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덕
이근호 2020년 2월 5일
본문 말씀: 호세아 7:4-7
(7:4)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교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7:5)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7:6) 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 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7:7)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사람들은 매사를 자기로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판단을 내린 내용에 자신을 걸어보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가치로 여깁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시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인간을 사물화시킵니다. ‘화덕’으로 간주하십니다.
불 때면 벌겋게 달아오르는 화덕말입니다. 화덕은 본래의 용도가 있습니다. 기능이 있습니다. 빵을 굽는 겁니다. 즉 노림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북이스라엘은 전체가 화덕과 같은 분위기라고 보고 계십니다. 죄가 넘쳐남을 화덕으로 묘사하시는 이유가, 인간이 자체적으로 자제력을 발동할 수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는 인간 자체로 마감이 되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배후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어떤 영적인 본질, 혹은 어떤 영원성이 지닌 성격과 결부된 채 이 세상에 나타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 짓는다’가 아니라 ‘죄가 인간을 앞장 세워서 그 죄의 영원함’을 표출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화덕이 내부적으로부터 시작해서 외부적으로 그 화력을 나타내는 듯이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단독적으로 의미를 정해서는 아니되고 인간의 배후와 결부된 사항을 인간을 말해야 하는 원리를 말해줍니다. 로마서 6:17-18에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죄의 종’이든지 아니면 ‘의의 종’이라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이라는 표현으로 인간의 의미를 마감시킬 수는 없습니다. “너의 배후자는 누구야?” 혹은 “너는 주인님은 누구냐?”라는 질문이 성립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초적인 좌와 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사용하셨습니다.
인간들은 마치 화덕과 같습니다. 늘 벌건 상태는 아니더라도 발효가 된 반죽이 부풀어오르면 언제든지 다시 화덕에 불일 지필 준비가 되는 그런 화덕입니다. 즉 사람들은 늘, 한결같이 죄지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겠지만 화덕 자체가 항시 벌겋게 될 용도로 쓰여질 기구인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도 항상 ‘죄를 보여주는 죄의 종’의 기능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짓는다’가 아니라 ‘인간을 죄는 내어놓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북이스라엘은 선택하셔서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화덕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함입니다. 시편 71:20에 보면,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백성과 함께 있다는 주님이 고난을 같이 받거나 보이지 아니하면 결코 자기 백성들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왜 주님이 고난을 받아셔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이 인간 세상 자체가 죄를 벌겋게 발산하는 화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이 원래 이 기능으로 인하여 참된 메시야께서 이 세상 속에서 고난받는 분으로 나타남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 4:16에 보면,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에스더는 이미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즉 참된 죄의 기원은 오로지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고, 동시에 참된 의도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죄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의 죽음을 통해서 의를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더는 ‘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가 나오고 그의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사 입다는 이번 전쟁의 시작을 자신의 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해주신다면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입다가 상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아직 결혼하지도 않는 무남독녀 딸이 아무 사정도 모르는 채 반갑다고 아버지 입다를 제일 먼저 반깁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축제의 분위기에서 싸늘한 슬픔의 요소가 되어버린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입다의 딸은 이번 전쟁의 성격을 달리 해석을 내립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 희생물이 없는 승리는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될 인간은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준비한 희생물을 증거해야 하는 기능자로서 나타나는 겁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전쟁은 입다에서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다의 딸이 자진해서 희생물이 될 때에 비로소 전쟁의 비밀은 다 드러나게 됩니다.
왜 희생이 없이 구원이 없을까요? 그것은 모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화덕처럼 모든 의미와 가치를 자기에게서 시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희생되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본성이 참된 죄와 참된 의를 보여주는데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모든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했을 때, 나라는 수년 동안 가뭄이 들게 되었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사르밧 지방으로 가는데 거기에 어느 과부 모자(母子)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삶은 북이스라엘의 사정을 말해주듯이 ‘죽음’ 그 자체입니다. 마지막 양식을 먹는 순간, 엘리야가 가로챕니다.
