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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5:3-5 / 언약적 간음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5:3-5 / 언약적 간음

정인순 2019. 12. 12. 13:23

음성 동영상 Youtube

언약적 간음 


이근호
2019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호세아 5:3-5

(5: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5:4)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일방적으로 “간음했다”고 선언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평소에 가장 우선되는 사정은 어쨌거나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간음’이라고 선포하게 되면 그들로서는 변명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간음했다’고 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과 혼인관계에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남편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신부의 처지에 위치해 있다는 겁니다. 언약 해석에 의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언약을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현실정에 대해서 규정하시지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자신이 뭘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간음했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이태껏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사를 다시 이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을 돕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내로 삼고, 또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확정지었기에 도와주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 입장에서 과연 인간이 하나님과 혼인이 성립하느냐부터 의아해 할 것입니다. 혼인은 인간이 인간과 하는 것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무리 해도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를 못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이 두 사람을 한 몸되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아직 선악과 따먹기 전의 일이요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권한이 있을 때의 형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넘어와서 아담과 하와는 각각 딴 몸이 되었습니다.

즉 태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누락된 겁니다. 사랑이 누락되게 되면 아무리 인간들끼리 애정이 넘친다 할지라도 간음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3:9-10에 보면, “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사랑이 빠지면 진정한 사랑으로 관계가 아니고 이 또한 두 사람이 한 몸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이란 창세기 3장 이후에 상대를 보면서 대상화하는 겁니다. 상대와 거리를 두고서 판단하게 되는데 나와 너로 구분지어지고, 상대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오직 나만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 타인을 이용하는 바가 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되었던 신이 되었던 메시야가 되었던 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본인이 선택할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여기에 사랑은 빠지고 간음이 성립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힘센 이방 민족에 둘러싸여서 오직 살아남기 위함 일념으로 그들의 신을 도입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이미 혼인관계에 있다고 정해놓으신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다 진정한 남편 되는 하나님 입장에서 ‘바람피운 아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질투심입니다. 남편과 아내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사랑에 입각한 질투심입니다. 이 질투심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선적으로 자기 입장이기에 하나님 입장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남편되심은 이미 이스라엘이 간음한 연후에 등장됩니다. 예레미야 3:8에 보면,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간음했음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혼인계약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계약서에 의해 이혼서를 너희들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인간 대 인간의 혼인에서 이혼하게 되면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는 율법에 따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신 24:10 이는 이혼하게 된 시점에 와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혼인한 관계임을 아는 겁니다.

이사야 54:6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 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관계 깨어짐은 그냥 사적인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가 날아가고 더 나아가서 우주마저 파멸됩니다.

이 물질세계는 자체적으로 요동치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언약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달리 말해서 대자연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웅대한 하나님의 원래적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혼인하시겠다는 낌새는 창세기 3장부터 있어 왔습니다. 남편되는 아담은 흙이 되어 죽게 되지만 여자는 이름이 하와, 곧 생명이 되는 이유는 ,죽은 아담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친히 남편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와 한 몸되기 위한 배려였던 겁니다.

룻기에서는 옷을 덮어주므로서 남편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그러나 에스겔 16:8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입혀준 신부 옷을 발가벗기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서 안에는 새신부를 맞아하시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6)

이는 하나님과 부부가 되어 끝없이 영생을 같이 누리겠다는 겁니다. 기존의 세상 목숨은 생명이 아닙니다. 도리어 죽음으로 달려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마 20:22) 즉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기어이, 세상과 함께 있는 즐거움보다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부부가 된 기쁨을 마련해주십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일방적으로 신부로 지정해주신 이 최종적 사랑을 주님과 더불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9강-호 5장 3-5절(언약적간음)1912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5장 3-5절입니다. 구약성경 1260페이지입니다.

호세아 5:3-5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호세아 선지자의 일방적 생각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주변에 있는 정치적상황과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게 되면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하고, 자기들 생존의 기반을 다져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하는 이 행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해서는 선지자의 나타남이 아니면 아무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에 호세아선지자같은 선지자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 일단 그들은 대단히 감사히 여기고 그것을 복으로 여겨야 됩니다.

