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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지젝 170411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80여명의 신학자들[부산강의]

지젝 170411

정인순 2017. 4. 1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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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704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1-지젝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슬로보예 지젝인데 교재에 나와 있습니다. 1949년생입니다. 저보다 네 살 많아요. 한국에 여러 차례 다녀갔지요. 지젝이란 분이 왜 그렇게 유명해졌느냐 하면, 기존에 나온 모든 철학에 대해서 거부했기 때문에. 거부한 이유는 그것들이 전부 다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조차 거부했어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지난 시간에 레비나스 했지요. 레비나스 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철학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철학이 인류에게 희망을 주려하는 겁니다. 돈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좌절하지 마시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희망을 주잖아요. 그런 희망을 만약에 누가 꺾어버린다면 이건 너무 잔인한 일이죠. 그 잔인한 일을 지젝이 한 겁니다.


 

 


 

인간은 일체 이웃사랑이니 그런 것들이 성립될 수 없다 존재란 거죠. 이 말은 곧 무엇이 날아가느냐 하면, 결국 철학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힘든 지경에서도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윤리,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상을 뒷받침 하는데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마저 만약에 없애버린다면 철학이 설 자리 자체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사라질 때 기존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러한 지젝의 이론에 대해서 자기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니까 상당히 공격하겠지요. 공격하다보니까 이 사람이 유명해진 거예요.


 

 


 

유명해지는 방법은 간단해요. 기존 동료에게서 욕 얻어먹으면 유명해집니다. 그냥 욕한다고 유명해지는 건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 되니까 근거가 뭐냐 하면, 이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체 문제인데요. 최근의 철학은 인간이 윤리적이어야 한다. 윤리적이란 말은 동물과 달라야 된다. 동물은 충동적이고 욕구적이죠. 자연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샌델이란 사람 들어봤습니까?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 대학교수 마이클 샌델, 인문학에서 거론되는, 이 땅에서 정의, 세월호 사건, IS문제, 난민 문제,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결책을 내야 돼요. 그런데 해결책이 얼마나 잘 사느냐 문제라면 경제에서 하는 문제고, 철학에서 해야 될 문제는 얼마나 잘 사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는 문제입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렵고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갖고, 나이지리아에서 물 없어서 고생하는 것, 애들 전염병 때문에 고생하는데 한 달에 삼만 원만 내면 30명을 살릴 수 있다는 그런 것 많이 봤지요. 그런 걸 행할 때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까지 내려온 철학의 마지막은 철학이 있어야 될 이유는, 인간은 윤리적이고, 윤리적일 때 아직도 인류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슬로보예 지젝 합니다. 인물로서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다음 달에는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에서 하나님은 어떤 존재냐 하는 걸 마지막으로 다루고, 그 다음부터는 시편 강해로 성경 공부하겠습니다.


 

 


 

인류애가 있어야 된다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줄곧 이야기했단 말이죠. 지젝은 이걸 반대해요. 쉽게 말해서 인류애 같은 소리하고 있네. 왜 인류애를 붙드느냐 하면, 사람 사는 의미를 찾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의 의미는 돈에 빼앗겼잖아요. 돈에 빼앗겨서 이 세상이 너무 냉혹하고 냉정해요. 비정하고 삭막합니다. 돈으로 모든 문제가 결정되니까. 철학은 삭막한 가운데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의미를 가져야 된다. 이게 지금까지 나온 철학인데 그걸 지젝은 박살냅니다.


 

 


 

인간은 의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의미와 이미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의미는 내가 여기 살아갈 이유를 내 안에 장착하는 것, 가져오는 게 의미에요. 난 역시 이렇게 삭막한 세상에서도 나는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어. 자기 안에 집어넣을 수 있어요. 의미를.


 

 


 

이미지는 사진을 찍는 거예요. 벚꽃이 좋다. 갑자기 벚꽃이 필 때는 사진 찍고 싶지요. 이미지를 찍는 겁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나무가 나한테 들어옵니까? 옛날에 아프리카 탐험가들이 사진을 찍으니까 토인들이 놀랬어요. 사진을 못 찍게 했어요. 왜냐하면 사진 찍히면 자기 영혼이 사진 찍는 사람한테 빼앗긴다고 생각한 겁니다. 빼앗기는 것 아니죠. 사진 찍는다는 것은 복제 또는 복사를 의미하는 겁니다. 사진을 찍을 때 한 방에 찍어버리죠. 전체를 그냥 가져오잖아요.


 

 


 

의미는 따져야 되죠. 나는 저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며 저 사람보다 우월할까, 열등할까?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들이 예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 난 착함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나 어려울 때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해. 여러 가지로 요모조모로 따진다는 겁니다. 특히 요새 교사들 이야기 들어보면 힘들다는 겁니다. 교사 입장에서 학생들이 잘 되기 위해서 학업에도 충실하고 기본적인 인간성, 선과 악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학부모가, “나도 안 나무라는 애를 네가 뭔데 나무라는 데?” 이럴 때 교사가, “내가 이러려고 교사했나?” 갑자기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학원에 있는 교사는 어떻습니까? 의미 챙길 필요 없지요. 저 학생이 돈이 될지 어떨지 찍으면 되는 거예요. 제 예가 어떻습니까? 그냥 지식을 나눠주고 파는 기능인으로 끝나는 거예요.


 

 


 

지젝은 의미 시대는 끝났고 이미지 시대라는 겁니다. 이미지가 왜 이 시대에 있느냐 하면,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인간은 자신을 실체로 봅니다. 실체란 흔히 우리 자신을 육신으로 봐요. 거울 보면 내가 거기 물체로 있지요. 이게 기본입니다. 인간은 물체에다 의미를 추가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젝은 말하기를 자기를 실체로 보는 이건 언제냐 하면, 6~18개월 동안에 어릴 때 있던 잔상이라는 겁니다. 어릴 때는 자기의 주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냥 막 움직이는 동물 정도로 보면 됩니다. 인간이 자기를 실체로 보는 이유가 뭐냐? 나중에 주체가 되고 난 뒤에 회고적으로 자신의 과거는 이랬고, 지금은 이런 의미가 있다는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현재 자기 주체의 의미로 집어넣기 때문에 인간은 실체에서 벗어나 주체라고 우길 수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존에 나는 어릴 때 있었고, 청소년기 있었고, 지금은 어른이다, 라는 시간의식을 다 깨버리는 겁니다. 그건 하나에 착각, 환상이라는 거예요. 지금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구태여 억지로 이걸 구성하기 위해서 어릴 적과 지금의 차이 남을 추궁하는 식으로 회고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나는 성장했다. 이젠 어린애가 아니야. 어른이야. 이렇게 보는 거예요.


