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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름 수련회 8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2여름(사도행전)

여름 수련회 8강

정인순 2019. 9. 28. 14:50

음성8 8강동영상

 

 

강의 8

교재 7페이지 [그리스도론]입니다. 기존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을 이야기할 때는 그리스도론이 먼저냐 아니면 구원론이 먼저냐를 따집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원이 있는지. 우리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 중요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원 작업이 있다면 인간은 소외되고 배재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인간이 소외되고 그리스도만 높이면 어느 인간도 예수를 믿을 마음이 없고, 예수님을 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제일 먼저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실로 느껴지는 것은 내 몸이 여기 있다는 것.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어요. 다른 모든 것은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모르겠는데 이렇게 의심하는 것으로 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은 맞잖아?” 라고 나서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모든 관심사가 항상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 이후에 피히테라는 사람, 그 후 셀링, 그 뒤에 헤겔. 이들을 독일의 관념론자들이라고 하는데 관념론이 무엇인가 하면, 신을 설명할 때 세상적인 움직임으로 신을 설명하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합니다. 피히테라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우주론까지 다 나(자아)에서 나왔다”고 했고, 셀링은 “그 나(자아)라는 것도 자연의 일부”라고 했고, 헤겔은 “자연이고 인간이고 간에 하나님이 성육신 된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고 했고, 따라서 “세상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할 때까지 정신적으로 발전해서 이루어간다’고 주장했는데, 발전해 갈 때 반드시 성경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을 통해서 정과 반대가 합쳐서 최후의 목적의 나라로 간다고 했고, 그러한 정신적인 발전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꾼 사람이 포이에르바하고, 그 물질적인 발전에다 경제적인 여건을 집어넣은 것이 마르크스고, 그 마르크스를 유교적인 전통과 접목한 것이 김일성입니다.

우리 민족을 살리되 자체적으로 높은 사람 없이 공산사회를 이루어서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유교적인 전통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것은 협동해서 해보겠다는 것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북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못 먹고, 못 사는 것은 남조선을 미제국주의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참아야 한다.”

이 전체 사상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해방이 목적입니다. 예수라는 분도 우리 인간해방을 위해서 존재해야 사람들에게 먹히는 메시아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을 위해서 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을 배제해서 인간을 모독하는 메시아는 오디션에서 탈락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선택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러면 종교단체가 운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진정 가슴으로 행복이 벅차오릅니까? 아니면 이론상 그러니까 억지로 정답은 발설하지만 그것이 가슴으로 답답함을 느낍니까? 답답할 겁니다. 뭔가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성경상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내 몸의 욕망을 위한 하나님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겁니다. 이것은 역시 내가 우선이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 몸에 젖은 버릇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내가 죽는 마당에 그리스도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내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지, ‘하나님 있고 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광신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따져보세요.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어설프게 미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갈등 속에 있기에 자아분열 때문에 불행합니다. 한 곳에 미치면 세상이 없어져도 행복을 느낍니다.

일본의 중년 아줌마들이 K-pop 젊은 연예인들에게 빠져서 용돈을 모아서 한국까지 와서 가수들의 콘서트에 다니고 영화촬영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하면서 미쳐보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미친 교회에 가면 사람들 수가 많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제발 미치지 마세요.” 라고.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마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를 포기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포기한 거예요. 구원이고 뭐고 이런 것은 생각 못합니다. 왜? 인간 구원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 구원은 없고 구원이 있다면 그리스도에 의한 자기 구원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창세전에 합의한 사항입니다.

어떤 것을 합의했는가 하면,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야, 너 자신에서 벗어나서 예수 안을 만들어야 된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에서 뭐로 바뀌어야 되는가 하면 ‘예수 안’으로 범위를 확장시켜 줘야 되는 겁니다. 확장시키는 이 언약이 나사렛 예수 본인의 처지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했지요. 잔을 마시는 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이미 합의한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어요. 마태복음 16:21에 나옵니다. 부활하실 것을 알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자기 자신보다 주님의 계획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그 문제를 놓고 예수님도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어떤 계획 앞에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아예 안 하잖아요. 안 되는 일 시도하지도 마세요.

