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창세기 22:15-19 / 이삭에 의한 복 본문
이삭에 의한 복
이근호 본문 말씀: 창세기 22:15-19
녹취:오용익 94강-창 22장 15—19절(이삭의 복)1706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5-19절입니다. 구약성경 28페이지입니다.
창 22:15-19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보통 이 세상은 사람들끼리 대화합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같은 사람들을 상대해서 만났던 체험담, 느낌, 그것을 주고받으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겁니다. 단란한 가정이라는 것은 드라마나 일상에서 알다시피 부모와 자식과 함께 살면서, 오늘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아버지는 노인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낮에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 만난 이야기하는 것을 가지고 단란한 가정이라 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사람만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만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서로 정해놓고, 당연시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이 세상모든 것은 전혀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단란한 가정에서 단란하게 백년을 살아도 그 가족 몽땅 단란하게 지옥 갑니다. 성경이 왜 있습니까? 사람끼리 만나서 누가 지혜가 높고, 누가 똑똑하고, 누가 상상력을 잘 발휘했느냐, 그걸 대결하는 장소, 그런 만남이 성경내용이 아니에요. 진짜로 만났어요. 정말로 만났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안 보려고 하는 겁니다. 노는 레벨이 달라요. 자기의 관심사가 달라요. 자기는 사람 만나서 남들 앞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가를 늘 체크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데 성경 펴게 되면 사람 만난 것은 쳐주지 않으니 자기의 존재가치가 없는 겁니다.
성경을 덮었다고 합시다. 성경을 모른체 성경 덮고 난 뒤에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 채우려고 하는 것은 뭐냐? 나라는 그 의미, 나라는 그 가치를 본인이 다 채워야 돼요. 나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했다, 나는 이런 인간이다, 그 의미와 가치, 내용을 자기가 애쓰고 힘들여 고생해서 다 채워 넣어야 돼요.
그러나 성경에 있는 성도는 주님이 다 채워줍니다. 빡빡하게.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 사람은 성경 보고 싶지를 않아요.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인간을 통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만난 사람이 있다, 라고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과 분류를 시켜버립니다.
딱 두 종류의 인간형이 성립이 돼버려요. 하나님만난 쪽과 하나님만나지 않은 쪽. 아로나민골드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이 차이나는 것처럼 완전히 구분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에 관심 없이 사람들만 만나면서 과연 그들이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는가?
그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신경을 써요. 하지만 멀리 있는 하나님이에요. 왕림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들끼리만 나라를 만들고, 시장을 만들고, 사회를 만든 거기에 다녀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하나님이니까 죽어서 만나야 되겠다는 거예요. 죽어서 봅시다, 지금은 아니고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은 전혀 인간의 일에 대해서 그냥 방치하고 손 놓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절에 가는 사람들도 생각합니다. 자기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책임지고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어려울 때만 찾아가면 된다. 더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지요.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여기 있다, 라고 할 수 있는 창조의 첫 번째 걸음은 뭐냐? 사람이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아담이 만들어짐으로서 더 이상 사람은 없어요. 아담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창조는 끝났습니다. 종결되어서 달리 또 만들지 않아요. 에일리언, 그런 외계인 같은 것 안 만듭니다.
사람 만들면 그걸로 다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 자기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사람을 보라는 말이지요.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특이성을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사람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사람을 가지고 끄집어내는 것이 있는데 그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운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프로젝트가 사람에게서 나와요. 그러니 하나님의 모든 일은 사람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람가지고 하나님이 일을 개시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올 때, “아담아, 어디 있느냐.” 찾아올 때 그 뒤에 나오는 것은 아담조차 미리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계획이 찾아오심으로서 자기 안에서 술술 바깥으로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자의 후손, 부부가 그냥 부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댄 부부는 거기서 여자의 후손과 동시에 아담부부는 생각도 못한 것이 나옵니다.
뱀의 후손이 나옵니다. 마술사가 입에다 수건을 집어넣었는데 거기서 종이테이프가 막 나오는 것처럼 설마 그런 것이 나올 줄은 몰랐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의미라 하는 것, 내 인생의 의미는 내가 행한 것으로 채우는 것이 나의 사는 의미고 내가 사는 내용이고 가치다. “나는 인생 이렇게 살았다. 잘 살았다, 그치?”