 

 


 

방금 제가 억지라고 했지요. 억지란 말은 자기 자신의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 뭔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실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실제가 아니라면 허구, 환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젝,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느냐고 나오겠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것은 이유도 모르는 욕망, 돈에 대한 욕망에 휘말려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5억 가졌다고 만족하는 사람 없어요. 5억 돼야 비로소 10억이란 욕망이 새롭게 생기거든요. 이런 입장에서 어떤 허구, 환상 속에 헤매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이건 억지를 써서라도 나는 이렇다고 우기는 작업을 해야 될 힘든 존재가 된 겁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욕망에 휩쓸러 가면서. 예를 들어서 일체 나는 세상에 있는 사치스런 물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큰소리치자마자 백화점 가방 있는데 가져갈 사람? 여기요, 하고 손들게 돼있단 말이죠.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모른 체 계속 자기이어야 함을 강요받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처음에 인간은 의미부터 하는 게 아니고 이미지부터 출발해서 의미로 갔는데 여기서 자기가 의미 있다, 살 만한 가치 있다고 하지만 이게 새로운 욕망을 자아내는 이미지에 휘둘려요. 인간은 이건 끊어버려요. 자꾸 자기를 괴롭히니까. 현재 내가 생각하는 의미로 만족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 만족이 새로운 욕망이 들어오게 되면, 나는 이걸로 족해, 하면서도 자꾸 곁눈질하는 거예요. 혹시 내가? 이건 본인이 실체가 그런 거고 주체는 나를 가만두지 않고 새로운 욕망으로 이끌고 가는 거예요. 실체와 주체가 내부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겁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그 근거가 뭐냐? 이렇게 봅니다.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 자본주의는 정신 병리적 현상이에요. 자본주의는 백 퍼센트 미친 인간들이에요. 의미가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나 이걸로 살래, 로 종결되지 않아요. 자꾸 두리번거려요. 신상 나왔는지. 마트에서 광고하는 것 보에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하려면 집에 라면 두 개 있고, 물 나온다. 난 이걸로 족해. 그런데 마트전단지에 나오죠. 계란 한 판 특가! 8000원 --> 2500원, 냉장고 열어보면 계란 있어요. 또 사야 돼요. 병리적 현상입니다.


 

 


 

그래서 지젝은 말하기를 인간은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고 욕망이 기존의 욕망을 억눌러요. 내가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고 욕망이 기존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어요.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나라는 것은 항상 탈락해요. 그래서 앞의 이미지를 상상계라고 하고, 중간에 의미를 상징계라 하고, 뒤의 이미지를 실재계라 합니다. 지금 현실이 인간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작용하는 세 가지 경우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이야기해요. 이건 라캉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상상계가 뭔지, 그 다음에 상징계가 뭔지, 실재계가 뭔지 제가 간략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상상계는 그냥 이미지로 생각하면 참 쉬워요. 그냥 찰칵 찍어버려요. 저분이 아버지 될 만한 조건을 따져보자. 아이들이 그렇게 아버지로 부르지 않습니다. 내가 아빠라고 부르기 전에 저 아저씨 연봉이 얼마고, 이렇게 안 따지지요. 찰칵 찍어버리잖아요. 왜? 주체가 형성이 안 됐으니까. 그때 실체가 되는 거예요. 실체는 동물의 몸처럼 그런 겁니다.


 

 


 

상상계에서는 자아이상이라 하는데 내가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완벽 추구하는 거예요. 어릴 때 의미가 아니고 이미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빗자루 타고 하늘을 날고 싶어. 아니 빗자루가 곧 나야. 완벽을 추구하는 거예요. 자아이상이에요. 누구나 시작은 상상하는 거예요. 물론 그걸 상상이라고 하면 화냅니다. 어린애는 이걸 현실로 봐요. 자기가 꿈꾸는 동화세계가 전부니까. 집안이 가난하다. 가난한 애가 도서관에서 신데렐라 동화를 봤다. 그의 꿈과 비전은 뭐겠어요? 가난한 집구석에서 뭘 사달라고 해도 맨날 돈 없다고 하니까 완벽한 자아는 신데렐라 동화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왕자가 있어야 거기서 탈출할 수 있겠죠.


 

 


 

그 애가 크면 드라마를 보는 거예요. 우연히 길에서 재벌 3세와 부딪쳐서 커피 흘리고, 나중에 그 회사에 입사하고, 처음엔 개 무시당하지만 나중엔 아가씨 혼자 회사 다 일으키는 것 같아. 그리고 재벌 3세의 약혼자가 못 되게 굴고, 그걸 다 극복하고 결국 결혼하고, 계모와 딸을 마지막엔 용서하고 끝나는. 더 붙이면 출생의 비밀이 있어서 점 하나 붙이고.


 

 


 

이게 현실의 전부에요. 완벽한 현실은 어릴 때 구축이 돼버려요. 이미지지요. 이유가 없어요. 무조건 그래야 돼요. 신이 있다면 무조건 왕자가 와서 나를 건져야 돼. 그게 참된 신이야. 지젝은 말합니다. 신은 내가 만듭니다. 신이 나타났는데 보니까 나라. 큰 바위 얼굴로 똑같아. 나중에 신을 이야기하니까 그게 나였어요. 왜냐하면 성경해석을 누가 하는데? 본인이 상상계로서 완벽한 자아이상으로서 성경을 현실로 봐서 현실 속의 등장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해서 나중에 신을 공부해보니까 내가 되고자 하는 그 자아이상과 신이 어떻게 합치되는지 딱 맞아요.


 

 


 

그 다음에 현실이 사회에 들어갑니다. 처음에 사회에 들어갈 때 내부적으로 강력하게 반발하죠. 그래서 회사 들어가고 난 뒤에 3개월 만에, 6개월 만에 때려치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강력한 저항이 있습니다. 실제 현실은 자아이상이 깨져버립니다. 여기에 법이 있지요. 규칙이 있지요. 야근 있지요. 그리고 그냥 무시가 아닙니다. 개 무시당하지요. 업무 못한다고. “이것도 작업한 거야? 그런 식으로 하려면 그만 둬.” 초자가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초자가 회사업무가 적용하기 힘들지만 인간은 의미로 사는 게 아니고 이미지로 살기 때문에 언젠가는 왕자를 만나든지 재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꾹 참는 거예요.


 

 


 

뭐 때문에 참습니까? 지금 현실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현실은 이미 구축해놨어요. 하지만 지금 주어진 현실은 완벽한 현실로 가기 위한 고난의 길, 역경의 길, 이걸 영웅처럼 이겨내게 되면, 나중에 꿈은 반드시 이뤄지리라. 월드컵 4강이 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꿈이 기존의 현실과 부딪치죠. 이게 자본주의사회에서 병리적 현상, 그걸 징후, 증상이라는 겁니다. 그 징후, 증상은 히스테리라든지 정신분열증으로 이어져요. 강박증, 조울증, 우울증 이런 현상. 결국 그 꿈을 향하여 완벽한 현실을 위하여 이 한 몸 없어지면 그만이지. 자살이죠.


 

 


 

지젝은 자본주의 자체는 몇 명이 아니라 몇 십 명이 죽어도 그것이 동력이 되어서 자본주의는 질주할 수 있습니다. 실패자, 인생낙오자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성장하지 않아요. 자본주의 자체가 밟아줄 놈은 밟아줘야 돼요. 밟아주지 않으면 정체가 돼요. 안 밟아주는 것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입니다. 사회주의는 안 밟기 때문에 다 같이 그 자리에 스톱해서 전부 다 거짓꼴을 못 면해요.


