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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63 - 지혜의 증거자 160926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63 - 지혜의 증거자 160926

정인순 2016. 9. 26. 13:34

음성                     동영상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3 - 지혜의 증거자 
                                                                                 
                                                         

16,09,2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5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거기에 보면 잠언서 5장 7절에서 9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리고 그 내용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잠 5:7)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잠 5:8)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잠 5:9)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 하나님의 지혜는 악을 유발시켜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의 지혜는 악을 유발시키는데, 즉 악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말이다. 우리가 보통 살아가면서 "악한 자인가? 아닌가?" 라고 하는 판정은, 그것을 누가 내리는가? 자기 자신이 내리게 되는데, 그것을 이번 미국의 시카고 강의에서 '유용성'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손해가 되면 나쁜 사람이다" 라고 분류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방적인 분류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혜가 오게 되면, 태초부터 악한 자로 규정되는 것, 그리고 태초부터 하나님 쪽의 사람이라고 규정되는 것, 그것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파악이 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이 달라요 !!

그러면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다는 것인가? 다르다는 것인가? 다르다는 것인데, 이게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상상함에 있어서, 하지만 막상 하나님 쪽에서 나오는 말씀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전혀 같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하나님마저도 자기 유용성에 끄집어 넣으려는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말이다. 즉 "제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제가 원하는 좋은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만 우리가 다루는 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자가 되고 하나님은 피조물이 되는데, 그렇게 주객이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다.

 

◈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지상에 이렇게 인간이 있다고 하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우리는 말씀을 지키고" 라고 하면 틀렸다는 말이다. 그것은 가짜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 오실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그렇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가 무슨 사건인가? 사람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죽는, 죽음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오셨다는 것은,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인데, 즉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계신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고 하니,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이 십자가를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런데 이러한 "나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 라고 하는 방식을 가지고, 놀랍게도 진짜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을 찾는 우리마저도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것을, 그것을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하나님을 마땅히 자기편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우리 생각에 동의한다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했는데, 그러니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는가? 그만 십자가가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빼고 하나님을 자기 유용성으로만 보았다는 것이다.

 

◈ 복음인가? 유용성인가?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힘이 드십니까?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시면 도와줍니다" 라고 하는데,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전도지가 모두 이런 내용이라는 말이다. 이게 바로 유용성 때문인데, 그렇게 자꾸 진짜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을 찾고, 그런 가짜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그런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라고 규정하고, 그 아들을 성자 예수님이라고 규정하고, 그리고 그런 가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을 성령이라고 규정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복음이라고 여기고, 그런 이익이 되는 사람들이 같이 모인 것을 교회라고 하고, 그리고 그 교회에 다니면 나중에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하지만 2,000년 동안 지옥을 가지고 천국이라고 그렇게 유포를 시켰다는 말이다. 가야할 곳은 천국인데, 그런데 방향은 처음부터 지옥으로 잡아놓고 천국에 간다고 우겨왔다는 것이다.

 

◈ 스톱, 십자가다 !!

그러니 중간에서 누군가가 이것을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는데, 즉 "지금 당신들이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알려줄 때 그 포인트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외친 것인데, 그게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이야기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아하, 우리가 그동안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절이 아닌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만 지옥에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말이다. 

자기 생활에, 자기 가정에, 자기 앞일에 유용성을 노리고, 화려한 자기 미래를 상상하면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는 힘들어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자기의 찬란한 미래를 꿈꾼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목사의 입에서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말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아멘' 소리를 남발하면서, 그런 종교취미생활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가 지난번에 '플라시모' 효과라고 했는데, 위약효과, 즉 가짜 약을 주었는데 마음은 안정이 된다는 말이다. 꿈과 희망을 찾아서, '목적이 이끄는 삶' 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교회에 와서 마음에 안정을 얻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는 빠지고 없다는 말이다.

 

◈ 다시 하면 !!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하겠는데, 아무튼 늦게 오시는 분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데 말이다(ㅋㅋ). 인간들은 자기와 소통이 되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산정을 해놓고, 자기의 시간과 정성을 거기에 모두 퍼붓는다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올 때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십자가를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를 배치했다는 것은 죽음인데, 그런데 이게 그냥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대적이 된다는 표시로서 '십자가 죽음'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앞장세웠다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마치 폭죽과 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불꽃놀이인데 말이다. 폭죽이 밤하늘에 올라갈 때는 멋있는데, "슈융, 펑!' 하면서 터질 때의 그 화려함은 그야말로 장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터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10초나 20초 뒤에 다시 밤하늘을 쳐다보면 어둠의 바탕,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 라는 것인데, 그냥 캄캄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배가 고파서 다시 밤하늘에 폭죽을 쏴 올리는데, 그러면 또 다시 '펑' 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데,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대한 것을 바쳐서 내가 기대한 것을 다시 회수한다" 라는 것인데, 자기가 연출해서 자기가 출연하고, 자기가 주연하고 자기가 조연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스토리를 전개시켜서 끝내고 돌아서면 깊은 허무만 찾아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종교놀이를 참 잘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내세웠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만 그 십자가는 빼버리고, 우리의 꿈과 희망을, 그것을 조기에 만족스럽게 소유하기 위해서, 자기 종교놀이에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상상해서 끄집어 넣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짜 지혜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쳐들어오시는 하나님 !!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쳐들어온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은 우상이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공중에 붕 떠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온다고 하면, 우리의 존재는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 것이냐는 말이다.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십자가의 능력이 와서 닿았다고 하면, 그것을 '성령세례' 라고 하는데 말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완성한 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고, 그것을 적용시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입장이 되는고 하니, 우리에게 죄가 유입되고 쏟아지는데, 그 다음에는 감사와 찬양이 바깥으로 발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간 시스템으로 사용이 되는데, 즉 죄가 들어왔는데 나오기는 의가 나오는 말이다. 일종의 변환기나 트랜스라고 할 수 있는데, 십자가가 위해서 도달하게 되면 그렇게 바꿔치기가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접촉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런 자들을 두고 '영에 속한 사람' 이라고 하는데, 즉 성령을 속했다는 것이다. 성도라고 이야기하고 말이다. 이렇게 보면 성도라는 것은, 성도가 되고자 하는 의도도 전혀 성도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성도를 간택한다는 것이다. "너! 너! 너!"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신다는 말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택정함을 받았다" 라고 하는데,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택함을 받은 성도를 주님께서 새롭게 발생을 시키는데, 새롭게 발생을 시킨다는 말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성도가 되려고 하지 말자 !!

