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66 / 배신+ 흡수 / 161107 본문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6 - 배신과 흡수 16,11,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자식은 아버지가 훈계해서 키워라 !! 오늘은 교재 181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거기에 보면 잠언서 8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잠언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훈을 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으로, 즉 아버지라는 인간이 아들이라는 인간에게 교훈을 하는 것을 잠언이라고 시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평소에 자식을 양육하고 훈계하라는 것이 잠언이라는 말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를 하고 교훈을 하는, 즉 짧은 문장에 인생사를 담아서, 인생을 적게 산 젊은 사람들에게 교육용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잠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속담 속에 삶의 지혜가 들어있는, 그러니 이것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인데, 즉 아버지라는 사람, 아들이라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래서 잠언서 1장의 내용만 보면 무슨 느낌을 주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는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상을 준다는 말이다. 즉 "자식은 아버지 담당이지 내 담당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잠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그러면 계속해서 인간이 인간을 교육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런데 교재 181페이지에 나오는, 잠언서 8장 1절과 22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인간 대 인간으로, 인간에게 일임한 그 원칙이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지혜가 끼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잠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 ◈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끼어든 지혜 !! 그러니 인간 이성의 지혜와 명철에 의해서 인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는 인간을 떠나서 분리가 되어버리고, 직접 지혜가 이 땅에 오게 되면 결국 이 지혜와 명철이란 것이 마치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주의 기운과 같은 느낌이 드는데(ㅋㅋ), 사람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또 다른 영역에 속한 지혜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처음에 아버지가 자식에게 훈계를 한다는 것은 그만 멀쑥하게 되고 말았는데, 하청을 준다고 해놓고 본사에서 직접 다 해버리면 하청업체는 무엇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물건을 거래할 때도 대리점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나가야 하는데, 본점과 직접 계약해서 물건을 구입하게 되면, 대리점은 장사를 그만하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를 한다는 것은, 이 아버지가 보통 아버지가 아닌데, 다윗의 가문에 속한 아버지라는 말이다. 알다시피 다윗의 아들이 곧 솔로몬인데, 그 솔로몬이 자기 자녀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잠언서라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의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말이다. ◈ 주인공이 달라요 !! 방금 제가 '저자'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과 그 문장 속의 주인공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이가 아프다" 라고 말을 한다고 하면, 그런데 여기에서 이가 아프다고 말하는 그 '나'와, 그리고 이가 아픈 '나'는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데" 라고 하는데, 그것이 결단코 솔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기의 본성을 말하는 가운데, 즉 자기가 마음에 둔 것을 말하는 가운데, 그런데 벌써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그만 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드디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망설인 것이 15초 이전이라고 한다면, 그때의 모습과 15초 이후에 이야기하기로 한 모습이 그만 다르다는 것이다. 그게 같지를 않은데, 그러니 전혀 종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편지를 붙일까? 말까? 그런 영화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하루에도 수십 통을 써놓고 그런데 그것을 붙일지 말지, 그것을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 편지 속에는 "순애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편지 속에서 사랑한다고 하는 '나'와, 편지를 붙일까말까 고민하는 '나'가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영화에 보면 주인공이 편지를 부치는데, 그런데 부치고 나서 다시 우체국에 전화를 해서 그 편지를 다시 돌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편지를 받고 순애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런 온갖 걱정을 다 하면서 회수를 요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루에 마음이 12번도 더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데" 라고 하지만, 그게 솔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 이게 너의 솔직한 마음이구나" 라고 하면, "시작은 솔직하게 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참 답답하구나. 이게 솔직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진짜로 솔직한 마음이 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나도 몰라"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최백호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 라는 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즉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럭비공처럼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 소통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런데 !! 현대 기호학과 언어학에서 이것을 계속해서 분석하는데, 왜냐하면 타인과 소통이 될 때 현대사회는 결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통하는 방법은 언어인데,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그래서 기호나 언어, 상징, 그런 것들을 잘 연구해서, 보다 명확하게 타인에게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연설문을 보면, 국민들에게 보다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르는데, 일체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말이다. 그래서 한 편의 연설문이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심리학자나 언어학자들이 총동원되어서 작성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언어학자들이 연구를 해보니, 처음에는 이 언어라는 것이 둘 사이를 보다 단합하고 결속하기 위해서 사용한 줄로 알았는데, 그렇게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말이다. 그래서 "말을 해야 알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을 하면 상대방이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 언어는, 소통이 아닌 명령 !! 그런데 연구를 해보니 그것이 아닌데, 즉 언어라는 것은 소통이 아닌 명령이라는 말이다. 상대방에게 명령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렇게 말을 할 테니, 너는 무조건 나의 말을 따라야 한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대인관계에 있어서 입에서 말을 끄집어내면, 그것은 은연중에 명령하는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감출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뒤에 '플리즈' 라고 붙여도,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공손하게 이야기를 해도, 그게 명령이 된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야야, 이번에 김장을 담지 말거라. 