서로 만나면 그것 내놓으면서 수다 떨면서 카페에서 몇 시간씩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마술사 입에서 종이테이프가 끝도 없이 나오듯이, 기대하지도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았던 이야기가 막 술술 나오는 거예요, 숨어 있던 하나님의 계획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사전에 생각한 것이 아니에요. 개인의 의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야기했던 내용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 16절에 나옵니다. 내가 나를 가르켜 맹세한다. 히브리서 6장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린 약속은 하나님 본인만 개입하지 다른 어떤 피조물도 그 성취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맹세한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성취시키는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만난 사람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아담 같은 경우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약속이 나오지요. 오늘 본문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뭐가 나오는가?
17절에 나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어요. 대적이라 하는 것은 원수인데 사람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에요. 하나님의 원수의 문을 가진다는 그 말은 이 세상은 악마에 의해서 가두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악마가 자물쇠로 채워서 가두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무저갱이고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에요. 그 안에서 오순도순 단란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지옥 안에서, 무저갱 안에서. 그러나 악마는 뒷짐 지지요. 눈치 안채게 하는 겁니다. 악마에 의해서 가두어진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독자성입니다. 나는 나다.
이것은 누굴 닮았느냐? 악마를 쏙 빼닮았어요. 악마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나다, 에요. 나는 신처럼 되겠다는 그 의지가 강렬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내 존재에 필요한 모든 의미와 가치와 내용 나의 의로움은, 존재할 권리는 내 행함으로 내가 채운다는 겁니다.
결국 채우는데 그 목적이 뭐냐? 나는 위대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알라는 위대하다. 나는 위대하다. 이게 독자성이에요. 무저갱 안에 포위되어 있는,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의 보편성, 공통적인 인간성을 뽑아내 보면 딱 악마의 성질로 묶여 있어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인간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오직 인간에게만 맹세하노니. 신을 그대로 빼닮았어요. 인간이 각자 작은 신으로서 전부 다 행세하는 겁니다.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신학은 개혁주의신학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 그게 최종목표에요.
그런 것은 플로티누스라 해서 AD 3세기 전에 철학자들이 다 이야기한 거예요. 그 근거는 플라톤 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플로티누스든, 플라톤이든, 오늘날 교회 교인이든, 목사든 간에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요. 자기의 본성을 속일수가 없어요. 신을 믿되 내 본성에 부합되고 내 본성에 대해서 박수쳐주고 격려할 수 있는 신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믿겠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들이 내세우고 있는 신학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개혁주의,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그리고 신천지, 여호와의증인, 예수재림교회, 몰몬교, 전부 다. 그 중에서 최고로 악마적인 것은 워치만 니, 지방교회를 쳐주면 돼요. 내가 신이 될 수 있는데 어떤 것을 하면 되겠어요, 라는 것을 탐구하고 연구해서 내가 행한 것은 실적으로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채우는 겁니다.
그런 인간들이 무저갱 안에 가득 지금도 DNA를 퍼트리면서 번식하고 있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버려요.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사람하고 의논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만난 이야기를 하는 그렇고 그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만난 존재가 되어서 낯선 이야기가 튀어나와버려요.
자식을 죽이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식을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해버립니다. “자식을 낳거든 죽여 버려라.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 네가 누군지를 진정 안다면, 네가 낳은 자식을 네 손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너는 네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다.”
악마에 속한, 이 무저갱에 속한 것은 뭐냐? 나는 신이 되기 때문에 신은 죽으면 안돼요. 따라서 나는 죽으면 안돼요. 사람들이 교회 오는 목적은 자신이 불멸할 존재가 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제 4차 산업시대가 되면 교회 가는 사람, 가더라도 건성으로 가지만 교회를 다닐 필요가 없게 되는 거예요.
왜냐? 불멸의 존재라고 할 때 이성적으로, 과학기술로서 얼마든지 나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 수 있다면 구태여 믿기지도 않는 것을 두고 믿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태에요. 교회는 너무 관념적으로 추상적인 반면에 4차 산업의 인공지능은 구체적이니까 구체적으로 불멸의 상태가 된다면 그까짓 거 교회 가서 있는지 없는지 분간도 안되는 추상적인 존재한테 쓸데없이 빌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교회에 안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dna가 자식을 통해서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점점 확인이 되는 겁니다. 자식을 낳는다는 말은 내가 불멸의 존재로 점점 확장되고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결혼도 안하고 자식이 없는 것은 어떠냐? 의학이 발달되면 dna를 나눠줄 수도 있고 또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면 되는 겁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봅시다.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했어요.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 여자는 자기 아내니까 이것은 보이는 겁니다,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보이는데서 출발해서 갑자기 인간들이 생각도 못한, 아담부부가 상상도 못한 이야기가 끄집어져 나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식인 이삭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접수하는 순간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예상도 못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숨겨진 하나님의 원수를 상대할 수 있는 자식의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게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추가적으로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전 언약에서 미처 알지 못한 내용들이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그 깊이를 더해주는 거예요.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원수하고 싸우게 된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식 이삭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는 이런 언질이 없었어요. 내 자식이 그렇게 한다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내자식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쟤는 누구입니까?” “내 자식입니다.” “당신의 자식이니 자식에 대해서 잘 알겠네요.” “잘 알지요.” “자식이 어떤 인간 되겠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훌륭한 변호사가 될 것입니다.”
