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창세기 23:1-4 / 사라의 죽음 본문
사라의 죽음
녹취:오용익
95강-창 23장 1—4절(사라의 죽음)1707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3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페이지입니다.
창 23:1-4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으로 가라, 이렇게 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갔을 때 어떤 결과물이 있어야 되는데 오늘 사라가 127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어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은 사라를 이 땅에서 죽이는 땅이다.
그것을 다시 이야기해서, 약속의 땅, 여기서 ‘약속’이라는 것은 사라가 죽든 누가 죽든 다 늙어죽거든요, 그렇게 죽을 때 사라의 죽음 속에서 약속이라는 것을 새롭게 규명하고 뽑아내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약속의 땅에서 주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죽었다고 해서 약속이 취소되거나 약속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이 땅에서의 기능은 우리를 죽일 때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그러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약속의 땅 중에서 매장지가 있는 그 장소는 원래 사라가 죽지 않았으면 그게 없는 땅이 되는 거예요. 없는 표식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창세기 23장 마지막에 보면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여기에 막벨라굴이 나오는데 원래부터 그 굴이라는 중요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새롭게 그 가치가 발생된 땅이에요.
사라가 죽지 않았으면 막벨라 밭 자체는 의미 없는 땅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되지요. 어떤 사람이 난파되어서 어떤 무인도,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도착해서 하루고 이틀이고 죽 지냈습니다. 아무리 훑어봐도 자기 외에는 아무도 온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저쪽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라.
이것은 무슨 표식이겠습니까?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말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저쪽에서 불을 피우고 있다는 표식, 사인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더 이상 무인도가 아니지요. 무인도라고 알았는데 무인도가 아닌 겁니다. 이점이 어려운 거예요. 그 사람이 처음 그 섬에 가서는, 이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그것이 자기가 아는 의미에요.
내가 생각하는 이 땅은 무인도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고 난 뒤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이 산다는 기척이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의 의미가 수정이 되는 거예요. 무인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바뀌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의미가 새롭게 바뀌는 겁니다.
막벨라 굴이라는 곳은 사라의 매장지가 되겠지요. 사라의 매장지가 된다는 것은……나중에 아브라함도 거기에 묻혀요. 요셉도 나중에 묻히는데 아브라함이 가족이 거기에 묻혔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그냥 아브라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 어떤 표식을, 어떤 사인을 만드는 겁니다. 그 표시가 뭐냐? 막벨라 굴이라는 겁니다. 막벨라 굴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고 사인이 되려면 사라가 살아서는 안돼요. 사라는 죽어야 되는 겁니다. 사라의 완성은 그녀의 죽음이에요. 사라가 죽을 때 어떤 여인으로 죽느냐 하면, 이 땅에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여인으로서 죽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그래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가 임신을 해서 이삭을 낳았잖아요, 라고 하겠지요. 제가 말한 것은 처음부터 사라는 아기를 못 낳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기 못 낳는 사라, 거기에 중첩이 돼요. 다중현실이지요. 중첩이 되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의 효과로 사라가 아기를 낳았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아기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에서부터 오늘 본문을 생각해야 돼요. 오늘 본문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부부가 보통 결혼을 할 때에 둘이 정붙여 이 땅에서 잘 살려고 결혼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결혼하게 하는 것은 둘이 만나서 잘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만나서 죽으라고 결혼하게 한 거예요.
에베소서 5장 25절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되어 있고 그런 남편에 대해서 아내는 복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고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결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왜 결혼해야 되는가, 언약적인 내용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어야 돼요.
창세전부터 준비된 언약이 거기에 개입되어야 되는데 그 언약의 지상의 사인, 표식은 뭐냐 하면, 죽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는, 말씀은 생명이지만 이 땅에서 육신이 되면 곧 그 생명은 죽음의 모습으로 생명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서 잘못된 의미는 뭐냐? 하나님께서 이 몸을 주셨으니까 이 땅에서 내가 살아봐야지, 하는 모든 것이 언약에 반대되는 악마적인 의식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살아봐야지.
사라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언약의 가정이라 할지라도 사라는 죽어야 된다. 하지만 사라가 다른 사람과 차이나는 점이 있다면 사라의 죽었던 그 장소가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삭을 낳게 된 그 취지를 보여주는 표식이 되는 매장지의 모습으로서 사라는 거기에 합류되는 거예요.
