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39강-창 36장 31-34절(에돔의 나라)1805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6장 31-34절입니다. 구약성경 54페이지입니다.
창 36:31-34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이스라엘과 에돔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고 에돔의 조상은 에서, 그리고 그 야곱과 에서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저주받았고 야곱은 축복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둘이 한 아버지에서 났지만 한 아버지에게서 난 두 자식의 운명이 하나는 축복이고 하나는 저주로 이어집니다.
같은 아버지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똑같은 운명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 말은, 이삭 안에, 이삭이라는 공통의 아버지 안에 두 가지의 상반되는 속성이 담겨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언약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은, 하나의 언약이 왔는데 결과는 두 개가 생기게 하는 전략, 그것이 하나님이 펼치는 언약입니다.
언약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말은 이 언약에서 제시되는 그 운명과 미래는 후차적으로 인간이 변경할 수가 없다, 고정된, 확정된 미래를 각자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행위를 집어넣어서 내 미래를 내가 원하는 미래로 바꾸겠다는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인간보다 언약이 우선이라는 그 점을 빠트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언약이 새언약인데 그 새언약에서 만들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라 하는 것은 확인하는 단체지 새삼스럽게 자기 운명을 바꾸는 단체는 아닙니다.
나보다 먼저,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 창세전부터 결정된 사항이 무엇인가를 교회 성도들은 서로 나누게 되는 겁니다. “당신도 그런 운명을 부여받았어? 나도 그런 운명을 부여받았어. 아, 참 신기하네.” 각자의 직업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얼굴 다르고, 지문이 다르고, dna 다르고, 다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게 다르다는 말은 인간의 살아온 습성이라든지 버릇이 다 다르다는 거거든요. 사고방식이 다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고방식이 얼마나 수천, 수만 가지인지와 상관없이 운명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언약적속성에 의해서 같은 나라에 모인다는 것, 총집합이 된다는 것, 이것보다 더 신기한 일이 있을까요? 참 신기하지요.
내가 평생에 한 모든 것은 일체 묻거나 따지지 않는 거예요. 이 순재 보험입니다. 전혀 묻거나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확정지어줬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할 것은, 자기가 하는 행위를 근거로 해서, 나는 이런 행위를 하고 당신은 저런 행위를 하니까 행위에 차이가 날 것이고 그래서 미래는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끄집어내 보는 겁니다.
끄집어내놓고 그것을 십자가 앞에서 개망신당해야 돼요. 너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 하는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개망신당해야 된다 그 말이에요. 다 같이 십자가 앞에 선다는 조건이 있어야 그게 가능하지요. 인간은 타고난 습성과 버릇이 있고 교육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의 성격을 자기가 못 고칩니다.
못 고치더라도 누구 앞에, 십자가 앞에 서느냐? 거기에 따라서 동일한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성질은 안 바뀌었지만 고백은 동일한 고백이 나오지요. 공식 같은 겁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이것은 공식이에요. “죄인이지만 주님의 십자가 피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동일한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할 것은, 당신은 어째서 죄인이냐 하는 그 물음, 거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 주고 있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스라엘과 에돔, 야곱과 에서는 한 아버지에서 났지만 갈 길이 달랐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른가? 왜 그게 달라야 되는가?
3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을 때에 벌써 에돔땅에는 왕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왕이 8명이고 족장이 11명 나옵니다. 야곱쪽은 왕이 없는데 에서쪽은 왕이 있었다. 그러면 왕이 있었다는 쪽이 무슨 징조, 징후가 되느냐 하면, 저주받은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았고 에서는 저주를 받았는데 축복받은 쪽에서는 왕이 나타나기 전에 저주받은 쪽에서 왕이 나타났다면 이것은 둘이 갈라지는 각도, 그 각도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벌어지는 요인이 발생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왕이 있다는 그게 왜 문제 되는가? 왕이 있다는 것이 왜 저주의 증상이 되는가? 왕이 있다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이유가, 그들이 왕을 내세우는 그 습성, 왕을 내세우는 속성이 창세기에 나오는 저주받은 쪽의 속성을 연속적으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같은데 형제가 갔던 길이 완전히 달랐던 첫 번째 사례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한쪽은 가인이고 다른 한쪽은 아벨이지요.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족속의 속성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가인의 후손이지요.