기껏 자기가 예상한 것만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자식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게 바치라고 하는 순간 바치기 전에 아버지가 전에 예상했던 그 내용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상밖의 기능과 역할들이 자기자식을 통해서 뿜어져 나올 때 아버지는 깜짝 놀라는 거예요.
내가 언제까지나 그 자식을 내 자식으로 품었더라면 나는 큰 탈 날 뻔 한 거예요. 아버지기에 자식을 안다고 지레짐작 생각하는 이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에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무저갱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악마를 닮았어요. 악마의 심성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독자성을 갖고 있습니다.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르기에 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에게 그것이 무슨 이익이 되느냐를 먼저 생각해요. 세상의 악마에 속한 인간들은 내게 어떤 이익이 되느냐를 늘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내가 어떻게 분해됩니까, 를 보는 거예요.
어떻게 내 배 째고 내가 예상 못한 어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식으로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가요? 이것은 배를 째야 비로소 바깥으로 분출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곧 죽음이지요. 제가 어제 대전강의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죽음이라는 것은 흔히 아는 대로 자기 목숨 끊어지는 것, 병원에 가서 모니터에서 심장박동 그래프가 일자로 죽 이어지는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일찍 만나는 것이 죽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일찍 만나는 것이 왜 죽음이냐 하면, 배를 째거든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는 이유가 날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배를 째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한 내용물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통해서.
인간을 통해서 한다고 해도 본인은 본인에 대해서 몰라요. 내가 어떤 존재로 다뤄진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 이 말이지요. 나라는 그것은 자아를 의미하고요. 내가 대전강의에서 이걸 가지고 미친 오토바이라고 했는데요. 자기신체가 주에 의해서 어떻게 다뤄질 것도 모르고 내 손은 내 것이다, 하니까 거기에 악마의 심성이 들어가지요.
독자성이니까. 그 다음부터 끌어 모으는데 급급해요. 교회 와서 등록하면서 “하나님, 교회 와서 등록했습니다. 저에게 어떤 이익을 주시겠습니까?” 교회 오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이익을 주시겠습니까, 하는 말은 교회 오기 전에 평소에 본인의 관심사와 행동거지의 모든 것이 오직 나에게 이익이 되는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가 그 이기적 행세를 그대로 가지고 교회 온 거예요.
목사는 얼씨구나, 고객만족이라 해서 사람들 체험만 끌어모아서 “바치면 복받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익이 돌아갑니다.” 교회는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째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인간을 폭파시키는 겁니다. 파키스탄이 원래 못사는 동네 아닙니까. 기름 값도 비싸고.
유조차가 서 있는데 기름이 샌다는 소리를 듣고 주민들이 다 나왔어요. 기름 빼낸다고 하는데 유조차가 폭발해서 48명이 죽었습니다. 폭발하는 유조차. 이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예상 못한 낯선 죽음을 주변에 퍼트리게 되는 겁니다. 교회 나온다는 것은 사실은 주님의 새언약에 나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새언약, 마지막 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열 두 제자에게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도록 초청한 거예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피 흘려야 되고 살이 찢겨야 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제자들이 제자되기 전에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에요. 열두 제자는 오늘날 보통 사람들과 똑같아요.
예수 믿었으니까, 메시아 믿었으니까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과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지금 온통 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내 병은 어떻게 고쳐지고 내 잃어버린 청춘은 어떻게 보상받고 내 깨져버린 단란했던 가정은 어떻게 회복될 것이고, 내 아픔은 어떻게 치유될 것이고, 전부 다 나의 이익과 연관되는 거예요.
