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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4:15-19 / 악마의 집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4:15-19 / 악마의 집

정인순 2019. 12. 3. 10:49

음성      동영상       Youtube

악마의 집


이근호
2019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호세아 4:15-19

(4:15)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지어다

(4: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4: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4:18)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4:19)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저희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라

선지자의 계시(啓示)는 주로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누군가 실제로 명령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고 다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명령을 함부로 하시고 일방적으로 하신다면 말은 그만큼 든든한 토대를 갖추고 계심을 전제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명령을 하달한다는 것은 어떤 ‘관계’가 수립되었다는 말입니다.

명령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혼자 살면 서글프기 짝이 없이 없습니다. 미래를 본인이 알아서 장만해야 한다는 것은 온갖 불안과 두려움과 근심을 끌어 모으는 것밖에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일방적으로, 함부로(?) 명령을 해댄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신분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한방으로 결정난 겁니다. 신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명령은 길갈로 가지말고 벧아웬으로 가지 말라는 겁니다. 길갈이나 벧아웬은 유명한 성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킨 기념비적인 장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은혜받기 위해 유명성지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지 말라는 겁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를 주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어디서 보여집니까? 바로 호세아 가정에서 보여집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여 음란한 자식,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는 바로 이 사실이 그 때 그 당시에 적합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드러났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드러나므로서 감춰버리는 효과를 갖게 됩니다. 즉 누구나도 보고 있는 데 아무도 그 담긴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시 나타남’ 사태입니다. 왜 누구아 편하게 보고 있는대로 그 계시를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공격받는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적하는 하나님 대신 사람들은 자기를 지켜주고, 사랑하고, 이뻐하고, 격려해주는 신을 찾아서 성지인 길갈과 벧엘에 올라갑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호세아 선지자는 벧엘이라는 성지를 조롱합니다.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을 너희들은 벧-아웬, 즉 ‘공허한 집’으로 부르겠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변모시켰다는 겁니다. 지금 계시가 어디에서 주어졌는지도 모르고 그들은 저 높은 곳에 가면 신을 더욱 가까이 할 줄을 알았던 겁니다. 벧엘은 원래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의 꿈에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왔던 그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하늘의 기(氣)를 자신들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명들은 이간들이 밟는다고 해서 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나 사사기에 보면 길갈(수 4장)이나 벧엘(삿 20:18)이나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녀간 곳입니다. 이 언약궤의 코스는 곧 엘리야 선지자에게는 하늘로 올라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왕하 2:1-2)

이 두 선지자는 여리고로 가고, 요단강으로 갑니다. 바로 이 코스는 전에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서 약속을 들어왔던 경로를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 하늘로 가는 코스이기도 합니다. 언약궤란 하나님의 돌판이 들어있는 상자이며 그 뚜껑은 하나님의 제물이 피가 묻혀서 은례를 내리고 곳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즉 장차 하나님께서 이 땅을 밟을 때, 이 언약궤가 지나간 코스를 통해서 하늘로 복귀한다는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게 장소적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최후의 날이 와서 하늘의 있던 천사들이 불심판을 가하기 위해 사전 경고의 사이렌을 울리고 나타난다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어떤 처신을 해야합니까?

이 처신의 방식은 평소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밝혀집니다. 어떤 이들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문설주에 발라버립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자기 마음에게 바르는 태도를 뜻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평소 교회에서 봉사한 것이나 기도한 것이나 헌금한 것이나 열심히 전도한 것으로 근거로 자신의 우수함을 내세울 것입니다.