그 라멕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3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이걸 자랑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나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걸 어디서 물려받았는가? 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속성입니다. 가인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혈육이 계속 연장되고 있다는 겁니다. 가인의 혈육이 가인이 죽고 난 뒤에도 생생하게 살아서, 인물은 다르고 이름은 달라도 그 인에 가인의 성격, 성질이 죽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생생하게 가인의 저주의 속성이 살아납니다. 살아나게 되면 비록 가인이 죽더라도 가인이 성질은 그 후손 속에서 그대로 살아 있지요. 사람들이 보통 살아있다, 살아있다, 하잖아요. 걸어 다니면 살아있고, 말하면 살아 있고, 밥 먹으면 살아 있지요. 죽은 사람은 공동묘지에 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 살아있는 사람 속에 뭐가 있느냐? 죽어야 될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를 못합니다. 저주받은 속성을 발휘하면서 살아 있어요. 왜 그런가? 저주를 이 땅에 보여줘서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구태여 번호를 매긴다면 첫째는 뭐냐 하면, 죽은 자만 죽은 것이 아니고 산자도 죽었다는 사실이 첫 번째. 두 번째, 산자 속에 죽음의 요소가 있는 이유는 그 죽음의 이유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저주의 티를 내고 있습니다. 그 저주의 티를 마구 낼 때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 만들기 위해서 이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거예요.
세 번째로 더 붙인다면 이 지옥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혈육은 어느 누구도 자기 혈육에서, 자기의 성격에서, 본성에서 탈출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가인이 저주받은 자인데 이 가인이 저주받은 특성을 이야기하라면 이 지상에서 자기 자리를 잡고 거기에서 절대적인 존재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는 것, 아까 말씀드린 대로 라멕이 그런 특성을 보여주고 있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을 자기의 영원한 터전으로 삼는 거예요. 땅을 영원한 터전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이고 뭐고 그런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터전, 나는 죽더라도 내 이름을 가진 내 후손이라도 계속 살 수 있는 터전으로 삼고자 이 땅에 터 잡고 절대적 조직을 구성하는 거예요.
이걸 자기조직화라고 하는데, 세포부터 해서 모든 생물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스스로 자기조직화가 이뤄져요. 자기가 자기를 단단히 하는 겁니다. 그러한 성질이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드러났고 창세기 12장에 들어오게 되면 아브라함에서 서로 다른 운명으로 가야 될 두 자녀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하나는 이삭이지요. 이삭과 이스마엘이 나오면서 이스마엘은 저주를 받고 이삭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미래, 운명과 대비가 되는 사건은 없는가?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관련되어 있는 친인척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는 땅이 있었어요. 거기가 소돔과 고모라였는데 롯이 사는 그 땅에 심판하는 천사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창세기 19장 29절에 상당히 의미 있는 구절이 나와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언약의 특징이 뭐냐? 아브라함언약이 이 지상에 성취되어 가면서 어떠한 최종적인 결과를 보여주느냐? 그것은, 아브라함과 관련된 사람은 땅을 공격하는 하나님의 유황불에서 면제시켜 주고 빼내주는 거지요. 빼내주는 식으로 건져주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상관없는 쪽은 하나님의 죄 값을 치르도록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몰살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땅에는 나중에는 거주민이 없지요. 유황불 맞아서 다 죽었으니까. 그 때 나오면서 하나의 원리가 나오는데 그 원리, 창세기 19장에서 천사가 롯에서 신신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17절에 보니까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천사가 강제로 롯의 가족을 끌어내고 난 뒤에 “도망하여” 여기에 도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생명을 보존하라” 생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망치지 않으면 너는 생명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여기 도망이라는 말이 또 나오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축복과 저주의 언약이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언약은 두 개의 이질적인 대립되는 속성을 지상에 펼치게 되는데 하나는 저주고 또 하나는 복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저주받은 자의 마지막 모습은 아브라함언약에 의하면 그것은 완전히 유황불로 타서 죽어버리고 심판받습니다.
그렇다면 복 받은 쪽은 뭐냐? 도망쳐야 되고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복은 내가 이 자리에서 뭔가 추가적으로 더 얻어 챙기는 것을 복이라고 보잖아요.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어디로부터 어디로 도피를 하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아무 미련 없이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왔던 모든 과거를 다 잊어버려야 된다는 거지요. 성경은 내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마태복음 8장 12절에 유명한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새말로 로마의 중대장이지요.
