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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8:1-3 / 일방적 정당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8:1-3 / 일방적 정당성

정인순 2020. 2. 27. 13:00

음성 동영상 Youtube

일방적 정당성


이근호
2020년 2월 26일             



본문 말씀: 호세아 8:1-3

(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8:2)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8:3)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

‘나팔’, 모든 것을 일반화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개인이 자신을 처분할 생각말라는 겁니다. 자신을 옳게 만들고 자신을 개선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융통성이란 손톱만큼도 없는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그대로 이 세상에 나팔을 불면서 해야 될 일을 합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 작업입니다. 이 땅에 대한 심판은 이미 확정된 바가 있기에 변경될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수완이나 능력으로 이 확정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운명이나 개인의 운명은 본인들이 알아서 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언에 준해서 진행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언입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정당성을 근거로 해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와야 하는지 그 원인을 찾아 연결시키게 됩니다. 무엇이 확정되어있을까요? 그것은 모든 인간은 ‘언약을 위반하고 율법을 어기게 된다’는 겁니다. 이 위반의 댓가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요 저주입니다.

예언은 단순히 충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고 회개하고 정신 차리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정당성과 견줄만한 그 어떤 인간들의 정당성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로움에다 우리의 정의로움으로 참여하고 거들자”라는 시도를 하나님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언약이 뭔지도 모릅니다. 율법의 본질이 뭔지도 모릅니다. 알지도 못한 것을 제대로 준수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성립될 바가 아닙니다. 즉 인간들은 기껏해야 조심스럽게 코 앞에 있는 상황에 대처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본인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의 부지런함에 속아넘어가서는 아니됩니다.

예언 내용 안에, ‘인간은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한다’고 되어 있으면 인간의 장래는 이 내용대로 되어질 뿐입니다. 요지부동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왜 이런 결과를 낳는지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아파트에서 자기 친구를 만나 생일 파티를 벌리고 난 뒤, 다음날 아침에 아랫 층에 있는 아저씨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고 소식을 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층간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그날 밤에 아래층 아저씨가 자살했다면 경찰서은 그 자살을 유발한 윗층 세대주를 소음유발 원인으로 지목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할 결과는 이처럼 일방적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몸에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임신을 시켜놓고서는 ‘그 임신은 인간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고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단호한 결과에 의해서 물을 필요도 없이 모조리 죄인이 되는 겁니다. 중요한 바는 하나님이 아시는 이같은 확정된 결과에 대해서 성도는 ‘미리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예언 속에 들어와야 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렇게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 지은 것에 제가 한 것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조리 제 안에 있는 악마가 그 짓을 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더욱 죄인되게 하기 위한 조치인고로 하나님의 정당성에 의해서 저를 저주하시고 지옥에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고백 속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그 어떤 꼼수도 들어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 어떤 요령을 부린다면 이는 ‘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거기에 합당한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행하는 ‘자기 정당성’입니다. 이 자기 정당성을 하나님의 일방적 정당성에서 보면, 언약을 어긴바가 됩니다.

반면에, 참으로 하나님의 결과성에 합류되어 있는 사람은, ‘예언이 빠진 현실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개꿈에 불과한 겁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20) 즉 언약을 모르는 자들은, 평소에 열심히 살아가는 자신의 노동의 댓가가 현실을 만든다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이미 확정된 결과가 있음에 대해서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 따로 어떤 결과를 얻고자 기대하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이게 범죄요 하나님의 예언을 모독하는 처사입니다. 상식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회개나 반성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시도하는 행위도 다 이런 상식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서 함락당한 것은, 이미 북이스라엘은 필히 언약의 어기고 율법을 범해야만 하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예언의 안목에서 세상을 볼 줄을 몰랐던 겁니다. 역대하 33:9에 보면,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24:3-4에 보면,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고 범죄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이 범죄의 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후대 왕이 요시야 왕이 철저하게 나름대로 율법을 가지고 유대나라를 정화를 했어도 소용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왕하 23:26)

그런데 이 므낫세가 갑자기 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매 저희가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간지라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 33:11-13)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서는 므낫세 왕 자신은 막판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하나님의 예언에 들어설 수 없음을 ‘회개’로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책임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됨을 감사하는 바로 그들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주신 은혜를 회수하시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작업입니다. 이것을 므낫세 왕은 미리 알았던 겁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반복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0강-호 8장 1-3절(일방적정당성)2002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8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3페이지입니다.

