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네 안에 성령이 임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그때 조건이 뭐냐? 우리 몸을 아예 뭐로 규정합니까? 죽을 몸이죠. 죽을 몸이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면서 뭐만 보여주면 됩니까, 우리가? 이래서 내가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는, 죽어도 합당한 조치라는 모습만 계속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자식들 걱정 너무 하지 마세요. 하루치만 삽시다. 내일은 내일치만 살면 되니까 미리 당겨도 자식 걱정한다든지 과거에 내가 잘나갔는데, 과거에 잘나가지 않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잘나갔어요. 과거는 이제 잊읍시다. 정말 과거 잊읍시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했잖아요. 왜 걱정이 되고 벌벌 떱니까? 미리 당겨서 걱정하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했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그것은 나한테 맡기고. 이만큼 살아도 우리가 살만큼 살았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 내 자리가 마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이 이야기 듣고 돌아서면 또 내 자리가 마감이 돼버려요. 모든 걸 나한테 소환시키고 모든 의미를 다 나한테 바구니에 담듯이 다 담아버려요.
이 땅이 악마의 천지가 됐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뜻은 이거에요. 악마의 잔재를 남겨라. 하나님에게 망령되이 일컫는 일을 돌로 쳐 죽일 때에 그 현장에 돌로 쳤다는 죽음 사건이 있지요. 그게 뭡니까? 이스라엘 속에 뭐가 있었다? 악마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는 새로운 정보가 있어서 그 다음 하루하루가 이스라엘이 새롭게 진행되는 겁니다. 악마는 이렇게 당해도 싸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상대한다? 이미 악마에 세상 신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우리와 상대해봐야 우린 탈출 못합니다. 악마를 꽁꽁 묶어놓고 가재도구를 데려가듯이 악마를 누가 이겼다? 악마를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십자가 피로 이겼다는 그 소식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게 되면 우리는 이미 모든 걸 다 아는 사람 돼버렸어요. 십자가 피로 이겼구나. 내가 할 것은 남아있는 게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아니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악마의 잔재를 남기는데 그런 사람이 성경에 나와 있어요. 시편 볼까요. 시편 3편 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자,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배운 것 복습해봅시다. 다윗은 ‘기계+언약’이죠. 이해되십니까? 성도는 새 언약을 받았어요. 기계+새 언약, 해골+피.
그래서 성도가 갈 때는 안에 해골이 들어있지만 바깥에는 피의 사랑을 보여줘요. 언약이 사랑이니까.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으로서 움직이는 사랑으로써 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해요. 요한일서 4장에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심판을 이겼느니라. 심판을 이긴 자로서 우린 이 세상에 계속 남겨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게 편합니까? 시편 3편 1절에 아니지요.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자, 대적이라 했어요. 이 대적은 바로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갑자기 닥터피시처럼 어떤 사람이 성도니까 마귀가 떼쓰려 보내는 거예요. 흔들기 위해서. 우리가 귀한 게 아니고 우리 속에 이질적인 요소, 아담에게 나올 수 없는,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있었고 인간에게는 없던 것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 우리에게 심어진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고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죠.
이게 있으니까 악마가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악마가 도사라. 슬슬 몰려드는 거예요. 닥터피시에 발을 한번 담가봐야 되는데. 그냥 발만 담갔는데 어디서 알고 수백 마리가 달려들 듯이 성도가 있는 곳에 그 다음부터 남편이란 이름으로 아내란 이름으로 자식이란 이름으로 목사란 이름으로 교회 장로란 이름으로 온갖 마귀의 종자들이 다 달려들어요.
엄마, 그래 살면 안 돼. 엄마, 광신도 같아. 아버지는 자식이 훌륭하게 되는 것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교회만 가고 내가 원하고 같이 안 놀아줘. 이러죠. 아까 배운 것 복습하게 되면, 아들은 어디에 멈춰 있습니까?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그것이 미래에 꿈이 완성되기를 기대하면 자기는 자연으로 마감되겠지요.
주변에 식구들은 누굴 위해 존재해야 된다? 다 나를 위해 존재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아들 자리에 딸로 바꿔도 마찬가지에요. 식구 다섯 명이면 전부 다 자기밖에 몰라. 심지어 사춘기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까지 마찬가지에요. 심지어 집에 강아지도 그런가? 강아지는 안 그렇겠다. 강아지는 성령 안 받았으니까 그건 모르겠고. 몰라. 강아지도 마귀 들 수 있겠네요. 뱀한테 마귀가 들었으니까. 강아지도 복음 이야기하면 물려고 달려들지 몰라.
