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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4:4-5 / 계약서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4:4-5 / 계약서

정인순 2019. 10. 30. 21:44

음성           동영상     Youtube

계약서 

 

이근호
2019년 10월 30일                


본문 말씀: 호세아 4:4-5

(4: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4: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멸망의 소식에 대해서 사람들은 위기감을 갖게 됩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들이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생계가 우선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아를 형성하기에 신을 고르더라도 자신이 좀 더 유복하게 살아남게 해줄 신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는 호세아의 하나님하고는 다른 신입니다.

성경에서는 바알신이 나오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오지만 인간들에게는 그런 구별이 무의미합니다. 어느 신이 자신에게 이익을 제공할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알’도 신이요, 여호와와 신입니다. 다같이 절대적 존재로 인식됩니다. 참된 신을 고르는 주도권을 인간들이 쥐고 결정해온 겁니다.

그런데 바알을 섬겼던 북이스라엘이 대혼돈의 시기가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 황폐해지고 들짐승들이 사라지면서 사는 것이 힘들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남탓하게 됩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소위 스승 노릇하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다투게 됩니다. 이러한 파국에 대해서 자기네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기를 바라지만, 제사장들이 제안이 그들이 원하는 답변이 아니되는 겁니다.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현시국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파국의 시절에는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그들은 제자리를 찾기 못해 비틀거립니다. 바로 이런 시기가 온다고 호세아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살리는 신이라는 바알이 되었든, 여호와가 되었든 사람들은 선호할 겁니다.

반면에 호세아가 알고 있는 신은, 호세아 자신이 잘되게 하는 신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살 것인가와 관련된 신이 아니라 무슨 일을 맡기셨느냐와 관련된 신입니다. 즉 사명이 생존보다 우선하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는 해야될 일로 인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이런 안목을 가져야 이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합니다.

사건의 해석은 새로운 사건을 만나야 가능합니다. 왜 ‘멸망 환경을 조성’하셨는지는 최종 사건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최종성은 ‘어미를 멸한다’는 예언입니다. 어미를 멸하면 기존의 등장한 모든 자식들도 소급해서 멸망당해야 마땅함으로 규정됩니다. 망한 어미를 가졌다는 이유로 당연히 망해야 하는 겁니다.

이 어미에서 제사장과 선지자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멸망한 이스라엘, 멸망한 제사장과 선지자와 백성들을 이 땅에 등장시키신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작성하신 계약서대로 세상을 진행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에서 나온 생명이라야 생명이라는 겁니다. 심판에서 솟아 나와야 진정한 복이라는 겁니다.

멸망 환경 유도 방식은 곧 새로움으로 교체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재림같은 것은 기존의 모든 눈에 보이는 시공간이 일종의 무대세트처럼 임시방편적 위상에 불과함을 말해줍니다. 기존의 시공간 안에서 인간들은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고, 자아성을 구축하고, 목숨이 붙어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기존의 시공간에서 구성된 모든 개념은 다 허위개념이요 가상개념입니다. 있지도 않는데도 ‘목숨’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이 마치 있는 것처럼 오인한 겁니다.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처럼, 그동안 악마는 인간들을 평생을 걸쳐 있지도 않는 목숨을 운운하면서 겁박해 온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사망’을 육체로 포장하면서 태어났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에게 목숨이 없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이 주님이 주신 사명이요 역할이지 결코 목숨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계약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이요 선지자입니다.

