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41강-창 37장 5-11절(요셉이 꾼 꿈)1806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5-11절입니다. 구약성경 56페이지입니다.
창 37:5-11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지난 시간에 에돔의 족보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에돔의 족보 다음에 창세기 37장에 야곱의 족보가 나옵니다. 야곱은 복의 계통이고 에돔은 저주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의 계보라면 뭔가 달라도 다른 점이 있어야겠지요. 누가 누굴 낳고, 누가 누굴 낳고,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손자를 낳고, 그런 식으로 죽죽 이어져 가봤자 거기에 에돔의 족보와는 다른 어떤 특이성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안동권씨나 경주이씨나 족보들 많지 않습니까? 그 족보들은 계속해서 미완성으로 혈육적인 연쇄고리를 가지고 줄기차게 갈 데까지 가보는 식으로 이어져갑니다. 끝이 어떻게 끝나는가? 기존의 인간의 족보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왜? 미래의 일은 모르기 때문에 갈 데까지 가보는 거지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야곱의 족보는 유일하게 하늘의 복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족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르냐 하면, 오늘 본문에 야곱의 족보라고 해놓고 에돔의 족보와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야곱의 족보 전체의 성격과 본질을 결정짓는 요소가 요셉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돔의 족보는 갈 데까지 가보는 거예요. 아무도 장담 못해요. 아직까지 역사가 진행되면서 이어져 나갈 것이니까 최종적인 정답은 그 때 가봐야 안다는 것, 에돔의 족보적인 인상,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야곱의 족보는 뭐냐? 가봤자 별 것 없다. 이미 야곱의 족보의 그 본질과 내용은 요셉을 통해서 더 종결되었다, 다 드러났다, 라는 점을 오늘 본문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역사가 아무리 이어지고 인류의 역사가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그 핵심 내용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확정된 내용과 본질을 야곱의 족보는 품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꿈으로 나타난 거예요. 요셉의 꿈으로.
에돔의 족보 쪽도 꿈은 꾸겠지요. 하지만 꿈이 족보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야곱의 족보는 꿈이라는 것이 야곱의 족보의 모든 성질, 성격을 결정짓고 마는 겁니다. 야곱의 족보라 해놓고는 야곱은 나오지도 않고 갑자기 요셉이 나오고, 요셉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면서 대번에 나오는 것이 요셉은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들의 눈에 들어오는, 인간들이 보고 있는, 아버지가 자식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는다는 그 족보,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그 주인공을 굴비 엮듯이 엮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는 제대로 된 족보냐?
아니면 그 모든 계통을 무시하고 갑자기 난입하는 것이 있어요. 꿈의 난입이죠. 꿈이라는 것은 난감한 겁니다. 예측한 게 아니거든요. 꿈은 난감하고 그리고 꿈은 원인이 없어요. 꿈은 주어진 대로 받을 뿐이지 사전에 준비하다든지 사전에 어떤 재료를 마련한다든지 그런 것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난입이라는 말이 맞아요. 그냥 뛰어 들어오는 것, 쳐들어오는 것, 침투하는 것, 침노하는 것, 그런 성격이 꿈의 성격이에요. 요셉이 꿈을 꿈으로 말미암아 에돔은 인간이 주인공이지만 축복의 계통 야곱은 꿈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이 꿈을 꿈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들통 나느냐? 왜 인간중심의 에서족보는 천국에서 탈락될 수밖에 없고, 축복에서 밀리고, 저주받을 사람들인가를 꿈을 통해서 들춰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요셉이 꿈을 꿨을 때에 형들이 요셉의 꿈 내용을 듣고서 축하한다든지, 박수쳐 준다든지, 고맙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격분합니다. 형들이 요셉의 꿈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것은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 형들이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꿈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꿈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 꿈이 나라는 이 주인공을 얼마나 돋보이게 해주는 징조인가, 라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해석기준이 있었던 겁니다. 형들이 요셉의 꿈의 내용을 듣고 격분했다는 것은 평소에 형들이 어떤 식으로 현실을 살아오고 있었는가가 밝혀지지요.
