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 5강
지난시간에 기독교회에서 철학과 차이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유대교전통이 그러하니까 그런 겁니다. 구약전통에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은 한 분인데 하나님 옆에 있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분 같으면 하나님 빼놓고는 전부다 누가 만들었을 것인데 그렇게 만들었을 때 없는데서 만들었다면 예수님마저도 없는데서 만들었다는 거기에 포함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없는데서 만든 거기에 예수님도 포함이 되느냐, 이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 때는 없는데서 만들었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들 때는 그것도 없는데서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사람 사고방식, 사람의 논리에서는 없는데서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하면 있기는 있는데 원인이 없다는 뜻이에요. 있기는 있는데 원인이 없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것은 없음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가 없겠지요. 이미 있으니까, 이미 있는 것이니까 없음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만들어 놓고는 손을 쓸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괜히 만들었어. 괜히 만들었어.” 이렇게 후회를 해도 이왕 만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아예 안 만들었으면 몰라도 이왕 만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든 간에 그것을 없음의 자리로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그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된다면, 이것이 성립한다면 이 있음에서 없음, 이것은 성립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냐, 어쨌든 있는 것인데 있는 것이 어떻게 없어지느냐는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창조가 무효가 되지요. 창조가 무효가 된다면 하나님은 실없는, 쓸데없는 일을 하신 거예요.
이 있는 것을 지옥 보내든지 천국 보내든지 그것은 돼요. 왜냐하면 천국가도 있고 지옥가도 있으니까 그것은 되는데 “너 있는데 너 이제 없어졌어.” 그것은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한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없는데서 있다, 라고 언급을 꼭 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예수님을 제시해서 다른 종교와 차별화를 해야 되거든요. 예수그리스도를 제시하기 위해서 뭘 집어넣는가, 없는데서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어떻게 관여했다, 라고 설명을 해서 예수님 위주로 종교의 방향을 틀다 보니 없는데서 있게 했다고 되는 겁니다.
그 당시의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있음에서 세상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인이 되고 그 하나님의 있음이 아까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죠, 하나님의 형상이 물질과 결합이 되면 이것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피조물이 되는데 여기에 데미우르고스라 해서 창조주가 등장하는 것은 없음에서 창조한 있음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이 다양성을 할 때 그 다양성에 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중간에 창조주를 집어넣은 것이지 없음에서 있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은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는 뭐냐,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해서 뭘 노리는가하면, ‘이 있음이 바로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예수님을 통해서 소통한다’. 이렇게 설명하기 위해서 기독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기독교신학자들이 내세운 것은 뭐냐, 예수님을 빼버리면 피조세계는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없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없는데서 생겼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없는데서 생겼는데 어떻게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기 위해서 없는데서 있음이라고 논리를 몰고 간 겁니다.
약간의 일리가 있지요. 일리는 있는데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를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없는데서 있었다, 이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 있음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있음의 원인을 예수님으로 본 겁니다. 철학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있게 했다”는 그 문제가 형태만 바뀌어서 그대로 유지됩니다. “예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원인이 예수님 때문에 있음’가 되고 이는 곧 “예수님의 형상이 있음 속에 개입이 된다.”가 됩니다. 이렇게 설명해야 논리가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떤 분이기에 현재 있음을 있게 하느냐, 라고 설명을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신학자들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없음에서 있음도 예수님으로 해결하고, 죄 있는 것에서 죄 없음으로 만드는 것도 예수님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이 신학자들이 지어내고 고안해 낸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도 되지만 인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피조물과 하나님관계를 어디에 대체해서 축소시키느냐 하면 예수님 존재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인성과 신성의 그 교환 작용에 의해서 이 존재문제도 해결하고 이 죄 있음이 죄 없음으로 되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다 해결 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문제가 하나 생겨요.