이번에 자식들 김장은 내가 배추를 한꺼번에 사서 다 하기로 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러면 며느리가 "어머니께서 힘이 들텐데, 그래도 김장을 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 어머니는 정말 짱입니다요 !! 그런데 그런 겉치레로 마치면 안 되고, "어머니가 담아주시는 김치가 이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어요" 라는 말이 나와야 발걸음도 가볍게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그냥 돌아가는 시어머니도 있지만, 사람이 뭔가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일방적 요청이 상대방의 반응으로 나타나기를,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말을 하던 윽박지르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은 자기의 절대적인 영역을 상대방의 넓혀가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진공사태가 아니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권력의 장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권력이 형성되어있다는 말이다. ◈ 오로라를 보셨나요? 예를 들어서, 자석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냥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쇳가루를 던져보면 N극과 S극 사이에서 쇳가루가 아무렇게나 놓이는 게 아니라 일정한 방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쇳가루를 치우면 그게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구도 그런 자석과 같은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런 자기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오로라 형상인데, 캐나다 북쪽에 가면 나타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괜히 거기에 잘못 갔다가는 돈과 시간만 날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나타나는고 하니, 태양에서 폭풍이 불어서 입자가 지구에 날아오게 되면, 그것이 보이지 않는 자기장에 걸리게 되면, 그때 마치 무당이 춤을 추듯이 하늘에 녹색과 파란색 등이 어울려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구는 보이지 않는 자력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지구만이 아니라 인간도 그렇다는 것인데, 그것을 보이지 않는 '기(氣)' 라고 하는데, 동양에서 그런 기가 중요한 것은 이미 자석에서 발견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마호멧트의 무덤이 공중에 떴다고 하는데, 그것은 알라신의 역사가 아니라, 그 동네에 자석이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보이는 것만이 전체라고 여겼던 이 세상에,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설명이 되지 않던 것이 현실적으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옛날에 주술을 하던 사람이나 무당들이 자석과 같은 것을 가지고 백성들을 현혹시킨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그게 역사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다. ◈ 권력의 장(場) !! 요즘은 연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 대 인간에 있어서 그런 권력의 장이 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인간의 모든 말은 명령이 된다는 것이다. 상관이 명령을 해서 명령이 아닌데, 친구와 같이 길을 가더라도 "어, 눈이 오네" 라고 하면, 눈이 온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인데, 그러니 그게 무슨 명령이냐고 할지 몰라도 말이다. 그러면 옆에 있던 친구가 "지금 우리가 교통사고가 나서 해결하려고 경찰서에 가는데, 그것이 눈에 들어오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 눈이 오네" 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눈에 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너도 관심을 좀 가져라" 라고 하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옆에 있는 친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지금 놀러가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너는 무슨 눈 타령이나 하고,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해?" 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너의 관심사에 동조할 마음이 전혀 없어" 라는, 그런 뜻이란 말이다. 잠언서가 다윗언약에 속해있는데, 그러니 지금 제가 다윗언약을 언급하면서, 이게 결코 추상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게 무엇인고 하니, 젊은 남녀가 보자마자 번개가 치면서 6개월만에 결혼했다고 하는 것인데,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장(場)이 형성되어서, 무엇이 있기에 땡기느냐는 말이다. ◈ 현대 물리학과, 사랑과 미움 !! 인류의 역사가 5,000년이라고 하면, 저는 지구전체 역사를 6,000년으로 보는데 말이다. 그러한 5,000년 역사에 있어서, 남녀간의 사랑조차도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헬라철학에는 당기는 것을 사랑이라고 했고, 반대로 미는 것을 미움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엠페도클레스' 라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과 미움으로 설명했는데, 당기고 미는 것으로 말이다. 이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이고, 물체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물체가 서로 당길 때는 사랑한다고 보면 되고, 밀어낼 때는 미워한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적인 감정으로 사물을 설명하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미신이라고 했는데, 컵이 무슨 감정이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에게나 감정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최첨단 양자물리학에 와서는, 놀랍게도 옛날에 주장한 것이 맞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더해서 설명을 해야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 물리학에 들어가니, 당기는 것이 있고 미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당기는 것을 중력이라고 하고, 미는 것을 반(反)중력이라고 하는데, 초창기에 우주가 창조될 때는, 즉 빅뱅이 일어났을 때는 중력에 역행되는 밀어냄에 의해서, 없는데서 새로운 것이 생성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현재 모든 물리학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미움에서 시작해서 당기는 것인데, 그러한 미움에서 시작해서 비로소 어떤 물체가 등장하는 것이고, 그렇게 물체가 등장해서 밀어내는 것을 이기기 위해서 서로가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을 중력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중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모든 것이 해체가 되고 분해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권사님이 이렇게 앉아 계시는데, 만약에 중력이 없으면 귀신이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전자는 마이너스(-)이고 원자핵은 플러스(+)인데, 그렇게 서로 당기고 있으니 이렇게 물체가 있는 것이지, 그게 없으면 빈 공간이 되어서 그만 통과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도 죽으면 분해가 되는데, 그렇게 분해가 된다는 것은, 중력에 반대가 되는 역중력, 그것을 물리학에서는 암흑물질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 암흑물질이 75퍼센트이고 나머지 25퍼센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고 말이다. 그래서 우주는 75퍼센트의 암흑물질로, 즉 점점 해체되고 있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에너지로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요즘 고등학생들이 배우고 있다는 말이다. ◈ 왔다가 사라지면 그만인 것이 인생 !! 그러니 마치 쥐포를 찢듯이 찢어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양자 물리학과 같은 최첨단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가? 