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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름 수련회 7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2여름(사도행전)

여름 수련회 7강

정인순 2019. 9. 28. 14:49

음성7  7강동영상

 

 


7강


지난 시간에 사도바울의 복음이 삼위일체와 다른 것, 동방교회는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삼위일체 섬기는 것을 가르칩니다. 혹시 유럽 여행을 가서 동방교회를 가보게 되면 하나님 세분이 나란히 놓여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리석은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뭘 포함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만이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까지 포함해서 십자가 사건을 형성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두 가지 구조를 다 갖고 있어야 십자가를 설명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을 복습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있고, 아들은 어떤 때 아들이냐 하면 다윗 언약에 의해서 완성된 아들이고, 이 다윗 언약은 반드시 여기에 하나님의 원수를 염두에 두고 아들을 통해서 원수를 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은 유일한 신인데 주의 자리를 따로(주께서 내 주에게) 마련하는 겁니다.


원래 신은 하나인데 하나에게 두 분의 주가 등장하는 이러한 변신이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파악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윗의 아들이 나타나거든요. 아들이 나타나게 되면 아들을 살해하고 가해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살해하고 가해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급해 보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혈육으로 엮어져서 그들을 모세를 따라서 애굽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이 국가가 약속의 땅을 차지한 그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다윗이라는 왕이 등장하죠.


다윗 왕을 등장시켜 다윗 왕의 후손으로 나온 이스라엘이 누구를 죽입니까? 이스라엘이 다윗 언약을 따라 온 아들을 죽임으로써 육적인 자기 본색을 다 드러내고 이러므로서 다윗 언약은 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이 폭로된 것입니다.


목적은 같은데 목적을 기대하는 양쪽이 서로 원수지간으로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어디 있느냐? 인간의 육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는 겁니다. 육이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인데, 그러면 아담 안에 뱀의 자손이 담겨 있는 겁니다. 같은 아담 안에서 한쪽은 메시아가 나오고 한쪽은 마귀가 나오고.


이걸 다시 한 번 소급해 보면 몸 안에 마귀 있고 예수님 있고. 양쪽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역사들 통해서 만개하고 펼쳐지게 되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해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 영역 빼놓고는 전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런 세력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요.


아까 동방교회 이야기했는데, 동방교회가 진짜 교회라면 바로 이 십자가를 증거해야 하고 그 십자가 사건에 모든 인간들이 가해자로서 가담되고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가해자를 노출시키는 십자가를 섬겨야 할 텐데 그들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로 단체 회원 모집하는데 급급했단 말이지요. 사람들이 납득하고 이해하는 이론을 가지고. ‘신이 인간이 되었기에 여러분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논리를 유포하고 교육합니다..


“여러분도 신이 되고 싶지요? 이왕이면. 하나님이 먼저 인간이 되셨는데 그것을 믿기만 하면 여러분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했단 말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호시탐탐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단체라고 자처하는 교회에서 ‘하나님 만듫기’를 이벤트로 제시하니 마다할 위인은 없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여기서 뭐가 빠졌는가 하면,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는‘가해자- 피해자 구조’가 완전히 다 빠졌어요. 이 바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 믿어 주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하나님, 저 아시죠? 바쁜 중에도 주의 말씀 듣는 것 아시지요?” 이렇게 나오니까 여기에 무슨 가해자의 의식이 생기겠어요? 안 생기지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사랑받는다는 생각만 든단 말이지요.


이게 다 육에서 나온 것입니다. 방금 말한 이것이 바로 신구약을 전부 합쳐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단순화 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단순화 시킬 수 있지요. 이스라엘에서 아우라처럼 번져 나오는 것이 있는데, 우유를 그릇에 부으면 크라운현상(왕관 모양이 생기는 현상)이 일어나지요. 이스라엘이 세상에 던져지면 여기서 크라운현상이 생긴단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우주론입니다.


육에서 나온 우주론 말고 진짜 우주론은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움직임을 나타내면서 그 주변에서 번져 나오는 우주론입니다. 언약적 우주론입니다. 그 우주론이 아인슈타인과 현재 천문학자와 망원경이 밝혀내는 그러한 우주론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에게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밝혀진다는 점이고, 망원경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는 안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은 마귀는 봐도 마귀인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의 안목은 마귀에 의해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뒤틀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 취급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판단력은 완전히 망가져 있어서 마귀를 천사로 보고, 천사를 마귀로 여기는 그런 혼란 속에 있기에 마귀를 본다고 해서 알아볼 수 없겠지요.