 

 


 

만약에 마라톤에서 선수들이 똑같이 달리면 이거는 굉장히 평화로운 마라톤이지만 기록이 안 나와요. 기록이 나오려면 아프리카 케냐 선수가 몇 명 뛰어야 돼요. 그때 한국선수 코치가 뒤에서 닦달해야 한국 신기록 겨우 낼까말까 해요. 이 방법을 강남에 있는 수험생 엄마들이 해요. 꼭 공부 잘하는 놈과 친구해야 되고, 맹모삼천지교처럼 억지로 갖다 붙여야 돼요. 학군이 중요한 거예요. 해운대 학군 괜찮아요? 대구 수성구 괜찮아요. 꼴지라도 괜찮아요. 억지로라도 선두에 붙어야 강제라도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이미지가, 이미지 자체가 현실이니까, 현실은 실제로 완벽하게 추구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아이상이 깨어집니다. 깨어지고 이상적 자아로 바뀌어요. 이건 라캉 이론을 지젝이 그대로 받아온 거예요. 이상적 자아는 일단 상상계에서 현실로 오니까 주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야근하려면 힘이 붙이잖아요. “엄마, 힘들어서 도저히 못 살겠어. 멋진 아이템 하나 있는데 친구와 동업해서 대박날 수 있어. 엄마, 도와줘.” 이렇게 되겠지요. “그렇게 대박나면 어떻게 되는데?” “성공한 중소기업이 되는 거야.”라고 할 때 그 중소기업이 이상자아가 됩니다.


 

 


 

이걸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게 뭐냐? 자아이상과 이상적 자아를 굉장히 혼동해요. 우린 혼동하지 맙시다. 자아이상은 이미지 시대에 무조건 되고 싶다고 베낀 거고, 이상 자아는 요모조모 따져서 새로운 자기 모델이 생긴 거예요. 상징계에서. 상징계는 법과 규칙이 통하지요. 법과 규칙에 대해서 자기 착각하던 사람이 여기서 주체가 생깁니다. 주체가 생기려면 반드시 어릴 때 아버지의 흔적이 있어야 돼요. 정신적 지주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사회에 나가면 사장님, 부장님이 하고 그리고 경찰이 하고 군에서 고참이 하고 교회 오면 목사 내지 하나님이 그걸 하는 겁니다.


 

 


 

그 질서에 따를 때 칭찬이 주어져요. 제2의 자아가 형성되면서 동반해서 그 자아가 계속 칭찬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이 구축되는데 그 현실을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는 자기를 지시하고 명령해서, 이걸 알튀세르는 ‘호명’이라 하는데, 타인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나’가 되는 동시에 나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불러주는 내가 처음부터 기대한 나였다고 회귀해서 자기한테 붙이는 거예요.


 

 


 

이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태초에 예수 안에서 성도로 택했다 했지요. 그래 그거였어.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상징계입니다. 지금 지젝은 교회를 상징계의 일부로 봐요. 현실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 상식인데 갑자기 지젝, 라캉에 의해서 상식은 깨졌지요. 현실은 두 개 되는 거예요. 전에 동화적으로 살던, 맹목적, 낭만적으로 꿈을 이루던 그 꿈은 철이 없었다고 이미 상징계에 도달된 주체가 그 실체와 비교해서 회고해서 하는 거예요.


 

 


 

어릴 때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어. 그렇게 이야기하면 본인이 굉장히 어른스럽지요. 어른스러우면 행복하십니까? 인생 만족해요, 욕망 사라졌습니까? 난 어른스러워, 철났어. 이게 말도 안 되는 자기 위로라는 겁니다. 지젝은. 억지에요. 얼마나 돈과 자본에 시달렸으면 얼마나 돈 없이 사는 설움을 당했으면 고작 그런 식으로, 이것도 하나님 은혜라면 감사해야지,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 위로를 하겠느냐 말이죠. 그런 식으로 자기를 위로하게 되면 행복하다, 정신병 환자 된다? 정신병환자 되는 거예요.


 

 


 

자기 주택이 하나 있는데 갑자기 도시계획에 포함돼서 대단위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합시다. 옆집에서 자랑합니다. 현대건설에서 시세보다 다섯 배 준다고 해서 보상금 받고 한 달 뒤에 이사 갔습니다. 뒷집은 다른 건설회사에서 일곱 배 받고 새 아파트 사서 이사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운 없게도 자기만 달랑 남았어요. 이게 뭡니까? 새롭게 주어진 사건이죠. 그 사건 앞에서 나는 행복해, 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한다면 그게 정상입니까, 정신병환자입니까? 정신병환자죠. 그 괴로움을 자본주의사회가 우리에게 이미 심어준 돈에 대한 욕망을 마치 안 들은 것처럼 초연한 것처럼 위장을 해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가겠습니까? 신이시여, 이게 뭡니까?


 

 


 

그런데 다 같이 못 산다고 봅시다. 서로 정다운 이웃이에요. 그러데 하나둘 친구들 다 이사 가고 나중에 우연히 만났는데 보니까 강남 아줌마 다 되고 걸치고 난리 났어. 도시계획이 그렇게 돼서 내 땅은 삼십 년 전이나 똑같아. 이제는 쓸모없는 땅이 돼서 누가 찾아오지도 않아. 그러면 의미라는 것이 억지지요.


 

 


 

의미는 억지다. 내 존재 가치는 사실은 자기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면서도 불쑥불쑥 불만이 나오지요. 알 수 없는 분노, 반항이 나와요. 그게 잊었다고 생각한 자아이상이 계속 내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상상계의 추억이 죽질 않았어요. 완벽한 세계란 더는 욕망이 없는 세계에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욕망이 없는 세계가 좋습니까, 계속 새로운 욕망이 나를 이끄는 세계가 좋습니까? 어느 것이 우리한테 기쁨을 줘요? 욕망이 충족되는 게 기쁨을 줍니까, 또 새로운 욕망이 나를 그쪽으로 이끄는 게 즐거워요? 새로운 게 있어야 즐거워요. 그 새로운 것을 상상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새로운 욕망이 나오는데 이건 실체에서 주체로 가면서 억지로 여기에 뭔가 마개를 한 게 있어요.


 

 


 

오십 년 된 포도주 담은 오크통에 마개가 있지요. 마개 역할 하는 걸 오브제 a라 해요. 소문자 a는 상상계에서 욕망의 대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징계에서 대문자 A는 내가 이 땅에 현실세계에 있으면서, 상징계란 말이 우습지요. 우리는 상징계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걸 현실이라고 하지요. 어떤 현실? 철이 난 다음에 본 현실. 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어릴 때는 이 현실을 몰랐다. 철이 없어요. 지젝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현실은 자기 주체에 따라서 그때마다 달리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것 때문에 지젝이 어려운 거예요. 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왜 상징계라 하지?


 

 


 

상징이 심볼이잖아요. 심볼의 뉘앙스가 뭡니까? 헛방이란 말이에요. 이게 진짜 현실이 아니란 뜻이에요. 상상계는 말할 것도 없고. 상상계는 이미지고, 상징계는 심볼이고. 그러면 실제 하는 현실이 어디야? 그게 실재계입니다. 그러면 실재계에 살면 되겠네, 라고 하잖아요. 그 실재계는 어디 있느냐? 실재계는 도넛이에요. 중간에 구멍이 없으면 도넛이 안 되겠지요. 도넛이 우리 상상계 또는 상징계 가운데서 구멍을 파면 이게 바로 실재계입니다. 구멍 난 실재계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요.


 

 


 

프로이트나, 라캉의 이론을 지젝이 받으면서 이 세상 현실은 언어가 먼저 있으면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현실을 구성하게 돼있거든요. 그런데 실재계는 언어가 침투 못해요. 이 말은 실재계는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언어로 표현이 안 되면 없는 세계에요. 없는 세계인데 있다고 주장하느냐? 실재계기 때문에 정신 병리적인 증상과 증후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아파? 마음이. 도대체 이유도 모르는데 우울증 걸렸어. 해결책이 없어요.


