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개입
이근호 2020년 2월 19일
본문 말씀: 호세아 7:13-16
(7:13) 화 있을진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저희가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7:14)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7:15) 내가 저희 팔을 연습시켜 강건케 하였으나 저희는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7:16)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개인들은 특히 오늘날 개성을 중요시합니다. 자신의 품은 뜻을 마음껏 펼치는데 있어 그 누구도 방해할 권리가 없다고 자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개인은 본인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 영토에, 혹은 이미 존재하는 국적인 가진 부모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국적이 정해져 버립니다.
출생 지역에 의해 국적이 정해지는 것이 ‘속지(屬地)주의’라고 말하고 부모의 국적에 따라 정해지는 것을 ‘속인(屬人)주의’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당사자의 의사에 의해 국적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어진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결코 온전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집안 가족을 때려도 국가 경찰공무원이 관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확실한 현실은 모든 인간은 국가 단위, 혹은 민족 단위의 소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자기만의 개성을 주장해도 남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 자체를 특정 국가나 민족 단위에 일부로 봅니다.
성경도 이런 현실관 위에서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두 종류의 민족으로 구분하셨습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몸집+몸집+몸집+ …=국가(민족)’를 구성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또 다른 민족은 이스라엘을 말하는데 이 이스라엘은 ‘없었던 민족’이 하나님의 언약개입을 위해 이 지상에 친히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민족(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의 뜻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다른 민족들은 개인적인 몸이 추구하는 바를 국가라는 집단이 대행해서 나타내게 됩니다. 인간들의 사적인 몸은 힘을 원합니다. 자기를 편하게 하고 행복하기 위해 힘을 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도시를 만드는 식으로 힘을 집결을 시도합니다. 혼자의 힘보다 각자 특색있는 재능들의 집결되다 보면 보다 효율적이고 능률적이고 그 풍부하게 힘을 모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큰 힘이 큰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작은 힘을 큰 힘에 흡수 통합되기 싶고 결국에는 소멸됩니다.
큰 힘에 합류하지 아니하면 작은 개인적인 힘도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이를 위해 도시국가들은 옛적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습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인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개인의 사정이나 개성을 이유로 병력을 기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더 실질적인 현실상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전쟁을 할 때에 누구를 위해 전쟁하고 무슨 목적으로 전쟁하고 어떤 자들을 적으로 간주해서 공격하기도 하고 방어하기도 하느냐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벌리는 전쟁은 ‘인간의 적’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적’을 들추어내는 전쟁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적으로 간주하는 것을 이스라엘도 같은 안목으로 그들을 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안 되면 진정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31-32) 즉 땅과 하늘 사이에는 접촉점이 일체 없습니다.
육과 영 사이에도 접촉점이 없습니다. 이 접촉점이 없음을 오늘날 시대에는 도리어 인간의 승리로 간주합니다. 모든 진위가 과학이 담당하기에 과학적으로 진리로 인정되지 아니하면 모조리 미신이요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이게 육은 영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면에 영이 육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은 단호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땅에 속한 자가 하늘을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겁니다.
따라서 땅에 속한 모든 이방민족들은 오로지 자신이 속해 있는 나라의 생존력에 위협을 주는 것들은 다 적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지 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의 언약(약속)을 인정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들은 자신의 ‘소유성’을 바탕으로 생존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땅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만약에 가진 것이 없다는 말은 곧 모아놓은 힘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소유가 없으면 존재로 없다고 여기고 그들은 힘 모으는 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특출한 재능(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영웅으로 모시고 그 영웅에 종속되므로서 본인의 몸이 추구하는 바를 표현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소유성도 아니요 무(無)소유성도 아닙니다. 탈(脫)-소유성입니다. 즉 누구에게 종속당하는 관계로 살아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따로 내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이 끊어져이고 닫혀 있는 상황에서 하늘에 계신 쪽에서 이 지상애 개입했다면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개입’만 쳐다보면 되는 겁니다.
