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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4:11-14 / 비워 있는 중앙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4:11-14 / 비워 있는 중앙

정인순 2019. 11. 20. 21:46

음성           동영상

비워 있는 중앙


이근호
2019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호세아 4:11-14

(4: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4:12)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4:13) 저희가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4:14)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사람 사는 재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 사는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먹고 싶은 것 먹고 해보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일 겁니다. 이것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배후에서 누군가가 계속 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엄연히 보통 사람이라서 평소의 습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욕망으로 연속으로 신의 영역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마다 제단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제단에 집결되는 정신과 마음들은 본인들의 ‘사는 이유’와 ‘사는 재미’를 극대화해서 형성된 마음들입니다. 마치 볼펜 끝에 모든 잉크가 응집되는 것처럼 신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라서 성스럽다고 알려진 그 종교의 제단까지 이 욕망은 치고 올라온 겁니다.

‘내가 사는 재미나게 살아야 될 이유’, ‘내가 행복해야 될 이유’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들은 산꼭대기에 제단을 세우고 고상해 보이는 나무 밑에서 점을 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이런 우상짓을 막지 않으시는가?”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패망하는데 방관하시거나 조장하시는 것처럼 일을 하시는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탐스럽기만 한 열매’를 달리게 해놓으시고서는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언명하신 이유와 관련있습니다.

그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치워버린다든지 과일이 흉측하게 생겨서 따먹을 마음이 아예 생겨나지 않게 하실 수도 있을 법한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지 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관련 있습니다. 창세기 2:3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창 2:3)

안식이란 창조 전의 혼돈과 대비되는 결과입니다. 평정과 고요함과 정숙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창조 세계 안에 이 정숙과 고요함의 자리를 마련하시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이 고요함과 정숙과 평정은, 뭔가 있다가 그것이 제거된 그 이후의 상태를 가지고 완성하시려는 겁니다.

즉 죄와 오만과 패역함이 있던 자리가 제거되므로서 비로소 나타나는 자리가 안식의 자리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패역을 결코 낭비라고 보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자리 중심부에 있다가 제거되어 변두리로 물러갈 때, 비로소 거기에 빈 자리가 발생하는 겁니다.

마치 도공들이 화병을 만들기 전에 아무 것도 빈 자리가 없다가 진흙으로 화병을 만들므로서 그 화병 안에 ‘의미 있는 빈 공간’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차지한 그 중앙부의 자리가 강제로 퇴거당할 대상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었던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하 24:1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21::1에서는, 악마가 다윗을 격동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이스라엘 중앙부에 왕인 본인이 자리잡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입니다. 즉 내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이 정도 업적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축하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의 벌칙을 이후에 내리십니다.

왜 사전에 강제로 말리지 않고 그 이유에 세 가지 벌칙을 주시는 겁니까? 왜 사전에 다음과 같은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다윗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다윗이 차지하고 있는 그 중앙부위에서 다윗을 치워내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아나우라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할 때, 하나님의 징벌은 멈쳤습니다.

이는 곧 다윗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죄인이라는 이유에서 이스라엘 왕의 역할을 합니다”고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중심부의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에 죄를 전가시킨 제물로 채웁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문둥병도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합당한 제물을 제사장에게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에서 가장 완성된 선한 자리는 ‘인간의 삶’의 자리가 아니라 도리어 ‘죽음의 자리’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만이 중앙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 법의 중앙부는 ‘죽음의 제단’이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겁니다. 이 죽음의 자리를 위해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서 중심부를 차지한 본인들의 자리가 ‘자신의 죽음’의 자리로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이는 곧 ‘나를 위한 구원’이 실패로 끝나야 함을 뜻합니다. 천국의 중앙 모습은 ‘일찍이 죽음을 당한 예수님’ 주변에 천사들과 장로님들이 둘러싼 형태입니다.(계 4:4) 그 어떤 인간도 그 죽음의 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 죽음으로 참여할 뿐입니다. 로마서 12:1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구원 성공’을 꿈꾸던 자들은 실패로 끝나고 그 자리를 예수님의 죽음에다 내어주고 자신은 주변으로 물러나서 중앙부를 바라봐야 합니다. 마치 도공들이 화병을 만들면서 중심부를 텅 빈 공간을 생산하듯이 말입니다. 내 구원이 실패했을 때 비로소 주님의 구원이 보이게 됩니다.

