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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38:7-11 / 유다의 자식들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8:7-11 / 유다의 자식들

정인순 2018. 7. 11. 22:26

 음성        동영상

 

 유다의 자식들

 

 

이근호



2018년 7월 11일            

 

본문 말씀: 창세기 38:7-11

(38: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38: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38: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38:10)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38:11)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가정이란 인간 행복의 근원입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보호자가 있어 성장하는 인간으로서 는 평생 내내 든든한 후원자를 찾게 마련입니다. 가정이란 이 든든함의 필수적인 환경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고된 일상을 보내어도 안락한 가정이 있다면 심신으로 편히 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내내 든든한 삶의 둥지를 견지하려고 신경 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든든한 인생의 후원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순탄치 않는 인생사를 통해서라도 든든한 하나님이 함께 있어 자기를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평소에 신 앞에서 순응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바로 이러한 일반적인 하나님상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인정치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언약’을 통해서만 참된 하나님의 면면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유다 가정은 야곱 언약의 영향권 안에 놓여 있는 가정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받았던 언약의 축복은 그대로 아들의 인생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곧 일반적인 하나님이 아닌 참된 하나님을 만나는 상대자로서 유다 가정이 다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 맏이 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사실은 ‘하나님은 책벌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마음먹은 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으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아들 세 명에 중에 하나님에 의해서 두 명이 죽게 됩니다. 만약에 자식이 10명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열 명 다 죽이신다고 해서 인간쪽에서 불만을 품고 하나님께 대들 권리없습니다. 열 명 중에서 한 명은 남겨줄 책임이 하나님에게 없습니다. 다 실리든 다 죽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문제는 유다의 아들이 왜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되었나 하는 겁니다. 즉 인간의 어떤 면이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악인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것’을 따로 사수하겠다는 정신입니다. 8절에서는 둘째 아들 오난은 형수와의 관계에서 생기게 되는 자식은 ‘자기 것’이 못 된다는 생각에 수정되지 못하는 조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비난 오난 뿐만 아닙니다. 유다도 든든한 자기 가정이 다 와해되는 것을 걱정해서 막내 아들 셀라를 며느리에게 내어주지 않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막내 아들이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곧 ‘내 가정’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나 오난이란 씨없는 형을 위하여 형수와 동침해서 자식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취지를 진정 모르고 있습니다.

신명기 25:5-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위 ‘시형제 결혼법’의 취지는, 이스라엘 민족은 전체가 하나님의 맏이가 되어야 하는 원칙을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맏이’가 아니라면 이스라엘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장차 이 땅에 오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의 맏이’라는 조건에 충족하기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장래 최종적으로 ‘맏이집단’을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 ‘유일한 아들’에서 ‘맏이가 되는 분’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겁니다. 새로운 동생들을 발생시키는 작업을 완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맏이’에 종속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3:1-2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태생이 되는 조건이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은 그 죽음의 취지를 품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즉 기어이 성취될 사항을 미리 실시되게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기대하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지금 자신의 행함을 원인으로 제시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도리어 완성이 미리 앞당겨 들어온 바가 되는 그 일에 이스라엘에 참여하는 겁니다. 시동생이 ‘맏이’의 명분을 위하여 자기를 잊어지게 하는 것이 시형제 결혼법입니다.

자신이 자기 것을 계속 지킨다든지,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맏이만 계속 살리기 위한 원칙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겁니다. 이는 곧 친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접촉하기 전에는, 인간은 나름대로 자신의 최선의 순종이 자기를 위해 괜찮은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하나님께서 친히 오시므로 서 인간은 평소에 생각이 왜 하나님 보시기에 오류요 무지요 곡해인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내 인생은 실패’라는 말을 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인간은 실패할 권리조차 없습니다. 늘 완벽하게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의 ‘내 것 지키기’가 이 참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의 행함이 원인이 되어 합당한 결과가 비로소 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만남 자체가 복이요 완성된 보상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자신의 고집과 자기 나름대로의 희망이 무용지물이 되어야 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 행함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의 행함은 곧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언약의 가정을 위해 육적인 가정은 그 든든함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를 위한 가정, 나를 위한 행복은 하나님의 가족을 훼방하는 짓으로서 악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오시기 전까지는 마치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이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은 상충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위한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음을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6강-창 38장 7-11절(유다의 자식들)1807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8장 7-11절입니다. 구약성경 58페이지입니다.