이것으로 인해 그 모자의 목숨은 엘리야 목숨과 합류가 됩니다. 그리고 난 뒤, 그 가정에 밀가루가 계속 나오고 기름병에서 기름에 계속 채워집니다. 단순히 살림살이가 나와졌다고 생각하면 아니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복된 혜택을 받는지 그 내막이 밝혀져야 엘리야가 찾아간 취지가 마감됩니다.
갑자가 과부의 아들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다시 살리게 됩니다. 이처럼 아무리 모든 세상이 죄악된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한 통속으로 죄악된 천지가 배경이 되어 메시야의 고난이 의의 원천으로서 등장되는 겁니다. 이로서 성도는 자신의 마음 결심에 의해 사는 자가 아니라 배후에 계시는 예수님과 통하는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의 성과를 전파하는 사명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7강-호 7장 4-7절(화덕)2002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7장 4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1페이지입니다.
호세아 7:4-7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교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뿐이니라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 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화덕이란 빵 굽는 철판이지요. 또는 달구어진 진흙이나 달구어진 철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런 것으로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그 시작이 ‘나는 인간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의 판단은 내가 한다. 나는 인간이니까. 항상 내게 옳고 내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나는 움직인다. 그만한 권한은 우리에게 있다.’라고 자신들이 인간이라고 여기고 그리고 백성들이나 그의 지도자들도 각자 자신들을 인간이라 여깁니다.
이스라엘 자체도 따지고 보면 몸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어요. 각자 자기의 살 궁리나 행복할 궁리를 쉬지 않고 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인간이다, 라고 여기는 것을 뭘 로 바꾸냐 하면, 사물로 바꿔요. 인간이었을 때는 항상 생각이나 행동의 출발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내 생각에 의해서 내가 움직인다.’고 항상 출발점이 인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출발해요.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고 다 생각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뭔가 해보자.’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판을 사물판, 물체판으로 바꿔서 사물로 재현해버리고 표시를 해버리면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아니고 물체덩어리지요. 물체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뭘 표현하려고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내가 자꾸 인간이라고 우기는데 내가 보기에는 죄라는 것에 놀아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하여 놀아나고 있고 너희들의 움직임은 곧 죄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사물을 통해서 어떤 발현되는 움직임까지 다포함해서 설명을 할 때 화덕, 그리고 발효된 빵, 이런 사물이 적절한 거예요. 왜냐하면 화덕, 쉽게 말해서 요새의 철판구이 할 때의 그 철판이지요, 벌겋게 달궈진 철판이라든지 벌겋게 달궈진 그 진흙덩어리, 그 화덕은 그냥 사물이 아니에요. 불을 지피면 여기에 벌겋게 달아오르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달아오르니까 화덕의 본래 기능대로 움직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화덕자체가 해야 될 그 기능이 움직임으로서 바깥에 드러나는 점에서 화덕이라는 것이 아주 적절한 묘사가 된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그냥 집안에 가만있는 것이 죄가 아니에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전염된다고 집안에 그냥 가만히 있는데 그것은 죄가 아니지요.
죄는 설치게 되어 있고, 어떤 작용을 하게 되어 있고 그 영향은 퍼지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자신도 모르고 그 죄가 발산되는 그 움직임을, 불을 때면 화덕이 점점 더 벌게지는 그 화덕의 모양새, 또는 변화, 이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화덕을 통해서 그 당시 세상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화덕의 세트로 뭐가 있어야 되느냐? 화덕이라는 것은 그냥 화덕이 아니고 빵을 굽는 기능이 있어야 되지요. 그러면 이제 빵을 굽는데 그 빵은 어떤 빵이냐? 발효가 되는 겁니다. 누룩을 넣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죄라는 것,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들은 지금 죄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할 때 화덕을 가지고 묘사하고 빵 가지고도 묘사하고요. 빵이 부풀어지는 것을 가지고.