꿈은 형들에게 격분하게 하는 요소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형들이 격분할 줄 알고 그 꿈을 요셉으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했고 요셉은 그 꿈을 형들에게 두 번씩이나 이야기했고 아버지에게도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역사, 족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요셉을 통해 준 그 꿈을 감당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되고 오히려 배격하는 성질을 품고 인간의 족보는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집어넣어준 그 꿈을 인간은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앞으로 자기 족보는 적어도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양보 없는 원칙 같은 것이 인간 내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꿈을 꾸게 함으로 말미암아 에돔의 족보와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아버지 야곱이 받았던 그 언약이 역사 속에서 전개될 때는 요셉에게 준 꿈이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필수적이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족보는 이렇다 하고 꿈을 줬지요.
꿈을 주게 될 때에 요셉의 형들이, ‘하나님이여, 축복해 주옵소서.’ 이렇게 마치 자기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양, 하나님께서 뭔가 위에서 계시를 주시면 그 계시가 아무 저항 없이 순하게 들어올 수 있는 순수한 바탕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동생 요셉을 통해서 계시로 꿈을 주니까 그들은 빈 마음이 아니고 뭔가 자기중심이 역사관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역사관은 시간 순서대로, 형들이니까 인생을 오래 살았잖아요, 시간순서상 자기들이 동생보다 우월하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준 꿈은 그 우월성이 바뀌어져요. 요셉이 꿈대로 하는 말이, 형들이 나에게 절하더라, 하니까 졸지에 자기들이 우월한 것이 아니고 열등해져 버리고 자기들보다 뒤늦게 태어났고 자기들보다 아래쪽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 요셉이 자기보다 우월 쪽에 속해버리면 뭐가 무시당하는가 하면, 시간적인 서열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도 본인 생각이거나 혹은 공부를 많이 해서 “형님, 내가 공부를 많이 해보니까 형들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요셉도 그냥 당했어요. 하나님이 꿈을 꾸게 했고 그것을 순전한 마음으로 형들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속은 꿈이 오기 전에 이미 진공상태가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중심의 역사관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있었는데 그 외부에서 오는 꿈이 기존의 자기 역사관에 부합되면 그것은 좋은 꿈이라고 박수쳐 줄 것이고 기존의 역사관에 반대가 되면 오히려 격분하게 될 것이고.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요셉을 통해서, 형들이 알고 있는 역사,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개꿈이라는 거예요. 꿈이 꿈을 회수하는 거예요. 꿈이라 하는 것은 허망한 겁니다. 역사가 아니고 비역사, 그냥 공중에 날라 가버리는, 잠시 있었던 것 같지만 사실은 허깨비 같은 것, 꿈은 무용지물이지요.
꿈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기존의 자신의 역사관, 자신의 생각을 받쳐준다면 수용할 용의가 되어 있지만 만약에 반대한다면 그런 것은 과감하게 쳐낼 대상이 되지요. 현실이라는 것은 꿈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은 꿈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기존의 인간들의 생각이 요셉이 꿈을 꿈으로 말미암아 그 역사라는 그것이 바로 꿈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꿈과 역사가 융합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꿈으로 왔을 때 그것을 거부하는, 진짜 현실이고 진짜 역사라는 그쪽이 하나님 보시기에 개꿈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노고가 다 헛방이고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축복 받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챙기고 있었던 모든 복음이야기, 십자가이야기, 교회 나오기, 성경공부, 신학하기, 이 모든 수고가 다 헛수고에 불과한 꿈같은 것, 잠잘 때 꿈을 꾼 것 밖에 안돼요. 지나가게 되면 그 꿈은 다 날라 가버리지요.
구원받기 위해서 뭘 준비해야 됩니까, 라는 그것이 바로 헛꿈 꾸고 있는 짓거리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단디(단단히) 준비하는지. 아주 단단히 준비하거든요. 혹시 뭐 하나 빠트려서 내 구원에 지장이 안 될까, 걱정하는 거예요.
마치 보험 계약하면서 빽빽하게 작은 글자로 쓰인 약관 구절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읽어서 사인하고 도장 찍고 보험금 주겠다는 그런 마음자세, 내 구원은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겠느냐 하는 그 마음자세, 그것이 요셉의 꿈에 입장에서 보면 다 허망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꿈은 돌격해서 들어오는 것이니까. 구원은 돌격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내가 준비한다고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잘 챙기면 구원받고 못 챙기면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는 것이지 내가 따내는 것이 아니에요.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들이 오해한 것은 요셉이 자기 꿈을 나름대로 해석한 거예요. 형들이 나에게 절을 하더이다.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요셉의 해석입니다. 요셉이 받았던 꿈의 해석에서 요셉도 틀렸어요. 요셉이, 나에게 형들이 절한다고 한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요셉이 철이 없어서 꿈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형들은 그 요셉의 해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꾼 당사자가 요셉이기 때문에 요셉에게 우리가 절을 한다는 것, 꿈만 놓고 봐서는 그 해석이 옳다고 생각한 겁니다. 만약에 요셉의 꿈을 형들이 꾸었다면 형들도 똑같은 해석을 내놓을 거예요. 자기는 그런 꿈을 못 꾸어서 약이 올라서 그런 이야기 하지요.