사상이 불교와 비슷한데, 모든 것은 왔다가 쥐포처럼 찢어지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한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를 믿지 않는데, 어차피 한 번 뭉쳐졌다가 흩어지는 것인데, 그게 불교이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종교라고 할 수 없는데, 서양에서도 동양철학적인 요소가 있는 철학자들은 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도 그렇고 말이다. 김용옥도 그러한데, 그 양반도 백두선생의 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잠시 정신을 집중했을 때 나오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뭔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신을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신이 어디에 있어? 그냥 먼지가 되어서 날리면 그만이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김광석이 그런 노래를 불렀는데, "먼지가 되어 ♬" 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먼저 먼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술이 당기면 술을 마시고, 잠이 오면 자고, 그렇게 살면 되는데, 술도 끊고 잠을 설쳐가면서 교회는 왜 나가느냐는 것이다. 등산이나 가면 되는데, 그러다가 사고가 나서 죽고 말이다. 74살이나 되어서 등산을 왜 가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조용히 집에 있다가 사라지면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신이고 뭐고 다 귀찮다는 것이다. ◈ 잠언서는 결코 처세술이 아니기에 !! 아무튼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훈계를 할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겨준 일이라고 시작하는 것이 잠언서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잠언을 자칫 잘못하면 처세술처럼 느낄 수가 있는데, "니가 이래야 성공한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침착해라. 넘어졌다고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를 자기의 출세길을 열어주는, 자기가 이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방법들이 여기 잠언서에 들어있다고 여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대인관계라든지, 세상관이라든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 잠언서가 가르쳐준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잠언서 6장에서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라고 하면, "아하, 개미처럼 부지런하면 재물이 들어오는구나. 부지런해야지" 라고 하게 되는데, 무슨 토정비결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성경은 어려워서 잠만 오는데, 잠언서는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잠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물론 착각인데, 잠언서는 성경말씀이 아닌가? 성경말씀이라는 것은, 성경말씀에서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성경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고통이 들어있는데, 그 고통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 어떤 구절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성경말씀을 보면서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 게 동시에 유발되어야 제대로 된 성경해석이지, "이렇게 하면 내가 출세하겠네. 여기에 이런 삶의 지혜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를 해놓으셨구나" 라고 말이다. "잔치집에 가서 너무 많이 먹지 말라. 그러면 교양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것은 너의 출세에 지장이 된다" 라고, 그런 식으로 잠언서를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잠언서 8장과, 직접 침투하는 하나님의 지혜 !! 그런데 잠언서 8장에 오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 이전에는 인간에게 맡겨놓아서, 그래서 "이렇게 하면 출세한다" 라고 느껴졌던 것이, 8장에 오면 인간을 보고 손을 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직접 하나님의 지혜가 침투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지혜가 침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 대 인간으로, 그렇게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 지혜라고 하면, 이 지혜가 하나님의 뜻이든 우주의 뜻이든 간에 인간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문장 안에 있는 주인공과 말하는 주인공이 같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잠언서 8장에 보니, 지혜가 나서서 뭐라고 하는가? "손을 떼라. 어서 손을 떼라" 라고 하는데, 즉 지혜가 직접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가 직접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어떻게 지혜가 직접 움직이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성경책이 있는데, 제가 친절한 금자씨가 되어서 설명을 해드리니까 여러분이 이해가 되었는데, 그런데 제가 그만 "나는 앞으로 설명하지 않을 거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자 성경책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하는 말이, "너는 하지마. 내가 할거야" 라고 하면서 스스로 성경책이 펼쳐지면서 거기서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즉 성경말씀이 스스로 여러분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1번은 틀리고 2번이 맞다 !! 그런데 잠언서 8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1번은 틀리고 2번이 맞다는 것인데, 그때는 틀리고 지금이 맞다는 것이다. 이사야서 40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모든 육체는 풀이고 그 아름다움은 꽃과 같은데, 그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보면,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움직여서 하는 것인데, 그러니 너희들이 나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니, 실로 그러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문장 안에 있는 주인공과 말하는 주인공이, 그게 중간에 인간이 개입하게 되면 주인공이 같지 않고, 인간이 빠질 경우에는 문장 안에 있는 주인공과 말하는 주인공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말하는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니 눈에 보이겠는가? 물론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이 성경말씀을 직접 다가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성령으로 말하게 하시는 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듣게 하셔서, 말하는 이나 듣는 이는 다 빠져버리고, 듣게 하면서 그 안에 잠재되어있던 진리의 말씀이, 누가 가르칠 필요 없이 자생적으로 확인되고 활성화가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예를 들어서, 지나가는 노숙자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라고 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가는데, 그런데 그 찬송가를 듣는 순간에 자기 안에 있던, 즉 고린도전서 15장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는 말씀이 생각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다고 해서 노숙자를 쫓아가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나를 가르쳤습니다" 라고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부르고 싶어서 찬송가를 불렀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찬송가를 듣고 자기 안에서 말씀이 활성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서로가 소통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감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의 장(長)', 즉 '지혜의 장(長)' 이라는 것이다. 참 어렵다면 어려운데, 목사가 가르치고 교인들은 배우면 되는데, 그런 학원을 주님이 만드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 신앙을 이야기해봐라. 