이스라엘이 가는 통로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는데 그 원수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절에 ‘거짓 것’이라고 합니다. ‘거짓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 주변의 것과 엮여지면서 비로소 등장해요. 육이 ‘거짓’이라고 무엇을 규정하는 그 자체가 엉터리요 거짓입니다. 마치 사기꾼이 남을 보고 “저 사람 사기꾼이야”라고 외치는 것을 믿을 것이 못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해코지했으니까 하나님께 벌 받아야 해.”라는 주장을 정당화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을 공격하고 귀찮게 했어요. 그래서 헤롯은 세례요한을 목 잘라 죽이고 쟁반에 그 목을 담아 사람들이 보게 했습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거짓 것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요한은 참되고 헤롯은 거짓된 자입니다. 이 말을 헤롯에게 해 보세요. “헤롯 당신은 참된 세례요한을 죽였기에 거짓된 자입니다.”라고 한다면, 헤롯을 말하기를 “왕인 나를 공격하고 귀찮게 했기에 세례요한은 거짓된 자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참과 거짓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는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 나라 속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의견 차이가 있느냐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는 집단적인 이스라엘이 활동하면서 거짓 것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움직일 때만 ‘하나님의 원수’도 집단화되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이란 다수가 되더라도 숫자로는 1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을 집단으로 표시함으로 말미암아 육적이고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 혈육(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개인 가정사 문제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중력이 자기 안으로 쏠립니다. 우리 집안 잘 되고 나만 잘 되면 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개인에서 하나님 쪽으로 나아가려면 개인이 집단을 위해서 포기해야 될 사태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포기해야 될 사태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이성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중에 하나님의 전리품을 훔친 사람이 있었어요. 아간이란 사람인데, 이 아간 때문에 집단이 전부 전쟁에서 패했어요.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사적인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집단적으로 이뤄야 될 하나님의 계획에 방해를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뭘 알아야 됩니까? 사적으로 내가 이득을 챙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집단이 나보다 우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겠지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집단의식이 발생됩니다.


이렇게 집단의식이 발생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모든 언약, 십자가라든지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십자가 믿고 이런 이익을 얻었다.” 라고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쪽이 이득을 얻게 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는 그런 구조입니다. 한쪽이 주식이 올랐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주식을 사서 망한 사람이 내린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부동산이 올랐다면 다른 지역에서는 부동산으로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약속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고 앞의 것만 챙기고 자기 것만 챙기는 것을 옳은 행동으로 봐주자는 그런 룰이 있어서 그 룰에 따라 살아가는 거예요. 다윈에 의하면 이것이 자연도태설입니다. 안 될 놈은 제거하고 될 놈만 남아서 계속 살아가는 그 원리.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우리는 그 사회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것은 사적인 이익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개인이 이득이 아니라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사적인 용심을 챙깁니다. 거짓말로 나아만에게 속이고 돈과 옷을 받아 챙깁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이 갖고 있던 문둥병이 나아만 장군 개인의 문둥병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 옆에 있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린 거예요.


그런데 전체적인 언약을 모르고 게하시는 커미션을 챙기려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이 갖고 있던 그 문둥병이 그대로 옮겨가서 멀리 있던 거짓 것이 엘리사 바로 옆에 있는 거짓 것과 대비되도록 한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문둥병은 저주를 의미합니다. 저주받는 인간조차도 구약의 언약 아래서는 그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문둥병이 걸린 거예요.


문둥병이 걸리면서 나아만 장군은 진짜 놀라운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문둥병 걸려야 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당하고 그 정당함이 나의 정당함으로 왔다.”는 것을 나아만은 감사히 여겼습니다. 사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에게 부탁하지요. “혹시 제가 고향에 가서 여호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여호와로 생각하고 섬길 테니까 이해해 주세요.” 라고 했어요. 일종의 파견 근무를 하는 것처럼 어디를 가도 “여호와 때문에 살았습니다. 여호와 때문에 살았습니다.”를 반복해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집단화 되고 그 안에서 사적인 것은 빠져야 됩니다. 뺀다고 빠집니까? 안 빠지지요. 여기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발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오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사람은 자기 딴에는 이스라엘 집단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적으로 전환된 이스라엘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입니다.