이는 자기 문제에서 손을 놔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뒷전으로 물러나갈 처지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는 말입니다. (마 18:3) 어린 아이는 자기 힘으로 버티는 자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모 의존적입니다. 부모에게 장악당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중심부는 인간 영웅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워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제사방식으로 갖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사무엘상 8:7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적을 버리고 자신의 소유와 생존에 위협을 주는 것을 적으로 간주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면,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적이 되고 이방나라 애굽에 의해 집단적으로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적이란 자기 소유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이런 인식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갖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비록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는 생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떡과 포도주만 찾을려고 울고 있을 나라가 아닙니다.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심을 믿는 백성이어야 하는 겁니다. 즉 약속대로 개입하는 메시야에 바라보면서 더 이상 자기로 인해 염려하지 않는 자가 바로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소속이 이스라엘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적이 우리의 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9강-호 7장 13-16절(하나님의 개입) 2002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7장 13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2페이지입니다.
호세아 7:13-16
“화 있을찐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찐저 저희가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내가 저희 팔을 연습시켜 강건케 하였으나 저희는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북 이스라엘, 여기서 에브라임이라는 것은 북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에브라임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꼴보기 싫다!” 그 말입니다. “수치스럽다. 저리 꺼져! 저리 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방나라하고 어떤 차이를 보이지 않을 때 자기가 만든 나라를 내침으로서, 저주하고 멸망케 함으로서 하나님 쪽에서는 손해 보는 일이 없어요.
하나님 자신의 뜻을 멸망당하는 이스라엘에 고스란히 남겼기 때문에, 하나님 자기 뜻을 충분히 반영해 줬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는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 보면서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이 본문이 그다지 고민거리나 걱정거리가 되지 않아요. ‘망할자들 망하는 것은 당연하지.’ 그렇게 되는데 만약에 이스라엘 편에 속한다면 이것은 걱정이 늘어지지요.
‘도대체 얼마나 말씀을 지키고 얼마나 하나님께 돌아와야 되고, 얼마나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야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이런 말씀이 고민거리가 되고 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쪽에 서 있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박수치고 찬미하고 “잘했습니다. 내칠 자 내치는 것이 하나님답지요. 아이고, 내가 다 속이 시원합니다. 하나님 조치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하시는 일에 찬양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서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이스라엘 편에 서가지고,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걱정을 하는 거예요. 오늘 말씀 끝에 보면 16절에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되어 있어요. 애굽이라 하는 것은 나라 이름입니다 애굽사람한테 조롱거리가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애굽이라는 나라한테 조롱거리가 되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이.
이런 말씀을 두고 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인간들이 개인주의로, 개인단위로 생각해서 나는 어떤 존재냐, 나는 어떤 인간이냐, 나는 어떻게 되겠느냐, 항상 자기자신을 개인이라는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는데 이 호세아 7장의 경우에는 북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단위가 애굽이라는 국가단위한테 조롱거리가 돼요.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어떤 가치나 의미라는 것은 하나님한테는 통하지 않고 그러한 인식 같은 것은 별 소용없어요. “너 어느 나라에 속해?” 또 다른 말로 하면 “너 어느 민족에 속해?” 이렇게 민족단위, 집단단위, 국가단위로 끊어서 하나님은 보시는 겁니다. “소속이 어디냐? 너는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 속하느냐? 애굽에 속하느냐, 이스라엘에 속하느냐?” 그런 식으로 묻는 겁니다.
만약 개인적으로 해버리면 이것이 다양성이 되어서 마지막에 ‘그것은 네 개성이고 이것은 나의개성이다.’ 이렇게 돼버려요. ‘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산다. 나는 너처럼 재벌집안도 아니고 넉넉지 못해서 이렇게 산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도 좋아. 이것은 나의 개성이 되어서 이것은 내 인생이니 네가 잘 산다고 해서 나에게 으스댈 필요 없어. 나는 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을거야.’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 이것이 다 부질없는 이유가 있어요. 전쟁이 일어났다 칩시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같은 일병이라도 한쪽은 총각일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할 수도 있고 한쪽은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서 애 하나 두고 전쟁에 참여할 수가 있어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1차 세계대전이 있었거든요.