구약 출애굽기 19:4에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독수리 날개에 엎혀서 일방적으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는 ‘낚여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19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지시하기를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일방적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약속은 요한복음 6:39에 나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가 망한 바로 그 현장이 우리 구원의 자리입니다. 자기 구원을 챙기려는 것도 탐욕이요 우상숭배입니다.(골 3: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가치를 버리고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6강-호 4장 11-14절(비워있는 중앙)

191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4장 11-14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4:11-14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저희가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꾸중하고 나무라시는데, 어떤 일을 벌이고 난 뒤에 나무라고 꾸중할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런 간음행위, 여기서 간음행위라 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말하는데 그 우상숭배, 이방종교를 섬기는 것을 사전에 제거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마음에 들기 마련이에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고 그들이 범죄하잖아요.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심어놓았을 때에 선악과나무를 먹는 것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선악과나무 근처에 인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조치를 왜 취하지 않았는가, 하는 겁니다. 선악과나무가 따먹기에는 너무나 흉측해서, 정말 거북스러워서 차마 따먹고 싶어도 따먹을 맘이 들지 않도록 흉악한 모습의 과일로 만들어놓으면 되었는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가 짝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 먹고 싶은 과실은 선악과 과실이지요. ‘따먹어라. 따먹어라.’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나와서 마구 유혹하는듯한 나무를 심어놓고는 그 밑에 있는 팻말에는 “따먹지 말라.” 그렇게 했을 때 그러면 어쩌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흔드는 모습을 보이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뒤늦게, 내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음란한 마음으로 이방종교를 숨긴다고 질책할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다는 약속의 땅에서 이런 것들을 제거하시는 것이 하나님다운 조치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그래놓고 이 사람들을 간음했다는 이유로 처단해버린다면 이것은 하나님 일에 낭비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낭비가 심하다. 백성을 약속의 땅에 넣어놓고 거기 못산다고 쫓아내고. 자기 백성을 너무 심하게 소모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요. 거기에는 선악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한 내력, 따먹고 싶은 나무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한 그 내력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비밀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어요.

어떤 식으로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느냐? 도공들이 화병을 만드는데 화병이라는 것은, 꽃을 꽂기 위해서는 그 안이 비어 있도록 진흙을 가지고 벽체를 만들지요. 그렇게 만들어나간다는 말이지요. 도공들이 아예 아무것도 만들지도 않을 때는 비어있다는 그것조차 없어요.

그런데 진흙가지고 돌돌 말아서 화병을 만드는 순간 없던 빈자리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없던 빈자리. 도공들이 일을 하면 할수록, 더 크게 화병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 안의 빈자리도 크게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 빈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창세기 2장 3절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안식은 무엇과 대비되느냐? 창세기 1장 1절의 혼돈과, 어두움과 비교가 되는 겁니다.