9절에 보면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내게 절하더이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요셉 본인을 이야기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했다고 하니까 형들이 절한다는 것이고, 10절에 보면 아버지도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라고 나무라요.
그런데 이에 요셉을 나무랄 문제가 아닌 것이, 요셉이 평소에 최고가 되기 위해서, 대장질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기 꿈을 조작한 것이 아니잖아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셉이 꿈의 수용자라는 이유 때문에 요셉이 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거예요. 이것은 요셉이 일반적으로 꿈꾸는 기존의 짓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이 본인이 꿈을 꾸려고 노력하고 애쓴 것이 아니거든요. 요셉이 꿈을 꾸기 위해서 연습한 것이 아니에요. 요셉 본인이 이 꿈을 꾸기 위해서 예행연습 한 적이 없어요. 평소에 요셉이 형들보다 자기가 우수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멋진 꿈꾸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미리 짐작한 것이 아니에요. 요셉도 형하고 똑같은 입장입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해줬으면 요셉은 꿈의 주인공으로 본인을 등장시키면 안돼요.
왜냐하면 요셉도 이 세상에 속한, 형들과 똑같이 이 육에 속한 존재입니다. 요셉에게 꿈을 준 것은 야곱언약을 위해서 제공된 거예요. 제가 오늘 아침에 누구에게 질문을 받았어요. 서울의 어떤 아시는 분이 여성철학자를 만났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분이 목사님인줄 알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거예요. 자기가 철학을 공부해보니 불교에서는 인간의 없음 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없음 중심으로 보게 되면 불교가 풀리는데 그 관점에서 기독교라는 신학을 공부해 보니까 불교나 기독교나 똑같이 없음 중심으로 세상만사를 풀더라.
그런데 예수하고 부처하고 누가 더 출생이 빠르냐 하면 부처가 출생이 빠르거든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처가 이 땅에 태어나서 나름대로 진리를 설파한 곳이 인도라는 말이지요. 인도에 먼저 예수보다 먼저 진리가 퍼져 있었으니까 예수님이 많은 진리를 알아야 자기가 메시아가 되니까 인도까지 가서 배워서 자기 것으로 해서 기독교를 전했기 때문에 불교의 진리나 기독교의 진리나 똑같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목사님 견해는 어떻습니까, 라고 도전적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저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서 질문을 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불교는 없음 중심이지만 기독교는 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봐서 이것은 언약중심이라는 말이지요. 언약중심이라는 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을 때 이미 정해진 것이 언약이에요. 이스라엘은 언약이 먼저 있고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일은 부처한테 배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메시아대로 움직인 겁니다. 그것을 그대로 오늘 본문에 적용시키면 지금 요셉의 형들이 복 받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언약이 언약스스로 전개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요셉에게 침투해서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니까 요셉도 해석 제대로 못하고, 형들도 해석 못하고, 그렇게 된 거예요.
왜냐하면 요셉이 꾼 꿈의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새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지 요셉이 아니에요. 요셉은 이 땅에 와서 자기 죄로 죽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이 요셉의 꿈에서 요셉이 형들보다 우월하다, 형들이 요셉보다 열등하다, 지금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언약의 계시를 넘겨준 것은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혈육적인 연쇄고리를, 현실 그 자체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 거예요. 이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에돔 족보와 다를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자식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 자식 낳고, 자식 낳고, 이렇게 되면 마지막 때에 결국 하나님을 만나든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된다는 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가보면 안다는 거예요. 가보면 아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야곱족보에서는 미리 모든 결론이 그 안에 담긴 채 전개돼요. 그게 뭐냐 하면, 역사가 있다, 인간이 있다는 것을 현실로 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뭐냐? 너희들이 꿈을 개꿈으로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들이 붙들고 있는 역사자체, 현실자체가 꿈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꿈이라 했을 때에 요셉의 형들이 격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굉장히 중요시해요. 서열을 중요시하고요. 시간이 흐르는 것을 왜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면, 시간이 그냥 빈 채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예상과 희망과 소망과 기대와 목적, 이 모든 것을 인생이라는 역사, 시대라는 역사 속에 투자하고 애를 쓰면서 비축을 하고 그것이 지혜인양, 그것이 진리인양 여기면서 고이고이 간직하는 겁니다. 그것이 custom이라, 관습이고 관행이고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이 다 그런데서 나온 거예요
그걸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역사에서 지혜를 배워라. 진리는 역사한테 배워라. 과거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된다. 이게 인간에서는 흔히들 누구에게 동의도 없이 내세우는 진리 값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꿈이, 원인도 없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예상도 못한, 인간이 기대하지도 않은 꿈이라는 것을 가지고 현실이라는, 실제로는 이 현실이 개꿈인데,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인데, 헛된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헛되다고 여겨지는 꿈을 가지고 진실을 깨면서 공격해가는 거예요. 네가 바로 꿈이다.