그럴 때 우리는 시편 3편 1절이 나한테 아까 심판 사건이 이스라엘에 잠입된 것처럼 시편 3편 1절이 그냥 이론상 지식상 말씀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서 구체화되는 그런 현상을 우린 살아가면서 닥터피시에 물리는 것처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세상에 나가서 영업을 한다든지 친구, 동창생을 만나든지 일가친척을 만나든지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하는 아줌마를 만나도 어떤 경우든 내 모든 상태에서 우리는 우글거리는 하나님의 대적들을 만나는 거예요.
성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원래는 조용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랐는데 성도 하나 들어가니까 미꾸라지 정체가 드러나서 발작을 일으키죠. 너희는 이 땅에 소금이다. 이건 연관되는 게 아니고 내가 지어낸 거지만. 소금처럼 거하는 거죠. 너희는 이 땅에 빛이라. 어두움을 밝힌다. 이 말은 그들로 하여금 악마의 정체를 밝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대적들의 구체화된 것이 시편 2편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의 허사를 경영하는고” 여기 열방, 민족들이 붙습니다. 이게 누가 쓴 거예요? 다윗이 쓴 거죠. 다윗이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 2절에 뭐라 돼있습니까?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러니까 악마는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악마는 날 없다고 여기고 살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악마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드러난다든지 언약에 있는 사람이 등장할 때 악마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돼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의 열방들이 분노하며, 지금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의도가 다 하나님의 계획된 바다 이 말입니다.
그 이스라엘 속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가 있거든요. 그 기름 부은 자가 뭐나 하면, 7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다음에 뭡니까? “너는 내 아들이라” 그러니까 악마가 진짜 귀신같이 알아요. 악마가 악마같이 안다고요. 악마의 라이벌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죽지 않는 하나님을 전파하지요. 교회가.
교회에서 예수님 이야기 잘 안하지요. 무슨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 이야기하지요. 잘해주는 하나님,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하는 하나님, 착하게 살면 가만있지 않고 30배, 60배, 100배로 보상해주는 하나님이죠. 거기에 죽는 하나님 모습 없지요. 그게 악마가 심어놓은 인간 속에 태생부터 심어놓은 유치원 아이들도 기도하라면 기도 잘해요. 심어놓은 하나님이 뭐냐 하면, 날 사랑하는 하나님이에요.
적어보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뭐가 있지요? 내가 들어있지요. 이게 제로가 돼야 될 텐데 제로가 아니고 1이 돼있어요. 하나님은 뭐냐 하면, 주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에요. 누굴 배제하고? 나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나를 배제하고. 나를 죽이고 죽인 나를 집어넣을 때 이게 바로 십자가의 영이 하시는 일이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시느냐? 그래야 우리 주변에 악마의 잔재를 남기기 위해서 뽑을 것 뽑아내고 나머지는 그대로 지옥 불에 들어가면 되고 심판 불에 들어가면 되거든요.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부터 보면, 천하에 꾀던 자가 하늘에서 쫓겨나서 9절에 보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에 떨어졌어요. 땅은 누구 세상입니까? 악마가 통치하는 세상이에요. 그 통치하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보냈다 했지요.
언약을 보내게 되면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도를 통해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구원됐으니까. 하나님을 참소하는 자, 그 복음을 받으니까 가만두지 못하고 이제 발악을 하는 거예요.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나고” 참소라는 게 선악으로 동원시키는 거예요.
얼레리 꼴레리 천당 가는 저 사람 20살 때 사기 쳤다. 27살 때 바람피웠다. 53 때 횡령했다. 어떻게 나쁜 짓했다. 매일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 양심에다 계속해서 선악을 쏘아대는 거예요. 악을 지적하고 악을 제거하려면 기도를 두 번 더해야 되고 헌금 더하고 새벽기도 나와야 되고. 너 그러면 나중에 벌 받아서 암 걸린다. 너 요새 나쁜 짓해서 간 아픈 거야. 모든 행동 하나에 너 그 짓했으니까 이번 주 자살할 줄 알아라. 두려움과 공포를 계속 줘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는데 매일같이 참소합니다.
그럴 때 성도의 대처방법은 간단해요.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쉽게 말해서 어린 양의 피로 이겼으니 피로 다 된 마당이기 때문에 이젠 까짓것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게 되면 마귀가 시비 걸 거리가 없다니까요.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할 거리가 없다니까요. 죽겠다는데, 뭐. 피가 고마워서 지금 더 살고 싶지도 않다는데 뭘 어떻게 유혹을 해요.
사람이 살려고, 살려고 제자리걸음하면서 나 이만큼 사는데 얼마나 애썼는데 이러니까 시험이 왔고, 내가 저놈의 자식 키우려고 시장바닥에서 새벽 장사하면서 키운 내 자식을 두고 내가 그냥 못 죽지. 이러니까 그 자체가 시험거리 되는 거예요. 저 자식 장가가는 것 보고 가야 된다. 내 딸 시집보내고 눈을 감아야 원한이 없다. 이게 전부 다 마귀에 시험든 거예요.