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우리 인간이 타락했잖아요. 인간이 타락했는데 예수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예수님 내부에서 타락 작용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내부의 타락 작용을 예수님이 처리를 해 놓고 그 처리를 일단 ‘예수님의 형상’ 속에 담고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죄 있는 우리가 죄 없이 된다는 논리를 제시하려 합니다. 딱딱 맞아 떨어지거든요. 이 신학자들, 나름대로 고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철학보다 기독교가 우위에 있다는 자존심을 걸고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한 겁니다. 물론 배후에서 데오도시우스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이 신학을 가지고 기안을 올려서 황제의 결재를 맡으면 로마전역의 학교나 교회에 유포를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대로 교육받으면 누구나 신자가 되는 거예요. 이미 신자는 되었지요. 유아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고 난 뒤에 신자 된 것이 뭐냐,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제 2차, 제 3차 세미나와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래야 로마 제국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타락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타락했다고 하면 곤란하거든요.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니까. 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죄 있는 죄인을 용서하는 자격이 되느냐,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여기에 뭘 집어넣는가, 여기에 예수님의 로고스를 집어넣습니다. 예수님 속에는 로고스가 들어 있다는 거지요. 자, 예수님 안에 로고스(신성)가 들어 있고 또 인간이 들어 있는데 이 인간 속에는 육과 영과 혼이 있다는 말이지요. 영과 혼을 합해서 영혼이라 하지요.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0?~390?)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서 타락한 형태를 지녔기에 이 영혼을 로고스에 살짝 집어넣으면 신성도 괜찮은 신성이 되고 예수님의 인간성도 괜찮은 인간성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괜찮은 신성과 인성으로 만들어 놓으면 여기서 프뉴마(영), 곧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영으로 복제를 해 버리면, 예수님의 이 육과 영혼의 괜찮은 이것이 인간 속에 덮쳐버리면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이 괜찮은 영으로 정화가 되고 정화가 되면서 예수님 안에 일단 들어가고 난 뒤에 뭘 기다리느냐하면 예수님의 고상한 신성을 기다린다고요, 그러면 인간이 예수님 안에서 신성으로 합류가 되면서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는 장치를 예수 그리스도로 마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 못해서 환장했어! 창세기에서 선악과 생명나무 따먹지 못하게 괜히 막아놓고 애먹인다는 식이죠. 이 아이디어가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성경구절(요 17:21)의 내용은 이런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교류와 직류전류를 바꾸는 트랜스, 나이 드신 분들은 도란스라고 많이들 부르지요, 그 트랜스를 사용해서 전류를 바꾸게 되면 예수 안에서 인성에서 신성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원죄, 죄, 이런 문제보다도 신성만 입히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동방신학의 진수를 여기서 그대로 보여주게 되는 거예요.
아폴리나리우스의 논리에 대해 그 당시 교회는 “그러면 안 돼!” 라고 했죠.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러면 예수님 속에 있는 인성의 영혼을 로고스가 대체해 버리면 예수님은 영혼이 빠져 있기 때문에 진정한 영혼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 모습을 띤 가현체에 불과해서 삼위일체에 어긋난다.” 해서 거부당했습니다. 거부당했다는 말은 뭐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까? 결국 예수님 속에는 인성과 신성 둘 다 있다고 한 거예요. 문제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신성과 인성, 인성과 신성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계실 때도 인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계실 때도 인간 같으면 독립적인 예수라는 분이 둘이 된다.”는 말이지요.
둘이 되니까 인간들이 어떤 경우 기적을 원할 때는 신적인 예수님을 골라잡아서 “주여!” 하고 신적인 예수님을 부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인간적으로 연약해져서 예수님에게 인간적인 동정을 사고 싶을 때 “주님은 인간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아픔을 체휼하시는 분이니 우리 아픔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이렇게 해서 편리한 대로 예수님을 골라잡아 이용할 여지를 제공하는 거예요. 이용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예수님 본인이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이렇게 되지요. 아예 가시나무새가 되어 버렸어요. 내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서 밥을 떠 잡수실 때 이것을 인간적으로 먹어야 되느냐, 아니면 신적으로 먹어야 되느냐,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물위를 걸을 때는 신적으로 하다가 마리아, 마르다 집에 가서 울 때는 신은 울 수 없기에 인간적으로 트랜스, 교류와 직류를 변환해서 “지금부터 인간입니다, 삐리리리리!” 이런 식으로 한다는 식밖에 안되거든요. 실제로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행동이고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는 인간으로 죽었지만 부활할 때는 신성으로 부활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지요. 예수님 옆구리에 스위치가 하나 달려 있는 모양이라.
