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창세기 22: 11-14 / 여호와 이레 본문
여호와 이레
이근호
본문 말씀; 창세기 22: 11-14
녹취:오용익
93강-창 22장 11—14절(여호와이레)1706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1-14절입니다. 구약성경 28페이지입니다.
창 22:11-14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 올라갈 때 최종적으로 두 사람이 올라갔습니다. 종들은 산 밑에 대기하고 있었고요. 2인 1조가 되어서 이 일을 치러야 되는데 결정적 순간에 와서 제 3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해요.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게 되면 이 일은 아브라함이 해야 될 일이 아님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할 일이 아니고, 네 아들 다루는 것은 아브라함 네가 다룰 문제가 아니고 너는 빠지라는 거예요. 내가 직접 네 아들을 다루겠다, 그렇게 나섭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을 등장시켜서 마치 아버지가 아들의 모든 것을 처리해야 되는 것처럼 몰고 가다가 결국에는 바통 터치하듯이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직접 관여하시고 아브라함은 손을 떼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장차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마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손을 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시작해서 그 마무리까지 하나님이 몽땅 다 알아서 하셔야 될 일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이땅에 오시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거기는 사람들만 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일이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로 바통 터치가 일어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그동안 인간들을 부려왔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원리를 그대로 선행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아브라함은 빠지고 하나님은 개입했다면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제단에 눕혀놓고 칼을 대려고 할 때 이삭은 살려달려고 할 수 있는 기회마저 허락되지 않았어요. 경상도 말로 “아버지, 왜 이카십니까?” 아버지 왜 이러세요, 아버지가 미쳤어요, 라고 할 수 있는 기회마저 이삭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어요.
결국 이삭은 하나의 갇혀 있는 운명입니다. 본인이 원한 인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인이 기대하거나 생각한 길을 이삭은 가지 않습니다. 이삭이 뭐가 잘못됐고 뭐가 문제에요? 아버지가 잡다가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이 자기를 잡으려고 할 때 이삭은 난데없이 두 분에 의해서 횡포를 당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어리둥절 할거예요.
이게 진정 하나님의 일인가 하는 거예요. 이삭은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살아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순종하는가. 이게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어야 순종을 하든 말씀을 지키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아 있어야 헌금을 하든 전도를 하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삭이 알아서 자살할까요?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까요, 살까요, 내가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내가 살아서 열심히 충성하겠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본인이 개시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꼼짝 못하는 한계, 움직이는 컨베이어선반에 끌려가듯이 난데없는 상황 속에 그냥 놓이게 되는 거예요. 놓이게 되면 거기서 하나님의 일을 처음으로 접선하게 되고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솜씨를 부려서 그 솜씨 부린 일을 거기에 첨가시킬 문제도 아니구나.
그냥 끌려가는 거예요. 주께서 이미 준비한 우리가 알지못하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의 그냥 말려들어가고 휩쓸려 들어가는 것, 그럴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비로소 실감나게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통해서 표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삭을 죽이는가? 아브라함 손으로 죽이다가 아브라함은 빠지고 하나님이 직접 이삭을 죽이는 그 일이 왜 하나님의 일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존재하고는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여 놓고 하나님에 의해서 죽이는 그 죽음 안이 하나님은 자기백성과 하나님 자신이 유일하게 만나는 장소에요. 죽음 안에서만 만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대할 때 그냥 피만 쪽쪽 팔아먹으면 되는 겁니다. 소라 먹을 때 딱딱한 껍질 먹지 않지요. 다슬기 먹을 때 내용물 먹고 껍질 버리잖아요.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피만 뽑아내고 나머지는 버리기 위함입니다. 나머지는 외피니까 그냥 버리고 피만 뽑아내면 돼요. 그 피, 죽음만 뽑아내면 됩니다. 이삭이라 하는 것은 그냥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태어난 자식이에요.