선지자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몰랐던 나 자신을 하나님 편에서 보내신 종의 통해서 우리 자신이 ‘아, 이런 형편에 있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부르시는가 하면, “에브라임아”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을 보고 부르는 거예요.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라고 이야기했고 남쪽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당히 일방적 생각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특히 여기서 간음했다는 이야기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간음했다는 것은 호세아 선지자의경우에 어떤 경우를 간음했다고 하느냐 하면, 남자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여성화시킬 때 간음과 행음이 성립되는 겁니다. 여성화된 이스라엘이 본래 사랑했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편을 따라갔을 때, 그 다른 남편을 사랑하고 선호할 때 이게 간음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호세아의 이야기가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동의하기가 힘든 거예요. 왜냐하면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는 인식자체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인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결혼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혼인이 가능할 수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이것이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거예요. 더구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이스라엘 그 전체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신부입장에서 줄곧 같이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호세아 2장에 나옵니다. 16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라고 했는데 그날이라 하는 것은 장차의 날이고요, 그 앞에 15절 끝부분에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주 쉽게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고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혼인관계에 놓여 있다는 이 사실은 선지자가 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계약서가 있다는 거예요. 계약서가 없어버리면 인간이 하나님과 결혼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참 생소하기 짝이 없지요. 지금 호세아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생소한데.

우리가 아는 상식에는 사람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있고, 남자는 남편이 되고 여자는 아내가 되는 것이지 모두가 여자처럼 누구의 신부가 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호세아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계약서에 담긴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흔히 인간들끼리 통하는 상식이라는 선에서 계속 살아보려고 애를 썼다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들이 계약서를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서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일단은 내가 스스로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그 자체가 살아 있다는 것, 목숨 부지한다는 그것, 생명이지요, 생명에 대해서 진짜 이스라엘에게만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난 그 하나님의 생명과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방인들이나 너희들이 같이 생각하는, 내 목숨하나 부지하자는 그 생명이 원천적으로 다르다는 거예요.

목숨을 살리고자, 부지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점점 더 마지막 때 저주로, 지옥으로, 죽음으로 너를 재촉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라고 선지자나 하나님께 물으면 그것은 계약서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 계약서는요, 이렇게 호세아가 나타나서, 또는 예레미야나 이사야같은 선지자가 나타나서 계약서를 언급해줄 때 비로소 ‘아, 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있었어?’라고 아는 거예요.

그런데 계약서를 제시할 그 시점에서 이미 이스라엘은 계약서 있으나마나 상관없이 어떻게 살아보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노력대로 그냥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방의 신을 믿든지, 안그러면 이방민족과 교제를 하든지, 어떤 애를 쓰든지, 여호와를 믿어서 기도하든지 간에 그 목적은 ‘내가 이 땅에서 버티고 목숨 부지하고 살겠다.’라는 그것이 우선적입니다.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타고난 본능, 본심이니까요. 그런데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기다가 계약서 들이대면서, 너희들이 인간의 본성이니까 ‘일단 살아보겠습니다.’ 하는 그것이 이미 간음행위에 해당된다고 나중에 등장하는 계약서에 의해서 밝혀지는 거예요.

처음부터, 창세기 1장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 안했어요. 십자가 이야기는 신약에 나옵니다. 처음에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오래 살려고 애썼고, 나름대로 자식 낳고 살았지요. 그러나 십자가 지고 마지막 최후의 계약서, 새언약이라는 그 십자가를 지고 딱 과거를 돌아볼 때 너희는 다 헛짓했다는 겁니다. 살고자하는 그것이 너희를 죽게 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거예요.

계약서의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이미 너희는 혼전관계가 아니고 혼인관계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약서에 의하면. 혼인된 관계였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지요. 유다도 몰랐고요. 그걸 누가 알아요? 하나님과 혼인관계라 하는 것을. 인간이 자기 색시가 있고 자기 남편이 있는데 하나님하고 결혼할 무슨 욕심을 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하는 일, 생존이나 도와주면 그만이지 굳이 혼인까지 할 이유가 인간에게 나올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겁니다. 창세기 2장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거거든요.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게 되면 그것은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권한을 갖게 돼요.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조건하에 그 두 사람은 영원토록, 영원히, 끝남이 없이 영원히 끝없는 영생을 계속 맛볼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라는 그 신분이 대단히 중요한 신분인 거예요. 그냥 남자와 여자는 절대로 한 몸이 안돼요. 그러나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봐서 같이 끝없이 영원한 생명을 같이 보장받을 수 있는 신분을 갖추게 되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2장의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리고 아담에게 여자를 준 취지가 한 세팅이 되어있어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가 선악과 따먹고 남편에게도 줘서 같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어떤 경우라도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수 없다 그 말이지요.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수 없어버리면 그 자체는 창세기 2장과 결별이에요. 창세기 2장과 창세기 3장이 결별되어 버립니다. 결별되어버리면 그들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여자, 자기의 마음에 드는 남편을 본인이 고르게 되어 있어요.

