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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37:18-20 / 형들의 미움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7:18-20 / 형들의 미움

정인순 2018. 6. 13. 22:02

음성            동영상

 

 형들의 미움

이근호
2018년 6월 13일             

 

 

본문 말씀: 창세기 37:18-20


(37: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37: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37: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과 요셉의 형들의 대결구조가 설정된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한 꿈 때문입니다. 이 꿈의 내용이 발설되면서 형들의 미움은 요셉의 존재를 없애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했습니다. 왜 그들은 요셉을 공격할까요? 그것은 먼저 그들이 요셉으로부터 공격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포부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위한 그 꿈 달성에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그 꿈의 내용이란 결국 ‘자기가 절대적 존재’로 부각되고 확고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자기 꿈의 최종적 내용은 이미 본인 위주로 굳어지게 됩니다.


태어나면서 생기게 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양보하는 전쟁을 할 마음으로 포부를 정하게 됩니다. 시작점부터 종착점이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꾼 꿈에 의하면 형들의 개인적인 이런 포부들은 무산됩니다. 자기 꿈을 접하는 소식으로 들려온 겁니다. 따라서 요셉쪽에서 먼저 자신들의 인생 길을 잃게 만든 내용으로 공격을 했다고 여겼던 겁니다.


형들 입장에서 꿈이란 꿈을 꾼 당사자를 계속 살려내고 부각시키는 양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 겁니다. 형들의 입장과 요셉의 입장의 차이가 여기서 납니다. 요셉에게 있어, 요셉의 꿈이나 포부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꿈을 위해 이 지상에서 소멸되고 분쇄되어야 했습니다.



즉 요셉을 죽이고 꿈을 살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보이는 것이 없어지지 아니하면 숨어 있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요셉에게 있어 꿈과의 관계는, 요셉은 목적을 쟁취하는 자가 아니라 그 과정과 절차에 참여되는 자가 됩니다. 꿈 자체가 목적이 되기에 요셉은 단지 그 꿈 실현에 동원된 채 쓰여지는 자에 불과한 겁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자기가 짠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상대하고 그들을 만나야 할 겁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과 ‘자기에게 필요치 않는 사람’을 임의로 구분하고 취사선택해 버리게 됩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사건을 제대로 감안해서 정해져야 하는 진리값을 고려하지 않는 처사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과 ‘전체에게 필요한 것’과 엄연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참으로 많은 귀한 것들을 제거해서 쓰레기 취급해 버립니다. 시편 136:7-9에 보면,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한결 같이 밤하늘을 장식하는 달과 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작은 것, 작은 변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심한 자기 절대성을 증명해줄 꿈과 목적 달성에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이 주신 귀한 가치들을 잘라내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형들에게 있어 요셉의 꿈은 시시한 것이고 과감하게 제거할 내용으로 들려진 것은, 이미 그들은 나름대로 포부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 자신의 존재가 자기 생의 목적으로 굳어져 있었던 겁니다. 자신들의 꿈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심보입니다.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전개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미움받고 싫어버림 바 되는 절차를 보이게 됩니다.


야곱 가족 내부에서 미워하는 쪽과 미움받는 쪽이 갈라지면서 이 인간 세상의 내막이 밝혀집니다. 즉 언약은 ‘미움이 생기는 구조’로 설정하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미움없이 언약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완성되지도 않습니다. 즉 이 세상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꿈을 미워하는 성질을 발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꿈이 하나님의 꿈을 핍박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꿈에 속고 자기 희망에 매일같이 속아 넘어갑니다. 이미 와 버린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매일같이 자기에게 미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선으로 해서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존재 증명을 최종 목표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정면으로 마주보는 식이 됩니다. 요한복음 15:23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전하는 그 진리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마음이 공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은 곧 주님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세상 전체가 이미 그런 성질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세상이 이런 식이기에 요셉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꿈도 미움과 고난의 아픔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시편 80:1에 보면,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백성의 대표 이름으로 ‘요셉’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성은 시편 80:5-6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겪을 수모를 다같이 공유하게 하시는 식으로 야곱 언약을 달성시키십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 그는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즉 복음을 안다는 것,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탐을 낼 만한 획기적인 행운이 주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가실 그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복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는 서러움에 같이 참예된 바로 그 자가 하나님의 꿈 속에 들어간 성도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포부나 자기 뜻 관철이 주님의 뜻에 방해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2강-창 37장 18-20절(형들의 미움)

1808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18-20절입니다. 구약성경 56페이지입니다.