이래서는 잘 이해가 안 되지요. 더 진도를 나가 보겠습니다. 원래 부부라 하는 것은 혼자 죽기보다는 같이 죽으라고 하는 것인데 죽으면서 아기를 낳게 되면 실제적으로 자식 쳐다보면서 “여보, 우리는 이제 은퇴하자.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부부가 혼자 죽으나 같이 죽으나 마찬가지지만 결혼해서 같이 죽는 이유가 뭐냐? 결혼해서 같이 죽게 되면 결혼을 해서 같이 살아야 자식이라는 생명을 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은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거예요. 50퍼센트의 dna를 공유한 자식이 태어나게 되면 자기는 자식 안에서 생명이 계속해서 이어지니까.
자식이 태어났다. 자식에게 생명이 있다는 말은 죽어도 자식의 생명을 근거로 해서 자식 안에서 나는 계속 살아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으면, 사라가 아기를 못 낳으면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면 되지 않겠는가? 사라를 위한 자식은 주지 않습니다.
사라의 기능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생이라는 것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라는 언약의 여인으로서, 여자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온 겁니다. 사라가 죽어서 막벨라굴에 묻히는 동시에 그 남편 된 아브라함의 여정도 끝이 나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을 거쳐 세겜이라고 가나안 땅에 들어옵니다.
세겜에서 헤브론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내려가요. 애굽으로 갔다가 블레셋 땅으로 옵니다. 브엘세바까지 오는데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죠. 거기서 오래 살다가 드디어 사라가 죽을 때는 그 위로, 헤브론으로 갑니다. 창세기 23장 19절에 보면,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헤브론에 사라가 묻히면서 아내 죽고는 거기서 자기여정도 스톱이 되어버려요. 더 살 이유가 없어요.
아브라함은 사라에 종속되어 있어요. 사라가 표식입니다. 사라에게 자식이 있느냐, 자식이 없느냐는 그것으로 애당초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본모습, 본내용이 표현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들러리에요.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둘 있습니다. 사라가 있고 하갈이 있어요.
언약이 아브라함언약 달랑 하나의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는 생명으로 통하는 노선의 언약이 있고 하나는 지옥, 저주로 통하는 노선이 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두 아내로 결정해요. ‘아브라함과 그 외’가 아니라 ‘사라와 그 외’가 되는 겁니다.
사라가 보여주는 것은 뭐냐? 죽은 자는 자식을 멈춘다는 대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에 많은 자기자식을 낳잖아요. 하지만 사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자식 백날 낳아도 영생 아닙니다. 자식 낳아봐야 죽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봐야 또 죽고, 참기름 발라서 영원한 지옥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 거예요.
인류의 역사가 혈육, 혈통이 연속되면서 점점 더 지옥에 접근하는 겁니다. 노선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를 통해서. 노선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노선이 두 개가 되는 거예요. 사람이 육신이 되어서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이 자식을 낳는 이것을 사람들은 생명이니 목숨이니 하는데 그것은 생명도 목숨도 아니에요.
그냥 죽음의 증거물을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은 어디 있느냐? 사라를 보라는 겁니다. 아, 사라가 훌륭하구나. 아니요.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아, 사라가 참 대단한 여자구나. 아니요, 절대로 대단한 여자 아니에요. 사라는 등에 뭘 업었어요. 평생 아기 못 낳는 여자가 사라의 본 모습이에요.
아기 못 낳는 여자가 결국은 127세까지 살다가 죽어서 어떤 매장지에 묻히면 그것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운명이고 생명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라에게, 아기 못 낳는 여자에게 하나님이 아기를 낳게 해놓고 그 사라가 죽을 때는 그 아기 못 낳는 여자에게 아기가 생겼다는 의미를 듬뿍 담고 막벨라 굴에 장사가 되어버리면, 막벨라 굴은 이 세상에 전혀 없는 땅인데 생명 때문에, 언약 때문에 새롭게 의미가 발현된 장소가 막벨라 굴입니다.
나중에 이 막벨라 굴에 아브라함이 묻혀요. 아마 이삭과 야곱, 요셉도 거기 묻히고요. 사람이 얼마나 훌륭하냐, 혹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언약이 그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이 많고 많은 넓은 땅에서 어느 장소로 하나로 결집시키는가, 어떤 굴, 구멍으로 몰아서 집어넣는가, 그 집어넣는 구멍이 중요한 거예요.
그 구멍은 이 땅에 없는 겁니다. 없는 구멍인데 사라가 죽으면서 최초로 생긴 구멍이 그 구멍이에요. 그리되면 거기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전부 다 사라 몸속으로 합류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이것이 하나님의 물질성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기 때문에 물질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형상이나 우상으로 하나님을 만들면 안돼요.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도 형태로, 형식으로, 물질로서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어떤 땅도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에 의해서 사건이 발생되게 되면 그 언약을 기억하는 사건이 포함된 특정지점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그게 뭐냐? 막벨라굴이라는 거예요.