내일 토요일에 만약에 결혼식 한다 하면 부모님이 저절로 새벽기도에 내일 결혼식 하는데 일단 기본적으로 날씨 괜찮아야 되고, 그리고 부좃돈 두둑이 받게 하고, 제발 결혼해서 안 다투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고 순풍순풍 아들 낳고 딸 낳든지 딸 낳고 아들 낳든지 하여튼 둘 이상 낳고, 그리고 무탈하게 아무 병도 없게 해주시고 그저 나라에서 필요한 인재 되게 하시고 교회의 큰 일군 돼서 주의 영광을 많이 돌려 예수 믿는 사람은 저래 잘 되는구나, 하고 무릎을 치면서 너도 나도 교회 나올 수 있도록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주여, 기도하는 이 뜻대로 마옵시고 이 뜻대로 하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다음날 비가 와서 부조 들고 온 사람들 차사고 나서 부조도 못 내고 전부 다 돌아가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위가 가족력이 있어서 젊을 때부터 당뇨고. 내 자식만은 남의 자식과는 달리 별나게 잘 돼야 된다는 그 자체가 그게 바로 악마에요. 그게 악마의 자세라니까요. 그것도 모르고 수십 년 동안 교회에 돈 갖다 바치고 속아 넘어간 거예요. 아이고, 그 돈 아까워라. 내가 안 냈지만. 내가 생각해도 아까워. 보이스피싱에 걸려서.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자꾸 과거에 미흡한 걸 지금 예수 믿고 만회하려는 생각을 해요. 만회했다고 칩시다. 자, 모든 영광은 누구 영광이겠어요? 거봐. 나 괜찮잖아. 괜찮은 존재 맞잖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날 무시하지 마. 날 무시하면 죽여 버린다.
그러니까 악마가 하나님 앞에 대들었던 이유가, 예수님과 상대적으로 자기가 무시당한 것을 견디질 못해서 악마는 이를 갈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일에 대해서 집중 공격합니다. 이게 시편에 뭐냐 하면, 기름 부은 자, 하나님은 안 건드려요. 하나님이 보낸 자, 아들을 집중 공격해서 나는 아들은 안 믿지만 하나님은 믿는다고 소리를 악마가 온 천지에 교회란 이름으로 다 퍼져나간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 만드시고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천국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 뭔가 빠졌어. 십자가 복음도 빠져버리고. 결국 하나님 등쳐먹고 나 잘되는 것. 그게 제2, 제3의 악마의 새끼들이에요. 뱀의 자식들이에요. 뱀의 자식이 목사 돼있고, 뱀의 자식이 장로 돼있고.
그놈의 뱀의 자식, 악마의 자식이 장로 되니까 목사 쫓아내고 마귀의 자식을 또 세우고. 그저 이 교회나 키워라, 이 말이죠. 교회운영 되도록 운영비 나오도록 하고 빈자리 다 채워달라는 거예요. 그것만 요구하는 거죠. 교회를 그렇게 절대화시키는 거나 우리 가정 집구석 절대화하는 거나 다를 것 뭐 있어요. 똑같지요.
우리의 마감이 주님이어야 되지 내가 마감이 되면 안 됩니다. 나는 구멍 뚫려야 돼요. 막아서다가 폭탄 맞아야 돼요. 뭔가 미사일이 확 뚫고 지나가야 돼요. 네가 아니야, 비켜. 주님이야. 왜 네가 그 앞에서 얼쩡거려. 네가 골키퍼야. 저주 사건을 주께서는 하나님을 망령되게 했던 그 사람에게 했다면 지금 그 돌을 우리가 맞아야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 터질 때 이미 우리는 망령된 자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음이 확인되었어요. 우리가 남에게 돌을 던질 쨉이 못 됩니다. 우리가 누구한테 돌을 던져요. 죄 없는 사람이 돌 던지라 했는데 우리가 죄 있는데 돌을 못 던지지요. 주님께서는 소스, 콘센트를 피에다 꽂아버렸어요. 지지직 전기가 막 통해. 피의 전기가 통해요.
