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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27 / 결 / 160705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1:27 / 결 / 160705

정인순 2016. 7. 6. 09:0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충성모

요한복음 11장 27절(가락-결)160705a-이근호 목사 

1강, 오늘은 요한복음 11장 27절부터 보겠습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그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이러한 인간 쪽에서의 답변은 예수님께서 앞에 무슨 말을 하시고 난 뒤에 나온 답변입니까? 그 예수님의 말씀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 독촉을 했지요. 내게 너한테 요구한 데에 대해서 네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 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반응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였습니다. 앞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하고 뒤에 마르다가 하는 이야기하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면) 잘 안 맞아요. 잘 일치되지가 않습니다. 일치되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느낌에 대해서 뭔가 빠뜨린 게 있어서 그런 거에요. 어떤 것을 빠뜨렸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네가 구원 받을 거야. 안 받을 거야. 구원 받기 싫어? 구원 받기 원해?”라면서 구박한 것처럼 보이는데 거기에 대해서 마르다는“예수님은 그리스도잖아요.”라고 답변했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너 비빔밥 먹을 거야, 아니면 짬뽕 먹을 거야?”라고 했는데 답변하는 사람이 대뜸 “예수님은 주방장이잖아요.”라고 한 거에요. 우리라면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짬뽕.” “짜장면.”이라고 할 건데 “예수님은 주방장이잖아요.”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현대인들처럼 구원이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구원 되고 말고는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지금 주고받는 대화에 대해서 잘 연결이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현장에 있는 마르다보다 오늘날 현대인들, 우리들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점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할 때 ‘아, 이건 구원에 관한 문제구나.’라고 우리는 알아들었는데 마르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예, 저 예수 믿습니다.”라고 한 것이 아니고 “주는 그리스도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모든 성경이나 기독교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냐, 아니면 복음에 관한 이야기냐 이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생각하기를 이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다.” 또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자기는 아무 수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주는 대로 그냥 낼름 받으면 되니까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삐라를 부치고, 헬리콥터에서 삐라 날리면 그냥 보고 읽으면 되잖아요. 그렇다면 이건 헬리콥터에서 내려온 전단지, 계시이고 우리가 보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은 하늘에서 나풀나풀 전단지가 내려오면서 전단지를 읽어보려고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너는 그걸 읽어볼 자격이 애초부터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성경책, 계시는 인간이 받아서 읽어볼 권한조차도 없어요. 그러면 그 전단지는 어디로 갑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말씀처럼 예수님 쪽으로 가는 게 복음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우리는 개무시 당하는 거지요. 그렇게 무시를 당하라고 계시를 주신 거에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무시를 안 당하려고 교회에 가는 겁니다. 교회에 가서 진짜 발길로 차이고 망신을 당해야 돼요. 망신을 안 당하면 사람이 안 됩니다. 태클 없는 축구가 무슨 축구겠어요? 망신을 당하고 깨지고 멍들어서 온 몸에 멍투성이고 뭔가 인간 자체가 왜 우리한테 직접 계시를 안 주고 중간에 예수님이 왜 끼어드는지에 대한 번민과 갈등과 의문점이 발생돼야 돼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교회가 장사하는 곳인 줄을 뻔히 알기 때문에 “고객은 왕”이라고 해가지고 손님대우 받느라고, “교회 왔다. 나 대접해라. 나를 천당 보내면 약간의 성의는 표할게.” 이런 자세로 교회에 오는 거에요. 진짜 면상을 군화발로 차도 “아이구,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될 건데 교회라는 데에 무슨 자랑질을 하겠다고 옵니다. 거기에다가 당회장 목사님은 “어서 오시옵소서. 다른 교회에 안 가시고 이 교회에 오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해가지고 왔다고 찬양해주고 앞에 세워서 온 축복이란 축복은 다 동원시키고 꽃가루 뿌리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대환영을 해주고 말이지요. 

죄인이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환영을 해요. 탕자도 아닌데..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생각하기를 ‘나에 대해서는 알고 모자라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면 되니까 나를 아는 데에다가 추가해서 하나님마저 딱 갖다붙이면 더는 이제 나는 세상에서 모르는 게 없다.’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마저 알았으니까 이제 다 안 게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뻔뻔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이 현대인들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복음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죽음은 특수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일반성(보통) 속에 특수성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인간들은 “나는 죽기 싫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일반성이에요. 마르다가 예수님한테 닦달 내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오빠, 내 목숨 같은 오빠를 왜 죽이십니까?” 이것 때문에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오빠를 왜 죽였냐고 닦달 내는 것의 뜻은 “나는 죽기 싫어. 절대로 죽기 싫어. 내가 절대로 죽지 않고 살리는 방법이 있어서 그것을 하나님 쪽에서 내게 제시하면 얼마든지 내가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때의 마리아도, 마르다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회에 안 다니는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에 생전 안 나가다가 죽을 병에 걸려가지고 목사가 기도해서 나으니까 그때 비로소 교회에 나오는 거에요. “아이구, 큰일날 뻔했다. 죽을 뻔했다.” 죽을 뻔해서 나왔다는 거에요. 그렇게 해도 벌써, 이미 그 사람은 죽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음에서 나올 사람을 찾습니다. 죽음에서 나올 사람이 되려면 우리를 죽음에다가 강제로 전부 다 몰아넣어야 돼요. 집어넣어놓고 영생을 얻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구분해내시는 겁니다. 일방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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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습니까? 만약에 착한 사람만 건져내버리면 (아까 이야기한) 일반성을 특수한 주님이 인정해주는 셈이 되어 버려요. “그래, 너 인간이야?” “예, 인간입니다.” “인간이냐? 그럼 내가 살려줄게.” 그런데 인간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인간이지요. 그러면 일반성을 그대로 옹호한 셈이 되잖아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보내셔서 예수님이 올 때에 보통 사람으로 왔어요.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잖아요. “요셉이 이방 제사장의 딸하고 결혼해가지고 므낫세, 에브라임을 낳았는데 어떻게 거룩한 약속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하고 결혼을 할 수 있느냐?” 참 귀한 질문이고 좋은 질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했지요. 요셉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요셉도 일반인데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복음은 결과적으로 나와야지, “나는 특수한 사람이다.”라고 버텨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요셉이 종으로 팔렸잖아요. 자기 딴에는 꿈을 꿨지만 누가 봐도 개꿈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겁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이 예수님한테 요구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내 앞에서 기적을 베풀어봐라.” 쉽게 말해서, “야, 이 보통 사람(일반인) 중에 하나인 예수야. 네 아버지는 목수고 너는 목수의 아들인 이 보통(일반) 사람아, 이 평범한 사람아. 네가 만약에 메시아라면 우리가 기대하는 특수성을 보여라.”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할 때 왜 예수님께서 호응을 안 해줬느냐 하면은 그 말에 호응을 해줘버리면 일반적인 가운데에 이미 특수성이 있다는 것으로 인정해주는 게 돼요. 그 특수성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자기들은 자부하거든요. “우리만큼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도자로 인정해줬다.”고 생각하는, 자기 나름대로 일반하고 격리된, 특출한 특수성을 이미 유지하고 있는 쪽에서 나온 기준을 갖고 있단 말이지요. 

“자, 우리가 심사하겠다. 우리는 심사할 만한 자격이 있어. 예수야, 이리 나와봐. 우리가 심사해서 통과하면 나는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해줄게.”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거기에 호응을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렇게 호응을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바리새인이나 예수님이나 전부 단짝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자기들이 특수한 계층이라는 것을 본인들만 주장하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유대 나라에 일반인들도 그들의 가치성을 인정해줬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에 의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너무 훌륭하니까 훌륭한 사람들을 우리가 인정해주자.” “그래, 인정해주자.” 벌써 인간들끼리 일방적으로 특수한 계층과 보통 사람으로 구분을 지어놓았다 이 말이지요. 