그러면 빵과 화덕 사이가 어떻게 연결되느냐? 화덕에 불을 지르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면 죄가 시작되는 사건은 화덕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여기에 불을 피우는 작업이 있게 되고 맨 날 불을 피우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가 유념해서 묘사하는 것이 뭐냐? 맨 날 불을 피우는 것이 아니고 마치 화덕의 불을 처음 피울 때가 있고, 그 다음에 빵을 누룩 넣어 반죽해서 밤새도록 빵이 부풀어 오르도록 기다렸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오, 방이 부풀었네.’ 그 때 다시 한 번 화덕에다 불을 피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간격이 생기는 겁니다. 인터벌이 생기는 거예요. ‘맨 날 죄 짓는 것은 아니다.’라고 사람들은 변명을 하는데 그 점은 맞아요. 그런데 맨 날 죄짓는 것이 아닌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괜찮은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화덕이라는 것도 맨 날 불 피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덕이 맨 날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더라도 화덕은 빵을 굽는 그 노림수를 갖고 있는 기능.
“빵아. 그냥 내 위에 붙어라.” 철판 같으면 “이 벌건 철판에 붙어라.” 항상 화덕과 철판의 노림수는 뭐냐 하면, 빵을 구워내겠다는 일념으로 그 장치라는 것이 성립되어 있는 겁니다. 자, 말씀을 쉽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당시의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본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어떤 기능을 보여줘야 돼요.
인간은 어떤 용도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북쪽 이스라엘에 있는 인간들의 용도가 뭐냐? 죄를 보여주는 용도로서 지금 북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이겠는가? 우리 가운데 의인은 몇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마태복음 5장의 팔복에 나오는 말씀처럼, 심령이 애통하고 의에 굶주린 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말이에요. 전부 다 한통속이라는 말이지요. 모두 다 화덕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화덕은 빵을 굽는 용도에요. 노림수를 갖고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만나면 서로가 갖고 있는 본래의 기능, 죄를 발산하는 기능에 그들은 열중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심취되어 있어요.
예외가 없어요. 너도 나도 다같이 마찬가지에요. “맨 날 죄짓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항상 예비적이에요. 대비되어 있어요. 화덕은 빵 굽는 노림수를 멈춘 적이 없습니다. 죄를 노리던 죄를 짓든 어쨌든간에 죄와 무관한 시간은 없다는 말이지요. 그걸 북이스라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걸 증명해내는 겁니다.
아무도, ‘우리는 죄를 발산하는 화덕’이라고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것이 만약에 문제가 된다면 이 이스라엘이라는 택한 나라, 또 그들이 사는 땅도 자기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이거든요,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이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 모른다는 말은 죄에 푹 젖은 거예요.
죄에 푹 젖었다는 말은, 개개인이 잘났는지 못났는지를 따진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되고요, 모두 일치단결해서, 하나가 되어서, 어떤 사람이 쉬엄쉬엄 죄를 짓든, 어떤 사람이 노골적으로 죄를 짓든, 그 인터벌, 그 간격이 있더라도 항상 마음자세는 ‘오늘도 무슨 죄를 어떻게 지을까?’라는 그 생각 외에 인간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화덕의 기능과 동일하다.
인간은 사물이 됨으로서, 하나님이 표현하도록 준비된 사물이 됨으로서 진짜 자기의 본질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화덕이라는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보게 되면, 화덕에서 불을 질러버리면 화덕은 벌겋게 달아오르게 되어 있지요. 그래야 빵을 구우니까. 벌겋게 달아오른다는 이 말은 화덕본인이 자기 내부에서 자기가 어떻게 누를 수 없을 정도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대체가 안 될 정도로 그냥 서서히 달아오르는 거예요. 화덕의 특징입니다.