제사장+선지자는 오실 왕의 대행자로서 왕의 직능을 말해줍니다. 오실 왕은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시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이 부어지는데 이는 이미 이들의 직책이 심판을 이긴 직책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9에 보면,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름부음이란 그 사람의 신분이 여타의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 신분이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은 일반 백성들이 들어갈 수 없는 구역에서 일합니다. 선지자는 천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달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진 사명은 그들의 목숨보다 더 우선됩니다. 호세아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존 세상에서는 이들마저 백성들과 함께 멸망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사야 7:14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들’은 처녀로부터 새로이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이는 기존의 임신과 차별되는 임신이요 출산입니다. 누가복음 1:39-41에 보면,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41-42) 영원히 저주로부터 상관없이 벗어나 복만 지속될 나라가 이 아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로서 기존의 시공간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은 그들의 생명, 즉 예수님의 생명없음이 들통나면서 멸망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시공간에서 정리된 목숨은 그동안 악마에 의해서 관리되어 왔습니다. 이 악마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결사적으로 숨기려고 한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약서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그 아들 출생으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1-5)

계약서 앞에서 성도는 자기 목숨을 먼저 털 듯이 툭툭 털어버려야 합니다. 실없는 농담같은 인생을 진지하게 다루어서는 아니됩니다. 죽을 때 폼나게 죽으려고 해서도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매일의 삶은 오직 십자가에서 유입되는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제사장과 선지자는 바로 성령받은 성도입니다. (벧전 2: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다 이루어주신 생명을 가지고 마땅히 해야 할 일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3강-호 4장 4-5절(계약서)1910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4장 4-5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4:4-5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얼른 보면 이 말이 짧은데 문장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이 안 되어 있고,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연결이 안 되어 있고, 더구나 “네 어미를 멸하리라.”하는 말은 상당히 생뚱맞게 여겨질 겁니다. 여기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기에 우리 보기에 낯설어 보이느냐? 호세아 4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모든 것이 드디어 없어지고 사라지고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위기감을 느끼니까 자기보존본능에 의해서 남 탓으로, 주변 탓으로 돌리면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서로 다투게 되는 겁니다. 그 다투게 되는 상황이 결국은 제사장하고 다투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게 4절 내용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밤에 선지자하고까지 다투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거친다는 말은 종잡을 수 없이 비틀거리고 제자리를 못 찾아가는 불안한 자세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내가 제사장과 선지자를 유발한 그 어미를 멸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어미, 모친이 등장하지요. 이것은 지금껏 줄곧 우리가 알아왔듯이 바알종교와 여호와 종교가 어떻게 차이 나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몰랐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주력하다 보니 바알종교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바알의 뜻은 그냥 신이에요. 바알, 신, 딴 뜻은 없고 그냥 신이에요.