또 문제가 뭐냐, 예수님의 의지가 두 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적인 의지로써 할 때냐, 하나님의 의지로 할 때냐, 그 때 그 두 의지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온갖 쓸데없는 걱정들을 다 하는 겁니다. 레온티우스(485-543)라는 사람이 ‘위격내재(엔티휘포스타시스)’ 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예수님의 내부에서 로고스라는 그 신성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예수님의 인성에 늘 개입해서 관리하고 조절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본성은 유지된다.”라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늘 관리한다는 이 말은 언뜻 보면 예수님 자체 내의 문제인 것 같지만,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믿는다는 말 자체도 부끄럽지만, 예수님을 파악하고 이용해서 구원받으려 할 때……, 믿는다는 소리도 이제는 부끄러워요, 믿는다는 소리도 하지 맙시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내부장치를 제대로 파악을 해줘야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하면, 로고스가 예수님의 인성에 마중을 나오니까 “저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하고 상대하거든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없는데서 생긴 사람이 하나님과 상대하려면 중간에 똑같이 인간같이 생긴 인간을 만나서, 인간같이 생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신 예수를 만나서……, ‘인간같이 생긴 인간’이라고 하면 안 되지요. 삼위일체에 걸리면 큰 일 나니까 말을 조심해서 해야겠지요. 자칫하면 아리우스(알렉산드리아사람)처럼 돼버려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사본질로서 창조된 분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요.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면 예수님이 마중을 나올 때에 우리가 “예수님, 너무 인간적입니다. 신은 너무 고귀해서 만날 수 없고 우리 인간적으로 만납시다.” 예수님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 하면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한 인간, 그만큼 겸손하고 낮춰진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부터 친구’라는 말씀을 하셨지요.(요 15:14) “이제 우린 친구 아이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우리 친구 아인가!” 이렇게 가게 되면 거기서 누가 기다리느냐하면, 로고스가 기다려요. 갑자기 126층 하늘나라로 솟구쳐 올라가서 하늘나라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굉장히 구원 쉽죠.
왜, 우리는 하늘나라 하나님이 너무나 무서운데 그것을 익히 아시고 친밀하신 인간성을 가지고 오셔서 그 인간성을 가진 우리를 데리고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는 내부적인 교류장치가 예수님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교육 자재로써 로마 전역에 쓴다면 어지간하게 교만한 인간 아니라면 “이거 다 믿습니다!” 하지요. 이것은 사실 믿음이 아니고 그냥 아는 것인데 전부 다 “믿습니다.”가 돼버려요. 그러면 일단 신학자들은 한 숨 돌리지요. 이렇게 해서 고을마다 예수를 다 믿어버리니까. 세례 받을 때 “일단 뿌릴 테니 받아 봐.” 해서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뿌려놓고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게 되면 “예수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모르는데요?” “누구처럼 성질 급하게 하지 말고 가만있어 봐.” 해서 그 다음부터 육으로 교육에 나서면 “아하,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슬람교나 토속종교나 신화의 종교가 아니고 제대로 구원의 메시아를 만났구나. 이 정도까지 우리를 생각해서 배려해 준다면 우리 쪽에서도 예수를 믿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대해서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 참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러면 로마 제국이 편안하고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지요. 눈치 들을 보니 지금 다들 그렇게 살아들 오셨어요.
이게 바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교재 2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면죄’보다 교회라는 인간들의 집결체에서 제공하는 ‘면죄 방식’이 훨씬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면 이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태도이다.】 사도바울이 면죄를 이야기할 때 면제받는 방식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무에서 유로 창조했기 때문에 면죄방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인가,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언급하지 않은 것을 교회는 아주 친절하게, 대중들 편에서 서서, 또는 아주 고상하게 그들의 신앙적인 표현으로 제공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주께서는 하지 않은 것을 우리 인간들의 끈끈한 정에 의해서 특별히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온갖 것을 신학적으로 차분하게 체계를 만들어줬으니까 분명히 하늘나라 가면 상급이 많을 것이다.”라고 그들은 자부했습니다.
사람을 꾀어서 데려오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못하고 우리들이 교육이라는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거지요. 인간 속에는 이성이 있고 질서를 구현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데려오는 겁니다. 일단 교회에 데려오게 되면 제 2의 작업, 삼위일체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동방교회 같은 경우에는 무엇이 교회의 주제가 되느냐하면, 마리아, 성인숭배, 삼위일체 숭배하는 것, 지금도 오소독스(Orthodoxie) 교회에 가면 삼위일체를 같이 모시고 있어요. 왜 삼위일체를 같이 모시는가하면, 여러 신학자들이 그동안 애쓰고 노력해서 이 만큼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지혜를 집약해서 결론 내린 것, 그것이 바로 역시 삼위일체가 땡이다, 그 말입니다.