그 이익을 왜 원합니까? 그 이익을 가질 때 나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인간으로, 남게 꿇리지 않는 인간으로 당당하게 세상에 나설 수가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누가 있는데요? 세상에는 나를 주목하는 자들이 있었거든요. 그들이 뭔데요? 모르지요. 그 세상 사람들 다 실없는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실없는 이야기, 거기에 왜 말려듭니까? 뉴스시간에 한 시간 동안 하고 신문지면을 장식해도 그거 다 실없는 이야기입니다. 실없는 이야기는 최백호의 낭만을 위하여, 그 노래에 잘 나와 있어요. 실없는 농담 사이로……. 거기 나오는 단어, 부질없는 것, 실없는 농담, 낼 모레 세상 떠나는데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 그리고 실없는 농담.
연금이 어떠니, 의료보험이 어떠니, 북한의 핵이 어떠니, 다 쓸데없는 것들. 인간이 저희끼리 절대자가 되지 못해서 염려, 걱정하는 것으로 우리가 강요당하는 겁니다. 성도는 뭐냐 하면, 이삭 같은 존재에요. 하나님의 성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뭐냐? 무저갱을 용인하는 지점입니다.
무저갱이 누가복음 8장 31절에 나와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군대귀신들이 주님 앞에 소원이 뭐냐?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무저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요. 귀신들이 설치는 이유가 요한계시록 9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무저갱의 자물쇠를 열어버렸어요. 열어서 귀신들이 나온 거예요. 나왔는데 그 나온 귀신들을 예수님이 상대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를. 이런 귀신들이 주도권을 쥐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부질없이 갇혀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만난 사람에게 언약이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게 되면 점차 어디에 접근하는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접근해갑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시한폭탄 같은 폭발, 낯선 죽음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보고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는 이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기자식을 도로 드리는 거예요. 이것은 아버지로서의 모든 책임에서 손을 떼는 겁니다. 이삭은 분명히 내 자식이지만 이삭의 이삭다움은 내가 손을 떼고 주님의 약속이 그 이삭을 다룰 때 비로소 아버지와아들의 관계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통해서 그 시대에 하나의 폭탄으로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아브라함은 분해되어야 되지요. 소유가 아니고 내놓는 거예요. 자기자식만 내놓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도 내놓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내놓아야 됩니다. 흔히 사람들이 제가 설교하거나 복음을 전하면, ‘그러면 되던 일도 안 되겠네?’ 이래버려요.
“되는 일도 안 되겠네.” 하고서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면 되지.” 이렇게 끝나요. 그러나 정작 하나님만난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되는 것이 안 되는 것은 맞아요. 뭔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나의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노리고 나에게 이득이 되도록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면 그것이 다 금지가 되잖아요. 그러면 되는 일이 안되지요. 그런데 그 다음 더 나가야 돼요. 이미 되어진 일이에요. 이미 되어진 일에, 급류에 말려들어간 겁니다. 이것은 되고 안 되고 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맹세는 나를 경유해서 도로 하나님 앞에, 그 경로에 연어처럼 물고기처럼 그 급류에 놀고 있어요. 지금 가뭄이라 놀 급류도 없지만.
그 대표적인 일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오해해서 다 버렸습니다. “안되겠네, 못하겠네, 안되고 못하면 우리들끼리 해야지.” 했는데 그 일이 고기 잡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그 고기 잡는 곳에 가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데 부활하고서 만나기는 했지만 “그래, 옛날로 돌아가서 우리끼리 살아야지.” 그래서 우리끼리 한 일이 고기 잡는 일입니다. 원래 고기 잡는 일이 전공이에요. 그래서 고기 잡았다 그 말이지요. 고기를 왜 잡는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이익이 되는가? 고기를 잡으면 나는 고기 잡는 사람으로서 자기의미가 부가가 됩니다. 나는 고기 잡는 사람.
그런데 예수님이 끼어들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고기 잡고자 하는 어부가 이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라는 조로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제자들은 그것이 아니에요. 고기를 잡도록 해주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걸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해보고 해도 소용없으면 안하지 뭐, 그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 독자적으로 나름대로의 의미를 구하는 이 자체가 주님 오시지 않았으면 죄인이고 하나님의 원수의 심성인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걸 고백하는 거예요. 남들처럼 그냥 착하게 살고 자기 일 하면 세상만사 편하다.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고 전부인줄 알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성령이 오니까 이게 바로 무저갱, 악마가 다스리는 세상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다시 말씀 드릴까요? ‘자기할일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살게 되면 세상은 별일 없이 잘 굴러간다. 나중에는 연금타고. 요양원에 가서 살다가 죽으면 자식들이 장례 치러주고 제사지내 주겠지.’
