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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6:7-11 / 언약이 끊어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6:7-11 / 언약이 끊어짐

정인순 2020. 1. 22. 21:26

음성     동영상 Youtube

언약이 끊어짐


이근호
2020년 1월 22일             


본문 말씀: 호세아 6:7-11

(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6:8)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6: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6: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6:11)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존재의의는 ‘언약 끊어진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시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 주심이 마치 인간 구원을 위한 것처럼 호도합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생각 자체가 ‘언약 끊어짐’을 증명해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남북 두 나라로 나뉘어지게 하시는 것과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하는 것도 ‘언약 끊어짐’의 여파입니다.

언약에서 끊어진 인간들의 특징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더 우선시 한다는데 있습니다. 언약이 끊어졌기에 인간들은 서로들에게 더 의존합니다. 원래 창세기 1장부터 이 세상은 ‘혼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질서는 나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질서 있음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성을 마주하는 희열과 감격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즉 질서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혼돈이 당연한 사태입니다. 그러나 언약이 끊어진 이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 하는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약이 끊어졌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숨이 끊어져야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술꾼에서 있어 술 끊어지면 죽을 맛인 것처럼, 언약 끊어지면 당연히 죽은 겁니다.

따라서 참으로 ‘언약 끊어짐’을 인간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주변에 누가 죽게 되면 “이제 죽었어?”라고 반문을 해야 합니다. 특히 연세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능히 예상이 되지만 젊디 젊고 장래가 기대되고 총망받는 자가 졸지에 죽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되게 애석해 합니다.

마치 안 죽어도 될 자가 죽은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죽어왔기에 “이제 죽었어?”라는 태도가 바른 태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단정하시기를 ‘인간은 언약이 끊어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을 만나든지 대하는 태도 자체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두 언약이 끊어진 자들이기에 “너는 왜 인간이 아닌 지, 내가 백 가지 증거를 찾아내겠다”라는 마음 자세로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주눅들지 않고 심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타인에게 아부해서 자기 잘 궁리를 찾는 비굴한 삶이 될 뿐입니다. 즉 언약적으로 세상을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호세아 선지자는 섬뜩한 체험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치 사파리 관광에서, 남들은 다 안전한 차에 올라탔건만 호세아 홀로 맹수들과 들판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끔찍한 체험일 겁니다. 즉 호세아는 지금 ‘언약 끊어진 무질서’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통 우상숭배로 둘러싼 현장인 것으로 제대로 고발할 수가 있는 겁니다. 

즉 ‘언약이 끊어진’ 그 단면은 그냥 곱게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반대하는 행위들이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언약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인간들은 자신과 타인을 조정하는 식으로 매사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예가 열왕기상 12:28-31에 나옵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여호와 종교를 모방토록 합니다. 사람들이 평소하던 대로 그들의 마음속에, ‘신을 섬겼다’는 티만 내게 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독려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약 끊어졌음’을 자신의 신앙 안에 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니 이단인 겁니다.

본인들이 원하는 바가 곧 하나님이 원하는 바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신앙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에서 끊어진 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언약대로 바르게 사는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언약에서 끊어진 자’기 필요합니다.

질서에 앞서 혼돈이 필요한 겁니다. 이 혼란과 혼돈의 진수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일찍이 채택하셨습니다. 사울왕이 그 대표적 인문인데요 사무엘상 10:20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나서시어 이스라엘에 왕을 채택하십니다. 철저하게 뽑기로 인물을 찾아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왕 채택에 있어 인간의 그 어떤 영향도 배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뽑혀나온 왕이 사무엘상 15:23에서는 일방적으로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인 겁니다. ‘왜 이스라엘은 말씀을 잘 지켰나?’가 아니라 반대로 ‘왜 이스라엘은 말씀을 버려 그들이 버림을 받게되었나’를 시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민 중이 미리 채택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약 거짐에 있지 인간 건짐에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언약이나 말씀보다 인간 구원이 우선이다 고 여기는 것은 전형적으로 ‘언약에서 끊어져’ 죽은 자들의 공통적인 심성입니다. 예레미야 36:22-23에 보면,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신하 여후디를 시켜서 예레미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고서는 한편 두 편 읽기를 마치자 마자 그 성경을 칼로 두루마리를 잘라서 즉석에서 화롯불에 집어넣습니다. 이같인 혼동이 바탕으로 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십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이 세상 그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는데 열심이었던 그들 손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살해당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참되게 ‘언약이 이어진 인간’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씨는 동일하되 밭이 차이로 인해 오직 하나의 밭에서만 열매가 맺혀집니다.