자, 과연 어떤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십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겨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명령과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본래 죄인인 것을 확정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에게 있어 참으로 놀라운 점은 “나는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내가 죄”라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죄를 지었다”가 되면, “내가 죄를 짓지 않을 때도 있는 존재”다가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고백하기를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남”을 고백하므로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쉽게 말해서 개에게 목줄을 단단히 매고 개를 점잖게 할 수는 없으니 그 개 앞에 맛있는 고기 구운 것을 놔둔다면 개는 그 고기가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일 겁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개념’이란 그 안에 ‘본질’로 꽉 차 있다는 겁니다. 항상 본질의 패턴이 반복에서 나오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해도 달라질 게 없는 것이 바로 ‘개념적 존재’로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죄+피’입니다. 어머니의 음란이 그대로 음란한 자식을 생산하고 있음이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인간을 부정으로 보는 계시는 어느 인간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인간이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의미를 자기 선에서 스톱시키고 이해하는 겁니다. 이것은 언약에서 볼 때 환상, 곧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은 ‘허망한 집’(벧아웬)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어나 이 계시(啓示)는 단순히 잔소리에 지나지 않고 제국의 움직임마저 조정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다’는 말은 앗수르 제국이 북 이스라엘을 낚아 챈다는 말입니다. 이 지구의 운명은 호세아의 간음계시에 의해 진행되는 겁니다.

호세아의 부인 고멜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간음을 좋아하는 간음자인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좋아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는 자가 아니라 의인(인 척)에서 죄인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엘리아의 경로 따라 밟아가면서 언약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7강-호 4장 15-19절(악마의 집)191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4장 15-19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4:15-19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찌어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저희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라.”

오늘 본문의 형식이 바로 명령입니다. 우리 인간에 있어서 혼자 살면 힘들어 못살아요. 인생은 한방이잖아요. 어떤게 한방이냐 하면, 누가 명령하는자가 있어야 돼요. 명령한다는 것은 든든한 토대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명령을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생기는 것이 뭐냐? 그분과의 관계에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혼자 살게 되면 그냥 내던져진 길에 그냥 혼자 사는 것이 되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서글프기 짝이 없어요. 인생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누가 강력한 명령을 하셔서 그 명령대로 움직이는 그것이 차라리 행복이어야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에,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 얼마나 든든한 인생입니까? 진짜 명령자를 만나는 것이 인생의 결정적인 한방을 얻은 거예요. 이제는 걱정 끝이에요. 자기에게 명령하는 자가 있으니까. 그분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면 되니까. 그 사이에 수립되는 것은 관계, 또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너를 이렇게 규정한다.” 탄탄한 규정성.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결과물.

오늘 본문이, ‘가지 말라, 길갈로 가지 말라.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 할 때 따지지 말고 ‘내가 주님한테 명령받는 관계구나. 그런 관계가 이미 수립되어 있구나. 주님이 나를 길갈로 올라가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했구나.’ 그렇다면 따로 ‘네가 누구지?’라고 규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지?’ 그딴 것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명령하는 자가 ‘너는 이렇다’고 명령하면 그만이니까. 이게 원래 이스라엘이에요. 혼자 사는 것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힘들었지만 광야 40년 만에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명령자가 함께 있었기에 그러합니다.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은 사실은 인생성공이고 그것보다 안정적인 인생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공한 인생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 명령자가 여러 가지 명령들을 하는데 15절에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이렇게 했어요. 길갈과 벧엘이 나오게 되면 여러분이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광야 지나고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 진행코스였습니다. 요단 건너서 여리고, 여리고 건너서 길갈, 길갈 건너서 벧엘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경로 속에서 뭘 가져왔느냐 하면, 언약궤를 메어서 가져왔어요.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땅이 아니고 언약궤가 거기에 사는 땅입니다. 언약궤 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거든요. 하나님이 사시는 곳 성전이지요. 하나님이 사시는 땅을 만들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온 겁니다.

그래서 명령한 겁니다. ‘이스라엘아 내 명령 들어라. 내 명령을 들으면 내가 영원히 사는 곳에 너희도 나와 함께 있게 하리라.’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는 명령이라는 것, 또 다른 말로 하면 관계성이라는 것, 토대가 든든한 관계성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성전에 합류하게 하신 거예요. 이런 명령 하나하나에 굉장히 감사해야 되는 겁니다.