안 되는 것은 말씀이 여러분을 되게 하시는 겁니다. 되지도 않을 것을 자기가 해보겠다고 설치지 마세요. 예수님은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에서 예수님에게서 뭐가 발생됩니까? 십자가 사건이 발생되는데, 십자가 사건이 발생해야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맡은 이 직무, 반드시 마시도록 되어 있는 쓴잔,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마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포기하고 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예수 안’이 발생됩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이걸 설명하려고 하니까 저도 골치가 아프고 여러분도 골치 아플 거예요. 무엇이 먼저 있을 때는 먼저 있는 것 안에 들어오면 ‘안’이고 그 바깥은 ‘밖’이라고 분명히 드러나요. 그런데 ‘예수 안’은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발생된 범주(영역)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풍선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풍선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풍선 안이 생기고, 이것을 경계선으로 해서 밖에 생기지요. 자, 이 풍선이 없다고 합시다. 그러면 안과 밖이 있을 수 없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이 ‘나는 (집안)여기 있으니까 너는 (집)밖에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전혀 먹히지 않는 소리입니다. 인간이 사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결정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봅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7-8절입니다. “환란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한 몸이나 잘 간수를 하지 왜 전 우주를 다 치시는 겁니까? 이런 일괄적인 행동을 하시는 권한이 왜 생긴 거예요? 내가 옆집에 불을 지르면 안 되지요. 본문을 다시 봅시다.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벌을 주시다는 겁니다.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로 내 가족이고 식구라 하더라도 형벌을 내린다는 아주 냉혹하고 무서운 말씀을 착하고 유순한 사도바울의 입을 통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맞아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입니다. 편지 글에는 이런 과격한 내용을 썼고 실제로 복음을 전할 때는 거북한 소리는 안 했을까요? 그런 일은 없어요. 실제로 설교한 내용이나 서신을 통해 쓴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전하겠다는 자체가 인간으로써는 예의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인격을 모독해도 이렇게 모독할 수는 없어요.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다고 자기 엄마, 아버지 가리지 않고 다 불태워 죽인다는 것은 패역무도한 인간입니다. 학교 다닐 때 공납금 누구 줬는데? 어릴 때 기저귀 누가 갈아줬는데? 이제 와서 복음 모른다고 불살라 죽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자기 안과 자기 밖을 나누면서 이런 경솔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풍선이 없을 경우에는 누구도 안과 밖을 의미 있게 주장할 하등의 권한이 없어요. 예수님이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 안’이라는 것이 비로소 발생합니다. 하여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안과 밖이 없었어요. 예수님의 안과 밖에 등장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 이루시고 주의 자리에 앉아서 비로소 새롭게 만들어진 영역, 아무것도 없는데서 풍선이 하나 생긴 것처럼 새로운 영역이 발생되면서 ‘예수 안’이 생겼고, ‘예수 밖’이 따로 생긴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개인의 자격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의인의 자격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 안’에는 다 이루심의 혜택을 입는 영역입니다.
‘예수 안’은 예수님이 받았던 모든 혜택, 아브라함 언약을 지키면 축복된 약속을 받지요. 그 축복된 약속이 제공되는 장소가 ‘예수 안’입니다. 왜?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모세가 신명기 28장에서 이 말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그 복이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다 옵니다. 십일조 안 해도 복 받고, 전도 안 해도 복 받고, 예배 참석 안 해도 복 받고, 성경공부 참석 안 해도 복 받아요. 진짜로 그래요.

신명기 28장의 말씀은 모세의 율법 차원이고, 모세 율법을 새언약에서 모세 율법까지 다 포함해서 이루거든요. 이루면 의인이 되고, 의가 있는 곳에는 복이 오고 죄가 있는 곳에는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의인이 되어서 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뭘 해도 복을 받습니다. 밭에 가도 복이고, 발톱이 뽑혀도 복이고 뭘 해도 복이에요.