모든 인간이 언약에 끊어졌으므로 모두 우상숭배자일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시고 그 조성하시는 땅에서만 씨앗되는 말씀을 받아 열매를 맺히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5:1-2에 보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포도 수액이 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포도나무에 열매가 병행해서 맺어집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되기에 참으로 천국 가는 사람은 인간이 이론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요소를 지니고 있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의 말씀보다 세상에 더 휘말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5강-호 6장 7-11절(언약이 끊어짐)

200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6장 7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1페이지입니다.

호세아 6:7-11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여기 나오는 지명들이 있습니다. 길르앗 나오고, 세겜 나오고, 나라이름도 나와요. 이스라엘 나오고, 유다 나오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지명과 나라 이름은 오직 하나의 단어를 설명하기 위한 겁니다. 그 하나의 단어가 7절에 나옵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아담은 사람이지요. 사람처럼 언약을 어기고. 그것을 설명하고 과연 사람들이 언약을 어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나라로 하여금 행음하게 하시고, 제사장들이 살인하게 하고, 이스라엘을 더럽히도록 그렇게 지켜보고 계신 겁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호세아 선지자가 해요. 그 당시 호세아 선지자 본인이 살아왔던 그 태도가 뭐냐 하면, 질서 속에서 무질서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질서를 당연시하는 체험을 한 겁니다. 무질서를 당연시하는 체험. 오히려 질서가 있는 것을 희한한 일로 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약을 어겼으니까. 언약을 어겼다는 당연한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규정을 하신 거예요.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이 호세아 계시를 통해서 “인간은 이미 언약을 어겼다. 그래서 인간들아. 언약을 어겼다는 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너희 인간들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들아. 나쁜짓 하지 마라. 인간들아 잘못 살지 말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잘못된 인간들을 원하는 겁니다. 잘못된 인간들. 반갑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도 원한다고 하지 마세요. 이미 인간은 언약을 위반했어요. 그 값을 해야지요. 위반했으면 위반한 티를 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게 무질서에요. 막사는 겁니다. 무질서한 존재가 어줍지 않게 질서를 논해요? 주제파악도 못한 거예요. 호세아는 무질서를 정상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라가 엉망이니까요. 그걸 당연시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평원에 맹수가 살고 있을 때에 거기에 사파리 여행가지요. 제일 상상하기 겁나는 것이 뭐냐? 차 안에서는 안전한데 만약에 내가 차 밖에 나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사파리 공포체험입니다. 남들은 안전하게 차 안에서 구경하고 있는데 나 혼자 맹수들, 사자와 호랑이들 있는데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파리 차가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빨리 타야 되는데.

지금 호세아의 위치가 그래요. 호세아가 지금 사파리 공포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무질서속에 그냥 뚝 떨어져 놓여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호세아처럼 무질서를 기정사실로 여겨줘야 제대로 이세상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 다시 말해 언약이 끊어졌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사람의 죽음이란 숨 끊어진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죽음이란 언약이 끊어진 것을 말해요. 술꾼들이 술 끊어졌다고 하면 그것은 죽은 겁니다. 인간에게 언약이 끊어진 것은 자기가 살았다고 우겨도 죽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누가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지 마세요. 연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미리 예상했지만 그것 말고, 최근에 별세한 남 보원 그런 경우 말고요, 진짜 안죽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 미리 상상해보세요.