그 구분이 되어 있다고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어주면 그 체제 있잖아요? 그 체제를 주님께서 정당한 체제로 인정해주는 셈이 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거에요. 그런 경우가 오늘날 교회에도 빈번합니다. 목사가 서리 집사에서 장립 집사가 되려는 후보자를 부릅니다. 당회장실로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부릅니다. 그리고 “저, 김집사님 올해는 장립 집사가 되어야 되는데 김집사, 십일조 하지요?”라고 묻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에는) 헌금을 누구한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근본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잖아요. 자기(목사)가 왜 묻습니까? 십일조를 하든, 십의 구조를 하든, 0.005%를 하든 자기가 왜 물어요? 묻는 이유가 뭡니까?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이미 신앙이 좋다고 그쪽 동네(교회)에서는 규정화가 되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규정을 따라주지 아니하면 당신은 장립 집사가 못 되고 장립 집사가 못 되면 장로가 못 되고 장로가 못 되면 마누라가 권사가 못 되고 장로가 못 되면 당신이 회사에서 장로가 아닌 그냥 보통 집사인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 직장 생활에 있어서의 신임도에 약간 차질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라고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장로입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의 말이 믿을 만하구나.”가 되고 “그냥 집사입니다.”라고 하면 “날라리구나.” 이렇게 되기 때문에 한 교회에 오래 머물러서 빨리 장로급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장로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이 투표를 해야 되잖아요. 이 투표의 위력이 대단해요. 국회의원들이 왜 큰소리를 치는데요. 주민들이 투표했잖아요. 그러니까 시장이나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지요. “당신은 투표하면 몇 표 나오겠습니까? 나는 이만큼 나왔는데..” 자기의 팬들이 그만큼 많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투표를 해서 장로가 되면 그 교회에 그만큼 지분을 갖는 거에요. 그런데 그 귀한 경로 중간에 목사가 그것이 귀한 줄 알고 “십일조 얼마 합니까?” “예, 아파트 부금도 넣어야 되고 해서 못 했습니다.” “아, 우리교회는 십일조를 해야 장립 집사가 되는데요. 모범이 되어야 되거든요. 십일조 할 거죠? 지금은 안 하지만 앞으로 할 거라는 조건 하에 서약을 받고 제가 후보감으로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기준을 누가 정했습니까? 전통적으로 목사가 정한 겁니다. 목사가 십일조를 하니까 교인들이 오해하기를 ‘목사님도 역시 믿음이 좋아서 십일조 하시나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목사의 십일조는 믿음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십일조는 계산을 해서 나중에 퇴직할 때 퇴직금으로 다시 돌려받아요. 자기 연금을 붓는 것에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예수님께 기적을 베풀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반대로 가버려요.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고 했지요. 바로 그 자리를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신명기 21장 21절에 나온 말씀인데요.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미 그것은 누가 정했습니까? 이미 바리새인 쪽에서 정했지요. 신명기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했건 간에 그들의 입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라고 나름대로 해석해서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은 그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는 거에요. ‘저게 내 자리다.’ 왜?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누구의 기준? 인간들의 기준. 어떤 기준? 인간들이 부러워하는, “저게 믿음이야. 저게 천국 가는 사람이야.”라고 정해놓은 그 기준과 정반대 지점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입니다. 

유대인(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기면서 금식을 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옳다구나. 저것의 반대로 하면 돼.” 청개구리 신자에요. 동으로 가라고 하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고 하면 남으로 가고. 그래서 진짜 그 교회에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주의 마음이겠지만. ) 십일조는 없으니까 소득의 10%를 꼬박꼬박 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목사가 와가지고 “십일조를 하십니까? 십일조를 하셔야 잘 됩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십일조를 안 내야 되지요. 왜? 주님의 공식에 의하면 “하라.”고 했기 때문에 안 해야 되는 겁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안 하면 돼요. 그게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이미 특수적인 존재를 상정해놓았어요. 그리고 그 외에는 비리비리한 자들이에요. 그냥 지시나 통제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지시받고 통제를 받는 자리에 주님은 자기의 특수성을 그 안에 만들어내십니다. 물론 아버지의 뜻이지만. 그래야 그들이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 되거든요. 그들이 어지간히 기피하지 않았으면 못 박으라는 소리까지는 안 했잖아요. 그런데 얼마나 기피했으면.. 그런데 무엇이 기피하는 계기가 되었느냐 하면은 그 모든 장소 가운데 특수한 장소가 성전인데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건드린 겁니다. 

성전을 건드리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은 거룩한 장소가 없어져요. 성전이 없으면 거룩한 계급도 없어집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도 의미가 없어져요. 그리고 제사장이 없어지면 십일조를 받을 이유도 없어져요. 거룩한 장소인 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또 거기에 하나님께서 지정한 계급인 제사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만 받으시기 때문에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십일조가 있어야 된다는 논조가 그들의 논조였습니다. 박하와 같은 소산물의 십일조를 받았잖아요. 왜? 이것을 받아서 제사장이 밥을 먹고 살아서 성전이 유지가 되어줘야 하나님을 그 지점을 받고 그 행동한 행위를 받기 때문에 십일조 안 하고 헌금 안 하고 성전세를 안 내면 이 사람은 신의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진짜 성전은 따로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구약에서 성전세를 내라는 것의 의미는 뭡니까? 그것은 가짜 성전을 유지하는 인간들이 달라고 하는 게 아니고 진짜 성전이 있음을 알려주는 성전세가 나와야 되잖아요. 그게 주님께서 “물고기를 잡아라”라고 한 거에요. 잡아서 아가리를 벌리니까 더도 덜도 말고 딱 성전세가 나왔잖아요. 그러면 성전은 누구입니까? 물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 본인이지요. 그 예수님 안에 이미 성전세가 들어있지요. 그러면 성전세를 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성전이 완료가 되었는데 성전이 왜 필요해요? 성전이 예수님 몸으로 지금 잘 유지가 되고 있는데 성전세가 왜 필요합니까? 돈 몇 푼을 더 주면 예수님이 배부르셔서 더 성전이 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 지금 누가 계시다는 겁니까? 성령이 계시잖아요.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지요. 그러면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성령을 받아버리면 우리도 이미 성전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성전세가 필요합니까? 오히려 성전세를 받아야 돼요. 목사를 보고 “십일조 내놔.”라고 해야 돼요. “왜?” “내가 성전이니까 내가 받아야 되겠어.” 사실은 받을 필요가 없어요. 받아서 유지하는 게 아니고 이미 성전 자체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주의 성령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 돈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가 없는 거에요. 

구제라고 하는 것은 구원에서 나온 거에요. 아까 첫째 동영상 강의할 때 말했지만 구원이 퍼져서 구제가 되는 것이지, 구제가 구원으로 넘어설 수가 없는 일이라는 거에요. 아무리 구제해봐도 그 사람은 천당에 못 갑니다. 예수님의 피로 가야지 무슨 돈을 받아챙겼다고 구원을 받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람을 달래는 용도로 돈을 줘요. 다시 말해 돈을 사람 유인책으로 사용하잖아요. 돈을 주니까 사람이 교회에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돈이 있다는데 왜 안 와요? 그러니까 교회에 오고 지옥에 가는 거에요. 그런데 돈을 계속 안 주면 삐져가지고 교회에 안 나와요. 결국 누가 그렇게 망치게 했습니까? 유사 성전. 

조금 더 해봅시다.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반성에서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있으라는 거에요. 그 다음에 특수성은 누구의 작업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보냈을 때에 여기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마저도 특수성이 아니에요. 세례 요한마저도 나중에 예수님이 너무나 보통 사람이 되어놓으니까 의심해가지고 “당신이 오실 자가 맞습니까?”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특별해야 된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예수님(특수성)은 일반성 속에 우리가 기대한 대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대한 대로 그때그때마다 특수성이 일어납니다. 

이 특수성이 일반성 속에 들어오게 되면 “아, 놀랍다.”가 아니라 “낯섦”, 낯설어요. 낯설다고요. 성령을 받은 성도(우리)가 사는 인생을 보게 되면 놀라운 게 아니에요. 기이하고 낯설지요. 자기의 인생이 자기한테 낯설다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돌았나?, 내가 미쳤나? 내가 지금 착각한 게 아닌가? 있지도 않은 하나님, 있지도 않은 천국이 있다고 내가 누구한테 그렇게 강렬하게 세뇌와 최면을 당했지? 내가 바보도 아닌데 이젠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너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깨어있어야 돼. 성경이라는 옛날 구닥다리 동화책에 네가 말려들면 안 돼. 창세기를 읽어보겠다고 하는데 안 돼, 그러면 안 돼, 창세기는 옛날 만화책이야. 시편, 욥기 그런 것은 다 지나간 책이야. 읽으면 안 돼.’ 