그러면 여호와는? 요즘 말로 하면 그냥 신이에요. 바알도 신이고 여호와도 신이고. 바알은 이방인들이 믿는 신이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만드신 그 하나님을 여호와라 하는데 그러나 인간입장에서 봐서는, ‘바알이 좋으냐, 여호와가 좋으냐?’ 하는 것은 나를 더 살게 만드는 신이 어느 쪽이냐가 인간의 선택지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여호와 말씀대로 바르게 살겠다는데 사실은 바르게 살겠다는 그 의도가 뭐겠어요? 똑바로 말해서 더 살고 싶다는 겁니다. ‘착하면 더 살려주겠지. 착하면 조기에 죽이지는 않겠지.’ 더 살고 싶어서 바르게살기를 시도하는 거예요. 바르게 살겠다는 그 의도 뒤에는 뭐가 있느냐? 그냥 바알신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해주는 것은 바로 호세아지요. 어떻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내 인생이 몇 년이 남았는지, 몇십 년이 남았는지 그것은 모르겠는데 주님이 나한테 맡겨준 일이 뭡니까, 를 먼저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살겠다는 것은 바알신입니다. 바알신이니까 제 식대로 번역하면 그냥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더 살게 하고 행복하게 살게 할 거예요?”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은 바알신을 이미 따르고 있는 거예요. “주여, 무슨 일을 저에게 시켰습니까?” 이것은, 이미 그 사람은 참된 신이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4장에 들어와서 갑자기 일찍 죽이고 멸망시키겠다고 하니 사람들이 혼비백산이 되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이 혼돈스러운 거예요. 호세아는 알지요. 자기는 사명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바알신을 섬겼다는 것을 압니다. 바알신을 연구할 필요는 없어요. 본인들이 원하는 신이 바알신이었으니까요. 주변의 나라들이 바알신을 믿어서 잘 먹고 잘사니까, 나도 잘 먹고 잘 살면서, 오래 살고 싶다는 그 본능으로 그냥 바알신을 따르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혼란에 빠지니까 누구에게 묻느냐 하면,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묻겠지요. 그들이 그 시대의 스승이니까. 그래서 제사장과 선지자가 답변을 해주니까 강력하게 다투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더 오래살고 행복한 그 답변이 안 나오잖아. 당신은 왜 엉뚱한 소리 하느냐? 이 선지자야! 이 제사장아! 우리가 원하는 해답을 줘야지. 어떻게 하면 이 봉착된 난관을 어떻게 풀어헤쳐서 전처럼 잘 먹고 잘사느냐의 그 해답을제시해야 되지 왜 딴소리하느냐?” 라고 백성들이 제사장 붙들고 선지자 붙들고 공격을 해대니까, 제사장이나 선지자들도 이러한 혼란스러운 북 이스라엘의 혼돈에 대해서 답변할 것이 별로 없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이건데, 지금 일어난 혼란사태는 그 뜻하고 잘 안 맞으니까 답변을 못한 거예요. 답변을 못하니까 누가 또 흔들리느냐 하면,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같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해서 해석을 하려면 이런 사건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사건을 만나야 풀리게 됩니다.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 새로운 사건은 5절 끝에 보면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하는 이 대목. 여기서 어미라 하는 것은 제사장이지요. 제사장과 선지자를 낳게 한 그 어미, 그 어미를 죽인다, 없앤다. 그 없애는 최종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비로소 이러한 혼란과 혼돈이 벌어진 이유를 너희들은 알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미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다면, 백성들도 멸망하고 제사장과 선지자도 다 포로 잡혀가고 멸망하겠지요. 그렇게 멸망하게 된다면 그 전에 왜 선지자와 제사장을 이스라엘나라에 세웠느냐 하는 겁니다. 있으나마나한 것을 왜 세웠느냐? 있어도 멸망하고 없어도 멸망하는데 왜 세웠느냐? 그렇게 되겠지요.

제사장과 선지자를 멸하는 것이 아니고 어미를 멸한다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제사장과 선지자는 어디 출생이냐 하면, 바로 어미로부터 낳은 자식이라고 보는 겁니다. 어미를 멸망함으로서 제사장과 선지자마저 타락해서 아무 대책이 없는, 유명무실한 제사장, 선지자, 유명무실한 스승들이 우왕좌왕 하면서 백성들에게 어떤 답변도 못해준다는 이 현상을 통해서 “자, 이제 이스라엘은 멸망할 만 하지? 내가 아주 작살을 내는 것에 대해서 너희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나오는 거지요.

물론 백성들은, 제사장과 선지자는 동의 못하겠지만. 동의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어미를 멸한다는 것이 어떤 원칙에 의해서 어미를 멸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나라를 만들 때 그냥 만든 것이 아니고 거기에 언약을 실어서 나라를 만든 겁니다.

언약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계약. 계약이라는 말보다 더 실감나게 하려면 그냥 계약서. 하나님은 계약서대로 일을 진행시키지요. 그러면 선지자나 제사장들이 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계약서만 이야기하면 되는 겁니다. 이 계약서를 이야기할 때 제대로 반듯하게, 바르게 계약서의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그 제사장과 선지자들 자체가 어떤 자세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호세아같은 그런 자세가 되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목숨이라는 것, 내 목숨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약서가 계약서답게 실현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 생명과 목숨이 있다. 그렇게 봐야 되는 거예요. 그게 여호와의 뜻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여호와가 바알신과 다른 점은 주여, 주께서 자기에게 맡긴 일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사는가, 목숨을 부지하는가 보다도 무슨 일이 내 목숨보다 더 우선되는 거예요. 선행되는 겁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목숨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선지자와 제사장이 개판이 되어 가지고 백성들이 바알신을 섬기는데 그냥 방치하고 자기들도 따라서 섬기고 그랬겠지요. 온통 전체가 바알신을 섬겼으니까. 호세아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음녀라 했겠어요?

