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 50 / 예수님 이야기 / 16100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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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명직 가락-요한복음11장50절(예수님 이야기) 161004a-이 근호 목사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0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11장 50절. 그런데 사실은 우리 47절부터 한번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을 살려둬선 안된다고 하는 거예요. 참 이상하죠?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베풀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을 포섭을 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어디에서 차이가 나느냐 하면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의 견해와 유대인들의 견해가 달라요.
유대인들의 견해는 뭐냐 하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법으로 율법을 본 겁니다. “우리가 지킬 수 있다.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법을 줬었다.” 특히 율법에 보면 명령어에요. 명령어. 지시와 명령이잖아요. 누가 누구한테 지시하고 명령할 때는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시하고 명령한다는 것이 우리의 선입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뭐냐 하면은 모세의 율법은 너희들이 율법대로 심판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율법을 줬다고 이야기 합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그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뭐라 하면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왜 그러냐 하면 율법을 주게 되면 반드시 행하려는 의지가 거기에 마중을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부모도 그렇잖아요. 부모가 자식한테 일시키면 대부분 행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행하게 되게 되면 열심히 해봐라 쪽으로 행하는 게 아니고, 만약에 제대로 지시한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는 처벌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처벌을 밑에, 밑창에 깔고 주께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네가 못 지키는 경우에는 너는 각오해라. 각오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요. 그 당시 유대인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구요. 그 당시 유대인의 그것이 어떤 동질성을 이루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구약 이스라엘과 똑같은, 같은 평지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평지.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만들어진 게 언제이지요? 출애굽 때죠? 출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어떤 나라가 만들어지는데, 이스라엘이 만들어 집니다. 이스라엘을 만든 나라가 어떤 어떤 우여곡절을 다 겪고, 어떻게 신약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 유대 나라가 존속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이 시기가 뭐냐 하면 이 시기가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에. 따라서 이 이스라엘에 대한 총 정리를 어디서 하느냐.
그 당시에 유대민족, 이스라엘과 동족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때 다운 면모를 주께서는 말씀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사사설교와 같은 경우에도 역시 하나의 율법인데요. 율법인데,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 죄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 라고 해서. 지금껏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날 고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너희가 어떤 식으로 이해했기에, 어떤 식으로 잘못 이해했기에..”
망했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종합해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로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러한 예수님의 전략인데요. 예수님의 작전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장 후반부터 3장까지 이렇게 이야기 하죠. 율법으로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율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적용되는데, 율법을 보통 사람에게 줘버리면, 율법으로 의롭다 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율법을, 그럼 사람에게 율법을 줬다? 그러면 나머지 다른 쪽은 누구에게 줬느냐? 다른 쪽은 예수님 본인이, 율법을 본인이 수용해 버립니다. 수용하고, 그것을 어디서 이루느냐 하면은 바로 그 이웃사랑을,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버립니다. 죽음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서 그걸 다 이루십니다. 그것을 저는 인터셉트라고 하는데 주신 율법을 예수님이 중간에 인터셉트, 가로채기 해가지고 자신에게로 물줄기를 돌려버리죠.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을 과연 다 이루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실패했는지 그 여부는 예수님이 율법대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판정이 나요. 예수님이 그냥 죽어서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있으면 죄 값으로 죽은 게 되거든요. 죄 값으로 위반해서 죽은 게 되는 저주, 율법 어기면 죄입니다. 말을 좀 쉽게 합시다. 사람이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사람이 죽는 이유는 본인이 몰라요.
모든 사람 중에서 자기가 죽는 이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원형적으로 원천적으로 주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죽는 이유를 살핍니다. 그러니까 쉽게 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율법을 줬다는 말은 “네가 이거 믿으면 죽음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차피 죽어가는 거 죽는 이유나 알아라.” 이 말이에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살아보려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거는 주님의 의도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이 교회들이.
사도의 권면, 명령도 마찬가지고 성경 말씀은 너보고 뭘 해보라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죽어가는 현상 자체가 이미 확정적이라는 겁니다. 이게 돌이킬 수 없어요. 이게 그 이야기가 어떻게 돼요? 깔끔하잖아요. 깔끔하지요? 제가 얼마 전에 7월 달에 드라마를 보다가, 띄엄띄엄 보다가 9월 달에 미국 간다고 못 본, 마무리 못 지은 드라마가 있어요. ‘더블유’라는 드라마였어요.
MBC에서 했던 드라마인데 그 ‘더블유’라는 드라마가 내용이 뭐냐 하면은 만화 속에 주인공이 갇혔어요. 만화 속에. 이 만화 속에 갇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만화 속에 있는 본인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알아서 미래는 내가 결정해서, 내가 선택해서, 나의 행동에 따라서 내 앞길이 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자기가 만화 속에 갇힌 것도 모르고. 나의 미래는 지금 나의 어떤 결정에 따라서 내 하기 나름이다. 이 생각 하겠죠?
그러나 작가의 입장에서는, 또 그 드라마의 만화 안에 있는 인물이 있고 또 만화를 그려내는 만화 밖의 또 인물들이 있어요. 시청자들은 그 둘 다 다 보지만. 만화 밖의 인물은 뭐냐 하면은 “너는 만화 속에 갇혀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만화 속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만화라는 것은 종이잖아요. 종이니까 이것은 몇 차원이에요? 2차원이지요. 2차원. 표면에, 표면 밖에 나오면 3차원이 되는데, 입체가 되는데, 묶여 있잖아요.
묶여 있으니까 일종의, 동물로 말하면 이건 뭐다? 이것이 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가자미.’ 이 가자미가 돼. 가자미처럼 납작하게 돼. 쥐포처럼. 형태는 코, 눈이 있는데 이것을 위에서 프레스, 압력을 가하니까 납작하게 되잖아요. 모든 인간은 죽음에 의해서 그냥 죽음이라는 그런 망하는 것 속에서, 죽는 이유도 그 안에서, 자기는 바깥의 벗어난 외곽의 시선을 갖지 못하니까. 관찰자가 되지 못하니까.
만화를 그린 작가는 알잖아요. 그 작가는 주님이 작가고, 그 만들어진 피조 세계의 그렇게 묶여있으니, 갇혀있는 꼴이 되니까, 자기는 거기서, 바깥세계의 안목이 없어서, 거기에다가 율법을 주니, ‘아! 율법을 지키면 복 받은 모양이다.’ 라고 오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오해에요. 네가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게 전부다 다 오해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그런 오해를 줬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거예요. 현재 눈에 띄는 서울 시내 시민들 모든 인간은 뭐, 원 총장인지, 반 총장인지 모든 사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력자든지 국회의원 모든 인간들은, 종교인들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본인을 볼 때에 오해의 안목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이걸 오해가 아닌 제대로 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의 안목밖에 없어요.
그 안목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게 되면 비로소 알지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오해한 것은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고, 이런 관계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자살하고 자기가 도망칠 때 비로소 성령을 받고 알게 된 것은 처음부터 주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만화책에 우리가 갇혀 있어서 구원 받는 사실을 알게 된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은 처음부터 행하기도 전에 야곱은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 있고 에서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예수가 아니고 에서. 에서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미움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어제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하갈과 이스마엘은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주인, 못된 여자 주인을 만나서, 누구냐 하면은 사라가 아니고 ‘사래’ 아주 못된 사래.
사래라는 여자를 만나가지고 이건 뭐.. 예. 결국 추방되고 저주받죠. 그런데 얼마나 가슴 아팠으면 통곡, 대성통곡 하면서 웁니다. 방성대곡 하면서 울어요. 쫓겨나가지고. 왜냐하면 제가 어제 강의 했지만 그 이스마엘 그게 아버지가 누굽니까?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잖아요? 양아버지입니까, 그것도? 예? 아니 진짜 아버지. 진짜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으면, 자고로 남자라면 책임져야죠. 예?
저 마누라가 잔소리 한다고 그걸. 자기가 낳은 자식하고 그 엄마를 그렇게 내쫓아버리면 굶어 죽으라는 소리와 똑같잖아요. 실제로 그, 얼마나 자식이 물이 없어 가지고 굶어 죽어가지고 대성통곡하면서 울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그 모자지간이 지옥가요. 그리고 매몰차게 내쫓았던 질투의 화신 공효진 질투의 화신. 질투 했던 그 사래는 이름도 ‘사라’로 바뀌면서 천국 갑니다. 이게 뭐에요? 이게 뭡니까?
뭐냐 하면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방식이 아니고 내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오는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노력과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은 전부다 헛수고입니다. 다 헛수고에요.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구 강의하면서 제발 좀 사고방식 좀 뜯어고쳐. 좀 바꿔라. 언제 바뀔 건데? 제발 좀 주님의 구원 방식으로 좀 바뀌어 주시옵소서! 제발! 네?
이거 하나 하나 좀 하면 의미 있겠지? 의미 없어요. 의미 없다 구요! 우리가 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희생과 선교와 봉사, 그것 참! 헌금이고 다 의미 없어요. 사고방식부터 가 이게 바뀌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하면서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강의하면서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아까 가자미 이야기는 했지만, 주님이 개입해 버리면 우리의 이야기는 스탑! 멈춰야 돼요. 우리의, 우리 이야기로서 우리 인생은 멈춰야 돼요.
주님이 개입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이 생기게 되느냐? 소급해서 누구의 이야기를 하게 되느냐? 이게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원형을 몰라요. 우리는 원형을 모르고 나 자신이 나에게 유일한 원형이라 생각을 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원형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부속품, 하나의 일부로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에 태어난 거예요. 그거 저, 명태알을 뭐라고 하죠? 명란이라고 하죠. 창란은 뭡니까? 하여튼 그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명란이라 합시다.