그러면 안 읽어보시지요. 안 읽어보니까 그렇게 편하던가요? 성경이 나를 무시하기 전에 나부터 먼저 성경을 개무시할 수 있는 그만한 권한이 나한테 없습니까? 그만한 권한을 발휘할 수 있잖아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인데.. 내가 최고인데, 결정해도 내가 결정하고 선택해도 내가 선택하고..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그래, 결심했어.’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과 맞상대를 하려는 거에요. 하나님과 맞상대를 하기 때문에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으나 마나에요. 내가 잘났는데 중간에 예수님이 왜 필요합니까?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의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었어요. 하늘에는 잘난 하나님이 계시고 그에 못지않게 잘난 내가 땅에 있는 거에요. 율법에 흠이 없는데. 그러면 됐지 뭐에요. 

하나님이 계시고 목사가 있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나, 그리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지키면 나는 구원을 받잖아요. 하나님은 내려다보고 찰칵찰칵 카메라로 CT 막 찍고 있고 찍든 말든 나는 오늘도 하늘을 우러러보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별을 헤면서 살아가는데요. 이 당당한 나. 뭐 꿇릴 게 없는데. 나 때문에 피해본 사람도 별로 나타나지 않고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신앙이 좋은 것 아닙니까? 이런 신앙으로 어느 교회에 가보세요. 나보다 신앙이 다 못하지.. 이 정도 신앙이면 1등급인데.. 그게 최고인데요. 

그것은 예수님의 특수성이 어느 곳에서 발견되었는지를 몰라서 그런 거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목사와 같이 위쪽에서 발견된 게 아닙니다. 누구나 가기 싫은, 정말 누구나 낯설기 짝이 없는, 그걸 사건의 솟아오름이라고 합니다. 사건이 내 존재의 층을 뚫고 솟아올라와 버려요. 내가 나에 대해서 낯설어요. 이런 나는 전에 내가 기대했던 내 모습이 아니에요. 미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뭔가 이상해요. 그리고 내가 이상하게 변해가요. 남들처럼 되고 싶어요. 그런데 남들처럼 되는 게 용납이 안 돼요. 내 인생을 가만히 두지를 않는 것 같아요. 

여기도 목사님들이 계시지만 남들처럼 그렇게 못 산다고 하는데 저는 이야기해요. “남들처럼 그렇게 목사해 보지요.” “어떻게?” “목사 모임에 가면 돼요.” 목사 모임에 가면 낚시하는 이야기, 놀러간 이야기, 교인들 자랑, 그 이야기 하고 나중에 냉면 한 그릇 먹고 좀 태워주고 하면 돼요. 그런 데에 돌아다니면 돼요. 그리고 혹시 압니까? “우리 교회 바꿀까?” 하는 수도 있고, “우리 같이 공동목회할까?” 해가지고 취직도 되거든요. 복음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같은 동기생으로 만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왜 그 자리에 한 10년 만에 정석훈 목사님처럼 50살이 되어서 가보니까 토하고 싶으냐 이 말이지요. “욱, 가만히 있어봐. 욱. 욱.” 왜 갑자기 구토가 일어나느냐 이 말입니다. 구토라는 말은 『십자가를 아십니까』라는 책에 보면 나와요. 요한계시록에 토하고 내치리라고 했거든요. 왜 그들이 사기꾼으로 보이고 조희팔로 보이는지요. 조희팔 같은 참 질나쁜 사기꾼, 더러운 사기꾼으로 보이느냐 이 말이지요. “부족합니다.” 왜 이런 소리가 세미한 근육의 떨림으로 다가오느냐 말이지요. 진짜 성질 나서 때려죽이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이 막 들어요. 왜 그렇습니까? 

인간들은 일반성에 속하고 예수님만 특수한 분이에요. 그리고 예수님 속에는 성령이 계시잖아요. 성령께서 자기 백성(일반성)을 찾아오게 되면 특수한 데에서 확장된, 특수한 종들, 주의 백성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그런 특수한 자들의 모임이 일반성이 되어 버려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역사의 순서는 십자가 다음에 부활로 되어 있지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되면 십자가는 잊어도 좋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된 주님께서 찾아오시니까 부활에서 다시 십자가로 가는데 처음의 십자가는 일반적인 십자가인 반면에 마지막 십자가는 오직 성도라는 특수한 것을 만들어내는(생산해 내는) 특수성이 되는 겁니다. 

전에는 피를 믿었습니다. ‘그래, 피를 믿고 용서받자.’ 피를 대상으로 삼고 바로보고 피를 믿고 피를 가졌는데, 이제는 “피 안”에 살아요. 성도는 “피 안”에 사는 사람이지 피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피를 받아다가 오른손에 찍어바르고 왼손에도 찍어바르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피 안”에 살아요. 그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고 또 문설주에다가 바르는 것인데 그것의 뜻은 그 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통째로 어린양의 피의 혜택, 피의 효과를 그대로 입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 중 하나만 교회에 다니면 나머지는 다 천당 가겠네.”라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할례를 행했잖아요. 할례라는 것이 개인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설명을 해야 됩니다. 

개인 구원, 개인 부활은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구약 때부터 할례를 받은 자는 다른 가족들과의 연관성에서 할례를 받은 자가 가족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할례를 받은 자가 있고 그 자식들이 있고 그 아내가 있다고 했을 때 “나 할례를 받았다. 너희들을 대표해서 받았으니까 내가 알아서 너희를 구원해줄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할례가 가족과의 관계성 속에 주님이 경영해서 이 안에 들어와 버리면 이 안에 약속에 대한 성취성이 들어있습니다. 약속의 완성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은 것 속에 (여자들은 할례가 없잖아요.), 그 관계성 속에 약속의 완성이 들어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약속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은 어떤 분인신가 하면은 자기 백성의 죄를, 예수님 자신이 그냥 자기만 구원 받겠다고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고, 죄를 대신 가져야 될 자기 백성들이 있어요. 그게 구약에서는 할례라는 형식으로 이미 여기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때문에 가족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할례 속에 내주하시는, 장차 오실 메시아 때문에 이 아버지에 속한 가족은 구원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할례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잖아요. 이삭도 할례를 받았지요. 할례를 안 받았어요.) 할례는 누가 받는 겁니까? 장차 중간에 개입하시는 예수님만 진짜배기 할례를 받으신 거에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 세례가 되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이니까 그냥 미리 당겨서 할례라는 형식을 했을 뿐이에요. 

그 율법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할례의 효과가 할례 받은 가정으로 다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그런 조건하에 있어요. 그러면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게 뭡니까? “그러면 나는 특수자다.”가 아니고 “특수자 안에서 산다.”라고 해야 돼요. 특수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뽑혀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꾸 “나는 이렇게 해서 기도한다. 이렇게 해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내세우면 안 돼요. 본인이 단독적으로 행동하고 단독적으로 자기의 가치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경유해서 대인관계에 나서는 거에요. 그렇게 되는 거에요. 

복음을 모르는 남편이 헤어지자고 하거든 갈라서라고 하고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거든 갈라서라고 하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에요. 항상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이제 아까 처음에 했던 것의 해답을 내리겠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했을 때 (구원을 받을래, 안 받을래 우리의 선택에 맡긴 게 아니고)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미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고 오빠도 존재하고 내 동생도 존재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주를 위한 일입니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믿는다고 할 때 내가 단독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없지요. 믿음은 선물이라고 했잖아요. 선물.. 선물이라는 말은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여자한테 프로포즈를 하면서 다이아 반지를 담은 통의 뚜껑을 탁 열고 꿇어앉아가지고 드라마에서 그렇게 하던데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가 젊을 때 청혼할 때는 미쳤습니까? 꿇어앉아서 그렇게 하게요? “됐나?” “됐다!”라고 하면 끝나는 거지, 뭐, 꿇어앉아서 다이아반지를 줍니까? 하여튼 다이아반지를 딱 열어서 줄 때 여자가 “고맙다. 다이아야.” 하고 다이아만 끼고 도망갑니까?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가 배신하면 때려죽이는 겁니다. 줄 것을 다 줬는데 달랑 챙기고 “나는 다른 남자 사귈 거야.” 이래가지고 화가 나서 찾아가가지고 불지르고 난리가 나는 거에요. 