특별한 장소에요. 아무나 그 굴에 장사되지 못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막벨라굴에 들어갔다는 말은 그 인간들은 자체로서는 영생이 아니고 죽어 마땅함을,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났냐, 그러면 죽어 마땅해.
그렇다면 죽어 마땅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특이성이 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좀 어렵게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다 하는 것. 내 몸의 심장이 뛰고 혈액이 돌고 뇌가 작동하고 숨을 쉬면 그것을 살았다고 하잖아요. 인간을 그렇게 살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경우냐? 자기한테 의미를 만들어낼 때 인간은 살아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의미를 어떻게 만드는가? 들개와 집에서 키우는 개와의 차이점이 뭐냐? 집에서 키우는 개는 끈을 묶어서 개를 앞장세웁니다. 끈을 가운데 두고 그 끈에 묶여 있는 개와 주인과는 늘 소통하고 교감하게 되어 있어요.
알아듣는지는 모르지만 말을 주고받게 되어 있고 반응을 나타내잖아요. 그럴 때 그 개는 주인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거예요. 들개도 살아있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가치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 인간에게 땅을 줬거든요. 그러면 인간은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땅과 교감하면서 살아요.
땅과 교감하면서, 땅에 적응하면서, 땅에 편만하게 채우는데 자기들 후손으로 다 채우고 싶은 거예요.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20장에서 아비멜렉 이야기할 때 제가 했어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저주가 임할 때 즉각적인 효과가 뭐냐? 아비멜렉집안의 여자들이 임신을 못해요.
임신을 못한다는 말은 인간은 개만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짜 끌고 싶은 것은 자기의 가상자아를 끈으로 묶어서 끌고 가고 싶은 거예요.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5년 후에는, 10년 후에는 내가 저 모습이 될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개를 끌고 가다가 개가 모퉁이를 돌아섰다 해봅시다.
주인이 깜짝 놀라요. ‘우리 개가 어디로 갔지?’ 심지어 개 끈이 풀려서 끈만 달라 남고 개가 사라져 버렸다면 갑자기 그 순간 주인은 잠시 살맛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개와 교감하면서 나는 살아 있는 거예요.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낳고 자식과 교감하면서 자식 속에서 나는 영생을 얻는 겁니다.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 ‘나 죽어도 제사지내줄 사람도 없는데 그냥 살다가 죽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식에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자식에게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미래의, 가상의 나에게 공을 들이는 거예요. 나를 닮았거든요. 내 몸에서 나왔잖아요. 남이 아닌 거예요.
내가 확장되고 늘어진 거라니까요. 나는 죽어도 그 애가 살아 있으면 나는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살아 있다는 의미에요. 그런데 내 자아가 어느 날 언덕을 넘어가서 내 앞에서 사라진다면, 나의 가상자아가. 내 개를 끈이 풀려서 잃어버렸다면. 그것과 마찬가지로 진짜 기대하는 내가 언덕을 넘어서 사라졌다면 그것은 사라진 저쪽의 가상자아가 죽은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내가 죽은 거예요. 나는 끈으로 묶었으니까.
하나님께서 사라를 죽여버립니다. 사라를 죽이는데 어디서 죽이느냐 하면 막벨라 굴에다 죽여 버려요. 막벨라굴을 구입하게 된 경위가 창세기 23장에 죽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있지만 아브라함은 또 헷족속과 관계성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라고 이야기해요.
나그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12절에 보면, “죽은 자와 방불”하다는 뜻이에요. “나는 이 헷(히타이트)족속가운데 살지만 사실은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은 자로 살아갑니다.”라고 하니까 저쪽 사람들이 “아니요, 아니요. 당신은 우리의 방백이요, 당신은 우리의 지도자중 하나입니다.”라고 6절에 나옵니다.
“어르신네, 왜 이러십니까? 당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지도자라 하는 것을 우리가 소문듣고 알고 있어요.” 아비멜렉 소문이 확 퍼졌습니다. 우리가운데 정말 신과 통하는 놀라운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까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엮어서 관계를 맺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왜냐? 죽은 자고 나그네니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나는 떠날 사람이고 사라질 존재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 지도자이십니다. 얼마나 존경스럽다고요.”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붙잡고 싶고 아브라함은 떠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존경받게 하는 이유가, 이 땅에 없는 의미를 지닌 새로운 땅을 심어놓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호응조로 나왔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가 없다고 했을 때 자기들 땅 중에서 마음대로 가지고, 굴뿐만 아니라 아예 밭도 사라는 이야기가 11절에 나옵니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옛날에는 거간, 중간상인을 둬서 부동산을 흥정하는데 그 흥정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와요. 에브론이라는 사람이 중간상인입니다.