안식이라 하는 것은 요란함이 아니라, 거기서 휴식이 되고, 고요가 되고, 평정이 되고, 쉼이 되는 그런 공간, 하나님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에요. 그러면 그 목적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그것도 안 따먹을 수 없을만하게 해놓고 따먹지 말라고 한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도공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거기에 빈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빈공간은 아무 일도 없는 빈공간이 아니에요. 뭔가 도공들이 진흙을 가지고 화병을 만들면 거기에는 화병이 ‘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있음은 무엇을 포위하고 둘러싼 있음이냐 하면, 그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공터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진흙을 가지고 화병 굽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역할입니다. 자기의 중앙지를 비워두는 거예요. 내가 차지하고 있는,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으로서 차지하는 그 작업이 필요하고요. 그 다음에 ‘내가 주인공이다. 나는 나를 위해 산다.’라고 하는 그 자리에서 여지없이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추방될 때 비로소 그 추방된 자리가 드러난 하나님의 안식의 자리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2절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그 보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이 주위를 천사들과 24장로들이 죽 둘러서 있어요. 둘러서 있다는 말은 한곳에 모든 것이 응집되어 있고 집중하는 거예요. 모든 생각과 마음이 그 중앙의 중심지를 보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나의 중심지는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에요. 여러분의 마음 한가운데 누가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교회 봉사 좀 하게 되면 갑자기 내가 그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 참, 이런 말, 이런 설교를 하기가 참 곤란하지만, 말씀이니까. 사람이 달리 사는 재미가 없다니까요. 사람이 사는 재미와 보람이 뭐가 있어요? 남이 나를 알아주고, 남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내가 중앙에 앉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죽 둘러서서 나를 쳐다볼 때 이것 말고 다른 재미가 있습니까?

“아이고, 훌륭하다. 대단하다. 참 축하한다. 위대하다.” 왜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나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겼다고 되어 있는데 왜 그렇게 되느냐고 물으면 그 사람들은요, 그것 외에 달리 사는 재미와 보람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노아 때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갔잖아요. 방주만 보지 마시고 방주아래 물에 잠긴 사람들 좀 보세요. 노아 때 방주만 자꾸 주목하지 말고, 방주는 뜨고 그 아래 물속에 잠긴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강남부터 해서 서울, 대구, 부산, 목포, 광주, 전부 다 물속에 갇힌 사람들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 성경에서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12월 7일에 결혼식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사는 그것 외에 사는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사는 재미도 없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오순도순 사는 그것 말고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이방종교가 뭐냐 하면, ‘네가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다 긍정해줄게’ 그거거든요. ‘신과 잘 의논하면 네게 필요한 것, 네가 너로 인하여 가치 있고, 너로 인하여 사는 보람을 누리도록 내가 키워줄게. 너는 너의 중심에 너만 있으면 돼.’라는 그것을 이방종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방송에 나와서 가르치는 것, 선배라는 사람들이 후배들에게 가르칠 때에 행복이란 뭐냐?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것이 서슴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젊은 분들 나중에 대학에 가면 인문학이라 해서 교수한테 배울 거예요. ‘남 눈치 보지 말고 네가 네 주인공이 되어서 사는 것이 인생사는 행복이다.’

회사 때려치우고 스타벅스 차리고 싶지요. 물론 돈이 있어야 차리지. ‘스타벅스 차려서 네가 주인노릇해라. 너의 주인은 너니까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는 보람이다.’ 그걸 이방종교가 긍정해주고 정당화시켜 준다는 그 말입니다. 뭘 자리를 비워요? 내 중심자리에는 내가 있어야지 무슨 자리를 비웁니까?

그게 물 밑에 잠긴 사람들의 통일된 생각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그저 먹고 마시려고 한다면, 요새 같으면 그냥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에서 먹고 마시면 되는데 이 사람들이 그 먹고 마시는 것으로 어디까지 접수하고 점령했느냐? 신에게 바치는 제단, 높은 산마다 제단을 만들었거든요. 종교적인 모양새로 모든 욕구와 욕망이 집결된 거예요.

밑에 있던 나방 벌레가 꼬물꼬물하면서 결국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집결하는 것처럼 땅 밑에 있었던 일상으로 나오는 모든 욕망들이 거룩하다는 신이 있는 곳, 신이 가까이 있다는 곳까지 전부다 접수하고 점령을 한 겁니다. 쉽게 해서 교회가 놀이터가 되었다는 그 말이지요. 산꼭대기에서 분향한다는 이야기가 전부 그런 이야기거든요.