요한복음 11:50에 보면 “한 사람이 죽어서 우리 민족이 살면 유익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 했습니다. 야구 경기에서는 희생 번트를 통해서 자신이 죽고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칭찬들을 일입니다. 그러나 사적인 경우에 개인적으로 희생을 하게 되면 그 보상은 누구 해줍니까?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본인은 손해잖아요. 그래서 희생할 때는 반드시 개인적인 희생이란 자체를 없애버리고 이 희생마저도 하나님께서 시켜서 한 고귀한 희생이라는 감을 가지고 희생에 나서도록 합니다.


12사도가 순교하는 것도 사적으로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게 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것을 감사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헌금과 기도와 모든 봉사가 다 그렇습니다. 사적으로 이것 해서 얼마나 이득을 얻을 것인가 라는 생각은 하지 말란 말이죠.


신약 성경에도 그런 것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특히 현대인들에게 난처하게 만드는 구절이 뭔가 하면 “네가 누구를 대접하려거든 대접 받은 사람이 고마워하면서 되갚을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대접하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남을 대접할 때 먼저 물어봐야 돼요. “제가 회를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돈 벌어서 저에가 회를 사줄 의향이 있습니까?” 그렇게 나오면 상대방이 “그럼요 사람이 염치가 있지. 형편만 되면 회보다 더한 것도 사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탈락입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은 어느 인간이 지키겠습니까?


이것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이유는 “나를 통해 구원 받았다고 그 은혜를 내게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예수님만 지켜야 하니까요. 만약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놓고 “근호야, 구원 받았지. 은혜 갚아야지.” 이러면 예수님마저 그 말씀의 위반자가 됩니다.


제가 헌금하지 말라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헌금으로 사는데 받아 챙기는 사람이 다시 헌금해 버리면 방향성이 이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자기도 십자가 지고, 예수님 금식한다고 자기도 금식하면 주님이 고맙다고 하시겠어요? 교만한 짓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지고 같이 고통스러워하자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지게 하신 자는 바로 저입니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십자가 믿는 사람이에요.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그분의 혜택을 입겠는가?’ 그걸 받아드리는 사람이 십자가 믿는 사람인데, 예수님 십자가 지셨다고 죄송한 마음으로 “다른 것은 없고 닭이 있는데 이것 삶아 드릴까요?”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은혜의 값을 하게 되면 예수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래서 하고 싶거든 딴 거 하세요. 내가 나의 죄를 얼마나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가를 찾아내면 돼요. 자기 잘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색하게 걸쳐놓는 여러 가지 행위들의 껍질을 벗기시면 그 죄로 인하여 더욱 더 주님의 은혜가 더 높아 갑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3차 전도여행을 했던 사도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거짓 것’이나 ‘하나님의 원수’ 이런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진행하는 방향에 아우라(뒷배경)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시대를 거친다면 그 시대에 합당한 거짓 것이 등장하고, 그 다음 시대는 그 다음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거짓 것이 나오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와요.


처음에 이스라엘의 거짓 것은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첨가되고 이스라엘이 계속 진행되면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적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사울 본인도 몰랐어요. ‘내가 하나님만을 위해서 이스라엘에 봉사하겠습니다.’ 하고 선언한 왕인데, 그 왕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못 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언제 알았는가? 덩치 큰 골리앗이 자기 눈앞에 등장했을 때 비로소 자신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가정에서 아들을 장가보내면서 예수 믿는 며느리를 맞이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들과 며느리의 신앙을 생각해서라기보다도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인데 절에 다니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본인의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평소에 자신이 자기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산다는 점을 몰랐는데 아들이 절에 다니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골리앗이 등장한 거지요.