약속에서 태어난 자식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서 구체화되려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없는데서 생겨버린 그 이삭을 하나님이 직접 손댑니다. 직접 관리하고 다뤄야 돼요. 반갑다 친구야, 해서 직접 오셔야 되는 겁니다. 직접 오셔서 이삭을 죽여 버리지요. 이삭에게 가치 있는 것은 이삭의 죽음밖에 없어요. 다른 것은 아무 가치 없어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다루실 때 하나님께서 거기서 죽음을 뽑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가치는 없습니다. 물론 인간도 만만치 않습니다. 버팁니다. 살아서 순종하게 제발 죽이지 마옵소서,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죽음 안에서만 만나느냐 하면 이삭이 죽는 이 모습 속에서 여호와가 탄생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호와의 탄생. 성육신이라고 하면 우리가 뭘 로 알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마리아 몸에서 태어나는 것을 성육신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성육신이라 하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났다, 탄생했다는 그것으로 의미를 마감시키는데 그러면 안돼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해서 십자가에서 성육신의 의미의 모든 것이 완성된 것으로 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죽기 위해서 왔어요. 이 말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준비된 그 죽음 아니면 주의 일이 아니에요.
그냥 자살하면 안돼요. 주께서 죽이시는 그 죽음 속에서 자기 백성과 하나님은 만납니다. 하나님보고 “하나님, 하늘의 그 시원한데 편안히 살지 마시고 이 가뭄심한 땅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한 번 살아보세요.”라고 요청한다면, 그래서 주께서 이 땅의 삶을 산다면 주님은 그냥 죽음, 그 죽음이 하나님이 육신이 되는 모습이에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 죽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의 탄생이고 여호와의 성육신이에요. 이 말은 뭐냐? 이삭을 앞서 보낸 것은 하나님이 사람 되고 싶어서 그렇고 하나님이 사람 되시는데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죽임을 당할 때 그게 하나님이 진짜 사람이 되신 당사자라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죽음가지고만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 죽는 사건 말고도 꽃이 핀다든지, 인간들이 문명을 일군 것도 있고, 바다의 파도치는 것, 새가 지저귀는 것, 다 하나님의 일인데 왜 죽음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느냐, 하는데 세계사의 축소판은 하나님이 아시지 인간은 몰라요.
이 세상이 축소판이 된다면 이 세상의 원천, 이 세상의 모든 의미, 모든 가치가 시작이 되는 의미의 덩어리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하나님의 죽음, 그것이 인간에게 감추어진 진짜 모든 의미의 본부입니다. 모든 의미가 거기서, 그 죽음에서 나와요. 선하다, 악하다, 의롭다, 경건하다, 이 모든 의미는 한꺼번에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죽으면 그게 의고, 하나님에 의해서 죽으면 그것이 거룩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되면 그것이 경건이에요. 그러면 악은 뭐냐? 하나님의 죽음에서 의미를 끄집어내지 않고, 시작하지 않는 모든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 소라라면 우리가 외피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가?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 안에 들어 있을 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의고, 하나님의 거룩이고, 하나님의 경건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그동안 우리는 복음도 아닌데 복음이라고 우겼고 신앙생활도 아니면서 신앙생활 했다고 뭔가 오인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인간이 신앙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데도 교회라고 우기는 그 근거를 추적해 보니까 그게 뭐냐? 그 교회 안에, 경건이라는 그 안에 최종적으로 내가 반드시 살아 있는 조건 하에서 시작이 됐거든요. 내가 살아 있는 조건하에서, 하나님이 뭘 원하십니까, 뭘 해드릴까요, 이렇게 시작한 거예요.
그 의미출발부터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존재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준 존재로부터 출발하니까 이게 전부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줬으니까 잘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네가 제대로 잘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의 죽음을 원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죽음을 원한다 할지라도 내가 싫어요, 안 해요, 내 뺄 거야, 하나님과 안 놀아, 하고 기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주님의 제단 위에서 이삭처럼 내 빼고, 왜 이러십니까, 라고 반항 못하도록 몰아세워버립니다. 몰아세워버리면 어떠한 생산물이 나오는가? 이삭은 이삭인데 이삭을 해부하고 거기에 뭘 집어넣는가 하면, 네가 죽고 너 대신 다른 요소를 우리 안에 집어넣고 봉합해 버립니다. 지퍼 쫙 올려버려요.