방탄소년단. 그들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젊은 사람, 전 세계의 아미들, 팬들은 기절을 할 거예요. 세상 끝났다고. 그러나 호세아의경우는 뭐냐 하면, ‘아직도 살았나? 이제 죽었어?’ 원래 죽은 거예요. 언약 깨지면 원래 죽은 거예요. 미리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 주위에 20대, 30대, 40대까지 봐줄게요, 그런 사람이 어제까지도 전화통화 했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이제야 죽었어?’ 이게 호세아의 마음이에요. ‘이제야 죽었단 말인가? 진즉 죽어야 될 것을.’ 그렇게 세상을 죽음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은 곧 자기자신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겁니다. 즉 언약적관계성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호세아의 입장으로 바꿔서 이 본문을 봐야 됩니다. 제가 하는 말이 과한 말이 아니에요. 누가복음 12장 19절에 보면, 어떤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가 너무 잘 되었어요.

수확물이 감당이 안되어서 창고를 크게 지었어요. 그래서 창고에 가득 찬 그 곡물만 봐도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고 만족스러웠는지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보고 자랑질을 합니다. ‘내 영혼아 이정도면 내가 사람값을 하지? 우리 이제는 넉넉하게 오래간다. 편안히 쉬고 먹고 즐기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누가복음 12장 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걸 특수한 상황으로 제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걸 보편적 상황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무질서가 기본이에요. 질서가 기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서가 잡히고 잘 돌아가는 것을 희한한 일로 봐야 돼요.

왜 그런가 하면, 처음에 천지창조 할 때 창조의 가치는 무질서를 바탕으로 깔아야 “빛이 있으라.”의 그 즐거움이 있는 거예요. 그 희열이 있는 거예요. 창조의 희열은요, 무질서를 바탕으로 깔아야 돼요. 부부가 너무 좋게 지내면 안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매일같이 싸우고, 찢고, 던지고 난리를 치다가 어느 날 조용하면 “우리 이상한 부부지 그지? 이럴 수는 없어. 오늘도 싸워야 되는데, 서너 시간은.” 둘 다 죽은 자니까요. 둘 다 무질서니까. 그게 바로 마땅한 일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돌아와서 이제 우리가 정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망하도록 방치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나왔어요. ‘이미 모든 인간이 언약이 끊어져 죽었고, 무질서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특별한 나라 이스라엘을 채택했다. 택해서 과연 그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과연 언약에서 끊어짐이 무엇인가를 아주 충실하게 제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인식만 살짝 바뀌어도요, 우리가 세상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늘 허리 낮추고 쭈그려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언약이 끊어지게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은 뭐냐? 이것은 더 쉬워요. 여러분이 누굴 만나든, 누구와 대화를 하든 그 사람에게서 이것만 찾으면 됩니다. ‘네가 왜 인간이 아닌가만 증명해 줄게.’

마음가짐 자체가 ‘왜 네가 인간이 아님의 증거를 찾아주마.’ 이것이 호세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입니다. 사람을 볼 때 장점 단점 이것은 제쳐놓고요. ‘네가 죽은 인간인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게.’ 이런 마음가짐으로 여러분이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고, 혹은 김 정은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인간이 아닌 이유를 내가 객관적으로 찾아낼게.’

특히 존경한다고 소문난 사람에게 그런 마음자세와 태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학교 가셔서 우리 담임선생님이 왜 인간이 아닌가를 열가지, 백가지를 찾아내는 거예요. 그게 자유 아닙니까? 뭐가 자유겠어요? ‘저 사람에게 잘못보이면 나는 죽는데.’ 이것은 아니거든요. 이것은 아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이야기가 성경적으로 하면 굉장히 간단한데 실제로서는 복잡해요.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언약이 끊어졌기 때문에 끊어진 사람다운 마음을 품고 이 세상을 대해요. 언약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이렇게 돼요. 사람을 만날 때, 네가 사람이 아닌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하고 나하고 서로 원하는 것을 얻자, 그렇게 나와요. 윈윈, 서로가 승리하는 것을 찾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언약이 끊어진 사람이 이 성경을 읽고 천국에 가려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네가 원하는 것을 잘 조정하려고 애를 써요. 그게 어떤 방식이냐 하면, 구원은 무엇인가 설명하려고 해요. 복음이 무엇인가 설명하려고 하고, 성경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자꾸 설명해주려고 하는 겁니다. 설명해주겠다는 것은 뭐냐? 납득시키겠다는 것이고 설득을 시켜서, 너는 나에게 설득 받고 천당 가고, 나는 너를 설득했다고 주의 종으로 새삼 확인받고 서로가 좋지 않으냐 하는 겁니다.