명태알 하나하나는 자기는 독자적인 존재라고 인식할 거예요. 알 하나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는데, 명태 입장에서는 여러 수 만개 알 중에 그냥 알 하나뿐이죠. 그 알이 명태 안에 들어옴으로써 전체 명태를 이루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알맹이로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갈 뿐인데, 우리는, 알맹이로 태어난 우리가 마치 전부인 것처럼 세상의 현실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여기서 주님이 개입해 버리면 “멈춰라!” 하는 것처럼 주께서 갑자기 개입하면 멈추어지면서 멈춰진 동시에 그게 뭐가 되냐 하면은 소급해서 전부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어릴 때 뭐, 여고시절, 사진 찍은 거, 전부다 예. 춤추고 노래 부른 게, 모든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춤 춰야 되고, 노래 부르는 이야기로 소급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잘 모르는데, 구약 때부터 “멈춰라!”하는 소리와 함께 집어 들어온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누구냐 하면은 선지자들이었어요. 선지자 이전에 구체적으로 그것을 내걸어 보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것을 나실인 이라고 합니다. ‘나실인’ 나실인을 기억할 때는 이렇게 기억 하면 돼요. 나실제 괴로움~ 이렇게 기억하시면 돼요. 나실인. ‘바친 자’, ‘주 앞에 바친 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이스라엘 속에 주님의 속성을 품고 도로 주님 앞에 회수 당하는 자’ 처음부터 이거는 자기 인생이, 시작부터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의 속성으로서 점철된, 연결된, 그렇게 그 인생이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의 특징은 뭐냐? 다른 사람보다 특이해요. 특이성에 주목해야 돼요. 그 특이성을 다른 말로 하면 ‘경계’ 또는 ‘경계선’ 전에도 이야기 했습니다. 전에 민수기서에서 아니 출애굽기서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경계선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자기만의 폭과 면적이 없어요. 경계선이라는 특징은. 주름자체가 몇 평이냐 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저 아파트의 창틀이 몇 평이냐 창틀이 몇 평이냐는 말은 안 해요. 아파트가 몇 평이지. 창틀은 뭐냐? 아파트와 바깥 영역과의 그 경계선이 창틀이잖아요!
창틀이 몇 평이 아니고 창틀 안에 몇 평이 되냐는 거잖아요. 창틀 자체는 그냥 경계선입니다. 경계. 그런데 경계선인데 그 경계선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양쪽 다 본다는 거예요. 아파트 바깥도 거기 보이고 안쪽도, 양쪽 다 보는, 가자미 눈 같이 양쪽 다 보는, 그런 입장이 바로 나실인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나실인이 등장했을 때는 “저 사람이 우리 고향 사람 맞지? 그런데 저 인간 왜 저렇게 살아?”
“왜?” “아니 포도주도 안마신데. 그리고 머리는, 지가 뭐 지가 여자도 아닌데 머리가 왜 저리 깍지를 않지?” “세상에 장례식에 참석도 안한데. 자기 아버지 죽었는데도, 자기 아버지 시체도 더럽다고 안 만진데.” 죽음, 죽음을 멀리한다는 의미보다도 죽음에 대해서 죽음 안에서 죽음을 보는 게 아니고, 죽음 안에서 죽음을 보는 것은 우리들이죠.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에 대해서 어설프게 논하는 우리들.
죽음을 죽음이 바깥에서 벗어난 제3의 객관적 안목에서 죽음을 다시 보는 안목이 나실인의 인생의 속성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거예요. “네가 죽을 때 죽는 이유를 모르지? 나는 알거든 뭐, 알려줘? 알려줘? 알려줄게. 아나 먹어라. 율법.” 율법이 온 것은 뭐다? 우리가 “이야! 진작 죽어야 마땅하군요!” 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온 것은.
십계명을 준 것은, “이야! 우리가 그냥 내가 숨 쉬고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십계명이라는 얼기설기의 그물망. 계명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라는, 계명의 계명됨을 위하여. 계명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그 거룩함과 선함과 그 의로움과 엄중함을 위해서, 우리는 존재해야 되는데 그게 위험하니까, 계명을 계명대로 높이지를 못 할 경우에는 죽어 마땅하다.”는 그런 공식에 의해서 죽어가는 겁니다. 죽어가는 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되는데 따 먹었잖아요. 그럼 선악과 자리에서 계속해서 뭐가 주어지냐? 주님의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왜 따먹었어? 왜 따먹었어? 왜 따먹었어?” 자꾸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따먹었냐고. 그럼 우리는 뭡니까. “구경도 못했어. 왜 저보고 닦달내십니까? 저 안 따먹었어요! 저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빼는 거예요. 그런 걸 내뺄 때, 내빼지 못하도록,
“아! 네가 참, 나중에 태어났지! 너 아담 아니지~ 내가 착각했어.” 이게 아니라, 내빼지 못하기 위해서 계명으로 엮어 버리는 거예요. 계명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은 “네가 나중에 태어나더라도 계명의 그물망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계명의 저촉을 받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천년만년 흘러도 동일한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동일한 입장. 이세상은 말씀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계명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뜻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으로 엮어져 있다. 같은 말입니다. 이거 녹취 누가 합니까? 이미아 씨가 녹취합니까? 누가하죠? 방금 이야기 한 거 너무 미안하다. 너무 빨리 이야기해서. 랩을 너무 빨리해서 미안하다. 강의할 때 녹취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 세상의 이 모든 것은 천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뭐냐 하면은 내가 갈 수 없는 천국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돼요. 마귀는 천국을 뭐라고 소개 하는 줄 알아요? 내가 갈 수 있는 천국으로 소개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자! 마귀가 소개하는 천국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그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참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성경책을 가지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들이댑니다.
“영생의 나라가 여기 있으니까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자, 뭐가 누락되어 있습니까? 영생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 목사가 알려주지 않고 있죠?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아담을 어떻게 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지요? 쫓아내고, 쫓아내놓고, 흑흑 울면서 “그래도 쫓아냈지만 네가 알아서 기어 오너라. 내가 옆에다가 이렇게 샛길을 만들어 줬으니.”
이렇게 됐습니까? 아니면 철통같이, 철통같이 못 오도록 막아 놨습니까? 예, 완전히 이거는 용역도 그런 용역이 없지요? 불수레든 천사가 그 에덴의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가 술 먹고 화가 나가지고 “너 같은 자식은 내가 용납 못하겠다. 나가라! 당장 짐 싸가지고 나가!” 아버지가 아무리 고함질러도, 엄마는 맨발로 나와 가지고,
“아이고! 야야, 아빠가, 네 아버지가 지금 화나서, 술 먹고 화나서 하는 거 알지? 조금 피해 있거라. 그래. 피해 있으면 내가 나중에 집에서 쌀가마 들고 가지고 너한테 가서 줄게.” 이게 엄마 마음입니다. 한쪽은, 아버지는 영이 있어가지고 내보내놓고 엄마는 뒷 곳에 가서 딱 떠 가 줘가지고 “다시는 안하겠다고 사과하고 오너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또 누가 알아요? 아버지가 또 안다고.
“당신 방금 저, 저, 저, 그 자식도 아닌 거에 쌀 퍼줬지?” “아이고 내가 언제?” “한번 걸리면 내 손에 죽는다.” 옛날 60년대 가부장제 모습입니다. 요새, 요새는 그런 거 없지요. 요새는 잘못보이면 쫓겨나는 수가 있습니다. 요새는 그런 거 없지만. 옛날엔, 아! 옛날이여. 옛날엔 그랬죠. 하나님은 그런 게 없습니다. 쫓아냈으면 못 들어갑니다. 영원히 못 들어가요. 그게 천국은 율법의 나라에요.
율법의 완성의 나라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킨다는 말은 율법에 완성된 나라도 이거는 못 들어가요. 그래서 이름이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요.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이 끼어들 쨉이 못 되요. 어디를 얼른거립니까? 서울의 아주, 고급아파트에 서민들이 앞에 얼른 거리면 누가, 누가, 경비가 쫓아와가지고 “여여, 누가 여기, 여기 누가 사는지”, 참, 고급 빌라 있잖아요.
한강 옆에 고급빌라에 “당신이 여기 얼쩡거리나? 여기에 누구냐, 이병헌이 살고, 여기는 저 뭐고, 장동건이 여기 옆집에 살고 어디서 여기서, 이게, 여기에, 어디 서민이 여기에 얼쩡거리나. 여기에는 현대그룹 누구 살고, 이건희 살고, 이건희의 별장이 여기 있고 어디 여기 들어와!” 얼쩡거리면 안 되듯이 우리가 주님의 하나님 나라에 기웃거린다는 자체가 아직도 주님께서 우리를 쫓아냈다는 그 취지를 완전히 개 무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천국은 어떤 인간도 “못 들어가는 거 맞지? 그렇지?” 확인 차, 확인 차 온 천국이에요. 그래서 천국 온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도끼들로 온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 진노의 이 독사의 자식들아!” 아주 일괄적으로 독사의 자식들을 만들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한 겁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아까 두 번째 강의(유튜브). 도끼. 도끼라는 의미가 뭡니까?
뭐 쓰다듬으려고 도끼를 쓰겠습니까? 작살내려고. 작살내려고. 세례 요한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이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공동체와 그들의 사회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습니까? 따로 나와 있죠? 어디로? 세례 요한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광야잖아요. 광야. 광야는 홀로, 옷도 이것은 완전히 이상한 옷을 입고, 너희들과 차별화 시키는 겁니다.