이게 뭐냐? 이삭이 죽어야 될 그 죽음, 이삭은 이미 죽은 존재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가도록 만드는 요인은 수풀에 갇혀 있는 수양이 이삭 내부에 투입되게 됩니다. 인셉션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유기물체에서 이물질이 나오는 것을 의미해요. 뭔가 삼키는 것, 삼켰는데 삼키는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쁘다고 해서 토해내지도 못하는 것.
분명히 내 안에 있는데 이질적이에요. 내가 강제로 떠밀어도 나가지도 않아요. 그 이물질을 다뤄야 되는데 주객이 바뀌어서 다루지 못하고 그 쪽이 나를 다루는 거예요. <인셉션>이라는 미국의 영화가 있어요. 우리말로 하면 ‘개시’라는 뜻인데 처음 출발할 때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어요.
꿈이 무한 반복되는 내용의 영화에요. 인터포지션이라는 것, 개입한다, 주입한다, 갑자기 기입한다, 허락도 없이 쑤시고 들어오는 거예요. 동화이야기인데 커서 그걸 보고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이 있었는데 이웃집에 못된 이리가 있어서 호시탐탐 양을 노렸지요.
엄마가 알고 양들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야곱과 에서의 축복 이야기가 생각이 났지요. “이리가 와도 절대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 중간에 양을 노리고 이리가 왔어요. 양들은 시키는 대로 했어요. “목소리가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닌데?” 이런 식으로. 하지만 기어이 이리는 엄마양인 척 속여서 양들은 문을 열었고 다 답아 먹혔어요.
지금 잡아 먹혔다는 이야기가 초점이 아니라 나중에 그 이리의 배를 지퍼 열듯이 열어서 양을 다 끄집어내거든요.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물이나 우리의 능력 같은 것을 안 봐요. 우리는 하나의 운반체에요. 매개체라고 하는데. 숙주. 뭔가 바이러스를 운반하는 숙주, 매개체처럼 운반체역할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손을 떼게 하고 이삭을 직접 다룹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잡는 일에 시키는 대로 하는데 손을 뗐다 하는 것은 이삭이라는 자식은 이미 아버지하고 혈통적으로 끊어진 상태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는 말은,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바는, 그게 네 자식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브라함 네 자식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어떤 행세, 어떤 기능, 어떤 원리를 품고 이 땅에 오는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미리 앞당겨서 이삭이라는 형태로 보이게 하는 거예요. 이삭이라는 형태가 어떤 형태인가? 이삭이라는 형태는 배 째고 거기에 어린양을 집어넣는 형태입니다.
장차 메시아가 올 때까지. 하나님이 사람이 될 때까지.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성육신이에요. 여호와의 성육신이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사람이 될 때 이 모습이 아니면 어떤 모습으로도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습니다, 하는 사실을 신약이전에 창세기 22장에 미리 이야기했어요.
그렇다면 이 사실을 두고서 오늘날 교회, 기독교와 비교해 봅시다. 기독교, 교회, 우리가 아는 상식에 입각해서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종교놀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하고 상관없으면 역시 천국과도 상관없는 짓거리를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주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 배 째기 위해서 온 거예요.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온 거예요. 우리를 날마다 제단에 눕히기 위해서 온 겁니다. 하나님의 산 제물 되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보고 재롱잔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솜씨 부리라는 것이 아니에요.
테너 바리톤 베이스 그리고 소프라노, 성가대 하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바자회열고 전도 대회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당 넓히고, 주일학교 넓히고, 주차장 넓히라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성도는 수술자국이 있어야 돼요. 완전히 째서 어린양을 집어넣는 그 수술자국.
수술하고 꿰매게 되면 어딜 가나, 캐나다 가나, 미국가나, 영국가나, 아프리카가나 어딜 가도 덜렁덜렁 그 안에 뭐가 있어요. 뭐가 들어 있어요. 어디든지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이잖아요. 지금 우리의 사는 형편, 꼬락서니, 이런 것을 탓할 입장이 못 됩니다. 한 달 수입이 어떠니, 가정불화가 어떠니, 몸이 아프니, 지금 그럴 입장이 못돼요.