그 모습, 마음자세와 삶의 태도 자체가 언약에서 끊어진 티를 톡톡히 내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하고는 거래 안하거든요. 자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끼리 거래하고 조정하는 그 증거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에서 31절에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왕 여로보암은 남쪽 유다의 솔로몬에 대해서 굉장히 감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애굽에서 홍해 건너고 요단강을 건넜으니 다 같은 이스라엘인데 너는 뭐냐? 네가 통뼈야? 우리는 우리대로 이 약속의 땅을 가졌으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택한 백성 맞다.” 고 우기던 자가 여로보암이에요.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북쪽의 지도자가 여로보암이고 남쪽은 르호보암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성전이 여로보암의 나라 북쪽에는 없다 이 말이지요. 남쪽에 있거든요. 이스라엘이 갈라지기 직전에는 남쪽과 북쪽에 제사장들이 다 편만해 있고 제사장이 있다는 말은 평소에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늘 성전중심으로 모일 것이 뻔하기 때문에 38선을 만들든지, 휴전선을 만들든지 해서 남쪽과 북쪽을 분명히 갈라놓으려고 북쪽의 여러보암이 정책적으로 그렇게 만들었어요.

종교를 하나 만든 겁니다. 이게 뭐냐? 인간을 설득시켜서 조종을 해 보고자 하는 거예요. 그래야 나라가 질서가 잡히니까. ‘왕이 널 위해서 이렇게 종교적인 서비스를 해준다. 너희들의 종교까지 걱정해주니까 내가 얼마나 훌륭한 왕이냐?’ 하고 이렇게 봉사를 하는 차원에서 제단을 쌓아요. 위쪽에 단이라는 장소에 제단을 쌓고, 그 다음 38선 같은 경계선에는 벧엘에 제단을 둡니다.

그렇게 해서 백성들보고 “저 예루살렘까지 가지 말고 같은 하나님이니까 여기서 그만 하나님을 섬기자.” 그리고 8월 15일로 절기를 정했어요. 그 다음에 제사장들이 자꾸 남쪽으로 내려가니까 제사장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워서 월급 줘가면서 종교 행사를 그럴싸하게 하면 되지 꼭 제사장이 해야 되느냐, 하는 식으로 북쪽 나름대로의 성전 없이, 성전이 빠져버린 상태에서 여호와종교를 만든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이 끊어진 증거중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구원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처럼 혼돈이 있어줘야 새로운 하나님의 작업, 손길, 이걸 얻을 수가 있거든요. 저는 그걸 하나님이 언약을 디자인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언약이 어떤 모양새를 가져요. 디자인 되는 거예요.

디자인 되려면 필히 개판이 되어야 돼요. 혼돈이 되어야 된다고요. 언약이 끊어진 사람이 필수적으로 꼭 있어야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언약이 끊어지게 되면 끊어진 채로 그냥 있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큰 오산이에요. 끊어지게 되면 거기에 뭐가 달라붙느냐 하면, 그게 방치되지 않고 악마가 ‘내가 언약을 마저 이어줄게.’ 해서 악마식 언약개념이 끊어진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간다고 일요일에 가만히 집에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 안가면 꼭 딴짓을 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언약이 끊어진 자리가 빈자리로 남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악마로 하여금 조종당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에게는 빈구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일곱귀신이 와도 와요. 그래서 남쪽의 그 벧엘, 가짜지요, 그 가짜제단에 대해서 오늘 본문 호세아 6장 10절에서는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이 벧엘이에요. 왜냐하면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거든요. 야곱이 거기서 사다리꿈을 꾸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잖아요.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벧엘을 차지했기 때문에 벧엘을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가장 근접한, 하나님 보기에 신앙심이 있어 보이는 가장 근접한 성스러운 지명으로서의 대리로서 가장 적절한 것이 벧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채택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제단을 세워서 나름대로의 언약을 이어보겠다는 그 짓이 숨겨진 악마가 시킨 일이 고스란히 다 집결되어 있어요. 다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목해 보는 이유가 그것이 하나님께 끊어졌음을 제대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이 돼요.