본문 15절에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라고 했는데 ‘벧아웬’에서 ‘벧’이라는 것은 집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원래 ‘벧엘’이에요. 벧엘인데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지금 호세아가 조롱하고 있습니다. ‘벧아웬’에서 ‘아웬’이란 ‘허망하다, 죄악되었다. 부실하다. 허구적이다. 공허하다.’는 뜻이 ‘아웬’이지요.

하나님이 지어야 될 집에 너희들이 제단을 쌓으면서 엉뚱한 신을 섬기는 순간 그게 죄악의 집이 되고 말았어요. 허망한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되고 싶지 않은 교회는 없어요. 그들이 벧엘에 올라갈 때 하나님의 집이라고 여기고 올라간 거예요. 저는 예루살렘 근처에 갔을 때 밤에 올라갔었어요.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집이 되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집이 되고 싶은데 하나님이 뭐라고 규정했느냐 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고 악마의 집’이 된 거예요. 공허한 집이죠. 우상이란 허망이라는 뜻이에요. 허망한 집, 죄악의 집으로 만든 거예요. 그 이유를 따지면서 “북쪽은 그렇더라도 남쪽 유다야! 너희는 그러지 마라.”고 하는 겁니다.

15절에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여기 행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간음, 음란, 행음, 여러 가지 말로 할 수가 있는데요. 행음의 시작은 놀랍게도 호세아가정부터 시작한 거예요. 호세아가 누구냐? 선지자지요. 그 선지자가 누구로부터의 관계, 누구로부터의 명령이냐?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받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간음, 행음의 시작은 어디서부터냐? 하나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겁니다. 간음을. 호세아가 간음을 한 것이 아니고 ‘간음을 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호세아가정에 간음이 발생되어야 된다는 그 뜻이에요. 그래서 발생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음란한 여인과 혼인을 해야 되지요.

그 다음에 음란한 여인과 혼인을 하면서 그냥 혼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아들 둘과 딸 하나, 자식을 낳아야 되고. 그 자식, 이름이 음란한 자식들을 낳아줘야 돼요. ‘호세아가 어느 음란한 여자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 모두가 음란한 자식이다.’라는 말은 뭐냐? 그 구조자체가 이 세상에 간음과 음란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간음과 행음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키시는 그 의도가 뭐냐? 어렵게 갑니다. 나타남으로 감추는 것을 더 감추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났는데 나타났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타났다는 그것이 이유가 되어서 계시는 점점 더 숨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되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눈에 보였지요? 예수라는 분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누구나 그 당시 사람이라면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데, 볼 수 있게 나타난 그 것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더욱더 완전히 깜깜한 알 수 없는 분으로 규정되는 겁니다. 나타났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을 더욱더 숨기고 싶어서 나타나는 거예요.

계시의 나타남은 그 계시의 본뜻은 인간으로서는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드러난 것으로 인하여 감춤이 성립되는 거예요. 자,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벧엘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길 거예요. 하나님의 아무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생각대로 하거든요. 드러난 것이 없으면 새롭게 드러난 것이 없으니까, 자기자신들만 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제단을 쌓자. 벧엘에 올라가서 하자.”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벧엘, 거기가 높은 곳이니까,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만나려고 했는데 저 낮은 곳의 호세아가정에서 간음이라는 것이 생산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높은 곳의 벧엘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 것인가, 아니면 낮은 곳, 호세아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것인가의 새로운 선택지가 발생된 거예요.

높은 곳에 가야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은 본인들의 생각이에요. 본인들이 익히 하나님의 계시를 안다고 여길 때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벧엘을 뭐라고 하느냐? 벧아웬이라고 한 거예요. 너히들은 하나님의 집에 갔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집에 간 것이 아니고 악마의 집, 허망한 집, 우상의 집에 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물론 길갈도 마찬가지고요. 옛날에 언약궤가 통과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일종의 성지같은 곳입니다. 길갈, 벧엘, 세겜, 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난 곳들입니다. 특히 벧엘같은 곳은 야곱이 꿈에 사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곳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지점이에요.

