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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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8월 9일 본문 말씀: 창세기 25:12-18
(25: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25: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25: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25:15)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25:16)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25:17)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25:18)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이스마엘 자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기로 작정된 자라는 사실을 오늘날 인간들이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기존에 ‘저주스러움’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스마엘 자손의 형편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주스러움’을 기대하고서는 이스마엘 자손을 보게 되면 너무나도 평범하고 조용하게 삽니다.
그리고 보통 저주스럽다고 하면 자손들의 대가 끊어져야 하는데, 이스마엘 자손들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7:6에 보면,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고 나옵니다. 창세기 16:10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갈과 그 자손은 애만 잘 낳습니다. 원래 번성이나 번창이란 복을 받은 증거입니다. 창세기 1:22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질(質)적으로 하나님께서 흡족하시다는 의사표시에 이 지상에 같은 종류의 피조물들을 번창케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마엘 자손의 질(質)도 하나님께서 흡족하셨기에 온 천지에 이스마엘 자손으로 번성케 하시는 것일까요? 즉 많은 인구가 북작거린다는 것이 저주받았다는 증거로 낙착이 될 요소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4장을 통해서, 이스마엘마저 아버지가 아브람이라는 사실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2-23)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육을 통해 2중적인 질적 차이성을 담아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의 번창은 아브라함 자손의 번창과 끝까지 대비시키기 위한 조치입니다. 번창하다고 해서 질적인 면에서 ‘복받았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위치에 인간들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나 이스마엘 노선에 들어서지 않고 아브라함 노선에 들어서서 천국가야지”라고 골라잡을 그 어떤 위치에 있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오직 외형적으로 이스마엘 노선 하나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복권 중에서는 즉석에서 동전으로 긁어서 당장 당첨금을 확인할 수 있는 복권이 있습니다.
그 복권을 보면 얇은 막으로 복권 액수를 가려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 노선을 번창케 하시는 이유는, 그 어떤 인간도 번창이 곧 복이라는 유혹에서 자진해서 벗어날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을 벗겨야 하는데, 문제는 그 이스마엘의 형편이 사람들 보기에 복받은 양상이라는 점에서 그 표면성을 선호하게 마련입니다.
정작 아브라함 노선은 철저하게 이스마엘 노선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찾고자 해도 찾아지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심지어 아브라함 본인에게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미 아내의 태가 죽어버린 그런 형편에서 천사가와서 내년에 아기 임신할 것이라고 하니 아브라함 내외는 웃을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아기의 생기면 좋겠다’가 아니라 먼저 아브라함 쪽에 갓난 아기를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기대가 미치지 않는 다른 영역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즉 수학적으로 표면해서, 이 생의 존재를 x라고 한다면, 결국 모든 인간은 죽어서 0가 됩니다.
선악과 따먹은 벌로 심판받아 멸망되는 것을 0이라고 보고, x를 존재로 보면, x+(- x)=0가 되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 x’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에는 존재를 취소시키고 환원시키는 마이너스(-)요소가 자체적으로 내재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x를 통해서 숨겨진 ‘-x’를 찾아내어 그것과 예수님 중심의 창조성과 연결시키고자 하시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단순히 사라짐이 아니라 ‘멸망’이요 ‘심판’이요 ‘분노의 징벌’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요소가 ‘이스마엘 노선’에는 발견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 노선’에서만 단면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마엘 노선은 외형적으로 그저 무난하고 매끈한 연속되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노선은, 기존의 육적 요소를 부정(否定)하고 차단하는 요소가 작렬합니다.
이는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생애였습니다.
. ‘-x’ 속에서만 숨겨진 진정한 존재(아들)가 비로소 나타납니다. 아들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해주시는 바로 그 분만이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 밖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고, ‘여호와’도 아니며 ‘하나님’도 아닙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존재로서는 예수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x'’ 요소가 없기에 그저 행함으로만 처신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 노선’과 ‘이스마엘 노선’이 대비되지만 신약에서 ‘행함’이냐 아니면 ‘믿음’이냐로 가름됩니다. 갈라디아서 3:9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상기해드립니다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결코 아브라함에게 나올 수 없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님과 연계되어야 하는데 그 연계 방식이 아브라함 노선에서는 ‘육의 단절’ 형식으로 진행시키시는 겁니다.
이는 모든 행함의 부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오직 ‘행함’만 나오고 ‘믿음’은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이러한 ‘행함의 단절’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모든 연결과정에 예수님의 능력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라는 결과물입니다.