아예 하나님 생각도 안하고 내빼는 것이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 섬기겠다고 열심을 다하는 그 현장이 가장 하나님께 욕보이는 자리로 아주 하나님 보시기에 적절한 겁니다. 하나님을 누가 죽이는가? 불교신자가 죽였습니까? 하나님을 이슬람인이 죽였어요? 하나님을 공자나 맹자가 죽였습니까? 일본사무라이가 죽였어요?

하나님에게 열심과 특심을 내는 유대인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가장 누구보다 하나님을 앞장서서 섬긴다고 소문난 그들, 누가 봐도 경건하기 이를데 없는 그들이 하나님을 앞장서서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여러분은 어느 새 진입했습니다. 그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했는데 그걸 채택이라고 보는데, 이스라엘을 채택했는데 왜 채택하느냐? 버리기 위해서 채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가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부합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채택하고 버리신 거예요.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사울왕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15장 23절에, 사울이 왕 되고 싶다고 손 든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자진해서 “저 왕 될게요. 왕으로 뽑아주시면 제가 제대로 왕노릇 하겠습니다.” 하고 먼저 자기가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시작은 누가 했느냐? 하나님이 시작했어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오해하고 있느냐? 자기나라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겁니다. 선택받았기 때문에 어떤 민족보다도 우리는 유일하게 구원받은 민족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 아닙니까? 칼빈주의 예정론에 나오는 이야기 아니에요? 일반교인들은 잘 모르지요. 칼빈주의 예정론이 뭔지.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 선택이라는 겁니다. 이게 17세기부터 아주 당연시 되었어요. 지금의 21세기까지도 소위 개혁교회, 개신교회에서는 당연시 된 겁니다. 선택했는데 버릴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은 왜 있습니까? 하나님은 구약을 통해서 뭘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구약은 버리기 위해서 선택된 거예요.

무질서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채택된 겁니다. 영원한 선택을 구분하기 위해서 제가 명칭을 ‘채택’으로 바꾸겠습니다. 그들은 채택된 거예요. 채택할 때 철저하게 절대로 너희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고 사울이 왕 될 때 인간들의 의사나 의도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상 10장 19절을 보게 되면 “이제 너희 지파대로 천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고 했고, 20절에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가 뽑혔어요.

로또 뽑듯이 뽑았다는 그 말입니다. 베냐민 지파를 뽑았고 그 뒤에 최후의 한 명이 나올 때까지 뽑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21절에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이렇게 뽑은 거예요. 뽑을 때 사울은 부끄러워서 숨었어요. 숨었는데 기어이 찾아내서 사람들 앞에서 왕 되게 했습니다. 기름 부어서 왕 되게 했지요.

채택하신 거예요. 그래놓고 사무엘상 15장 2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채택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왕이 쓸모없다고 버려버리는 거예요. 그 이유가 사무엘상 15장 26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울왕이여, 당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신은 지금 쓰임 받는 거예요. 어떻게 쓰임 받는가?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보다 더 앞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 다시 보세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 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생각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게 아닙니다. 인간을 먼저 생각해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담아, 언약을 어겼구나.” 여기서 아담을 작게, 그리고 언약은 크게 읽을 수 있어야 돼요. 아담아(속삭이듯이 아주 작게) 그리고 언약을 감히 어기다니(큰 소리로) 이렇게 읽어야 돼요. “뭐라고요?” “인간아(아주 작게), 언약을 어겼다(크게)!”