여호와는 계약서대로 하고, 그들은 바알신을 믿는다. 그러면 거기에서 제사장과 선지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 계약서대로 외치는데 있어서 자기 목숨을 떨쳐버려야지요. 먼지 털듯이 자기 목숨을 털어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목숨 털어낸다고 하면 “목사님,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닌데요.” 하겠는데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목숨이라는 것은요, 이게 허위개념이에요. 가상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죽었으니까. 여러분, 가상개념이 뭐냐? 수면제 다량 복용해보세요. 수면제복용하면 허황~되지요. 몽롱~하고 그렇지요. 목숨이라는 것이 없어요. 생명이라는 것이 없는데 사람들이 마귀로부터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었어요. 수면제를 먹어서 있지도 않은 목숨 부지 한다고 계속해서 쓸데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쓸모없이 인생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인생이라 하는 것은 실없는 농담 같은 거예요. 허위개념이란 있지도 않은데 인간이 상상하는게 허위개념이거든요. 나한테 목숨이 있다. 없어요. 목숨이라는 것이 없다니까요? 안개 같은데 무슨 목숨이 있어요. 있지도 않은 목숨가지고 겁내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네 목숨은 몇 년이냐? 무슨 몇 년이에요? 있어야 몇 년이지요. 있지도 않은데.

목숨이 허위개념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하면, 성경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이 카톡으로 좋은 질문을 했는데 “재림이 무엇입니까?” 질문이 간단해요. 답변을 해 드렸습니다. 재림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이 아는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재림이란 인간이 알고 있는 시공간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의 무대 세팅이 되어 있는데 하나의 무세세트에요. 실제가 아니고 그냥 세트라고요. 무대세트에서 인간은 한계 안에 가두어져 있지요. 인간은 그 한계 속에서 자기가 목숨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재림은 바깥에서 오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 세트의 베니어합판을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보니 인간은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거예요.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망이 태어나는 거예요.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가 태어났을 때 혹은 요양병원에서 사람 죽을 때 숨을 거두면 심장박동측정기가 스톱이 되고 갑자기 의사가 제사장이 된 양 진단이 나옵니다. “아무개 씨, 몇 년, 몇 월, 몇 시부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면 옆에서 간호사가 적고 그래요.

누가 태어났다는 이것은 “아무개 씨 사망하셨습니다.”에요. 왜냐하면 로마서 5장에서 사망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들어온 거예요. 처음부터 목숨이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사망이 있고 사망을 육체로 포장하다 보니까, 안에는 사망이 있는데 육체로 포장되어 있다 보니까 마치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허위개념이 발생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시공간은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 안에서의 시공간이 전부거든요. 이게 재림이 되면 그 세트장의 베니어합판을 담당자가 와서 다 뜯어냅니다. 뜯어내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죄 안에서 죽은 자들이에요. 성경을 천 번을 보니 뭐합니까? 교회 50년 다니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기본사실도 모르는데요.