이러한 이야기가 맞다고 하면, "내가 알아서 성도가 되겠다" 라는 것은 당연히 거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가 되지 말자"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성도가 되겠다고 하는 그 의지가 주님이 진짜 성도를 만드시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 의지가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가 성도가 되겠다고 하면 자꾸만 누구를 바라본다는 것인가? 자기가 어느 정도 성도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데, 그러면 그 판정을 누가 내리는가? 자기 자신이 내리는데, "나는 성도가 맞아. 새벽기도시간에 은헤를 받았으니 성도가 맞아" 라고 말이다. 그리고 오후에 누구하고 싸우면, "나는 성도가 아냐" 라고 하고 말이다. 무슨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도 아니고 "성도가 맞아. 성도가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베리 베리 디피커트한, 캘거리의 '퀴즈 1, 2' !!   

이번에 캘거리에서 강의를 하는데도 이런 문제가 나왔는데, 몇 몇 분을 빼놓고는 너무 어렵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분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이 우리 수준을 너무 높게 보아서 수준을 뛰어넘는 강의를 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셨다" 라고 일방적으로 반응을 보였는데, 저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은데 말이다.

그러면 그게 어느 정도 어려운고 하니, 캘거리 강의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지 여러분도 스스로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첫 번째가, "이웃을 위하여 자기 간을 떼내어 준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한 행위이다" 라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옆 사람이 행여 빼앗아 먹을까 싶어서 눈을 흘기면서 귤을 먹는 것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이다" 라는 것이다. 

참 쉬운 내용인데(ㅋㅋ), 이웃을 보고 "몸 관리를 잘 하시고, 건강하세요" 라고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의 간을 떼내어 준 것이 말과 혀로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과, 그리고 귤을 먹는데 있어서, 오늘은 귤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귤을 먹는데 옆 사람이 빼앗아 먹을까 싶어서 얼른 자기 혼자서 먹는 것이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게 이해가 됩니까? 오히려 은근히 화가 나지 싶은데,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말이다. 이게 요한일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게 너무 어렵다고 해서 이 시간에 다시 정리하고 싶은데 말이다.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단 요한일서 3장을 보면, 오늘은 교재보다도 성경을 찾아보면서 하겠는데 말이다. 10절에서 16절을 보자.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인가?

여기 요한일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이미 따로 구분되어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사랑을 하려면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를 사랑해야지 마귀에게 속한 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어렵다고 하면, 정말로 이러한 점이 어렵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성도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 그래서 "저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이기에 사랑을 하면 안 돼. 저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했기에 사랑해야 돼" 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성도 자신이 어떤 부담을 느끼겠는가?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마귀에게 속한 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귀에 속한 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자를 먼저 구분해야하고, 그렇게 해서 마귀에 속한 자는 사랑하면 안 되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를 사랑해야 하는데,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 16절에 보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귀에 속한 자를 두고 형제라고 하지 않는데,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기에 그렇게 형제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판단하고 판정한다는 말인가? 자기가 알아서 판단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나' 라는 것이 마귀에 속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자기부터 마귀에 속했다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에게 속했다고 착각해서 이 요한일서 3장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다고 하면, 그러면 구원을 받겠는가?

 

◈ 어휴, 깜놀이야 !!

구원은 고사하고 나중에 심판을 받을 때 받을 때 깜짝 놀라게 되는데, 이것을 두 글자로 '깜놀'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즉 "저는 형제를 위해서 저의 간까지 내어놓았는데, 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말입니다. 그 정도로 했으면 여기 16절에 나오는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는 조항에,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얼추 비슷하게는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런 저를 구원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라고 우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구원은 니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이 된 사항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는 하나님의 결정된 사항은 받아들이지 않고, 니가 보기에 최고의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을 행함으로서, 마치 너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이 나에게 자꾸만 우기는데, '이래도 이게 사랑이 아닙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심지어 저는 원수도 사랑했는데, 제 아들을 죽인 살인자도 사랑했는데, 그리고 그 사람을 저의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는데, 이 정도로 하면 하나님에게 속한 자의 티가 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오면, 어디에서 많이 듣던 내용이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겠는가? "니 같은, 니가 판단하고 니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 그게 자기의 운명이고 미래라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 때문에 내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나는 절대로 사랑하지 않겠어 !!

그러면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가? 그러니 '사랑하라' 라는 것에는 무엇이 전제가 되는고 하니,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 이미 깔려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출발을 "나는 절대 사랑하지 않겠어" 라는 것에서 해야하는데, 마귀에 속한 자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에 위배가 되니 말이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을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당연히 가룟 유다와 한 편인데, 그리고 예수님을 모독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그들의 아비인 사탄을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님이 섭섭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우리에게는 굉장히 골치 아픈 문제인데, 정(情)으로는 굉장히 좋은 사람인데, 그런데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나 태도가 십자가 복음을 거부할 때, 그러면 그런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것이 당연히 고민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절에 다니는 보살이 자기 집에 계속 좋은 물건을 선물로 준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주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고 덜렁 덜렁 받고 말이다. 그쪽에서는 얼마나 끔찍하게 우리를 업보의 대상으로 삼는지 모르는데, 우리는 그 대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 맛있는 곶감을 먹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이 무슨 개소리인가?" 라고 하면서 관계가 틀어지고 마는데, 그러니 오는 복을 굳이 찰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용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믿음도 없으면서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고맙다는 것이다. 재정을 맡은 집사라면 더 그러한데, 그래서 이 문제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 첫째, 이웃에게 간을 떼 준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한 행위이다 !!