꿈이 옴으로 말미암아 현실이 졸지에 꿈으로 변해버리고 그 요셉이 받은 꿈이 저쪽의 현실 이 된 꿈을 회수해가는 겁니다. 회수하는 과정에서 오늘 본문 내용은 뭐냐? 최종적인, 중심 되는 대표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 오늘 꿈의 내용이에요. 중심 되는 대표자가 있는 거예요.
열 두 명의 아들 그 중에서 하나가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1에서 나왔던 12가 다시 1로 회수되는 식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행된다는 것이 요셉에게 담긴 꿈의 진실입니다. 다양성이 오직 하나에 집중되는 전개과정을 보이는데 그것을 그동안 인간들은 시간이 흐르면 되겠지, 라고 해서 시간의 전개에 미뤄버렸어요.
그런데 시간의 전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뭐냐? 언약의 전개과정이에요. 언약의 전개과정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그러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자가 세상 모든 일어나는 것들을 꿈으로 여기고 진실 된 것은 그 모세언약의 주인공, 오직 하나밖에 없는 주인공, 중심 되는 그 주인공 그 인물로 모든 일어나는 세상일을 전부 다 권세로서 자기에게 끌어당기고 회수시키는 겁니다.
그 진행과정이 언약의 진행과정이에요. 인간중심이 아니고 언약중심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인간이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에요. 예수님이 먼저입니다. 세상 일어나는 모든 것은 왜 예수님 중심으로 전개되는가? 그것을 에돔 족보와 야곱족보를 두고 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저주해야 되고 야곱을 축복해야 되는가? 그것은 내 맘대로 라는 거예요. 이 중심 되는 인물, 언약을 성취시킬 그분의 자기의사로, 일방적인 권한으로 한쪽은 저주하고 한쪽은 사랑해준 겁니다. 끝.
거기에 무슨 군말이 필요합니까? 이 세상은 이유를 달고 토를 다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내 인생 왜 이렇게 사는가? 나쁜 짓을 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유 없어요. 그냥 그렇게 살게 되어 있어요. 그 이유를 나에서 찾으면 안돼요.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고생한다. 내가 착하면 고생 덜할 것을.
자꾸 자기중심으로 생각해 버리면 그것은 요셉의 형들과 같이 되어버려요. 그리고 요셉도 그 범주 안에 들어가고요. 야곱도 그 범주에 들어가고. 레아도 그 범주에 들어가고 다 들어가요. 인간이라는 것은 그 한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게 한계성이에요.
요셉이 꿈을 꾸었다 하니까 전부 다 요셉의 꿈을 놓고 형은 형대로 요셉은 요셉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전부 다 일방적으로 자기중심으로 해석들을 해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꿈을 놓고 그 꿈을 언약대로 전개해 가면서 뭘 쳐내느냐 하면, 잘못된 해석들을 쳐내는 작업을 앞으로 전개하는 거예요.
요셉의 꿈을 가지고 계속 쳐내는 겁니다. 왜곡된 엉터리 해석을. 인간들 자기중심의 해석을.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성경을 놓고 자기구원중심으로 해석하는, 구원론 중심으로 해석하는, 성경 뭘 알면 내가 구원 받습니까, 하는 식의 해석들을 쳐내는 작업이 요셉을 통해서 앞으로 전개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꿈의 세계, 이 꿈이 세계가 천국이라면 나는 기어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뭘 준비해야 되고, 뭘 행해야 되는가, 라는 시도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허망한 꿈으로 보는 겁니다. 꿈꾸지 마라. 네 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꿈꿀 자격도 없다.