창 38:7-11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집에 있으니라.”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세 명 낳았는데 큰 아들 이름이 엘, 둘째 아들 이름이 오난, 셋째 아들 이름이 셀라, 이렇게 아들 세 명을 낳았습니다. 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가정이 충분히 구성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유다가정의 큰 아들이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꿈에 받았던 언약과 연관된 분이 아버지에요.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이라는 아버지에게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언약을 받은 아버지 야곱의 자식이 되는 유다도 언약의 영향권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가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에 주목해야 되느냐 하면, 언약을 앞장세워서 이 땅에 구체적으로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는 그 언약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라는 것에 주목을 해야겠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일반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천지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먼저 언약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우리에게 서슴없이 나타내고자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 언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겁니다.

결국 언약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언약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돼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얼마나 반가운 이야기고 진리에 접했다는 것, 그 진리자체가 영원토록 요지부동이잖아요, 그러면 한 번 얻은 그 진리로 인하여 우리의 운명도 확정이 되니까 큰 횡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일하시는데 그 언약 안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펼쳐질 때에 어떤 식으로 일반적인 하나님과 차이점을 보이는가? 그것은 야곱의 가계, 야곱의 족보,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유다의 가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접할 수가 있어요. 정말 귀하고 중요한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니까 유다의 장자 엘이, 야곱의 손자지요,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시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떤 분이냐 하면, 책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무엇을 해도 그냥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손수 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유다의 맏이 엘이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러면 엘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께 벌을 받았는가? 우리는 이것부터 먼저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것부터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벌을 내릴만한 권한을 가지신 분, 항상 그 권한을 실시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지신 분, 임의로 자기가 벌하고 싶으면 벌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시는 그 하나님인 것을 알면 우리는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 책벌에 의해서 우리가 벌을 받아 엘처럼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으면서 하나님께 찬미해야 되고 감사해야 됩니다. 왜? 바른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이걸 다른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인생을 살면서 영적인 요소를 발견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돼요.

이 세상에서는 성경 덮어버리면 사는 것이 그저 그렇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남 뒤꽁무니 따라가면서 남 모방하면서, 흉내나 내면서 서로 좋은 게 좋고, 그것이 진리인양 여기잖아요. 그렇다면 그 속에는 전부 다 인간적인 생각만 있어요. 인간적인 생각밖에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요소를 발췌해서 그걸 접하고 감지하고 절감하면서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야곱이나 야곱의 가정, 유다의 가정에 하나님이 주신 큰 혜택입니다.

축복이라는 것이 뭘까요? 축복이라는 것은 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는 것, 일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부터 전개되고 자기로 결국 마감된다는 자기인생일 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주권적으로 갑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관여해서 친히 이끄신다는 것, 그런 인생이라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고 따로 계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되었지요. 그러면 되었잖아요. 뭘 더 바랍니까?

왜 그러냐? 내 인생이 내 손으로 일궈나간다면 그 모든 책임과 처벌은 내 행함에 따라서 받겠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책임자라고 한다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내 인생 아니니까 책임질 이유가 없지요. 죽이면 그냥 죽지요. 살리면 그냥 사는 겁니다.