그러면 첫 번째 문제인, 즉 "이웃을 위하여 간을 떼내어 준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한 행위이다" 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 이미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마귀에 속한 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결정이 났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결정이 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무엇을 경유한다고 했는가? 십자가를 경유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원수가 되는데,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요한일서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하는데, 진짜 희생을 당하신 아벨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예수님을 빼고 모든 인간은 가인이 된다는 말이다.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아까 그린 그림을 다시 보겠는데, 우리에게 이렇게 십자가가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오직 십자가로만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것이 티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에 속한 자도, 역시 십자가가 배치되어야만 그 정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 십자가를 수용하는 자만이 !!

이게 어렵다면 쉬운 것부터 하겠는데, 자기가 누구를 보고 마귀에게 속했는지, 하나님에게 속했는지, 그것을 판정하는 것은 무효가 되고,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오직 십자가를 드러낼 때, 그렇게 십자가를 수용하는 자만이 처음부터 예정된, 즉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고 구원을 받은 자로 확정된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은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마귀에게 속한 자를 사랑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사랑하면 안 되는데, 그러니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바로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두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는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점점 드러나는 '나'의 정체 !!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수용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할 일은 무엇인가?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들추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어떻게 생각했는가? 자기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주님이 나타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합치된다고 오해를 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뜻을 먼저 이야기하면, 그게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이웃에게 자기의 간을 떼내어 주면 그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라고 여기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기 뜻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 두 번째로, 눈을 흘기면서 귤을 먹는 것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다 !!

그렇다면 두 번째로 이야기한, 즉 "옆 사람이 행여 빼앗아 먹을까 싶어서 눈을 흘기면서 귤을 먹는 것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때려죽여도 사랑이 될 수 없다" 라고, 그렇게 누가 판정을 내린다는 말인가? 자기의 윤리와 도덕이 그러한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주님이 내리신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했고, 그리고 사랑인 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먼저 판정을 내렸다는 말인가? 자기가 먼저 판정을 내렸는데,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본심이 십자가 앞에서 원수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달라도 너무 달라요 !!

결론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데,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시켜놓고, 그 다음이 무엇인고 하니, "너희가 도대체 어떠한 죄인이기에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먼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모습, 그것이 곧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행위의 다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도의 인생은 그러한 행위를 보여주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특이성' 인데,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이 "십자가을 알아보지 못하겠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십자가만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관점과 인식도 역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라도 너무 다르기에 말이다.

 

◈ SPA! A~A~A~ !!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어떤 간판을 보았는데, 거기에 적힌 문구가 우리나라의 간판과는 그 느낌이 너무 달랐다는 것이다. 그게 음료수 광고였는데, 우리말로 하면 "우리 음료수는 시원하다" 라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미국의 간판은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 "우리 음료수는 시원해,해,해,해!" 라고, 그런 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표현하는 기법이 달라도 너무 다른데, 참 그것이 '스파' 라는 음료수였는데 말이다. 

제 아무리 같은 부모를 둔 형제이고 가족이고 친척이고, 설령 부부라고 하더라도, 성령이 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달라도 너무 "스파, 아아아!" 하다는 것이다(ㅋㅋ).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고 하니, 우리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해서 나도 몰랐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옆 사람이 행여 빼앗아 먹을까 싶어서 눈을 흘기면서 귤을 먹는 것이, 그것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려주어야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설득을 당해서 구원을 받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설교는 설득이 아니기에 !!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을 설득시키려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반칙이고 월권행위라는 것이다. 다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다 까발리고 보여주어서, 정말로 성령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 그것을 확인하고 소개할 뿐이라는 말이다. 구원받을 자를 챙긴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 이외에 그 어떤 인간에도 그러한 책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단 한 명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물론 베드로도 그렇고 말이다.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주님께서 모두 다 하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이다. 만약에 이게 이해가 된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이미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이런 특이성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 존재와 인식 !!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존재가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식은 그 다음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와 인식의 격차인데 말이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 줄을 모르는데, 그런데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특이성이 불거져 나올 때, "아하, 내가 남들에게 밉상이라는 소리는 듣지만 성도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귤을 먹으면서 혼자서 다 먹으려고 눈을 흘기고 하는 것은, 물론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이웃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주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이기주의로 곧 바로 가면 안 되고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오늘도 내가 한 성질을 했구나. 좀 나눠주면 되는데 욕심을 부렸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죄가 발생하게 되고, 그러면서 요한일서 3장 16절에 있는, 즉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는 말씀이 쏟아지게 되고, 그래서 자기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고, 그러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순간, 그런 죄를 자기 의사를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일찌감치 십자가로 용서하시고,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서 정해주신 것에 대해서 찬양과 감사가 흘러나오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루시는, 즉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이웃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 자슥, 겸손하기는 !!

주님이 형제를 사랑하는 방식이 바로 그 방식인데,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임금님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 라고 하니, 구원을 받은 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근호야, 덕분에 비싼 생수를 잘 마셨다 !!

미국에 가면 에비앙 생수가 한 병에 2달러를 하는데, 그래서 저는 아까워서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데, 그런데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와서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준 것이 전혀 아닌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니가 물을 사서 거기에 놓았기 때문이다" 라고 하면서 억지를(?) 부리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사랑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누가 미안해하겠는가? 당사가 미안한데, 그래서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 끝까지 이기주의이고 자기밖에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자식이 겸손을 떨기는, 내가 다 봤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겸손이 아닌데, 자기는 그렇게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야, 너 자신이 이기주의인 것도 알고, 정말로 겸손하구나"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다.