호세아 8:1-3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

이 예언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의외로 3절에 나오는 단어 하나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미’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이 하나님의 예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인간 쪽에서 어떻게 상황을 개선시킬 여지가 전혀 없음을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언이 예언답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인간 쪽에서 손쓸 수가 없다는 것을 슬프게 듣지 마세요. 다행스럽고,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결과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필연적인 결과, 결과의 필연성을 근거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식으로 예언대로 일을 하십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요. 인간은 내일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어떤 결과인지 모르지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결과를 이미 정해놓았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일방적정당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어떤 결과를 정해놓고 이것이 정당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정당한 것을 이모저모 따져서 생각해서 ‘나는 정당하다’ 혹은 ‘나는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정을 내리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정당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정당성,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정의로움, 여기서는 인간이 알고 있는 정의, 또는 정당함 옳음 그것과 견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확정지어진 그 결과에 대해서 인간이 원인제공자로 들어서는 것을 주님께서는 원치 않기에 그렇습니다.

“결과는 내가 정해 놨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너희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라는 식으로 예언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달라질 것인 양 자기 자신에게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예언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정당성이라는 것을 알 때 성도의 마음가짐은 이렇습니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정해놓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정당성의 정당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원인제공자로 추적을 당하는 입장에 있다는 이 관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걸 오히려 더 신기해해야 돼요. 내가 어떤 일을 벌여놓고 거기에 합당한 결과를 바라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우리의 인간적인 상식이거든요. 사는 방법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조심스럽게 살아가요. 그런데 이 예언 앞에서는 자기의 부지런함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돼요. 인간은 조심스럽게 자기 발자국을 쳐다보고 하루하루 살아가요. 자기 코 앞에 있는 발자국을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데 문제는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사실. 왜? 자기 코앞에 있는 발자국만 쳐다보면서 살아가다 보니까 자기 자신의 방향,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갈지 본인이 결정지을 수가 없어요.

어릴 때 학교에서 집으로 올 때 앞에 가는 친구 가방만 붙들고 고개 푹 숙이고 눈 감고 가는 놀이하잖아요. 그래서 뒤에 있는 눈 감은 애가 물어요. “어디까지 왔~나?” 하고 묻는다고요. 그러면 그 애가 “미장원까지 왔~다.” 또 “어디까지 왔~나?” 가다가 너무 심심해서 묻는 거예요. 그 뒤의 애는 자기 코앞까지 밖에 몰라요. 어디까지 왔는지도 몰라요. 그것은 눈뜨고 앞에 가는 그 애가 다 이야기해주지요.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그 말을 잘 여러분이 새겨들어야 돼요. 예언이라 하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그 예언이 확정되었고 이제부터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어떤 결정을 취소시키고 변경시킬 수 있는, 혹은 개선하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인 결정이 확정되었음의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원인자로서 거기에 참여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예언은 뭐냐 하면, 1절,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여호와의 집에 덮치는 것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하도록 이미 결정된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저는 굉장히 기쁜데요?

정말 기쁘다면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이 “네가 벌 받아야 돼.”라고 할 때 우리의 답변이 이렇게 돼야 돼요. “하나님, 제가 벌 받을 짓 어느 것도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저보고 죄지었다고 하는데 저는 제가 죄 짓는 일은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악마가 다 그 짓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악마로 하여금 그 짓 하게 하신 이유는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하셔서 지옥 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지옥 보내 주세요. 지옥 보내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뭐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요. 억지스럽고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이것이 억지스럽게 들리면 들릴수록 기뻐해야 될 일은 뭐냐? 어떻게 내가 그 사실을 아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하면 우리는 뭘 로 이해하느냐 하면, ‘아, 정신차라리고 하는 모양이구나. 회개하라고 하는 모양이구나.’ 또는 ‘주님, 제가 그 때 그 말씀 듣고 완전히 정신 차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바르게 살려고 마음먹었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언약을 어기며 율법을 범한다는 이 확정된 하나님의 정당성이 주제넘은 우리로 인하여 이게 틀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새삼스럽게 놀라운 기적을 우리가 받아서, 내가 몰랐었는데 알았다, 가 아니라 이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생각만 한다면 그 정도 반성과 회개는 나올 수가 있습니다. “똑바로 해.” ‘아, 주님의 말씀이 덮쳤구나.’ “예, 똑바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속하는 문제에요. 제가 계속 강조하는 것은 뭐냐?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이것은 내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문제에요.