삼위일체 거부하면 그것은 지옥가고 삼위일체 수용하면 그것은 천국가기로 온 가톨릭교회가 정했던 겁니다. 가톨릭(catholic, 보편교회)이라는 말을 이그나티우스(Ignatius Antiochenus ? – 107?)라는 교부가 처음 사용했는데 전체 교회가 삼위일체로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되기로 한 판국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을 필요 없어요. 그냥 삼위일체 공부하면 구원 받습니다."라고 활짝 개방된 거예요. 그런데 교재에 보면 “사도바울은 ‘면죄’가 아닌 ‘면죄방식’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네가 면죄함을 믿느냐?”라고 하는 것이지 “네 면죄함을 받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네 죄 용서를 받아라.”라든지 “네 죄 용서함을 입었다.” 이러면 되는데 “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게 되면 면죄가 너에게 주어진다.”라는 방식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이 말이지요. 심지어 세례라는 것도 사도바울은 준적이 없다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야기하지요. ‘나는 누구에게도 세례준적이 없다.’(고린도전서 1:14-16) 이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사도바울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방식도 없다고 하는데, 당신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다 같은 인간임에도 당신은 방식이 없다고 하고 나는 방식이 있다고 하고, 삼위일체 교육을 받아서 그렇게 말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방식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느냐?”라고 물을 때 “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라고 해서 여기에 ‘믿음’이 들어가요. 사도바울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는 이런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함들이 이런 식으로 다 결론 내려진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구약에서 다 했기 때문에.
따라서 이렇게 실컷 해본들 이것을 결코 믿음이라고 쳐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어디에 속하는가, 육에 속하는 거지요. 그러면 육은 뭐고 영은 뭐냐, 사도바울이 영이라고 하는 것은 걸림돌이 있어야 돼요. 이런 행함, 인간의 아이디어, 로고스, 여기서 나오는 신학체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엎어지고, 코 깨지고, 면상 다 망가지고, 도저히 일어나지도 못한 채 좌절되고 절망이 되어야 그것이 영적인 이야기가 돼요. ‘내가 옛날에는 바리새인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지만 그리스도를 알고부터는 그런 것은 다 똥이고 오줌이었다.’ 하는 겁니다. 분뇨 치우는 차 불러와야 돼요. 교회마다 다 똥차 불러서 호스 대고 다 빼내버려야 돼요. 똥, 오줌 빼내는 전문 업체 불러서 다 빨아내야 돼요. 빼내도 또 나오겠지만.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이쪽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할 때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것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지.” 정신을 지금 엉뚱한 데 팔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국가라는 것에 인간의 자기존재를 심어놓아 버리면 그 국가의 존재와 더불어서 자기 존재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는 나라 안에서 복을 받아서 내가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국가가 교회로 바뀌면 이제는 국가라는 이름의 교회로부터, 또는 교회라는 이름의 국가로부터 나는 내세까지 보장받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가 어느 정도 안심을 느끼는 겁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삼위일체 교리 같은 것은 사실은 우리가 듣고자 했고 우리가 기대하고자 하는 나의 육적인 욕망의 화신들이지요. 나는 이런 소리를 듣기를 원했고 이렇게 해서 나는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을 외부에서 마귀가 눈치 채고 잘도 나에게 봉사하고 협조를 해 왔던 흔적이 교회사가 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양보가 없지요. ‘면죄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면죄는 이렇게 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존재분석에 들어간다든지 예수님의 신성이니 인성이니, 로고스가 어떻게 침투하니, 인격이나 의지가 두 개니 한 개니, 그런 것이 일체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바울뿐이 아니라 사도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른편’입니다. 포지션이지요(위치). 오른편에 누가 서 있느냐, 이 존재문제가 아니고 포지션입니다. 예수님을 존재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자기 존재를 엮으려고 새로운 예수라는 존재를, 메시아를 상상하게 돼요. 그런데 ‘오른편’은 인간이 상상해 낼 수가 없습니다. 왜, 오른편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발생된 포지션, 위치이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라는 개념은 ‘주’라는 어떤 인물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주’라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이 발생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구약에서부터 언약 적으로 그렇게 흘러 내려오는 겁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그 주 예수는 어디에 계시는 주 예수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 예수입니다. 하나님 우편이란 어디냐,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낸 자리,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자리에 서실 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미 그동안 꾸준하게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 자리는 주의 이름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주의 이름이 드디어 실체화 되고 인물로 등장할 때 그 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주의 오른편에 있다는 말이지요. 자, 이것을 그림으로 한 번 그려봅시다. 구약은 유일신입니다. 신이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하면, ‘면죄방식’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면죄했다는 사실만 있으면 되지 면죄방식은 필요 없어요. 주께서 하는 면죄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어떤 방식을 동원하면 그것을 우리가 우리 것으로 인수해서 따낼 수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인간이 세운 삼위일체의 그 분석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따 낸다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면죄 받는 방식의 일종이라서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방식을 허용한 적이 없어요. 그런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그것만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용서하시는데 주님만이 용서가 돼요. “주님이 용서한다.”는 것과 “우리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용서를 하실 대상은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만 주님의 용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긴다.”(출 33:19 ; 롬 9:15)는 말씀이거든요.