“너희들이 있는 그 공동체 그 자리와 내가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있는 이 위치가, 나의 위치는 너희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객관적 위치라는 말이다.” 너희들은, 그 객관적인 안목을 놓친 거예요. 그게 없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를 살려 냈다는 이 말은, 이게, 이게 기적이 아니고 표적입니다. 자, 기적과 표적의 차이점은 기적은, 인간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기적이고, 표적은 예상 못한 일이 표적이 됩니다.
그렇다면 표적이 기적입니까? 아닙니까? 표적은 기적이 아니지요.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은 가슴이 심쿵 안 해요.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돼요. “역시 주께선, 역시 주님! 엄지척이에요. 주님 최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역시 참, 우리 예상대로야!” 이렇게 되는데, 표적은 의외로 미미하고 시시하고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뭐지 저 이벤트는? 십자가에 죽어? 저거 뭐하는 거지? 십자가가 표적 중에 표적이다?
저게 뭐야? 왜 스스로 자살해? 우리가 살려 준다 해도 안 살려고 하고 왜죽지? 왜? 메시야가 왜 죽어버리지?” 이점은요. 예수님을 비난한 자만 아니고 열두 제자도 아무도 그것을 이해 못했습니다. 아무도. 열두 제자도 은근히 노렸어요. “주님 좋은 분 만났으니까 팔자 펴야겠다.”싶어서 하늘나라 벼슬 차지하려는 계획만 했지. 예수님이 누군 줄 몰랐어요. 차라리 가룟 유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솔직하다고. 가룟 유다가. 정말 가룟 유다가 상남자예요.
지가 잘못한 것을 지가 책임지겠다고 나섰으니까. 이런 상남자가 어딨어요. 자살할 정도로. 양심의 가책이 돼서. 상남자가 되면 뭐합니까? 그 순간은 멋있게 보이는데, 지옥 가도, 지옥에 가서도 멋을 챙겨보지요. 이 지옥의 특징은, 지옥 이야기 나왔으니까. 지옥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매력이 없어요. 지옥은 모든 매력을 주님 앞에 강탈당합니다. 매력이란 뭐지요? 내가 남한테 내세울만한 어떤 것이 매력이잖아요. 챠밍. 내세우는 거.
남녀들 이렇게, 처녀, 총각들 모여가지고 할 때, 나름대로 꾸미고 오잖아요. 꾸미는 게 뭐냐 하면은 매력 발산하러 온 다 이말 이에요. 매력발산. 그런데 지옥도 마찬가지고 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체 매력은 주께서 뭉개버립니다. 매력 없어도 구원 받고 매력 있어도 지옥 갑니다. 이 세상이 가장, 최고의 매력은 부자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거지가 되어 몸이 아프다는 것은 이거는 전혀 매력 제로가 아닌 매력 마이너스죠 마이너스.
그래도 어디 갑니까? 천국가고. 매력이 넘치는, 매력이 줄줄 흘러넘치는 그 자는 지옥가고. 여기 여러분들이 너무 매력 발산 너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 내놓을 매력도 없지만. 천국이라는 것은 천국이라는 마지막 때에, 마지막 때에 천국에 왔다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천국은” 반드시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자기를 포함시킨 천국을 생각합니다. 천국이 한 사람마다 천국이 다 달라요.
어떤 천국에는 자기를, 자기 사랑하는 딸래미하고, 남편하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저 지옥 보내버리고, 저 친정 엄마와, 친정 고것만 무조건 가야되는 천국. 저, 딴 사람이 천국이라는 것은, 딴 사람이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 마누라 놔두고 지가 좋아하는 연예인하고 같이 사는 것. 한가인하고 한평생 살아 보는 게 소원인데, 자기 마누라 때문에 못사니까 천국 가서 소원 풀어보겠다고.
한가인하고, 한가인도 천국가고 지도 한가인과 같이 가서 거기서 같이 둘이 사는 걸 생각하는 천국. 이 천국이, 누가 만들었냐면 본인들이 붙잡고, 본인들이 만들었는데, 어디서 만들어졌냐면 자신의 살아오면서 나오던 경륜과 경험에 정보를 이렇게 압축해서 그걸 내용으로 장착해서 만든 천국들을 만들어 내지요. 그리고 그 생각들을 가지고 교회 와서 그대로 철야하면서 그걸 또 노골적으로 내뱉어요. 점잖은 사람들은 꿍하고 있을 건데.
교회 오는 사람들이 점잖은 사람들만 옵니까? 좀 이렇게 맛 간 사람들도 오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기도제목으로 막 터져 나와요. 특히 그 저, 아주머니들 금요일 오전에 모여가지고 구역할 때 뭐하나 하면 “우리가 서로 기도제목을 내놓으세요.” 해가지고 강제로 기도제목 끄집어내가지고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할 때 그 끄집어 내놓은 기도제목들 한번 보세요. 뭐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을 하게 하옵시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 사업의 문제는 뒷전이고 딴 게 더 있어요. 우리 뭐,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해놓고는, 뭐냐면 사실은 말을 안 해. 확장이라는 것은 그것을 빌미로 해서 이것 하게 되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주께서 은밀하게 뒷주머니에 봉투 해가지고 주겠지요. “네가 건전한 걸 기도했으니까 내가 이것까지 더 주마.” 이런 거 있잖아요. 솔로몬의 그런 기도 나오잖아요.
“너의 건강과 원수 죽는 것을 원치 않고 백성들에게 아주 바른 말씀을 가르친다고 했으니까 덤으로, 덤으로 네가 오래 살고 부자 되게 해준다.” 덤이 문제야. 덤이. 덤에 꽃혀가지고. 덤을 노리고 은근히 기복신앙 다 빼버리고 건전하기 짝이 없는 문장만 골라가지고, 그런 문장 고르는 거 어디서 수입하느냐? 그 복음학교에서 수입 해가지고 김용의 목사한테 배운 거 있잖아요. 그거 배운 거 가지고, 그걸 쭉 하고, 그걸 채워가지고. 아이고, 그런 수작들을 부리는데,
근본적으로 그렇게 수십 년 해도 천국이 우리를 안 넣어주는 천국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들었죠? 천국은 우리를 넣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사람이 바뀌었거든요. 다른 사람이에요. 어떻게? 주께서 개입하니까. 평소에는 자기 인생인 줄 알았더니만 나중에 보니깐 주님을 위해, 주님을 위해서 태어나야만 했던, 그러한 안목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그런 엘리야, 그런 모세.
그래서 그 엘리야와 모세가 주님 하고 변화산에서 이야기할 때, 뭐 이야기 했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건 광주 강의에서 제가 언급했습니다. 뭐에 대해서 변화산에서 이야기 했냐면, “주님, 주님 죽으셔야 되잖아요.” 그 이야기 했다 구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철이 없는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 마치 천국에 자기가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해가지고, “여기가 좋사오니 맨션 세 채를 지어드리겠습니다.”
뭐 지가 하비타트인가? 뭐, 뭐, 집 지어주는 거 뭡니까? 그것 또, ‘해비타트’ 지가 해비타트 봉사대원도 아닌데 집을 왜 지어줍니까? “여기 집을 세 채 짓겠으니.” 자기가, 우리는 한편이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한편 아니거든요. 베드로는 본인이 천국 못 갈 인간 인 것을 반드시 경유를 할 때까지는 어떤 천국인지를 몰랐습니다. 나중에 베드로 입에서 자기가 버림받았을 때에, 자기가 예수님을 버렸을 때에,
내가 생각하는 천국하고 정작 주께서 마련한 천국하고는 전혀 딴 세계라는 사실이에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하면 노력 할수록 점점 더, 점점 더 관계없는 천국이에요. 진짜 준비된 천국입니다. 내가 내 노력. 내 노력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뭘 낀다? 나를 반드시 거기에 끼어 놓겠다는 아집과 고집과 열성과 집착. 그런 것들은 천국에는 절대로 끼어 들 수가 없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합니다.
“같이 죽자. 같이 죽자!” 죽고, 그 다음에 다시 살아 날 때는 그 죽어야 될 나를 품을 때에 그, 지금까지 죽어야 마땅한 그 죄인을, 그렇게 죄 짓게 만드는 그 모든 과정들이 예수님의 자신의 이야기였고, 자신의 의도로서 그렇게 이끌어 왔다는 것을 알겠죠?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누구 이름으로 이끌려 왔어요? 예수의 이름으로 갑니다.
그 자기가 뒤돌아 볼 때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활동하셔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통합해서 이야기 할 때 그것을 가지고 뭐냐.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었습니다.” 라고 소급해서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 말은 바로 나사로를 살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것은 사람 죽었다. 살았다는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표적을 의미하는 겁니다. 어떤 표적이냐 하면은,
이 세상 자체가 만화 속에 있어요. 만화속이니까, 만화. 만화 속이니까 이차원, 납작 엎드러져 있지요. 이 안에( ) 모든 인간들이 들어 있어요. 그러면 나사로가 여기서 살아나왔다고 해서 나사로가 살아나왔다고, 죽은 나사로가 살았다고 해서 이 바깥에 만화 속에 바깥으로 나온 게 아니고 살아도, 나사로 산 것도 역시 만화 속에서 살았어요. 그러면 나사로 입장에서는 정작 살았다는 것은,
이 만화 속에서 “살았다.” 라는 것은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았다는 게 아니에요. 여전히 이거는 죽은 거 에요. 진짜 살았다는 것은 이 만화 바깥에 있어요. 예수님 동네. 이곳이 진정한 “살았다.” 말씀으로 살았다. 생명, 영생의 세계가 이 바깥에 있습니다. 이 바깥의 세계의 예수님께서 그대로 영생 그대로 이 땅에 들어올 때에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하지요.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 하는 거예요.