그 자체가 간음이 되는 겁니다. 원래 창세기 2장의 그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로마서 13장 8-10절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창세기 2장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죄도 개입되기 전이기 때문에 사랑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죄가 왕노릇해서 인간이 죄짓는 정도가 아니고 죄에 따라서 인간은 놀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체는 뭐냐 하면, 사랑이 아닌 게 돼요. 사랑이 아니면서 서로 정 나누고 결혼하는 이 전부가 간음행위가 되는 겁니다.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사실을 창세기 3장부터 이미 알려왔었어요. 남자도 죄짓고 여자도 죄지었을 때 동일한 죄에 대해서 주께서 죄를 처리하는 방법이 동일한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자, 여자와 남자사이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개입을 해버립니다.

남자와 여자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20절에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 어미가 됨이더라.” 생명이라는 뜻이에요. 하와는 생명이에요. 생명의 어머니라는 뜻이 하와입니다. 반면에 19절에 보면 아담은 죽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아담의 자리가 없어지고, 여자의 자리만 생명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누가 개입했기에 그렇게 되느냐 하면, 죄가 있는 둘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래요. 만약에 하나님이 개입 안하면 남자도 죽고 여자도 같이 죽습니다. 여자 이름이 하와라는 생명이 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뭔가 남자는 죽이되 여자에게 생명이라는 이름을 줬다는 것은 남자는 죽어 마땅하고 그 죽어 마땅한 남자의 자리에, 모든 산자의 어미가 여자로부터 시작되니까 그 여자의 생명을 제공하는 쪽은 그 남자가 죽는 빈자리에 하나님이 거기 들어가서 하나님이 유일한 남편의 역할을 함으로서 창세기 2장에 있었던 그 표준적인 모델, 영생을 주는 그 모델을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자, 이러한 이야기가 그동안 침묵해 있다가, 아무 이야기가 없다가 호세아에 와서……, 물론 호세아서에서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예레미야 3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갑자기 예레미야에서 그 계약서 내용이 이혼서가 돼요. 이혼을 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인간과 하나님이 결혼할 때도 계약서가 있고 이혼할 때도 계약서가 있다는 겁니다. 계약이란 언약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의 살길이 우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서인 언약은 뒷전이고, 그 안에 영생이 들어 있는데 영생이 들어 있는 그 계약서는 뒷전이고, 그저 자기몸의 목숨 부지하고자 자기 목숨이 유리한대로 살다보니까 계약서 없는 남편인 신을 찾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알이라는 이름자체가 남편이라는 뜻이거든요. 계약서가 없는 남편, 인간들 본인이 선택한 남편이지요. 인간이 범죄해 버리면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본인은 독자적인 선택과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어요. 독자적인 선택과 결정을 내릴 때는 그것이 신이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남자가 되었든 본인이 결정한다고요.

왜? 나를 위해서 저쪽을 결정하니까 상대는 하나님이든 누구든 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대상이 되어서 선택하는 그 관계가 간음행위가 되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드는 남자 여자를 고를 때 그게 간음이 되는 거예요. 왜? 아담이 잠자고 있을 때 배우자를 줬기 때문에 내가 배우자를 선택할 권한은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선택할 권한이 없어줘야 우리는 하나님의 원래 인간으로서 영생을 보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이상은 영생은 없는 거예요. 단독행위기 때문에. 신도 내가 고르는 겁니다. 나 좋으라고, 나 유리하게, 내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신을 고르는 거예요. 그게 예수가 되었든 여호와가 되었든 전부 다 바알이 되는 겁니다. 내 편리한 대로 내 이익을 위해서 내가 신을 골랐으니까요. 물론 이런 이혼계약서가 예레미야 3장 8절에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꾸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흔적을 남겼어요.

신명기 24장 1절에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개인적인 가정사에 이혼증서라는 하나님의 율법의 흔적을 남겨버립니다.