그러면 듣고 내가 동의한다면 동의한다고 할게. 하지만 나에게 명령조로 말하지는 마라" 라는 것인데, 하지만 인간의 말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아무리 겸손하게 이야기를 해도 그게 다 명령이라는 말이다. ◈ 부부간의 신뢰의 장은 회복되지 않아 !! 남자들이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아픔이 무엇인고 하니, 아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잔소리로 들린다는 것인데(ㅋㅋ), 잠자리를 같이 해주고 살림을 살아주는 것은 참 고마운데, 잔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열 마디라도 한 마디만 하면, 남자들이 거기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기 때문에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 마디의 말을 백 마디로 늘여버리니,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에게도 그 이유가 다 있는데, 한 번 이야기를 하면 남자가 들어 처먹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했던 소리를 또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댁 이야기를 해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처음에는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도망을 치든지 해야하는데, 그 핑계를 대고 등산을 가서 사고가 나고 말이다. 그래서 남자는 "알아들었으니 이제 고마해라" 라고 하면, 그러면 여자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알아들었는데 또 하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똑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서로 신뢰가 없기 때문인데, 즉 신뢰의 장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뢰의 장을 형성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물론 여자들은 "당신이 똑바로 하면 신뢰의 장을 형성하겠다" 라고 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남자가 순진하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데, 하지만 3년만 같이 살아보면 그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아무리 신뢰를 회복해도 그동안 했던 가락이 있기 때문에, 그게 버릇이 되어서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만 같이 살아보면 다 느낀다는 것이다(ㅋㅋ). ◈ 내가 명령을 하는데 누가 감히? 인간 대 인간으로 하는 것은 명령으로 통하기 때문에, 이 명령에는 무엇이 개입되는고 하니, 육적인 기대와 소망이 가미된다는 것인데,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을 한다는 것, 했던 말을 또 한다는 것, 즉 명령에 또 명령이 추가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제 이 세상이 명령을 하는 명령자의 세상이 되지 아니하면 나는 짜증나고 화난다" 라는, 그런 독보적인 자기 존재성을, 즉 악마적 본성을 발휘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성경말씀이 나빠서가 아니라, 성경말씀을 계속해서 인용하면서도 잠재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해석하는 대로 자기 주변이 평정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자기의 독선적인 고집과 아집이 그런 가운데서 형성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악마적인 발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소리도 두 번을 하게 되면 그만 잔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할 때, 그것을 남편은 어떻게 보는고 하니, 아내가 가정의 주도권을 가지고 가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밀리면 안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강렬한 맞서기를 하다가보니 결혼 6개월만에 그만 파토가 나고 하는데, 기(氣) 싸움을 한다고 말이다. ◈ 하지만 민중의 사회는 없어 !! 비록 가정이라는 것이 좁은 영역이지만, 거기에는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하는 권력의 장이 형성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권력의 장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고 말이다. 말하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새로운 환경이기를, 그것을 말을 하면서 의도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러한데, 가난한 농민들이 모여서 데모를 한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사회가 농민들 위주로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노동자들의 데모도 그렇고, 또 촛불집회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이 사회가 민중들의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데, 그런 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추상적인데, 이 세상에 국민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이다. 그동안 모든 것을 다 실험해봤는데, 군주정권, 참주정권 등등을 말이다. 이미 로마시대 때에 다 해보았는데, 그리고 그 이전에는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도 해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작은 마을에서는 그게 되는데, 그런데 인구가 늘어나서 몇 만명이 넘어가면 그만 중구난방이 되어서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필리핀에 대통령이 이름이 누구인고 하니, 아무튼 '두'씨 성을 가지고 있는데, 공식적으로 죽인 것만 3,000명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열배, 아니 백배라는 것이다. 마약을 했다고 말이다. 현재 지지율이 무려 80퍼센트라고 하는데, 그러니 더 죽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지율이 8퍼센트도 아닌 5퍼센트인데 말이다. 그러니 인간도 아닌 것은 보호할 가치도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인데,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야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문제인데, 실질적인 것은 자기 재산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를 해치는 것은, 그런 것들은 자기를 대신해서 대표자로서 대통령이 알아서 좀 제거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두테르트인가 뭔가 하는 대통령이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북통일이 되어서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게 통일이 되면 개인적으로 북한과 교역을 한다든지 해서 자기 재산이 늘어나고 먹고사는 것이 좀 나아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핑계인데, 거기에 솔직함은 전혀 들어있지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에 말이다. ◈ 인간의 목표는 독재자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이 성경말씀인 잠언서를 가지고 활용한다는 것은 자기가 독재자로 살고 싶어하는 숨겨진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 주변을 만들어가는, 그게 파시스트이고 나치인데 말이다. 그렇게 그 현장에서 자기가 최고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서 말을 내뱉게 되어있는, 그게 바로 인간 대 인간의 언어적 소통의 관계라는 것이다. 세상이 이러한데, 그러니 순수하고 순진하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시골에서 부모에게 효도만 하면서 살아온 아기씨도, 서울에 와서 취직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모두 순실이가 될 수밖에 없는데, 순수한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아담의 후손이고, 그래서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시는데, 즉 "손떼라!" 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씀을 주었지만, 너희들이 말씀을 이루어서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은 허락한 적도 없고 기대한 적도 없다" 라는 것이다. 의인도 아니면서, 죄인이 되어서 각자 자기 영역에서 돗대라고 우기는 꼴을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하겠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 소돔과 고모라에, 덩치가 큰 어린아이 두 명이 !! 