그럼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할 때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유도하냐 하면은 모든 세상 자체가 나를 오해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그러한 상황인 것을 의도적으로 밝히러 온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50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됐죠. 한 사람과 그 가야바 제사장인가? 한사람과 뭘 연결시킵니까? 한사람과 온 민족과 연관을 시키는 거예요.
가야바는 지금 만화 속에 자기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그렇게 예수라는 인물이 와서 소요를 일으켜버리면 로마군들이 예수라는 그 인물 때문에 그걸 빌미로 해서 다시 더 강하게 이스라엘을 압박해 버리면 우리가 괴롭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한 사람을 죽여서 누가 살자? “옛날처럼 예수 없던 그 시절처럼 다시 살자.” 라고 한 이 사건은 사실은 그 사건마저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이야기다.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된, 벌어져야 될 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 한분이 죽어서 누가 산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이쪽 만화 속에 있는 세계가 아니고 사실은 이쪽에 있는 세계로서, 이들이 살아나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이 만화속의 세계를 그 법칙을 그대로 이용하시는 거예요. 굉장히 이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 굉장히 복잡해요. 복잡하기 때문에 이것을 간단한 문장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사로와, 죽었다가 살아났지요? 그러면 이제 나사로가 이 만화 속을 폭을 넓혀 봅시다.
원래 폭이 없는데 일단 있다 치고 넓혀 봅시다. 나사로가 살았는데, 죽었다가 도로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지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우리는 여기 있다 해요. 여기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여기 있다가 아니라, 그가 여기까지, 있다가 아니고 그가 여기 있도록 지금까지 있어 왔다. 도 아니고, 그냥 여기서 “생겼다!” 해야 말이 가장 적당한 말이 됩니다. 나사로가 여기에서 살아난 건 나사로가 생겼다. 라고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무엇과 관련해서 끌어 왔냐 하면 과거에 나사로를 알던 그 나사로가 아니고, 내가 알던 나사로가 아니고 “다른 나사로인 것을 너희들이 눈치 채라.” 이말 이거든요. 그러면 다른 나사로라면 그냥, 죽었던 나사로가, 우리 보기에는 연속이 있지만 그냥 연속되어 버리면 이 만화 속 세계, 외부 세계와 관련성이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그냥 “생겼다.” 돼버리면 뭡니까? “네가 했어?” “아니!” “네가 했어?” 여기에 없는 분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 진거죠? 없는 분에 의해서.
그렇다면 예수를 볼 때에, “예수님은 옛날부터 아는 사이야.” 이러면 안 되고,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 세계에 없던 분이라는 그러한 안목을 가지고 나사로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연관을 지어 보라는 것입니다. “왜 지어야 됩니까?” 왜 지어야 되냐 하면은 우리 성도의, 성령 받은 성도의 입장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어느 학교 나오고, 고등학교 때 어디 다니고, 어제까지 뭐 했고.” 자꾸 이렇게 연결 짓지 말고 네?
지금 주께서 지금 나를 이 자리에 앉도록, 여러분이 앉도록. 주께서 만들어 냈다고 이렇게 보자 이 말이죠. 그렇게 보아야 된다는 겁니다. 저는! 자꾸 어제 나와 연속성으로 돼버리면 뭐가 누락이 되고 뭐가 빠지느냐 하면은 주님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자꾸 빠져 버리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나를 여기 있도록 했다는 것을 빠져 버리고, “뭐, 내가 알아서 어제, 뭐 오늘도 아침에 밥 먹고 아침에 뭐, 아르바이트하고, 나 여기 살아있네.” 자꾸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알아서 하다가 이러다 보면 천국에 가겠지?” 아니에요! 그런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생긴’ 인간이 천국가지. 내가 알아서 살아가는 인간은 천국 못갑니다. 누가? 천국에 계신 분의 손길이 닿아져야 돼요. 천국에서 주님께서 나를 근원적으로, 원천적으로, 원형적으로 뭔가 새롭게 제조해야 돼요. 표적이 나 자신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돼야 됩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아이고, 주님께서는 나사로만 살리고 나는 왜 안 살리나?” 자꾸 불평들을 하시는데, 내가 만약에 주님 때문에 살아났다면, “예수님이 세다고 막, 예수님이 나를 구원했다고, 막, 영어로 문자를 해가지고 티(셔츠)하나 만들어서 돌아 당기면서 나 죽었는데 살아났어! 이렇게 자랑 질 하겠는데, 왜 나사로는 그렇게 특혜 줘가지고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려주고, 왜 나는 안 살려주느냐 이렇게 하는데.” 한번 죽여 봐요? 그러면. 한번 인생 끝장 내 볼까요? 그러면. 네?
그러니까 성경을, 성경을 참, 너무 가볍게 해석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살아 있잖아요! 죽었는데 나사로처럼 살려서 살아 계신 거예요. 여러분, 나사로만 표적을 거창하게 보시지 마시고, 내가 숨 쉬고 있고, 네? 이렇게 시차 때문에 졸고 계시는 이것도 표적이에요. 이게 하나하나가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표적이에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나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고, 나,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고, 너희들 보기에 내가 표적으로 안보여?” 그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지금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게 안보여?” “미쳤구나.” “안보여?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희락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리 안보이나? 그렇게 안보여?” 눈이 아직 못 알아 볼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지요. 그런 당당함 가지고! 그래서 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우리는 매일같이 죽었다가 매일같이 살아나고 매일같이 잃어버렸다가 매일같이 얻는다고.
그것이 바로 로마서 4장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하신다. 지금 주님께서 노시는 게 아니거든요. 활동할 때, 활동의 원칙이 그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하시고. 그 이야기 하려고 요한복음 11장 이야기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보는 안목과 내가 나를 보는 안목이” 이 환경 때문에 엄청난 차이 난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유대 나라를 고수하려는 안목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인간 대 인간의 온 역사적인 전통, 꾸준히 이어져 온 유대나라를 지켜야 되겠다는 그 안목이 너희들이 나를 볼 때, 왜곡되게 보게 했고 곡해하게 보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 가정이 만약에 식구가 다섯 명이다. 대학교 다니는 아이 둘이 있고, 이제 졸업하고 군에 갖다온 애 하나 있고, 그리고 부모 있고 다섯 식구다.
그런데 우리 식구는 25년 전부터 교회 다녀가지고 애들은 유아세례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교회 다섯 명 다 등록하고 세례교인이다. 지금 뭐가 빠졌어요? 이럴 때 뭐가 빠졌습니까? 25년 동안 신앙생활 잘해가지고 지금 어느 교회 다닌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야바의 오해에요. 가야바. 네?
“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낸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지금의 우리들을 예언했으며 메시야까지 예언했는데 우리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지금껏 기적과 기적으로 연결된 우리나라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게 어떤 소란이 난다해서,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저 예수라는 작자가 소란을 일으키니까 저걸 우리가 죽여야 한다.
죽여야 주께서 주신 이 덩어리. 하나님의 은혜의 덩어리인 인간을 지킬 수 있다.” 이거나, “우리는 다섯 명인데 25년 동안 신앙생활하다 지금 교회 다닌다.” 이거나, 안목이 어떤 안목입니까? 동일한 안목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내세우는 것은 뭐냐? “나사로를 보아라!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났느냐? 아니면 죽은 자였는데 나 때문에 산자 되었느냐?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죽은 자였는데 나 때문에 죽어도 사는 자였는가?”를 묻는 거예요. 그 존재를 묻는 거예요. 그 존재를. 말이 내 참, 말이 어렵다. 어렵지만, 이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네.. 남들한테 참 좋은데, 달리 설명할 길이 없네.
나사로의 모습이 누구냐 면은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에요. “너희들이 나를 누구라 보느냐” 이말 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보이느냐? 목수의 아들로 보이느냐? 아니면 다른 특이성. 나실인 같은 다른 특이성으로 보이느냐? 나는 너희들이 속해 있는 이 사회 자체가 지금 완전히 죽은 사회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는 내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것을 모르고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좋다.
니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짜 천국 갈 사람을 나 하나 죽어서 그 사람들을 뽑아 낼 거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요. 예수님 죽기는 그들 손에 죽고 결과는 누가 얻고? 나사로 같이 영생 얻을 자들은, 영생을 얻어서 뽑아내가지고 예수님처럼 이 땅에 있으면서도 여기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발생된, 새롭게 발생되어서 이 땅을 사는 천국의 백성들이 여기 있네~ 라고 그걸 나타내는 삶을, 그러한 모습으로 주께서는 지금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참으로 이렇게 제가 설명해도 참 어려운데 이게 뭐냐? 표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은,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성령 받아 사는 것도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그렇게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야 된단 말입니다. 이 땅에 속한자로 내가 어렸을 때는 맨 날 뭐 했다고 하지 말고, 매일매일, 매일매일 새로워~ 노래 있잖아요. 매일매일 새롭다고. 매일매일 새롭게. 매일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모습으로. 해서 어떻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늘 ‘소급’하면 돼요. 물론 돌아서면 또 우리의 또 옛날 과거 생각나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깨우치면 다시 소급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이것조차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이기주의로 살 거 에요. 하지만 그것조차도 주께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을 다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을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락-요한복음11장50절(예수님 이야기) 161004b-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서 간단하게 설명하게 되면, 나사로를 죽은 자에서 살려낸 그 모습이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나사로는 자기 안에 죽든 살아있든 관계없이 자기 안에 살아있었어요. 나사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자기는 숨 쉬고 있으니깐 살아있다. 그런데 “나사로도 살아 있는데 죽었구나. 어! 또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서, 왜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은 좋은데, 왜, 그 우리가 싫어하는 예수라는 인물 때문에 살아났느냐? 이게 시비 거리가 된 거에요.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는 네가 속해있는 세상 자체가 지금 나에 대해 공격이다.” 이 말이에요. “너희들이 그렇게 너희들끼리 그렇게 숙덕숙덕 하면서 꾸려나가는 이 세상 자체가, 이 세상 자체가 몽땅 그거는 나를 대적하는 죽은 세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전체와 예수님 자신을 일대일로 보는 겁니다. 일대일로. 그러나 그들은 나사로 하나 살아났다. 죽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희들 전체가 그렇게 나사로가 죽었다. 살았다. 할 쨉이 못된다. 너희들은 이미 죽은 세상 가운데서 그냥 같이 죽어 있는 입장이다.” 이거예요. 이 말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되겠다는, 그럴 거 같으면 주님께서 오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내 백성은 따로 있고 그 백성에 대해서 내가 회수하듯이, 찾아가듯이, 끄집어내듯이 하면 그게 영생이 되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되는 것은 없어요. 어차피 이세상은 주님의 세상이니까 그렇게 정리하시면 되고요. 그래서 나사로는 예수님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영이다.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때, 세상은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나사로와 더불어서 나타내는 것이 11장 이야기였습니다.