벧엘에 올라가게 되면 옛날의 그 사다리를 생각해서 은혜가 막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벧엘에 올라갈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듬뿍 담아오는 것 같겠지요.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뜻은 호세아가정에서 일어났는데요? 간음이라는 이름으로요. ‘현재 너희 이스라엘은 간음한 자의 종자다. 그 자식들의 집합’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렇게 호세아가정을 통해서 간음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현재의 북이스라엘은 그들이 간음죄를 범하고 있다는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간음죄가 호세아가정에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스라엘전체가 전부다 간음죄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감추고 있는 바가 되고, 또 모르고 있는 바가 돼요.

하나님께서 예수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는 모든 하나님은 가짜가 된 거예요. 엉터리가 되고 우상이 된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동안 무슨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전부 엉터리 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진짜 하나님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예요.

표정 보니까 지금 진짜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늘에서 마지막 공습이 일어나요. 하늘에서 불심판 때리기 위해서 사이렌소리를 울립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일곱 나팔소리, 1,2,3,4,5,6,7, 일곱 나팔소리, 사이렌 소리가 윙~, 윙~, 윙~, 민방공 훈련할 때 사이렌소리가 울리듯이 천사가 와서 불심판의 경고를 윙~, 윙~, 하고 온천하에 하나님의 최후의 불심판경고를 날릴 때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거기에 대처해서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는 거예요.

평소에 교회 열심히 다닌 그것 챙긴다, 헌금한 것 챙긴다, 선교한 것 챙긴다, 전도한 것 챙긴다, 여러 가지 착한 일 한 것 챙긴다, 구제한 것 챙긴다. 이런 식으로 윙~, 그 불심판에 대비할 것이냐, 아니면 출애굽처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를 것이냐? 어느 것이 진짜 하나님이십니까? 어느 쪽이 진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어요?

이게 신약에 오면 마음에 피를 바르는 거예요. 마음에 예수님의 피, 십자가의 피를 온통 마음에 바르는 거예요. 마음에 피 바르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의 방식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마음에 피 바르는 것, 나는 죄인입니다. ‘이 십자가의 피를 바른 자만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는 용서가 되어서 구원받습니다, 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때 그 하나님 말고 다른 하나님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 믿었습니까? 나쁜 짓 안하고, 착한 일 많이 하면 되는 하나님이죠. 예수님의 피가 소용없는 식으로 살았어요. 호세아가정이 음란한 가정이 되는 이유는 ‘의인에서 죄인’으로 거듭나라는 이야기에요.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흔히 일반 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의인에서 죄인으로 거듭나야 돼요. 하, 참, 자진해서 ‘내가 간음자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지요. 이 말도, 내가 간음했다는 이 말도 잘못된 말이에요. 다윗이 간음을 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 자체가 간음이에요. 내가 간음을 행한 것이 아니고 다윗 자체가 간음이에요. 다윗,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이라니까요.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죄짓는 것이 아니고 나 자체가 죄라는 개념입니다. 개념! 규정된 것.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죄가 나오는 겁니다. 왜? 개념이라는 것은 숨어 있는 본질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개가 목줄에 묶여 있으니까 굉장히 점잖아 보이지요.

그런데 그 근처에 돼지갈비나 불고기 냄새 싹 피워보세요. 개가 자기본질을 못 이기지요. 킁킁거리면서 목줄을 당기고 발악을 해요. ‘나 저고기 좋은데. 먹고 싶은데.’ 그게 본질이잖아요. 개념은 본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개념이에요. 인간의 죄의 본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개념입니다. 다윗이 아는 것은 뭐냐? 처음에는 내가 죄 지었다고 여겼다가 나단선지자가 오니까 내가 바로 죄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내가 죄 지었다’가 아니라 내가 죄가 돼요.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면 이것은 선악적인 사고방식에 있는 겁니다. 내가 죄지었다는 말은, ‘죄 짓지 않을 때는 나는 죄 안지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지을 수도 있지만 안지을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다’ 할 경우에 ‘나는 죄 지었다’가 되지만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내가 뭘 하든 숨어 있는 죄가 나를 통해서 바깥으로 발산된다는 뜻이에요.