영국군병사들이 참호 속에 있을 때 친구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개성을 따지면 한쪽은 기혼자요 한쪽은 미혼자에요.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질러 형님이 있는 연대까지 가서 독일군을 공격하려는 명령을 취소시킨다. 왜? 그것은 독일군의 함정이기 때문에. 이것이 <1917>이라는 영화에요. 두 사람이 갔다가 한 사람은 죽는 영화인데 거기 보면,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 것이 용납이 안됩니다.
논산훈련소가 왜 있습니까? 논산훈련소는 인간의 모든 개별적 개성을 묵살하고 머리부터 박박 밀게 해요. 똑같은 옷을 입게 합니다. 일체 모든 필요한 물자를 제공합니다. 휴대폰이 어디 있어요? 다 압수지요.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다수의 부속이지요. 개성, 다양성,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다수의 부속품으로 징병제로 해서 모든 인간을 강제로 군에 가게 할 때 그것이 국가의 위력입니다.
나는 어느 학교 나왔다는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군대 가면 전부 계급으로 결정되어버리거든요. 개인자체의 가치가 용납되지 않는 겁니다. 자, 어느 것이 더 현실다우냐? 국가단위로 끊는 것이 현실다우냐? 아니면 ‘나는 군대 안가. 국가가 오라고 해도 안가.’ 그런 식으로 개인적으로 내 개성을 살리는 것이 가장 현실적일까요? 그걸 한번 생각해 보자는 말이지요.
머리 나빠도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자식이 있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버지가 칼을 빼서 자식을 죽였다. 없던 자식인데 내가 결혼해서 생겨난 내 소유의 내 자식이 되는 거예요. ‘내 자식을 내가 죽였는데, 죽이고 싶어서 죽였는데 뭐가 어때?’ 그런데 그 다음날 신고가 들어오고 경찰이 왔다 이 말이지요.
아버지가 하는 말이 “당신들 뭡니까?” “경찰 공무원입니다.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내가 내 자식을 죽인거야.” 혹은 “내 마누라 내가 때렸다고!” 누가 누굴 때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힘센지 모르겠지만 내 남편을 내가 때렸다고요. “내 남편 내가 때리고 내 아내를 내가 때리는데 국가가 왜 폭행죄로 잡아가? 내 인생이야. 국가가 관여하지 마.”
이게 현실적입니까? 내가 말을 잘해서 남에게 사기 쳤다. “내 혀 가지고 사기를 쳤는데 국가가 왜 간섭하느냐?”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 사람 말이 맞습니다. 자기 자식 자기가 죽이면 남이 간섭 못하고 자기 아내 자기가 때려도 간섭 못합니다. 문제는 민족이라는 것, 혈육의 단체라는 것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국가라는 것이 뭐냐? ‘몸집 + 몸집 + 몸집’ 이에요. 몸 덩어리, 몸 덩어리, 신체덩어리, 신체와 신체가 결합된 것이 국가거든요. 그게 민족이고 또 국가고. 외국에서 전쟁을 걸어왔는데 ‘나는 총 쏘는 것 싫어.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에 총 안쏠거야. 난 군대도 안가.’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적들이 나에게 원한이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옆집사람은 기타를 잘 치지만 나는 피아노를 잘 쳐.’ 그런 개성을 고려해서 북한괴뢰군이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너희들은 피아노를 치든 기타를 치든 똑같은 동일한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은 성격이 좋거나 인자하거나 관계없이 잠재적 테러범으로 외부에서 보거든요. 소속이 되면 소속에 보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성격자체에 대해서 국민 본인들이 그걸 수용했다고 다른 나라에게 그렇게 보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알라신을 믿는 것이 국교다.” 이란 같은 경우 그리고 많은 나라가 그렇거든요. 사우디아라비아도 마찬가지고요. 이슬람이 국교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국교는 아니에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지만 주변 다른 나라는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개개인이 알라신을 많이 믿든 적게 믿든 관계없이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국가는 무조건 알라의 이름으로 징병해버려요. 실제로 오스만제국 당시에 본인이 예수 믿어도 터키 국민이면 알라신의 전사가 되어버려요. 나치당시에 나치에 동조하기 않고 반대하는 독일군민들은 사정없이 죽여 버렸어요. 히틀러가 폴란드 사람들만 죽인 줄 알아요? 그 전에 자국민도 무지하게 죽였습니다.