경찰서 취조실에 가게 되면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요. 저는 안 가봤습니다만, 드라마 보면 나오데요. 내부에서 보면 저쪽이 안보이고 취조실 바깥에서 보면 안이 보이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내 모습을 비취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튕겨 나오게 되어 있는데 튕겨 나오는 것이 아니고, 거울 속에 들어가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거울속 안에서 보게 되면 거울에 모습이 비취는 사람들에게는 그 거울 안에 사람이 들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못하는데, 거울 속에 들어있는 어떤 인물은 바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다 아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일방적으로 확정된 결과대로 필연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속입니다. 예언 속에 들어갔다는 말은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자는 뜻은 아닙니다. ‘기다려보자. 예언대로 되는대로.’ 그것 아니에요. 이미 확정적이에요.

이 결과를 바꾸지를 못해요. 우리는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바꾸지를 못합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언약의 내용이 뭐고 율법의 진짜 내용을 우리가 사전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딴에 성경말씀 지켰다, 하지만 지켜봤자 그거 지킨 것 아니에요. 율법의정신도 모르고 언약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뭘 알아야 지키지요. 알아도 못 지키지만 몰라서도 못 지켜요. 지킬 수가 없어요. 그냥 조심스럽게 자기의 발자국만 부지런히 설칠 뿐 그런 것은 하나의 원인에 불과한데 그 원인은 어떤 결과와도 매치되지 않습니다.

좀 노골적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친구들과 생일파티 하고 있었어요. 그 다음날 아침이 되니 아파트가 어수선해요. 경비원들이 왔다갔다, 하고 순찰차도 와 있어요. 보니까 아래층 아저씨가 투신자살을 했어요. 경찰관은 그 아저씨가 왜 투신자살을 했는지 조사를 합니다. 해보니 확정된 결과가 나왔지요. 원인이 뭐냐? 원인을 찾습니다. 지난밤에 위층에서 파티 한다고 너무 시끄러워서 층간소음 때문에 자살했어요. 이건 그냥 예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돌아가셨어요. 십자가에서. 그것이 확정된 하나님의 일방적인 정당성이에요. 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그 의를 가지고 이제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일인 것을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알았어요? 이 사실을? 인간이 생각을 넘어서는 거예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요? 도저히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거예요.

누가복음 1장 29, 30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마리아라는 처녀에 임신을 시켰습니다. 일방적임신이 일방적정당성이에요. 마리아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두고 조금도 정당하다고 보지 않아요. 처녀가 임신을 해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정당하다고 요구할 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마리아의 몸에다 임신을 시켜놓고 뭐라고 하느냐? 이는 인간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립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마리아도 놀랐어요. “어쩜이뇨.” 인간들은 상식대로 살거든요. 상식에 비춰서 말이 안되는 거예요. 말이 안되는데 이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내가, 여러분이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제가 묻는 것은, ‘이렇게 알게 되었다’는 답변을 하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놀라워라, 그 말입니다. “놀랍도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일방적으로 율법을 어겼다, 언약을 어겼다. 너 심판받는다. 이것이 겁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언약을 지키기 시도하기도 전에, 율법을 지키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로 하여금 언약위반자, 율법위반자로 규정해주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미리 당겨서 미리 알았다는 이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잘해보려고 하는 모든 짓거리가 헛수고일 뿐이라는 이것을 미리 당겨서 안다는 것이 슬슬 웃음이 나와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게 기분 좋은 이야기 아니에요? 돈을 수천억 줘보세요. 이걸 알 수가 있는가? 교회 30년, 40년 다녀보세요. 이걸 알 수 있는가? 지금 모든 인간의 고민은 이거예요. ‘내가 어떻게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로서 내가 개입할 수 있느냐?’ 이거잖아요.

그 방향이 잘못된 거예요. 그 방향이! 내 쪽에서부터 출발했던 그 방향, 이것은 예언이 아니고 우리가 꾸역꾸역 뭔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체가 언약위반이라는 거지요. 누구에 의해서? 일방적인, 일방적이라는 것을 꼭 집어넣어야 돼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정당성에 의하면 ‘너는 언약을 위반하고 율법을 위반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전부 다 언약위반이 되고 율법위반이 돼요.

심판받기로 되어 있으면 심판 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뭘 토를 달아요, 거기에다가? 이미 예언이 되어 있는데. 게다가 이 말씀이 “누구 능력되면 지켜봐라. 못 지키는 사람은 지옥 보내고 지키는 사람은 천당 간다.” 이것이 아니에요. 호세아 8장 1절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이 말, 나팔을 불어라, 이 말은 모든 것을 일반화시킨다는 뜻입니다.