끈 떨어진 자가 아니라 끈이 이어져 있어요. 예수님과 한 몸이 되고 말았어요. 주님의 사랑이 계속 주입됩니다. 우리는 죄만 짓고. 그 죄를 의 되게 하는 주님의 언약의 다 이루심이 계속 오니까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 에너지 장은 다 이루심, 다 이루심, 매일같이 다 이루심뿐이에요. 자꾸 과거를 생각하게 되면 지금 자기가 못 마땅해요. 이 모양 이 꼴로 살려고 그렇게 애썼나.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고요.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 역시 불만이라. 다음에는 잘 되겠지. 또 계획한다고요. 미래 잘라내 버리고요. 아까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미래란 게 없어요. 주님 자체가 미래고 우리 운명은 없습니다. 주님 자체가 이미 확정된 운명인데 운명 앞에 ‘나’자를 붙이고 미래 앞에 나를 왜 붙입니까? 내일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악마는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십자가로 자꾸 우리에게 들이댑니다. 십자가 알면 복 받아야지, 이런 식으로 들이댑니다. 그게 십자가와 복 받는 게 앞뒤가 안 맞게 돼있어요.
한 가지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왜 이 설명하느냐 하면, 아까 시편 3편 1절에 악마가 있다는 사실이 눈에 안 보이는데 악마는 없는 존재에요.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해버리면 갑자기 다윗의 적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온 천지가 다윗을 공격하고 달려듭니다. 이게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발한 일이에요.
그처럼 갈라디아서 5장을 보게 되면, 오늘날도 성도가 있는 곳에 온 주변에 성령을 받으면 성도가 뭐가 보이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 18절이 보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성령 받은 자로 간주합니다. 기계+사랑이에요. 기계+언약.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끈이 떨어졌거든. 끈이 떨어져버렸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악마가 천국에서 끈 떨어졌잖아요. 악마와 똑같아요. 천국과 끈 떨어졌으니까 사랑에서 끈 떨어졌거든요. 언약에서 끈 떨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홀로 살아야 돼요. 복음 모르는 여러분 가족들 보세요. 다 홀로 살잖아요. 멀리 찾지 마세요. 그들이 주장하는 게 뭡니까? 분내는 것과 당파 짓는 것과 싸우는 것과 지 마음대로 사는 것, 자기 육신이 터져 나오는 대로 사는 이게 끈 떨어진 거예요. 자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거예요. 모든 일은 자기 좋으라고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묻지요. 너 왜 그렇게 사는지 물으면 그쪽에서 뭐라 하냐면, 몰라. 내 돈 벌어서 내가 쓰는데 니가 왜? 이러거든요. 너 왜 그렇게 사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생긴 게 이 모양인데. 악마가 없어요. 다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그게 전부인 거예요. 나는 이상하게 내 위주로 살고 싶어. 왜 그런지 몰라. 그 이유를 묻는 니가 이상해. 남들 다 그렇게 살지 않나? 하필 나만 붙들고 그런 소리하는 데. 그걸 묻는 니가 이상한데.
성도는 성령으로 보기 때문에 육체의 일, 육체의 일이 뭐냐 하면, 육신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육신만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육신은 악마와 더불어 있는 육신이죠. 그것은 뭐냐?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결국 다윗에게 대들었던 대적들은 뭡니까? 다윗은 1과 2가 있는데 제3의 요소를 다윗은 공유하고 있는데 다윗을 공격하는 사람은 제3의 요소가 없으니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이미 죽은 자란 것을 모르니까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사는 거예요. 나는 내 기쁨대로 내 행복대로 사는데 너는 왜 십자가 지신 주님 위해서 살아. 이상하네, 라고 오히려 저쪽에서 의아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그런 현상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할 때는 그게 보여요. 평소에는 돈 보고 산다고 그것도 안 보이고 자기 육신만 챙기다가 퍼뜩 갑자기 정신 차려 보면, 내가 말씀을 대하고 십자가 대하는 경우가 생겨버리면 내가 이렇게 행복하구나. 괜히 어제 보상하려고 오늘 애쓸 필요 없고 내일까지 미리 당겨서 하지 말고 오늘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오늘도 살게 하신 것에 감사하면서 오늘치만 생각하자. 그렇게 사셔야 돼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주여 일용할 양식만 주시고 악마의 시험에 들지 마시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그게 바로 성도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다 집어넣은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끈 떨어진 것 맞아요. 이젠 그걸 볼 줄 알아야 돼요. 그렇다면 남들이 끈 떨어졌다면 나는, 여러분 자신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용서가 여러분 내부에 유입되면서 살아가는 자체가 범사에 모든 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몸이 아프고 힘들고 또는 육체가 피곤하고 돈이 없더라도 그것마저도 생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귀한 사랑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멀리 했던 말씀을 다시 대해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다시 한 번 파악해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는지 이제 실감납니다. 그리고 오늘도 옛날 이스라엘 사람 못지않게 늘 아슬아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남들에게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히려 강건하여서 나보다 주님의 십자가 피가 더 귀한 것인 것을 귀한 생명인 것을 날마다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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