다이아를 줬다는 말은 “이제 너는 빼도박도 못 해.” 그런 뜻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너는 이제 빼도박도 못 해. 너는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라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어.”라는 뜻입니다. 왜? 그 효과가, 그 능력이 너로 하여금 일반적이지 않게 했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보통 사람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특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느 정도로?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못 살 정도로 특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특별함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어요. “주여, 믿었으니까 기도하면 병이 낫게 하옵소서.” 이렇게 자기가 생각한 특수함을 기도라는 것을 통해서 자꾸 끄집어내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안수하면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게 되고 내가 어느 교회에 등록하면 갑자기 그 교회가 30배에서 50배로 번성되고 자꾸 어떤 실적과 업적을 찾을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왜? 그렇게 되면 내가 생각한 특수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사람이 우리교회를 보고 이야기하기를 “그렇게 진리를 전하면 왜 사람수가 그것밖에 안 되느냐?”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노아의 방주는 큰데 왜 사람들은 여덟 명밖에 안 들어갔어요?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이 되게 하셔야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신천지는 숫자가 많으니까 신천지에 가지요. 자꾸 어떤 실적, 주께서 함께 하시면 놀라운 실적이 생길 거라고 하는 거에요. 기도하면 30배, 60배의 재물이 들어오고.. 30배라고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요 롯데의 딸은 30억을 받았어요. 면세점 허락해주면서요. 30배, 60배 막 나오네요. 예수님이 오빠 살리고 난 뒤에 나사로가 재벌이 되었습니까? 어디 놀라운 재벌이 되었어요? 아니에요. 욕만 되게 얻어먹었다니까요. “죽으면 죽지 왜 또 살아서 기어나와가지고..”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갑자기 영부인이 되었어요? 아무것도 안 되었어요. 제가 장담하는데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낯선 사람이 되었어요. 누가 보기에? 본인이 본인을 보기에 낯선 사람이 되었어요. 특히 오빠 나사로는 정말 자기가 봐도 신기해요. 죽었으니까 제대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가 아니고 군에 또 가게 생겼으니까, 군에 두 번 가게 되었으니까 정말 이런 낯선 것이 어디 있어요? 진짜 사나이인가요? 뭐가 좋다고 세상을 두 번 살아요? 

그러니까 항상 예상 밖이에요. 그렇다고 해가지고 나는 일반인이 아니고 특수하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난 뒤에 산 속에 들어가서 스스로 굶어죽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생각한 또 특수한 것 아니에요? 가난이라는 것,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 10, 11장 본 게 나빠요.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고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지팡이 하고 뭐 들고 돌아다닌다는 거에요. 자기가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김삿갓도 아니고 왜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에요? 노숙자도 아니고.. 그냥 집구석에 앉아있지 돌아다니기는 열심히 돌아다녀요. 민폐만 끼친다니까요. 

자꾸 특수한 무엇, ‘이렇게 하면 놀라운, 어떤 신기한 것을 얻을 것이다.’라고 상상하는데 창작하지 마세요. 그것은 본인들의 욕망입니다. 그만큼 본인들이 믿음이 없다는 거에요. 믿음이 없으니까 자기가 상상한 무엇이 생겨야 “그때 가서 믿겠습니다.”라고 하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한 거에요. 정답은 “그냥 사세요.” 하던 대로 그냥 살아도 얼마든지 특수자입니다. 왜? 얼마든지 그냥 평범하게 사는데 이 사람이 평범함 사람 이상이에요. 이상한 존재가 되었어요. 아까 집사님이 지옥을 보았다고 하는데 우리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만 다른 데에 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장사가 안 되는지 드디어 완전히 맛이 가벼렸구나. 이제는 슬슬 말아먹게 되는구나.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걸로 도피하려고 하느냐?” 온갖 소리를 다 듣습니다. 특별하고 기발한 것 없습니다. 주께서 기발한 게 있으면 그걸 피해가요.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보통인데 그것을 주의 은혜로 아는 이것(우리)이 특수한 겁니다. 

그 다음 계속 봅시다. 우리의 본성은 절대로 죽지 않는 게 본성이지만 죽음 속에서 나온 사람만이 하나님의 특수함입니다. 죽음 속에서 나온 자. 이미 죽었고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참 이 이야기도 남들한테 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요. 그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 해야지 이걸 개나 소나 다 이야기해버리면 진짜 개한테 진주를 던지는 것밖에 안 되듯이 함부로 말하게 되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마르다하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마리아가 갔습니다. 32절~34절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마르다 다음에 누구의 차례입니까? 마리아의 차례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의 평소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오빠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저로 깔고 예수님은 어떤 예수? 내가 원하는 것, 우리 집안의 사는 것을 보장해주는 그런 생명보험 같은 예수라고 생각했던 것을 주께서 나사로를 죽임으로써 그 내막을 다 들통 나게 하신 거에요. 그걸 뜯어내지 않고 그것이 찢어지지 아니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특수한 존재가 안 됩니다. 그것은 진짜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밖에 안 돼요. 예수님이 왜 왔는지를 모르게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있고 나는 진짜 괜찮게 살고 예수님한테 좋은 관계를 하고 그러면 됐지 뭘 원해?” 이런 식이라니까요.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내가 철썩같이 믿은 그 밑바탕을 완전히 뒤집어놓아야 돼요. 좀 과격한 엄마라면 아침에 밥 먹으라고 해도 아들이 안 나오고 있으면 침대하고 침대보하고 완전히 전부 집어던져 버려요. “아이고 일어나세요. 아드님. ” 이런 소리 안 해요. 침대보에 둘러싸가지고 밖에 확 던져버려요. 주님께서 그렇게 완전히 “우리가 이것만은 못 놓습니다.” 라고 하는 걸 “고(그)래?” 하면서 집어던집니다. 확 빼버려요. “자, 이제 너 믿을 게 있나, 없나?” “없습니다.” 진작 그래야지.. 사람들이 믿는 게 있어요.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 그런 것을 꼭 쥐고 있습니다. 그게 보통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은 뭐를 믿었느냐 하면은 기드온의 에봇을 믿었지요, 그리고 모세의 놋뱀을 믿었지요, 전부 다 한 기적 했던 것들이 아닙니까? 거기에다가 만나가 든 항아리, 언약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 다들 그걸 신주단지 모시듯이 모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와 성전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싫어하는 바벨론(소위 말하는 인민군들, 더 무서운 게 있는데 IS)가 와가지고 자살폭탄으로 예배당을 뒤집어엎어버렸지요. 없애버린 겁니다. 감사해야 돼요. 내 힘으로 부수지 않는 신주단지를 주께서 이렇게 부숴주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에요.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것, 차마 내 손으로 망치를 들고 깨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깨주시니 세상에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을 깨니까 뭐가 보입니까? 비로소 십자가가 보이잖아요. 그것을 깨니까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토록 지독하게 나만 사랑하고 내 귀한 것만 챙기는 이 천하에 몹쓸 죄인을 노출시키는 그 능력인데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능력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나를 못난 자로, “모든 걸 빼앗기고 아프고 모든 것이 날아가도 괜찮아.”라고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위로하는, 정말 이상하게 위로해줄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윤복희? 여러분밖에 없습니까? 여러분입니까? 아니에요. 우리 주님밖에 없지요. 누가 날 위로해주지? 위로는 무슨 위로. 

다시 이야기합니다. 망신 당하지 않으면 인간이 안 됩니다. 망신도 그냥 망신이 아니에요. 개망신을 당해야 돼요. 개망신 당할 때 진짜 할렐루야가 나와요. 그런데 그런다고 인간이 되는 게 아니에요. 개망신 당하고 할렐루야 인간이 되었지요? 그 다음에 다음날부터 또 인간이 된 걸 신봉해요. 아이구 못돼 먹기도 하여튼. 이 육신 때문에.. 내가 5년 전에 인간이 되었다. 그걸 또 자랑삼아 돌아다니면서.. 그것이 또 뒤집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뒤집어져야 돼요. 

그래서 마르다가 담요 뺏겨서 뒤집어졌지요. 이제 마리아가 뒤집어졌지요. 이 가정이 완전히 전혀 예수님하고 뜻이 달랐다는 것이 티가 다 났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은 “내가 나사로를 사랑하노라”라고 했어요. 주님의 사랑을 누가 막았습니까? 누가 방해했어요? 본인들이 방해했잖아요. 내가 주님의 사랑을 지금 막고 있는 거에요. 주님은 지금 사랑의 화살을 쏘는데 커다란, 두께가 엄청 두꺼운 방패를 내가 쥐고 턱턱 그 화살을 다 막고 있는 거에요.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해가면서.. 사람은 줘도 문제에요. 줘도 자기가 다 막아놓고.. “사랑이 어디 있느냐?” 사랑은 없다고 해요. 자기가 화살을 다 부러뜨려놓고.. 주신 은혜를 다 부러뜨려놓고 “주님 내가 얻을 게 없는데 뭐를 줬습니까?” 이러고 있다 이 말이에요. 주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줬습니다. 10분 쉽시다.