우리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으니까 땅의 목숨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거지요. “네 생명은 누구도 손 못 대는 곳에 따로 챙겨놓았으니까 걱정 말아라. 지상의 네 목숨 건드리는 자가 있거든 그것은 옷과 같이 벗은 것이기에 그들이 가져가도 상관없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지요. 골로새서 3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 밖입니다. ‘예수 밖’이 저주 받을 이유가 뭔가를 ‘예수 안’에서 따져보는 사람, 그가 성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으니까 우리끼리 행복하자.’ 이것이 아니고, ‘이상하다. 예수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지?’

내가 천국을 간다는 말은 내가 천국 감으로 말미암아 낸 대신 지옥 갈 사람이 필히 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 하나 천국 가는 명단이 밝히질 때는, 누가 하나 지옥 가는 명단도 밝혀지는 겁니다. 유도 시합 같아요. 심판이 깃발을 들어요. 한쪽이 승리했다는 신호로. 그러면 반대편은 자연적으로 패배가 선언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는 이유가, 야곱과 에서 양쪽이 있어야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택했다는 의미가 발생되거든요. 예수님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것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적용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야곱 군(그룹)에 속하는 사람과 에서 군에 속한 사람이 있어서, 에서는 모든 지옥 가는 사람의 대변자고 야곱은 천국 가는 사람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등장할 때 이쪽을 ‘예수 안’이라고 했다는 것은 저쪽은 그냥 ‘예수 밖’이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을 축복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예수님께 있는 모든 저주는 이쪽에 축복이 온 분량만큼 저쪽은 저주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천국에서 찬송소리가 높아질 때 지옥에서는 곡소리가 높아지는 겁니다.

저쪽에는 이를 갈며 슬피 울고 통곡의 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이쪽에는 찬송소리가 더욱 높아지는 거예요. 극과 극입니다. 너무나 대조적이에요. 부자는 목이 타서 물 한 방울이 그리워 물을 요청하는데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편히 쉬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그 모든 것이 개인적인 역량이나 능력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선이 예수로 인하여 새롭게 발생되었기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입니다.

제 강의를 정리해 보면, 기독론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예수 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과 합의 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셨다. 이것이 기독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일하셨다.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철학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은 신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 안 맞지요. 그들은 ‘예수 안’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신이 있으면 신은 만물을 위해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 철학에서는 상식입니다. ‘모든 것이 나타나서 머물다가 회귀한다.’ 이것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입니다. ‘모든 것은 신에게 복속되어 있다. 그럴 때 더욱 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이런 철학자의 이야기나 구약의 유대인들 주장과 유사해요.

구약의 유대인들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삼위일체. 그런 것 없어요. 그러면 철학에서 말하는 ‘신을 섬기자.’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믿었는가? 성전 회복, 이스라엘 회복, 땅 회복 같은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수표가 아니고 현찰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1948년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수용소에서 나와서 팔레스타인, 현재의 이스라엘 땅에 와서 자치 정부를 세웠습니다. 여기에 도움을 준 나라가 누구냐 하면 영국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탈레스타인 지역을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점령하고 있었는데 강제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주변 땅으로 몰아내고 떠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곳으로 가도록 연합군과 힘을 합해서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곳에 간 후에 살다보니 땅이 좁다고 여겼어요. 그들은 유대인들이기에 연합군의 결의 내용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다윗 시대에 가졌던 약속의 땅을 회복하려고 했어요.

여러분 중에 약속의 땅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지금 그곳을 가도 약속의 땅이 어딘지 모르고 그냥 땅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유대인들은 그냥 땅으로 보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보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우리와 달라요. 약속의 땅에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후손이 살고 있으니까 그들을 빨리 내쫓아야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될 종교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원자폭탄이 왜 있는데요? 그것을 언젠가는 터뜨려서 빨리 약속을 땅을 회복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욕심도 안 내요. 요르단, 시리아 땅 그 정도 땅을 차지하려 합니다. 그래야 아브라함 약속과 맞으니까.