독일나치시대 때 정박아, 장애인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 다 죽여 버렸어요. 쓸데없는 일에 국가의 힘을 빼게 한다고. 정신병 환자들도 수용소에 가둬서 죽여 버렸어요. 85퍼센트가 나치당을 옹호했으니까. 알박기라는 것이 있어요. 10차선 도로 내는데 나라에서 보상받고 다 이사 가라고 하지요. 그런데 혼자 “이 집은 부모님이 물려준 집이다. 여기가 내 고향이다.” 하면서 보상금 줘도 안받고 살던 대로 그냥 있겠다는 거예요.
10차선 도로 내려고 했는데 거기는 8차선으로 냈어요. 집 사이에 두고 이쪽 4차선, 이쪽 4차선. 그리고 그 집만 25미터 높이 위에 서 있어요. 그 집에서 내려올 길은 전혀 없습니다. 동서남북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탑처럼 서 있어요. 한 번 집에서 밖에 나오려면 낙하산 타고 내려와야 돼요. 중국에서.
개성이라는 것, 본인이 목숨 거는 개성은 국가의 힘에 맥을 못춥니다. 민족이 크면 국가가 되거든요.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영토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은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포괄적으로 그 국가 소속으로 다뤄지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나면 자기 조국을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에요. 태어났다면 그 자체가 이미 국가가 정해진 거예요.
영토주의거든요. 국가의 그 영토에 태어났다면 이미 그것은 대한민국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미국사람 할래.” 소용없어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개인의 개성이라는 이 현실, 가슴에 와 닿는 그 현실보다 오히려 더 확실한 현실이 뭐냐? 국가가 나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차원에서 다루고 있어요.
내가 전쟁 싫어한다고 전쟁을 안가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군대가 포위했을 때 18만 5천명이라는 엄청난 군대가 왔잖아요. 그 군인들 하나하나가 예루살렘에 어떤 원한이 있어서 온 사람들이 아니에요. 국가가 가라고 해서 갔는데 천사가 개입해서 그 많은 군대 다 몰살당했어요. 하루아침에 그 대군이 다 죽었어요. 천사가 화생방 무기를 사용했는지 다 죽어버렸다고요.
성경만이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국가위주에요. 이 세상 국가는 딱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국가 이스라엘, 그리고 인간의 혈육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이어가는 이방국가 그 둘밖에 없어요.
16절에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속이는 활이라고, 활이 속인다고 했어요. 무능하기 짝이없는, 무용지물의 활. 활이 등장하는데 활은 전쟁무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든 이유가 개개인 개성, ‘나 편하게 살래. 내 몸편한 게 최고야. 내 행복이면 그만이야.’ 이런 개개인의 개성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그 집단의 단위에서 보게 되면, 전쟁을 해야 될 나라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전쟁하는 나라라는 뜻이에요.
전쟁을 해야 돼요. 전쟁을 할 때 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적이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국가가 이스라엘국가입니다. 그 이유가 신약에 나와요. 요한복음 3장 31, 32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요한일서에도 그 비슷한 말씀이 있는데요. 이 말씀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땅에 속한 사람들은 전혀 못 알아듣는다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땅과 하늘은 접촉점이 없다는 겁니다. 연결점이 없어요. 통하는 구석이 전혀 없어요. 끊어져 있어요. 육과 영, 또는 땅과 하늘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제 말을 잘 들어보세요.