왜 이들의 욕망이 제단화, 종교화되는 식으로 되었는가? 볼펜심의 끝을 생각해 보세요. 볼펜이 잉크가 중력에 의해서 볼펜심의 끝에 있는 작은 볼, 작은 쇠구슬 안에 다 집중이 되잖아요. 모든 인간의 본심은 제단, 종교, 신과의 접합장소에 응집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릴까요? 인간의 모든 욕망의 배후에는 신과 대결하는 악마적요소가 상주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과 그들의 일상이 단절이 되지 않고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자체가 추구하는 그 신이라는 것, 종교라는 것이 평소에 ‘내가 주인이야. 내 중심은 나야’라는 의식과 합치되어서 그들은 그런 식으로 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그렇게 유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그냥 두시거나 낭비하시지 않습니다. 다 쓸모가 있어요. 결국 인간들의 이러한 욕망이 무엇을 건드리느냐? 진짜 약속의 땅의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 이걸 인간들이 결국 건드리는 방향으로 배후의 악마로부터 추진력을 받아서 움직인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이 확대되게 되면 그 하나가 또 하나의 종교가 되고 그 종교는 어디까지 밀려가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주신 율법의 최종상태의 경계선까지 접선되도록, 마주치도록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세상은 종교적인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가 않다고 이야기하겠지만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분명히 그것이 나와 있어요.

우상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어요.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라고 해놓고 그 탐심은 무엇이라고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느냐 하면 ‘우상숭배’로 되는 거예요. 우상숭배라는 것이 제사를 드리거나 어떤 특정한 신, 부처섬기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고 평소의 모든 행위가 우상숭배를 하는 쪽으로 기를 모으고 힘을 모으는 쪽으로 인간은 무장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우상숭배와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욕망을 이뤄주는 그런 신이 신이 아니라면 목사님은 참된 신이란 어떤 신을 말하는 겁니까?” 이렇게 묻고 싶지요. 그런데 벌써 제가 이야기했거든요. 중앙을 비우는 거예요. 중앙을 비울 때 인간들은 호락호락 중앙을 비우겠어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내가 주인공인데? 사는 보람이 나 때문에 사는데? 비우겠습니까? 안비우지요.

그러니까 너희들의 욕망이 뭘 건드렸느냐? 하나님의 법을 건드렸고 하나님의 참된 제단, 하나님의 참된 제사장소를 건드렸다는 식으로 그들을 활용하고 사용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냥 인생을 재미와 보람으로 살지만 그게 누굴 건드리느냐? 하나님의 법을 건드리는 행위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문자로 되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이 물질성을 갖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법이 물질성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 뭐냐? 십계명을 누구에게 줬느냐? 인간의 몸한테 십계명을 줬거든요. 인간의 몸에 십계명을 줘요.

인간의 몸은 단순한 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기서 뭘 찾느냐? 법과 몸이 만났으니까 그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이 제대로 나오는가를 보는 겁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추상적인 문자로 된 그 법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물질로 법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의 제사는 뭐냐? 그 몸이 죽음으로서 비로소 율법이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완성이 된다는 거예요. 레위기에 보면 제사법이 있잖아요. 제사법에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대신 양을 잡고, 염소 잡고, 소를 잡는데 그걸 단순히 소나 양이나 염소로 보지 마시고 죄 지은 사람이 거기에 안수를 해요. 자기 죄를 전가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몸이라는 물질을 양과 염소와 소가 대신해줘서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여지없이 그 양과 염소와 소가 죽는 겁니다. 제가 지금 죽음의 자리가 가장 선한 자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죽음의 자리가 가장 선한자리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율법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운데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여러분이 옛날에 교회 다니면서 많이 들어봤던 내용을 잠시 언급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2장에 기존교회에서 헌신예배 할 때 단골로 나오는 대목이 있어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제사가 죽음이거든요. 그러니까 네 몸을 가지고 죽으라, 그 말입니다. 죽음을 보이기 위해서 네 몸이 있고 그런 몸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으로 결합된 법의 물질성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 와서 예배드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제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구약에서는 지정된 장소가 있지만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 아라비안나이트>에 알리바바이야기가 나옵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가 있어요. 도둑놈이 낮에 미리 자기가 도둑질할 집에 표시를 해놓았어요. 다른 집은 말고 이 집만 털어야지, 하고 표시를 해놨는데 알리바바가 딱 보니 자기 집에 표시를 해놨거든요. 도둑떼가 자기 집을 터는 일을 실패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알리바바가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느냐 하면, 그 표시를 온 집집마다 동일하게 해놨어요. 40명의 도둑떼가 와서 보니 어느 집이 어느 집인지를 알 길이 없지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여인이 예수님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민족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는 대체 어디서 예배를 드리면 됩니까?”라고 지정된 장소를 이야기해요.