창 37:18-20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오늘 본문에서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지시에 의해서 세겜에서 도단이라는 곳, 북쪽으로 40여키로 떨어진 곳의 형들을 만나기 위해서,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만나기 전에 형들의 생각은 벌써 정해져 있습니다.

죽이자는 겁니다. 없애자. 물론 자기들이 없애면 아버지의 분노를 사기 때문에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는 쪽으로 일을 진행시키자고 의견합의를 봤습니다. 문제는 그 형들이 요셉을 왜 공격하느냐 하는 겁니다. 형들이 요셉을 공격하는 이유는 요셉이 꿈을 꾼 것까지는 좋은데 그 꿈의 내용을 발설한 겁니다.

발설함으로 말미암아 그걸 듣는 형들의 평소에 자기계획, 자기목적, 자기인생길이 틀어지게 만든 거예요. 자기가 설정한 그 길을 잃게 만든다면 혼선이 빚어지지요. 외부에 의해서 흔들리고 휘둘리는 것에 대해서 위기를 느끼기에 자기를 흔들기 한 그 외부의 작용, 요소를 없앰으로서 옛날식의 삶을 그대로 진행하려고 한 겁니다.

오뚜기처럼 가던 길을 그냥 가면 되는데 누가 옆에서 나를 흔들게 되면 자기 자신의 흔들림에 대해서 어쩔 줄 모르지요. 그런데 그 흔들리게 된 내용을 보게 되면 이미 형들이 평소에 자기 인생을 계획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겁니다. 형들은 나름 자기만의, 자기가 잘되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의 내용을 보게 되면 본인의 꿈을 달성한다는 것이 아예 전혀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아요. 누구한테 굴복하게 되어 있다. 특히 동생한테, 자기보다 늦게 난 동생한테 굴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확정적인 것처럼 요셉이 이야기하니까 자기만의 꿈이라는 것은 상실,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러면 꿈이 없이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태어나서 세상 살면서 이상스럽게 자기만의 어떤 목표라든지 목적, 꿈, 희망, 이런 것을 쟁취하려고 해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인간이 자기가 알면 얼마나 알고 세상을 살면 얼마나 오래 살아서 진리를 다 알겠습니까?

진리를 모르고 세상 전부를 모르는 입장에서 어떤 목적을 쟁취한다는 것은 과도한 욕심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목적을 달성하고 꿈을 달성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과정을 겪는 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어떤 절차에 참여되는 것이 인생의 의미에요.

뭘 하나 쟁취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생의 목표가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뭘 쟁취하게 되면 또 쟁취하고 싶은 것이 그 현장에 새롭게 나타나게 돼요. 따라서 사람은 무엇을 얻을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과정에 말려들어갈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인생이라는 것은 어떤 절차 과정에 참여되는 거예요. 그걸로 끝이에요.

인간에게 어떤 목적이라 하는 것은 어떤 정당성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거기서 정답이 되는 목적을 끄집어내야 될 텐데 세상 모든 것을 모르고 있는 입장에서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이라는 것은 전체 목적에 위반되기가 십상이거든요.

실컷 살았는데 그게 헛살았다, 가 되면 안 되잖아요. 따라서 애초부터 헛살지 않으려면 내 나름대로의 내가 잘되기 위한 어떤 인생의 꿈이라든지 목적을 애초에 포기하는 겁니다. “커서 뭐 될래?” “몰라. 갈 때까지 가 보는 거지 뭐.”