나팔 분다는 것은 누구 하나 예외 없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8장 1, 2절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일곱 천사가 빈손으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일곱 나팔을 불어요. 트럼펫을 분다고요. 빰빠라빰~, 분다고요. 트럼펫을 분다는 것은 모든 예언이 현실보다 우세하다는 것.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일방적 정당함이 인간의 모든 정당함을 이긴다는 것을 신호로 보여주는 거예요.

개인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일반화시킨다는 거예요. 보편화시키는 거예요. 모든 심판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 얻어맞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7절에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그 다음 8-11절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새 도는 전염병 코로나19 같아요. 천사는 무정해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왜? 일반화되니까. 사전에 “너 나와 아는 사이지?” 그런 것 없어요. 개별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 소용없어요. 예언은 예언대로 될 뿐이고 거기에 아무 정도 없는 무정한 천사가 주님이 시키는 대로 나팔을 불면 그대로 모든 것은 인간들이 아는 현실은 구라고 가짜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예언이 섞인 현실과 예언이 빠져 있는 현실을 구분해봅시다. 예언이 빠져 있다면 시편 73편 20절 말씀처럼 돼요.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자기가 일할 때는 자기가 하는 그 일에 현실인 줄 알아요.

인간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대를 가지고 일하거든요. 내가 지금의 행함이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은 어떤 결과를 내다보는 원인으로 투입되는 거예요. 자기는 그 일을 하면서 이걸 도저히 꿈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내가 만들어가기 때문에. 현실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 다른 말로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미래의 운명은 결정된다고 보는 거예요.

설교 처음에 이미 결과는 하나님의 정당성으로 확정되었지요. 그게 예언인데 인간들은 현실을 그렇게 보지 않고 미래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확정이 된다. 내가 원인자니까 내 원인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아닙니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에요.

니체가 이야기한 겁니다. “자기 운명을 즐겨라. 너 가치 있어. 장래는 너 하기 나름이야.” 그런데 시편 73편 20절에서는 그게 바로 개꿈이었다는 겁니다. 현실을, 경찰서 취조실에서 취조 받을 때 취조하는 형사와 범인이 있을 때는 함께 있는 사람이 그 둘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 상태는 보이지 않는 방, 예언의 방에서 이미 결정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예언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는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거기 같이 합류했다는 것, 이미 우리는 마지막 최종확정성에 같이 가담되어 있다는 사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까? 마리아가 임신을 했을 때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주여 왜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정당함이 마리아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

그럴 때 우리는 흔히 현실에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고 예언의 입장에서 현실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되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모든 모습은 마치 뭐와 같으냐? 보통 가게 새로 개업했을 때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홍보풍선을 세워두지요. 일명 춤추는 풍선.

춤추는 풍선 보세요. 하반신은 바람통풍기에 꽂혀 있어서 꼼짝도 못해요. 꼼짝도 못하는데 상반신은 자기 맘대로 춤을 춘다고요. 고등학생은 오토바이타고 빠라빠라빠라빰! 이러고 다니지요. 돈 있는 재벌 3세는 페라리 스포츠카 타고 날 듯이 다니지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지요. 놀러가고 싶은 곳 다 놀러가지요. 싱가포르에 가고 부산가고.

자기 딴에 춤추는 홍보풍선이라. 동창회 가서 자기자랑이나 하고 그것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 꽂혀 있어요. 꼼짝없이 땅에 꽂혀 있다고요.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어기고, 그리고 본문말씀대로 하나님의 대적이 독수리처럼 들이닥쳐서 필히 멸망하고, 저주받을 땅에서 발을 뺄 수가 없어요. 발이 빠지지를 않아요. 뺄 수가 없다고요. 하반신은 빠지지 않고 기껏 상반신만 춤을 추는 거예요.

그러나 지난 화요일에 대전강의생중계에서 그런 말씀 드렸었지요. 노아가 홍수 일어났을 때 노아의 부동산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가 평소에 가졌던 부동산, 주거지와 농토, 홍수 나니까 싹 다 날라 갔어요. 노아 말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자기뿌리를 이 땅에 꽂아 넣을 어떤 자리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을 위반한 땅이고 율법을 위반한 땅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정당성에 의해서 필히 여기서 심판과 저주가 여기에 덮치게 돼요.