저는 이걸 인간이 갖고 있는 영적인 기능, 또는 영원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냥 인간으로 다루고 이야기해버리면 “하나님 잘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짓 안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정신 차리겠습니다. 내가 제대로 정신 차려서 일하게 되면 내가 그다지 나쁜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자기가 출발점이기 때문에 자기의 각오와 결심에 따라서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자꾸 우기게 되는데 인간을 사물로 바꿔버리면 사물이라는 것은 그 고유의 기능을 스스로 사물이 저지할 수가 없어요.
벌겋게 달아오르는, 죄가 무르익고 달아오르는 이러한 본래의 욕구와 욕망을 어떻게 본인이 말릴 수가 없어요. 그냥 화덕은 화덕다워야지요. 뻔한것 아니겠어요? 저는 젊었을 때 마트에서 여러 가지 헷갈리는, 뭐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만, 나름대로 심각한 것이 있었는데 뭐냐? 겨울철에 호빵이 나오거든요. 이게 호빵인지 호만두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어요.
쪄서 쪼개봐야 알아요. 야채가 들어 있으면 호만두고 안에 팥 앙꼬가 들어 있으면 호빵 되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호빵인지 호만두인지 몰라요. 그런데 그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일괄적으로 알려줍니다. “너는 화덕이야. 다시 말해서 네가 죄를 조절할 수 있는 입장이나 처지가 못돼. 죄를 지을까 말까를 내가 알아서 조정하겠어. 라는 그것이 안 돼.” 그럴 것이면 화덕이라고 표현 자체를 안하지요.
이것은 인간 본인이 자기를 관장 못할 정도로 영적인 것, 다른 말로 하면 영원한 것이 인간 속에 이미 인간을 다스리고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영원함과 관련된 의미를 하나님께서는 화덕이란 용어를 쓰시면서 부여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아무리 과학을 연구해 봐도, 인간을 해부해서 인간의 내장을 조사해봐야 거기에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죽었네. 한줌의 재가 되었네.’ 그걸로 끝이에요. 어떤 과학자도 왜 인간은 재가 되느냐? 그걸 규명하고 설명한 과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설명할 수 없어요. “인간은 늙으면 죽는다. 몸 아프면 죽는다. 병균 들어가면 죽는다.” “왜 죽는데?” 몰라요. 왜 죽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 영역 밖이다.” 우리의 영역 밖이라는 말을 쉬운 말로 하게 되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영역 밖을 떼 놓고 여기까지만 안다고 하는 것은 반칙입니다. 왜냐하면 영역 밖이, 요만큼 안다는 과학에 대해서 뭐라고 지적을 하고 판단을 할지를 본인들이 모르고 있거든요. 초등학교 2학년과 5학년 애들 둘이 서로 막 잘났다고 시합을 해요. 누가 트롯을 잘 부르는지 시합을 한다고요.
저희끼리 있을 때는 서로 잘났다고 판정을 할 거예요. 그러나 판정관은 그들이 아는 범위를 넘어선 쪽에서 판정이 내리게 되는데, 인간이 무엇이냐를 과학적으로 아무리 규정을 해도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보는 그 안목에서 볼 때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지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없고 죄를 발산하는 하나의 사물, 또는 도구, 수단, 그래서 화덕, ‘너 나 할 것 없이 포괄적으로 말해서 한통속으로 죄를 보여주는 기능자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여주는 기능, 수단에 불과한 거예요.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다 그래요. 그래서 신약에 오게 되면 신약성경이 굉장히 깊이 있고 심오하고 어려운데요. 로마서 6장에서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걸 죄의 종, 또는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사람으로 보지를 않아요. “너는 죄와 관련되어 있나? 아니면 의와 관련되어 있나?”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걸 달리 하면 “너는 죄를 표현하는 수단이냐? 아니면 의를 표현하는 수단이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또 달리 하면 “너는 지옥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천국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느냐?” 그렇게 묻는 거예요. 로마서 6장 20-22절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전에는 죄의 종이더니 이제는 의의 종이라고.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인간이라는 말이 인간을 대표하지는 않고요. 대표자는 인간배후에 따로 있어요. 의가 인간을 대표하고 죄가 인간을 대표합니다. 진정하게 영원한 것들, 천국과 지옥이지요, 영생과 그리고 영원한 저주지요, 인간을 넘어서는 진짜 영원한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인간일 뿐이에요. 그러나 이 세상 모든 학문과 과학은 출발을 뭐부터 하느냐? ‘나는 인간이다.’ 부터 출발해요.