자, 그 다음 12장 들어가 봅시다. 12장 내용은 그 마르다가, 동생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비싼 향유를 갖다 한꺼번에, 그것도 조금씩 붓는 것이 아니고, 적금 붓듯이 한 달에 조금씩, 조금씩 붓고 다음 달에 또 붓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는 거예요. 이게 중요해요.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한꺼번에.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그냥 예수님 발에 그냥 갖다 부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향유를 부은 것은 2회, 3회 연속적인 것이 아니고, 어떻습니까? ‘단회성’이죠? 한번이죠? 한번! 한 번에 다 부었죠?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인생의 마감은 바로, 한 번의 죽음으로서 온전히 다 이루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향유가 만날 때, 그 죽음이라는 횟수, 한번에! 단번에! 예수님의 죽음은 일반인들의 죽음이 아니고, “세상은 과연 나빴다!” 세상은 나빴다를 단 한번으로 다 끝내 버리는 겁니다. 한번으로.
따라서 이, 한번으로 끝내버리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내가 더 나빠지면 안 돼. 여기서 내가, 내가 더 악한 사람이면 안 돼!” 라는 모든 시도는 다 부질없는 시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이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술, 담배는 일단 끊어야 되고, 그리고 절대로 이제부터는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야 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는데 앞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온유의 화평을 더하고, 화평에 뭘 더하고, 연단을 더해 가지고, 점점 더 나아져야지.” 라는 모든 시도는,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단번, 단회성을 모독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마르다가 향유를 주님 앞에 왕창 부었습니다. 그러면 부었다는 말은 마르다의, “마르다가 돈 푼이나 썼겠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아이고, 마르다가 큰마음 먹었네? 한턱냈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마르다의 목숨을 거기에다가 향유와 더불어서 그냥 다 날린 거예요.
“내가 알던 나는 어차피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쥐고 있던 나는 어차피 그것은 내가 아닌 ‘허상적인 나’를 나라고 우겼습니다. ‘진짜 나’는 내가 관리할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관리해야 되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그래 왔었습니다.”는 고백이에요.
“내가 향유 부을 때 그때부터 우리 주님, 잘해 봅시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창세전부터, 처음부터 나서 이 모든 것도 사실은 주님의 인생이었지, 내 인생이 아니었고, 내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제 합류코자 합니다. 주님의 거대한 그 스토리에 제가 ‘일부’로 ‘파편’으로 ‘파티클’로 하나의 ‘조각’으로 끼어 들어가기를 원합니다.”해서 향유를 뿌리는 거예요.
그 향유를 한꺼번에, 한꺼번에 몽땅 다 한꺼번에. 그러니까 향유를 한꺼번에 했다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감질나게 했다는 게 아니에요. 감질나게 했으면요. “주님, 저 이런 여자에요. 저 어때요? 괜찮죠?” 이렇게 되잖아요. “다음에는 곱빼기로 낼게요. 향유를.” 이게 아닌데. 이거는 한꺼번에 다 했다는 거 같은, “그러할 입장도 안 되고, 그러할 생각도 저는 없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난 없습니다.
나에게 나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나는, 나에게 나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나는 주님 위해서 늘 그동안 만들어져 왔습니다. 주의 것으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믿음의 결단? 그런 것은 내게 애초부터 없습니다. 믿음의 결심? 장렬함? 비장함? 단호함? 그런 것은 애초부터 나한테는 그런 것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지, 내가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것을 주 앞에 생색내는 게 믿음이 아니고, “나 이래요. 나 이런 존재, 인간입니다.”드러내는 게 믿음이 아니라 그냥 다 빼앗기는 건데 사실은 빼앗긴다는 말이 잘못된 건데, 원래 주님 거니까 주님 것으로 돌려주는 것이죠. 빼앗기는 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남의 물건을 써서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존재보다 ‘사명’이 우선되는 겁니다. 이 사명도 나의 사명이 아니고 주님이 하실 일. 주님의 사명, 아버지께 받은 사명, 주님의 일. 그 주님의 일이 우리의 존재에 올 때, 이것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가지고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 그 은사를 소유화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은사가 오면 올수록 우리는 내 것이라는 게 파괴되게 되어있어요. 자신이 파괴되게 되면 무엇도 파괴되는 줄 알아요?
내가 갖고 있던, 내가 내 인생 내가 관리 한다고 갖고 있던 모든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는 공포, 두려움, 불안. 이것도 그 순간 같이 “파악~!” 하고 다 깨져버립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내 인생도 아닌데 내가 걱정을 내가 왜 해? 내가 왜 해? 걱정을 왜 내가 해?” 농사를 짓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 “비가 와야 될 텐데.. 아이고~ 비가 너무 안 온다. 올해 농사 버리는데.. 가만 있어보자. 과거에 뭐를 잘못했는가..
세상에! 십일조를 딴 데 냈구나~ 꼴을 먹여주는 본 교회에다 내야 될 걸.. 십일조를 딴 데 냈구나! 참~ 죽겠어. 참, 눈치도 빨라. 그것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나한테 또 제때, 제때 이렇게 벌을 내려주시니.. 아이고~ 이제는 알았으니 이제라도 그때 못낸 거 플러스 곱빼기 해가지고, 주님이여! 네 배나 갚겠나이다.” 해가지고 삭개오처럼 갖다 주게 되면 다시 비 옵니까? 딱 갚는 순간 그 다음 월요일 날, 일요일 날에 네 배 갚아주면 그 다음 날 비와요.
비 오는데 누가 쾌재를 부르는지 알아요? 교회도 안 나오고 돈도 한 푼 안 낸 옆에 있는 농부가 쾌재를 불러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비 맞았다. 너는 돈만 날리고, 이 바보야! 조금만, 하루만 참지. 하루만 참아도 공짜로 될 걸. 괜히 나대가지고 돈만 날렸잖아 교회에.” 이러한, 이러한, 결국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이 나 잘되기 위해, 나의 유용성.
시카고, 미국 강의 첫 번째 강의가 뭐냐 하면, 유용성 강의 했잖아요. 모든 의미는 뭐다? 나의 유용성 할 때 만 의미가 있다는 거. 한번 들어 보세요. 한번 보세요. 시카고 첫 강의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늘 얼굴을 내미는 분 계시죠?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거 보고난 뒤 미인이라고. 미인이라는 사람이 있고, 좀 짜증내 하는 사람도 있고. 카메라 앵글 때문에. 그것은 제 아내가 카메라를 처음 촬영했기 때문에 좀 조절이 안 되서 그러는데 좀 이해해 주세요.
어쨌든 간에 그 강의는 음성으로 들으면, 신경 쓰이거든 음성으로 들으면 괜찮거든요. 보면 거기에 모든 의미는 나와 연관성이 있을 때 의미. 연관성 있을 때 의미. 주께서~ 누가 7절 좀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12:7) 네,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죽은 거 맞지요? 안 죽으면 안 되니까. 죽었는데, 그걸 달리, 달리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차를 갈아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까? 차를 갈아타는거요. 이쪽은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마리아가 감 잡았어요. 감을 잡고 “야 이거 큰일 나겠다. 내가 나이아가라폭포를 가면서 만약에 나이아가라의 수많은 물줄기가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육신이라면, 이것들이 앞에 나이아가라를, 이걸 몰라. 넓은 길이니까. 넓은 길로, 다수가 진리라 하는 것은 인문학에서 다 이야기하잖아요. 다수가 진리에 가깝다는 말이죠. 소수의 의견과 다수의 의견이.
다수가 쭉 가다가 떨어지면,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래요? 지옥이 안보이니까.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마리아는 일찍 폭포를, 마지막에 떨어지는 나이아가라폭포를 미리 봤어요. 봐가지고 갈아 탄 거 에요. 어디로? 주님 쪽으로 갈아 탄 거 에요. 물론 자기가 알아서 갈아 탄 거는 아니지만, 물론 주께서 믿음을 줬으니까 갈아타는 건데. 갈아탔을 때에. 죄인 같으면 알 수가 없다 할 텐데,
주님께서는 그 마리아가 하는 행위를 예수님의 구원의 하나의 시나리오로, 이것을 하나의 시나리오로 일어날 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편지처럼 넓혀지는 동일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프라이팬에, 제가 광주 때 그런 이야기를 드렸는가? 프라이팬에 볶음밥 해놓고, 볶음밥 해먹으려면 뭔가 덮어야 되죠? 계란 후라이 해가지고 이렇게, 이래가지고, 저어가지고, 하게 되면,
그 후라이 노란 게 전체 얇게 막이 되어 덮이지요? 처음에는 어디서 나왔어요? 하나의 원형, 계란에서 나왔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계란이라면, 주님이 앞으로 할 일은 뭐냐 하면은, 마리아처럼 나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확대가, 그게 예수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은 개인 구원은 없어요. 이게 소속구원이고 단체구원이거든요. 그러면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 천국 가는 사람은 뭡니까?