노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10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라고 되어 있거든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어디로 부르심을 받았느냐 하면, 하늘에 있는 본향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요. 가야 할 곳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로 가는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나그네 길을 갔어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이 땅에서는 자기가 거할 곳이 없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생을 살아간 겁니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고. ‘아, 여기는 우리가 영원히 거처할 곳이 없네.’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살았던 거예요. 이 땅에 자기부동산이 없어요. 떠돌이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일방적인 최종결말 속에 미리 들어간 안목과 시선을 가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을 볼 때 영원히 거처할 곳이 없다고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늘에서 보는 안목이 없어요. 없기에 어떻게 하든 이 땅에 자기 자신의 두발을 꽂고 거기서 번성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호세아 8장의 예언에 의하면 거기에는 천사가 나팔을 부는 동시에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무서운 심판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 저주받게 돼요. 이 말씀을 무서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워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또 고마워해야 돼요.

여러분은 감사하고 고마워집니까? 고마워지려면 왜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하여 심판과 저주를 하시는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동안 내려주신 은혜를 회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동안 이 땅에 살게 할 때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던 거예요. 햇빛, 달빛, 별빛도 그렇지요.

별빛의 경우 바다에서 고기 잡는 사람이나 배타는 사람에게는 별빛이 없으면 목적지에 도달 못합니다. 작은 별빛, 그리고 달에 의한 조수간만의 차이 같은 것, 그리고 해, 하늘에서 비 내리는 것, 땅이 열매를 맺는 이것 전부 다 하나님이 그냥 내려주신 은혜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에요. 그 은혜를 회수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잘못한 것 없잖아요. 하나님이 뭐 잘못했습니까? 감사해야 되지요. 고맙지요.

예언이 들어 있는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 ‘내가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지?’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정당성에 들어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회수해버리면 그 자체가 저주요, 심판인 거예요. 살고 싶어도 못삽니다.

일곱 천사가 와서 이 세상 3분의 1을 완전히 불바다 만든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잘 하셨습니다. 제대로 일 하시네요. 역시 하나님답고 일 잘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되지요.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가 무상으로 은혜를 입어왔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거든요. 은혜가 충만한데 은혜를 쏙 빼니까, 그동안 우리가 은혜 없이는 못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우리가 아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에 대해서 또 감사해야 되지요.

제 말을 잘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요. 호텔 예약사이트가 있어요. 근래 나온 광고물을 보니까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떤 사내가 말끔하게 정장 차려입고 나 좀 산다, 하는 폼을 잡으면서 호텔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어요. 직원이 카드를 받으려고 하는데 그 옆에 있는 젊은 친구가 똑같은 방인데 거기서도 카드결재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내에게는 “1박에 18만 5천원입니다.” 했거든요. 옆의 방을 쓰는 그 젊은 친구도 당연히 18만 5천원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11만 5천원입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 때부터 정장 차림의 그 사내가 카드를 안놓는 거예요. 돈이 아까워서 실랑이를 벌여요. 직원이 카드를 달라고 힘을 주는데 아까워서 그 카드를 안 놓고 막 뒤로 빼는 거예요. 그 때 카운터 직원이 앞으로는 트리바고 잘 이용하시라고.

그 광고에서 제가 뭘 주목했느냐 하면, 우리 몸을 주께 드리면 돼요. 주면 되는데 세상 사람과 자꾸 같이 살려고 하다 보니, 카드 그냥 주면 될 것을 안 빼앗기려고 하나님하고 실랑이를 벌이네요. “양복 입는 신사가 ……” 이렇게 시작해서 “요리집이 무어냐” 하는 식의 가사처럼 허풍을 떠는데 이게 아까운 거예요. 그동안 내가 나 간수하고 내 인생 내가 따로, 아모르 파티, 내 인생 내가 개척하고 내 몸, 내 멋진 인생을 내가 개척하려고 했던 그 내 인생에 대한 애착, 미련, 동정, 이걸 안 빼앗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호세아서에는 나팔을 불어버려요. 나팔을 불어버리면 “후딱 줘버려라. 찬스다.” 미래는 예언대로 돼요. 예언이 빠지면 꿈이 되니까. 인생 아무리 애쓰고 열심히 살아도 깨보면 개꿈 되어버려요. 살아온 것이 예언대로 살아왔는데 나중에 죽고 보니 그게 꿈에 불과한 것을 자기는 확실한 현실이라고 우겼던 거예요.