그래야지만 아브라함 노선에 있어 ‘약속이 주도권’을 쥐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에게 넘겨진 모든 것이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믿음의 결과’로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0강-창 25장 12—18절(이스마엘후손)1708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5장 12-18절입니다. 구약성경 34페이지입니다.
창 25:12-18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십 이 방백이었더라 이스마엘은 향년이 일백 삼십 칠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성경에 이스마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엉뚱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도 못할, 저주받을 백성의 이야기를 왜 이 거룩한 성경에다 기재하느냐는 말이지요. 우리가 관심이 없는 이 족속은 그냥 빼도 무관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은 굉장히 숫자가 많고 번창하는데 이렇게 번창하는 후손을 의도적으로 밑에 깔아두는 것은 이스마엘이냐, 아니면 아브라함이냐의 대결구도로 가져가는 우리의 평소의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복권에 그런 것이 있어요.
보통 복권을 사게 되면 당첨되는 액수를 은박지로 가려놓고 동전으로 긁어서 ‘꽝’이 나오던가, 혹은 ‘한 병 더’가 나오든지 그런 복권들이 있지요. 그래서 그 종이는 분명히 복권 한 장인데 겹쳐져 있어요. 가림막으로 덮여 있고 실제 내막은 가림막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지요. 동전으로 긁어내야 보이는 겁니다.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나는 이스마엘 안하고 아브라함 할래.’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전부 좋게 되어있고 이스마엘은 마지막에 저주받게 되어 있거든요. 그게 노골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2절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이렇게 시작하면서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우리는 그 뒤의 결말을 빨리 보고 싶은 거예요. 결말을 보게 되면 한쪽은 저주받지요.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천국에 간다. 이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보고 있는 이상은 이스마엘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아브라함노선에 내가 끼어들 것인가, 그 중점으로 우리가 성경을 볼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앞에 이스마엘티켓 하나, 아브라함 티켓 하나, 이 두 개의 티켓이 있어서 네가 좋은 것을 골라잡아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듯이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딱 복권은 한 장이에요. 두 장이 아니에요. 골라잡을 수가 없어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을 덮어버리는 은박지 같은 겁니다.
동전으로 긁어서 뒤에 ‘꽝’이 나오면 지옥이고 ‘아브라함’나오면 이것은 땡 잡은 거예요. 천국행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원받겠다는 우리 자신이 아브라함성향이 아니고 이스마엘성향이에요. 우리자신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할 때 누누이 이야기했어요. 처음부터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아브람이 존재했지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은 없어요. 그 이스마엘 아버지가 누굴까요? dna조사를 꼭 해야 되겠습니까? 이스마엘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좋은 쪽을 골라잡을 입장이 못 됩니다. 좋은 것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지옥을 좋아하고 천국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질이 급해요. 좋은 쪽이라면 무조건 자기가 좋은쪽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창세기 3장부터 우리는 이미 사단난 인간입니다. 뭘 잘못 먹었어요. 과일을 잘못 먹었어요. 여름에 주의해야 되는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사단 났습니다.
죽는다고 이야기했는데 문제는 안 죽으니까 문제가 되지요. 안 죽으니까 거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따먹었으니 죽여 버릴래.” 이것이 관심사가 아니라 아담으로 하여금 따먹는 것을 허락하면서 하나님께서 판을 키워갑니다.
그것은 뭐냐? 선악과 따먹도록 배후에서 종용한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어요. 그 세력과, 하나님이 나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세력과 싸움하도록 파견한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바로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진짜 인간,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지요.
그러면 첫 번째 만들어진 아담은 그냥 폼이나 내다가 빠진 거지요. 마라톤도 그렇게 1500미터, 800미터 달리기도 그런데, 꼭 앞에 앞서가면서 기록조절 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선수지요. 선수지만 몇 바퀴 돌다가 어느 순간에 빠져버립니다. 빠지고 그 사람이 빠지고 난 뒤에 진짜 본격적인 레이스를 하지요.
자전거경주에도 그런 것이 있어요. 아담은 뭐가 선도한다는 것, 뭔가 판을 키우는 것인데 그 판을 키우는 하나의 미끼 같은 것으로 흙으로 만든 인간이 일단 따먹고 난 뒤에는 자기의 선도 역할은 끝나고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육에서 난 것은 육으로 되고 그 다음에 영쪽의 주인공, 최후의 승리자,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작업을 위하여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담의 육의 자식들을 이 땅에 팽창시킵니다.