골리앗이 등장했는데 이쪽은 여호와 하나님 편이니까 이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자를 불러놓고 “우리는 기독교 집안이니까 교회 나가야 되고 교회 나간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하겠다.” 이렇게 했는데 골리앗이 달리 골리앗이겠습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고집도 센 거예요. “저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댁의 아들이 하다 결혼하자고 졸라서 하려고 했는데 그런 조건을 지켜야 한다면 저는 결혼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옆에서 “엄마, 왜 그래?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이렇게 나오고. 결국은 부모가 지지요.


누가 골리앗을 보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냈습니다. 사울 왕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소년 다윗이 해결함으로써 드디어 사울이 발작을 일으킵니다. 악신이 사울을 움직이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악마’고 ‘거짓 것’입니다. 악신에 들어가 다윗만 보면 발작을 일으키는데 사울도 어쩔 수 없어요.


이 악마라는 것, 하나님의 원수, 다윗 언약의 원수는 인간 대 인간의 감정이 아니고 감정을 초월한 그 다윗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어요. 사울은 악신에 들려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다윗에게 창을 던지는 겁니다. 창을 던질 때 다윗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게 던지는데 다윗은 자기에게 던지는 줄 알고 황급히 피한 후 황당함을 토로합니다. “왕이여, 왜 이러십니까? 저는 당신의 사위입니다.” 그 때 사울이 하는 말이 “내가 미쳤지. 어떻게 너에게 창을 던질 수가 있어? 정말 미안하다.” 본인의 행동을 본인도 몰라요.


나중에 본격적으로 강도가 심해질 때, 그 때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비로소 압니다. 내가 골리앗을 이기고 내가 하나님 잘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내 안에 뭘 발견하는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이 대목은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외친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같은 계통, 다윗 언약의 계통이기 때문에 다윗 안에 장차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 사건이 먼저 스며든 거예요. 그래서 다윗 본인은 몰랐죠. 하지만 본인이 처해있는 시대적 상황에 각색된 신약의 십자가가 미리 앞당겨서 오게 되면 앞당겨진 그 시대에 각색자와 그 원수들이 그 시대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극을 펼치는 겁니다.


비로소 다윗은 ‘내가 잘났다.’가 아니라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내 속에 있는 그분이여, 그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가 됩니다. 요한복음 8:56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가 보고 기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아브라함이 언제 예수님을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보고 기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다는 말이 없어요. 기껏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세 분의 등장인물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비약한 말이고, 천사 세 분을 만나고, 중간에 천사 한 분은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두 천사에 의해 고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 가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물어봅니다. “아브라함이여. 당신이 언제 예수님을 봤습니까?” 아브라함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네가 내 죄가 뭔지를 모르는 이상, 내가 언제 예수님을 보았는지를 너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다. 너는 네 시대의 ‘하나님의 원수’을 알고 나는 내 시대의 ‘하나님의 원수’를 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 시대의 그리스도는 그 시대 사람만 알고,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퍼지고 있는 적그리스도, 반복음적 요소들이 우리의 활동에서 계속 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론은 반드시 거짓 것이 표출될 때 그것이 제대로 된 우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의 우주론은 별들의 생성, 블랙홀부터 해서 중력의 입자를 발견해서 처음에 질량이 어디에서 발생되었는지, 진동하는 초끈에서 어떻게 질량을 주는 근원적인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입자로부터 각종 입자들이 나왔는지를 규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냥 있음에서 있음으로 에너지 형태가 바뀌어졌을 뿐입니다. 그냥 ‘있음’에서 ‘거짓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 우주론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는 다윗이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피해자고 가해자는 사울인데, 나중에 피해자 다윗이 가해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 의해 피해 당한 자가 있습니다. 우리야 장군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야는 억울하지만 사적으로 억울함을 따질 수 없고 집단적인 진짜 이스라엘은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희생된 것뿐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그렇게 죽었으면 적어도 아내가 수절하고 참으면서 살아야 될 텐데 좋다고 다윗에게 가서 아들까지 나았지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인가요? 만약이 다윗이 동사무소 직원이었다면 그와 결혼했겠습니까? 안 했겠지요. 왕이니까 얼른 결혼했지요. 처음에는 남편이 죽고 피해자인 것 같았는데 다윗에게 시집을 가서 가해자가 되고. 이것이 인간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인간은 종잡을 수 없어요. 럭비 공처럼 내가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되도록 우리를 채용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그 말씀 되도록 우리를 채용해서 그 말씀으로 몰아넣는 식으로 우리를 말씀 속에 있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하는 말씀은 우리가 못 지키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목을 조르지요. 우리가 사용되는 겁니다. 왜요? 우리는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생성케 하는 재료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사용해서 말씀이 생성되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거짓 것은 없애버리겠는데 주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계속 거짓 것이 생산되어야 할 이유가 성경에 거짓 것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에 적그리스도가 나오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양산되어야 합니다. 왜요? 세상은 말씀대로 되도록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귀찮은 것은 없애버리고 이것은 지워버리고 싶겠지만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주의 말씀에 관여하지 마세요. 그냥 내 담당이 뭔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면 그 주변에 하나님의 새로운 우주관이 등장하는데 그 우주관에는 주님과 싸워야 될 원수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국가기 때문에 원수도 국가로 등장합니다. 국가대 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후대의 이야기고 옛날 고대국가는 각각 신봉하는 신을 내세웁니다.