모친이 나를 죄 중에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난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얼마나 자기가 의인인체 했습니까? 의인에서 죄인 되는 이 다시 태어남, 이것이 중생이다, 그 말이지요. 아, 참! 지금 호세아가정에서 음란죄를 시작한 것은, ‘인간아!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이 거룩한 사건, 거룩한 장소에 네가 발을 딛기만 하면 전부다 그게 벧엘이 아니고 벧아웬이 된다니까요. 하나님의 집이 아니고 악마의 집이 되는 거예요.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 만나겠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이 마지막, 윙~, 사이렌소리가 울릴 때 지금 시간이 없어요, 곧 천사가 불심판을 내릴 때에 뭘 준비해야 됩니까? “주여, 저 죄인입니다. 십자가 피 여기 있잖아요. 피 보고 넘어갔다면서요? 피 여기 있어요. 내가 자랑하고 내가 평소에 관심 두는 것은 이 피밖에 없었습니다. 이 피가 전부에요. 나에게 이 피가 제일 소중해요.” 이게 바로 간음 아닌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겁니다. 율법을 주고 ‘율법 + 피’가 언약이거든요. 그게 언약궤라는 말이지요. 제가 언약궤 이야기도 했지요. 호세아도 율법 아닙니까? 율법 주고, 율법을 주게 되면, “네가 벧엘에 올라가서 예배드려라.” 하면 벧엘에 올라가요. 올라가는데 올라간 그 결과가 뭐냐? 벧엘이 아니고 벧아웬이 된다니까요.

교회라는 것이 예수의 탈을 쓴 악마의 전당이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탈을 쓴 악마의 전당이 돼요. 벧엘이라고 여겼던 교회가 벧아웬이 된다니까요. 인간들 체면 세워주는 곳. 자기자신이 간음이고 자기자신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단단한 규정이에요. 주께서 율법으로 명령할 때는 네가 죄짓지 말라, 가 아니라,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율법의 위반자인 죄인이라는 관계에서 예수님, 나는 의인이고 너는 내 앞에서 무조건 죄인이야.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야.’ 그걸 규정하라고 우리에게 율법을 준 거예요.

이게 어렵습니까? 개념이란 내 본질을 숨길 수 없는 거예요. 얼마 전에 뉴스에 나왔는데요. 어떤 버스 운전기사가 밤중에 차고로 버스를 집어넣기 위해서 가는데 뭔가를 울렁, 하고 밟고 지나갔어요. 20대 청년이 술 취해서 길에 대자로 누워있는데 버스가 그냥 밟고 지나가 버렸어요. 과속은 안했고요. 이것은 어느 차 누가 조심해도 술 취해 누워있는 청년을 칠 수밖에 없었어요.

사고가 났지요. 그 청년은 하반신이 마비되었답니다. 버스회사에서 그 소식을 듣고 그 버스기사를 해고했어요. 잘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버스회사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혔기 때문에 잘린 겁니다. 그 버스 기사의 자식이 지금 암투병중입니다. 자기는 해고됐습니다. 한 회사에서 해고가 되었으면 다른 회사 운전기사로 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돈 몇 백 주고 배운 기술이 대형버스 모는 것뿐입니다.

자,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그 버스기사가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겠지요. 불평하겠지요. 그게 바로 벧엘이 아니고 본인이 벧아웬이 되는 겁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사건을 통해서 티가 나 버린 거예요. 윙~ 사이렌 소리 날 때, 하늘에서 불심판이 내려온다면 “하나님 저 괜찮아요? 저 잘났어요.” 이러고 버티다가는 다 작살나는 겁니다.

뭐로 버텨야 됩니까?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유월절의 피, 빨리 발라.” 문설주에 빨리 발라버리라고 했잖아요. 처음 출애굽할 때. “평소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예수님이 피였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피 안에서 죽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피가 살아나는 것이 구원이에요. 내안에 피가 살아나는 것.