요한복음 11장 27절(가락-결)160705b-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빠가 죽었습니다. 오빠는 육체적으로 죽었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살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는 점에서 실상은 여전히 죽어있는 입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어라, 다시 말해서 너 자신에 대해서 너 자신의 생각을 죽여라. 너는 이미 죽은 자고 주는 그리스도라고 했으니까 살든 죽이든 나한테 달렸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얼마나 간단한 복음(기쁜 소식)입니까?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뭡니까? 나에 대해서 실망해야 되지요.


내 판단, 내 결정, 내 선택이 진짜 꼴갑한다는 것, 내가 결정, 선택한다는 것이 천국은커녕 지옥에 딱 맞다는 것, 그걸 아셔야 돼요. 그걸 포괄적으로 오빠의 죽음을 통해서 언급한 겁니다. 지금 마리아가 울지요, 마르다가 울지요, 그 다음 옆에 있는 조문객들이 다 울었잖아요. 그리고 예수님까지 통분히 여기시며 섭섭해하시잖아요. 그러면 여기에서 안 운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죽은 나사로밖에 없지요. 죽은 나사로만 ‘지금 바깥에 뭐 하고 있지? 바깥에 왜 울음바다가 되어 있지? 무슨 일 났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끝이잖아요. 끝이 아니고 이걸 시작으로 봐가지고 거기에서 실타래가 나오듯이 슬슬 역사를 끄집어내는 방식을 우리 하나님이 사용하신 겁니다. 창세기 1장에 천지를 창조했잖아요.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 안에 이미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가있어요. 그러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고 처음부터 죽음을 염두에 두고 죽음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걸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했습니다.) 포괄이라고 합니다. 앞의 것이 이미 지나간 뒤의 것을 덮어버리는 겁니다. 미래가 과거마저 덮는 거에요. 이걸 포괄이라고 합니다. 포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갑니다. 앞에는 거대한 댐이 있다고 봅시다. 언덕이 있고 물이 고여있습니다. 댐 쪽으로 가니까 댐에서 먼 쪽은 과거가 되지요. 이 사람은 아직까지 댐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댐 가까운 쪽은 미래가 되겠지요. 그런데 댐이 갈라졌습니다. 갈라지니까 물이 쏟아지겠지요. 물이 쏟아져서 처음에 댐을 보고 있다가 오히려 댐한테 크게 당하지요. 나중에 댐물에 휩쓸려가지고 이 사람이 물속에 잠기잖아요. 이게 포괄이에요.


이미 인간은 죽음 안에 포괄되어 있는 겁니다. 미래가 과거마저 미리 덮는 거에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보통 죽었다고 하면은 시체가 되어 딱딱해져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죽음에서 슬슬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역사가 나와요. 제가 군에 갔을 때 통신병이었습니다. 통신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일반대대에 있었지만 일반대대에도 통신과가 있어서 통신과에 있었어요. 통신과는 뭐를 하느냐 하면은 (이것은 기밀 내용도 아니니까 그냥..) 부대와 부대 사이에 있는 전봇대의 전선을 수리하고 설치하고 그것에 대한 교환, “예, 몇 번입니다. 충성!” 이렇게 하고, “충성! 예, 몇 번입니다. 대대장님과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교환도 하고 이것을 다 합해서 통신이라고 하는 거에요.


방사통이라는 것이 있어요. 방사통이 뭐냐 하면은 동그라미 두 개가 있고 그 사이에 구멍이 나있고 그 구멍에 구리선이라든지 통신선, 케이블 같은 것이 감아져 있어요. 이걸 운반하는데 굉장히 무거워요. 그래서 우리 부대에는 내리막이 있는데 내가 귀찮아서 발로 차버리지요.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굴러가지요. 어차피 내려갈 거니까 발로 차버립니다. 이거 운반하기가 힘들어요. 이 방사통에서 케이블선이 나옵니다. 케이블선이 나오게 하려면 방사통을 돌리면 돼요. 십자가만 슬슬 반복하게 되면 여기에서 인류의 역사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죽음이지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죽음은 “꼼짝마라.”가 죽음인데 “꼼짝마라”가 아니고 본격적인 역사의 핵심이 되고 역사의 활동력이 되는 거에요. 그 증거가 뭐냐? 모든 인간은 태어나도 결국은 죽잖아요. 증명이 되었잖아요. 태어나는 힘보다 죽는 힘이 더 세요. 로마서 5장에 “아담 위에 죽음이 왕노릇한다”라고 했듯이 죽음이 왕노릇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어렵습니다.) 그 죽음이 더 힘을 발휘해서 산 것을 포괄한다, 또는 다른 말로 함몰한다, 덮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살고자 아등바등 애를 쓰고 사업을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뭘 해도 몸이 망가지고 뭐가 망가지고 결국은 죽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으면 그게 끝인 줄로 알고 있는 거에요. 끝이 아니고 자기는 원래 자리, 원래 시작점에 태어나서 살았기 때문에, 내가 활동하기 때문에 놓치고 몰랐고 가리워졌고 찾아갈 수 없던 그것을,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의 자리로 찾아가주시는 겁니다. 본래의 자리가 뭡니까? 죄가 왕노릇하는 자리, 죄는 통치하는 왕이 되고 우리는 죄의 통치를 받는 그 위치, 그 자리가 인간, 아담의 후손들의 자리입니다. 그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일반적인 인간의 자리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도 보통 전환이 되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다 스트레스 받아 살 일입니다. 죽고자 해야 이 스트레스가 풀리지, 왜냐하면 역사는 죽음에서 나와 죽음으로 가는데 우리는 역사를 거슬려서 안 죽을 것처럼 아등바등 기껏 살 것처럼 그렇게 애를 쓰잖아요. 영화가 다 그래요. 어벤저스도 그렇고 원더우먼, 배트맨.. 배트맨이 (싸움)하다가 죽었다고 하면 이 영화를 누가 보러 옵니까? 안 보러 옵니다. 죽을 뻔했는데 기적적인 힘을 발휘해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이렇게 나오잖아요. 스파이더맨, 슈퍼맨이 전부 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되고 싶은 희망을 대리해서 그 영화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공중을 난다거나 거미줄을 쫙 쳐서 난다는 것은 어릴 때 남자아이들의 꿈입니다. 이상이에요. 그 높은 건물을 쫙쫙 뛰어다니는 것을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은 책상 위를 뛰어다니는 것으로 똑같이 흉내를 내요.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모르겠습니다만, 7살, 8살 남자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보세요. 완전히 만화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야부야, 두두두.” “으어어.” 아빠한테 와가지고 막 총을 쏘고 심지어 목사한테도 와가지고 애가 (목사) 죽으라고 “탕, 탕, 탕.” 하고 그러면 나는 또 “윽.” 죽는 척을 하고요. 이 바보 같은 애들이 죽음이 끝이 아닌데 평소에 들은 것대로, ‘사는 것은 정상이고 죽으면 불행이다.’라고 생각을 한 거에요. “아이고 고마운 꼬마 애들아.” 목사인 나를 보고 총을 쏴가지고 나로 하여금 본래의 내 자리를 찾아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어요.


역사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죽음으로 가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간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이 두 갈래 선이 있는 거에요. 하나는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보여줄 십자가와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보여줄 십자가가 있는데 지옥에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공의와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 이쪽(천국에 가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해서), 둘 다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해서 양쪽 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시작과 끝이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인류의 역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밑거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눈에 보기에는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른 거에요.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이하고 놀랍고 낯설고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만 여기 마르다가 이야기한 것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래, 원래 그게 자연스러워. 네가 오해해서 그렇지, 원래 이 스케줄이 이 스케줄이고 원래 프로그램이 이 프로그램이야. 원래 이런 거야. 너는 살아있으니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안목이지만 그것은 네가 아직까지 안 죽어봐서 그래.” “내가 너희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네 오빠를 죽이겠느냐?”