팽창시킨다는 말이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복을 주실 때 그 복이라는 개념이 팽창개념이에요. 하나님이 복을 주시매 한 영역을 장악한 그 피조물로 자기 자리를 확장시킵니다. 하늘이 장악한 그 세는 확장되고 바다의 고기는 고기대로 복을 주시매 팽창되고 6일 날 짐승과 인간도 팽창되고, 모든 것이 팽창되는데 팽창되는 축복이라는 그 작용 그것이 마냥 복이 아니라는 새로운 성질을 부여받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크게 되고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서 그게 복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점을 염두에 두고 이스마엘을 생각을 해 봐야 돼요. 오늘 본문의 이스마엘 자손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지나간 창세기 16장에 보면 이스마엘 이야기가 나오고 창세기 17장에도 이스마엘 이야기가 나와요.
창세기 17장 20절에 보게 되면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가, 교인들이, 인간들이 보면서 왜 저주받는 이쪽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그 복이라는 것, 그 복을 이쪽에 쏟아 붓는 이유가 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바짝바짝 말라 죽어야 되고, 자식도 없어야 되고, 빌어먹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열 두 방백이니까 마치 야곱의 열 두 방백과 비슷하게 되어버리고 복을 줘서 번창, 번성케 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창세기 1장 28절의 그 유명한 말씀이 있잖아요. 복을 줘서 번성하고 온 세상 다스리고 충만케 한다는 그 말씀.
그 복을 세상에 지옥 가는 노선도 같이 받는다면 우리가 저주와 복을 어떤 기준으로 파악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이 모호하게 돼버려요. 여기서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것인데, 안 믿는 사람이 너무 잘되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이 너무 부자가 되고 만사가 형통할 때 우리가 “저 사람이 복 받았는지 저주를 받았는지를 뭘로 알겠습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넌지시 물어보게 되면 주님께서 “네가 그런 식으로 알고자 하는 의도가 뭐냐?”고 되물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파악해서 좋은 쪽을 선택하겠다는 네 의도가 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조로 나오시는 이유, 이것을 저는 돔배기법칙, 또는 소시지법칙이라 하는데, 소시지가 길쭉하잖아요. 또는 상어고기가 길쭉하다는 말이지요. 그걸 도마에 놓습니다. 사람들은 보면서 “이것은 소시지고 저건 상어고기.” 상어 한 마리 놓으면, “이것은 상어다.” 고등어 한 마리 놓으면, “이것은 고등어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칼 가져 오너라, 해서 칼 가지고 소시지를 잘라버려요. 그러면 단면이 나오잖아요. 외형적으로 번창하고 크게 잘되는데 그 단면은 과연 동일할까, 라고 묻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시간적으로 보면 순간적이에요. 더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아브라함자손이라 하는 것은 긴 역사를 봐서는 파악이 안돼요. 어떤 역사든 동일한 단면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아브라함자손이에요. 물론 이스마엘자손도 단면이 있지만 이스마엘자손에 대해서는 그 단면을 성경자체가 소개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6장 12절에 보면,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라고 해서 이스마엘 자손이 상당히 힘들게 저주받은 생을 살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이것은 외형적입니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이 뭡니까?”라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이스마엘은 외형적으로 봐요. 번창하고, 숫자 많아지고, 특정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요. 특정자리, 애굽에서 앗수르로 넘어가는 그 길, 술이라는 광야, 거기는 시내산을 말해요. 시내광야를 말하고요, 또 하윌라, 여기는 현재 북 예멘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스마엘은 아랍사람의 조상이라 보시면 돼요. 지금 아랍과 그 남방쪽에 사는 사람들이 그 후손들인데 그들은 이렇게 번창해서 살았다는 그것이 끝이 돼요. 외형적으로 역사를 보여준다고요. 고등어 전체를 보여주고 소시지 전체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단면을 끊어버리면 거기는 혈통적인 모든 노선이 끊어져 있어요. 역사라는 것이 아브라함 자손에게는 성립이 안 됩니다. 역사라는 것이 없어요. 겉으로는 아브라함자손도 번창했어요. 그 번창하게 된 것이 질이 달라요. 이스마엘자손이 번창한 것과 아브라함자손이 번창한 것이 질이 다르다니까요.