제가 아주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주 쉽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이란 것은 없는 거예요. “너 누구 종이야?” 이렇게 물어야 돼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것은 “당신은 지금 무슨 기능을 보여줍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로마서 6장에서. 그래서 신약성경이 사도바울의 편지부터 시작해서 이게 어려워요.
사람들은 신약을 보면서 ‘나 인간인데 어떻게 구원받지?’ 이렇게 출발하게 되면 모든 해석은 다 엉터리해석이에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성경이 아닙니다. 배후자를 알려주는 것이 성경이에요. 나의 배후자는 누구지? 나의 주님은 누구지? 나의 주인은 누구지? 너의 주인은 누구지? 까보자 그 말이에요. 주민증 까듯이 한 번 까보자. 네 소속이 어디냐를 한 번 까보자는 그 말이에요.
네 소속이 북한 인민군인지, 아니면 남쪽의 패션회사 여사장인지 한번 까보자는 그 말입니다. 인민군 중대장인지, 남쪽의 재벌 여사장인지, 한 번 까보자는 그 말입니다. 여러분 소속이 어디에요? 이것은, 나는 뭘 했습니다, 를 묻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어떤 영원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하는 것을 묻는 거예요.
출애굽기 3장 2,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나타날 때 사물로 나타난 것이 나와요.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불꽃으로 나타나요. 떨기나무에 붙어 있는 불꽃으로 나타났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그 광경에 졸도할 정도로 놀라버린 모세가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그 현장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타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참 멋진 표현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인간들이 아는 수준은요, 이렇게 뭔가 불이 탄다는 것은 불의 재료가 있어서 그 재료가 소모되면서 소모된 만큼의 열량과 에너지가 불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두 종류의 연탄이 있거든요. 시커먼 연탄과 하얀 연탄. 차이점이 뭐냐? 하얀 연탄은 다 탄 연탄이고 시커먼 연탄은 아직까지 속에 에너지원이 들어 있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연탄을 다 태우면 하얗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들이 아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한계성 있는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떨기나무는 불타게 되면 점점 그 나무가 재가 되어야 할 텐데 어떤 영적인 요소, 영원한 요소가 함께 붙어 있다면 분명히 불은 붙는데 재료가 무한정이라.
재료가 소모되지를 않아요. 이것이 이 땅에서의 영적인 어떤 묘사를 할 때 동일한 표현을 인간에게 쓸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죄에 속한 인간은요, 영원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저주의 요소만 영원토록, 끊임없이 나와요. 그리고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짓을 하든 간에, 남편이 몇 명이든 관계없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그래서 이 땅에서 ‘주의 백성은 영원하다. 예정된 자는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용어가 그게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이 땅에서 그걸 해석하는 사람은, “내가 예정되었어요.”라고 또 출발점을 나부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영원히 예정되신 분이에요. 아버지로부터 택함 받은 사람인데 거기에 낄 자리 안 낄 자리 분간도 못하고 “내가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하고 들어가지요. 내가, 나라는 인간이.