그래서 이 지상에 말씀이 오니 권력의 장이 형성되는데, 그게 성경에서는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나오는데, 그들이 멸망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천사가 둘이 아브라함을 찾아왔는데, 그들이 왔을 때 곱게 이야기하고 곱게 빠졌는가?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천사가 찾아오니 동네의 깡패들이 천사들을 건드리기 위해서 덤벼든다는 것이다. (창 19: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천사가 곧장 심판을 받을 이 세상을 찾아왔을 때,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인간들만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에 오니 눈에 보이지 않던 권력의 장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권력의 장은 그야말로 폭력인데, 즉 힘의 장이라는 말이다. 힘이 센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윽박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세계라는 것은, 물론 평소에 인간들끼리 살 때는 그냥 참고 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천사가 오니, 즉 순결한 자가 오니, 전혀 힘이 없는 모습이 순결인데 말이다. 즉 힘이 있는 세계에서 힘이 없는 것만큼 순결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아기들은 다 예쁜데, 그 이유는? 엄마 아빠가 아무리 인물이 없어도 아기는 다 예쁜데, 그렇지 않은가? 심지어 흑인 아이들도 예쁘다는 것이다. 혹시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아이들은 다 예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왜 예쁘냐는 것이다. 그것은 어른들이 늘 힘에 의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런데 아이들은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힘과 관계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그게 우리가 잊어버렸던 옛날의 꿈과 같은 동화의 세계를 아이들을 통해서 다시 보는 반가움이 있다는 것이다. 손자가 웃을 때는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데, 물론 똥을 싸고 울 때는 조금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이가 웃을 때는 천사의 모습인데, 그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에 왔다는 것이다. 덩치가 큰 어린아이 두 명이 왔다는 말이다. 깡패들도 예쁜 것은 알아가지고는, 진짜 예쁜 것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성인데 말이다. 그래서 과거에 오페라 무대에는 여성이 등장할 수가 없어서 남성이 소프라노 역할을 했는데, 그래서 그것을 남성성을 제거한 남자가 하는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아직 남성성이 나타나지 않은 소년이 했다는 것이다. 그게 음악사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을 듣다가 기절한 관객도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다. 천사의 소리라고 하면서 말이다. ◈ 깨어진 이웃사랑 !! 그러한 권력의 장에 두 명이 왔을 때, 이것은 동성애도 아닌데, 천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니 말이다. 성경에 보면 깡패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와서 천사를 내어달라고 하니 롯이 거부한다는 것이다. 손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니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웃사랑이 깨어져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웃은 있는데, 그런데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왜 사랑이 없는가? 그것은 자기 중심의 권력의 장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남에게 명령하고 지배해서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 하는, 그러한 경쟁과 투쟁의 장 속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이 곧 소돔과 고모라 !!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인데, 그래서 성령을 받는 사도바울은 간단하게 뭐라고 하는가? "자, 떠나자!" 라고 하는데, 살만큼 살다가 오라고 하면 미련도 없이 가자는 말이다. 60대에 천사가 오면 핑계를 대지 말고 가자는 것이다. 그것은 젊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머뭇거리지 말고 가자는 말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소원이었는데, 사도바울이 이 세상을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마음이 곧 천사의 마음인데, 권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그딴 권력?" 이라고 하면서 우습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유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권력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모함하고 공격을 하는데, "에이, 이 나쁜 놈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주님이 오셔서 "여인아, 나는 너를 용서한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용서를 해주니, 즉 심판주가 용서를 해주시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신경을 쓰면 오히려 그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무거운 짐이 되어서 누적이 되는데, 그래서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무엇이 들어있는가? 남들이 군지렁거린 것들이 쌓여있는데, 자기 몸무게가 70이라고 하면, 그 무게는 무려 2톤이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는데, 그 무게로 인해서 말이다. "오늘도 어떻게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지?" 라고 하면서, 그 스트레스가 그야말로 끔찍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 몸이 다 아프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도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벌떡 빌어나야 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말이다. 우리는 천사이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교재 181페이지를 살펴보자. ** 여기에 보면 지혜의 본질이 나오는데, 이게 곧 지혜의 원래 정체입니다. 여호와께서 만물을 지으시기 전에,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지혜가 되는 나를 지었다는 겁니다. (잠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잠언서 중간에 보면 창조주가 직접 인간 세상에 개입한다는 것인데, 8장에는 그 본질이 나오는데 말이다. 사실은 그게 3장에, 아니 1장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23절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라고 말이다. 물론 이것은 다윗언약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식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이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지혜가 만드신 이 세상 !! 그런데 8장에 들어가면 인간은 손을 떼고, 이제는 하나님 옆에 계시는 창조주가, 그러니 누가 만들었다는 것인가?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가 주체가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겠다고 하는 그 주체가, 그게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남을 가르쳐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그런 존재를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내가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라는 것을, 그것을 성경자체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디서 죄인 주제에 까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해보겠는데 말이다. ◈ 인간에게 먼저 시키고, 왜 손을 떼게 하시는가? 