그러면 목사님, 제사장은 뭐고 선지자는 뭐냐? 제사장과 선지자는 기름부음이 있어요. 기름부음은 뭐냐 하면, 심판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에요. 기름부음이 일종의 사인이에요. 심판을 이겼다는 직책이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기름부음이 있어요. 히브리서 1장 9절에 보면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동류보다 승하다는 말은, 더 높이 있다는 거예요. 레벨이 같은 레벨이 아니고 더 높은 레벨에 있다는 거예요. 기름부음은 소속이 위쪽에 있다는 뜻이에요. 요한일서 2장 20절에 나오지요. 성도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제사장들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죽음의 장소를 들락거리면서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선지자는 천상회의와 관련되어서 이 땅 죽음의 세계에서 하늘나라 소식을 듬뿍 담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와 제사장은 기름부음이 있어요. 이 기름부음은 무엇을 뜻하느냐? 숨겨진, 아직 나타나지 않은, 구약이니까, 임금님의 대변자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하늘에 계시는 왕,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대행자기능을 제사장과 선지자가 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제사기능이고 선지자는 진리를 유포하는 직책이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기존의 이방나라 말고, 그들은 세트장안에 있으니까, 그들은 자기가 지금 허위개념, 목숨이 없는데도 목숨이 있다고 우기는 식으로 얽매여서 살아가는 그들과는 달리 그들을 초월했단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구심점이 되어서 그래서 형성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그 구심점, 그게 과연 사실이라는 그 근거가 뭐냐? 그게 계약서에요. 하나님의 계약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요. 그러니까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계약서만 있을 뿐 목숨을 그냥 먼지 털듯이 털어내면 돼요 그냥. 계약서만 있으면 되니까. 그까짓 있지도 않은 목숨 벌벌 떨 필요 없거든요. 그거 던져버리고, 먼지 털듯이 그냥 털면 돼요. 먼지털이 있지요. 목숨아, 떨어져라.

목숨 떨어지니까 악마가 공격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거예요. 본인이 죽었다는데 뭘 공격해요, 죽었다는데! 목숨이 없기 때문에 인생자체가 실없는 농담같은 거예요. 실없는 농담인데 세상에 그걸 진지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걸 진지하게 여기면 뭐가 발생되는가? 화가,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계약서만 있는 거예요. 주님은 계약서대로 한다고요. 성경전체가 언약대로 되어 있습니다. 이걸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백날 해도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계약서대로 되어갑니다. 그 계약서에 게임의 룰이 있어요. 예수님은 그 계약서대로 오시는 겁니다. 그 계약서대로 이스라엘을, 어미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현재 기존에 있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구약은 뭐냐? “두껍아, 두껍아! 헌집 다오. 새집 줄게.” 이게 구약이거든요. 신약은 뭐냐? “두껍아, 두껍아! 새집 줄게. 헌집 다오.” 새집 받아놓고 헌집을 그냥 던지는 거예요. 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니까. 우리 생명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명만 생명이에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이 생명이지 우리 생명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같은, 쓰레기같은 징조, 징후 비슷한 거예요. 그것은 없는 거예요.

우리 목숨 그거 시장에서 시세가 한 근에 얼마씩 합니까? 없잖아요. 없어요. 주님의 생명이 살려주니까 오늘도 10월 30일, 내일 되면 시월의 마지막 날, 그냥 주님이 매일같이 살려주는 거예요. 주님의 생명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생명이, 계약서에서 흘러나온 생명이.

따라서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뭘 보느냐? 살았다, 가 아닙니다. 계약서를 쳐다보지요, 계약서를! ‘도대체 내가 죽었는데 왜 살지? 아, 계약대로구나.’ 살려주옵소서, 가 아니라 ‘주여, 무슨 일을 할까요?’ 계약서 증거하면 돼요. 이 세상은 계약서대로 되어간다. 계약서의 마지막 이벤트가 뭐냐? 재림이잖아요.

주님의 시공간이 있기에 이제는 옛것은, 구닥다리는 뜯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자아는 뭐냐? 인간의 자아는 현재 무대 안에 세팅된 가짜 시공간 가지고 세상을 논하고, 과학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국가를 논하고, 교회를 논하고, 나, 내가 누구냐, 그걸 논한 거예요. 이게 가짜인데.

있지도 않은 목숨이 있다고 치고 거기에 어떻게 하면 밥 먹고 사느냐, 이게 전부다 지나가면 실없는 농담같은 거라니까요. 아무 의미 없어요. 지옥가는 사람이나 거기에 신경쓰라 해요. 그들은 계약서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1절부터 4절까지 다 멸망하는 거예요. 다 조져버리는 거예요. 1절부터 4절까지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땅이 슬퍼하고, 거기 거하는 자가 없고, 들짐승도 없고, 이렇게 계약서대로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없애버리는, 그 궁극적으로 함축된 구체화는 뭐냐? 어미를 없애는 거예요. 어미를 없앤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이사야 7장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계약서입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존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계약서에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하거든요. 아들을 새로 낳는데요. 그러면 처녀가 낳은 아들은 뭐고 기존에 인간이 낳은 아들은 뭡니까? 어느 것이 참된 목숨이에요?