육과 영은 연결점이 없다. 마땅한 접촉점이 없다. 그 말과, 영과 육은 접촉점이 없다. 이게 같은 말이 아닙니다. 땅과 하늘은 접촉점이 없다는 그 말과, 하늘과 땅은 접촉점이 없다는 말이 얼른 보면 같은 말이지만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가려고 하지요. ‘죽으면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이다. 지옥은 피하고 천국가자’라고 시도해도 땅의 세상의 모든 종교라 하는 것은 이미 과학을 통해서 미신으로 증명이 되었어요.
과학이 모든 진리의 척도에요. 과학적이 아닌 것은 다 미신이라는 겁니다. 귀신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 봤어요? 천국? 봤어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고요? 그런 일은 없어요. 왜? 과학적으로 그것은 확인이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땅에서 하늘로 간다는 것은 인간의 연약한 마음, 의지 없는 인간들, 뭔가 담력이 없는 사람들이 의지하고 싶어서 어린애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 계셨으면 좋겠다.’ 하다가 하나님이 계신다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데 그것이 옳다, 혹은 그르다 하는 것을 결정하는 분명한 잣대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과학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망원경을 가지고 봐도 거기에는 별이 보이고, 달이 보이고, 해가 보이더라도 천사는 안보여요.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달에는 옥토끼가 산다고 했잖아요. 토끼가 절구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토끼치고는 큰 토끼지요. 암스트롱이라는 사람이 달에 갔는데 토끼가 없어요. 토끼가 무서워서 도망을 쳤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없어요. 과학적으로는 달에 토끼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은하수는 강이 아닙니다. 아직도 달에 토끼가 있다고 하고, 은하수가 우주에 있는 강이라고, 하늘에 흐르는 물이 있다는 식으로 하면 이것은 잘못되었다. 왜? 과학적이 아니니까. 비과학적이니까. 그것은 하나의 신화고 미신이니까. 그래서 어떤 일이 있을 때 마음이 약해서 하나님 찾는 그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우선 과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해야지요.
중세 때 14, 5세기경에 흑사병이 퍼졌잖아요. 유럽의 3분의 1이 죽었어요. 흑사병이 퍼졌을 때에 요한계시록대로 되었다고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쥐만 잡으면 될 일을 가지고, 쥐만 잡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을 가지고. 쥐 잡으면 된다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생화학이 발달하고, 반복된 실험을 통해서 과학이 발달하면서 밝혀진 거지요. 그 다음부터는 흑사병이 와도 주사 맞으면 끝나는 거예요.
균 배양해서 면역이 되는 약을 개발하면 신종코로나든 뭐든 다 낫는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뭘 해도 행동은 과학적으로 하는 것이 오늘날 이 시대입니다. 몸집과 몸집, ‘몸집 + 몸집 + 몸집’, ‘인간의 지혜 + 지혜 + 지혜’ 이것은 뭐냐? 전염병이 퍼진다든지 외국에서 적이 쳐들어온다고 할 때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없는데 그 힘은 국가에서 나를 지킬 수 있도록 보태주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표현을 하기 위한 몸이거든요. 인간의 모든 몸은 가만있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자꾸 표현을 하게 되어 있어요. 뭘 표현하느냐? 내가 내부에서 추구하는 바를 몸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단백질이라는 근육질을 통해서, 어떤 동작을 통해서 표현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누굴 사랑한다면 몸이 먼저 반응을 일으켜요.
평소에 말 잘 안하다가 갑자기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앞에서 온다면 갑자기 말을 더듬으면서 “그대여, 너무 아름답도다. 내가 가지고 있는 통장의 돈 반을 드리리다.” 뭐 이런 식으로. 초등학생 같으면 “내가 갖고 있는 구슬의 절반을 ……” 이렇게 되겠지요. 몸이 반응을 한다고요. 이게 바로 육이 결국 하늘과 접촉점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반대로 합니다. 영과 육이 접촉점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출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이게 바로 요한복음 3장이에요. 서로 끊어졌어요. 육과 영이 접촉점이 없다는 것은 이 땅 인간들의 자신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건 없건 관계없어. 우리는 우리끼리 살면 돼. 몸과 몸을 합쳐서. 몸과 몸을 합치면 힘이 나오니까.’ 그 힘으로 우리는 버틸 수 있다는 거예요.