 

 


 

뭔가 놓친 게 있어요. 그래서 지젝의 철학은, 인간들이 현실에 매진하면 매진할수록 놓친 것에 의해서 욕망으로 끌림을 받는다는 겁니다. 현실에, 자아에, 주체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렇게 안 하면 안 놓치는 데 바보처럼 살면 별로 정신병에 안 걸리는데 뭔가 욕망을 이루려고 목적을 달성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아프게 다가오는 미흡점, 결핍 그것은 바로 욕망 때문인데 욕망의 잉여, 우수리, 여분 그것이 바로 실재계를 이룹니다. 여기에는 주이상스, 여분의 희열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욕망은 욕망이 아니에요. 반드시 지금보다 더 기쁘고 즐거울 게 있을 것이라고 항상 내다보면서 인간은 의미에서 상상계로 계속 가요.


 

 


 

의미에서 상상계로 가면서 상상계에 도달하는 데 성공합니까? 실패하지요. 완벽이 어디 있어요. 완벽을 못하도록 가는 도중에 틈에서 모습을 보이는 데 그것도 실패의 모습으로. 인생 살아봤자 다 헛되고 헛된 거야. 이처럼 허무를 느끼는 것, 그게 실재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 실재계가 실제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남한테 착한 일한다고 행복한 게 아니죠. 착한 일하면 더 착하게, 심지어 더 희생해서 착하게, 더 가면 지금보다 더 심한 희생해서 남 도와주기, 마약 같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실팬데 기뻐요.


 

 


 

이것을 지젝은 프로이트에서 가져옵니다. 프로이트는 전반기철학과 후반기 철학이 있는데 전반기 철학은 리비도고, 리비도는 모든 것은 성욕에서 나왔다. 프로이트가 위대한 점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출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있어요. 그게 가족입니다. 우리 가족은 문제없다는 겁니다. 프로이트가 나오기까지 모든 철학은 우리 가족은 문제없고 건전하다는 겁니다.


 

 


 

모든 문제는 가족 외에서 나쁜 것이 있기 때문에 동서양 철학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수모와 굴욕과 모욕을 당하더라도 내 새끼, 내 가족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걸 다할 수 있다는 게 인간의 기본적인 철학이고 사상입니다. 동서양 철학 다 마찬가지에요. 심지어 종교도 마찬가지지요. 제가 <사일런스> 영화 평한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당한 영화, 거기 보면 순교했다는데 순교가 아니고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는 거예요.


 

 


 

그동안 철학자들이 왜 이걸 안 건드렸느냐 하면, 이걸 건드리면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 되고 괴물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를 괴물이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인간은 괴물 안 되기 위해 사는 거예요. 프로이트는 그게 바로 정신병을 유발했다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모른다. 괴물이면서도 괴물 아닌 척하기 때문에 얼마나 위장을 해야 되고 위선을 떨어야 되겠어요.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포장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괴물이라도 자식만은 괴물이면 안 돼. 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본인이 괴물인데 본인의 dna을 받았는데 어떻게 자식이 괴물 아닐 수가 있어요? 모든 문제는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가족에 있다고 지적한 사람이 프로이트입니다. 인간의 성욕은 인간이 말릴 수 없다. 정욕=성욕+정복. 성욕은 인간이 못 다스린다고 나온 내용이 리비도란 겁니다.


 

 


 

리비도는 무의식이 그동안 의식에 덮여있지만 의식을 뜯어보자. 무의식은 성욕이에요. 무의식은 자손을 무조건 번식해야 된다는 짐승의 충동이 성욕입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에서 쫓겨난 마광수가 프로이트에 반해버렸어요. 왜 진작 이 진솔한 것을 누가 이야기하지 않느냐? 진솔하게 이야기하다가 쫓겨났어요. 그러면 연세대가 무너지니까. 기존의 상징계가 무너져요.


 

 


 

상징계는 아버지가 정신적 지주가 돼서 전부 그 말을 들어야 돼요. 그래야 질서가 잡히거든요. 윤리, 도덕적. 질서가 잡힌다는 말은 이미지 세계가 아니고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의미, 윤리적 의미가 유지돼요. 그걸 프로이트가 깨버렸다고. 의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광수도. 인간이 자식이나 번식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그런데 프로이트는 우리가 짐승의 일부인데 아닌 척하니까 인간에게만 있는 정신병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게 치료가 되려면, 너는 원래 짐승이야. 짐승만도 못하다고 인정해버리면 그 순간 병이 나아요.


 

 


 

나는 이대 출신이고, 청와대와 놀았고. 빨리 그 병을 고쳐야 돼요. 맨날 열여섯 살 때 예쁘장한 그걸 자기 자아라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나이 팔십 되도 갖고 있으면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정신병환자에요.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잠재적 환자라니까요. 인간의 실체가 주인공이 아니면 전부 잠재적 환자에요. 주인공 아니면서도 주인공 놀이를 하기 위해서 나온 몸부림이 주체사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인간은 주체는 없고 실체의 차이 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지젝은 그런다고 해결이 되냐? 차라리 주체 끄집어내고 조져야 된단 말이죠. 프로이트는 첫 번째 리비도에요. 성욕이에요. 남자는 나이 60이든, 70이 되든 역시 예쁜 것. 여자는 거기에 맞춰서 30대도 60대도 예쁜 것. 여러분 할머니가 생머리 해보세요. 못 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 생머리가 어울리는 나이가 있어요. 70되도 생머리로 있으면, 미인도 그린 사람, 천경자 씨 죽을 때까지 길렀거든요. 못 보겠어요. 파마해서 올리면 얼마나 좋아.


 

 


 

후반기 철학이 뭐냐 하면, 인간은 물질이 돼간다. 바로 죽음의 충동입니다. 동양의 해탈 차원이에요. 모든 게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래 욕해라. 나 하나 죽을게.” 죽음의 충동이 리비도 안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물질로 변하는 본능, 이것이 바로 인간은 주체 쪽에서 리비도가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면서 충동이란 말은 그냥 충동이 아니고 그렇게 됐으면 참 즐겁겠습니다. 그게 내가 정말 꿈꾸는 행복일 거라는 거예요. 죽는 그 순간이 완벽한 상상계에서 완벽한 나의 이미지일 것이라는 충동, 이 충동이 도넛 구멍을 차지하고 있다. 소문자 a가 남아도는 잉여, 계속해서 일어나는 쾌락으로서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지젝이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10분 쉽시다.

 


201704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1-지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해보겠습니다.


 

 


 

지젝의 이러한 사상이 두 가지에서 영향을 주게 돼요. 하나는 정치적 문제,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치는 어떻게 하느냐? 이걸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보편적인 이데올로기가 다 허구고 환상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도 환상이란 말이고 사회주의고 공산주의가 다 환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이념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의 병리적 현상, 돈 때문에 시달린 영혼이 너무 괴로워서 그걸 어디로 해소하느냐 하면, 완벽한 이념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실제 생활에서 오는 척박한 어려운 상황을 그런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때우려고 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취직 안 되니까 이념 전쟁에 뛰어드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 간사들 선교 하러 가는 것. 지지난 번 설교에서 그랬잖아요. 교회에서 앵벌이 시킨다고.