 

◈ 성령의 열매는 죄를 바탕으로 !!

그러니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죄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화평과 그 모든 것이 말이다. 형제우애는 다른 것이 아닌데, "니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죄인이야" 라는 것인데, 그러한 고백은 성도가 아니라면 결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인 너에게 나는 받아서 챙겼지만, 하지만 나는 너에게 줄 것은 없어"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죄인이 가지는 뻔뻔스러움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뻔뻔스러움이야말로 그 이웃을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하면, 그렇게 준 주체를 예수님으로 받겠는가? 자기로 받겠는가? 이게 정말로 어려운데,  만약에 자기 간을 내어주고, 그것을 솔직하게 "이것은 제가 아니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렇게 주님이 자기를 사용하신다면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간을 떼내어 주고 난 다음에, 그 가족들을 보고, "왜 당신들은 정작 가족이면서도 그 사람에게 간을 떼내어 주지 않았는가? 가족이라서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라고 한다면, 그러면서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한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마귀에 속한 자가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 주여, 저는 간을 떼서 준 죄인입니다 !!

바로 이것이 요한일서 3장에 나오는데, 즉 "형제에게 미운 감정이 있다고 하면 이미 살인자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걸려들었는데, 그러니 실컷 간을 떼서 주고는 자기는 어디에 간다는 말인가? 천국에 아닌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무슨 토끼도 아니고 자꾸만 간을 떼주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한데 말이다(ㅋㅋ).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간을 떼주나 우산을 쓰나, 동일한 이웃사랑 !!

아무튼 정말로 진심으로 간을 떼주었다고 하면,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는 것도 역시 감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산이 없으면 비를 맞으니 말이다. 자기가 떼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강제로 떼주게 했다고 하면,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는 것이 바로 주님이 베풀어주신 자기에 대한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우산을 쓰는 것도 이웃에 대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고, 그리고 간을 떼주는 것도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고 하면, 간을 떼서 준 것을 가지고 유난을 떨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입을 다물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간을 떼주고 뭐라고 해야하는고 하니, "주여, 저는 간을 떼준 죄인입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간을 떼주나마나 자기가 죄인인 것은 동일한데, 그러니 "간을 떼서 주기 전까지는 이웃을 미워했는데, 떼서 주고 난 다음부터는 사랑이다" 라고, 그런 결정을 자기가 내린다는 것 자체가 벌써 마귀적이라는 것이다. 평소에 숨을 쉬는 것은 누구 때문인가? 주님이 이웃사랑의 차원에서 숨을 쉬도록 해주셨는데 말이다.

 

◈ 그런데 그것을 구분한다고 하면 !!

그런데 그 사랑은 무시하고 꼭 자기가 나서서 누구를 도와준 것만 가지고 주님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숨을 쉬는 것은 숨쉬기 운동이고 말이다(ㅋㅋ). 하나는 하나님이 다루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결정하고, 어디 그런 게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바로 마귀에 속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티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귀에 속한 자는 어떻게 아는고 하니, 이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들이대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자기 간을 떼서 주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납득이 됩니까?" 라고 말이다. 물론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기적인 행동을 했는데, 그것이 이웃을 자기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라고 해서, 둘 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사랑해줄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 왜 우리는 가룟 유다를 사랑하면 안 되는가?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왜 우리는 가룟 유다를 사랑하면 안 되는가?" 라는 것인데, 여기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2,000년 동안 신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고민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불교가 더 나은데, 불교는 사탄도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러한가? 자신의 대자대비를 드러내기 위해서 뭐라고 하는가? "사탄이여 오라.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고, 성철스님이 1980년대에 그런 법어를 사월초파일에 발표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탄을 사랑하면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도록 도움을 준 가룟 유다를 천국으로 보내라고 하면 안 되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가룟 유다가 없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 공로자를 왜 지옥에 보내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라고 해놓고 일은 다 시키고 말이다. 무슨 그런 것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룟 유다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그렇게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가룟 유다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잠시 요약하면 !!

이제 이해가 되었지 싶은데,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정해놓고, 요한일서를 비롯한 성경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에게서 무엇이 발생하는고 하니, 갑자기 죄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즉 간을 떼서 주고, "내가 했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왜 니가 했어? 내가 했지"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명령을 저에게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명령을 너에게 하는 것은, 너의 선택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까발리기 위함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미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내려오시기 때문에, 십자가 속에 요한일서가 들어있기 때문에, 요한일서로 시작해서 십자가의 취지를 드러내는 용도로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에게 죄가 들어오고, 그러면 우리의 그 어떤 행동도 주님의 이웃사랑을 실행하는 도구라는 게 드러나면서, 여기서 주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껏, 그 어떤 행위라도, 우리가 살아있고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즉 우리의 존재 자체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위가 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주님을 향해서 찬양을 드리고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주님의 예정하심이고, 결정하심의 구체화가 된 행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여보, 이리와. 막 살자 !!

주님은 "형제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주님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신랑을 옆에 두고서, 마누라를 옆에 두고서 주님을 따로 찾지 말라는 것이다. 특이성을 품고 그냥 살아가는 평소의 모습, 그게 바로 주위에서 살아있는 주님의 모습으로 다가서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또 나왔는데, "막 사세요" 라고 말이다. 그냥 그렇게 사시면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깨닫게 해서, 그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만 주님에게 영광이 되도록 성령께서 조치를 취하신다는 것을, 그게 바로 '성령 안에서의 자유' 라는 말이다. 

다시 잠언서로 돌아와서, 교재 175페이지를 보자.