“주님께서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만 용서해준다.”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이 됩니까?”라고 또 묻고 싶지요. 자꾸 우리는 ‘주께서 하신다.’고 하게 되면 또 어느새 내 모습이 여기에 등장해 있다는 말이지요. 자꾸 우리는 주께서 뭘 하게 되면 또 뭘 하나 걸치게 되고, 또 뭐가 하나 등장하고, 회개하라, 하면 회개해서 구원되고자 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이렇게 항상 이 바깥, 주께서 하시는 이 바깥에서 다가가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용방식이 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는 모든 것이 ‘없음’이 되는 겁니다. 인간보기에 있어 보여도 그것 자체를 ‘없음’으로 간주하고 일을 시작하시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사래가 태가 죽어서 거기에 자식이 없습니다. 없는데 없는 자식이 있게 되었어요.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네가 믿으면 그것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여기서 없다는 말을, 내가 여기 있는데 없어지면 없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자꾸 내 중심으로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에서는 누가 없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역사 속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꾸 우리 이야기로 끌어당겨서 이용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는데 예수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부께서 성자와 두 분 사이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자리를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제시해주시고 주님은 언약대로 원수를 이기면 주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주의 자리에 앉게 되면 이 앉은 자리에서 뭐가 나오느냐하면, “이제 내 백성,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더 이상 악마, 원수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지는” 자리가 주의 자리입니다. 이 주님의 자리로부터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뭘 아느냐하면, 주님 입장에서 우리는 없는 자요, 주님 입장에서 우리는 죽은 자인데, 죽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같은 말이 돼요.
‘죽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왜 같은 말이 되느냐하면……,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같은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같은 말이 된다고요. 없던 인물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등장했고 그 없던 인물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이 죽음은 세상 어떤 인간도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죽음, 사실상 유일한 죽음, 제대로 죽음의 내막을 다 함유하고 있는 진짜배기 죽음……, 우리의 죽음은 제대로 죽음도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죽음은 그냥 의미 없는 죽음이에요, 목적 없는 죽음이고 이유도 없는 죽음이고 그래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서만 알고 있는 죽음이에요. 여기에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주제넘게 끼어들면 안 되는데, 이 성부와 성자사이에 자기들의 삼위일체를 들고 와서 자꾸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드는 이유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가, 이런 것은 묻지도 않고 그저 사람들을 여기에 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니 하나님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니 버릴 리가 없다, 이러면서 전부 다 집어넣는 거예요. 로마제국 전체 국민들을 여기에 교육을 시켜서 다 집어넣는 거예요. 대단한 모세지요, 대단한 모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보기에 인간들끼리 인간이라고 하지만 주님보기에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을 가지고 우리가 인간이라고 우기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지만 주께서 일체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 맞잖아, 할 때 주께서는 언약 사건을 일으켜 버립니다. 언약 사건을 일으켜 버리면 “거 봐, 네가 인간 아닌 것이 들통 났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는 인간으로 제사를 드렸어요. 나중에 보니까 인간이 아니고 죄가 지배하는 겁니다.