룻기 3장 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작업 걸어보려고 한 대목이에요. 물론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시켰어요. 사람 괜찮으니 슬쩍 매력을 발산해서 네 사람을 만들어보라고 하는 지대한 사명을 룻에게 줬고 거기에 보아스가 걸려든 거예요. 물론 꽃뱀은 아니지만.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말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이게 뭐냐 하면, 청혼하는 거예요.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룻기만 보게 되면 나오미가정의 룻이 남자하나 꾀는 모습, 물론 시어머니가 시켜서 한 일이지만, 남자 꼬드기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에스겔 16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그런데 이제는 그 옷조차 날라갔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사랑할 때 내 아내로 여기고 사랑할 때는 내 옷을, 이 하나님의 옷을 너에게 덮어줬잖아.” 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꾸준히 전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자기신부로 여기면서 관리해왔다는 거예요. 신부로 여기면서 준 그것을 가지고 ‘헤세드’, 사랑이라고, 또는 자비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의 자비가 “네가 원하는 것이 뭐야? 도와줄게.” 그것이 아니고, 그냥 남남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가 이미 이스라엘은 내 신부고 나는 네 남편이라는 창세기 2장의 그것을 염두에 두고, 감히 하나님께서 인간과 혼인하기를 마음에 두시고 꾸준하게 남편의 사랑을 아내에게 줘서 아내를 아내로서 관리해 왔던 거예요.

그러나 그 사실을 추가적인 언약, 이 계약서가 오기 전까지는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로 하여금 간음케 하는 겁니다. 간음의 자리에 가서 비로소 이런 계약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을 사용해요. ‘간음케 해서’라는 말은 사실은 어폐가 있어요. 인간들은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해도 그 사랑에 담긴 남편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그 깊은 내용은 모르고 그냥 도와주겠지, 라고 생각했지요.

그 많은 율법과 언약을 줘도 인간은 그걸 캐치를 못하는 겁니다. 어떤 계기가 오기까지는. 어떤 계기?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으로 규정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든지,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남편되심에 대해서 영 감각이 없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언약을 전혀 해석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해석하기 급급해서, 자기 살고자 하는 그 해석식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뿐이에요.

지난 시간에 했지만, 자기소우주, 내가족,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간음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나라자체가 날라가버려요. 간음이라는 그 내용이 하나의 국가마저 날라가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물론 사적인 간음이 아니고 계약서의 하나님을 남편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간음, 그 간음으로 유다도 날라가 버리고 이스라엘도 날라가 버립니다.

더 말해서 이 간음행위가 이 모든 우주의 변화까지, 우주의 파멸까지 초래하는 간음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니까. 이 언약에 위배되면 이 우주가 날라가 버리거든요. 보통과학에서는 말합니다. 물질의 변화라 하는 것은 물질자체 내에서 나오는 스스로의 변화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물질의 변화와 그 운명은 언약에서 나와요.

물질이 이렇게 어수선하고 혼동스럽고 요란스러운 것은 언약의 내용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하나의 수단인 겁니다. 그런데 그 물질 가운데 인간이 들어 있거든요. 인간도 흙이니까. 인간의, 인류의 대표자가 누구에요?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서를 계속 보내는 겁니다. 언약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너의 운명도 결정한다고.

호세아 9장 10절에 보면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옛날 광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 그냥 내 백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와 혼인할 내 신부라고 본 거예요. 그 사실을 간음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비로소 호세아 9장 10절에서 비로소 공개하시는 겁니다.

광야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어요. 너는 내 신부라는 이야기가 광야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냥 내 백성이지요. 내가 너를 인도한다. 그러나 호세아 9장 10절에 보면 다른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너의 신랑이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신랑을 만나면 안돼.” 그런데 그 다른 신랑이 뭐냐 하면, 다른 신, 이방민족들이 믿는 다른 신을 하나님입장에서 라이벌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 당시 민수기 25장에 나오는데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민수기 25장 10, 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질투심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서로 너무너무 사랑하는 관계가 있을 때 질투라는 것이 성립되거든요.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곧 신부될 사람? 그게 아니고 아예 신부에요. 신부는 계약서에 의해서 아예 신부로 확정된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신랑 삼으려고 한 적도 없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자기백성을 신부 삼고자 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나님이 갖고 있는 영생을 같이 영원히 맛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외에는 다른 생명은 없어요. 우리 목숨은 생명 아닙니다. 얼마나 성경의 언약의 내용이 신비롭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이미 혼인했다는 것, 앞으로 혼인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혼인했다는 사실. 인간은 하나님의 신부, 색시가 되었다는 사실. 못믿지요.