이걸 신약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크게, 너는 작게. “뭐라고요?” “예수님을 위해서!” 아하, 예수님을 위해서.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은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러면 또 되바라진 사람은, “하나님이여,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왜 버리시려 하나이까.” 이렇게 잘못된 생각으로 또 나올 수 있겠지요. 왜 버립니까,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빛 되시고 예수님이 창조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혼돈 속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던 거예요. 창세기 1장도 안읽어봤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십니까, 하는 말 자체가 꼭 필요한 말인데요. 점점 어려워지지요. 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왜 필요한 말이냐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아담은 언약에서 끊어졌다는 아주 적절한 증거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막사세요. 막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죽더라도 ‘이제야 죽었어?’라는 말을 옆사람에게 들을 준비를 하세요.

언약 끊어지면 죽은 자에요. 뭘 생각합니까, 교회 와서. 하나님은 죽음을 가지고 언약을 디자인 한다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죽은 존재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디자인솜씨에 대해서 지금 감각이 열린 거예요. ‘주께서 쓸모없는,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나를 가지고 뭘 하시려는 구나.’ 이런 발상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감사와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안죽었으니까. 안죽는 이것이 이상한 거예요. 이 교회 불이 안 난 것이 이상해요. 내가 안아픈 것이 이상하고. 진즉에 아파도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언약이 끊어지니 그 언약이 끊어진 빈자리에 악마가 인간중심이라고 완전히 성경해석을 반대로 해서 우리 안에 집어넣었는데 우리는 언약이 끊어진 입장에서 뭐가 확 다가오느냐? 그 악마의 말이 어떻게 그렇게 사랑으로서 위로로서 다가오는지? “은혜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악마에게 꿈쩍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하고 빌라도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와요.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빌라도가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잘 보이면 너 풀어줄게.” 그게 바로 언약이 끊어진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에요. 빌라도는 본인이 혼돈인 줄 몰라요. 본인이 거짓인지를 몰라요. 거짓이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요? 예수님 보고 “진리가 무엇이냐?” 이러고 있다고요.

알려줘도 거짓이 되는 거예요. 예레미야 36장 22절 23절에 보면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 선지자가 만났습니다. 유다의 못된 마지막 왕이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의 신하인 여후디가 예레미야가 쓴 하나님의 계시를 낭독하면 왕이 작은 칼로 짝짝 째서 화로 불에 집어넣어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웠어요.

이게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나라의 숨어 있는 속성이, 언약에서 끊어진 그 혼란의 속성이 결국은 말씀 자체에 대해서 역겨워하고, 말씀을 들려주게 되면 회개하고 찬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보는 앞에서 찢어버리는 본성을 극단으로 왕이 대표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야, 이 사람 나쁜 사람이네.’ 하지 마세요. 언약이 끊어진 모든 인간을 시드기야가 지금 대표로 보여주는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게 되면,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만, 사람들이 다 잡니다. 겨울에 난로 피워놓게 되면 얼마나 잠이 잘 옵니까? 다 자요. 여름에는 또 덥다고 자거든요. 겨울에는 난로 피워놓고 자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자요. 다 자는데 광고시간에 “이제 재정보고 합니다. 내년에 목사 사례비는 2백 5십만 원 드리기로 책정했습니다.” 하면 아무도 안잡니다. 돈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언약이 끊어졌기에 비로소 알아듣는 이야기. “그러면 목사님의 월급은 2백 5십만 원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하는 순간 앞에 있었던 40분의 설교는 전부 다 칼로 다 째서 화로불에 집어넣은 거예요. 아버지가 설교한다고 3, 4분 해봐야 ‘아버지, 그런 고생 하지 마세요. 다 압니다.’ 하고 치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수모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잖아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빛이요, 진리요, 언약입니다.