** 지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악의 모습은 지혜를 모욕하고 우스운 것으로 보는데 있습니다. 복음의 적수는 복음에서 얼굴을 돌리는 모든 자들입니다. 반(反)지혜가 쉬지도 않고 울컥울컥하고 토하듯이 솟구쳐 나옵니다.  

 

◈ 십자가가 믿어지지요?

그러니 복음이 등장해야만 이 현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믿으세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잘 알아서 선택해서 믿으세요" 라는 의미가 되는데, 하지만 십자가 복음은 그렇게 자기가 선택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믿는 것은 자기 유용성 때문에 그러한데, 즉 "나는 죄인이니 십자가를 믿고 죄 씻음을 받아서 구원문제를 해결하고, 그 다음부터는 내 마음대로 한 번 열심히 살아보겠다" 라고 하는, 그렇게 이중 플레이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십자가를 믿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그것은 상대방을 주체로 간주해서 요구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믿어지지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주체를 주님 쪽으로 돌려드리는 것인데, 즉 "주님이 믿게 하신 사람이 있지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가 이렇게 십자가를 이야기했는데, 만약에 그게 납득이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 속에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렇게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고 우리는 수용자일 뿐임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설교와 강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러브이즈 먼들 !!

그러니 "이것을 하세요. 저것을 하세요" 라고 하면 안 되는데, 만약에 "예수님은 고난이니 그 고난을 받아들이세요" 라고 하면, 아니 구원을 해준다고 하는데 무엇인들 마다하겠느냐는 말이다. "러브이즈 먼들!" 이란 말이 있는데(ㅋㅋ), 자기에게 유용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믿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으로 감사와 찬양이, 즉 "이것은 저의 일이 아니고, 단지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일의 결과물입니다" 라는 것이 고백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언서 5장 15절에서 18절을 보자.

(잠 5:15)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잠 5:16)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잠 5:17)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잠 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여기 15절에 보면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토라' 라고 하는데, 자기들이 율법을 해석한 자기들의 경전이라는 말이다. 말씀이 마구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여기에 십자가의 의미가 과연 담겨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제가 여러 차례 강조를 하지만, 모든 성경해석은 무엇이 나와야 한다는 말인가? 반드시 십자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말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이 망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만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잃어버린 자 !!

그러니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망해서 해체되는 과정에서 진짜 이스라엘이 눈에 보인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라는 것인데, 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반드시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현재 입장은 주님이 찾지 아니하면 우리는 영원히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그렇게 자기 실존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언제나 이기주의로 돈밖에 모르고 자기 명예와 자기 가치만 꿍치고 있으니, 그러니 잃어버려서 지옥에 가도 전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그렇게 잃어버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엇이 와서 닿았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저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함께 하면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정말이지 십자가 복음을 아는 목사님이라는 말이다. 목사가 아니고 목사님이라는 것이다.

 

◈ 제가 개고, 돼지입니다 !!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유대인들은 무엇인가? 샘물이기에 퍼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데, 즉 "말씀을 퍼주기만 하면 언젠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하지만 이 마태복음 7장 6절은 십자가의 취지가 들어있는데,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명령을 받고 어떻게 하면 되는가? 누가 개이고 누가 돼지인지 판정에 나서는데, 그 판정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자기가 판정에 나서는데, 자기 마음에 들면 개고 아니면 돼지라고 말이다. 참 그게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나 돼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잘해주면 천사고, 그게 아니고 개라고 말이다(ㅋㅋ).

그것은 자기 자신이 개나 돼지라는 것을 전제로 깔지 않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이 마태복음 7장 8절의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만이 개나 돼지가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성도만이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님, 제가 바로 개고 돼지입니다. 저에게는 천국을 주지 않아도, 영생을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이다. 
 
◈ 구원이 아닌,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려고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게 목적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쫓아내고 왜 찾아오시느냐는 말이다.

구원은 우리 좋아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주님 좋아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원도 되지 않을 인간을, 자기의 증인으로 만들어서 자기 품에 품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도 흠모하는데, "너희들을 위해서 주님이 피까지 흘려주셨는데, 우리 천사들은 죽도록 일만 해. 그런데 탕자와 같은 너희들에게는 금가락지도 끼워주고, 정말로 부럽고, 그리고 축하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천사들도 주님을 찬양하는데, 그러면서 성도도 섬긴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니 누가 옥문을 열어주는가? 옥녀인가? 아닌데, 옥녀는 지금 쫓겨서 도망가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물론 왕을 만나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면 누가 옥문을 여는가? 천사가 열어준다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누가 지진을 일으켰는가? 그곳이 양산단층이라서 그러한가? 그게 아니라 천사가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는데 엄청난 태풍이 분다는 것이다. 그때 누가 와서 "바울아, 너는 반드시 로마로 가야하니, 걱정하지 말라" 라고 했는가? 천사가 와서 그렇게 섬겼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일은 주님께서 혼자서 다 벌리시고 다 알아서 처리를 하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무엇만 하면 되는가? "모든 일을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사도바울처럼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교재 176페이지를 보자.

** 아내는 여호와께서 주신 여자이기에 지혜의 여인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잠 5:19)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여기서 아내를 바라볼 때, "암사슴과 같고 암노루와 같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말이다. 조금 전에 살펴본 요한일서의 말씀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진다" 라고 하면 되는데, 즉 "무엇을 하든 말씀완성이다" 라고 하는, 그 한마디로 끝난다는 것이다. 

 

◈ '여보, 사랑해' 라는 헛소리, 그러나 !!