커서 뭐 될래, 라는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다 허망한 거예요.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갖게 되면 그 목적에 대해서 종속됩니다. 매이게 돼요. 매이게 되면 그 목적과 관련된 것만 수집하고 나머지 중요한 것은 자진해서 다 패대기쳐요. 전부 다 없애버리고 제외시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해물 탕을 같이 먹는데 전복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전복이 몸에 좋고, 남자한테 좋다는 식으로 하고 있고 주인이 선심 쓴다고 전복을 듬뿍 떠서 줬습니다. 식사가 다 끝나고 난 뒤에 주인이 가보니까 전복을 그대로 다 내놨어요. 왜? 주인한테는 전복이 귀한 대접이지만 손님한테는 전복이 싫어하는 음식이라는 말이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이것을 해보겠다고 뭔가 결심을 하고 꿈을 가지는 순간 그 사람은 반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부여된 것 가운데 필요한 것만 챙겨서 자기 뜻을 억지로 쟁취하려고 하니까 그 자기로 인하여 떨어져나가는 수많은 그 가치들이 본인한테는 부질없는 것들로 쓰레기 취급받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굉장히, 아마 이 사회에서 대부분이 그런 경우를 매일같이 경험하게 될 겁니다. 옛날 서양 동화에도 그런 것이 있지만. 어느 부잣집 마나님에게는 보석이 굉장히 중요해요. 곳간이나 부엌에 있는 밀가루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영국 사람인데 남편이 하는 일이 인도에 가서 무역을 크게 해서 갑부가 된 사람입니다. 무역선을 운영하는데 원하는 물품을 싸게 사와서 비싼 가격으로 팔아서 크게 성공해온 사람이에요.

남편은 장사하기 위해서 남편이 인도로 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관심이 없어요. 자꾸 집에 재산이 쌓이는 것만 아주 좋아합니다. 보석 사 모으고 비싼 것만 사모으는 사치의 달인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인도에서 돌아오던 남편의 무역선이 폭풍에 파선되고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다음에 빚쟁이들에게 귀한 저택과 많은 보석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이제는 굶어 죽을 판입니다. 전에 그 마나님이 자기 집 곳간에 있는 밀가루가 너무 많다고 해변에 갖다 버렸어요.

폭삭 망하고서 거지가 된 그 마나님이 어느 날 해변가에 보니 뭔가 자라고 있거든요. 저게 뭐냐 물어보니 자기가 버린 밀가루에요. 자기가 원하는 꿈을 꿀 때 밀가루는 시시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쓸데없는 허황된 꿈을 꾸다 보니 이미 주신 귀한 가치를 다 놓치는 거예요.

시편 136편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별들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라고 되어 있어요. 이 자본주의사회,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빡빡하게 살다보면 낮에, 또는 밤에도 하늘을 쳐다볼 일이 없잖아요.

자기 꿈이 있기 때문에, 자기 포부가 있기 때문에, 야심이 너무 강해서 별 속에서 반짝이는 주님의 사랑과 달 속에서 비치고 있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전혀 다 놓치고 있는 거예요. 산들바람의 고마움도 모르고 따스한 공기의 ……, 요새는 공기는 고마운 줄 압니다만, 미세먼지 때문에 공기의 고마움을 압니다만.

병원에 가기 전에는 자기의 건강함의 고마움을 잘 모르듯이 평소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줬는가를 다 놓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 꿈에 완전히 미쳐 살아서 그래요. 정신병자가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형들이 요셉을 왜 미워하느냐? 자기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예요. 요셉의 꿈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꿈이 우선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꿈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꿈이라는 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당신과 나의 만남이 하필이면 이렇게 만났느냐 하는 그것으로 나의 꿈을 접고 이 만남 자체를 우연으로 보지 않고 전부 다 주님의 꿈으로 다 돌려드리는 것, 이게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

요셉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그 무대로서 인간들은 거기에 배치되어 있고 세팅되어 있는 겁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요란스럽고, 멋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신앙의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 무미건조하고, 평범해 보이고, 아무 티 나지 아니하고, 그럼에도 그 속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포착하는 것, 그게 신앙이에요. 그게 신앙의 능력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계획이고 목적이요 꿈이고 뜻임을 발췌해내는 능력,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잖아요.

흔히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데 사람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 작용하는 그 성령을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가졌기에 상대방을 볼 때에 상대방의 겉모습이나 처지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속의 성령의 역사, 주님의 뜻을 보는 겁니다.

특히 성령 같은 경우에 주님의 완료된 뜻인데 그게 꿈의 실현이지요. 하나님의 꿈이 인간의 꿈의 모든 방해를 물리치시고 기어이 저 사람을 구원했구나, 그 사람의 재주나 능력이나 덕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와 성도의 만남이에요.