도둑놈들이 알라바바집에 표시를 하듯이 이 몸이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이 되고, 그게 율법의 완성이 되고, 안식이 되고, 하나님의 목표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러한 시간과 그러한 공간은 이제 잊어버려라. 네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건과 그 삶의 현장이 전부 다 예배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살아가는 그 모든 구역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리가 돼요.

왜냐하면 그 자리마다 성도는 자기의 가치와 자기의 중심을 계속해서 비워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공들이 화병을 굽듯이 자기 몸을 통해서, ‘전에는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이 따로 있습니다.’라고 비워내는 그런 일들을 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안식의 자리고 구원의 완성의 자리인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그 가치의 자리에 있을 때 그걸 어떤 식으로 비워내야 되는가? 내가 나에게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자신을 구원하고자 애를 쓴다는 말이지요. 내가 죽어서 천당가기를 애를 쓰거든요. 그게 실패로 끝나야 돼요. 내 구원이 실패로 끝나는 그것이 바로 구원의 성공입니다.

자신을 가치 있게 보기 때문에 이 가치 있는 인간이니까 이 가치 있는 인간을 천국까지 밀어 올리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방종교, 우상숭배, 탐심의 연장선이 되는 겁니다.

사무엘하 24장 18절에 보면, 거기에 ‘아라우나’ 또 다른데서는 ‘오르난’이라고도 하는데, 아라우나 타작마당이 나옵니다. 거기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제사의 응답을 받은 장소에요. 아라우나 타작마당은 원래 제사장소가 아니지요. 어느 개인집의 타작마당이지요.

그런데 개인집의 타작마당이 어떻게 번제하는 장소가 되었느냐? 사무엘하 24장 1절에 보면 다윗이 실패합니다. 다윗이 악마에 권유를 받아서 인구조사를 하게 돼요. 왜 다윗이 악마에게 권유를 받아서……, 물론 그 때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왜 인구조사를 했는가?

그 이스라엘의 중앙지에 본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내 나라기 때문에, 내가 정치 잘해서 얼마나 많은 숫자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가, 으스대고 싶어서 인구조사를 한 겁니다. 요새말로 하면 목사가 교인수 계산한 거예요. 우리교회 같으면 그런 일 없지만 큰 교회 같으면 목사가 전도사보고, 네 할 일은 예배나 설교에 신경 쓰지 말고 뒤에서 교인 몇 명 왔는가, 그거 헤아리라는 말이지요. 그게 전도사가 해야 할 일이거든요.

그런데 눈치 없는 전도사가 곧이곧대로 교회 온 사람 숫자 그대로 헤아리게 되면 잘려요. 요령 있는 전도사 같으면 한 100명쯤 왔을 때 250명이 왔다고 하면 목사는 흡족해하고 비로소 마음의 쉼을 얻는 거예요. 생존은 요령이니까 지시할 때 뭘 원하는지를 알고 맞춰주면 끝나는 거예요.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한 겁니다. 왜? 인구가 많다는 것은 누가 장하다는 겁니까? 내가 장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 내가 사는 이유와 재미와 보람은 내 잘난 맛에 있다는 그 한가운데 자기가 앉아있는 겁니다. 금복주 영감처럼 떡 하니 퍼져서 앉아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우상숭배에 해당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그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사탄을 보내서 그렇게 하게 만들어요. 이 대목이 중요하고 어려운 대목이지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나무를 아예 뽑아버리는 것이 아니고, 심어놓고 인간으로 하여금 아예 그 나무를 따먹게 만들어요.