어떤 로마의 중대장이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 종이 아프니까 예수님이 좀 도와 달라, 할 때에 내가 가겠다, 하니까 8절, 9절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믿음이 있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이 칭찬이 결국 무슨 결과를 낳는가? 마태복음 8장 12절에 보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추가적으로 뭘 하나 받는 것이 아니고 작살나는 쪽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이 된 상태를 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언약이 우리에게 찾아오지 아니하면, 언약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현재 우리가 태평스럽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가는 이것이 저주가 된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땅에서 살기 때문에 땅의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한평생 땅에서 살다가, 고생고생하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 생각, 그 사고방식이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 사고방식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지요. 그러면 교회 가서, 이왕 사는 것, 행복하고 떵떵거리면서 살도록 부자 되고 오래 살게 해달라, 이렇게 해버려요. 이런 요구에는 뭐가 없느냐? 빠져나옴이 없습니다. 탈출도 없고 이 땅에 대해서 ‘뒤돌아보기도 싫어. 나는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라는 언약적인 빼내줌이 빠져 있는 거지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아브라함언약에 있어서 저주가 어떤 양상으로 이 지상에서 최종마감 되는가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죄에 대해서 눈감고 넘어가지 않고 기어이 심판하고야 만다는 결심을 언약을 통해서 충분히 반영한 증거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축복의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롯은 거기서 살았던 사람이지만 기사회생으로……, 그야말로 자칫했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사실은 큰일 났지요. 자기 아내가 뒤돌아봤으니까. 롯은 거기서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 돼요.
처음부터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것은 롯의 생각이 아니었지요. 천사의 일방적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생각이 들이닥치지 아니하면 성도는 이 땅에서 구원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자기결심과 자기의 각오는 소용없어요. 주님의 강렬한 열심과 강렬한 조치가 우리의 뜻을 이겨서 롯처럼 세상에 미련두지 않고 빠져나오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언약이라면 이삭에 의해서 생겨난 두 자식이 보여주고 있는 저주의 양상과 축복의 양상은 어떻게 차이 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왕이 없지만 에돔 자손은 왕이 있었다는 이 사실을 통해서 어느 쪽이 저주받은 쪽인가를 하나님께서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나섰다는 말입니다.
왕이 있다는 이 자체가 지상을 영원한 자신의 안식처로 확정짓겠다는 겁니다. 왕이라는 것은 요즘말로 하면 일종의 깡패지요. 옛날 왕들은 전쟁을 해서 노예를 많이 가진, 노예라는 것은 다른 말로 용병인데 그 용병, 노예를 많이 가진 그들이 왕입니다. 옛날의 노예는 요즘 말로 하면 현찰이 많다는 뜻이에요.
옛날에는 노예가 돈이었습니다. 노예를 사고팔고 하면서 거래가 되었던 거예요. 노예를 사기 위해서 자기 옆에 제사장을 둔다든지 본인이 제사장이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성전에 많은 재물을 갖다 바치도록 했습니다.
옛날에는 농사를 지었기에 날씨가 좋지 않으면 일 년 농사 다 버려요. 그래서 신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데 그 신의 화신, 신의 아들로 그 당시 지도자들이 설치고 다닌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섬기듯이 지도자인 왕을 섬긴 거예요. 왕이라는 것은 일반인 중에서 좀 괜찮은 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신의 대리자처럼 행세한 자가 왕이에요.
왕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뭔가 새로운 지명이 나올 때도 왕의 전쟁 이야기, 그런 것을 가지고 지명을 많이 붙였지요. 지금 우리교회가 있는 이 땅, 대구 지묘동이 옛날 후삼국시대 때, 고려가 되기 전에 마지막 전쟁을 벌였던 전투지역이에요.
많은 지명들이 있는데 칠곡 가는 쪽의 ‘무태’라는 지명은 무슨 뜻이냐 하면, 후백제의 견훤이 따라오기 때문에 왕건이 지시하기를 태만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전쟁 끝나기까지 마음 놓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 지명 이름이 무태에요.