블레셋은 다곤 신이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죠. 그래서 우리 한 판 붙어볼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는 “거 할례 받았나?” “할례 안 받았다.” “우리는 할례 받았는데 한 판 붙어볼까?” 그래서 이 집단 대 집단의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그러한 기계장치가 이스라엘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 기계가 돌지요. 이스라엘 기계가 돕니다. 이스라엘 기계는 모세언약대로 작동합니다. 모세 언약대로 작동한다는 말은 하늘에 있는 거룩이 지상에 장착되어 지상과 함께 움직이는 거룩으로 내려오는 것이 모세언약입니다. 그래서 모세 언약은 법궤가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움직여야 됩니다. 하루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 돕니다. 돌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여리고 성이 마지막 일곱 바퀴 돌 때 무너진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들은 언약궤가 시키는 대로 돌 뿐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하늘로 올라가는지 땅으로 꺼지는지 그것은 그들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언약궤를 바라볼 때는 언약궤에서 나오는 거룩만 발산하면 되지 뒤따라가는 내 쪽에서 나오는 것을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행진을 할 때 북소리에 맞춰 걸어가듯이 기계처럼 움직이면 됩니다. 그런데 일곱 바퀴 돌 때 무너질 것은 아무도 예상 못해요. 그런데 일곱 바퀴 다 돌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양쪽 다 놀랐어요. 진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거룩한 분인 것을 이스라엘 본인도 놀랐고 여리고 사람들도 놀랐고. 이스라엘 본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이 승리하심에 놀랐다면 여리고 성의 전리품을 그들이 갖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십자가 알고부터 ‘십자가 알았으니 은혜 갚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어요. “아, 십자가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구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공짜로 천국에 넣어주다니. 이것 정말 충격이야. 나를 이토록 무시하다니.”라고 놀란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보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더 무섭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기대를 걸 게 아무 것도 없음이 확연해졌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그 즐거움이 구원받은 자의 충격적인 즐거움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께 무시를 안 당하려고 하니까 문제잖아요. 무시당합시다! 무시당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주님께 철저히 무시당하고 “이 멍청아! 너는 내가 아니면 지옥 갔어.” 이런 무시당함이 행복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주님께 철저히 무시당하면 당할수록 우리의 사적인 고민은 없어집니다. 그런 고민은 사치입니다. “아들이 키가 안 커서 고민입니다.” 이것도 사치입니다. 아들 키가 그보다 더 작아도 괜찮아요. 주님이 우리를 무시하는 그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가 구원 받을 때 그들의 직업을 탓하지 않습니다. 직업이 뭔가 하는 것은 구원 앞에서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갑자기 “이왕 구원 받을 것, 국회의원이나 하면서 구원 받지 창기가 뭐고?” 이렇게 됩니다. 쇼크를 받으세요. 특히 연세 높으신 분들은 “내 청춘은 어디로 갔나?” 이런 한탄 하지 맙시다. 나날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해지면 늘 이팔청춘입니다. 82세를 거꾸로 하세요.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이 원수라는 말입니다. 내가 원수인데 원수를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해요. 무시 안 당하려 하고, 주님과 같이 이야기하려 하고, 주님과 겸상하려 하고, 신처럼 되려 하고, 삼위일체 알아서 구원 받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이 원수인데, 그런 것 안 해도 구원하셨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신학공부하고, 해외 선교하고 난리들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일종의 기계인데 그 기계에 거룩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담겨있는 거룩이란 분이 자기 언약을 성취하는 결과로써 주변에 거짓 것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는 겁니다. 나의 승리가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전리품으로 있는 것을 우리는 족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우리의 용사요, 우리의 반석이요, 우리의 피난처시며 산성인데 그분이 만든 성전에 우리가 문지기라도 된다면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습니다. 참새는 좋겠다. 공중을 마음껏 날 수 있어서. 처마 밑에 집을 짓는데 나는 왜 날개가 없어서 새처럼 집을 짓지 못하는가?