이스마엘자손은 그냥 창세기 1장의 번창하라는 그 번창이 계속 지속되는 반면에 아브라함자손은 번창할 건더기가 없어요. 왜? 자식이 있어야 번창하지요. 아브라함자손은 살아 있으니까 계속 번창해서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보지요. 아브라함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해요. 죽는 것이 정상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요셉이잖아요.
요셉은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해요. 진즉에 죽을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살았다 하면 안돼요. 요셉도 아브라함자손이거든요. 요셉은 살았다 하면 안 되고요. 시편 105편에 보면 요셉이 산 것이 아니고 요셉이 함께 있는 말씀이 살아 있는 거예요. 요셉이 주가 아니라 요셉에게 덮쳐진 그 꿈이 요셉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말씀을 증거 하는 객체로서, 증거물로서 움직일 뿐이에요. 저는 오늘 말씀 생각하면서 해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 먼데서 혼자서 얼마나 고생하겠나. 그러나 요셉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 같은 것은 생각도 안하고 “네가 어디에 가도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되지만 잘 먹고 잘 살아도 지옥가요.
그것은 외형적이니까. “어디 가도 인생에 좋은 사람 만나라. 잘 독립하고 성공해라. 이왕 사는 것 출세해라.” 이렇게 은근히 기대하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집착이 크면 실망도 크다고. 그것이 사실은 모든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스마엘 성향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요셉 빼놓고는 열 한 형제가 이스마엘적이에요. “지가 꿈을 꾼다고?” 사실은 요셉이 꿈을 꾼 것이 아니고 꿈이 요셉을 만드는 거예요. 요셉도 그것을 몰랐지요. “나는 꿈 꿨~다. 엄마 아빠와 형제들이 다 나에게 절하는 꿈을 꿨다. 난 출세할거야.” ‘으이그! 저 밉상, 저 싸가지. 두고 보자. 네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 손으로 좌절시켜 줄게.’
그래서 형제들이 요셉을 죽였던 거예요. 팔아먹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인 거예요. 요셉을 팔아먹을 때의 그 상인이 하필 이스마엘상인이에요. 누구도 이스마엘사고방식으로 역사를 보고, 이스마엘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 범주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남들 보기에 요셉이 이렇게 고생했는데 나중에 국무총리까지 되었다, 그런 식으로 요셉의 일대를 본다면 그것은 이스마엘적 사고방식이에요. 지옥 갈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수정하지요.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은 착고(着庫)에 매여야 되고요.
요셉이 말씀에 얽매이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인생, 자기 동질성이 차단되고, 끊어지고, 절단되는 경험을 계속 겪어야 돼요. 내 인생이라 할 것이 없어요. 이게 바로 아브라함의 내부단면이에요. 갈라디아서 4장을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이삭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은 이 땅에서 번창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묻는 겁니다. “좋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거잖아요. 태어났다. 자라났다. 청년이 되었다. 나중에 장가 잘 가서 번창했다. 이거 일반인들의 소망입니다. 로망이에요. 뭘 더 원해요. 최고 아닙니까? 이 땅에 태어났는데 복 받아서 번창하고 평온한 생활을 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다.
주님은 묻습니다. “그게 다냐?” “예, 다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땅의 사람으로서 지옥가야 되지요. 그게 다가 아닌 요소가 나와야 돼요. 그게 이삭의 일평생입니다. 분명히 자기 눈에 축복이라는 맏이가 저주로 바뀌어버릴 때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든 사고방식의 전복이에요. 뒤집어지는 겁니다.
뒤집어진다는 것은 모래시계처럼 거꾸로 되는 거예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겁니다.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지옥가고 있고 지옥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천국 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만날 모래시계를 뒤집기 합니다. 주님하고 나하고 사우나 가서 모래시계 뒤집기 하는 거예요.
이렇게 놓으면 뒤집어버리고, 이렇게 놓으면 뒤집어버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에요. 난 살려고 하는데 자꾸 죽으라 하는 거예요. 죽겠다고 삐지면 또 살려주고. 뭐예요, 이거! 일관성이 없어요, 일관성이! 나름의 프로젝트를, 어떤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이런 이유입니다. 수식으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다 죽잖아요. 왜? 선악과 따먹었으니 다 죽습니다. 죽는 것을 제로(0)라고 봅시다. 그러면 ×+(-×)=0가 돼요. ×를 존재라고 봅시다. 존재가 0이 될 때 우리의 존재는 나중에 죽는다. 그러면 왜 죽는지 그 핵심이 빠져 있어요.