잠언서라는 것이 솔로몬이 아들에게, 즉 왕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언약이 무엇인고 하니, 다윗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들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지혜, 율법의 완성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먼저 인간에게 시켜놓고 그 다음에 인간에게 손을 떼게 하시는고 하니, 이 다윗언약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먼저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보고 한 번 해보라고 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물음표인데, 그런데 이 물음표가 잠언서 8장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직접 여기 2번 문항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었지 싶은데, 일단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언약이 둘로서 나누어지는데, 다윗언약이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이 오히려 가리개의 역할을 하는데, 아담의 범죄를 덮어주는 말이다. 그렇게 마귀에 속한 인간을 가려놓았는데, 그런데 "이게 어디서? 비켜라!" 라고 해서 비켰는데, 그러니 배후에 숨겨진 진짜 다윗언약의 주인공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잠언서 8장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이 땅에서 지혜의 나라를, 천국을 이룰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럴 권한도 전혀 없는데,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본래 뜻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잠언서 8장 22절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잠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처음에 이 세상은 혼돈인데,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냥 '무(無)'는 아니고, 이것은 뭔가 있음은 아니고, 그 있음과 비교해볼 때 없음을 혼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 전 '혼돈' 이라는 것은? 당연히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한데,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현재 있다고 여기는 것이 없을 때, 이것이 있는 쪽에서 볼 때 없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없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혼돈이 있다는 것이다. 어둠이 있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둠이 있는 것을 있다고 하면 안 되고, 항상 그 시작을 하나님이 만드신 그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이 없을 때가 있는데, 그때를 '무(無)'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적인 무가 아니고 상대적인 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것이 곧 혼돈인데, 현대 물리학에서는 암흑물질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들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있을 때가 있고 거기에 비해서 없을 때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무엇이 누락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중보자인데, 이 중보자가 초반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중보자는 언제 등장하는가? ◈ 과연 중보자가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바로 중보자의 역할을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해야하는데, 그런 역할을 하라고 만들어진 게 인간이란 말이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개입되어진 중보자적인 역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중보자가 필요한가?"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이 난로를 만들었다고 하면, 그런데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 자기가 만들었으면 자기가 불을 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만들었지만 불을 피울 수가 없네. 그러면 중보자가 필요하구나" 라는,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아이디어가 전혀 떠오를 수가 없는데, 필요가 없다고 여기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차가 있는데, 그러면 이것이 마시고 싶으면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는 도저히 마시지 못하겠어. 그러니 중보자가 필요해"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데 무슨 중보자가 필요하냐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닌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보자가 필요도 없이 차를 마시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는 소리라는 것이다. 물론 중보자가 없이 해도 되는데, 그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게 나쁜 짓에 해당되기에 지옥에 가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다. ◈ 우리는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워 !!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배가 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신다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그러면 부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요? 저기 컵이 있네. 저 컵으로 물을 마셔야지. 참 그러면 안 되는데, 중보자를 염두에 부고, 중보자의 경로를 거쳐서 물을 마실 때 영광이 된다고 했지. 그러니 주님이여,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중보자를 생각하면서 물을 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한다면, 이게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번잡스럽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곤란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길을 가면서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주여, 주의 영광을 위해서 발을 뗍니다. 저의 힘으로는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발을 올리고 내리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발 밑에 있는 개미를 조심한다고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밑을 본다는데 말이다.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제자들아, 너희들은 무엇을 하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라고 하셨는가?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12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제자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간섭을 하셨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물을 마실 때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님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마셨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오히려 제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했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지은 모든 죄를 몽땅 누가 가지고 가셨는가? 예수님이 가지고 가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릴 때, 그때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잔소리를 해서 이룬 것이 아니고 피를 흘려서 다 이루셨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들이 그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착한 일을 하든 말든, 아무리 주님을 섬기고 해도 그것이 영광이 된다는 것인가? 안 된다는 것인가? 영광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중간에 있는 중보자가 빠진 채로 하나님을 생각하기에 말이다. ◈ 중보자가 없는 세상은 처음부터 없었어 !! 그러니 중보자가 없는 세상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데, 지혜가 없는, 창조주가 없는 세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따로 계시고 하나님이 따로 계시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두 분이란 말이다. 성령까지 합하면 세 분이고 말이다. 그러니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중보자가 따로 계신다는 것이다. 