교인과 교인의 인사지요. 요셉과 형들의 만남에서 차이점이 뭐냐?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 꿈들이 있었고 그 꿈이 요셉을 통해서 뭔가 치었다 할까, 방해를 받았다 할까, 좌절되었다고 할까, 공격받는다는 느낌을 형들이 갖고 있었을 거예요. 틀어진다고나 할까.

형들은 자기의 꿈을 위해서 그냥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형들의 결정적 차이는, 요셉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사시면서, 여러분이라 해야 교인 몇 명 안 되지만, 여러분이 인생을 사시면서 인생이라는 것을 누굴 상대로 인생을 살아가시는 겁니까?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억지로 또는 인내하면서, 참아내면서 자꾸 사람하고 관계하고 사람과 사귀어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지요. 그렇게 사니까 사람들에게 잘못보이면, 밉보이면 사달난다, 절단난다, 내 꿈이 좌절 된다,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지면서, 그런 무게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요셉의 꿈은 요셉 본인이 꾼 꿈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하나님의 꿈을 어떻게 실현하고 어떤 과정을 겪는가? 하나님의 꿈은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보이는 것이 없어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죽어야 되는 겁니다. 꿈꾸는 자가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꿈은 그 현장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꿈은 본인이 죽으면 안돼요. 본인이 제안한 꿈이기 때문에. 본인이 만든 꿈이기 때문에 억지로 본인이 살아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오고 말씀을 멀리하고, 각각 자기 일 하고, 하나님과 동떨어지게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이유가 뭡니까? 본인들의 꿈은 본인이 사람과의 만남,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서 달성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의 꿈이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 내가 만든 내 꿈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이 보이는 내가 계속 보이는 쪽으로, 계속 잘 되는 쪽으로 측정을 해서 내 인생이 지금 성공했다, 잘 되고 있다, 를 판단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바로 요셉의 형들입니다. 그리고 이 요셉의 형들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고 하나님의 꿈을 가진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갖고 오신 예수님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꿈과 하나님의 꿈의 만남, 이것은 대결구조입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 공격을 미움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꿈은 반드시 하나님의 꿈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꿈이 계속해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이 꾼 꿈은 인간들의 꿈에 치어서 공허 속에 분쇄되어 소실되고 날아가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꿈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인간들의 세계였습니다. 인간들의 세계에서 인간의 열심과 노력과 지혜와 양보와 희생으로서 인간들의 사회와 나라와 국가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거기에는 전혀 하나님의 꿈도 들어있지 않고 인간의 꿈들만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뜻을 가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인간은 일치단결,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합치되었는지 하나가 되어서 차라리 살인강도 바라바를 건져낼지언정 예수님을 죽이라는 식으로 합치된 목소리를 냈습니다.

귀신의 목소리지요. 예수여, 당신과 나는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게 인간들의 근원적인 심성이었습니다. 그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도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꿈도 계획도 이 지상에서 분쇄되어서 소멸되고 사라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받았다고, 십자가 복음 안다고, 자기가 신자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날 선하게 인도하겠지, 하나님께서 내가 신자인 것을 이 땅에 살아가면서 남들이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윤기 나게, 돋보이게 이끌어주시겠지, 라고 잔뜩 기대를 하지요.

복음 아니까 하는 일도 잘되고, 복음 아니까 병도 낫고, 복음 아니까 유명인사 되고, 복음 아니까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칭찬받는, 부러움을 사는 그런 사람 되겠지, 라고 기대를 해요. 그러나 실제로 복음을 아는 사람, 실제로 성령 받아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 살아봤자 어떤 티도 나지 않는 인생길을 갑니다.

너 거기 있나, 할 정도로.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복음 알기 전에서 복음 알고 난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난 떨 일도 없어요.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 받은 어떤 효과도 없어요. 좁은 길을 간다는, 그것을 알 수 있는 어떤 기회조차도 없습니다. 티 낼 기회조차 주지 않아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내 인생에 어떤 변화라는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내가 지금 신자 맞나. 정말 십자가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맞기는 맞아? 예수님의 피가 구원의 능력이야? 그런데 뭔가 획기적인 일들이 왜 일어나지 않는 거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복음 알면서 획기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렇게 예상하는 그것은, 예수 믿기 전에, 성령 받기 전에, 복음 알기 전에 그 때의 내 육의 심성, 욥의 형들과 똑같은 심성을 가지고 거기에 신앙이라는 것을 보탠 거예요.