이 처녀의 임신은 기존의 인간들의 임신과 달라요. 인간의 임신은 다 가짜거든요. 결국 태어날 때부터 죽은 아기가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사망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을 허락하는 그런 세계, 죽음의 세계를 유발하는 거예요. 멸망의 세계.

기름 부은 성도라 하는 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멸망의 바다위에 떠도는 조각배같은 겁니다. 멸망의 바다위의 조각배. 오늘 좀 멀리서 온 조각배들이 여기 계시지만. 다들 멀리서 오셨지만. 그냥 이게 다 멸망이에요. 계약서대로. 계약서를 자꾸 밀치지 마시고 계약서를 들이대고 이야기합시다.

계약서대로 하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 낳은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에요. 그것만이 재림 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그 안에 아들의 생명이 작용하는 겁니다. 이사야가 이런 예언을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같잖지도 않다고 콧방귀를 뀌었겠습니까?

“무슨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했는데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여겼던 그것, 누가복음 1장 41-4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태중의 아이가 복이 있다는 말은,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저주와 관련 없는, 오직 복에서 시작해서 영원토록 복을 받는 유일한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이게 새로운 임신입니다. 새로운 아기에요. 이래도 이사야 7장에서 처녀가 아기를 낳는 이것이 농담입니까? 이게 비현실적이에요?

성경에서 처녀가 애 낳는 기록을 왜 했겠습니까?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출신이 어디야?”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이 오시면 계약서대로 하는데 지금 우리는 뭐냐 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계약서대로 새로운 아기를 출현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아담의 육으로 나온 모든 아기를 다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기의 출현과 동시에 뭘 동반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멸망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 양면성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 절차를. 이스라엘이 있었다. 망했다. 왜? 새로운 아기에 주목하라. 처녀가 아기를 낳는 그 아기, 그 아기만 의미 있지 나머지는 의미 없어요. 그분만이 생명이에요.

이 아기가 태어나자 갑자기 영적세계, 악마의 세계가 난리가 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그 발아래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지요.

이게 뭐냐 하면, 해와 달, 별이 있는 이 시공간은 한시적인, 일시적인, 임시방편의 무대의 세트장이라니까요. 멸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허물기 위해서 만들어진 세트장이라니까요. 해와 달, 별, 이게 전부 다. 인간이 기껏 바라보는 것이 밤에는 별과 달, 낮에는 해밖에 못 보잖아요. 그걸 보면서 자기는 살아있다는 거예요.

자기자신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고 제한이 있어요. 참 진짜 교회 왜 오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교회 뭘 들으러 오는 거예요? 그냥 가짜만 들으려고 옵니까? 가짜만? 내 인생 행복하려고 오는 거예요? 계약서는 안중에도 없지요. 지금 악마는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 2, 3절에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그 이적이 뭐냐? 창세기 3장에 아담을 꾀었던 그 옛 뱀, 뱀이 붉은 용이 되어서 머리가 일곱, 모든 권세, 이 무대 세트장에 있는 모든 것, 기존의 없어질 시공간 그걸 장악하고 있는 악마가 그 여자하나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데 성령께서 그 여자를 따로 떼어서 피신시킨 거예요.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2장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만 보게 되면 이 말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십자가와 부활은 이 시공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재림은 그 시공간을 바깥에서 뜯어내는 거예요. 자, 이제 드라마 끝났다. 뜯어내는 겁니다. 진짜 현실이 다 열리는 거예요, 그 때는!