그게 다윗언약 안에 내재되어 있었는데, 드디어 다윗언약을 통해서 바깥으로 현실화가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게 알라의 이슬람 종교이든 불교이든 간에 중보자가 없는데, 힌두교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들은 일체 중보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중보자가 없이 신을 섬겼는고 하니, 그들은 자기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고상한 것, 경건한 것, 거룩한 것, 그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것이 선악체계인데 말이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그것을 자기가 임의로 양심대로 분류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악은 가능한 한 저지르지 않고 선은 모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선의 모습이 어떠한고 하니, 착하다고 하는 것도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데, 늘 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만 자기를 학대하고 만다는 것이다.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다든지, 남을 위해서 기도한다든지 말이다. 착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거지가 매일같이 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매일같이 착해지려고 하면, 스스로 나쁜 짓을 하려는 그 욕심마저 끊어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에 들어가든지 해서 도를 닦고 하는데, 여자들이 유니폼을 입고 수녀원에 들어가고 말이다. 물론 거기서 하는 것은 참기름을 짜고 된장을 만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거룩한 것이냐는 말이다. 그게 진짜 참기름은 맞지만, 가짜를 파는 사람들에 비하면 매우 양심적이지만, 하지만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것이다. ◈ 중보자가 필요치 않는 인간들 !! 중보자가 없는데, 12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 착함을 들이대면서 그것으로 구원을 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정작 그 중보자가 누구에게 죽으셨는가? 그런 짓을 하는 자들에게 그만 살해를 당하셨다는 말이다. 자기들이 이렇게 착한데, 굳이 중보자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제자들이 원하는 중보자는 자기들이 잘한다는 것을 격려해주는 중보자인데, "잘한다. 더 열심히 하면 천사들도 부러워하겠다. 마일리지가 점점 쌓여간다. 베드로야, 참 잘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마일리지를 쌓고 쿠폰을 모으면서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죽임을 다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만 중보자를 빼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왜 자기가 중보자로 나서기를 좋아하고, "너는 중보자가 아냐.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영광이 되지 않아" 라는 말을 싫어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을 분석해보면, 그것이 바로 주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언표주체와 행위주체 !! 만약에 하나님에게 감사의 편지 쓰기를 한다면,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편지를 썼다고 하면,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라는 말인가? 그것을 옆집 아저씨가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문장 속의 주체는 '나는' 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말하는 주체, 즉 '언표주체'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문장 속에서 그렇게 적고 쓰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행위의 주체' 라고 하는데, 즉 말하는 주체와 행위의 주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 인간은 도저히 포기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즉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간절히 기도해도, 여전히 자기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오늘도 26분을 기도했다. 세상에 교회에 나와서 6개월만에 20분 벽을 훌쩍 뛰어넘었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보통 10년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그 반대가 되어서, 초반에는 열심히 기도하다가 가면 갈수록 그만 짧아진다는 것이다(ㅋㅋ). 그것도 일종의 퇴행인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가면 갈수록 자기가 어떤 발언을 쏟아낸다는 것이, 타인을 의식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의식된 타인으로 인해서 그 현장에서 보다 근사한 '나'를 새롭게 조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성은, 그야말로 중보자가 없이는 도저히 구원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죄악은 평생을 간다는 것이다. 중보자가 없이는, 예수님의 피가 없는 아무리 발악을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 다윗언약은, 우리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음을 !! 그래서 주님이 다윗언약을 주신 것은, 지옥에 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하나님이 주신 교훈대로 가르쳤는데, 그렇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가르친 자기는 점점 더 영웅이 되고, 신앙의 선배가 되고, 신앙의 스승이 되는, 그런 꼬락서니를 자기가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이렇게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지? 전혀 나는 아닌데, 도대체가 왜 이렇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언약은 무엇인가? "그 어떤 인간도 스승이 될 인간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도 없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죄인이 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 모세를 통해서 살펴본 '중보자' !! 그러면 중보자가 무엇인고 하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서 좀 그러한데 말이다. 모세 이야기를 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모세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일원인가? 아닌가? 그 60만 가운데 모세가 포함이 되어있는데, 그러면 시내산에 도착할 때까지 모세는 포함이 되는가? 안 되는가? 포함이 되는데, 그러면 모세가 시내산에 혼자 올라가는데, 여호수아도 떼서 버리고 말이다. 여호수아는 중간쯤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포함이 되는가? 안 되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시내산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포함이 되는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하나님에게 포함이 되는데, 그러면 모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게 인간의 나라라고 하면, 여기 가운데 무엇이 있는가? 모세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 쪽에서는 모세를 지도자로 보는데, 왜냐하면 모세 덕분에 애굽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홍해가 갈라지고 해서 말이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오니 무엇을 잃어버렸는고 하니까, 모세는 하나님에게 속했는데, 그래서 이 선을 그만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중보자를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첫 번째는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동안에 이들이 그만 우상숭배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세가 40일 동안 있다가 내려오니 밑에서 난리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무엇이 섬기는가?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등장했는데, 그런데 이 하나님은 어디에 있던 하나님인가?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의 신인데, 그러면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는가? 여기지 않았는가? 