어차피 주께서 주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활용하시고 사용하시는 인생인데 내가 거기에 의미를 추가해서 보탤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괜히 의미 추가하다가는 내 인생을 통한 하나님의 일에 훼방자가 될 뿐이지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은 일반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야곱을 통해서, 또는 유다를 통해서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그 언약의 하나님의 구체성, 종합적인 말은 처벌하시는 하나님,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하나님,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처벌한다는 것, 인간을 처벌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는 말은 인간들에게는 항시 어떤 가능성이 있느냐 하면, 오류를 갖고 있고 실패할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곡해와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겁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가정 말고 언약의 가정, 복된 가정에 찾아오게 되면 그 가정은 하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밝혀지는 인간의 무지성, 실패성, 오류성, 오해, 곡해, 이런 것이 하나님의 작용으로 유감없이 다 들춰진다는 겁니다. 이것도 복이 되지요.

그 예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님을 섬긴 그들 손에 의해서 진짜 하나님이 살해당했잖아요. 미움 받았지요. 그 미움 받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잖아요. 그리고 그 죽으신 하나님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겁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거기에 일어나는 특이 현상은 인간의 오류와 오해와 무지같은 것들이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노출시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평소의 생각은 뭐냐 하면, 자기 인생에 실패하고 오해하고 무지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낙망을 하고, 잘할 수 있었는데 패배한 양, 자기 자존심을 구겼다든지, 자기 인생의 꼬락서니가 엉망이 되었다든지 하는지 하는 것으로 분노와 원망을 하나님께 퍼붓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은 평소에 인간이 얼마나 자기 것 사수하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그런 허망한 개념들을 일방적으로 끌어당겼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것은 하나님 종교가 아니고 자기종교에 불과한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유다가정에 찾아오셨다. 어떻게 찾아오셨는가? 언약을 통해서 찾아오신다. 그러면 언약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책벌하시는, 벌 줄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 벌줄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다? 오류가 있고 곡해가 있고 무지했다.

그러면 하나님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은 어떻게 살았는가? 자기 것 자기가 사수하면서 자기 것 자기가 사수하는 이 행위는 절대로 오류가 아니고 무지가 아니고 곡해가 아닐 것이고 이것은 올바른 나의 태도라고 자부했었지요.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특히 유다가정에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벌이는데 인간들의 가정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든든함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밤이 되면 엄마 아빠가 있는 집으로 속히 들어오지요. 특히 갓난아이는 엄마가 곁에 없으면 앙, 하고 웁니다. 엄마가 곁에서 엄마가 곁에 있다는 표시를 해주지요.

애가 울 때 애 태운 탈 것을 밑에서 끌고 당기면 어린애가 울다가도 그쳐버려요. 엄마가 곁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정서적으로 자기보다 더 우월하고 자기를 다 보호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 있으면 안심을 해요. 그게 없어지면 불안해하고.

어릴 때 있는 보호본능, 든든한 자에게서 받는 보호본능, 이것이 가정이라면 이 가정에는 아버지가 있지요. 그렇다면 어른이 되어서 교회 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는 것, 예수님을 구세주라 믿는다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지요. 왜냐하면 나보다 더 월등한 힘을 가진 분이 나의 수호자가 되고 나의 미래까지 보장해주니까 얼마나 든든합니까?

우리는 그 든든함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것을 신앙 있음이라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든든한 하나님 아버지가 있고 나에게는 내 죄를 용서하는 구세주까지 있고,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이렇게 지켜주니 정말 교회 나오기 잘했다. 예수 믿기 잘했다. 든든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정서적인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하지요.

어릴 때는 부모가 그 든든함을 받쳐주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보다 넓은 범위 내에서 하나님이, 예수님, 성령님께서 그렇게 지켜주니 한 번 신자라고 여긴 사람이 그 종교, 신앙을, 그다지 큰 일이 없다면 버릴 일이 없지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생채기를 낸다면, 거기에 상처를 낸다면, 그것을 해체시킨다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유다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만났고 유다는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요.

여호와 믿는 가정에 유다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늘 자기 가정이 안정적이고, 행복하고, 웃음꽃이 피고, 어디가도 자랑할 만한 자식들이고, 누구한테 내놔도 기죽지 않는, 그래서 자식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 그것은 다 있고 심지어 그 자식은 자기목숨보다 더 귀한 거예요.