‘주님의 성전에서 살고 싶다.’ 이런 마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위기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가 나중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하실 때 극단적이 되지요. 예수님 십자가 피를 우리는 피를 가지고 마중 나가야 됩니다. ‘나는 죽은 목숨이다.’라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주쳐야 됩니다. 내가 살아 있고서는 십자가에 죽은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우리를 만날 때, 그 때 우리의 모든 향수도 주님 발 앞에 뿌린 여인처럼,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보다 더 귀한 죽음임을 고백하게 되지요.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로 갈 때는 이미 주님은 베드로를 죽은 목숨으로 간주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거기에 이 일을 통해서 살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했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인데 죽은 목숨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제 [인간론]을 봅시다. 교재 6페이지 밑에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에서는 이 인간론이 어떻게 개입되는가? 여기서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말씀이 들어갑니다.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해서 아담은 산 영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죽은 자를 늘 살려내는 거예요. 여기서 죽었다는 말을 숨 끊어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율법은 거룩입니다. 모세 언약은 거룩입니다. 진짜 거룩함 앞에서 우리가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율법이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은 “모든 사람으로 입을 막고 심판과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롬 3:19)


그러면 심판과 저주 아래서 죽은 사람이 무슨 수로 살 수가 있습니다. 고맙게도 같이 율법 안에 들어오신 분이 있어요. 율법 안에 같이 들어와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인간론은 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다는 것은 율법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모든 인간이 죄가 있는 거예요. 비록 흠이 없고 죄를 안 지었다 하더라도 율법 아래서는 다 죄가 있는 겁니다.


죄 있는 육신으로 율법 아래서 죄인 되었고 저주를 당했기 때문에 육신에 있는 그곳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디에 있었는데 어디로 갔다는 그 경로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전에는 육에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신학자들은 크게 오해를 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은 부활 후 육신이 여전히 있는가, 아니면 영으로 존재하는가?’ 이것을 따지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 안에서의 모든 개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적 개념과 상관없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말하는 영은 육체와 대비되는 영이 아니고 육신이 있고 다 영광스럽게 있더라도 육이라는 악한 세대와 비교되는 차원에서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육신의 어두운 세계와 비교해서.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에 속한 사람은 육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거예요.


“똑바로 살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이미 구원 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네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 왜 육신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법에 대해서 겁내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느냐? 이 바보야!’ 하는 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왜 네 신분도 모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군 복무를 마친 후에 10여 년간 꿈에서 군 복무를 했어요. 꿈에서 계속 제대 날짜 계산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도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깼어요. 군 생활에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요.


이 트라우마( 정신적 상처 ) 이것이 우리 몸에 배어있어요.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너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 너를 정죄하리요.” 아무도 정죄할 사람이 없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내가 오늘도 나쁜 짓했구나. 내가 회초리를 맞아야지.” 스스로 채찍질합니다. 그래서 꿇어 앉아 기도하기. 점식 식사 금식. 이런 것으로 나쁜 짓을 착한 일로 보상하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것이 트라우마입니다. 군 복무는 이미 끝났는데 아직도 군대생활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해 주께서 대신 죽으셨는데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환란과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라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환란과 핍박이 오면 두려워하면서 “이제 주님의 사랑에서 잠시 끊어진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해요.(롬 8:35-39)


사람이 몸이 아프면 원상복귀만 생각해요. 인간론이란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살려내는 영을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인가 그것이 인간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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