 

 


 

옛날처럼 젊은이들이 고생하며 살고 방 한 칸에 비키니 옷장 놓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60대 이상 노인들 우리도 고생 다 했다. 지금 대구에 중소기업들 사람이 없어서 못 구한다. 그런 데 3D 업종 안 가고 전부 대기업에 가려고 하니까 취직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젊은 사람들이 이미 상상계, 자아이상이 이 꽂혔어요. 꽂힌 이상 자아이상은 수정할 생각 없고 그들의 아는 현실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아이상을 구현할 현실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가 해줘야 된다는 거예요. 거기서 정신병 생기고 술, 담배로 정신병을 해소하려는 겁니다. 자진해서 미치고 싶은 겁니다. 술, 담배 없으면 도대체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계속 사업이나 할까, 취직했다가 더럽다고 때려치우고 자기 사업한다고 털어먹고 하잖아요. 자기만 털어먹으면 괜찮은데 온 가족이 털어먹으니까.


 

 


 

그들이 이념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념이 허구화된 이유를 밝힙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젊은이들이 뭘 보느냐 하면, 욕망을 충족 못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충족을 방해한다는 이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자꾸 젊은이들은 어릴 때 상상계의 욕망을 충족 못하느냐고 하지만 욕망이 욕망을 낳는 거예요. 그럼 이념이라는 것은 뭐냐? 중간에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빠지는 겁니다. 현실은 다양성, 다수지요. 다수에서 보편적을 뽑아냅니다. 이게 바로 이데올로기에요. 이념이라니까요. 다수에서 보편성을 만든다는 거예요. 나는 이런 세상이 되면 참 좋겠다. 어떤 세상인데? 그런데 다수의 생각이 너무 많아.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은 다 하나의 생각으로 통합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걸 기독교적으로 하면 온 세상이 기독교 세상 되는 것, 이걸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념 자체가 허구란 말이죠. 왜냐하면 이것을 기대하는 오야봉이 있어요. 오야봉이 본인이에요. 그런데 본인은 누구한테 있느냐? 알 수 없는 정신적 지주가 있어요. 정신적 지주는 어릴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커서는 이상 자아, 내가 꼭 되고 싶은 것, 김 과장이라면 김 이사, 나아가 김 회장 되고 싶은 것. 그것이 날 지시해서 나를 중심으로 보편성을 이루는 겁니다.


 

 


 

지젝에 의하면 도넛에는 중심이 없잖아요. 중심을 허구적인 것이 감히 중심을 비워야 돌아가는 욕망의 세계에 이걸 채우면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이걸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도 없이 어떤 욕망과 희열과 즐거움, 쾌락을 추구한다면 마저 채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습니까? 설명 못합니다. 언어적 설명은 안 되고 나라는 인간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더 기쁨을 추구한다면 이 괴리만큼 정신적 병리적 증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사회에서 정신병환자가 되는 겁니다.


 

 


 

교회 가면 착하라 하지요. 또 착해, 또 착해. 어떻습니까? 정신병환자 되는 거예요. 기도하라 하지요. 성경에 보면 무시로 기도해야 되지요. 기도 시간을 늘린다고요. 또 늘여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기대치에 부합되는 어떤 기쁨 같은 걸 노리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 했는데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쾌락이 있다면 그게 잉여 쾌락이에요. 우수리, 나머지 쾌락이 있다면 그것이 현재 나를 힘들게 만듭니다.


 

 


 

주체 안에 남는 구멍, 그것이 바로 쁘띠아(petit a), 가짜 욕망이라 할 수 있고 소규모 욕망, 미지의 X가 우리에게 항상 상상계 속에 이미 침투해 있는 겁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할 때 적폐라 하고 적대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정치란 없는 적을 만들어 공격하면서 본인의 상징계를 형성하는 게 정치입니다. 박근혜 탄핵할 때 안철수와 문재인이 마음이 얼추 맞지요. 적은 저쪽 박근혜기 때문에. 탄핵되고 난 뒤에는 문재인 쪽에서 안철수 딸이 어떠니저떠니 나오는 겁니다. 당선확률이 안철수가 높아지니까 적을 만들어야 돼요.


 

 


 

사람이 적이 없으면 어떤 활동도 안 하게 돼있습니다. 적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사실은 본인의 욕망을 계속 바짝 메마르게 하는 그 무엇을 적으로 간주하거든요. 너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건 본인이 계속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적이 다 물러가고 적이 완전히 내 발 밑에 밟히면 행복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또 새로운 적폐, 적대를 만들어야 돼요. 적폐는 정치적 용어에요. 이데올로기는 왜 있는가? 적폐, 적대를 만들기 위해서 기준 세우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겁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했다, 어느 당에 속했다고 하는 겁니다. 정치가 없는 곳이 없어요. 이건 심지어 가정에서도 있어요. 아버지 패와 엄마 패, 에서와 야곱 이야기 아닙니까.


 

 


 

야곱이 훌륭하다면 안 되고 야곱이 중요한 점은, 바로 그 적이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고, 에서는 그게 없어요. 야곱은 자기 안에 적폐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해소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해소가 안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받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구원하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지요. 얍복 강가에. 그동안 한 편이라고 생각한 하나님이 자기와 싸워야 될 적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지요. 하나님이 적이 된 결말은 죽음으로 저주로 처리해야 돼요. 야곱이 저주받은 현장에서 태어난 게 누굽니까? 이스라엘 아닙니까. 이름이, 존재가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지젝은 이렇게 합니다. 내 존재가 없는 곳에는 내가 없고 내가 없는 곳에 내 존재가 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는 내가 없다고 이야기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면 할수록 가짜임을 폭로하는 순간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런 말이 우리나라에 있지요. ‘솔직히’란 말. 선보면서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이것 백 프로 가짜입니다.


 

 


 

‘솔직히’란 말 듣지 마시고 밥 먹을 때 어떻게 먹는가? 나는 주체고, 밥 먹는 것은 실체거든요. 그 실체가 주체되기 전의 실체기 때문에 그게 그 사람이에요. “밥 먹을 때 좀 흘리네요?” 하니까 “제가요?” 할 때 이게 가짜라. 실체에 나를 붙이면 가짜가 돼버려요. 주체는 항상 실체를 감추는 데 급급합니다.


 

 


 

그래서 지젝이 유명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가 가짜라 이야기해서 그래요. 그런데 지젝이 기존의 정치를 공격하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교재 234페이지에 이게 어디까지 나가느냐 하면 궁극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나가요. 그 대목을 봐야 돼요. [지젝은 그의 저서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이 세상에 어느 종교가 신이 자기 신도를 보고 나를 배반하라고 이야기하는 신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게 바로 지젝이 말하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에요. 가룟 유다를 제자로 누가 택했어요? 예수님 본인이 선택한 거예요. 가룟 유다의 운명 속에 예수님의 자기 선택이 들어있어요. 그럼 가룟 유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 선택의 결과를 본인이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배신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배신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난 거예요. 신을 배신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신이 아니라고 나타난 유일한 신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는 그걸 몰랐다는 겁니다.