성도의 영원한 구원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선택을 받은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구원되었다는 그 주가 되심을 증거하는 용도로 주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성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자리에요. 성도는 홀로 있는 자리가 아니고 주와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야 의의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독적으로 의인 아닙니다. 의의 종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택한 백성인 북쪽 이스라엘을 온천지가 죄 판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의도로 자기가 택한 백성인 북 이스라엘을 완전히 의인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죄밖에 없는, 그것도 본인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벌겋게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영원한 죄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통해서 묘사하는 이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너 말고, 너를 조종하는 그 정체, 영원한 영적정체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해서 죄의 본체를 그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그 영원성을. 까불거리는 그 개인 말고, 개인이 뭘 잘했니 잘못 했니, 울고불고, 그것 말고 영원함, 너도 모르는 그 네 속에 있는 영원함을 너를 화덕으로 간주해서 그 화덕을, 통해서 벌겋게 달아오르는 그 모습을 내가 보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북 이스라엘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도 없어요. 그냥 본능적으로 벌개요. 죄로 인하여. 그리고 그 죄는 항상 노림수를 갖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볼 때 서로 잡아먹으려는 그 노림수. 그게 북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우리 인간세상 아닙니까? 한시도 죄가 멈출 수가 없지요. 화덕인데요. 화덕에서 뭐할 거예요? 거기서 스케이트 탈거예요? 그 벌건데서.
화덕은 화덕다워야 됩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화덕되게 하시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죄의 종이 되게 하신 거예요. 아담자체가 그래요. 그것은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시는가? 거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깊은 뜻은 시편 71편 20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 번 읽어드립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누가 우리를 구원하느냐 하면, 먼저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죄가 화덕으로서 벌겋게 달구어질 이유가 충분하지요. 그 달구어진 화덕에 누가 누워버리면, 죄인 줄 알면서도 그 죄 위에 누가 거기에 뛰어드시는가?
장차 우리의 주님이 거기에 뛰어들지요. 벌겋게 달구어진 죄밖에 없는 곳에 뛰어들지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없는 그 곳에. 아무도 부르짖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마태복음 5장에, 의에 주리고 굶주린 자, 의가 없어서 애통하는 자, 아, 정말, 이 시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돼요. 왜? 영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의가 없는 세상을 애통해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월급 떼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셨는데 그 십자가 지신 그 피를 안경에 발라버리고 그 피 묻은 안경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거예요. “누구야? 우리 예수님 죽인 자들이.” 이렇게 세상을 보는 거예요. “우리 애꿎은 하나님을 너희들이 왜 죽였어? 대체 네 속에 무슨 괴물이 있어서 하나님을 이렇게 죽이느냐는 안목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오늘 본문에 호세아같은 경우지요.
사람들은 사람이 마냥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오늘 호세아 본문에서 아주 특징적인 것이 뭐냐하면, 이 화덕이 늘 벌겋게 달궈지지 않고 쉬는 타임이 있다는 거예요. 화덕 벌겋다. 그 다음에 일단 화덕에 시동은 걸어놓고 반죽이 제대로 발효되면 곧 2차적으로 화덕의 불을 일으킨다. 그래서 어떤 텀을, 빵 굽는 자가 어떤 텀을 마련해줘요.
그 텀은 뭐냐? 왜 이 세상에 전부 죄밖에 없는가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죄 있는 것은 죄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고 그것과 누구와의 매치, 누구와의 만남을 드러내기 위한 바탕으로서의 죄가 깔려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해도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되실 것이니까 지난 겨울수련회 강의의 한 대목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에스더 4장에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했어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그 다음에 3일 뒤에 예복 입고 남편에게 나아가지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갔다가 죽어도 할 말이 없어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에스더가 각오를 한 순간 이미 에스더는 죽은 자에요. 왜 성경에서 에스더로 하여금 죽은 여자로 간주해야 되는가?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죄, 인간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인간 속에서 올라오는 죄라는 영적인, 저주라는 영적인 수단으로서 인간이 사용되는 그 인간 배후의 영원한 괴물, 그걸 역사적으로 끄집어낼 때는 오직 죄 없는 죽음, 하나님의 언약의 죽음과 만나지 아니하면 죄의 원천, 죄의 기원, 그것이 밝혀지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신 것은 죄가 뭐냐는 겁니다. 죄가 어디서 나왔느냐를 밝히는 거예요. 화덕은 벌겋지요. 어떤 사람은 술을 딱 한잔 마셨는데 얼굴이 벌겋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너 소주 다섯 병 마셨지?” 이렇게 하는데 그 사람은 체질상 한 잔 마셔도 벌개요. 한 잔 마시고 음주측정해도 수치가 안 나오는데 얼굴은 벌개요.