그런데 이 잠언서 5장 19절의 경우에는, 제가 여러분의 수준을 캘거리보다 더 높다고 여기고, 그러면 거기에 맞추어서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데 말이다(ㅋㅋ). 자기 혼자 있으면 "주님께서 다루신다" 라고 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그런데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다고 하면, 그렇게 두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떨어져있는 개별자라고 하면 저 여자도 역시 개별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 라는 단독자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가지고 저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항상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하지만, 그게 헛소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자가 뭐라고 하는가? "당신이 나를 사랑해줘서 참 고마워" 라고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여자의 헛소리인데, 그러니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만이 아는, 그렇게 독자적으로 해서 자기에게로 회수되는, 자기 가치를 빛낼 이기주의적 욕망에 의해서 말을 뱉어내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여자는 어떠한가?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어서 정말 고마워" 라고 하면서, 앞으로 자기에게 잘해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자기의 욕망을 다시 회수하는 쪽으로 반응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둘 다 이기주의적 의도를 가지고 주고 받으니 이게 제대로 된 만남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녀는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같고 암노루와 같다. 그러니 항상 그 사랑을 연모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게 연결이 되지 않는데 연결이 되게 함으로서 부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하나가 아닌데, 숫자로 하면 '2' 라는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뻔히 자기 주장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은 하나가 되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무엇이 투입되는고 하니, 지혜를 집어넣게 되는데, 그렇게 지혜가 들어가면 단절된 것을 새롭게 완성한다는 것이다. 즉 지혜로 인해서 단절에서 완성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 햄버~거, 미쿡에 갔다왔어요 !!

단절에서 완성으로 나가면 지혜인데, 그러면 잠언서의 지혜가 신약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숨겨진 지혜가 바로 십자가인데, 즉 십자가는 구원받은 자만이 아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이다. 그렇게 지혜가 십자가로 내려오게 되면 양쪽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십자가가 중간에 끼어들면 남편과 아내가 무엇이 되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둘 다 죄인이라고 그렇게 느끼는 경우인데, 그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 달리 부부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헛소리를 25년 동안이나 하고 있었어" 라고 하면, 아내는 "괜찮아요. 나도 그렇게 헛소리를 했어요" 라고 할 때, 부부는 둘 다 주님 앞에서 신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마치 햄버거의 햄처럼 가운데 끼워 넣고는, 양쪽에서 서로 빵이 되어서 하나의 햄버거가 된다는 것이다. "햄버~거, 얼마 전에 미쿡에 갔다왔어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ㅋㅋ).

그렇게 주님께서 지혜를 주니 둘이 하나의 부부가 되는데, 그런데 이것을 남편이, 그리고 아내가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는데, 그것을 요구하면 아내 위주의 햄버거가 되기 때문에,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 햄버거라는 것이다. 물론 남편이 요구해도 마찬가지인데, 남편 햄버거가 되면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얼른 헤어지세요 !!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서로가 독자적인 것을 고수하면서, 그러면서 십자가를 증거하면서, 그렇게 못난 죄인들이 헤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복음을 모르는 배우자가 "우리 그만 헤어져" 라고 하면, 망설이지 말고 얼른 그렇게 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쪽에서 헤어지자고 해도 자기가 버틴다는 것은, 그것은 가정을 자기의 가치와 자존심을 위한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의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쿠, 혼자서 살면 자식은 어떻게 하고, 생활비는 어떻게 하고, 그리고 동창생들에게는 이혼녀라는 소리를 들으면 얼굴도 들지 못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지?" 라고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모르는 자와는 헤어지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 가서 "당신, 복음을 아나? 모르지? 그러면 우리 헤어지자" 라고 하지 말고(ㅋㅋ), 주님께서 그렇게 다루신다는 것이다. 영생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주님이 그렇게 몰아세우는데, 주님이 그렇게 카페트를 깔아서 그 위를 걸어가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일이 아니었으면 복음을 모를 뻔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뭔가 소급해서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을 몰랐으면 끝까지 자기 가정이라고 여기고는, 자기 명예를 위해서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잠언서에 보면 그 뒤에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러니 잠언서에서 여인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지혜가 흘러나오는 파이프로서, 그렇게 여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자가 지혜의 파이프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처럼 여인은 남자를 잘 되게 하기 위한 배필로 배치가 된 겁니다. 잠언서 마지막에 보면, 여자가 밤새도록 길쌈을 하고 열심히 가족을 돌보고 하는 것이, 결국은 남편으로 하여금 성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대를 받게 한다는 겁니다. 이는 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지혜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귀를 받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들이 여자를 자기 사람으로 삼으로 안 되는데,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겁니다. 

(잠 31:22)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잠 31:23)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되며
(잠 31:24)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고에게 맡기며
(잠 31:25)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잠 31:26)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잠 31:27)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잠 31:28)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잠 31: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1)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 잠언서와 부부관계 !!

이렇게 잠언서 마지막을 보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지혜가 지혜로서 가장 지혜답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부부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부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부부라는 것은 인간대 인간의 만남이 아니라, 지혜가 지혜로 드러나기 위해서 주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둘 다 죄인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죄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여기까지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결론을 지었다고 하면, 그러면 죄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당신은 나와 결혼을 해야해" 라는 생각이 남편에게 늘 있어왔다는 것을, 그것을 아내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다시 남편은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하는 죄를 늘 일깨우게 된다는 것이다. 

"니는 나에게 밥이나 해주고 빨래나 해주면, 그게 전부야. 복음으로 잔소리를 할 생각은 하지마. 그렇지 않아도 니 잔소리에 머리털이 다 서는데, 복음을 가지고도 잔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어휴, 지겹다 지겨워. 그러니 니는 내가 돈을 벌어다주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일체 간섭하지 말고, 무조건 나를 섬겨" 라고 하는, 그러니 남자로서는 제일 편안한 상황이라고 하는 죄를 새삼스럽게 깨우치게 하는, 그런 용도로서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 복음과 잔소리 !!