풍선이 뜨는 것은 풍선이 예뻐서 뜨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헬륨가스 스스로 뜨고 싶어하니까 덩달아서 고무풍선이 뜨잖아요. 피가 뜨니까, 다른 말로 할까요, 하나님의 언약이 뜨니까 원래 그 사람의 출생지가 지옥인데,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죄에서 나서 죄로, 지옥으로 가야 되는데 그 사람은 헬륨가스 덕분에 어디로 가느냐? 그 피흘린 유월절 어린양의 고향, 어디입니까, 천국으로 떠서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궤가 진행했던 그 코스입니다.

열왕기하 2장 1,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벧엘로 갔다가 또 어디로 가느냐 하면, 여리고로 갔다가, 거기서 또 어디로 가느냐 하면, 요단으로 가는 거예요.

언약궤가 지나갔던 그 과정은 열왕기하 2장 1, 2절의 말씀처럼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는 거예요. 엘리야는 원래 땅이 고향이지 하늘이 고향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는데 뭘로 올리느냐? 하나님의 언약궤가 지나간 그 언약의 정신이 엘리야에게 있으니까 엘리야가 자기고향도 아닌, 창조전에는 물론 고향이었지요, 본래 땅에 있는 사람 하늘로 불수레 타고 올라가는 겁니다. 팩트에요, 이거.

이게 지금 동화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버스기사가 술취한 청년 깔아뭉갠 그것만 팩트가 아니에요. 그 팩트는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황당한 일을 주십니까?”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성경의 팩트는 뭐냐 하면, 땅에 있는 자가 갈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늘로 가는가의 그 경로를 보는 겁니다. 그 경로가 예수님이 오셔서 살았던 그 경로와 동일한 경로에요. 예수님 자체가 언약궤니까.

자,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이 세상이 팩트가 아니고 이게 허구……, 아까 말한 대로 벧아웬이라는 뜻은 허망한 집이에요. 왜 허망한 집을 그렇게 좋아하느냐? 그것은 모든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자기선에서 스톱해버렸어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벌이게 되면 그 일벌인 것이 내 선에서 스톱이 되면 안돼요. 그 의미가 내 선에서 마감이 되면 안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 주께서 나 살라고 이렇게 하셨구나.’ 이렇게 마감이 되면 안되고 나를 더 뚫고 뒤로 가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벌어진 사건이었고 나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심판하는 천사로 하여금 죽음을 건너뛰게 했는가? 그 내막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휘말린 거예요. 죽음의 천사가 왔는데 히브리인들이 문설주에 피만 바르면 그 피가 뭐길래 죽음의 천사가 왜 그냥 넘어갔느냐는 말이지요. 그냥 넘어갔다고 그렇게 하지 마시고, 왜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갔느냐는 말입니다. 넘어갔다고 해서 그 절기를 유월절, 그냥 넘어갔다고 해서 'pass over'라고 하거든요.

그게 뭔데 그냥 넘어갔느냐 하는 겁니다. 그 피 흘려 죽은 어린양이 어린양이 아니거든요. 이스라엘한테는 드러난 거예요. 이스라엘에게는 드러났지만 실은 거기에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감추어진게 있어요. 나중에 그 감추어진 것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내가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할 때 비로소 합치가 되는 겁니다.

옛날 유월절 어린양의 본질은 예수님이었다는 사실로 일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희생을 보고 그 희생 안에 있는 너희들은 더 이상 심판할 것이 없다,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갈 때 어떻게 넘어가느냐? 의인인체 하다가 뭐로 바뀌어야 되느냐? 우리가 죄라 하는 것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 죄와 그리고 우리에게 오는 예수님의 피와 플러스가 되어서 그것이 하나의 언약이 되고, 그 언약이 언약궤의 정신을 표현해주는 겁니다.

언약궤가 뭐냐를 설명해 드려야 되는데, 언약궤라는 것은 상자인데요. 그 통 안에 돌판이 들어 있어요. 율법이 들어있다고요. 그 율법이 들어있는 상자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해요. 속죄소, 또는 시은좌, 은혜가 내려앉는 장소, 또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거든요.