오빠를 죽여서 다시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본래 인간의 자리가 사는 게 인간의 자리가 아니고 죽는 게 인간의 자리인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죽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 때문에 있어야 되고 따라서 십자가를 위해서 죄는 발생되어야 되고 그 죄가 인간에게 덮쳐야 되고 죄는 인간 위에 왕노릇 해야 되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어야 하고 이런 모든 스케줄이 전부 무엇에 초점이 맞추어 있느냐,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창조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죽은 분이 예수님입니다.”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나사로 가정에 죽은 사건이 일어난 거에요.


이게 사실이에요. 이게. (Believe or not), 믿든지 말든지 그건 모르겠는데 이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설교자가 이 사실을 전하면 교인들이 “미쳤나, 왜 저러지? 우리를 보고 지금 죽으라는 이야기야?” 멀뚱멀뚱해가지고 흔히 하는 말로 소통이 안 된다고 하지요. (욕심이 다르다고 해야지 소통이 안 된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설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 입장에서 ‘아이고 그러면 바꿔볼까?’라고 하는데 바꿔야 될 이유가 없다니까요. 잘못 된 것을 이야기하면 바꿔야 되는데 사실이 그런데 뭘 바꿔요. 바꿔지면 사실도 바꿔집니까? 믿든지 안 믿든지 관계없이 사실이 그런데요. 믿는다고 사실이 되고 안 믿는다고 거짓이 되는 거에요? 그런 거에요?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라면 “그래, 십자가는 복음이야.” 이렇게 하지 말고 그게 왜 복음인지 그걸 중심으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시 한 번 좍 그 중심 부분을 뚫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여기 12장에 보면 나오지요. 미리 한 번 당겨서 봅시다. 12장 3절~5절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7절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는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라고 하셨지요. 뭘 위하여?


“위하여” 앞에 □를 넣습니다. “□를 위하여”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시험을 한 번 쳐봅시다. 1번, 주를 위하여 2번, 하나님을 위하여 3번, 교회를 위하여 4번, 성도를 위하여 5번, 죽음을 위하여 몇 번입니까? “죽음을 위하여”지요. 흔히 상투적으로 주를 위하여라고 하는 말은 의미가 없어요. 왜? 주라고 하면 추상적인 멋있는 분으로 자꾸 머리를 삼기 때문이에요. “죽음을 위하여” 그러니까 이 마리아가 구체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주님은 죽으셔야만 됩니다. 왜? 그게 우리의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가 탄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피를 가지고 창조한 자가 성도에요. 피를 가지고.


그래서 우리는 죽더라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가 되는 겁니다. 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죽고 예수의 피를 인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주고 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마르다가 믿었던 거에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답변은 바로 앞에 나온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호응이 되는 답변이에요. 이건 개인구원은 아니지요? 개인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없지요. 그냥 기독론,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만 구원이 되지 그런 예수님을 내 쪽에서 이렇게 믿고 저렇게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활동의 여파, 또는 주님의 트로피로서의 구원(영생, 성도)가 되는 거에요.


전혀 어렵지 않은데 어렵지 않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방사통을 집어넣어서 그렇잖아요. 이 방사통을 설명을 좀 해드려야 되겠는데요. 살다보면 죽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죽음에서 태어났기에 죽음으로 꺼져야 되고 사라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누가? 우리의 운명이.. 누구 팔자가? 우리의 팔자가.. 해가 지평선에 떴습니다. 낮 동안에 찬란히 빛나다가 해가 지잖아요. 해가 죽었습니까? 내일 또 떠요. 안 뜰 수도 있지만 하여튼 내일 또 뜬단 말이지요. 그러면 지평선 넘어가면 해가 해 아닙니까? 그냥 애들 자장가처럼 “햇님도 벌써 잠을 자요. 너도 잠자야지..” 햇님도 잠을 자니까 우리도 잠잘까요? 애들 자장가는 그럴 수 있어요.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잊어라”는 말과 똑같은 식이지요.


“우리 산 사람이 최고이고 산 사람끼리가 현실이지 죽은 사람은 찾을 필요가 없다. 죽은 귀신은 제사 드릴 필요가 없다.”라는 말은 원래 우리의 원천을 몰라서 그래요. 사도 요한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 뭘 생각했겠어요? ‘도대체 이 이야기를 누가 알아듣겠나?’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누가 알아듣겠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면 “저는 주를 믿습니다.”라고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이 말은 지금 예수님이 말하시는 취지를 마르다가 알아챈 거에요. 실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주의 은혜지요.


그런데 이 점을 여러분들이 이해했는가 하고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까 이해한 얼굴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하겠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흘러갑니다. 흘러가는데 이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돌출부가 탁 뛰어올라요. 뭔가 돌출되는 게 있어요. 역사와 상관없이 시간의 흐름 자체를 무시하는 어떤 계기가 있어요. 그게 원칙이라는 거에요. 역사는 지나간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어떤 원동력을 가지고 어떤 엔진을 가동시켜서 가느냐 휘발류를 집어넣느냐, 가솔린을 집어넣느냐 (가솔린이 휘발류네요.) 뭘 집어넣고 가느냐 역사라는 기관차를 돌리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마르크스는 노동력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 노동력도 아니에요. 프로이드는 인간 무의식의 욕망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원칙과 원리가 튀어나와 버린다고 했는데 이것이 튀어나올 때 여러 사람이 같은 게 튀어나오는데 이것을 종합해보면 이렇게 돼요. 역사는 죽 수직선(→)으로 가고 이것은↱ 이렇게 간다고요.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고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묵시가 되어 버려요. 여기(→)는 역사이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묵시(↱)는 원칙이기 때문에 원칙은 2000년도의 미래나 50000만년 후의 미래나 동일한 원칙이 돼요. 그 원칙이 아까 우리가 봤던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원칙과 똑같은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입니다. 이것은 세월이 바뀌어도 상관이 없는 원칙이 되는 거에요.


이 “원칙”이라는 말을 이 속(역사와 묵시)에 집어넣읍시다. 역사를 이렇게 선으로 했지만 역사를 하나의 원통(파이프)으로 봅시다. 이걸 전에 주일 낮 설교 할 때 롤케이크으로 봤지요. 이 원통이 연필이라면 연필 안에 뭐가 들어있지요? 연필심이 들어있지요. 연필심이 이렇게 연결되는 거에요. 그러면 연필심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원칙만 나타나지요. 새카만 거요. 이게 바로 죽음인데 무슨 죽음이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특수한 죽음인데 이걸 우리는 십자가 죽음이라고 해요. 마리아는 이걸 알고 향유를 뿌려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게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마리아라는 개인의 구원에 관한 어떤 생각, “예수님,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저 살려줄 거죠?”라고 되어 버리면 그것은 역사에서 이탈한 게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이 살아있다는 게 역사의 원칙이 아니잖아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버지가 유언하면서 자식들을 모아놓고 “내가 죽더라도 너희가 나를 기억해야 되고 나에게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말고 항상 내 생일도 지키고 내가 죽는 날도 제사 지내야 된다. 알겠느냐?” 이렇게 한다는 말은 본인이 원칙이라는 말이거든요. “나는 죽어도 너희는 계속해서 이 아버지를 잊지말아라.” 김일성도 아니고.. 그런 뜻이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원칙은 내가, 내가 구원 받는 게 원칙이 아니에요. “나 아무개인데 나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 이게 원칙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아니고 뭐가 원칙입니까? 누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으면 우리의 원칙, 내 안에 있던 내 원칙을 뭐로 바꿔줘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꿔줘 버리면 십자가가 나의 연필심이 되고 나는 거기에서 발생된 연필심을 둘러싼 나무 부분이 된다 이 말이지요. 나무 껍질.. 제가 주일 오후 때인가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요. 결이라고 했지요. 아니다. 대구 강의에서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보통 나무판자를 보면 그 나무의 결이 있잖아요. 결을 대패로 깎아봅시다. 그래서 밀어서 이만큼을 깎았습니다. 깎아버리면 결이 사라집니까, 아니면 그대로 나옵니까? 그대로 나오지요. 더 깔끔하게, 말끔하게 나오지요. 또 깎아봐도 또 결이 나오지요. 이처럼 결은 하나의 원칙 같아가지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깎아도 깎아도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게 일반 종교인 같으면 “나는 구원 받았다.”가 될 거에요. 그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에 내가 구원 받았다는 대목이 없어요. 성경은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너는 구원 받았다.”로 보는 게 아니고 “너는 죽었다.”로 보는데 그 결이 우리한테 있어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런 결이 우리 안에 있어줘야 이 사람이 성도가 되는 거에요.