따먹는 순간 인간은 뭐가 되었느냐? 신이 된 겁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뒷전이고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데 좀 도와 달라.’ 이렇게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아까 말한 탐심,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중앙을 빈자리로 만들지 않아요. 항상 중앙의 자리에 앉아서 선악과 따먹은 티를 다 내는 겁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고 난 뒤에 하나님이 뒤늦게 나타나서 벌칙을 내립니다. “셋 중에서 하나를 골라라.” 갓이라는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서, 7년 기근이 있을 것, 또는 왕이 대적에서 석 달 동안 쫓기는 것. 그러니까 3지선다형 문제를 낸 거예요. 객관식으로 골라잡으라는 그 말입니다.

“7년 동안 이 나라에 기근이 있을 것이다.” 이것도 이스라엘 그 나라의 중앙지를 옴팍 비워내는 계기입니다. 인간의 뜻대로, 이 세상은 내 세상이라는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 그 인간의 뜻대로 절대로 해주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사에요. 마음입니다. 7년 기근으로 중앙을 완전히 박살내는 거지요.

“7년 동안의 기근, 그거 할래? 아니면 그 중앙지를 차지하고 있는 왕이 석 달 동안 적에게 쫓겨 다닐래? 아니면 3일 동안 전염병이 온 땅에 퍼지는 그것으로 할래?”라고 했을 때 다윗이 가만 생각해보니까 7년은 기간이 길잖아요. 석 달도 길잖아요. 그중에서 제일 짧은 것이 3일 동안이에요. 3일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세 번째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한 번 보세요. 사탄이 다윗을 부추겨서 인구조사하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사전에 벌칙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네가 인구조사를 하면 네가 이렇게 당한다는 낌새가 사전에 없어요. 그냥 하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기분대로, 내 사는 재미대로 그냥 살게 만들어요. 그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신났지요. 내가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뒤늦게 그 앞에 뭐를 들이대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죽음을 들이대는 거예요. 진짜 중앙의 자리는 죽음의 자리니까.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의 원래 뜻이 그러니까요. 율법대로 제사 드렸다고 내가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제사를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다윗이 그렇게 세 번째 벌칙을 선택한 뒤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쳤어요.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세월호 이것은 문제도 아니에요. 7만 명이 죽었어요. 7만 명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조치가 제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제사드릴 아무런 자리도 아닌데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저를 처벌해주옵소서. 제가 잘못했잖아요. 제가 죄인입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은 뭐냐?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거예요. “내가 처벌을 받습니다. 이 제단에서 바치는 이 제물은 사실은 나의 죽음입니다.” 이게 바로 산 제사에요, 산제사.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이런 인간은 죽어 마땅합니다.”를 고백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응답하셔서 그 재앙을 스톱시켰어요. 재앙이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신약은 어떠냐? 방금 제가 언급한 것이 구약이지요. 신약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거기에 문둥병자가 나와요. 예수님이 산상설교하고 내려오니까 문둥병자가 예수님한테 와서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깨끗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네가 계속 주인공이 되니까. 내가 깨끗하게 해줄 테니까, 해줄 테니까 이 문둥병자야, 네가 율법에 정한 예물을 제사장에게 보여라.”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문둥병자가 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의 완성과 연결되고, 관계 지어졌고,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가 저주받은 자, 옛날에는 문둥병이 저주받은 자에요, 저주받은 자 된 거예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의 법이 주인공이에요. 법의 완성이 주인공이고 그 법의 완성을 위해서 죽었던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문둥병은 그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해서 문둥병 된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이 죄가 많아서 문둥병이 되었다고 하는데 죄가 많아서 문둥병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문둥병이 된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겠지요. 하나님의 중앙부분은 하나님의 자리지 우리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우리자신의 구원에 우리가 실패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꾸 내구원에 성공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내 구원에 성공하면 어떤 점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가?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가 설치고 나를 단도리한다고 내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해요. 그러면 우리는 내 중심을 비켜나서 주님이 하시는 그 구원을 감상하고, 감격하고, 찬양해야 되지요. 우리는 내가 주인공자리에서 비켜나야지요.