돈이 은 4백세겔이에요. 땅값이 은 4백세겔이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 “그 4백세겔 안 줘도 당신은 보통사람이 아니니 거저 드리겠습니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값을 쳐서 드리겠습니다.” 한 거예요. 값을 치름으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실질적으로 이 땅의 사람으로 확정된 언약적인 장소, 지점을 영원히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땅이라도 같은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의미를 봅시다. 의미가 뭐냐? 의미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나부터 출발해요. ‘내가 살아 있다. 아, 숨쉬는구나. 살아 있다.’ 이게 의미가 아니에요. 이런 게 있잖아요. 배가 부서졌는데 주변에 스티로폼이 떠다니잖아요. 스티로폼을 밧줄로 묶어서 임시적으로 타고 “살려주세요!” 하는 그 장면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스티로폼 한 10개 묶어서 자기몸 하나 겨우 싣는 배를 만들었다 칩시다. 그런데 저기서 스티로폼이 또 떠내려 와요. 그러면 그걸 놓치지 않고 묶어서 조각이 11개. 자꾸 떠내려 와서 20개. 그래서 4만 5천 7백 5십 2개가 되면 이것은 거대한 배가 되겠지요.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계속 주어지는 사건들이 스티로폼처럼 밀려오면 그걸 모아 구성해서 이 땅에서 든든하고 안정된 생존을 유지하는 것, 이게 바로 사는 거예요.
자식 하나보다 둘 셋 있는 것이 더 안정되잖아요. 그리고 아버지형제가 하나가 아니고 많으면 그만큼 나의 스티로폼이 많아지는 겁니다. 어려울 때 삼촌 찾으면 되고 또 엄마 쪽에 형제가 많으면 외삼촌 찾아가면 되고. 외삼촌 아들이 청와대 근무하게 되면 딸 취직 못하면 좋은 데 알아봐줄 수도 있는 문제고.
이렇게 스티로폼이 많으면 그만큼 가라앉을 가능성이 적어지고 든든해진다는 그 말이지요. 그게 사는 거예요. 사는 것은 나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고 내 정신적인 영역을 넓히는 거예요. 사라는 안 그랬습니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장소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라가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은 거기서 여정이 멈췄다는 거예요. 끝이에요. 더 이상 스티로폼 구하러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하나님의 약속의 끝은 어디냐? 하늘나라가 아니고 이 땅에서 어디냐? 여자의 후손, 언약의 핵심이 되는 여인이 죽었던 그 자리, 이삭이 출생했던 그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그 여인이 죽는 그 장소, 장차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서 이삭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그 지점이 막벨라 굴입니다.
그 노끈을 뭐라고 하느냐? 살았다, 그 노끈이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언약과 관련없는 모든 이 세상의 인간적인 관계, 혈통적 관계는 저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비나 남편이나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영생과 상관없다는 거예요.
영생의 나라에 인간이 들어가지를 못하는 이유가 너무 스티로폼이 많아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 너무 많아요. 얽히고설킨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줄 일가친척들이 너무 많아요. 전부 다 거짓인데. 진리가 아니거든요.
창세기 50장 13절에 보면, 야곱이 죽습니다. 야곱이 죽고난 뒤에 요셉이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요셉은 어디서 죽느냐 하면, 애굽에서 죽어요. 이집트에 땅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땅이 없어요. 영생과 내통하는 땅이 없어요.
그 땅은 두 개의 언약, 하나는 율법에 속한 언약, 저주의 언약이고 또 하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통하는 사라의 언약,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두 개의 언약인데 그 두 개의 언약중 하나의 언약은 사라가 죽은 그 장소에 합류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합류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영생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는 모든 언약의 완성이고 새언약이고 그게 십자가거든요. 십자가와 관련된 사람으로서 사라는 살았고 아브라함은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아까 본 것처럼 살아 있으나 사실은 죽은 자와 방불한 자로서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그네라 합니다. 이 땅에 붕 떠서 살아가는 거예요.
붕 떠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 몸에서 난 이스마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주도권은 아브라함에게서 어떤 자식이 나오느냐가 아니라 사라에게 어떤 자식이 임신되었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라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미 죽었어요. 127세로 죽었습니다.