현재 전 세계의 도시화가 75퍼센트라고 합니다. 왜 자꾸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가느냐? 몸집이 모여야 거기서 돈이 생기고 힘이 생기거든요. 50년 전만 해도 전 세계 도시화가 10퍼센트밖에 안되었어요. 지금 인구가 77억이거든요. 77억의 인구의 도시화가 75퍼센트가 되었어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든 말든 무조건 도시로 가요. 몸집을 모으는 거예요.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도시 하나를 국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도시국가에요. 도시 하나가 국가 행세를 한 거예요.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캐슬, 성을 지었는데 그것이 하나의 도시로서 활동한 거예요. 몸집을 키우는 겁니다. 스케일을 키우는 거예요. 그게 육이 사는 방식이고 그 스케일을 키우는 방식이 뭐냐? 바벨탑을 쌓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안가도 그만 우리끼리 살지.’ 하면서 이 땅에서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겠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그 개인의 추구가 몸과 몸이 만나면서 대표적 단일체로서의 국가가 움직이는 거예요. 국가가 하나의 개인적 몸체처럼 움직이는 겁니다.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요. 국가의 책임자인 왕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고요.
그게 바로 모든 고대국가에요. 하나님은 뒷전이에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편의상 인간들의 생각을 결집하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거론하지 하나님위주가 아닙니다. 나 위주에요. 내 몸 위주고. 내가 잘되면 국가에 충성을 하게 되고, 아낌없이 전쟁에 나가서 내 국가가 잘되는 그것이 곧 내가 잘되는 거예요. 손 흥민 골 넣는데 우리가 왜 기뻐하지요? 봉 준호 영화가 작품상 받는데 우리가 왜 기분이 좋으냐는 말이지요. 일본은 찡그리고 한국 사람은 기 펴고 다니고, 왜 그런데요?
현실은 뭐냐? 나의 개성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에요. ‘나보다 더 큰 몸집이 나를 대신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추구하는 것을 내 국가 대한민국이 나 대신 달성해줬으면 좋겠다.’ 그게 뭐냐? 지상천국이에요. 영원한 절대적인 신의 나라. ‘내가 신처럼 살아보자. 힘을 모아서 이 지상에 행복한 나라 건설해보자.’
인간의 몸으로 표현하는 그것이 집단적으로 표현되는 그것이 국가, 이방나라입니다. 그들의 적들은 뭐냐? 이 몸이 있는 나라, 또는 이 나를 건드리면 그들이 적이 되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라요. 이스라엘은 인간의 적이 아닙니다. 나의 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적을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접촉점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접촉점을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해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전쟁을 함으로서 비로소 없던 적들이 보이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말은 비로소 하나님의 적이 보인다는 뜻이에요. 그 전까지는 나의 적, 나의 원수만 생각나다가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하늘에서 누가 개입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개입된 그 분을 쳐다보는 순간 나는 뒷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하늘과 땅이 연결이 안 되었으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오신 분이 이 땅에 개입이 되어버리면 그 때부터 없던 구원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기쁨이잖아요. 성도의 기쁨은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개입된 메시아 그분을 쳐다보면서 내 문제에서 내가 손을 뗀다는 이 자유, 이게 성도의 기쁨입니다. 이제는 날 위해서 살 이유가 없거든요.
왜? 메시아가 개입했기 때문에. 메시아가 개입했다는 것은 없던 구원이, 구원 안 받아도 되는데 구원이 새로 발생된 거예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자는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쳐다보는 것은 뭐냐? 전에는 하늘에서 누가 구원자가 개입되었다는 소식을 모를 때는 사나 죽으나 자기 몸만 챙겨야 돼요.