이 시나리오가, 갇혀 있는, 악마와 더불어서 영원히 지옥에 가야 될, 그 지옥의 삶을 앞당겨서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독자적인 나의 의미, 나의 가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는 원수, 악마, 마귀, 귀신, 그런 것들을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그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 예수님을 공격했던 반대세력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오늘 본문 17절처럼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라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거예요.
‘아하, 이삭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잘 먹고 사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씨앗을 하나님께서는 나를 분해해서 내 안에서 자식 이름으로 끄집어 내놨구나. 하나님이 손대서 하나님의 자기맹세가 담긴 하나님의 자식, 하나님의 아들을 내 속에서 잉태했다가 바깥으로 끄집어내는데 나는 하나의 참여된 자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점점 더 아브라함언약이라는 구체화를 띠게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소유하기 위해서, 이득을 얻기 위해서 사는 반면에 지금 하나님은 어디서 볼 수 있느냐?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의 모든 것이 공개되고 노출되고 째져서 내 안에 마귀 있었다, 귀신 일곱 마리 있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는 독자적인 나의 의미만 챙겼다, 라는 것을 아주 기쁘게 소개하는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쳤잖아요.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아라우나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아라우나 타작마당이 어디에 있느냐? 모리아산에 있어요. 예루살렘동쪽이지요.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 네 씨, 네 민족과 그 외 다른 민족과 차별되어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이라는 하나님의 적들을 이기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다윗 대에 와서는 이스라엘내부에 적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대적,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잠시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저주로 7만 명이 죽고 난 뒤에 모리아 산에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니까 그 저주가 멈췄어요.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십자가중심으로 돌아가요.
그게 바로 현실입니다. 낯선 인물중심으로 돌아가요. 흔히 뉴스에 나오는 그 사람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유명인사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에게 미움 받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누가복음 16장에. 유명인사,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고 낯선, 정말 같은 인간인데 주님 앞에 분해당한 사람, 그 사람중심으로 언약이 쏟아지면서 주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그들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갑니다.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들어오면 아주 딱딱해요. 제가 어릴 때 먹은 사탕 중에서 하얀 돌사탕이 있어요. 어릴 때 그걸 받으면 하나의 과중한 업무를 받은 듯이 느껴져요. 이걸 언제 다 녹이나 싶어서. 이게 하나님의 수축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현실을 움직이는 응축된 핵심을 성도는 안고 있어요.
영원한 팔자입니다. 다른 것은 내손으로 다 다뤄도 내 속에서 딴딴하게 들어온 이것, 하나님의 맹세의 완성은 내가 손댈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것에 장애물이 되고 방해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피로서 보여줄 뿐이지요.
저는 이런 입장을 달리 예를 듭니다. 매끈한 피부가 암에 걸려서 괴사당하는 것이 있지요. 함몰 당하듯이. 말끔한 내 인생에서 함몰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싱크홀. 평범한 아스팔트에 갑자기 구멍이 펑 나는 것처럼.
그러한 하나님의 십자가의 상처, 강도 아니면서도 강도로 취급받고, 창녀 아니면서도 창녀로 취급받고, 죄인이 아니면서도, 평생 경찰서 한 번 간적도 없는데 주님 앞에 이미 죄인으로 취급받고, 남들은 아직 나이 창창하다 하는데 이미 죽은자로 취급받는, 내가 죽은자 같으나 산자요, 라는 그런 이야기, 그런 언약적인 기제가 작동하는, 매카니즘이 작동하는 이상한 상처를 품고 살아가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뭔가 함몰되어 있어요. 죽 가다가 구멍이 생겼어요. 싱크홀이에요. 맨홀 안에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이것은 어떻게 메우려도 메울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나의 이런 상처를 자랑하세요. 십자가만 자랑하세요. 나 때문에 죽으신 분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이삭이고 아브라함인데 그 이유가 뭐냐? 진짜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그 사람 앞에서 비로소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영적싸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중심 없어서 헤매고 있는, 허무를 느끼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습니까? 불교가 진리인지, 기독교가 진리인지, 아니면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평범한 것이 진리인지, 불안하게 살아가고 무서워하면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주께서 성령주세서 십자가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가 왜 복음일 수밖에 없는가를 세상 끝 날까지 자랑하고 또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24:1-4 / 이삭의 아내 (0) | 2017.07.12 |
---|---|
창세기 23:1-4 / 사라의 죽음 (0) | 2017.07.05 |
창세기 22: 11-14 / 여호와 이레 (0) | 2017.06.21 |
창세기 22:7-10 / 없는 제물 (0) | 2017.06.14 |
창세기 22:3-7 / 이삭과의 동행 (0) | 2017.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