소라껍질에 먼지 좀 쌓였다고 해서 그것가지고 탓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안에 있는 내용물만 까먹으면 되니까.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든 이유가 자기 피 뽑아먹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자기 피만 필요한 거예요. 만약 아브라함에게 이 일을 맡기면 아브라함은 이런 상황이 될 거예요.
“하나님의 cctv가 지금 돌아가고 있지요? 천사들 다 봐. 하나님께 제가 어느 정도로 순종하고 어느 정도로 믿음의 조상답게 대단한 믿음인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하지만 내 신앙을 티내기 위해서 네가 좀 희생해줘. 간다!” 하고 칼 가지고 그냥 죽였을 거예요.
그렇게 순종해야만 믿음의 조상 티가 나기 때문에. 믿음을 보이라 했으니까 지금 믿음을 보이는 거예요. 아들아, 미안하다, 해놓고 그냥 죽이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2천년기독교의 성격해석이 이렇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했다. 완전히 복음 밖에서 하는 소리를 다 하고 있습니다.
악마가 한다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 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장이니까 자기 아들을 바쳤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안 되니까 십일조 아끼지 말고 드리자. “주여, 보고 계시지요? cctv 돌아가고 있지요? 이 귀한 돈 바칩니다.”
셀카 찍어가면서 “이정도로 나는 순종, 순종합니다. 시키는 대로 순종하겠나이다. 믿음의 조상이 그 정도라면 그 정도까지는 못 따라가지만 흉내라도 내면서 같은 노선에 있다는 것을 제가 티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가르쳐왔습니다.
이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에요. 오죽 믿음이 없으면 불안불안해서 그 짓 하겠어요? 복음은 불안할 근거도 없어요. 불안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걱정, 근심, 불안, 염려하는 그 문제가 아닙니다. 곧 죽어야 될 놈이 뭘 염려하고 뭘 걱정해요.
주님이 째겠다는데 뭘……. “마취는 하셨습니까?”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마취 하나 안하나 관계없어요.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냐에 주께서는 관심도 없어요. 주께서 내 배 쨀 때 “잠깐만! 천사는 칼 좀 거둬라. 이 몸 드리면 날 구원할 겁니까?” 그런 사적구원을 논할 시간도 없어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그런 대화할 시간도 없다고요.
이삭하고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하고만 이야기했어요. 그냥 죽입니다. “보시옵소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멈춰라!” 이야기를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둘 사이에서만 하지 이삭은 그냥 들러리인거예요. 너무나 피동적이고 수동적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시게 되는데요. 오시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델하우스수준이고요. 진짜 하나님과 그 아들관계를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로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수양이 수풀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수풀에 수양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겁니다.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해서, 나는 이런 아들 바치는 짓을 왜 해야 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모르고 구원받았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몰라야 됩니다. 아는 것이 화근이에요.
우리의 배만 째면 되지 그 배 째이는 내가 삼위일체 알아야 되고, 성경 알아야 되고, 뭘 알 필요가 없어요. 그냥 째이면 되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성경 몇 독 했습니까? 박사학위 몇 개에요? 구원받았어요. 몰라도 구원받았어요. 주께서 째시는 사람은 몰라도 구원받아요.
왜냐하면 아예 그의 지식과 정보에 관한 시험을 안쳤기 때문에 그래요. 중요한 것, 주님이 보고자 하는 것은 그 인간 안에, 자기백성 안에 주님의 자기 수양, 하나님의 어린양 그것만 찾지 그 외에는 아예 보지를 않습니다. 진짜 복음의 내용을 들어보면요, 너무나 비정하고 차가워요.
하나님에게 인정사정 같은 것은 통하지도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차질없이 일을 진행시킵니다. 깔끔해요.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의 여지를 완전히 삭제시켜 버립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여, 내가 죄를 지었거든요. 내가 너무 과속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 회개합니다.” 하면 주님께서 같잖다는 듯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옳고 그르고, 악하고 선한 것은 너에게 애당초 따지거나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의미는 수양에서, 어린양에서 나온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 대신 양이 투입되었다는 그 사실이 모든 의미의 개시에요. 인셉션이라니까요.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에요.