열심히 공부해야 되고, 돈 벌어야 되고, 자기만 챙기다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안보내도 되는데 하늘에 계시던 그 분이 약속대로 자기 아들을 구원자로, 메시아로 이 땅에 개입했다, 오셨다, 라는 소식이 들리는 순간 우리는 그분만 생각하고, 그분에게 관심 두고, 그분이 하신 성과만 바라보게 되면 더 이상 내가 나 자신을 붙들고 피곤하게 살던 모든 인생은 다 일거에 부질없는 짓이 돼요. 안해도 되는 짓이 되는 겁니다.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이지만 구약에서는 그걸 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달리 다른 나라는 왕이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왕이 없어요. 그 비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말이지요. 약속이 있고 약속대로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죽음의 제사를 계속 하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다워야 되는데 갑자기 이방나라의 인간에서 뽑혀 나온 왕이 있어서 이방나라가 유지되니까 그게 부러운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이방나라가 전쟁하는 것은 자기 몸뚱이 하나 지키기 위해서 전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걸 본받아서는 안되는 겁니다. 나 하나 편하고 내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설립취지와 달라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살라고 이스라엘을 만든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무엘상 8장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사무엘)를 버림이 아니요 나(여호와)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왕인데 이스라엘은 왕 자리를 비워놔야 돼요. 이방나라는 인간의 왕으로 채워야 되는 것이 이방나라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왕이 있으면 인간 대 인간의 의사소통 때문에 왕의 지시에 따르면 되는데 이스라엘은 어떤 인격자가 없어요. 그냥 약속만 있을 뿐 어떤 인격자가 없다 그 말이지요. 약속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지켜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존재이유는 뭐냐? 왕 있음에 대해서 왕 없음이 왕 있음을 이긴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증명하고 싶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교회의 주인이 누굽니까? 성경을 안보는 교인들은 교회의 주인이 당회장목사지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에베소서는 보지도 않았어요. 봐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요. 교회의 주인은 비어 있어야 돼요.
평소에 인간은 같은 인간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그 쪽을 위함이 아니고 나 자신의 몸, 몸은 표현하는 거니까, 내가 편하고 내가 절대적으로 행복하고 싶어서, 그 사람에게 뭔가 요청하고 싶어서 같은 인간끼리 의사소통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교회가 아닌 일반모임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뭐냐? 보이지 않는 분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에 개입해서 스스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 이루었음이 중앙에 있다면 우리가 따로 나를 소유할 필요가 없어요. 어려워지는데 좀 참으세요. 인간은 소유함으로서 자기가 존재하려고 하는 겁니다. 뭔가 있을 때 그 있는 것을 끌어 모아서 나라고 지칭하고, 그 끌어 모은 것을 지켜야 그게 나가 되고, 만약에 그 끌어모은 것이 사라지면 인간은 곧 자살하고 싶어요. 나다움이 아무것도 없으면 내가 살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소유가 아니에요. 그러면 무소유냐? 무소유는 불교에서 하는 소리고 거기 찾아가라고 하세요. 무소유가 아니에요. 비소유, 또는 탈소유에요. 소유당하는 거예요. 내가 뭘 소유해서 나다운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장악당하는 겁니다. 우리는 종이고 그분은 주인이 되는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공중에서 뛰어내려 본 적이 없어요. 낙하산이랄지 그런 것을 타고서. 물론 초등학교 때 미끄럼틀에서 우산 들고 뛰어내리려 하다가 혼난 적은 있지만. 낙하산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낙하산이 우리를 붙들고 있지 내가 낙하산을 붙들고 있다고 해서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붙잡고 있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말고 이방나라는 뭐냐? 자기들 몸집끼리 모아서 힘을 보태야 돼요. 그래야 그들은 자기가 안전하게 보존되고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타고난 육적 본성이에요. 추구하는 바가 뭔가 내 힘이라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가요. 어린아이가 자기 힘을 따로 챙기고, 어린아이가 자기생계를 자기가 따로 챙기는 그것은 어린아이답지 않잖아요. 