본인이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자신의 계란을 많이 퍼뜨려가지고 그걸 평지로 만드는, 그 평지 속에 하나의 계란 입자로 포함이 되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주님께서, 어느 것 하나 건드려도, 마리아를 건드리면 누구 건드리는 거예요? 같이 노란 계란이니까, 주님 자신을 건드리는 게 되죠. 그럼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뭐냐 하면은,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다.” 하니까 구원 받은 사람이 뭐라 합니까? “제가 언제 그랬지요? 제가.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게 하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저 끄트머리에 있는 계란의 퍼져있는, 계란 후라이 그것을 만진 것이 곧 누구를 만진 것이다? “나의 몸체를 만진 것이다.” 라고 보는 거예요. 이게 주님의 구원이에요.
예수님만 달랑 구원받는 개인구원이 아니고, 전체의, 예수님 믿는 백성들을 데려오는 그 전체를 가지고 ‘예수님의 구원’이라 하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일부로 말려들면 그 사람은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예수 안에서 의인, 프라이팬 안에서 의인. 노랗게 되는 가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노랗다면, 계란 후라이 노랗다면, 우리도 역시, 같이 노란 겁니다. 같은 색깔이에요. 예수 안에서.
그, 덮는데 바로 뭘 덮느냐? 죄를 하나님의 피로 덮어버리죠. 죄로 덮어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거죠. 이것을 제가 광주 강의에선가, 대구 강의에선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대구 강의에서, 죄가 들어오게 되고, 주님이 여기 계시고, 우리를 사용할 때 죄를 사용할 때, 죄가 옆에 들어오게 되면 이게 뭐가 나오느냐(→人→ 하나님의 의 됨). 하나님의 의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가, 성도가 꼭 필요한 거예요.
죄가 들어오게 해서, 죄가 들어오는 방법은 뭐다? 아까 했죠? 율법과 말씀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나오는 순간 우리는 뭐가 돼버려요? 돈을 사랑한 자가 돼버리죠. “탐내지 말라.”는 순간 우리 속에서 마중을 나온다 했지요? 탐심을 가지고 마중을 나오게 되면, 우리가 죄가 발생되고, 이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뭐가 된다? 의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뭐만 건지면 돼요?
주님은 자신의 의만 건지면 주님은 본거고 그 결과로 생기는 것이 뭐다? 구원 받은 자기 백성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막걸리. 집에서 막걸리를 담그면 뭐가 나옵니까? 막걸리가 생산되면서 뭐가 나오지요? 술 찌꺼기 나오지요. 어릴 때, 배고플 때는 그거 먹었어요. 배고플 때. 가난한, 뭐 어지간한 집은, 옛날엔 다 가난했으니까. 그걸 먹고, 아침에 그거 먹고, 아침에 술 취해가지고.. 이런 현상이 있다 아닙니까.
그 찌꺼기가 우리에요. 주님은 자기 의를 챙기는 그 나오는 뒷 분에 나오는 그 떨어지는 그 흔적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여기 있으나 천국가나 자기의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품합니까? 주님이, “주님이여! 주님의 일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들이 구원 받았네요? 세상에! 이런 횡재가!” 이렇게 고마워하죠. 어떤, 만났던 분은 그렇게 고마워하던 가요?
이 죽일 날 이렇게, 이 찌끼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사용 안 해도 되는데 건지셨나? 이런 마음. 오직 주님께만 감사하는 마음. 주님께, 십자가의 공로만 감사하는 그 마음. 자, 그런데 여기서 봅시다. 그런데 왜? 향유가지고 주님을 마사지 해드리지. 왜 그것을 향유를 발에다 깹니까? 여기 보면 향유 병을 깨버렸잖아요. 발에 부어가지고 깨버렸지요. 우리 같으면 “예수님, 이 향유 가지고 아침에 면도 하시고 뿌리세요.”
이렇게 할 텐데, 왜 예수님 발에다가 왜 뿌립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틀을 깨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마리아가 그걸 알고 그걸 깨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깨고 바깥으로 탈출 못합니다. 우리 능력은 안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우리의 자아의 중첩되어 있는 모든 기억들이, 이것이 그냥, 생긴 게 우리 스스로 육신에 생긴 게 아니고,
이미 우리 주변에서 반복해서 계속 훈육 받고, 양육 받고, 교육받은 거예요 전부다. 끊임없이 거기서 발생 된 게 뭐냐 하면은 우리의 본성은, 우리의 육신은 선악으로 돼있고, 선, 악으로 되어 있는데다 받았던 모든 교육들이 선, 악과 관련돼서 연결 돼버리면 이게 우리의 뭐가 됩니까? 양심으로 자리 잡죠. 양심은 뭐냐 하면은 선과 악에 대해서 아는 겁니다. 일종의 우리 속 안에 있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합니까? 선악 추구하고, 뭐를 버리려고? 악을 버림으로써 내가 생존해야 될 거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신 앞에서 지금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거예요. “남은 죽이더라고 저는 죽이면 안 됩니다. 제가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데, 바른, 착한 교회 오빠고, 착한 사람인데.”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고, 나름대로. 저 자식 세 명 낳고 다 키웠는데, 내 손으로 시장가서, 장사해서 다 키웠고,
저 말썽부리는 술주정뱅이 남편을 내가 다 인간 만들었고.” 전~부다, 모든 자기 주변에 있던, 그 모든 것. 그것을 자기 가치성으로 다 끌어 모으면서 그런 식으로 뭐는 내 앞에서 점점 더 옅어지게 하고, 악은 점점 더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선은 돋보이게 만들고. 그 작업 외에 우리가 24시간 하는 작업이 이것 말고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요. 아침에 눈만 뜨면 “아이고, 잘났다.” 눈만 뜨면 하는 짓거리가 이 짓거리가 아닙니까?
“오늘도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냐?” 이 짓거리. “오늘도 태양은 떴구나. 태양은 나를 비추어라.” 비춰서 뭐할 건데? 죄인 비춰서 뭐할 건데. 보람~찬 또 하루를 위하여 열심히 매진하겠다. 매진해서 뭐있는데? 매진하겠다는 게 뭡니까? 어두운 악은 물러가고, 선한 나만 돋보여라! 이런 거. 선하면 뭐가 온다? 복이 오고. 악하면 뭐가 온다? 저주 오니. 복 받기 위해서는 계속 선을 쌓고, 또 쌓고, 마일리지 쌓고, 그 짓 하는 거. 그거 하는 거 외에는 없지요?
그러면 거기서 선과 악의 기준은 누가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선과 악의 기준은? 그건 집안 어른들이 이야기 했지요. 어릴 때부터 교회 목사가 이야기 했고, 또 학교 선생님이 이야기 했고 사회 영민과 통영민 윤리적인 통영, 도덕이 그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체제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타고난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봅시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돼요. 좀 참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힘들더라도 참아야 돼요.
우리는 육신 덩어리, 육체, 세포 덩어리. 육신인데, 우리의 정신세계는, 우리의 정신세계가 육신 덩어리를 덮고 있습니다. 정신세계가 덮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광주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인간의 육신 가운데서 인간의 정신이 육신을 덮는다고 생각 하는데, 하지만 육신은, 육신에는 인간의 정신이 덮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육신이 갖고 있는 자체적인 욕망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은 그때로부터 개조가 되고, 변명이 되고, 핑계를 댈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육신에 나오는 욕망은 인간의 정신으로써 이것을 다스릴 재주가 없습니다. 네? 그것을 순 우리말로 하면, 이게 되죠. 뭐에요? ‘욱’ 욱하는 성질. 품사의 감탄사가 다 이런 종류에요. 감탄사가. 모든 현재의 언어학자, 기호학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기본적인 어어는 감탄사지. 그 외에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을 그대로 신학자들이, 그것을 봐 가지고 ‘여호와’라 하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하!’ 신에 대해서 감탄이,
‘하!’ ‘이야!’ ‘야훼’가 되었다는 겁니다. ‘야!’ 그게 야훼가 되고 가나안 땅에서는 ‘엘’이 되고 ‘야훼’가 되고 여러 형태로, 그러니 모든 인간이 기호의 분석을 해보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것이 아니고, 육신에서 그냥 ‘아야!’ 하는 것처럼 뭔가 자극을 받았을 때 자연적으로 나오는 그 ‘외마디’ 같은 것. 그런데 외마디가 나온다면 이건 정신에서 나오는 언어체계가 아닙니다.
언어체계와 언어체계 이전에, 아주 가장 생생한 ‘생속’이라고 하죠. 어떤 이미징이 없고 극히 네추럴, 자연적인 요소. 그게 언어의 기본이 되어서, 그것으로 사회가 발달 하면서 소통 하다 보니까, “야! 너 감정 좀 추스르고, 너 좀 오바 다.” 해서 어느 정도 얼추 단어를 맞춰가니깐 그 단어들이 형성됐고, 그 단어들이 형성 됐으니까, 그 안에서 언어를 뜯어보게 되면 원바닥이 나오죠.
특히 한자에 나오는 한자 뜻은 전부 뭡니까? 한자 뜻이 전부 옛날에 제사 지낼 때 모양새를 가지고 한자를 만들었고요. ‘코미디’라는 말이 있죠? 코미디의 원뜻은 ‘코마디’인가 그런데 이게 ‘시골 시장’이라는 뜻이에요. 천박한 인간들을 갖고 노는 것을 코미디라 하는 겁니다. 자꾸 원어를 이렇게 끄집어내게 되면 이것은 따져서 하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그냥 욕구라 할까? 욕구. 자연적인 욕망, 욕구가 외마디처럼 튀어나오는 것들이 언어의 파편이 되는 거예요.