도공들이 화병을 만들 때 중앙부위는 비워놓고 진흙으로 하나의 벽체를 만들어나가듯이 우리는 예수님 주위를 둘러싼 사람이 되어야지요. 쳐다볼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내가 내 구원을 챙기는 그것이 실패로 끝나야 돼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호세아에 있는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우상숭배 할 때 왜 하나님이 막지 않고 왜 가만두셨는가? 나중에 이들이 어디에 실패하느냐? 결국 쫓겨나갑니다. 자기들의 구원에 실패해요. 그 실패했다는 체험, 그것이 그들이 구원받는 유일한 통로가 되고 계기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내 구원에 실패했다는 것이.

“목사님, 우상 안 섬기면 되고, 포도주 안 먹으면 되잖아요.” 하는데 인간은 본인이 그걸 하고 말고가 아니라 누가 시킨다니까요. 인간자체가 욕망이에요. 욕망은 본인이 금지한다고 금지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이미 악마로부터 유혹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말릴 수가 없어요. 내가 주인공노릇을 하고 싶다는 이것을 어떻게 말립니까?

결국은 하세요. 본인이 주인공 하시고, 그걸로 인하여 자기구원이 깨지시고, 구원에 실패하시면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 구원에 내가 실패하고 내가 지옥에 간다면, 그렇다면 천국은 누가 가는데?’라고 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6장 39절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신다는 그 사실이 그렇게도 기쁨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문둥병자하고 예수님하고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관계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비로소 주님이 하시는 그 일로 인하여 구원되지 내가 내 구원 챙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비로소 내 중앙의 자리에 다윗처럼, 문둥병자처럼 내 중앙의 자리에 내가 없다는 거예요. 내 구원에 내가 실패했다는 말은, 나의 다짐과 나의 약속도, 내가 세운 모든 법도 실패로 끝나는 그 현장이 비로소 우리가 구원되었음을 알 수 있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오늘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우리 자신의 구원에, 내 구원에 실패하라는 거지요. 끝으로 이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어떻게 애굽에서 이끌어냈느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서 인도했다고 합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구원은 독수리 날개로 낚아챈 거예요. 그런데 독수리가 우리 가운데 있잖아요. 그러면 되었잖아요. 왜 나의 사는 재미를 내가 따로 만들어야 됩니까? 독수리가 있는데. 마태복음 4장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이제 고기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낚는다는 말을 했지요.

출애굽기에서는 독수리날개로 업는다고 되어 있고 신약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이 우리를 베드로를 통해서 낚아요. 사도를 통해서 낚는 거예요. 우리는 낚인 거예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데 뒤에서 낚싯줄로 그냥 골라낸 겁니다. 선별적으로, 선택된 거예요. 채택된 거예요. 너는 창세전에 예정되었다고.

뭐가 더 필요합니까? 그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 잘남이 방해하고 내 가치를 고수함이 방해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계획과 설계가 실패하는데서 도리어 그동안 내가 가렸던 주님의 공로와,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 다시 눈떠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섬기다가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로 봤지만 그것이 하나의 구원의 과정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우리 중앙에 앉아있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주님께 비워두고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의 십자가, 그 죽으심만 그 중앙자리를 차지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