파군재삼거리가 있는데 ‘파군’이라는 것은 왕건의 군대가 완전히 박살났다고 해서 파군이라 했어요. 그래서 왕건 얼굴이 하얘졌어요. 견훤의 군세에 너무 놀라서 얼굴이 하얘진 거예요. 요 뒤 지명이 ‘백안’이에요. 안심이라는 곳은 이제는 안 따라오겠지 해서 그 이름은 안심이에요. 밤새워 도망갔다고 해서 반야월이고 반야월에서 안심되는 겁니다.
팔공산은 왕건을 지키려고 여덟 명의 충신이 왕건대신 죽었어요. 그래서 이름이 팔공산이고요. 신숭겸의 묘가 있는데 가케무샤, 왕건의 대역을 하다 죽어서 신숭겸의 제사를 모시고 있잖아요.
어떤 지명이라 하는 것은 보통 백성들의 지명은 소용없어요. 우리가 사는 토지가 있는데 신의 이름으로 등장하신 분이 왕이고 왕이 우리를 보호할 때 이것은 신의 보호다.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왕을 섬긴 겁니다.
왕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혈육이 자체적인 자기조직화, 폐쇄적이지요, 자기조직화를 더 강화시키고 단단히 하겠다는 것, 우리 혈육끼리 뭉쳐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그 고집스러움, 이것이 에돔자손이 이스라엘자손보다 먼저 왕을 세움으로서 보여준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왕이 없느냐? 이스라엘은 왕이 없어야 돼요. 왕이 없느냐고 물을 것이 아니고 왕이 있다는 것이 수상해요. 왕이 없어야 돼요. 왜 왕이 없어야 되느냐? 다음 시간에 볼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의 족보가 나오는데 에돔의 족보는 혈육에 의해서 단단히 뭉쳐지지만 이스라엘족보는 그 혈육을 중간에서 내재적으로 와해시키고 분열시키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혈육을 깨버려요. 혈육이 찢어집니다. 혈육중심으로 못 모이게 하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왕이에요. 에돔의 왕은 보이는 왕이지만 이스라엘왕은 보이지 않는 왕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더라도 이것은 보이는 왕의 대리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왕을 지시하기 위해서 세운 왕이지 자기를 보라고 세운 왕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치 오늘날 목사가 있다는 말은, 목사는 “저 십자가 믿고 일찍 세상 뜰래요.”라는 이야기 하라고 그 교회 목사를 세운 거예요. “이 세상에 터 잡고 사는 그것은 저주받은 자들의 가인의 속성입니다. 빨리 뜹시다. 교회 잘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교회가 잘 안 된다는 이 말은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든지 교회가 망한다든지 하는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옛날에 한국기독교가 천만이나 천이백만 이었는데, 지금은 오백만 정도라 하는데, 오백만도 구라고 실제로는 오백만도 안 된다고 걱정들을 하는데, 그렇게 걱정들 하는 사람들은 성경도 안보는 모양이라.
누가복음 12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적은 무리라는 말은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어느 정도 적은지를. 적게 하는 거예요. 혈육적으로 인간들과 인간들의 뭉친 덩어리가 저쪽에 비할 바가 안될 정도로 적어요.
애굽에서 나갈 때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남자만 5십만이라 하지만 애굽전체에 비하면 이것은 적은 숫자에요. 그리고 로마서 9장 27절에 보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이스라엘 내부를 깨버려요. 찢어버리고 분열시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한 것은 세상에 있는 다른 이방민족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되게 한 것이 아니고 왕 없는 나라가 자체적으로 자기조직화 하는 왕이 있는 민족을 저주받는 민족으로 지목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또 그렇게 지목할 수 있는 민족이라야만 야곱의 복의 속한 민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왕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방나라를 따라갈 때에, 그들이 왕을 추구했을 때 그 때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왕은 남은자를 생산하는 왕이신데 그 생산은 기존 인간들이 이방나라를 본받아서, 우리도 자체적으로 든든하고 안정된 왕이 있는 나라가 되자, 하는 그 저주스런 사고방식을 찢어버리는 그 작업 속에서 비로소 안보이던 것이 새롭게 보이면서 등장하는 자들, 그게 남은자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브라함과 관련된 롯 이야기에서. 충분히, 지난 날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충분히 봤어요. 네가 충분히 본 것, 그 본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작심한 것들만 봤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심판받는 것이 뭐가 그리 좋아서, 저주받는 사고방식이 뭐 그렇게 그리워서, 그게 그렇게 아쉬운 추억이 되어서 그걸 뒤돌아 볼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우리가 봐야 될 것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에요. 하늘나라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지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나라 의를 구하는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겁니다. 땅에 있지 않아요. 우리는 땅에서 이미 죽은 자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어요. 혈육으로 사는 사람한테서는 도저히 이런 생각이 안 나옵니다.