차라리 자기가 죽지 자기 자식은 일찍 죽이기 싫은 거예요. 하나님이 보호하사 자기 가정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고 유다가정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그 맏이를 죽였어요. 그럴 때 그 든든함이 깨져버립니다.

하나님이라는 그 보호막이 뭔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 유다는 지금 직접 하나님과 관련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실감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냥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 누가 마다하겠어요?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든든한 하나님 믿는다는 그 빽으로 보기 싫은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뭔가 바뀌어야 된다는 것, 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내 것 내가 지키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그런 하나님, 어릴 때의 부모 같은 역할을 하는 든든한 하나님은 교정되어야 되고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 가지고. 가정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잖아요. 첫째 아들 죽었지요. 그 다음에 둘째 아들도 죽습니다. 8절-10절에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문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라.”

중간에 있는 이야기 다 빼놓고 유다입장에서, 아버지입장에서 보면, 큰 아들 죽었고, 둘째 아들 죽었고, 그 사실만 왁 하고 와 닿는 거예요. 내력이 어떻든 간에,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내 목숨보다 귀한 우리 가정의 큰 아들 죽였고 둘째아들 죽였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아들이 셋뿐이니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 아들이 남아 있지요. 세 번째 아들에 대해서 유다가 어떻게 나름대로 조치를 하느냐 하면, 11절에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큰 아들 엘이 악해서 하나님이 죽였다. 그 다음에 둘째 아들도 하나님이 죽였다, 라고 했는데 11절에 보니까 철딱서니 없고 어린 셋째 아들을 안 죽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 유다가 나서서 하나님의 뜻과 대립되는, 상충되는 행위를 서슴없이 해버립니다.

그리고 명분이 뭐냐 하면, 그 아들마저 죽게 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아들 셋 줘놓고 다 죽이는 것이 왜 인간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우기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 열 명 줬는데 그 열 명 죽였다. 왜 하나님은 열 명을 다 죽이면 안 되는 분인가요? 그 중 한 명은 꼭 남겨둬야 되는 겁니까? 인간이 자식 열 명 받았으면 한 명은 건져야 된다고 그렇게 우길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지금 유다는 아들 세 명 가운데 둘 죽었다고 하나는 안 죽이려고 조치를 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가 아버지 유다에게 있느냐는 말입니다. 없지요. 없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그것은 유다가 자기라는 것, 자기 것을 계속 사수하고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들은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주면 좋은 하나님, 그게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면 내 것 지켜주겠지, 생각해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감사찬양합니다.

그런데 진짜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 뜻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그것이 하나님 일에 방해된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내 것이 여기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과 상충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권한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왜 거기에 대해서 거역하고 반발합니까? 막내아들만큼은 살려야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까?

8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문을 행하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이 보면, 무슨 이런 지시가 다 있나 생각하실 거예요.

이걸 줄여서 ‘시형제결혼법’이라 하는데 맏이가 아들이 없을 때, 아버지의 대를 이을 수 없을 때, 족보나 혈통을 이을 수 없을 때 맏이는 영원한 맏이기 때문에 그 맏이의 명분, 그 아들의 명분을 살려주기 위해서 둘째 아들이 맏아들 죽은 빈자리에 형수와 시동생이 다시 혼인을 해서 거기서 난 자식은 비록 시동생이 싫어할지라도 형의 씨에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25장 5절, 6절 보면, ‘시형제결혼법’이 율법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형제결혼법의 취지가 뭐냐? 이스라엘은 전부가 맏이의 이름으로 계속 이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자체가 맏이덕분에 하나님 백성이 되는 원리를 유지해 줘야 된다는 거지요. 그 원리는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했습니다.