 

 


 

그 대목을 읽어볼게요.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지젝은 거기서 더 나갑니다. 지젝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신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성경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있다고 나오지요. 지젝은 그럴 줄 알고 이야기합니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에요. 숨어있는 하나님. 이 말은 아무도 신의 존재를 안다, 모른다? 몰라요. 신의 존재를 모른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묘사는 것은 전부 거짓이 되는 겁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층은 어디 있기 때문에? 언어는 실체에서 나온 게 아니고 주체에서 나왔어요. 주체는 중심이 없어요. 그냥 도넛 같아요. 그때마다 자기 합리화뿐입니다.


 

 


 

S1, 이걸 주인기표라 하는데 흐르는 감정은 언어로 포진이 되고 스톱이 되고, 스톱이 되는 그게 주인인데, 주인은 실상은 모습이 없고 합당한 의미에 부합되려고 S2, S3 계속해서 나오는데 S2 됐다가 S3가 와서 그게 아니야, 그게 원 뜻이 아니거든요. S4가 또 그게 그런 뜻이 아니거든. 자꾸 언어가 미끄러지는 거예요. 주인기표는 없는데 없으면서도 S2, S3, S4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남자한테 참 좋은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떤 상황이 오면 표현도 바뀌는 거예요. 주인기표는 구멍 난 거예요. 실재계에 있어요. 이걸 남성형 세계라 합니다. 남성형 생식기처럼 돌출돼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인간은 돌출기가 제거가 됐어요. 제거됐다는 말은 그걸 사모한다는 겁니다. 주인을. 늘 미흡한 상태에서. 이걸 정신적인 거세라 해요. 거제 되지 않으면 정신병, 거세 되면 정상인. 거세 안 되면, “나는 나폴레옹이다.” 이러고 돌아다니고. “나는 신데렐라 공주야.” 이러고.


 

 


 

일본 만화에 나오는 차림새를 자기 자신에게 다 입히는 코스프레라 하지요. 그걸 어른 되도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나이 오십 넘어서 간담로봇 갖고 노는 사람들, 요새 기혼자들도 많아요. 창고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이 있어요. 김건모, 맨날 로봇 만들고 있어요. 그걸 퇴행이라 해요. 나이는 드는데 꿈은 어릴 때 자아이상에 꽂혀있는 거예요. 박혀있어요.


 

 


 

그래서 예수는 숨어있기 때문에, 가룟 유다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숨어있는 유일한 곳은 여러 군데 오는 게 아니고 그건 바로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한 그걸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외에는 복음이 없다고 지젝은 보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오직 한 가지 이야기했다. 십자가만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 십자가가 뭐냐?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했다. 이 말은 니들이 알고 있는 이념적인 지주 같은 나의 아버지 같은 하나님은 다 허구적이다. 실제로는 그로 인하여 배신당한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중요한 게 많은데 숨어있는 X가 나타날 때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이야기합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 대목이에요. 그 예수님이 나타나서 가만있었습니까? 활동했지요. 활동의 완성이 뭡니까? 활동의 모든 집약은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한 것이다. 그 의미가 뭐냐? 지젝이 기존의 신학자들을 조사해보니까 그 사람들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대목을 해석을 못하고 있어요. 이게 연기하는 건가? 해석을 못하고 있는 이유가, 실재계를 모르니까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상징계에서 나온 주체가 해석이 되는 거죠. 그 해석은 잘못이에요.


 

 


 

그래서 지젝은 말합니다. 해석은 성경을 준 자만이 해석한다는 거예요. 그럼 해석은 누가 합니까?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해석이에요. 성경을 하나님이 줬고 해석은 누가 한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신학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성경 준 자만이 해석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해석 사이에 이동하고 있는 거예요. 해석 사이를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 안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해석하는 책. 이렇게 해야 될 이유가, 성경해석은 인간은 못합니다. 성령이 와야 됩니다. 성령의 감동감화로 성경책이 지어졌으니까.


 

 


 

지제 앞에 이천 년 동안 공부했던 신학박사들이 꼼짝 못하고 있어요. 할 말을 잊어버렸어요. 틀리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왜 그동안 신학자들의 지제처럼 해석 못하느냐? 성경해석 자체가 목적이 있어서 그래요. 그게 이상자아입니다. 본인이 목사다. 본인 교회를 어떻게 키워야 돼요? 남들이 뭘 좋아합니까? 목사님이 주의 종 되니까 수천 명 모였지요. 큰 교회 부흥과 유지를 원했지요. 그게 이상자아지요. 이상자아를 유지하는 것은 상징계의 주체잖아요. 어떤 성경해석을 해서라도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커지는 것을 진리로 본 거예요. 이게 안 되면 그 목사 자살하는 거예요.


 

 


 

지젝은 말합니다. 네가 가룟 유다를 알아? 열두 제가 가운데 가룟 유다가 대표자에요. 가룟 유다 모르면 열한 제자 몰라요. 가룟 유다를 정신적으로 분석해야 되느냐 하면, 가룟 유다만 제대로 인류를 대표해서 예수님과 맞닥뜨린 겁니다. 그게 성경적으로 맞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담은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그 원수의 대표자가 가룟 유다잖아요. 베드로는 도망쳤지 죽음에 몰아넣진 않았잖아요. 다시 말해서 예수는 가룟 유다 눈에 자기의 적폐입니다. 자기의 자아이상을 공격하고 깨는 적이에요. 누가? 예수가. 쉽게 말해서 이러려고 제자 됐나?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운 대로 하면, 그것을 가룟 유다가 한 게 아니고 가룟 유다 속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기쁨이, 뭔가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쾌락이 나로 하여금 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할 때 잠시나마 구멍이 뚫리는 사이다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겁니다.


 

 


 

기독교뿐만 아니에요. 불교를 공격합니다. 불교의 논리는 고집멸도에요. 이 세상에 고생이 많다. 생로병사가 고생이잖아요. 고생은 욕심에서 나옵니다. 욕심은 집착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돈 십만 원을 기쁨으로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십만 원 잃어버렸을 때 그 십만 원이 집착의 원인이 돼요. 손에 있으면 느끼지 않는데 잃어버리면 집착이 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럼 아예 집착을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모든 고생은 집착에서, 집착을 해결하려면 없애면 된다. 없애는 방법은 도, 팔정도,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 이렇게 여덟 가지를 하면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 와중에 불교는 말합니다. 그 집착과 욕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남들이 가져다 준 것이다. 그러면 남들이 없으면 되는데 이미 나 자체가 남에게 포섭되면 나도 남이 되면 나를 죽여야 되겠지요. 유아론에서 무아론으로 나가야 돼요. 거기에 대해서 지젝은 제대로 공격합니다. 지난 시간에 한 레비나스와 데리다,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차이 이론 철학가들과 불교의 문제점은 타자가 지루한 동일성이에요. 똑같은 타자성이라는. 내가 다룰 수 있는 그냥 나한테 쇼윈도에 있는 타인들이에요. 저 사람과 놀래, 안 놀래, 결정을 누가 한다? 내가 하는 타자에요. 그것은 현실세계를 몰라서 한 거다.


 

 


 

불교의 가장 약점을 공격하고 불교를 무가치한 것으로 봐버리죠. 욕심을 짓는 나를 없애는 나, 그 욕심 많은 내가 만든 지루한 동일성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실재계의 침투가 아니고 같은 상징계에 있는 이웃에 침투지요. 상징계의 타인이 나를 공격하니까 도망치면 된다는 게 불교고, 사랑하자는 게 모든 윤리, 도덕이고 그런 거예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진짜 현실, 실재계가 빠진 셈이에요. 그런다고 행복하냐? 그런다고 기쁨이 충족되느냐?