괜히 사도바울이 등장해서 예수라는 사람을 거론하면서 갑자기 약속의 땅을 영적으로 처리해서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다”는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해서 사람들을 버려놓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똑바로 보라는 거지요. 에스겔, 예레미야를 보면 ‘약속의 땅은 약속된 씨에게 준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기에 정치적 차원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원자폭탄을 던져서라도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을 회복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입니다.

이런 유대인 중 한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할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힘으로 믿을 수 없도록, 우리로 하여금 오해할 만한 분으로 몰래 잠입하듯이 메시아를 보내었고 인간들을 지배하는 숨어있는 세력, 곧 악마는 인간들을 꼬드겨서 이 메시아를 실제로 살해토록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 태어날 때 헤롯이 미친듯이 두 살 이하의 아이를 다 죽였지요, 타국에서 온 동방박사를 곱게 돌려보내면 되는데 죽이려고 다시 불렀고, 천사가 나타나서 아이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시키고 이런 일이 벌어졌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보게 이런 마음이 생겨요. 주님은 왜 우리한테는 그런 일을 안 일으킵니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빨리 피하라!”든지 그런 계시는 안 내려 주시는 걸까요? 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아무 일 없는 것을 고마운 줄 아세요.

암 걸려서 낫는 것보다 아예 안 걸리는 것이 더 좋다는 거지요. 이것은 제 해석입니다. 믿지 마세요. 세상은 다른 차원에서 물결이 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육적인 차원에서 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안은 어떤 뜻을 갖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형성했던 그 무대장치 전부가 예수 밖으로 밀려나는 사건, 그것이 ‘예수 안’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모든 것이 그 다음부터는 ‘예수 안’에 의하면 바깥에 위치하도록 새롭게 조정된 그런 구조가 정착되고 정립된 그 관계가 ‘예수 안’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눈 씻고 찾아봐도 ‘예수 안’은 없습니다. 들어 갈 수가 없어요. 사람이 못 들어가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못 들어가니까 없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어요. 미쳤지요. 공상 과학영화를 보면 사람들을 공간이동 시킬 때 캡슐 같은 것이 있어서 쑥 들어가면 다른 곳에서 나타나잖아요. ‘예수 안’이 뭔가 하면, 캡슐이 들어가는 것처럼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 있다.” “어? 없어졌네.” 보니까 25Km 밖에서 새롭게 등장했어요. 이런 것이 예수 안입니까?

사람들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예수 안’을 찾지를 못해요. 그런데 이 안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요한 1서에 보면 예수 안에는 성령이 있고, 성령이 있는 자는 사랑이 있어서 두려움이 없고 심판이 이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 안인지 밖인지 어떻게 압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걸 그대로 보시면 되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이 안 보이니까 이것은 가위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 주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이다. 이것은 있는 것 같으니까 세모. ‘두려움이 없나니’ 요새 며칠 동안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것은 동그라미.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나는 심판 걱정 없어. 나는 죽으면 천국 갈 거야. 이것도 동그라미.

‘사랑이 있고, 두려움이 없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있으면 자기가 합격된 자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성령 안에 있다. 사랑 안에 있다. 두려움이 없다.’할 때는 이 안에서만 논의되는 것이 아니고 이 바깥에서 쏘아대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없고,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감사하고, 성령 안에 있다’ 이런 방식으로 안과 밖을 설명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 내용들이 그래요.

이걸 생각하시고 편지 내용들을 보시면 다 이해가 됩니다. “내가 우겨 쌈을 당하고 어떤 일을 당해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가 극한의 환란에 처했어도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거든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모든 것은 바깥에서 주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압박이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하는 말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도적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굶주림을 겪으면서도 “내 은혜가 네가 족하다(고후12:9).”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 항상 귀신이 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누구냐? 너희들은 가짜야!” 마귀가 그런 소리를 합니다. 우리 같으면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면 가는 길이 수월하도록 가는 곳마다 대우받고 환영받고 말씀 전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은혜 받고 하면 좋겠는데,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고 죽음의 위험을 겪고, 몸도 아프고, 옥에 갇히고, 풍랑을 만나고 했어요.