우리는 못믿으면, 내가 안 믿으면 이게 진리 아닌 줄로 알고 있어요. 이게 믿기가 불가능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어 마땅한 거예요. 왜? 하나님의 계약서를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 나와도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요. ‘하나님, 밥먹고 살게 하옵소서.’ 그것뿐이에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숨은 오늘 죽어도 괜찮은데 하나님이 주신 이 사랑은 영생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다면 그 관계자체가 생명나무를 주고받는 관계에요.

성경에 그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도 나오고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는 내 신부가 되었다고. 전에는 율법이 네 남편이었지만 이제는 성령이 네 남편이다.’ 그게 나오거든요. 사람들은 혼자 사는데 필요한 성경말씀을 이용하기 바빠요. 나와 내 가족만 잘살면 되니까. 내 가족과 내 삶을 위해서 성경말씀 동원한다면 해를 보고 감사하지 못하고 달을 보고 감사하지 못해요. 정말 미세먼지 보고 감사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마스크 끼고 초미세먼지 보고 감사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별을 보고 감사할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주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지 소우주, 나 잘먹고 잘사는 그 행복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성경을 나 좋으라고 이용하면 안돼요. 하나님께서 이 계약서를 언제 딱 드러내느냐? 이미 인간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는 것이 다 들통날 그 때입니다.

로마서 1장 28절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꾸준하게 하나님이 지켜봤어요. 나의 신부의 속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꾸준하게 지켜봤어요. 결국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사는 것이 급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뒷전이기 때문에.

이 말을 하나님의 혼인계약서에 집어넣어 봅시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 나하고 같이 살기 싫지? 그지? 너 나하고 같이 살기 싫지? 나와 함께 하기 싫지? 그지? 가라! 가거라! 네 남편 따라 가거라. 이 세상 따라 가거라.“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언약대로 국가자체가 날라가버려요. 이스라엘, 유다, 다 날라가요. “가라, 가! 네가 좋아하는 그쪽으로 가라. 바벨론 좋아하지? 바벨론에 잡혀가라. 앗수르도 좋아하지? 앗수로에 잡혀버려. 그쪽 신들 많잖아. 그쪽 신을 섬겨.” 하고 보내버려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려고 생각 안했어요.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다는 것을 본인이 몰랐어요. 본인이 몰랐다고요. 교회 50년, 60년을 다녀도 내 마음에 하나님이 별로라는 생각, 그것을 내가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은 별로고 따로 중요한 일이 영순위부터 차례로 이미 있기 때문에.

아가씨들 주일학교니 성가대니 교회 봉사해도요, 나중에 결혼할 때 교회 다닌다고 하면 ‘에이……’ 합니다. 돈 있는 의사라고 하면 ‘엄마야!’ 하고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요. 그런데 그 아가씨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아가씨 부모도 마찬가지에요. 아빠가 장로고 엄마가 권사라도 그런 것 다 날라가버리고 그저 의사사위 만나고 판사남편 만나면 최고에요. 한평생 산 것 한방에 들통 다 나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고맙게도 바벨론에 잡혀갑니다. 시편 137편에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웁니다. 왜 웁니까? 그 때 그 사랑을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하나님께서 거덜 내지요. 그 나라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나라가 없어졌고 남의 나라에 포로 잡혀 갔어요.

일제치하에 있으면서 일본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갔잖아요. 나라 없는 설움을 아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미국으로, 어떤 사람은 만주로 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멕시코 선인장농장으로, 어떤 사람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가고, 일본으로도 가고 도망 다 가버리는 거예요. 남아 있는 사람은 99.99퍼센트가 친일파에요. 친일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친일파 아닌 사람은 죽는데요?

해방? 없어요. 끝났어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우는 거예요. 후회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후회하게 만들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후회해야 본인이 살고자 하는 자체도 후회거리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나와 내 가정이 밥먹고 살면 그 만이라는, 내 행복만 되면 그만이라는 그자체가 원래 하나님의 인간다움과 너무나 거리가 먼 악마의 모습인 것을 후회하면서, 토해내면서 그것을 후회하는 자,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이사야 54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버려야 비로소 ‘아하, 나는 누구의, 남편의 아내였구나.’ 하는 것을 바벨론 포로 잡혀가서 알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언약에 그런 내용이 있는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달랐구나.’