사람들은 아예 예수님 몸체 자체를 죽여 버렸습니다.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걸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마세요. 지나간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 뭔가 들을 것이라고 기대한 우리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혼돈은 심히 혼돈해야 돼요. 그래야 창조의 희열과 ‘아직도 영생 얻는 사람이 있나’ 하는 감격과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마가복음 13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거래 안합니다. 언약이 끊어진 인간과 거래하지 않아요. 아무도 모른다. 그날과 그 시 아무도 모른다. 이걸 줄여버리면, 아무도 모른다. 더 줄여버리면 너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고 현재 우리는 살고 있어요. 현 지구상에 220여 개국 나라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요.

월드컵이 어디서 열리는지 그것은 알아요. 그런데 진리에 대해서, 언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갖다 주게 되면 전부 다 화롯가에 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집어넣은 그 빈자리를 모슬렘이 채우는 거예요. 불교가 채우는 거예요. 이 가짜 교회가 채우고 가짜성경해석이 다 채우는 거예요. 왜? 악마는 방치하지 않으니까. 언약이 끊어진 그 빈자리를 방치하지 않으니까.

십자가 복음 다 버려버리고 거기다가 교회성장, 부흥으로 다 채우는 겁니다. 이게 호세아입장에서는 그 자체가 그렇게 되어야 되는 무질서한 모습이에요. 그러면 대책은 무엇인가? 대책은 있습니다. 그 대책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비유가 나오는데 씨 뿌리는 비유에요. 씨 뿌리는 비유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람에게 호소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새로운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그 환경은 언약이 끊어지고 악마가 횡행하는 그 모든 역경도 이 새로운 환경의 창조력, 구원의 능력을 이겨낼 수가 없는 땅이 나와요. 네 가지 땅이 나오는데 하나는 길가에 씨가 떨어진 것. 또 하나는 돌짝밭에 떨어진 것. 또 하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 또 하나는 옥토에 떨어진 것. 이게 밭이에요. 밭은 인간이 아니고 환경입니다.

범죄한 인간을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개인적으로 잘해보자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어떤 노력으로도 될 수 없는 하나의 환경, 네 종류중 하나의 환경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새로운 환경에 대해서 주님께서 씨앗을 접목시키면 책임지고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히는 겁니다. 그 옥토를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 옥토에 자신의 피를 뿌려버리지요.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보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수액이라 하는 것이 있지요. 포도나무의 수액, 식물의 수액, 수액과 더불어서 과실이 새롭게 생성되도록 하는 거예요. 배양되도록 하는 겁니다. 새생명을.

그럴 때 원포도나무는 주님이거든요. 내가 참 포도나무니까. 내가 참 포도나무니까 어떤 인간도 ‘내가 포도나무’라고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건지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택을 설명하고 천국을 설명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조정이에요. 하나님과의 거래에 해당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막 살아라. 예수님의 수액, 예수님의 피의 수액을 네 속에 흐르게 해서 인간이 하지 못하는 그 옥토를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용서를 함으로서 죄를 용서하시는 그 창조력으로서 하나님께서 옥토를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유다야, 너 한 번 잡혀가봐라. 네가 포로 잡혀 가봐. 하지만 내가 다시 사로잡힌 데서 돌이킬 때에……” 11절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무질서와 혼돈가운데서 호세아는 장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진짜 구원될 이스라엘은 기다려야지요. 누가 올 때까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줄 분이 오셔야 되지요. 메시아가 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린다면 천국 가는 사람은 이론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요소를 본인 속에, 중심에 품고 있어야 돼요.

천국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아무리 설명해도 천국 갈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납득이 안되는 요소를 가장 귀한 보물의 자리에다가 품고 여러분은 ‘나는 무능하다. 나는 무질서야. 나는 언약에서 끊어진 자라.’라고 겉으로 얼마든지 마음 놓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무질서속에서, 혼돈 속에서 주님이 주신 질서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반대로 살았습니다.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챙길 것 챙기려고 했습니다. 그게 언약이 끊어진, 악마에게 속은 이미 죽은 자의 모습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우리 자랑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