뭐, 성경 언어라고 뭐 고상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뭡니까? 정신은 육신보다, 육체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고, 정신은 육체에 뒤따라오죠. 그런데 육체의 욕망은, 자, 문제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그건 누가 관리해요? 이것을 현대 과학과 현대 철학이 풀어내지를 못해요. 인간은 왜 욕망하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은 왜 욕망하느냐? 생물학에서 말하기는 “그것은 살기 위해서 산다.” 살기 위해서, 왜? 살기 위해서 하니까 그 다음에 더 큰 문제가 벌어졌어요.
살아야 되겠다는 그 산다는 주체자가 누구냐 이거에요. 누가, 내 안에 어떤 괴물이 있어 살으라고 하느냐. 괴물이 있어서 “야! 너 살아야 돼! 너 살아야 돼!” 가짜보고 자꾸 살아야 된다고 부추기는 거예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사람이 ‘욱’하고 누가 ‘확!’하면 욕하잖아요. 또 누가 밀치면 반드시 밀치잖아요. 왜 밀칩니까? 왜 욕하는데 화가 나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생물학적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방어 본능 하는 거라 구요. 방어 본능.
외부에서 병균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누가 나와서 방어를 합니까? 면역성이 있어서 방어하게 되어 있죠? 그런데 어디서도 면역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요. 영원히 미제라니까요. “누가 나를 방어 하냐? 누가 나를 방어 하냐?” 쉽게 말해서 내 육체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게 누구냐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그 육체의 주인이 밤 낮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그런데 욕망을 조사해 보니까 “살아야 돼”가 그게 다가 아니에요. “네가 최고가 되어야 돼. 남한테 밑지면 안 돼. 너 남한테 지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더 최고여야 돼. 네가 성적이 떨어지면 안 돼. 네가 남보다 더 작은 평수가 아니라 더 높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야 돼.” 이걸 누가 하느냐? 성경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그게 들통 났어요. 궁금하지요? 그게 누군지 궁금하지요?
구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죄악’이라고 하고 신약에서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알 수 있느냐? 바로 광야 40일 동안 예수님이 금식 할 때, 인간은 빠지고, 인간은 빠져야 돼요. 인간은 빠지고, 누가? 영대 영으로 마주치는 거예요. 예수님과 사탄이 마주쳤어요. 사탄의 무기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이 사탄의 무기는 평소에 인간들이 감추어졌던 거. 왜 나는 이 땅에서 살고 싶어 하는지.
그냥 살아야 된다는 본능이라는 말 이외는, 본능이라는 말을 조사해보면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아요. 할 말이 없으니까 “본능이야” 이거지. “누가 너희에게 그 본능을 주었느냐?”에 대해서는 누가 답변할거에요? 이 세상에 어느 철학자가 답변, 어느 의사가? 답변 못해요! 그 물대포 맞고 죽은 사람 누굽니까? 백, 백남기 할아버지 죽었지요. 왜 죽으면 안 되죠? 죽으면 왜 안 되는데요? 뉴스에 묻고 싶어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
벌써 질문 자체가 다르잖아요. “나가 죽였다! 이 놈의 정권, 박근혜 정권”이 죽였다는데, 그래, 왜? 죽으면 안 되는데? 왜 죽으면 안 되는데? 그,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가 18만 5000 그 사람들 죽었잖아요. 천사가 죽였잖아요. 그 사람들 왜 죽으면 안 되는데요? 성경은 간단합니다. “네가 언약을 건드렸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언약을 건드렸기 때문에. 언약을 건드려서 죽은 거예요. 구약에 나오잖아요.
구약 그대로 신약까지 광야에 옵니다. 마귀가 자기 무기를 발휘합니다. 마귀의 무기는 하나밖에 없어요. “너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첫 번째부터 했잖아요. “돌이 뭐가 돼라?” 왜, 돌이 떡이 돼야 됩니까? 왜 돌이 떡이 돼야 돼요? “예수 당신, 당신이나, 내가 다스리는 인간이나 당신이나 똑같은 거야.” 결국은, 사람은 뭐 좋은 일 하려면, 뭘 해야 돼요? “살아야지~ 살아야지. 당신 그렇게 굶어야 되겠어? 살아야지.
당신 굶어 죽으면 주의 일을 못해. 주의 일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돼.” 예수님은 사탄의 무기가, 기본이 뭐가 깔려있다?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이미 어떻게 됐는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왜 자꾸 죽어야 되는데, 왜 자꾸 살아야 되느냐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님이여! 왜! 죽여야 되는데, 왜! 살려주십니까?” 이런 이야기를 주님 앞에 해놓을 때 그게 성도다운 거예요.
앞으로 그런 분 만나면 죽어야 된다고 이야기 하세요. “당신,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뭐냐, 더 살겠다하는 당신의 본능밖에 안 된다.” 하면 쑥 들어가 버립니다. 얼마나 살고 싶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서 또 살고 싶어 하겠어요? 그러니까 마귀가 자꾸 천국 가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에요. “지금 너 살고 싶지? 내가 좋은 것 알려줄까? 팁 하나 줄까?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가서 또 산다.”
그러니까 그것을 미끼로 삼아서 막 오라고 해서, 교회에서 돈이란 돈은 꿀꺽 내고 가는 거예요. 주님은 반대입니다. “죽어 마땅하냐?” “예!” “그럼 천국이다!” 이게 주님의 뜻이에요. 이게 주님의 뜻입니다. “주여! 죽어 마땅한!”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가는 이유를 아시겠죠? “병 낫게 해 달라!” 이렇게 했습니까? 네? “내가 죽으면 병 때문에 죽은 것인가? 아니면 늙어 죽은 것인가? 물대포 맞아서 죽은 것인가?
그걸 파악해가지고 막 천국가고, 주님보고 막, 항의 했어요? “개가 와서 핥아도 마땅하고 내가 몸이 거지가 되도 이것도, 그리고 그만큼 살아온 것도 고맙습니다.” 하고 마음껏 거지가 될 수 있고. 욥이 처음에 몰랐어요. 자기는 착했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왔거든요. 욥은 아직도 자기가 고난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가지고 자꾸 뭐라고 따지냐면 “고난을 왜 주십니까?” 고난을 왜 주시냐고 따졌어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그 질문이 쏙 들어가 버렸어요. “고난을 왜 주십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이건 내가 할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건 누가 해야 되느냐? 이것은 자기 속에 있는 장차 오실 예수님만이 아버지한테 “주여,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자기 말고 자기 대표자가 할 이야기지, 자기가, 대표자가 아닌 자기가 할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예수님 인생이 “다 비켜!” 만 해도 우리는 뭐가 뭔지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대표자 됨을 연관 관계, 주님이 대표자임을 연관 관계 때문에 욥에게 고난이 온 거에요. 그래서 욥은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고난이 오면 고난 받으면 되고, 축복 오면 축복 받으면 되고, 영생 주면 영생 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욥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동안 자식 열 명 낳았고, 부자 되었고, 내가 이렇게 장사 잘되고 산 것은, 그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건강한 것도 주셨기에, 건강을 주셨기에 건강한 것뿐이고, 자식 열 명 주셨기에 받은 것뿐이고, 부자 되게 하셨기에 부자 된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욥이 제대로 이야기 했어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욥1:21) 제대로 이야기 해놓고, 머리로 알아요. 머리로. 머리로 알았다고요.
그런데 그게 머리로 안 정답을 실감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나중에 욥이 마지막 끝에 뭡니까? 죽은 자식 대신에 미스코리아 진선미 그렇게 예쁜 딸을 줬고, 갑절이나 더 부자 되게 했을 때에, 고난 받았던 대가로 얻은 게 아니고, 이것도 그냥 주셨기에 그냥 받은 거예요. 그러나 한국교회는 욥기를 보는 모든 사람마다 조금만 참으면 부자 될 수 있는 방법을 거기서 끄집어냅니다. “까짓 거, 고난은 잠깐이요, 부자는 영원이다.” 뭘 노립니까?
부자를 노리는 방법을 거기서 찾아서 약간 힘들기만 하면 나중에 부자 된다 이거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그렇게 창대하고 지옥가면 어떻게? 그러고 보면 창대한 사람 많이 봅니다. 프라이팬 이제 이해하시겠죠? 전부다 나의 구원, 내가 살아있다고 존재하는 게, 내 이야기 아닙니다. 전부다 주님의 자기업무고요. 자기 숙제지, 뭐 내가 꾸며놓은 가짜로 설정한 나라는 이미지하고 아무 관계없어요. 그것을 소급해서 봐야 되는 겁니다.
향유를 조금씩 뿌린 게 아니고, 두고두고 놓고, 적금 붓는 게 아니고, 한꺼번에 다 깼다는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함으로서, 우리가, 내가 지금까지 속해 있던 이 세상이 사실은 어둠의 세계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어둠의 세계요, 죽음의 세계다. 죽음의 세계인 것을, 죽음의 세계인 본인들이 못 알아 본거에요. 왜? 만화 속에 납작이 엎드려 있고,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 의하면 그들이 뭐냐 하면은 바로 그들이 ‘소경’ 그들이 소경. 본다고 하는 소경이에요.
그런데 소경에게 누가 터치 했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터치 하니까, 소경은 그냥 눈만 뜬 게 아니고 뭘 봤어요? “아!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걸 알지요. 나사로에게 주님이 관여 하니까, 나사로도 “아! 내가 전에 살았던 것은 사실 죽음이고, 주님과 함께 있는 이것이, 살았던 죽었던 상관없이 이게 영생”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이제는 12장을 넘어서서 요한복음 20장까지 가는데, 20장 미리 봅시다. 20장.