아무리 개망신을 당하고 아무리 세월에 깎이고 사업이 부도나고 망해도 그래도 내 안에 있는 이 결은 (내 재산이고 내 아파트가 결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은 욥에 나와요.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고 “대패로 한 번 밀어봐라. 욥 안에 뭐가 나오는지..” 욥 안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나옵니다. 왜? 마지막에 욥이 제사해서 누구를 용서합니까? 친구를 살리지요. 그게 바로.. 욥도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줄을 몰랐어요.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는 줄을 몰랐지요. 나중에 알고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지요. 내 결대로 오실 분이 있다는 말은 포괄되었다는 의미에요. 내 안에 이런 물이 튀었다는 말은 조금만 더 살아보게 되면 댐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 미레의 댐이 미리 터져가지고 나한테 물방울을 날리고 나를 포괄시킨 거에요. 함몰시킨 거에요.


그렇게 설명을 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가 설명이 안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로 끝이 나요. 그걸로 끝나 버리면 자기의 구원을 자기가 관리해야 돼요. 그러면 바리새인처럼 되어 버렸어요. 자기의 구원을 자기가 하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신빙자료나 업적 같은 것을 자꾸 찾아다녀요. “주여, 제가 신앙인이지요. 그러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저를 아들이라고 한다면 기도에 응답하시고 따라서 내가 기도한 사람은 암에서 낫게 하옵소서.” 이 사람은 자기가 마귀의 시험에 들어가지고 자꾸 테스트를 하는 거에요. 내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또 테스트해보고.. 십일조를 하면 창고를 채워주신다고 했으니까 창고부터 짓고 창고까지 지을 것 없고 그냥 통나무집 하나 개설해놓고 그 다음에 바쳐보는 거에요. 삼십 배, 육십 배가 오는지를..


정 그게 안 되면은 애가 그 대신 공부를 잘하든지.. 돈이 안 생기면 다른 쪽으로 좋은 일이 생기는지를 테스트해보는 거에요. 그 좋다는 게 뭐에요?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같은 거잖아요. 그런 것으로 대치해서 오는지를.. 자꾸 그러한 실적과 업적을 억지를 부려서 끌어모으려고 하는 겁니다. “주여, 기적을 베풀어주옵소서. 기적을 베풀어주옵소서.” 진정한 기적은 내가 대패로 깎이는 거에요. 내가 그러한 구닥다리, 어줍지 않게 신앙인이라고 냈던 그 티들을 주께서 대패로 확 밀어버려요. “그런 것, 이런 것 안 일어나도 괜찮아. 내가 준 믿음은 오직 십자가로써 끝났어.” 십자가 더하기 뭐가 아니라 그냥 십자가로 끝난 거에요.


죽어도 삽니다. 무릇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요. 그런데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죽이십니다. 어떻게 죽입니까? 점점 늙어죽지요. 보톡스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주사발도 별로 안 받고.. 온 몸이 다 멍들고 백날 정신 차려봐도 다 잊어버려서 이제는 차도 못 타겠고 나중에 75세 되면 운전도 못 하겠고. 조금 과로하면 쉬어야 되고 낮이 되면 낮잠 자야 되고.. 벌써 한 65세쯤 되면 낮잠 한숨 자 줘야 산 것처럼 돼요. 하루 일과가 낮잠자기에요. 노인네들은. 숙제가 낮잠자는 거에요. 아침먹고 낮잠, 낮잠, 점심먹고 낮잠, 낮잠, 저녁먹고 낮잠, 낮잠.. 녹즙 먹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그냥 낮잠인 거에요.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잤거든요. 아침먹고 낮잠자고 점심먹고 낮잠, 저녁먹고 저녁잠, 아침먹고 또 주무시고.. 그 DNA가 저한테 다시 오는 거에요. 왜냐? 포괄이기 때문에..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의 흔적입니다. 잠이 온다는 것은 죽음의 흔적이에요. 집사님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옥을 봤기 때문에 감당할 능력이.. 제목을 결로 하고 싶은데 결로 해야 되겠네요. 결이 더 낫네요. 주께서 환난과 곤고와 핍박을 줘가지고 계속해서 이 결이 도도라지게 나타나게 하시는 겁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이 말의 뜻은 “결국 네 속에 내 것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내 원칙이 들어있고 역사의 핵심과 심지를 나와 네가 공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함께 하고 있는 거에요. 함께. 어떤 브로마이드 잡지에 보니까 제목이 공유에요. 그래서 문방구에서 한 번 봤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영화배우 공유 이야기에요. 그래서 글자는 “공유를 공유하라.”에요.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한테 이런 결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 나타난다는 것은 결이 아예 없다는 거에요. 안 믿어지고 자기한테 결이 없으니까 기적을 행해서 병이 나았다느니, 기도했더니만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느니, 설교했더니만 3000명이 회개했다느니 온갖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 재산을 바쳐서 착한 일을 했다느니, 금식을 했다느니 하는 것들로 채우는데 그것은 쓰레기입니다. 그 쓰레기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쓰레기가 있다는 것은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쓰레기를 가지고 앞장세우는 교인이나 설교자나 목사들은 이미 그 자체가 “나는 쓰레기입니다.”라는 뜻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것을 티내고 있는 거에요. 얼마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부끄러웠으면 예배당을 짓고 비젼센타를 지어가지고 그 허점을 가리겠어요?


여러분 비젼센타 압니까? 교회 목회 절차가 그래요. 어느 예배당이 있으면 그 옆에 비젼센타를 세우는 거에요. 예배당을 해놓고 교인들이 온다 싶으면 주차장을 만들어요. 주차 용도가 아닙니다. 비젼센타 터전이 되기 위해서 미리 주차장을 해놓고 그 다음에 비젼센타를 짓고 그 다음에 또 주차장을 하는데 그 주차장은 주차장이 아니에요. 건물 하나를 더 짓기 위한 대지 마련입니다. 그게 절차에요. 주님은 예수님의 특수성의 기이함을 알리기 위해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종교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깔아놔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뭔가 번쩍번쩍하는 실적이 있는 종교적인 성과를 깔아놔줘야 믿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아는 자만이, 그야 말로 지금 죽어도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 까짓것 뭐 쓰레기지..”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33절을 봅시다.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그들이 하는 그 모습들이 주의 뜻에 맞다는 거에요, 안 맞다는 거에요? 안 맞다는 거에요. 안 맞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역사의 본래 중심을 그들은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시고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사람을 사귀려고 온 것이 아니고 ‘어휴 저 사람들, 참.. 죽는 것이 원래 인간의 자리인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인간이 돼요. 십자가에 함께 죽고 십자가에서 함께 살아나야 그 사람이 인간이 돼요.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 안 받아 줍니다.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데 그 사람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은 마귀의 종이지 인간이겠습니까, 괴물이지.. “아이고 나는 천국 안 가도 인간이다.” 그러려면 지옥에 가서 돌아다니면서 그런 소리를 하든지요.


누가 알아줍니까? 지옥에 가서 “물, 물!” 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인간이야.” 부딪히기 바빠서 서로 부딪히면서도 “나는 인간이야.” “너만 인간이야? 나도 인간이야.” 그게 오늘날 세상에 길거리에 부딪히는 것하고 똑같잖아요. 이 세상이 지옥이잖아요. 공통점이 있는데 한결같이 본인은 “나는 인간”이라는 거에요. 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아니거든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마귀의 종들이에요. 마귀의 종들이라니까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인정해줘야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두 자로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일한 사람, 유일한 아담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람 대우를 받는 거에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람이 아닙니다. “까짓것 아버지라고 부르지..” 아니에요. 그렇게 부르는 것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에요. 그러면 그냥 부르는 것하고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은 뭐가 다르냐? 주께서는 가짜를 들통내기 위해서 환난을 줘버립니다. 환난을 주기 위해 대패를 가지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결을 한 5cm 정도 밀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없어요. 맨땅입니다. 아무 무늬가 없어요. 남의 거름을 지고 장에 간 거에요. 교회에서 철야 하면서 “아버지, 주여.”라고 하니까 따라한 거에요. “아버지, 주여.”부터 밀어버리니까 욕밖에 안 나오잖아요. 그 사람은 아들이 없어요.