인간들은 하나님을 상상하는데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라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라는 것을 이스라엘한테는 언약궤라는 것으로 미리 보여준 겁니다. 피 흘려주시는 분으로 오신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초라한 분이지요. 초라한 분은 사람들에게는 선호대상이 안됩니다.

제가 질문할 테니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호세아의 부인 이름이 고멜인데요. 이 고멜이 간음을 해서 간음한 여자입니까, 아니면 그 자체가 간음입니까? 고멜은 그 자체가 간음이에요. 고멜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고 간음을 좋아하는 여자에요. 달리 하면 고멜은,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나쁜 짓을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에게는 좋아하는 일이 있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내가 죄기 때문에 죄만 좋아하고 죄 아닌 것은 안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죄 아닌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좋아함에서 배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맞아죽었잖아요. 이 세상에 예수님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요? 정작 오신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오셨는데요. 지금 호세아가 이야기하는 복음이 그거예요. “죄인주제에 하나님의 의를 알아볼 리가 없다. 호세아가정에서 간음죄가 벌어졌다. 너 어떻게 생각해? 그게 하나님 뜻이다.”

사람들은 “그건 하나님 뜻이 아니야. 하나님 뜻은 저 벧엘에 있어. 하나님의 집에 있는 거야.” 유명한 성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일으킨 그곳에 있다고 하면서 누구나 벧엘에 올라가고 누구나 길갈에 올라가요. 그런데 호세아가 명령합니다. “올라가지 마. 가지 마. 북쪽 이스라엘은 올라가도 유다는 그런데 올라가지 마.”그렇게 되는 겁니다.

벧엘이라는 곳이 열왕기상 12장 28, 2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벧엘에 금송아지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금송아지라고 하지 않고 ‘우리를 애굽땅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우상이라 하는 것은 나를 지적질 하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 보시기에 우상, 인간들이 아는 신이라 하는 것은 나를 지적질 하는 신을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칭찬하고, 나를 우대하고, 나를 격려하고 독려하고 나 잘했다고 사랑해주고 자비가 넘치는 그걸 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애굽땅에서 우리를 건져낸 하나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금송아지 만든 겁니다.

금송아지 깨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것이 들어 있어요. 그것이 벧엘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정작 호세아가정에서는 간음자식을 낳았는데요?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사사기 20장 18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이 때 벧엘에 언약궤가 있었던 거예요.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고요.

벧엘이라는 지역이 이 정도로 대단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벧엘이었다. 사사시대 때 그런 장소가 벧엘이었어요. 그런데 호세아는 누구에게 물어라? 벧엘에 올라가지 말고 호세아가정에 물으라. 왜? 호세아가정의 자식들이 다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기 때문에.

개념이라는 것은 본질패턴의 반복이 개념이에요. 인간의 본질이 반복해서 나온다니까요. 점잖은 개? 글쎄요. 고기타는 냄새 맡으면 점잖은 개 없을 걸요? 개가 목줄 했다고 해도 고기 굽는 냄새나면 아주 발악을 하잖아요. 인간도 아무리 교회 다니고 뭘 해도 죄짓는 일 있으면 발악을 한다니까요.

주님께서 가위를 가지고 그 목줄을 풀어놓아 버려요. 목사, 장로, 집사 되었다, 교회 50년 다녔다, 나이 70이나 80이 되어서 인격이 대단하다. 목줄 풀어놔 보세요. 껄떡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자기의 본질을 못 숨기지요. 다윗은 이것을 안 거예요. 내가 죄지은 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모친의 죄였습니다.

이 죄가 있을 때 이제 진짜 바라고, 진짜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의미 있고, 진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엇만 견딜 수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나를 지적질 하는 하나님이에요. 나를 공격해서 나를 죄인 만드는데 어느 정도 죄인이냐? 예수의 죽으심, 인간으로 죽었던 그 피에 합치시킬 때 그 피를 보고 넘어가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 행함이 아니고,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수천 번도 더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우리의 피를 보고 넘어가주는 겁니다.