모든 인간이 왜 죽는가? 왜 죄로 벌개서 죽는가? 왜 죽는가? 죽는 본인도 몰라요. 우리가 왜 죽는지를 몰라요. 왜 우리가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지 우리가 몰라요. 그것을 알려주마. 어떻게? 이 죄와 만나게 된 죄 없으신 분이 죽음을 가지고 죄와 만남으로서 비로소 죄의 정체가 밝혀지는 겁니다.
실제로 이것의 실습에 들어가는 것이 사사기 11장 37-40절에 나옵니다.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 하겠나이다 이르되 가라하고 두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입다라는 이 깡패가 싸움질 잘하고 용감무쌍했던 모양이지요.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침범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입다라는 깡패와 그 패거리들, 예컨대 마장동파하고 계약을 했어요. ‘나라를 구하면 너를 왕으로 삼아서 우리의 지도자 되게 해준다. 기생자식이라는 것은 문제 삼지 않고 무조건 우리 지도자 되게 한다.’ 지금 나라 구하는 것이 급하기 때문이지요.
오케이, 해서 입다가 자기 마음의 각오를 한답시고 일종의 객기를 부렸어요. “나를 택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힘입어서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내 앞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입다가 그런 사고방식으로 한 것은, 그 당시 그모스라는 암몬신에게 닭이든 소나 개든 사람이든 다 바치는 그런 것들을 많이 봤어요. 그런 우상 분위기에서 신에게 제물을 드리면 신은 감사하게 받고 복을 준다는 분위기에 있었고, 입다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들었고.
그래서 입다는 출발을 누구부터 하느냐? ‘하나님께서 내가 승리하도록 힘을 주시면’ 이 말자체가 자기가 중심이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나라는 인간이 중심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승리를 해버렸어요. 승리하고 난 뒤에 닭이나 한 두어 마리 뛰어나올 줄 알았지요. 집에서 키우던 양이나 나올 줄 알았지요.
세상에, 입다 머릿속에서 도저히 예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딸, 그것도 딸이 시집을 가서 손자라도 있는 것도 아니에요. 시집가지 않는 처녀 딸이 아버지가 어떤 서원을 했다는 것도 까마득히 모르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수고했다고 확 뛰어나왔을 때 입다는 기절초풍합니다. 참, 좋은 일 있을 때 낭패스런 일도 같이 생긴다고,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액운이 끼어들 줄 상상도 못했지요.
입다가 신에게 제물을 바치겠다는 것을 주저주저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나님, 미안합니다. 취소할게요.” 이럴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입다의 딸이 “아버지, 주저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의 성급함을 탓하지 않고, 이것은 나를 제물로 바쳐서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직접 잇겠습니다. 아버지의 승리가 아니고, 아버지의 객기나 용기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나는 제일먼저 뛰어나오게 되어 있고, 아버지는 그냥 전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죄밖에 없는 이스라엘, 그 지독한 죄한테 당하는 것을 누가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다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도 개판이고 저쪽도 개판이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것은 이스라엘 요소 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질만한 이유가 담겨 있을 겁니다. 그것을 나의 희생이라는 것으로 표현해드리겠습니다.” 하고 자기 죽는 것을 진짜 하나님의 전쟁으로 여기고 죽어버리지요.