×인데 (-×)가 첨부되기 때문에 결국 죽어요. 그 (-×)를 보여주는 노선이 유일하게 아브라함노선입니다. 아브라함노선만 단면을 잘라보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살지 못하게 만들고 자꾸 죽이는데 자살한다든지 그냥 죽으면 지옥 갑니다. 죽이는데 그 죽이시는 분이, 장차 이 땅에 죽으러 오신 분이 자기 죽음으로 아브라함을 끌어당기는 작업을 2천 년 전부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 때 보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오지요. ×+(-×)=0입니다. 그 (-×)가 성도에게만 단면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살고자 하고 모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데 (-×)는 그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는 주님이 우리의 존재로 하여금 의미 있는 죽음, 그냥 개죽음이 아니고 의미 있는 죽음,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마이너스(-)인생이, 주님이 가셨던 그 공생애가 우리 안에서 하나의 주도권을 쥐고 우리를 작용해 주니까 요셉은 국무총리 되더라도 국무총리보다 더 좋은 것은 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형제들을 위해서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 장차오실 그리스도의 모양새를 보여줬다는 그 사실이 국무총리 되는 것보다도 자기를 살리는 토대가 되고 반석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대신 죽으심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구약의 이스마엘자손과 대비되는 이 요소를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정말 난해하게 이야기했습니다.
3장 7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이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이스마엘노선이냐 아니면 아브라함노선이냐, 이렇게 갈라지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편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게 되면 행함이냐, 믿음이냐, 이렇게 갈라져요.
행함이냐, 믿음이냐, 이것을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관계를 모르고 봐버리면 개인적인 선택사항으로 주어져 버립니다. 사적인 것으로 주어져요. 나 행함 안하고 믿을래, 라고 결론지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차이나는 아브라함의 단면을 생각해 버리면 모든 인간의 믿음은 다 이스마엘적 행함으로 이미 소속되어 있어요.
어떤 인간도 믿음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뭘 믿겠다고 하는 것은 그냥 대상을 보고 듬뿍 믿는 것이 아니고 믿겠다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기대하는 것, 소망하는 것, 그것을 총동원해서 그 믿음의 내용에 장착해서 그 믿음이라는 것을 마저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믿음 안에는 자기 것으로 가득차 있어요.
마치 이스마엘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대로 믿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가 자기대로 살게 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예언한대로 진행될 뿐이에요. 그러한 방식이 일반적인데 그런 방식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허락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도리어 피식 웃습니다.
“지금 농담하지 마세요. 저한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아내 나이를 보세요. 이미 태가 죽은 것 저도 압니다. 무슨 아기를 낳아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아무리 기를 써도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마중 나옵니다. 어떤 분이 글을 썼는데 글을 너무 잘 써서 댓글을 이렇게 달았어요.
죽어도 나올 수 없는 글을 써서 감사합니다, 라고 썼습니다. 사람이 “제 목숨 바치겠습니다.” 하는 것이 인간이 마지막 내놓는 행함의 절정입니다. 악마의 최후의 모습이에요. “이 정도로 내 것 다 바쳤는데 주께서 알아서 주셔야지요.” 그래서 행함의 최고절정은 헌신이고 순교고 희생이요 자기부인이고 낮아짐입니다. 놀랍게도.
왜? 모든 것이 출발부터가 사적인, 개인적이에요.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을 믿는 인간 그 자체, 완성품으로 제조해 낸 거예요. 믿어라, 믿어라, 가 아니라 이 땅에 없는 아브라함을 만들어 낸 거예요. 아브라함 만들고 믿게 한 것이 아니고 믿음을 품은 채 아브라함이 태어나게 만들어버렸어요.
왜? 그 아브라함의 조상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의 육은 선조가 먼저 있고 자손이 나중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육의 혈통이 다 끊어져 버리면 조상이 먼저 있고 그 조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후손을 먼저 까는데 그 까는 방법은 육의 혈통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내려와요. 묵시적으로, 순간적으로 내려와요.