 

 


 

그럼 뭐냐 하면, 하나님은 실재계에서 나타난 거예요.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우리한테 나타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먼저 신이 여기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법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을 거론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법이 가만있으면 죄가 안 돼요. 법이 우리에게 작용하면 법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악이 생기고 악을 저지하기 위해 발악을 하면서 우리 안에서 선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정상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선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선은 없어요. 언제 선이 등장하느냐 하면, 악이 와서 우리를 통치할 때 약간이나마 반항기로 등장하는 게 선이에요. 로마서 7장에 그런 게 나오잖아요.


 

 


 

내가 선을 원하는데, 그걸로 끝났습니까? 그 뒤의 말이 뭡니까? 선과 악 중에서 악이 이기잖아요. 처음부터 악은 선한테 질 악이 아니고 이길 악이에요. 그런데 악이 등장해야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의인 행세하고 있는 얍삽한 짓이 악으로 말미암아 공개가 되고 노출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을 준 것은 선하라고 준 게 아니고 원래부터 악에 못 이긴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법을 줬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온다고 지젝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 중에서 무슨 선이 교회에서 유포됐느냐 하면,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게 선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면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왜 예수 믿으려고 하는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 믿으려고 하는데?” “죽어서 어디 갈지 몰라서 그래요.” “죽어서 어딜 가는지 네가 왜 알아야 되는데?” 우리가 고를 것 같으면 천국은 우리 세계잖아요. 천국 가기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는지. 없지요. 천국, 지옥을 왜 네가 결정하는데. 인간은 거짓말하는 거예요.


 

 


 

심판주가 누굽니까? 주님이라 하잖아요. 심판주가 주님이라면 심판을 주님한테 일임해야 앞뒤 논리가 맞잖아요. 그런데 거기다 예수를 믿으면 나를 심판하지 말라고 갑자기, 예수 믿는 걸 누가 악한 일로 봅니까? 선한 일로 보잖아요. 심판주 앞에서 예수 믿는 선을 행해버리면 심판행위에 대해서 내가 방해하는 게 돼요. 그걸 공무집행방해라 합니다.


 

 


 

최순실 조카 장시호가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받고 있거든요. 정유라는 이화여대 실제로 입학했었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줄 수 있는 공정한 법집행을 훼방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 공정한 심판이 훼손돼버려요. 이건 나만 생각하는 욕망이에요. 천국은 개인이 구원되는 곳이 아닙니다. 이건 구원파나 하는 짓이고 한국교회가 하는 짓이에요. 예수 믿으면 구원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성경해석은 주님이 하는데 여기서 지젝이 모르는 게 있어요. 성경해석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언약의 상대자기 때문에. 모든 언약 상대자는 한 분을 위해서 가요. 한 분이 누구냐?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 나타났잖아요. 왜 모세, 엘리야 본인의 착함으로 구원 못받느냐? 두 분은 이걸 알아요. 아브라함이 누굴 기대했어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쳤다고 구원 못 받아요. 요한복음 8장에서 누가 와야 돼요. 자기 죄를 대신할 누가 와야 돼요. 모세와 엘리야가 자신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알았어요. 그게 언약 안에서 그걸 안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성경해석 안에 그들의 초청받은 겁니다.


 

 


 

야곱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 된 거예요. 야곱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게 죽었어요. 죽고 그게 재료가 되어서 이스라엘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으니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이름을 믿어야 되느냐?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벌인 넘치는 결과물이에요. 왜 넘친다는 말을 하느냐 하면, 바로 지젝이 그걸 이야기했거든요. 지젝에서 실재계는 넘치는 여분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 말고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것. 따라서 경계선 넘어는 어떤 언어를 내뱉고 행위를 해도 우리가 추가 될 수 없어요. 거기에 보탤 수가 없어요.


 

 


 

예수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게 안 돼요. 예수 믿는 것도 주의 심판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 믿게 하는 그것이 결과로 주어져야 돼요.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예수 믿는 착한 일했다는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이것마저 어떻게 실재계 중심에서 이런 고백마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어서 선물로 나한테 안겨주게 되었느냐?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지젝은 그리스도가 빠지는데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고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젝이 복음에 대해서 얼추 따라왔어요. 그런데 지젝은 지금 모든 신학자들이 엉터리 기독교를 만들었다, 불교와 똑같은 것이라고 하면서도 진짜 무엇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포기했어요. 왜냐하면 자기 이론에 의해서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실재계는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비워놔야 돼요. 성도도 비워놔야 되겠지요. 성령세례를 내가 요청해서 받으면 이건 가짜에요. 그렇지 않고 그냥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해요. 이걸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내가 전한 말은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고. 지젝은 왜 그 대목을 이야기 안 해요? “사람의 지혜로 아니하고”란 말을 왜 빼먹느냐 말이죠.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돼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면 누구의 지혜란 말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그걸 다른 말로 성령이라 하는 거예요.


 

 


 

지젝은 교회를 성령의 공동체라 합니다. 하여튼 누가 비판해도 비판할 빌미를 주질 않아요. 민주주의 가짜라고 욕은 하는데 따지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반박할 건더기가 없어요. 사람이 민주주의를 원하고 세월호 어떻고 복지를 늘리고 평등을 부르짖자, 독재를 물리쳐라, 나치는 저리 가라, 파시즘은 가라, 이러한 배경에 지젝은 뭐로 봅니까?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돈에 환장한 정신적인 병리현상을 스스로 자가 치료한다니까요.


 

 


 

그럼 자본주의를 벗어나면 될 게 아니냐? 자본주의를 못 벗어나요.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실체기 때문에. 실체란 말은 프로이트에서 나왔지요. 프로이트에서 인간은 아니고 짐승이죠. 짐승은 먹이를 먹어야 돼요. 먹이 먹고 하는 일은 자손 번식. 그러니까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 그 노선이에요. 지금 그러한 짐승과 동일함을 꾸준히 인간은 온갖 윤리, 도덕과 철학과 사상으로 이념화 시켜서 포장했단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사상과 이념이라 해도 지 새끼 건드리고 가족 건들면 어떻습니까? 정신병 걸려요. 사람이 아직 견딜 만 한 것은 지 가족과 새끼가 건전하기 때문에 그나마 견딜 수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가정에 있는 거예요. 영원히 내 쉴 곳은 가정밖에 없다 하잖아요. 동양철학은 가정에서 가정으로 끝인 거예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외부적인 삼강오륜을 마련한 거예요. 그러다가 서양에 먹힌 겁니다. 서양은 가정에서 더 큰 이념이 있었어요. 그건 신을 위해서. 그것이 IS, 이슬람이 그 짓하고 있잖아요.


 

 


 

인도에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이슬람 교인이 트럭에 암소 열 마리 싣고 갔어요. 그 운전사 몽둥이로 맞아 죽었습니다. 왜 맞아죽었게요? 힌두교는 소를 숭상하죠. 자, 따져봅시다. 소를 숭상할 때 소는 S1이 되는 겁니다. 지젝은 이걸 알 수 없다 하는데 소를 숭상하고 싶어요. 그럴 때 지젝은 이걸 정신병자로 봐요. 정신병자니까 만약에 누가 소를 도살하려고 하면 소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나를 죽이죠. 왜냐하면 주체는 소와 더불어 있을 때 내가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그대로 기독교에 적용시켜 봅시다. 천주교에서 마리아 동상한테 인사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기독교는 비어있는 십자가라면 천주교는 처참하게 망가진 십자가에요. 망가진 십자가는 물체지요. 하나에 인격체지요. 인격체는 어릴 때 자아이상, 커서는 이상적 자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믿는다면 어느 정도 믿어야 돼? 예수처럼 믿어야 돼. 예수님이 모델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자고 나오니까 그 대목이 자기한테 이입된 거예요.