처음 태어난 것은 가축이든 사람이든 다 내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조건하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동행합니다. 출애굽기 1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그 취지가 뭐냐 하면, 맏이가 될 때 그 조건이 뭐냐 하면, 할례를 행해야 되고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목숨을 대신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그 맏이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목숨 안에는 하나님이 자기목숨이 삽입되어 들어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어린양, 장차오실 예수님이니까요. 하나님의 생명이 맏이 안에 입력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는 조건하에 이스라엘은 생명의 나라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민족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형제결혼법에 있어서 맏이가 죽었으면 둘째가 형수와 결혼하고 그 형수는 다른데 시집가면 안 되고 시동생과 결혼해서 그 집 사람이 되어야 돼요. 시동생과 결혼해서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맏이에게 생명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

형수 본 남편은 이미 죽었고 죽었으니까 시동생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이 형수의 아들이 되고 죽은 형님의 아들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저게 바로 생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로마서 8장 2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입니다.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제 뭘 로 바꾸는가 하면, 누구의 형제와 더불어 맏아들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추진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있을 때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땅에 와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맏아들이 되면서 거기에 대한 형제, 새로운 동생들을 양산시키는 맏이의 역할을 완성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 동생들은, 그 형제들은 예수님의 맏이 됨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게 되는 그 원칙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약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은 신약이 아니고 창세기라는 말이지요. 창세기의 유다가정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다가정에 일어난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목숨을 가진 맏아들이 될 수 있느냐? 그것은 장차 될 일을 미리 시작을 하시면 되는 거지요. 장차 기어이 성취될 일이 벌써 이 유다가정에 개시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보통 인간세계에서는 내가 행한 것이 나중에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식으로 하잖아요. 원인이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고 장차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결과에 인간으로 하여금 미리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인간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하시는 거예요.

인간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생겨난 그 결과에 인간은 그저 거기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 들어오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유다가정은 유다가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패밀리, 하나님의 영생의 패밀 리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유다의 행동, 큰 아들 죽었지요, 둘째아들 죽었지요, 이제 셋째아들은 너무 아까워서 살려놓겠다는 이 유다의 행동은 뭐냐 하면, 이 가정은 어디까지나 제 가정입니다, 하고 붙드는 거예요.

내 가정이기에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당도리 잘해서 셋째아들이라도 살려내야겠습니다, 라는 결과를 얻겠다는 거예요. 내 것이니까 내가 사수하겠다는 취지로서 셀라를 형수 다말에게 주지를 않았던 겁니다. 동침을 안 시킨 거예요.

처음 설교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지 아니하면 우리의 오류나 곡해나 무지가 뭔지 몰라요.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가정에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큰 아들 죽이고 둘째아들 죽였을 때에 그 다음에 나온 유다의 태도를 통해서 비로소 나온 유다의 근원적인 오류가 뭐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나가겠습니다, 하는 이 자체가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벌 받을 짓이고 심판받을 짓이 되는 거예요. 특히 8절에 보면,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고 지시를 했잖아요.

그런데 9절에 “오난이 그 씨가”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뭐냐?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여기에 자기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난이 죽은 것은 내 것 따로 챙길 권한이 내게 있다는 이 사고방식이 참된 하나님의 뜻과는 상충된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본문을 보면서 인간에게 어떤 불가능함 같은 것을 우리가 느껴야 돼요. 하나님의 뜻을 내가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내가 행해서 내 인생 가운데서 영적인 요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내 인생 속에 진짜 주의 영적인 것은 주께서 찾아와서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이것은 못 놓습니다.” 발악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죄를 들춰내는 그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내것 챙기는 그 자체가, 내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께 대적하는 요소라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 좋으라고, 나 위하려고 하나님 섬기는 것,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하나님 그것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가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을 우리 눈에 뒤집어씌운 거예요. 아까 카메라를 조정하는데 화면 중간이 어두워졌어요.