아브라함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이거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믿을 사람 없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야곱이 사다리 꿈을 꿀 때 거기 예수님이 함께 있었거든요.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한테 그런 이야기 했다고요. 누가 믿겠어요? 누가 봐도 야곱이 그 현장에 있었지 주님이 현장에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나다나엘은 알아요. 무화과나무에 기도할 때 주님이 함께 있었다는 말을 인정해요. 그러니까 너는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사람들이 육이 있으니까 그 육에 시간을 휘휘 돌려 감습니다. 인간은 육이 있으면 그 육에서 본래의 육적인 것이 계속 인간의 동질성으로, 순서적 시간을 고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그리움이란 하나의 짐이 되지요. 벌써 보고 싶지요? 짐입니다. 내 쪽에서 저쪽으로 다가설 수 있는 어떤 다리, 어떤 연결고리는 일체 다 끊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누굴 좋아해도 일방적이에요. 자기의 욕심에 불과합니다. 내가 좋아해도 저쪽에서는 일방적으로 나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이스마엘이나 그리고 아브라함 역사나 아무리 역사가 길더라도 그걸 응축을 해버리잖아요. 응축을 해버리면 인간은 한 발자국도 자기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두 아들을 낳았다. 끝나요. 그들이 어떤 역사를 가졌느냐는 그것은 의미없는 사설에 불과합니다.
의미는 긴 꼬리에 불과해요. 몸통은 딱 하나 뿐이에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게 두 언약이다. 하나는 저주받을 아들 나왔고 또 하나는 영생 얻을, 천국 갈 아들 나왔다. 그 자손들이 어떻게 되는가는 묻지 마라. 그 자손들은 끊어버리고, 끊어버리고 아브라함에서 누가 나왔느냐 그것으로 모든 운명은 이미 종결된 겁니다.
이렇게 시간을 계산하지 않을 때 이걸 믿음이라 하고 시간계산해서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는 개과천선할게요.” 시간요소를 집어넣으면 이걸 가지고 행함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간요소가 주어져버리면 계속해서 자기잘남을 기대를 하게 돼요. 기대를 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믿게 되는데 그것은 이스마엘적입니다.
그것은 마이너스(-)×가 들어 있지 않고 ×라는 존재만 들어있는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신약에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는 두 대립적인 요소가 구약에서는 이스마엘노선이냐 아브라함노선이냐, 두 개로 나눠진다고 했지요. 이스마엘은 굉장히 축복을 받습니다. 열 두 방백에 축복을 많이 받아요.
사람들은 헷갈립니다. 어떻게 저주받는 동네가 왜 그리 모든 것이 잘 되고 땅도 넉넉하게 차지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느냐, 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네가 벌써 이스마엘적이라는 것이 시작이 된다는 거지요. 그런 식으로 축복과 저주를 판단하겠다는 그 인식자체가 이미 이스마엘적이에요.
그러나 아브라함에서는 모든 것이 끊어져 있습니다. 자식이 없어요. 리브가도 자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도 자식이 없어요. 모든 것을 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인간적인 어떤 요소도 천국에서는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적인 요소가 빠진다면 무슨 요소? 하나님의 약속의 요소가 들어가야 되지요.
그러면 인간적인 요소와 약속의 요소는 같이 붙을 수 있는가? 같이 붙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존재가 ×라면 주님의 약속은 (-×)에요. 그 (-×)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것이 (-×)에요. 우리의 존재자체를 계속해서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흙이야.”
이게 우리 안에서 계속 작용해 버리면 ×+(-×)=0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이 구현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죽음안에 도달되었을 때 우리는 그 (-×)가 가진, 예수님이 가졌던 그 부활의 것에 이미 죽음으로서 참여가 된 거예요. 그래서 하늘나라 예루살렘에 가는 그 아브라함자손들은 이 땅에 어떤 육적인 자식들이 다 끊어지고 없는 겁니다.
육적인 자식이 없다는 말은 아브라함입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 땅에 없는 거예요. 다만 이스마엘, 아브람의 자식만 이 땅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브람의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던 (-×) 주님의 자손으로서, 주님을 보여주는 자손으로서, 약속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등장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혈통이 끊어지는 그러한 체험이 다음에 이삭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데 그것이 야곱에게도 주어지고, 그리고 요셉에게도 주어져요. 왜? 야곱에게 요셉은 죽은 자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한나에게도 주어져요. 한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있는 자식 갖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아버지가 없어요. 그것은, 하늘에 계신 분이 이 땅에 자기자손을 남길 때 예수님뿐만 아니고 자기자식들도 어떠한 인생을 살 것인가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것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속에 누가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기껏 열심히 한다 해 봤자 그것은 행함에 불과하고 믿는다 해봤자 그것조차 행함인 것을 이제는 고백합니다. 진짜 믿음은 믿음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것을 주 앞에, 그리고 세상에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