분명히 여겼고 실제로 하나님의 혜택을 입었다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말인가? 모세와 함께 입었다는 것이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그런데 이제 모세가 빠이빠이를 하고 혼자서 시내산으로 올라가니, 여기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들은 애굽에서 나왔다고 여겼는데, 전혀 애굽에서 나온 게 드러난다고 만다는 것이다. 즉 애굽에서 벌을 받았던 그 신을 여전히 계속해서 섬기고 있었다는 말이다. ◈ 자기가 우상숭배자임이 드러나야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12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에 간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으냐고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오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과정에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바로 우상숭배자이고, 예수님을 자기가 원하는 가짜 예수로 꾸준하게 섬겨왔다는 것이 들통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는데,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니, "나는 니가 핍박하던 예수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만든 하나님이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말이다. 여기에 '핍박'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결국 이것은 배신이라는 것이다. (행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 깨어진 돌판 !! 모세가 십계명을 돌 판에 새겨와서는 깨버렸는데, 이게 배신의 증거물인데, 그 깨어짐을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깨어진 돌판이 새로운 언약의 가장 중요한 장착물이 되는데, 그래서 그것이 언약궤에 핵심적 요소로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을 모세가 다시 받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은 제물의 피가 깨어진 것을 용납해주는 식으로 언약이 맺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집을 계약하는데, 그만 상대방이 열을 받아서 계약서를 찢었다고 하면, 그런데 그것을 테이프로 붙여서 간직하고 있다가 다시 보여주는데, 그렇게 찢어져서 붙여진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깨어진 십자가 앞에서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그것이 영원토록, 심지어 천국에 가서도 계속 노출이 되는데, 그게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진짜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는 말이다. 돈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는데, 주님의 용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마다 돌아다니는데, 마치 1등을 배출한 로또 판매처를 찾아다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그냥 오셨다는 것이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한다는 것은 지옥으로 갈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적은 수라고 두려워하지 말라. 천국이 너희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가방이 크고 좋다고 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배신 + 흡수 = 중보자 !!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했는데, 그러면 모세만 좋은 것인가? 시내산에서 자기 혼자 구원을 받고 말이다. 하지만 모세가 계속해서 시내산 꼭대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밑으로 내려왔는데, 그게 40만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모세가 40일만에 내려왔기에 예수님이 40일 동안 게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하는 것이 다 성취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모세가 보여주는 차원에서 40일 동안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40일 동안 있다가 내려왔는데, 그러면 배신 플러스 무엇이 되는가? 그것을 통합, 혹은 흡수라고 하는데, 즉 "배신+흡수" 라는 것이다. 이게 오늘 강의제목인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중보자' 라는 것이다. 그러니 중보자는 마귀가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데, 마귀와 죄가 없으면 진짜 중보자의 모습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모른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한 번도 중보자를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인데, 중보자 앞에서 신학박사든 무엇이든 간에, 그런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목사, 집사, 장로, 권사,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중보자만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요즘은 기독교고 천주교고 알라교고 불교고 간에 무엇을 없애버리는가? 배신과 흡수가 없는데, 그냥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모정의 세월'도 아니고, 집을 나갔던 아들이 엄마 품에 앉기는 것으로, 그렇게 페인트칠을 해서 끝내버린다는 것이다. ◈ 우리 마음대로 하되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발걸음을 떼고 물을 마시든, 혹은 놀러가서 차가 뒤집어지든 말든 어떻게 하시는가?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하되, 그게 바로 배신인데 말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사실은 그게 무엇이라는 말인가? 인간은 자석인데, 그러니 인간에게는 이미 권력의 장이 형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독보적이고 절대자로 세우고자 하는, 그런 육신의 본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이 최고이지, 남에게 밀리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너는 나에게 꿇어 !! 그것을 우리는 타고났는데, 그러니 상대방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을 잡아먹기 위해서 하는 명령이라는 말이다. 소통이라는 것은 핑계이고, "너는 나에게 꿇어!" 라고 하는, 그게 자기가 내뱉는 말에 섞여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주체는 그게 현실이 되고 실제가 되기를, 은근히 우리의 욕망이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 협박하고 공갈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애굽에서 하던 우상숭배이고, 하나님에게는 배신으로 보여진다는 말이다. 즉 "내가 너를 사랑했건만 너는 나를 배신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배신임을 아는 자들에게만 흡수가 되고 통합이 되는데, 그렇게 배신, 그리고 흡수가 되면, 우리의 몸은 누구의 몸이 된다는 말인가? 이제는 중보자가 다루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유앙겔리온, 즉 복음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지혜의 일부가 되게 하옵소서.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마저도 주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그렇게 주님을 핍박했던 우리를 거두어주시는, 그런 주님의 사랑만이 높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잠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 먼지가 되어 ♬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창 19: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창 19: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창 19:4)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창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출 32: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출 32: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 32: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출 32: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행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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