남편이 아내에게서 제일 지겨워하는 것이 바로 잔소리인데, 그래서 "제발 좀 고마해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자는 "내가 싫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내 이야기가 듣기 싫으면 다른 여자와 살지 왜? 지금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데, 내가 발목을 잡았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잔소리가 따발총을 쏘듯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는 골프채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는데, 그러면 여자는 나가는 남자의 등을 향해서 "골프를 치고 싶어서 환장해서 그랬지" 라고 하면 끝까지 마지막 펀치를 날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을 통해서 남자 자신도 몰랐던,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죄가 드러나는데, 그러면 "주여, 마누라의 잔소리가 없었으면 또 죄를 놓칠 뻔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 20대에 믿는 예수, 40대에 믿는 예수 !!

20대에 예수를 믿는 사람과 40대나 50대에 믿는 사람이 다른 점이 무엇인고 하니, 20대에는 십자가의 죄가 얕은데, 마누라의 잔소리를 많이 듣지 않아서 말이다. 그때는 윤리 도덕적으로 죄인데, 그런데 점점 살아가면서 그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조명기구가 멀리서 비추게 되면 그 그림자가 짧은데, 그런데 가까이에서 비추면 그림자가 어떻게 되는가? 넓고 길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도의 인생은 20대에 알던 죄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서 점점 더 죄의 폭이 넓어지고 길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30대의 신혼부부가 교회에 와서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 복음도 좋지만,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은 가는 것이고, 지금 당장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문제로 기도하려고 교회에 왔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어떻게 하든지 전세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야말로 좁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80이 넘은 은퇴한 장로님이 듣고 뭐라고 하는가? "신혼부부야, 전세에 살던 월세에 살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만약 있다고 하면 말이다. 그 장로님은 복음으로 80년을 살다보니,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도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30대에게 80대의 지혜를 강요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살아갈 날이 남아있기에 말이다. 그러니 주께서 또 그렇게 알아서 다루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점점 죄의 폭이 넓어지면 질수록 사랑의 깊이와 폭이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20대에 결사적으로 기도했던 그 기도내용이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 "참으로 쓸데없는 것으로 기도를 했구나. 괜히 내 무릎만 아팠네. 기도원의 소나무만 고생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죄를 더욱 더 깊이 있게 아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죄의 깊이도 알아줄 테니 제가 원하는 것도 주세요" 라고, 마치 갓바위에 가서 비는 식으로 말이다. 아닌 척을 하면서 은근히 자기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했다는 것이, 그런 자기 면면이 살아가면 들추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30대에 "나는 죄인입니다" 이라고 하는 의식과, 40대에 고백하는 의식이 서로 다른데, 하지만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30대가 40대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31살에 죽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죽더라도 주님이 다루시게 되면 그 죽는 순간에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것이 자기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이만큼 살게 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그게 제대로 된 제대날짜인데, 그러니 그 죽은 순간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데, 30대에 죽었다고 해서 철없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성도라고 한다면 80대의 노인도 모르는 더 깊은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교회에 80대의 영감보다 더 지혜로운 아이가 있는데, 나중에 40대가 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데 말이다(ㅋㅋ).

 

◈ 왼손으로 베개, 오른손으로는 품에 !!

이제 교재 177페이지를 보겠는데, 이것으로 부부관계는 마치고 말이다. 참 마치기 이전에 이번에 캘거리에서 마지막으로 한 강의에서 '아가서'를 인용했는데, 요한일서가 소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에, 아가서 2장 6절에 소속에 대해서 적절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말이다.

(아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이것을 상황극으로 해보면, 왼손으로 이렇게 베개를 하고 오른손으로 안아 주는데, 그러니 오른손이 소속인데, 오른손이 보호를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자기 품안에 데리고 오는 것인데,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말이다. "너의 자리는, 나의 품안이 너의 영원한 자리이다" 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가서 마지막에 보면, "심지어 내 품안에서 죽는다고 해도 너는 죽지 않는데, 그게 바로 니가 희망했던 영생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품안에 그것이 마련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천국에 가서 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사랑을 성령을 통해서 받음으로서, 천국에 가기 이전부터 이미 천국에 간 사람으로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랑으로 살게 되는 삶 !!

그렇다면 성경말씀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가? 그게 아니라, 누누이 강조를 하지만 성경은 개인의 구원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구원의 본질을 위해서 아직도 우리가 주님이 살려주시는 시간 내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즉 자기 생존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인해서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편이 평소에 아무리 구타를 하고 괴롭혀도, 남편의 입에서 "복음 때문에 너하고는 더 이상 살지를 못하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헤어지자" 라는 소리가 나오지 이전까지는,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이혼할 핑계가 결코 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간단한데, 남자가 술을 마시고는 "하늘같은 남자에게 어디 감히 잔소리를 해댄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때리려고 하면, 그래서 "십자가를 믿어라. 이 마귀야!" 라고 하면, 남자가 "니가 나에게 자꾸만 십자가를 가지고 잔소리를 할거야?" 라고 나오는 순간, 그러면 그 장면을 스마트 폰으로 찍어서 주님에게 가지고 가면, 그게 이혼에 합당한 소송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이다(ㅋㅋ).

그러니 복음이 아닌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편을 선택했고, 그렇게 선택한 남편을 통해서 남편의 죄가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자기가 알아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그게 바로 악마적인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을 주님이 들추어주시는데, 진작 죽어야 하는데 그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반드시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게 자기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소원이고, 그것이 자기에게 담겨있는데, 그 자리는 자기가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라 신랑이 되시는 주님께서, 왼손으로는 베개를 하고, 오른손으로는 자기 품에 품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금 남편에게 요구하면 안 되는데, 5분도 되지 않아서 팔에 쥐가 나면서, "머리 안 치우나? 머리만 커서, 이게 뭐꼬?" 라고 하면서 화를 낸다는 것이다(ㅋㅋ).

이제 교재 177페이지를 살펴보자.