지금껏 살아온 인생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기에, 지금껏 살아온 것이 지옥이라면 지금부터 내가 가는 길은 천국이기에 하나님의 살아 있음, 천사가 도와주는 기적과 기적의 연발, 연발로 나에게 올 것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지요. 그 기대한다는 것, 그것은 아까 제가 말씀대로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계속 유지하는 원칙을 포기를 못한 거예요.

인간에게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 어렵게 말씀 드려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그것이 시작점이고 동시에 최종점이에요. 인간은 내가 여기 있음에 마지막 목표도 근사하게 내가 있음으로서 마감되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아요. 요셉은 꿈을 꾸었다. 누가? 내가 꾸었다. 하지만 요셉은 그 꿈과 요셉과 더불어 같이 분쇄되고 깨져서 공중에, 공허 속에 산산조각 나도록 깨져야 됩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해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어떻게 봅니까? 달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어떻게 봅니까? 알 수가 없지요.

하나님은 하늘에서 막 쏘아댄다는데 우리는 전혀 그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우리 맘속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을 경우라면 그것은 우리가 내가 있음에 완전히 정신 팔려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시작점이고 최종점으로, 끝까지 나만 살아 있다는 그 절대적인 나의 존재성, 그것을 목표로, 목적으로 삼아서 달려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냥 깨진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 나야 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

시편 80편 1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을 죽이고자 합니다만 시편 80편에 보면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신다고 했어요.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양떼의 대표적인 그 이름은 요셉이 되는 겁니다.

요셉을 인도하는 이유는 요셉이 꿈을 꾼 것이 아니고 요셉 안에 하나님의 자기 꿈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꿈을 꾸는 거예요. 요셉을 인도할 때 어떻게 인도하는가, 그 인도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인도받는 그 당사자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육을 갖고 있다 보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심과 자기가 설정한, 자기가 계획한 멋있게 인도하심, 대단하고 유난스럽게 인도하시는 것, 그것과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과정 사이가 차이가 나도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들은 그 차이남에 대해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매일 같이 그저 눈물만 먹고 사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살게 해놓고 그것이 바로 요셉을 인도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꿈을 인도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예수님의 고난이 미리 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아픔이 있고 상처가 거기 있거든요. 지금 제가 아는 주변에 안 아픈 사람이 드물 정도로 아픈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그 아픈 사람은 그냥 감기 정도가 아닙니다. 오늘도 아마 눈물 흘리고 있을 걸요. 아파서. 잠 못 자서 아픈 사람, 암 걸려서 아픈 사람, 이빨 아파서 아픈 사람, 허리 아파서 아픈 사람, 따지고 보면 안 아픈 사람이 없어요.

그냥 안 울고 싶어도 눈물이 그냥 주르르 자동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살라고,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라는 탄식이 절로 나와요. 그런데 저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주님은 더 아팠는데요? 주님은 더 아팠어요.

제가 여러분에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가 성령 충만해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인데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죽는 죽음이 있는 반면에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성전미문의 앉은뱅이가 주님의 능력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자 둘 중 어느 것이 기적일까요?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인, 주님의 진리에 더 가까운 기적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스데반집사가 돌 맞아 죽는 것이 주님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에 가장 근접한, 보다 주님이 주님답게 느껴지는 기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앉은뱅이가 낫는 기적에 정신이 팔려 있지요. 그리고 나도 성령 받았으니까 그런 기적 달라고, 사업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고, 그런 기적 달라고 아주 간곡하고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는 기도제목 속에는 스데반에게 일어나는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라고 비는 내용은 아마 거의 들어있지 않을걸요.

요셉이 꿈에 의해서 어떻게 인생 살았는가? 우리들 다 미리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가신 길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꿈이 지상에 실현되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꿈 꾼 자가 꿈 때문에 죽어서 꿈도 날라 가고 그 사람도 날라 가는 그 방식이 곧 주님의 꿈의 성취방식이에요.