죽은 여자에서 산 이삭이 나왔다는 말은, 이것은 사라의 작품이 아니고 사라를 이용해서 언약이, 장차오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백성을 친히 만드신 거예요.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 살아있는 겁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들의 공통점, 이 땅에서 이미 영생 얻은 자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이 막벨라 굴입니다. 애굽에 장지 많아요. 국립묘지 현충원에 얼마나 많다고요. 거기에 묻히지 않고 구태여 고집해서 헤브론까지 가서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내려오고, 창세기 50장에 보면 요셉의 마지막 소원이 뭐냐? 그걸로 창세기가 끝나버려요. 26절에 보면,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이 그 앞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24절에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그래서 여호수아에 보면 요셉의 뼈를 앞장세우는데 요셉의 뼈가 내비게이션이에요. 요셉의 뼈는 그냥 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언약을 표현하는 물질성, 요셉의 뼈들이 모인 그 물질성,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유일한 물질적인 증거,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사건이지요. 십자가라는 것은 새로운 땅에서 날마다 반복되고 그래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잖아요.
십자가가 지나간 하나의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인간의 현실화로 소환될 수 없는, 영원한 절대적과거로 확정되어버린 그 십자가가 지금도 성령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막벨라 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야될 길은 언약을 짊어지고 이 땅에서 죽는 거예요. 사라처럼 언약을 짊어지고.
언약을 짊어진다는 말은, 개를 키우세요. 그리고 개가 지평선 위로 사라지거든 그 개가 사라진 그곳이 바로 주께서 기다리는 곳입니다. 나의 의미는, 나를 벌써부터 나와 함께 죽게 하신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는 그 지점, 나를 이끄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 내 앞에 먼저 가신 나의 강아지, 그 강아지가 이끄는 대로 끈에 묶인 채 딸려가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라와 다른 여자의 차이점은 이 땅에서 어떤 자식도 없었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다는 것이 사라의 의미에요. 나는 이 땅에 어떤 자식도 낳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영생을 만든 모친이다. 하늘에 있는 어머니, 그 하늘의 어머니가 사라의 모습으로 등장한 거예요.
왜? 신의 물질성이니까. 무인도에 연기 피어오르잖아요. 사람이 있으니까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아기 못 낳는 사라가 막벨라 굴에 갇힌 그것이, 어디에도 없는 천국이 저기 있네, 라고 천국이 이미 여기 있음을 보여주는 모닥불 연기같이 피어오르는 그것이 막벨라 굴입니다.
그게 오늘날 십자가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눈앞에 십자가가 보인다. 십자가 연기가 눈앞에 보이는데 네가 뭐하고 있느냐는 그 이야기에요. 죽는다고 해서 똑같은 죽음 아닙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고 난 뒤에 자기여정을 멈췄다는 거예요.
그 말은, 더 이상 이 땅에서의 의미는 끝났어요. 전적으로 사라한테 모든 의미가 다 넘겨졌어요. 사라가 가는 곳에 내가 가야 돼요. 사라 먼저 죽고 막벨라 굴에 장사되고 아브라함은 모든 여정이 멈춰지고 그 동네 옆 무덤 근처에서 살다가 늙어 죽어서 무덤에 같이 합장하는 그것.
결국 우리 인생의 의미가 뭐냐? 십자가가 우리의 의미에요. 우리가 죽었던 그 십자가를 지금 살아 있으면서 계속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면, “너는 죽은 자기 때문에 구태여 살려고 애쓰지 말라.” 만약에 살려고 애쓰게 되면 스티로폼만 잡아당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의 업적과 공적가지고 자기의미로 삼고 그걸 의미로 삼으면 그 의미가 있는 한 자기가 살아 있다고 자꾸 착각을 해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인데. 우리는, “내가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이것도 했으니까 봐라. 살아 있는 것이 맞잖아.”라고 남에게 우길 수가 있습니다. 그 노선이 그 노선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자기 잘남을 증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증거로서 날마다 주님께서 그 끈, 성령의 끈을 가지고 지금도 십자가 지신 그 쪽으로 가고 있다는 거예요. 막벨라 굴이라는 이것이 창세기의, 모든 인생의 도달지점을, 너무나 감사하게도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미리 챙겼다는 그 점에서 이 세상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이 갔던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결국은 죽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죽었던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이 어떻게 끝장나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도받고 있는지를 알려주셨사오니 우리가 가야될 그 십자가만 증거하는 남은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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