‘카메라를 갈 때가 되었구나. 검은 색조다 다 드러나서 이제는 더 못쓰겠다. 카메라를 다시 장만하든지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앞에 보니까 렌즈에 거미가 앉아가지고 거미줄을 쳐놓은 거예요. 죽은 거미와 거미줄을 걷어내니까 깨끗한 화면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을 하는데 죽은 거미시체처럼 누가 시야를 흐리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앞장서서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를 걷어내는 거지요. 우리를 치워버리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시는 거예요.

내 뜻이 딴 게 있겠어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바를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그걸 쟁취하고자, 그걸 사수하고자, 내 것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열성, 그게 우리 뜻이잖아요. 그 뜻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에요. 8절, 9절, 10절, 특히 10절에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다고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찾아왔을 때 여호와 앞에 악하다고 했을 때에 그 악한 행동이 뭔가를 언약의 가정인 유다가정을 통해서 비로소 구체화되어서 이렇게 보여지는 겁니다.

언약을 통해서 직접 만났던 사람이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악이라는 것,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 윤리나 도덕,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것, 지금 내가 똑바로 살게 되면 내일이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내가 계속 고수하는 것, 그게 진리가 아닌데 참된 진리인줄 착각해서 그게 진리인 줄로 알고 있어요.

지금 내가 똑바로 행동하면 내일은 내가 얻을 것을 얻겠지, 그런 논리와 관계구조를 계속 붙들고 있는 이런 것하고, 오늘 본문하고 얼마나 큰 거리가 있습니까? 내가 이만큼 잘하게 되면 복주겠지, 라는 것. 내가 나쁜 짓하게 되면 벌 받겠지, 이게 지금 악이 아니에요.

가장 근원적인 것은 뭐냐 하면, 내 것이 손해나는 짓이라면 나는 하지 않겠다는 인간들의 원초적인 그 본심을 오난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자기가 원하는 자식 낳고 한 가정으로 독립해서 사는 것,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이미 형과 결혼했던 일종의 고물, 중고가 된 여자,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야 된다는 것, 이것은 결혼하지도 않은 총각인 시동생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형을 죽인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자식을 낳았다 칩시다. 본문에서는 자식을 낳을까 싶어서 땅에다 설정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만약 자식을 낳았다 칩시다. 그러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삼촌이라고 불러야 돼요. 자기 자식인데 자기자식이 자기보고 삼촌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미워도 다시 한 번’도 아니고 인생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어요.

자기 인생을 그야말로 희생했다고 할까, 내 것이 없는, 자기 인생을 완전히 형에게 헌납하고 자기 인생에 대한 모든 권리에서 손을 놔야 되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라는 말이지요. 큰 아들 낳아서 죽은 형 쪽에 넘겨주고 그 다음에 둘째는 자기애가 되겠지요.

그러면 이것은 형제간이 또 사촌이 되어버리지요. 족보가 혼잡스레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소박한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마저 무참히 허용되지 않게 하는 이유가 뭐냐? 장차 오실 진짜 영생의 패밀리, 천국 가는 가정은 이 땅에서의, 이 지상에서의 인간적인 기대감으로 얻어지는 가정의 행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기이한 가정의 구성에 의해서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그분의 가족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이 죄인의 입장에서 반듯하게 산다고, 괜찮은 가정 꾸린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새로운 가정의 원리와 원칙은 이미 ‘시형제결혼법’으로 줬어요.

다시 말해서 네가 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정을 위해서 너는 어떤 것을 희생할 수 있고 무엇까지 내놓을 수 있느냐를 묻는 그 내용이 오늘 내용입니다. 지금 내가 기대하고 내가 예상하는 나만의 행복의 가정을 아낌없이 천국의 가정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느냐고 오늘 본문은 묻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오실 그 예수님이 주님의 가정의 원리와 원칙을 우리에게 먼저 제시한 그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서 내 것 챙긴다고 얼마나 주의 이름을 거론했습니까? 이것이 가증된 일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순수한 마음인 줄 알았습니다. 주의 영생을 가로막는 일이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