물론 마리아가 남자 없이 아기를 낳은 그것도 진짜 현실 맞는데 사람들은 그걸 아주 개무시해 버리지요. 사람들은 계약서가 없어요. 자기 몸뚱이밖에 없다고요. 아, 난 밥 먹고 살아야 되는데……, 몸이 아픈데……, 생활비가 없는데……, 애가 애먹이는데……, 예수여, 여호와여, 삼위일체여, 부르면서 날 살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사망인데 뭘 살려줘요? 사망, 목숨이 없음, 그 없음을 노출시켜 달라는 것이 호세아 4장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약서대로 그 계시가 “너희들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원래부터 없어야 돼. 없음을 노출시킬 거야.” 그리고 기존의 구약은 잠시 신약의 상황을 보여주다가 나중에 무대와 함께 은퇴해야 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에요. 우왕좌왕하면서.

그들은 자기 목숨이 아까웠고 그들은 그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밥 먹고 살려고 일신상의 자기 명예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죽을 때 폼 나게 죽을 생각하지 마세요. 폼 나게 죽는 것이 어디 있어요, 폼 나게. 그냥 죽으세요. 폼 나게 죽지 말고.

나는 목사다. 그래서 죽을 때 폼 나게 이렇게, 하면서 자기 죽는 모습까지 연출을 한다고요. 두 손을 올려서 “아, 빛이 보인다.” 보이기는 뭘 보여. 그냥 죽어요, 그냥. 남에게 믿음좋다고 과시하지 말고. 진짜 제사장과 선지자는요, 이미 자기가 살았기 때문에 까짓 거 목숨 같은 것 그거는 먼지 털어내는 그런 것이라는 자세를 보여줬어야 했어요.

그걸 누가 보여주는가? 호세아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약서를 생각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임마누엘,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진짜배기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이거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게 그렇게 짜증나는 소식이에요? 교회 왜 옵니까? 기쁜 소식 들으러오잖아요. 그거잖아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요?

지금도 이 시대도 여전히 우리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구심점 노릇합니다. 그러면 제대로 하는 선지자나 제사장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교회 갑니까, 하지 마세요. 어느 교회 갈 것도 없이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전파하게 함이라.

바로 우리가 제사장이고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영, 성령,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미, 우리의 옛날 어미를 죽이고 새로운 어미로서, 바탕으로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백성으로서 성령이 와서 마련해주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호세아 때는 그 사건의 의미를 몰랐는데 새로운 사건이 와서 이 호세아사건을 덮쳐야 비로소 호세아 사건이 이해가돼요. 새로운 사건, 나중사건은 뭐냐? 그게 바로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통해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아,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될 이유를, 육적인 제사장과 육적인 선지자가 멸망해야 될 이유를 이제야, 이제야 호세아 4장 4, 5절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기존의 어미를 죽이고 새로운 어미, 새로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 아들을 낳고 어미는 죽어요. 임마누엘 되는 아들 하나 낳고. 마리아가 그렇게 하지요. 자기는 은퇴하는 거지요. 왜? 자기의 기능이 그 기능이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하도록 미리 조치를 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지자고 제사장이라면 아무것도 주님 앞에 요구할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매일같이 주께서 우리가 요구하기 전에 우리가 살아야 될 것을 다 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 걱정할 필요 없이 그날그날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그것만 하면 돼요. 왜냐? 새로운 시공간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고 과거는 이미 끊어졌으니까. 그날 주께서 살려줘서, 주의 생명으로 살려줘서 오늘도 있게 했기 때문에 그저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호세아처럼 그냥 하면 돼요.

그 일이 뭡니까?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이야기합니다. 그 일이 뭡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계약서. 그러면 계약서가 완성되었습니까? 완성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어요. 이미 기름부음 자체가 심판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악마를 이긴 새로운 직책자, 그들의 집합, 모임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계약서만 있다면 아낌없이 목숨조차도 털어버릴 수 있는 자유가 있게 하옵소서. 세상의 모든 것이 계약서대로 움직이는데 우리는 다른 신을 찾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계약서대로 다 이루신 주님만 바라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