20장 29절을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20장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29)
보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지요? 자, 보지 않고 믿는 다는 말은, 이 말씀은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에요. “네가 네 믿음에 대해서 한번 점검해봐라.”는 거예요. “네가 나를 믿는다고 우기는데, 네가 보는 걸 내가 한번 철거 시켜볼까? 그걸 한번 빼 봐? 그래도 내가 믿으면 믿음이고, 네가 은근히 기대 했던 거 빠지면?” “어이구, 내가 이럴 줄 몰랐지.”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가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고 믿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고 믿는 것으로 시작 했더라도, 슬슬 뭘 빼겠다? 보고 믿은 요소를 전부다 와장창 다 빼버리겠다는 거예요. 보고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상되는 결과를 의미해요. 예상되는 결과를 미리 아는 거. 이것을 예상 안 되게 만들겠다. 라는 겁니다. 본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뜻이니까, “요렇게 하면 요렇게 되겠지. 기도하면 우리 애가 공부 잘하겠지? 요렇게 하면 요렇게 되겠지.” 이런 것을 왕창 빼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사도 바울이 사형선고를 받았잖아요.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자기 개인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든 주석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형선고 받았다는 것은 아시아에서, 아시아라는 것은, 터키 때 이고니온에서 돌아 맞아 죽을 뻔한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에베소에서도 사실 죽을 뻔 했어요. 그 이야기인데,
죽을 뻔 했는데 꼭 참으니까 나중에 뭐, 환난을 참음으로 구원받았다. 개인 구원 말하는데,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환난을 준 것은, 사도 바울이 속해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빼내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하는 겁니다. 주께서 어떤 일을 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형선고라 하는 것은, 어려울 때만 사형선고가 아니고 사도 바울 존재 자체가 사도가 되고 난 뒤, 모든 행적들이 전부다 사형선고 받은 형국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움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아는데, 알죠? 그러니까 풍부에 처하면 사형선고 안 받은 겁니까? 맨 그분이 그분인데? 똑같은 분인데, 사도 바울 똑같은 분인데.
그래,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풍부할 때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렇게, 이렇게 할 사람이에요? 풍부할 때도 누굴 본다? 그리스도를 볼 사람이고, 어려울 때도 누구 본다? 옥에 갇혔을 때도, 오직 하늘, 땅을 생각하지 않고 주를 볼 사람이죠.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사형선고 받았다는 말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독한 세상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삶이 그대로, 성령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든 것이 바로, 로또 당첨되는 예를 들었고, 또 예를 든 게 뭐냐 하면은 “그래! 우리 애들이 공부를 잘하네!” 애 공부 잘하는 것이 바로 내 발목을 잡는, 사형선고를 흐릿하게 만드는 세상적인 유혹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공부 잘해가지고 그래도 판사 되는 걸 보고 죽어야지”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공부 잘하는 건 잘하는 거고, 주여! 오늘 밤에는 낙원에 있으리라. 난 그게 더 좋아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 자식들이 공부를 그렇게 잘하고, 또, 딸이 스무 살 들어가고부터 예쁘기는 왜 그리 예쁜지, 김연아 저리 가라하고, 주위에선 미스코리아 나가라. 미용실 갈 때마다 미용실 원장이 조금만 머리 올리면 완전히 이거는 미스 서울이다. 왜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전부다 나한테는 뭐다? 뭐다 말입니까? 주님 앞에서는 사형선고감이다 이 말이죠.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설교가 너무 비참하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 행복한 사형선고. 그게 7절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요12:7)
“계속해서 그 여인이 하는 일이, 계속해서 번지도록 하라. 왜냐하면, 네가 보기에는 마리아로 보이냐? 너희들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결과물로 보아라. 예수님이 그와 함께 살아있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제2의 나사로와 제3의 마리아의 오빠라고 봐라.” 말이죠. 이게 성도입니다.
자, 그다음에 9절 보겠습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요12:12) 방금 이야기가 나오네요. 유대인의 큰 무리가 여기 계신 줄 알고 보니, 그 다음에 10절을 봅시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12:10) 그러니까, 보세요. 예수님이 벌여놓은 일이, 판이 커졌어. 이제는 누구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까?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지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이죠. 그러니까 모든 일이 지금 눈에 보이는 일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승천하고 난 뒤에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은 뭡니까? 결국은 예수 믿는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곧 누구를 건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누가 믿어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나는 여기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성령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이거는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계속해서 나와요.
“바울아, 바울아, 네가 홀로, 천사가 네 옆에 있다.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 있어야 된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주님이 함께 있었고, 성령께서 우겨쌈을 쌓여도 쌓이지 않게 만들었고, 그러한 나 같은 이러한 일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누가복음 16장에 서두에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여러분, 들어봤지요? 불의한 청지기 알지요. 자, 누가복음입니다. 빨리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성도가 돼요. 이 말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십자가를 앞으로 당겨 버리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일어나는 일은 그게 남의 일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12년 동안 병들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만 나았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다 눈에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 승천하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은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 부활해도, 그냥 승천 한 게 아니지요. 40일 동안 저들과 함께 있었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식의 활동과 보이지 않는 식의 활동이 넘어서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니까 제자들이 만지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만지지 마라!” 했습니다.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갈 때가 되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스라엘 회복 할 때가 언제입니까?” 이렇게 하니까 “그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경계선상에 있을 때에, 경계선상에 있는데 예수님이. 그 경계선상에 “내가 이젠 승천하고 올라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될 때에는 누가 보이는 역할을 해야 되냐 하면 바로, 너희 성령 받은 너희들이 이 땅에서 옛날 예수님이 보이던 시절의 역할을 너희들이 담당해야 된다.
그래서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이 예수한테 한 것이다.” 우리들의 신분이 이렇게 고귀합니다. 비록 청자켓을 입고 왔지만, 주님의 놀라운 영광스러운 자켓으로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이 신분이 천사가 부러워하는 신분이에요. 천사가 말합니다. “나한테 절하지 마라!” 오히려 자기가 사도 요한한테 절 할 입장이에요. 왜? 주께서 했던 그 일을 그대로 하기 때문에.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공통점이. 일단 초라하다. 그리고 가진 게 없다는 거, 또 배운 게 없다는 거.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죠. 가진 자를 부끄럽게 만들고, 똑똑한 자라도 부끄럽게 만들고,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만들죠. 이렇게 그들한테는 우리의 모습이 십자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미련하고, 뭐로 보인다? 어리석게 보이는 거예요.
“저 인간들은 뭐, 행하기는, 행함은 개떡치기고, 그냥 뭐,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 받았다. 십자가 이야기 밖에 안하지 않느냐?” 굉장히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뭐가 된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네모요. 네모 안에 뭐?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니들이 나하고 같아? 어디? 어디를 넘봐?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봐! 보이는 것만 봐!” 계속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사고방식으로 그저 큰 거, 위대한 거, 부자 되는 거, 애 공부 잘하는 거, 출세하는 거, 성공하는 거, 큰 교회 목회하는 거, 그런 것만 보이지요. 그러나 예수님하고 똑같은 대우를 그들은 하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복음으로 목회 하면 성공할 줄 알았지요? 성공할 줄 알았지?~ 30명 교회에 12명되고, 10명 교회 5명되고, 나중에 사모님하고 툭, 사모님도 이제는 의심돼. 그러니까 뭐냐 하면 “십자가 복음도 목회에 도움 안 되는구나. 버리자.” 진작에, 진작에, 진작에 그렇게 해야지! 그게 열두제자의 배신이에요!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 할 때는 뭐, 진짜 뭔가 되는지 알았죠. 세상에! 체포되어 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체포 되는 데까지 힘 안 써.
체포되고 우루룩. 십자가에서 “이따구 십자가~” 거꾸로 매고, 이렇게 엎어버리고, 우두둑! “주여, 떨어지게 하옵소서.” 해가지고 삼손처럼 이렇게 할 줄 알았지? 조용해요. 고린도후서 13장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십자가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연약하사 십자가에 죽으신’ 끝까지 연약해 갖고, 끝까지 약해 갖고. 저는 성도 이름 지을 때, 한나, 다윗 그런 거, 조다윗 그런 거 좀 짓지 말고, 네? 이연약, 김연약 이런 거 지었으면 좋겠어요.
뭐 꼼수를 노리지 말고, 꼼수 있잖아요. 뭐, 끝까지 그냥. 좀 심하게 말하면 김거지 이런 거.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연약한 거. 왜? 눈에 보이는 인간들은 하여튼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기능으로 그렇게 기능하십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러면 부자는 없다 말입니까? 아니지요. 그럼 우리 꼭 공부 못해요? 아니죠.
부자 되게 했는데 “이놈의 돈 40억이 발목을 잡는 구나.”이런 식으로 돈에 얽매이지 않고, 그런,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 뭐 주시면 챙겨야지요. 주시면 챙기는데,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전에 했지요. 탕웨이의 이야기. 열 번쯤 한다. “놓치지 않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못 들었어.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만큼 뭘 안고 하는 것처럼. 절대로 빼앗기지 마세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주시는 이유가 “네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어느 쪽에 총기가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이제 요한복음, 우리가 저, 몇 장입니까? (요11,12장)한 것처럼 다시 한 번 합니다. 십자가 전까지는 눈에 보인다고 했지요? 그래서 나사로를 죽이려고 합니다. 나사로를 죽여 봤자, 나사로는 관계없이 살았어요. 그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도 죽이고, 나사로를 죽이고, 이제는 성도라는 사람에게 욕하고, 으레이 그래야 될 세상인 것을, 우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어야 됨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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