그 다음에 보세요. 36절(~37절)이 중요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에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런 것들이 다 예수님을 민망케 하고 예수님을 통분케 한 이야기들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비난한다는 것은 뭘 모르고 있는 겁니까? 자신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 있는 나를 한 번 살려봐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거에요. “나사로가 예수님을 사랑했는데 소경은 눈을 뜨게 하면서 왜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섬겼던 나사로는 죽이는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능이 없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사고방식은 “나는 살았고”가 기반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산다”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서는 “산다”는 게 없어요. 그저 심판이고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도 울 게 아니고 그 동안 살아온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지 무슨 욕심에 더 살겠다고 그렇게 울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님 덕분에 나흘 만에 살아났지요? 나사로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잖아요. 그러면 죽었던 나사로는 어디 안에 있습니까? 죽어도 누구 안에 있어요? 예수님 안에 있잖아요. 그게 우리의 자리라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의 자리거든요. 나사로가 우리의 인생을 다 보여준 거에요.


죽었다가 깨어나도 주님 안에 있으면 사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그것은 큰 차이가 없는 거에요. 주님이 보시기에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죽어서 믿는 자도 살고.. (주님이 위로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은 지금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죽어도 내 안에 있으면 산 것이고 살아서 내 밖에 있으면 그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것이고..” 주님께서는 편하게, 자연스럽게 “너는 그런 거야.”라고 그냥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저 살려주지 않으면 전부를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울고불고 짜증내고 원망하고 난리가 난 거에요. 그래서 제가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한 번 답변해보세요.

“왜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기는가?” 강의를 이만큼 들었으면 답변해보세요. 모든 범죄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 왜 건드리느냐?” “건드리면 왜 안 되는데?” “건드리면 자기 생명에 위협을 느끼니까.” “위협을 느끼면 죽으면 되지.” “그러면 억울하잖아.” “왜 억울한데?” 그런데 죽는 게 왜 억울하지요? 억울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한테 조치를 잘못(엉터리로)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엉터리라면 자기가 생각하는 엉터리가 아닌, 본래의 자기의 일은 뭡니까? 자기는 계속해서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이건 창세기 3장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든 말든 간에 무조건 내 앞에 생명나무 열매를 내놓아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안 내놓고 생명나무를 치워버렸지요. 그게 억울한 거에요. 그런데 그 심보가 누구한테 유혹을 받아서 나온 심보의 연속입니까? 누가 그렇게 했어요? 뱀이 그렇게 했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입을 놀려도 입을 놀리는 게 자기의 입이 아니고 뱀의 혓바닥을 놀리는 거에요. 인간은 뱀의 다양성입니다. 뱀 중에서도 이쁜 뱀들이 많습니다. 고소영, 잘 생긴 뱀, 장동건. 최수종도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빼줄까요? 얼마나 많은데요. 송중기 뱀, 송혜교 뱀, 예수 믿는지는 모르겠으니까 안 믿는다고 치고. 뱀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아까 기차 타고 오는데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스마트폰을 보거든요. 스마트폰을 보는데 얼굴에다가 원숭이 뽀샵을 해가지고 자기의 얼굴인데 원숭이하고 합성을 하니까 바깥은 원숭이인데 안은 자기 얼굴이에요. 이렇게 찍고 저렇게 찍고 네 명이 전부 다 셀카 찍은 게 다 있어요. 뱀의 다양성이에요.


그렇게 예쁘게 찍어놓는데 왜 찍어놓는지를 아십니까? 죽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이렇게 예쁜데 만약 죽으면 억울하다는 거에요. 모든 드라마의 내용, 모든 신화와 동화, 소설의 내용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죽으면 억울하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리라. 전부 복수의 내용이에요. 선과 악이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를 더 살려내는 조건이 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짜증나는 드라마가 착한 일을 했는데 나쁜 놈한테 총맞아 죽는 겁니다. 이게 제일 억울해요. 돈내놓으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역시 고생고생 하면서도 낙을 본다고 결국은 악당들을 물리치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결혼하면 드라마는 끝이에요. 결혼하면 행복이 절로 오는 것처럼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았더라는 거에요. 70대 이야기는 안 나와요. 하여튼 결혼으로 끝나 버려요.


이 요한복음 11장이 드라마라면 이렇게 끝나면 안 돼요. 나사로가 나중에 결혼한 것까지 나와야 돼요. 그래서 당대에 제일 이쁜 사람하고 결혼해야지요. 만약 성경에 그게 나왔다고 하면 기도할 때 사람들이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이쁜 여자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감수할 거에요. 욥기하고 비슷합니다. 욥이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에 딸 세 명이 이쁘고 갑절로 갑부가 되었다는 그게 미끼 상품이 되어서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려고 하는데 그건 오기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기필코 차지하겠다는 욕심입니다.


어쨌든 간에 소경을 눈 뜨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경을 눈 뜨게 한 것을 사랑이라고 봤는데 나사로에게는 그 사랑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울었습니다. 여러분 소경이 눈을 뜨면 구원 받습니까? 아닙니다.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돼요. 원래의 자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그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는 인력으로 안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돼요. 주님께서 자기의 원래 자리로 가게 하려면 그 가는 당사자가 주님한테 그렇게 원망, 원망을 털어놔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조기에 청춘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를 믿었으면 뭔가 낙을 보고 가야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게 한 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왜 너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기느냐? 이 인간아.”


이게 자기만의 단독자 의식입니다. 나는 독립했다는 거에요. 이제는.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내가 알아서 믿겠다는 거에요. 이 단독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나라는 단독자를., 좋은 것 주시면 좋은 것을 받겠는데 나는 건드리지 마라는 거에요. 나를 건드리면 뭐든지 억울하게 느껴진다는 거에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악마가 쳐놓은 가상이거든요. 이걸 뚫고 들어오시는 능력은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이걸 뚫고 들어와야 돼요. 뚫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우리의 빈 공간에 (이걸 중심이라고 하는데요) 이 중심은 비어 있어요. 공백인데 왜 비어있는가. 주님의 자기 자리이기 때문에 이 자리가 비어있어요.


그런데 이 중심 바깥에 있는 우리가 이 단절을 넘어서서 공백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것에 밀려야 돼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내 중심이고 나 잘난 중심이기 때문에 밀려야 돼요. 밀리고 주님께서 이 공백에 들어오시면 이 공백에서 힘이 나와서 밀렸던 우리로 다시 중심을 보게 하는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이게 낯선 사건이에요. 낯선 사건입니다. 하필이면 우산을 안 가져온 날, 비가 왕창 오는 것 같은 것도 낯선 사건이에요. 하여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를 말로 때울 수 있는 게 아니고 진짜 말로 때우는 순간 그것이 나한테 실제로 와 버려요. 내가 보기에도 내 인생이 희한한 인생이에요. 낯설게 가는 인생. ‘내가 이런 생각을 다 할 수 있다니..’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중심 부분을 주님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차지하는 데에서 요한복음 11장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1장만 나온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 말씀 전체가 나온다는 뜻이에요. 성경 말씀으로 호출합니다. “너의 중심은 네가 그리는 저 바깥에 사람들이 있는 데가 아니고 예수님, 내가 죽는 모습이 진짜 네가 탄생한 본래의 자리이다.”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무덤이 있지요.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자, 묻습니다. 묻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모였습니까? 무덤 앞에 모였지요. 이게 복음이잖아요. “결혼식, 잔칫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무덤 앞에 다 나오라는 뜻이에요. 이게 전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무덤 앞에 나오라. 거기에 꼭 너를 빼닮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야.”


나사로가 나왔지요. 그리고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힘으로 풀 수는 없고 누가 풀어주니까 뒤뚱뒤뚱하면서 이제 돌을 옮겨놓고 나왔습니다. 44절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진수가 보여지는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바로 무덤 앞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면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온다? 주님의 무덤에서. 무슨 무덤? 빈 무덤에서. 빈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죽으셔야 했고 이제는 수퍼맨처럼 그걸 가지고 모든 성도에다가 그 빈 무덤을 우리 앞에 떨어뜨려놓습니다. 우리 안에 집어넣습니다. 전부 다 하나씩 꿰어 찼어요. 주님의 십자가, 주의 빈 무덤을 꿰차고 다닙니다. 그 빈 무덤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래서 무덤이라는 엔진이 가동되어서 우리를 살리고 죽음이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주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이 내가 살아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 속에 있었는데 죽음과 우리 사이에 연결 고리가 십자가 피였던 것을 우리가 늘 지금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세상보다도 주님 만나는 것을 더 희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