왜? 인간의 꿈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서 예측되고, 준비되는 것이고, 기대되고, 목적으로 이끄는 삶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나 위주의, 나 잘되기 위한 목적으로 꿈이든 세상 돌아가는 현실을 인간은 그냥 순수하게 해석하는 법이 없어요. 내 실익이 있는 쪽으로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꿈속에서 허망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존재를 유일한 현실로 봅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꿈이라고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나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중심은 따로 있는데 인간은 그 중심 되는 분을 구경도 못했는데 야곱언약에서 태어난 요셉에게, 꿈이라는 형식으로 드디어 구경도 못한 것이 요셉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서 형들은 비로소 목격하게 된 겁니다.
목격하면 이것을 칭찬한다든지, 축하한다든지,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 꿈을 대하는 순간 아버지로부터 형들까지 모든 인간이 노했다, 격분했다고 되어 있어요. 분노를 한 거예요. 비로소 인간은 얼마나 헛꿈을 꾸고 있는지 그 사실이 발각된 겁니다.
이 말은, 신약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여호와 섬기고 하나님 잘 섬긴다고 봤는데, 심지어 사울이라는 사람도 하나님 잘 섬기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기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막상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니까 그동안 내가 했던 짓거리가 전부 다 허망한 꿈같은 것이라는 것이 발각된 겁니다.
꿈인 줄도 모르고 실제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 진실인데 자기 손이 세포를 만지면서 자기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니까 자기는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 그 자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에돔에 속한 사람들 다 그래요.
요새 선거철이지요. 민주당하고 한국당과 대결하지요. 인간들끼리 서로 싸워봐야, 이재명이, 남경필이 이렇게 싸워봐야, 둘 다 싸워봐야 그 싸움은 의미 없는 싸움이에요. 왜? 둘 다 꿈속의 싸움이거든요. 둘 이 싸우다가 둘 다 나중에 지옥에서 만나요. 실컷 싸웠는데 지옥 가서 만나요. 왜? 둘 다 꿈속을 헤엄치고 있기 때문에.
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뭔가 준비해야 된다는 것, 기름 준비, 뭐 준비. 준비물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마치 나에게 허망한 꿈처럼 우리 속에 다가왔고 침투했습니다. 이미 왔어요. 진짜 현실은 왔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정작 귀한 것이 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마치 지나간 꿈속에서 들은 것처럼 왔다가 가버려요. F-킬라 모기약 친 것처럼. 뿌릴 때는 냄새 좀 나는데 좀 있으면 다 없어져요. 다시 모기가 앵, 하고 끓지요.
누가 이스라엘 언약의 대표자냐? 야곱도 아니고 요셉도 아니에요. 예수님이십니다. 요셉에게 꿈에 준 약속대로 그 약속이 요셉이 국무총리 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끝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꿈을 통해서 꿈에 불과한 이 세상에 꿈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둘 중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가를 주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세상의 자기 역사 속에, 자기 꿈속에 빠진 인간은 절대로 자기 꿈에서 자진해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구원이 될 수가 없어요. 자기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것을 그 대표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꿈의 내용이 언약인데 그 언약이 대표자 되시는 분을 통해서 실현되고 성취가 되면 그 성취성이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면서, 나 어떻게 잘 될까, 어떻게 천당 갈까, 이런 존재 속에 쑥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내가 원인제공하지 않은 난데없는 구원 속에 같이 놓이게 됩니다.
그 구원의 활동 속에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증인으로서 난데없이 살게 되지요. 마치 요셉이 난데없이 꿈을 꾼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생각을 합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너는 지금 허망한 꿈을 꾸고 있다고 놀리고 있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하거든요. 방금 이야기 한 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게 성령 받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남들이 평가할 때 이런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왜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네가 받았다는 복음이라는 그 허망한 꿈에 목숨 거느냐, 왜 전부를 거느냐, 이런 평가를 받을 겁니다.
여러분,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그 자체, 이것이 바로 천국 가는 야곱의 족보에 속한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꿈같은 이야기, 예상 못한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능력을 입었다는 이 소식이, 우리가 준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것이 우리 속에 쑥 들어오면서 졸지에 우리가 요셉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서 어떠한 수모가 있다 할지라도 웃음으로, 기쁨으로 오히려 즐길 수 있는 여유만만 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