로마에 전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가는 길에 풍랑은 왜 만났어요? 주님은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예수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겪도록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성도 바깥에서 계속 터지는 상황에서 “너는 예수 안에 있느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그런 일을 겪으며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를 위한 주님이 어디 있으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일하기 바쁜데 언제 우리를 챙깁니까? 그리스도의 안과 밖, 다 이룬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론입니다. 인성과 신성이 어떻고 이런 신학자의 주장은 다 성경 내용과 무관합니다.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몰라야 하는가? 꼭 알아야 해요. 어떤 분은 “이번 수련회 초반 강의가 어렵다. 꼭 이런 내용을 공부해야 하는가?”라고 하시는데, 꼭 아셔야 합니다. 인간의 아이디어가 그 정도로 계속 나오기 때문에 미리 알아야겠지요.

예수님의 기독론은 언약을 다 이루어서 예수 안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마저 거기에 따라 일하시는 모습이 그리스도론입니다.

이제 구원론을 봅시다. 사도바울의 구원론은 이걸 아시면 됩니다. 율법 이 한 가지만 아시면 구원론은 다 떼는 거예요. 율법은 거룩한 것이죠.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율법을 지킬 위인이 있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전부 다 율법에 의해서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왜? 너무 거룩하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너무 더럽기 때문에. 그런데 더러움을 심판하는 것이 멈출 수 없는 주님의 할 일입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언급했지요. 철학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면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까? 아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는 점입니다. 선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으면 선한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악이 있고 죄가 있더란 말이죠. 그러면 그 죄와 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에서 어거스틴과 많은 철학자들이 이런 해답을 내립니다.

“악은 없다.” 간단하지요. 분명히 사기꾼 있고, 나쁜 짓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선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착함이 얇아서 그런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IQ가 낮아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하다면 그 사람을 좋은 환경과 IQ높이는 주사를 놓아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고 어릴 때부터 따뜻한 사랑을 마음껏 받으면 그 사람은 결코 악해질 수가 없다. 악한 것은 그 사람에게 잠재되어 있는 선을 발휘할 기회를 주변상황 때문에 갖지 못해서 악한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빵을 훔치는 것은 악한 짓이지만 배부른 사람은 빵을 훔칠 리가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스토아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많이 가진 사람이 선이 약간 모자란 사람에게 자신의 남은 선을 나눠주면 국가 전체가 공통적인 선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윤리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기독교보다 낫지요? 기독교 뭐 별것 있나요? 이런 마음이 기독교교리가 아닐까요? 마치 고린도후서 8장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나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은 뭔가 하면, “시간적 여유와 환경의 풍요만 제공되면 얼마든지 사람을 교육시켜서 나쁜 사람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형제도는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형제도가 있으면 선할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차단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선한 것, 동양철학에서는 ‘성(誠)’이라고 합니다.

맹자의 성선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선하게 태어났기에 선한 품성이 꽃피기까지 그것을 꺾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인권운동이 나와요. 복수가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사랑과 용서가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성폭행과 살인 피해를 입은 가족들은 가해자를 죽이고 싶지만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살려두면서 차츰 회개시키면 혹시 압니까? 사랑의 원자탄이 될 지. 손양원 목사처럼 자기 아들을 죽은 자를 양자 삼은 행위를 두고 사람들이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는데, 혹시 그런 인간으로 변할지 누가 알겠어요? 사람이 복수를 안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뭐냐 하면, 내가 복수하게 되면 복수당한 가족에 의해 내가 또 복수를 당할 우려가 있어요.