그 딸이 죽는 순간 입다는 없습니다. 입다는 이제 없어요. 입다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객기를 부린 거예요. 그 출발점이 나 잘하겠습니다. 나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러나 입다의 딸은 출발점을 나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필연에 의해서,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입다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물이 된 것을 저는 도리어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이게 바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 신약의 로마서의 말대로 하면, 나는 내 뒤에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뒤에 천국이 있다. 그 천국과 나 사이의 연결점에 희생물, 죽어도 괜찮다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묻어 있는 밧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이 땅에는 일괄적으로 뒤에 지옥과 관련된, 죄와 관련된 화덕이라는 인간세상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것뿐만 아니에요. 열왕기상 16장에, 아합이라는 북쪽 이스라엘왕이 등장하면서 아주 엉망이에요. 16장 32, 33절에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그 뒤에 17장에 보면 길르앗에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사르밧에 과부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어요. 그 지역에 수 년 동안 여기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온 이스라엘이 화덕이에요. 전부 다 죄로 무르익었어요. 죄로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데, 약속의 땅에 사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그들, 애굽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그들이 왜 벌겋게 화덕이 되었고 죄를 지었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뭘 끄집어내기 위함이냐? 도대체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 이 인간 속에서 어떻게 구원받는 인간, 천국갈 수 있는 인간이 되느냐? 그 요소는 바로 죄밖에 없는 그 가운데서 선지자가 다가가는 그쪽에 있는 거예요. 사르밧 과부집이 굶어죽게 되었어요. 과부와 아들이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엘리야 선지자가 그걸 잽싸게 빼앗아서 날름, 날름 선지자 엘리야의 자기 입에다 집어넣어버려요.
양식을 인터셉트 한 것이 아닙니다. 사르밧 과부와 아들의 생명도 선지자가 자기 입에 집어넣은 거예요. “너 죽어도 나랑 같이 죽자. 그냥 죽으면 안 돼.” 그것은 죄로 죽는 거예요. 참, 이쯤에서 아까 읽었던 대목을 다시 읽을게요. 시편 71편 20절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라고 했거든요.
왜 고난이 없이는 우리가 살수가 없느냐는 그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희생이 되지 않고서는 왜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이 없느냐? 이게 복음이잖아요. ‘내가 알아서 잘 산다.’ 이것은 복음 아니에요. 어떤 분이 오셔서 나밖에 모르는, 화덕 같은, 죄밖에 모르는 나에게 알아서 대신 고난 받으시고, 그 고난 받은 분과 내가 만남을 이루게 해서 나 때문에 네가 살았다는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 방식으로 구원돼요. 그래서 엘리야도 마찬가지지요. 날름, 날름이 중요해요, 날름 먹어버려요. 날름 먹음으로서 그 과부와 아들의 목숨은 엘리야의 목숨과 결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가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여기서 영원성이 보장되지요. 열왕기상 17장 16절,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어떤 영원성, 부어도, 또 부어도 계속 나오는 무한, 영원성이 나오지요.
사르밧 과부는 ‘아이고, 지나가는 귀인을 만나서 내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되어버리면 진짜 죄의 보편성이나 영원성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나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렇게 돼요. 그 다음에 어떻게 영원성을 보장하느냐? 과부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얼마 후에 죽어버려요. 엘리야한테 혜택을 받았던 사르밧 과부는 화를 내지요. 당신이 괜히 와서 내 아들이 죽었다고.
그런데 엘리야가 다시 그 죽은 아들을 침상에 뉘이고 다시 살려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들이 먹고 있던 그 밀가루, 계속 나오는 그 참기름 병, 누가 죽음으로서, 그 대가로서 영원한 생명으로의 표시로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누가 죽었느냐? 당신 아들이 장차오실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용도로 당신 아들이 죽고 주의 종 엘리야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죽으면 죽으리이다.’ 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이 죄로 관영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죄가 관영되어야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고요, 필히 의인은 없어야 돼요. 모두 죄가 되어야 되고요. 그래야 누구만 주목하느냐? 유일한 희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주목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나는 인간이다. 내가 출발한다. 내가 모든 생각과 행동의 출발이다.’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는 주님의 의의 수단으로서만 이 땅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화덕이었습니다. 본능 자체가 죄짓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웬 기적인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이미 우리의 운명은 의의 종으로 확증이 되었사오니 이 확증된 우리의 기능과 용도가 주님, 이 땅의 것으로 가려지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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