어린아이는 부모가 먹여줘야 되지 10살 먹은 애가 “나는 홍 잠언이다” 해서 트로트 “남자의 항구~” 이런 것 불러서 자기밥벌이 자기가 하는 그것은 어린애답지를 않은 거지요.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것은 자기 밥벌이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메시아가 이 땅에 개입했다는 자체가 그 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돼요. 그분에 의해서 장악당해야 되고 종속당해야 돼요.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되고, 신하가 되고,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왕은 이미 다 이루었대요. 하늘과 땅 사이에 구멍을 뚫어놨다는 겁니다. 주님이 길이 되고, 주님이 진리가 되고, 주님이 영생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 아닙니까? 그게 구원이거든요. 그럴 때 비로소 뭐가 보이느냐? 비로소 백성 된 우리도 주님의 몸에 장악되어서 주님의 눈에 보이는 주님의 적, 원수가 어떤 것들인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기 소유로 살려는 자가 몽땅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학력이든, 직업이든, 개성이든, 재산이 얼마나 많으냐, 빌라에 사느냐에 관계없이 자기 것으로, 자기의 의와 가치를 자기소유에 바탕을 두는 자는 모조리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육이 됩니다.
육은 영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영은 또 육과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메시아 오심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메시아오심으로 구원되느냐? 메시아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시거든요. 어떤 왕이냐? 이스라엘 왕으로 오셔요. 그러면 백성은 뭐냐? 왕에 종속되면 되지요. 그 왕의 백성이 되면 되는 겁니다.
이 사실, 이 기준에 의해서 호세아는 계속 북 이스라엘에 촉구하는 거예요. “네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끼리 살렵니다.”라고 하겠지만 우리끼리 살면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이 적으로 삼은 그 적이 안 보인다니까요. 그래서 자꾸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의지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애굽땅에서 조롱거리가 된 거예요. 그것도 단체로,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아이고, 우리가 힘으로 사니까 지들도 힘으로 살려고? 힘의 소유로 살려고?” 이렇게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면서 그 조롱거리 된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로 변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준비한 활, 그것은 쏘면 바로 앞에 톡 떨어져버려요. 고장난 활이에요. 아무 쓸모없는 활이에요. 그러면 그들이 왜 여호와께 돌아올 줄 모르느냐? 인간의 그 본성은 먹고 사는데 있어요.
14절에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양식 없다고 슬피 부르짖기는 하는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관심사가 내 한 몸 배부르게 사는데 관심을 두니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다 상실한 거예요. 어딜 봐서 이스라엘인가? 요새 말로 하면 어딜 봐서 네가 그리스도 몸이냐는 말이지요.
뭘 보고 네가 그리스도의 지체냐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보는 원수를 같은 원수로 보지 못하는데 어째서 자기가 자기보고 성도라고 우길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자기 밥 먹고 사는 그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데. 교회는 모든 인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다 이루었다는 그 십자가만 자랑하고 바라보는 그것이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만약 우리교회 예배참석 한 그 사람이 33번째 환자라고 칩시다. 교회는 폐쇄됨으로서, 진짜 교회는 그것마저도 주께서 조치한, 내 목숨조차도 내 소유가 아님을, 내 가치나 의미나 자존심은 물론이고 내 체면, 그동안 쌓아놓은 나의 잘남, 그런 소유도 없고 내 목숨마저 내 소유가 아님을 아는 겁니다. 그러려면 33번째 환자가 우리 교회에 방문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 이 교회라는 것이 바로 이방종교의 제단, 악마가 세운 제단인 것을 교회 다니면서 우리가 확인해야 돼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참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이미 개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그걸로 우리의 모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충족되었음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해 주옵소서. 더 이상 내 문제에 대해서 손을 떼고 이제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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