그 피와 죄인의 관계, 이것을 수립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거예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운전해라. 길바닥에 술에 취해 누워있는 20대 그냥 치고 가거라. 그리고 너는 잘려라. 그리고 네 자식은 암투병 하는데 돈 떨어져라. 너는 그렇게 해도 항의할 어떤 권한도 없다. 왜? 너는 처음부터 죽은자니까. 처음부터 이미 죄인으로 규정되었으니까.”

의미를 내선에서 스톱하면 안돼요. 왜 저에게, 왜 저에게, 이렇게 세상에 흘러가는 의미가 나에게서 스톱이 되고 말았어요. 나를 뚫고 ‘왜 그렇지?’ 하고 돌아보면 그 뒤에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의 언약궤가 있잖아요. 언약궤 있는 곳이 하나님 계신 곳 아닙니까? 거기가 성전이니까요. 언약궤가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요한계시록에. 그러면 통과해야 되는데 인간은 평소에 내가 제일 중요하다 보니까 여기서 모든 의미를 스톱시켰어요. 뚫고 지나가야 되는데.

제가 지난 대전강의 두 번째 시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부러 열 두 제자 가운데 사탄을 심어놓았느냐? 사탄이 구멍입니다. 주님께서 사탄을 심어놔서 열두제자가 뭘 해도 중요한 것은 가룟유다에요. 가룟유다가 배신해버리니까 예수님의 공동체는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지요.

그 가룟유다가 있는 자리가 주님이 들어오는 자리에요. 주님의 자리는 가룟유다가 있던 자리였어요. 그 자리를 대체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된 것처럼. 우리 책임 아니지요. 한 사람이 범죄해서 온 사람이 죄인 되었으니까 우리 책임 아닙니다. 한 사람의 희생과 의로움으로 덩달아 우리가 의인되었다는 하나님만이 진짜배기 하나님입니다.

이제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뭘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 4장 16절에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여기서 ‘넓은들’이라고 한 것은 아주 풍요한 세상은 끝났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19절에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하는 말은 앗수르제국이 쳐들어와서 멸망시키고 포로 잡아간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을 제가 볼 때마다 신기한 것이, 이스라엘에 일어났던 그 일이 세상 모든 제국의 움직임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각자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그 사건이 주변 모든 이 세상의 운명, 이 지구상의 모든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요소가 이스라엘에게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언약입니다.

언약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여,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제국들, 나라들은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든든한 토대입니까? 십자가로 구원받지요. 십자가중심으로 세상 돌아가지요. 예수님과 나 사이에 십자가관계가 되려면 어떤 명령자가 있어야 돼요. 혼자 살면 안되고. 그냥 까라면 까라는 말이지요.

명령할 때 짜증내지 말고 ‘아, 나에게 명령자가 다 있구나. 세상에, 내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구나. 지금 내가 있는 것도 주님의 뜻이 있어서 있구나.’라고 모든 의미와 뜻을 나를 통과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는 것을 함께 보라는 그 말이지요. 쓸쓸하게 살지 말고, 외롭게 살지 마시고, 주저하지 말고, 오늘 하루 사는 것도 주의 명령에 따라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산거예요.

그 뜻은 뭡니까? 자, 마지막,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의인에서 죄인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내 죄를 발견하면 되는 거예요. 내 죄를 매일같이 발견하면 되는 겁니다. 발견할 때 마다 그 다음부터 내가 해체되고, 내가 전혀 안소중하고, 이 죄를 의로 만들어주시는,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유월절의 피가 우리 가슴팍을 늘 적시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이 가슴팍에 있는 십자가만 드러나고 나타나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언약중심으로 된다는 말은 참 쉽고, 공식은 참 쉬운데, 모든 그 언약의 의미가 우리로 인하여 막히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언약이 우리를 뚫고 주의 의도대로 실시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매일같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백부장같은 믿음을 갖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