사람이 지배하는 인간이 아니고 죄가 지배하는 겁니다. 죄가 지배하는 그것을 가인이 어떻게도 반항할 수가 없어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지배하는 속에서 가인이 해야 될 일은 있어요. 특별한 일이 있어야 됩니다. 가룟유다가 속에 사탄이 들어가니까 가룟유다는 그냥 쉴 수가 없어요. 멀뚱하게 있을 수가 없고 뭔가 자기가 맡은 사명을 다 해야 됩니다. 이 땅에서 그가 해야 될 사명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값을 쳐서 팔아먹는 그 역할, 일당 받고 하는 작은 엑스트라 같은 배역을 맡아서 할 뿐이에요.
아담은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아담이지 나머지는 아담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이름 그대로 아담은 흙이지 인간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이 아니고 그냥 흙으로서의 아담이지요. 진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창조하시면서 원한 것은 의로운 인간을 원한 겁니다. 죄지은 인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인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작업이 호출되고 초청받은 겁니다.
첫째 시간에 한 이야기지요. 사탄이 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길을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바울과 실라를 소개해 줘요.(행 16:17) 마귀는 이렇게 바울과 실라를 아는데 정작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못 알아봅니다. ‘어디서 사기꾼이 또 왔나.’라고 생각하지 못 알아 봐요. 그런데 마귀는 알아요. “당신은 빛의 세계로 구원하는 하나님의 종이지요.”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바울이 하는 일이 뭡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건지는 거예요. 건질 때 이 세상에서 건진다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도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너 자신으로부터 너 자신을 건지는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플라톤 철학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인간인데 앞으로 죽고 난 뒤에 어떻게 영원히 살 것인가?’ 출발점이 ‘나는 인간이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나는 짐승과도 다르고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여기서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의 마태복음이나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너는 악마에 속한 존재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자체적으로 인간되는 방법은 없어요. 없는데 진짜 예수님이 와서 영을 줄 때 예수님을 섬기는 용도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세요. 걱정을 하면서 살든 걱정을 안 하면서 살든, 결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면죄행위, 주께서 벌이시는 용서행위에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관여해 왔습니까, 하는 것을 고백하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용서받았는데 어떻게 해서 용서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사도바울이 어떻게 용서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용서받기 위해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어떤 분들은 사도바울이 용서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면 우리가 용서 받습니까? 안되거든요.
그냥 주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을 성령이 찾아 오셨다, 주님이 찾아 오셨다, 할 수 있는데 그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너무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하는데 이 절망을 즐기세요. 이 절망을 즐겨야 됩니다. 절망을 즐겨야 쓸데없는 삼위일체 환상을 꾸지를 않지요. ‘예수님의 존재를 분석해서 예수님의 인성으로 가서 신성으로 튀어 나온다,’ 이런 되지도 않는 상상력을 발휘하지를 않지요. 사람들이 하는 이 삼위일체 이론들은 다른 종교에도 이미 다 있어요. 철학에 있으니까 이것이 없을 리가 있습니까, 다 있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면죄방식에 대해서 왜 사도바울은 언급을 하지 않느냐하면, 면죄하는 방식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예수님의 독점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면죄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주께서 사용하실 때 우리는 그냥 결과물이고 예수님의 작품이 될 뿐이에요. 그냥 살아가면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티내면 되는 겁니다. 용서받은 그것을 티내시기 바랍니다. 용서받은 것을 티내는 방법은 세상에서 아무리 죄 있다 해도 그게 죄가 안 된다는 사실을 떠벌이면 되는 거예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Saint Gregorius of Nyssa, 330?~395?) 라는 사람이 갑바도기아의 3대교부중의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신도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우상이라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인간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 속에 담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그게 왜 우상이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 안 해놓았어요. 그게 우상이다,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말을 안 했어요. 제가 그 애매한 것 정해 드립니다. 인간의 언어가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단체로 소속되어 있는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미국 가서 신,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때는 영어로 god, 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얼추 sin, 이라고 알아듣습니다. 그 시대 문화의 언어를 자기도 만들어 낼 수 없고 기존에 있는 언어를 골라잡아서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신은 인간 속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신을 믿는 그것도 우상”이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쉿! 그 입 다물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입을 다물어야 되는 거예요. 디오니소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Areopagita)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신비주의 계열입니다. 나중에 나오는 보나벤투라, 쿠자누스 같은 사람들이 교회사에서 다 신비주의라서 연구하다 하다 안 되니까 “우리 그만 입 다 다뭅시다.” 하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입을 안 다물었습니다. 다물라고 때려도 안 다물었어요.