 

 


 

성경이 언어로 돼있으니까 언어를 상징적 주체로 해석하는 겁니다. 지젝은 우리가 해석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성적 자아가 동원하기 때문에 제대로 해석이 안 돼요. 해석하는 것이 일반인들이 자기 정신병이 해소가 되잖아요. 텅텅 비어있는 실재계를 뭔가 상징으로 채우니까 다소 안심이 되는 거예요. 안심이 된다는 말은 숫자가 많다는 것, 천주교가 교회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고 커지게 되죠. 커지게 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헌금이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 고객을 기쁘게 해야 돈이 많이 들어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에 치인 이 세상에서 이래서는 죽어서 지옥 갈까 싶어서 천국을 보내주거든요. 천국은 여러분 속에 들어 있잖아요. 착하게 살면, 정성껏 드리고 순종하면 구원받는다. 그게 천국이라고 목사가 부추기면 교회는 절로 부흥되는 겁니다. 가룟 유다 배신이야기를 왜 해요. 십자가 이야기를 왜 합니까? 십자가 끝나고 놀라운 부활의 살아있는 성령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바로 지젝이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공동체냐? 지젝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겁니다. 지젝이 아는 건 여기까지 에요. 사랑의 공동체가 마귀의 전당이고 죄악의 몸이란 말을 거기까진 지젝이 언질을 못해요. 그걸 언질하려면 진짜 성령 받아야 돼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 될 때 오늘날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접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것까지는 차마 이야기를 못해요. 성경에 나오는 대로 몰트만이 주장한 대로 유명한 신학자니까 인용해버립니다. 그래야 교회에 욕을 안 얻어먹으니까. 그래서 지젝은 해답은 없어요. 다 뜯어놨어요.


 

 


 

지젝이 믿는 게 있어요. 성령의 공동체를 믿어요. 교재에 보면 나오는데,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236쪽) 따라서 예수를 계속 속여야 된다는 겁니다. 속이기 때문에 안 속인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안 속이는 자는 더욱 더 속임을 당한다는 거죠.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이게 정말 맞는 이야기에요. 타락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타락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타락을 사람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죄인 중에 괴수가 되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아담이 따먹은 게 아니고 죄가 하나님이 따먹게 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 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죄에서 벗어나려고 구원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에 주목하자는 말입니다. 지젝이.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왜? 그런 현장에 있는 것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에. [타락으로 오인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돼있어요. 지금 [죽은 신을 위하여]란 책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을 제가 따온 겁니다. 타락으로 오인되는 구원, 다시 말해서 남들 보기에 타락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란 말이죠.


 

 


 

악은 뭐냐? 지젝은 말하기를 악은 생성적인 선이다. 선이 구체화 되면 악이 되니까 선이 구체화되면 악이 되니까 악이 있는 그것이 선이 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하죠.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릭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지젝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게 기존의 신학에 대해서 입을 다물게 할 만 하죠. 계속 지젝은 하나님 이야기 안 합니다.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공격하는 게 아니고 드러내고 있어요. 실재계를 드러내서 기존에 있는 상징적인 교회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좀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은 뭐냐? 하나님은 자기 정당성에 실패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이 말은 충분히 이해되지요. 얼마나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정당성을 확인하고 남에게 보여주고 증명하려고 애를 썼으면 하나님은 오히려 반대로 자기 실패를 증명하는 것으로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이 땅에서 죽임을 당했느냐? 오히려 그런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다.


 

 


 

특히 이 책에서 지젝은 욥을 이야기하는데 욥은 자기 고통의 의미를 달라고 그렇게 요청했건만 나중에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서 만나보니까 욥의 고통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다는 거죠. 의미란 상징계에서 하는 거죠. 상상계에선 의미가 아니고 이미지죠. 지젝은 더 나가서 그 이미지는 하나님이 욥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자기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서 욥에게 끝까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의미를 줬다는 겁니다.


 

 


 

지젝이 자신만만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마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침묵했다. 욥이 발악했을 때도 하나님은 침묵했다. 이 침묵의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유능한 것이 아니고 무능한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 이유가 뭐냐? 무에서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진해서 무, 타락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말하기를 이 타락한 세상에서 진정 기도하는 자는 무신론자밖에 없다. 실증적인 무신론자는 아니고 그냥 결과적으로 너희들이 다 하나님이면 난 하나님 안 믿을게, 라고 나온 무신론자만이 진정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왜? 자신을 원인으로 보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신의 이론을 마감해요.


 

 


 

이렇게 끝나면 안 되겠지요. 지젝의 복음적인 문제점. 잠언 29장 26절 보겠습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적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작정은 여호와께 있지요. 지젝이 처음부터 잘못된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닙니다.


 

 


 

지젝은 어디에 초점을 맞췄습니까? 주체에 초점을 맞췄지요. 그런데 잠언 29장 26절에 보면, 모든 인간의 작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죠. 그러면 인간을 둘러싼 자연적인 현상과 모든 환경은 하나님이 작심하고 주신 거죠. 이 말은 인간은 철저하게 수동적이에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남자 되고, 여자 되고 싶어 된 게 아니고 그냥 가만있으면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밀면 밀리게 돼있어요.


 

 


 

어떤 점에선 동양철학적 발언일 수 있는데 서양에선 주체지만 동양에선 주체가 없지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거기에 따라서 나는 나란 말이죠. 여호와도 모르고 언약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게 옳다는 거예요. 바로 그 점을 지젝이 뭔가 누락시키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보려고 하는 것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은 거예요. 그런데 그 배역은 누군가는 맡을 배역인 거예요.


 


 

나는 부산인데 남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어느 동에 태어났다. 나는 대구에서 오래 살았고 뭘 했고 이건 내가 안 해도 되지만 작정하신 분은 나에게 그 배역을 맡긴 거예요. 배역은 언제 끝납니까? 모든 연극이 끝나면 배역인 줄 알지요. 무대에서 내려와야 되지요. 그러면 우리 인생이란 무대에서 배역으로 그 역할을 하다가 잠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면 되잖아요.


 

 


 

십자가에 대해서 지젝은 옳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나 십자가 나오기 전에 십자가를 주체로 다가서면 안 된단 말이죠. 하나의 배역으로 봐야. 우리가 믿게 된 것은 주께서 믿으라고 주신 것, 작정하신 분은 여호와니까 주께서 믿게 하셔서 믿게 된 거예요. 남은 부자 되고 나는 가난한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고, 마침 주께서 작정해서 그 역할을 맡게 된 거예요. 머리 노랗게 된 것은, 내가 맡은 역할은 그뿐인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은 갈수록 그 배역의 강도가 느껴지면 점점 더 감사가 늘어나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지젝은 해답을 몰라요. 우리는 감사로 느끼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러 사람을 생각해보면서 주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면서 십자가만 증거 한다는 사실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의 원인이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서 & 기타(이근호) > 80여명의 신학자들[부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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