따라서 진짜 복 받은 야곱의 자손이라면 우리의 이런 사고방식이 내부적으로 찢어져야 돼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야 돼요. 세상에서 남들처럼 인간답게 살려고, 출세하려고, 남들로부터 부러움 사려고 시도하다가 성도라는 이름 때문에 그게 다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그게 다 허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깨달아야 돼요.
절망하는 것이 아니고, 아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휴 하고 가슴 쓸어내리면서 ‘참 큰일 날 뻔 했다. 저주 받은 자를 내가 왜 부러워했지?’하고 탄식하게 만들어야 돼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자기중심으로, 자기조직화를 해서 안정된 터를 잡고 사는 이것이 인생의 목표거나 그것이 성공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은 복 받은 사람들의 도리가 아닙니다. 해야 될 기능이 아니에요. 이 땅에 정착하기, 그게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그렇다고 가난하다고 해서 하늘나라 보는 것이 아니에요. 가난하면 할수록 과거의 실패를 보상하려는 욕구가 더욱더 크게 되기 마련입니다. 빨리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해 달라고,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다 채워달라고 요청하기 마련이에요.
찢어지는 대표적인 것은, 다음 시간부터 하지만, 요셉이 같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남은자지요. 남은자가 다른 형제들을 살립니다. 요셉의 형제 열 두 명이 찢어지지요. 그야말로 열 명이 한 명을 완전히 죽어라 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버지 야곱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아버지의 찢어진 이 마음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아픔을 대변해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백성은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대타로 우리에게 보내신 거예요.
우리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의와 거룩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가 죽어야 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저주받은 데서 복 받은 백성으로 빼내주시는 작업을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해내시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야곱언약을 통해서 그걸 미리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왕이 되겠다는 것은 제가 아까 가인의 후예인 라멕을 보았듯이, 어떤 힘을 가지고 이 땅에 정착하겠다는 겁니다. 누가 많은 힘을 끌어 모았는지 시합해 보자는 거예요. 경쟁해 보자는 겁니다.
누가누가 출세했는지, 누구 집안이 잘되었는지, 누가 건강한지, 누가 자랑거리가 많은지. 그런 사고방식 자체는 몰래 빠져나와서 뒤돌아보지 말라는 원칙이 완전히 빠져있는 거예요. 찢어지고 분열되고 이 땅에서 남은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야 되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그런 요소가 누락이 되어버리면 그게 바로 저주받은 심성이에요.
제가 아까 마태복음 8장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나중에 통곡합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통곡해요. 인생 잘못 살은 거예요. 헛바람 든 거예요. 에돔은 하나님의 언약의 부스러기입니다. 이건 푼돈이고 잔돈이에요. 본체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복을 위해서 수반된 어두운 그림자 같은 저주의 그림자가 에돔입니다.
그 에돔의 족보를 미리 보여준 겁니다. “에돔 봐라. 왕 삼아서 이 땅에서 오래오래 버티려고 왕 만들었잖아.” 그런데 드디어 37장에 야곱의 족보가 나옵니다. 야곱의 족보는 왕이 필요 없습니다. 찢어지는 요소, 제사장이 왕의 자리에 먼저 형성되는 겁니다. 대신 죽어야 될, 제물이 죽어야 될 그 제사장원칙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 라는 그 정신 속에 주님께서는 그 상한심령을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시는, 제물과 상한심령의 만남, 이것은 왕이 있는 에돔국가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하늘이 주신 요소입니다. 십자가지요.
그 십자가 있는 사람이 바로 남은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돔이 눈에 보이는 자기터전, 땅에 굳게 서기 위해서 혈육중심으로, 왕중심으로 단단히 단결했습니다. 그게 힘의 우열로 보이고 대단한 성공이고 출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저주의 양상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