주님하신 일,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의 일, 그게 의지 그 외에는 잘했다, 못했다, 그런 것을 따지면 안돼요.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제가 주님을 믿거든요. 믿는데 어떤 때는 내가 신앙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본인이 신앙이 있든 없든 그게 무슨 하나님의 일이 되겠어요. 하루에도 백번도 더 바뀌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늘 바뀌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냥 똥배나 내놓으면 돼요. 그래서 껍데기로 째이면 돼요. 어떤 분이 기흥에 있는 삼성반도체에 취직을 했어요. 취직했다고 대출받아서 가까운 화성에 집도 장만해서 이제는 대기업 다니면서 안정적으로 살아보겠다, 마음먹고 다녔는데 18일 만에 잘렸어요.
반도체 기판 그게 하나에 1억짜리인데 그걸 들고 운반하는 일을 아침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해요. 방진복 입고 그 일을 하게 되면 땀이 비 오듯이 오는 거예요. 그 걷는 양이 하루에 14킬로미터에요. 월급은 많이 줘요. 처음 들어가도 월급 250만원 넘을 정도로 많이 주고 1년만 지나면 보너스가 붙어요. 그런데 항상 운반을 제대로 해야 돼요. 그 기판 하나에 1억이니까 8개면 8억입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운반하다가 발이 꼬여서 넘어져서 그날 잘렸어요. 어떤 목사는 취직한 첫날 운반할 때 시키는 대로 안하고 열심히 한다고 그날 잘렸어요. usb를 절대소지하면 안되는데, 그리고 이 분이 평소에 그것을 명심하고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새가방 안에 아무 내용물도 없는 usb가 걸렸어요. 걸리고서 그날, 18일 만에 잘렸어요. 월 25만원씩 대출이자 나가는데.
그리고 그 다음날 다른 회사 지원해서 두 군데 합격했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삼성반도체에서는 정확한 것을 원해요. 그 사람이 키가 몇인지를 묻지 않아요. 그 사람이 얼마나 인품이 있는지 신앙이 좋은지를 묻지 않습니다. 정해진 대로만 해야 돼요.
꼭 하나님 같아요. 그분 말로는 공산당 같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교회가 교리나 어떤 신학을 만들어내든지 간에, 교회법이 어떠하든지 간에, 제직회 3분의 1, 3분의 2,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고 딱 성경에 있는 대로, 일체 인간에게는 묻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끝났어요.
그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인생을 일관되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 안에 들어온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계속 훼방놓습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만들어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나는 조졌다, 기도고 뭐고 하는 일이 되는 것이 없다, 18일 만에 쫓겨났다, 하는 그 순간 나는 뭘 느끼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죽이는구나.’ 바로 그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여서 그 죽음에서 피를 뽑아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있는 그 죽음을 뽑아내겠다는 것이 주님이 자기백성을 이 땅에 선택하고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딴 것 없어요. 이게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아브라함아, 손 떼라. 내가 직접 다룰게.” 이삭 죽입니다. 죽이면서 뭘 하느냐? 수양을 준비했지요. 아브라함이, 내 믿음 어때요, 내가 아들 잡습니다, 그 아들 잡는 그것이 믿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뭐냐? 내가 아들 잡는 이것이 믿음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이 결코 순종이 아니고 이것은 천국 가는 근거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 이해하는 그것이 믿음이에요. 따로 준비한 그 앞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은 순종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 어린양이 앞으로 하실 그 순종만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 안에 어떠한 소리가 들리는가? 여호와이레라는 소리, 그 외침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 순간뿐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네 인생 살아가라. 가면서 딸랑이가 어딜 가도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가는 어디에서도 여호와이레, 여호와이레, 여호와가 준비하셨다, 여호와가 준비하셨다, 그 준비하심이 나중에 마지막 때 모든 것을 깨치고 육이 죽고 튀어나오면 그분이 바로 성육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고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 약속, 이 언약, 그 외에는 다 가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히 세상 사람, 믿음 좋은 사람 따라가다가 엉뚱한 길로 갈 뻔 했습니다. 잘 믿는 것이 신앙인줄로 우리가 오인해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그 담긴 복음의 내용이 이미 우리 안에 있기에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한 것으로, 적합한 것으로 이끄신다다는 것을 날마다 찬미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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