하나님의 수준과 우리 수준이 달랐던 거예요. 하나님은 영생 주고자 하는데 우리는 그냥 밥이나 먹고 사는 행복, 건강만 챙기고 있는 겁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그 계약서를 들이미는데 그 계약서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이사야 62장 3, 4절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햅시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지요. 뿔라, 결혼한 여자.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쀼ㄹ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그게 바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지요. 신부되기 전에 먼저 대표자부터 혼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혼인부터 시키지요. 예수님을 보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 속에 성령을 보내가지고 이제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이게 간음자, 음녀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쁨으로 깨닫게 하는 거예요, 기쁨으로!

내가 어떤 수를 써도 이 음란과 간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기쁨으로 아는 거예요. 고마움으로. 왜? 남들은 그것을 모르니까. 알 수가 없으니까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같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예수님과 함께 영생 얻을 줄 알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면 하나님 뜻은 이거예요. “내가 없는 곳에 너희를 보내겠다. 그래도 좋으냐?”라고 묻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이 말씀을 보는데 그래 내가 없는 곳이라도 너 하나 행복하면 그걸로 너 만족해? 정말 그래? 진짜야? 정말 그런 마음이야?”라고 되묻는 식으로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에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은 지금 너희는,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없다는 거예요. 그걸 너희들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너희들의 세상기쁨이나 세상즐거움, 그것은 기쁨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고 그것은 나중에 울보가 될, 울어야 될 상황이에요. 정말 기쁨은 뭐냐? 내가 얼마나 돈을 가졌느냐, 얼마나 건강하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에요.

마태복음 9장에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금식하지 마라. 기뻐해라. 그러나 나중에 금식할 때가 올 것이다. 언제? 결혼식에서 신랑을 잃을 그 때에 너희가 울어라. 왜? 너는 신랑없는 신부처지가 되기에.” 마태복음 9장 15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는 항상, 내 백성은 나의 신부고 영원히 영생을 공유할 나의 배우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혼자가 아닙니다. 신부는 신랑의 잘남을 위해서, 면류관이니까, 신랑의 위대함을 증거할 면류관이고 명예니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우리에게 십자가 피 흘리게 하신 거예요.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주님 가는 곳에 함께 가는 줄로 알았지요. 마태복음 20장 22절에서 끔찍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것은 “너희가 나하고 함께 있을래?” 그 정도가 아니에요. “너 나에게 딱 붙어 있어라.”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붙어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의 잔을 네가 마시지 못하면 너는 내 신부가 되지 못합니다. 주님의 쓴잔은 곧 주님이 이 땅을 떠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담은 잔이에요.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보여주는 잔이 쓴잔이에요. 제자들보고 마실 수 있느냐고 하면 못마시지요.

그러나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하고 주제파악도 못하고 큰소리를 치니까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너희들이 마신다고 해서 마실 잔이 아니고 내가 이 예수님의 쓴잔을 마시게 하겠다. 그것도 기쁨으로, 너무 감사함으로 마시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을 때 짜증냈습니까? 분노했습니까? 돌을 던진 사람을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고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했지요. 그만큼 넉넉하다는 말이에요.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것이 그들은 도저히 알지도 못하는 언약대로, 하나님의 계약서대로 된 사항인데 그들은 모르고 돌을 던졌으니까 그 계약서 내용을 모르는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간음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찾아낼 수 없는 죄를 호세아를 통해서 다 밝혀준 거예요. 이 간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든 예수든 내가 선택하겠다는 것이고, 내가 선택하겠다는 것은 나 위주로, 내게 필요하고 도움된다 싶어서 그런 잘못된 판단으로 내린 것인데, 나를 항상 최우선시하고 나를 절대시하는 태도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계약서안에 하나님남편을 위한 신부만 필요할 뿐이지 자기절대성의 인간은 더 이상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주님 없는 곳에 보내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 계약서를 다시 한 번 보시면서 이 사랑이라는 것, 그 사랑은 하나님남편이 신부에게 모든 것을 다 주는, 공유하고자 내민 하나님의 무한한 배려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이 나 좋으라고, 소유하라고 주신 사랑이 아니고 주님과 한 몸인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사랑인 것을 알았사오니 주님이 있는 그 자체로서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