** 개미를 보면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부지런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부지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적인 노림수가 있는 경우에만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게으름을 피울 수 없도록 태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 '부지런함'에 대해서 !!

여기서는 '부지런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본능적으로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연세계가 그렇게 다 부지런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개미가 들풀이 부지런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부지런함을 떤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부지런함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 주님의 부지런함으로 인해서 그야말로 게을러터진 우리가 고맙게도 늘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또 감사할 것이 있는데, 그게 잠언서 6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여기서 잠언서 6장 10절에서 14절을 보자.

(잠 6:10)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잠 6: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 6:12)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
(잠 6:13)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하며
(잠 6:14)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 야, 딱 내 모습이네 !!

이것이 누구 이야기인가?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말이다. 잠언서를 그렇게 보아야 하는데, 좋은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고, 좋지 않은 것은 모두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게 되는데, 그 자체가 말씀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곧 움직이는 잠언서 6장 10절에서 14절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저는 이런 인간입니다. 틈만 나면 드러누우려는 게으른 놈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TV를 봐도 처음에는 반듯히 누워서 보는데, 조금만 있으면 비스듬하게 폼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리모컨도 손이 아닌 발가락으로 누르고 있다는 말이다(ㅋㅋ). 이것이 곧 아담의 본성인데, 이런 아담의 본성을 잠언서 6장 10절에서 14절 말씀이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이 화를 낼 때는 누가 주님을 욕한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털끝이라고 하나 건드리면 그만 화를 낸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속한 것을 건드리면 화를 낸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본성은 무엇인고 하니, 어디에 자기가 있는고 하니, 자기 소유 뒤에 자기가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의 것을 건드리면 화를 내겠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 안에 우리가 있는데, 그렇게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한 평생 끌어모은 것 안에서 자기가 발견되기를 원하는데, 여기에 토를 달거나 이의를 걸면 모멸감을 느끼면서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어서 당회를 열어라 !!

그러니 십자가를 앞장세우신 예수님이 무엇을 공격했겠는가? 우리 자신을 공격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야말로 꽉 쥐고 있는 이 소유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해야하는데, 즉 "여러분이 보시기에 이 부동산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하지만 이런 것은 천국에 가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처음 교회에 와서 교회에 헌금도 하지 않은 사람은 "목사님이 참으로 복음적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누가 화를 내겠는가? 집을 담보로 빌려서 건축헌금을 한 원로장로를 비롯해서, 부흥사에게 속아서 돈을 바친 인간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저 목사를 내쫓아야 한다. 그러니 당회를 열어라" 라고 하면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교회에 왔으면 열심히 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면 되는데, 당신이 뭐라고 우리가 이렇게 재산을 바쳐서 헌금한 이 부동산을 건드리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건드린다는 말이다.

 

◈ 아이비리그도 소용이 없습니다 !!

이번에 미국에 강의를 하면서도 여지없이 그 소유를 건드렸는데,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분들 가운데 미국의 '아이비리그' 라고, "콜롬비아, 브라운, 예일, 하버드, MIT, 프린스톤", 그렇게 미국에서 유명한 대학인데, 서울대학은 거기에 비교도 안 되고 말이다.

거기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런 대학에 다니는 자녀가 있어도, 그게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니, 그런 자식에 대해서 너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다들 아멘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속은 좀 쓰리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왜 내 자식을 건드립니까? 그냥 십자가만 전하면 되는데, 왜 내 자식을 건드립니까?" 라고 하신다면, 하지만 십자가를 전하는 경로가 바로 이 경로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의 멱살을 잡고 항의할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만 십자가가 아니라, 기적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그 모든 것이 다 십자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적을 원하는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라고 하셨는데, 즉 "나는 죽는데 너희들은 살려고 하지? 그러니 너희들은 개돼지다" 라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복음적인 말씀인지 모르는데, 예수님을 죽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붙들고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 마지막으로 욥기를 !!

이제 끝으로 욥의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는데, 하나님과 마귀의 대화는 바로 욥의 소유 문제였다는 것이다. 욥이 가지고 있는 건강문제, 그리고 신앙이 좋다고 하는 명예, 또한 자식과 재산, 과연 그것을 벗길 때도 욥이 믿겠느냐고 하는, 즉 "욥은 마치 양파껍질과 같은데, 그것을 벗기면 아무 것도 없다" 라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게 모든 인간에게도 다 해당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게 우리 이야기인데, 그러니 지금 사탄이 하나님과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 인간을 다 벗기면 주님을 배신할 겁니다. 자기 소유를 양파껍질처럼 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게 아니다. 욥 안에 내가 심어놓은 복음이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욥의 인생은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것인데, 어디까지 말인가? 주님이 심어놓은 것이 나올 때까지라는 말이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거기에서 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욥은 무엇을 보고 주님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욥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욥은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주님의 그 고난받음 자체를 통해서, 자기가 고난을 왜 받는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제가 한 때 건강했습니다 !!

그러면 무엇인가? "주님이 고난을 주시면 고난을 받고, 건강을 주시면 내 것이 아니고, 자식을 주어도 내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라고, 그래서 제가 한 때 건강했고, 제가 한 때 자식이 있었고 재산이 있었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하라고 욥은 있는 것인데, 그래서 욥의 입에서 그런 고백들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소위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정보를 끌어 모았지만 양파껍질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양파껍질 기능밖에 할 수 없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마귀에 속하고, 욥은 주님에게 속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욥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에 속한 친구들이 구원을 받듯이, 진작에 마귀에 속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미 창세 전부터 이미 택함을 받은 자라는 것을 소급해서 이렇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립니다. 오늘도 들었지만 또 잊게 될 것인데,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존재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록 우리의 인식은 왔다갔다하더라도 우리의 확고한 존재성은, 우리가 말씀 속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관계를 통해서 십자가와 연관해서 드러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