더 나아가서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인데도 안 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아들 죽인 놈 나와! 내가 교회 다니고 목사니까 너를 용서하는 거야.” “목사님, 고맙습니다.” “그래, 이제 신학교에 가서 선교사가 되어라. 내가 등록금도 대주고 뒷바라지 할게.” 그러면 그 사람은 가는 곳마다 간증하겠지요. “저는 진작 죽어야 될 살인자인데 하나님 은혜로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서 이렇게 주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복수하지 말고 용서를 하신다면 주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 찰 것입니다.”

이런 간증에 감동, 감격해서 헌금하고 난리를 치지요. 여러분, 세상에서 감동 받을 생각하지 말고 무시당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가해자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남들에게 감동 줄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할 권리가 없습니다. 맞아죽지 않은 건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여기세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사랑을 베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 주제에 무슨 사랑을 해!” 이런 고백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의 모든 입을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 빼고는 사람이라고 설치지 말란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의인도 아닌 것이 의인인 체하며 일하고 그러지 말란 말이지요. 우리는 율법 앞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요.

그 다음에, 건져주고 안 건져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권한이 저쪽에 넘어가 있는 겁니다. 지금 구원론하고 있어요. 자, 그러면 기존 신학에서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분석해서 그 속에 인성도 있고 신성도 있는데, 인성과 신성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되면 온전한 구원이 되지를 않아요.

어설픈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인성에 합류하게 되면 어설픈 인성이 주님 안에서 완벽한 인성으로 간주되고, 완벽한 인성을 기다리고 있는 로고스라는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 오면 밝아진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인성과 하나가 되면 그야말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적인 존재가 된다.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수용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아 같으면 구원론에 있어서 뭐가 필요 없습니까? 구약부터 내려오는 율법이 불필요하게 돼요.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제사법에 의해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흠 없는 어린양을 잡고 제단을 쌓을 때, 그 때 ‘그 위에 나의 이름이 임해서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 주는 것은 우리를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해자가 되고 우리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그 어린양이 약속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을 받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어린양 자체가 복을 받겠지요. 어린양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린양 받쳤으니까 이제 내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종속되어야 돼요? 어린양에게 일어난 그 일에 우리가 종속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성전이 이렇게 있고 동서남북 네 방향이 있는데, 동쪽에 문이 있어서 이쪽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죽습니다. 죽게 되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불에 태우지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것처럼. 태우는데 안 태우고 남는 게 있어요. 피를 남기고 기름을 남깁니다. 피와 기름을 남기고 여기서 피를 뿌려요. 성막 중간에 커튼이 있고 맨 안쪽은 지성소, 바깥은 성소라고 합니다. 지성소는 7월 10일(대속제일)에만 들어가고 다른 날은 못 가고, 성도에는 제사장이 들어갑니다. 7월 10일에는 지성소까지 들어가고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지금 보세요. 분명히 양이 들어갔는데 양은 분해되어 없어지고 피만 하나님께 나아가 만납니다. 피가 덮치는 여기에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에다가 흠 없는 제물의 피가 첨가되면 그 순간 이 전체의 나라가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거예요. 만약 이 나라에 울산대학교가 있다면 그 간판 내려야 합니다. ‘울산제사장 나라’로 간판을 바꿔야 합니다. 여기에 잠실운동장이 있다면 운동장은 ‘잠실 제사장운동장’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신나라양복점이 있다면 ‘신나라 제사장양복점’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에게 종속 되어야 해요. 그런 것이 그림자로 하늘나라 천국의 모형으로 지상에 있는 겁니다. 지금 모세 율법에 의하면 이 나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씻었으니까 이제 경기하러 가자.’ 경기하러 가면 삼성 라이온즈은 없어지고 ‘삼성제사장 라이온즈’가 있어요. 어디를 가도 전부 거룩한 나라에요. 더 이상 옛날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게 바로 ‘예수 안’입니다.

거룩이 싫지요? 귀찮고 거북하지요? 그 거룩 앞에서는 더 이상 우리가 죄로 인하여 받는 저주와 사망은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긴 상태에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우리 행실이 올바르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은 율법 구조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구원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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