본문에서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친다는 이 말은, 북 이스라엘에 살만에셀이라는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가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지 앗수르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앗수르 군대는 허수아비라니까요. 예언대로 된 거예요, 예언대로! 기원전 722년경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대군에 함몰될 때 진짜 호세아나 이런 사람 같으면 “주여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일방적인 정당성을 보여주는 식으로 멸망하기에 멸망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아무리 봐도 이해 안되는 대목이 있어요. 역대하 33장 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열왕기하 21장 16절에 보면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므낫세왕은 남쪽 유다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입니다. 므낫세보다 더 악한 왕이 없어요. 오죽 했으면 므낫세 다음에 아몬, 아몬 다음에 요시아, 이 왕들이 나와서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습니까? 우상을 다 깨면서 선정을 베풀어도 열왕기하 23장 26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요시아왕이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말씀대로 살고 아무리 해도 유다나라가 멸망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취소시키지 않습니다. 후대왕이 아무리 착해도 선대왕인 므낫세가 악해도 너무 악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므낫세왕은 나라 하나를 말아먹었으니까 가장 밑바닥까지 지옥 가야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생각할 거지요.

그런데 역대하 33장 10-1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저희가 듣지 아니한고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매 저희가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 간지라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자기가 다 일 저질러놓고, 나라 말아먹고, 그렇게 독하고 악하게, 연산군보다 더 지독하게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려놓고 서울말로 자기는? 경상도 말로 지는? 지는 막판에 회개를 해버려요. 회개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하사 다시왕위에 앉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대목을 보는 사람은 분통을 터뜨려요. ‘하나님의 유다나라는 건강해야 돼.’ 그런데 이 엉터리 같은 왕이 등장해서 완전히 나라를 엉망을 만들고 나라를 말아먹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막판에 회개를 하니 본인은 살았어요. 이게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일본과 국가대표 경기를 합니다. 감독 아들은 축구도 잘 못해요. 우리나라 대표팀이 일본을 2대 0으로 이기고 있는데 후반전에 감독이 자기 아들을 군대 면제받으려고 집어넣었다 칩시다. 그냥 예를 드는 겁니다. 그런데 후반전에 자살골 3개 넣고, 헛발질 두어 번 해서 5대 1로 역전패 당했을 때 7만군중이 “죽여라! 죽여라!” 하겠지요.

그런데 그 감독아들이 인터뷰하면서 하는 말이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끝났어요. 월드컵 나가지도 못하게 해놓고, 그 경기를 본 3천만 시청자들을 실망하게 해놓고 자기는 한마디 하고 끝났어요. “잘못했습니다. 내가 아버지한테 졸라서 후반전 뛰었는데 자살골 3골 넣고 패스미스해서 두골 더 먹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는 얼른 집에 갔어요.

성경을 보면서 ‘이럴 수가 있느냐?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하잖아요. 이게 성경을 전혀 모르고 꿈을 꾸는 자들의 성경해석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라는 것은 그게 아니고, 내가 원인자가 스스로 될 수 없고, 이미 하나님의 확정된 언약을 위반하고 율법을 위반했다는 그 하나님의 정당함을 근거로 해서 “이래서 너는 언약을 위반했고 이래서 너는 율법을 못 지켰어.”에 가담되고 엮이게 될 때 그 사람이 바로 회개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결과는 십자가로, 죄씻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거든요. 이게 최종적인 결과에요. 문제는 이겁니다. 이 사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이 사실을, 그것도 일반화된 이 사실을 어떻게 내가 이걸 알게 되었느냐?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만약에 내가 이걸 모르게 된다면 타산지석, ‘과거의 일을 내가 생각해서 지금 정신 차려야지. 이게 바로 회개야. 이게 바로 반성이야.’ 이런 식으로 해서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갖게 될 거예요.

‘내가 어떻게 바르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나의 구원은 나 하기에 따라 결정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정당성에 엿 먹이는 짓이에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서 하나의 초를 치는 악마의 성경해석법입니다. 이미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예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구원받지 인간이 설치고, 싸대고, 춤춘다고 해서 백날 해봐야 하나님은 그걸 정당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당성을 차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카드를 내가 쥐지 마시고, 버티지 마시고, 매일같이 “나는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처분에 맡길 수 있도록 해주신 이 은혜에, 이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돼요. 어떤 결정을 하는 것, 여행 갈까 말까, 이거 무의미합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낳아볼까, 하는 이것은 정말 헛꿈 꾸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내가 사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은 이미 우리가 예언 속에 있는 존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남 흉내 내고 모방한다고 참 헛 꿈같은 짓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에 의하면 십자가지신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사오니 이 사실이 도리어 엄청난 기쁨과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