유대인들이 입 다물라고 때려도 입을 못 다물겠다고 한 거예요. 왜냐,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는 겁니다. “너희들이 죽었다고 한 예수님은 살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를 왜 죽였습니까? 결국 삼위일체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런 ‘잠재태’가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거지요.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무슨 소리인지를 우리는 뭔지 모르지만 그들은 알았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던 그 현장에 없었잖아요.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을 2차, 3차에 걸쳐서 한 번 들어보자는 말이지요.
들어보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요. 다 그게 현명한 선택들입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는 또라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돌아버린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마음은 가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믿으라고 하면서도 믿는 방식은 이야기 안하고 죄 사함 받으라고 해놓고 죄 사함 받는 방식은 말하는 적이 없고. 어떤 사람에게는 거듭나라고 했는데 “거듭나면 된다고요? 아, 그럼 되겠네요. 그러면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면 되겠네요.” 그것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왜 거듭나라는 말을 사용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이렇게 해요.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내가 한 것이다.” 하니까 “성령이 뭡니까?” “너는 성령도 모르나?”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바람 이야기를 했어요. “바람이 임의로 불 듯이 성령이 임의로 분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니고데모 입장에서 처음부터 거듭난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요. “바람이 부는데 바람 불면 구원받은 줄 알아라” 그렇게 돼야 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거듭나야 된다는 말을 해 놓고 바람(성령)도 모른다고 면박을 주고 땅에 살면서도 땅의 일을 모르냐, 고 하면서 제시한 땅의 일이 뭐냐, 바로 유일무이한 사건,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
“모세가 놋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죽어서 하늘로 들리는 사건이 벌어지면,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바람같이 임하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 외에는 없다는 거예요. 이 예수님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종합해 보면 간단하게 이겁니다. “네가 하늘나라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보내줄 때만 하늘나라 들어갈 수 있다.” 그 말이거든요. 이것이 다윗언약에 보면 나와요. 다윗언약에 보면 다윗약속에 의해서 오신 다윗의 자손만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마감(완성)을 할 때 영광의 문은 열립니다. 시편 24편에 있는 말씀처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24:7-8)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 했는데 장례식에 시신이 누워 있다 합시다. 목사가 설교본문을 시편 24편으로 잡아서 “영광의 문이 열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라고 했을 때 그 누워있는 시신의 유족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마치 뭐와 같은가, 마술사가 “뜬다, 뜬다, 뜬다, 뜬다.” 하면 그 시신이 막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문들아, 열려라! 빨리 문 안 열어? 안 열어? 안 열어?”하는 식으로요. 그처럼 성전이라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서……, 성전이라는 통로는 그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선풍기가 있으면 팬이 돌아가고 여기서 바람이 나와서 시원하잖아요. 요새 나오는 선풍기는 가운데 구멍이 뻥, 하고 뚫려 있어요. 그런데 바람이 그 뚫린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여기는 뭘 집어넣는가, 어린양의 시체를 집어넣어요. 어린양의 죽음을 넣어버려요. 흠 없는 어린양의 제물을 여기에 담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린양을 잡는 것이 면죄방식이 된다, 안 된다? 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어린양 잡는 것은 우리가 잡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초복 중복 때 닭 모가지 비틀어서 잡는 것처럼 어린양도 잡을 수가 있어요. 어린양의 죽음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양을 잡는 너도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쪽에서(선풍기의 뚫린 그 구멍 자체에서) 바람이 불어야지 이쪽 인간 쪽에서 나가는 것은 삼위일체든 뭐든 안 받는다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어리석음이니까.
십자가라는 말은 걸림돌이에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가서 너를 건질 테니 네가 오는 수고로움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언약은 아들만 이루기 때문에, 주는 우리가 주가 아니고 따로 한 분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이 일을 하도록 좀 내버려 두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일을 해야지 우리가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일해서 주님의 공로로 공짜로 구원받으면 그 사람은 자기 일을 거기에 집어넣지를 않지요.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은혜고 주님의 공로로만, 주의 이름으로만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노렸던 천국 백성의 방식입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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