꿈을 꾸기 때문에 이 땅에서 큰 업적을 이루는 그것이 꿈의 성취가 아닙니다. 꿈이 소실돼요. 중간과정에서 꿈이 사라져버립니다. 왜? 형들이 못 따라오도록, 형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형들이 뒤따라오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는 꿈, 그게 꿈의 성취에요. 끊어버립니다. 그 끊어버림을 오늘 본문에서는 미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입니다. 형들도 야곱의 아들이지요. 하나님께서 야곱언약을 이루면서 야곱언약 속에서 야곱이 에서에게 미움을 받았던 그 과정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언약적 전개과정에서 자식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언약은 한쪽은 미워하고 한쪽은 미움 받는 그 대결구조가 아니면 언약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라는 사실을 요셉과 요셉의 형들 사이를 구분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여기서 아버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는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 삼위일체를 논해도 그 자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냐 하는데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어요.

순간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몸이 아픈데 어떻게 예수님을 안 미워할 수가 있어요, 몸이 아픈데. 돈이 바닥났는데 어떻게 안 미워합니까? 개척교회 했는데 교인들 다 떠나버리고 목사와 사모 둘 남았는데 어떻게 주님을 안 미워할 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는 힘들게 교회 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사고로 죽어요. 그 딸의 신발을 제단에 던지면서 울부짖습니다. “주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주님이 나에게 해준 게 이게 뭡니까?” 그게 바로 미움이에요. 그게 미움인 거예요. 인간은 예수 믿으면서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꿈이 근사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예수님의 힘을 빌려보자 하는 마음이 엮여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17절에 보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함이라고 했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예수님께서는 요셉 같은 예수님 자신의 기능을 하라고 제자들을 이 땅에 사도로 삼았습니다. 사도를 사람들은 얼마나 미워하는지 마치 오늘 본문에서 요셉을 형들이 미워하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왜 요셉의 말을 형들이 미워하고 사도의 말을 오늘날 사람들이 미워하는 겁니까? 나름대로 자기의 꿈들이 있고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그 꿈과 직접적으로 관련시켰기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내가 그냥 믿지 않고 소박하나마 자기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은 거예요. 그러면 사도는, 요셉은 어떤 꿈을 꾸었는가? 요셉은, 사도는 꿈이 없어요. 사도나 요셉은 주님의 꿈이 성취되는 과정에 관여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합니다. 어떤 자기 포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포부에 자신들이 말려들었다는 그 사실로서 감지덕지 하지요.

특히 사도바울은 그런 경우를 많이 보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가진 상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고난 가운데 이 복음을 전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이 자체가 나에게 상이고, 나에게 복이고, 나에게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본 겁니다.

이렇게 주님의 꿈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지저분한 인간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가서 누굴 봐야 되는가? 다른 곳을 보는 사람을 만나야 돼요.

세상에 살면서 다른 곳을 말하는 사람, 세상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 다른 곳을,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 하늘의 달과 별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찾는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 세상물정 모르고, 남경필이 이겼는지 누가 이겼는지 관심도 없고, 안철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박 원순이 이겼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게 자기 인생의 기쁨도 아니고 보람도 아니고, 프로야구에서 삼성이 이기는 것이 인생의 보람도 기쁨도 아니고, 그냥 주어진 모든 일, 선거라든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경험들이, 이것은 내 꿈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꿈의 절차에 내가 맞닥트리고, 그 주의 일에 참여하면서 부딪혀야 되고 만나야 될 필연적인 일들이라고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관련시키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돈 몇 푼 생겼다고 좋아하고, 돈 몇 푼 잃었다고 절망하고 따지고, 그런 사람보다 “썩어질 그런 것보다 영생이 더 좋아.”라고 하는 그런 사람. 물론 매일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성령이 작용하게 되면, 나는 세상보다 주님이 더 좋아, 라는 것을 2초라도, 3초라도, 그런 놀라운 기적적인 고백이 나오는 사람, “주여, 나는 눈에 보이는, 내가 있다는 이것 때문에 주의 뜻을 가리니까 제발 남을 통해서라도 나를 좀 죽여주옵소서. 없애주세요.”라고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했습니까? 내가 주의 꿈을 방해하고 있으니까 내가 죽어서라도, 저 죽어가는 인간이 죽어가면서도 예수 믿어서 천당은 가더라, 하는 그러한 주님의 숨겨진 것이 우리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 자신의 꿈을 꺾어주시고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 이 기도가 정녕 요셉적인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셉과 형들의 만남을 보면서도 이게 무슨 뜻인지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절차와 과정 속에서 필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망해야 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이제는 우리 인생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