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27 / 결 / 16070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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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11장 27절(가락-결)160705a-이근호 목사 다시 이야기합니다. 망신 당하지 않으면 인간이 안 됩니다. 망신도 그냥 망신이 아니에요. 개망신을 당해야 돼요. 개망신 당할 때 진짜 할렐루야가 나와요. 그런데 그런다고 인간이 되는 게 아니에요. 개망신 당하고 할렐루야 인간이 되었지요? 그 다음에 다음날부터 또 인간이 된 걸 신봉해요. 아이구 못돼 먹기도 하여튼. 이 육신 때문에.. 내가 5년 전에 인간이 되었다. 그걸 또 자랑삼아 돌아다니면서.. 그것이 또 뒤집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뒤집어져야 돼요. 요한복음 11장 27절(가락-결)160705b-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빠가 죽었습니다. 오빠는 육체적으로 죽었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살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는 점에서 실상은 여전히 죽어있는 입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어라, 다시 말해서 너 자신에 대해서 너 자신의 생각을 죽여라. 너는 이미 죽은 자고 주는 그리스도라고 했으니까 살든 죽이든 나한테 달렸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얼마나 간단한 복음(기쁜 소식)입니까?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뭡니까? 나에 대해서 실망해야 되지요. 내 판단, 내 결정, 내 선택이 진짜 꼴갑한다는 것, 내가 결정, 선택한다는 것이 천국은커녕 지옥에 딱 맞다는 것, 그걸 아셔야 돼요. 그걸 포괄적으로 오빠의 죽음을 통해서 언급한 겁니다. 지금 마리아가 울지요, 마르다가 울지요, 그 다음 옆에 있는 조문객들이 다 울었잖아요. 그리고 예수님까지 통분히 여기시며 섭섭해하시잖아요. 그러면 여기에서 안 운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죽은 나사로밖에 없지요. 죽은 나사로만 ‘지금 바깥에 뭐 하고 있지? 바깥에 왜 울음바다가 되어 있지? 무슨 일 났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끝이잖아요. 끝이 아니고 이걸 시작으로 봐가지고 거기에서 실타래가 나오듯이 슬슬 역사를 끄집어내는 방식을 우리 하나님이 사용하신 겁니다. 창세기 1장에 천지를 창조했잖아요.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 안에 이미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가있어요. 그러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고 처음부터 죽음을 염두에 두고 죽음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걸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했습니다.) 포괄이라고 합니다. 앞의 것이 이미 지나간 뒤의 것을 덮어버리는 겁니다. 미래가 과거마저 덮는 거에요. 이걸 포괄이라고 합니다. 포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갑니다. 앞에는 거대한 댐이 있다고 봅시다. 언덕이 있고 물이 고여있습니다. 댐 쪽으로 가니까 댐에서 먼 쪽은 과거가 되지요. 이 사람은 아직까지 댐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댐 가까운 쪽은 미래가 되겠지요. 그런데 댐이 갈라졌습니다. 갈라지니까 물이 쏟아지겠지요. 물이 쏟아져서 처음에 댐을 보고 있다가 오히려 댐한테 크게 당하지요. 나중에 댐물에 휩쓸려가지고 이 사람이 물속에 잠기잖아요. 이게 포괄이에요. 이미 인간은 죽음 안에 포괄되어 있는 겁니다. 미래가 과거마저 미리 덮는 거에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보통 죽었다고 하면은 시체가 되어 딱딱해져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죽음에서 슬슬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역사가 나와요. 제가 군에 갔을 때 통신병이었습니다. 통신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일반대대에 있었지만 일반대대에도 통신과가 있어서 통신과에 있었어요. 통신과는 뭐를 하느냐 하면은 (이것은 기밀 내용도 아니니까 그냥..) 부대와 부대 사이에 있는 전봇대의 전선을 수리하고 설치하고 그것에 대한 교환, “예, 몇 번입니다. 충성!” 이렇게 하고, “충성! 예, 몇 번입니다. 대대장님과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교환도 하고 이것을 다 합해서 통신이라고 하는 거에요. 방사통이라는 것이 있어요. 방사통이 뭐냐 하면은 동그라미 두 개가 있고 그 사이에 구멍이 나있고 그 구멍에 구리선이라든지 통신선, 케이블 같은 것이 감아져 있어요. 이걸 운반하는데 굉장히 무거워요. 그래서 우리 부대에는 내리막이 있는데 내가 귀찮아서 발로 차버리지요.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굴러가지요. 어차피 내려갈 거니까 발로 차버립니다. 이거 운반하기가 힘들어요. 이 방사통에서 케이블선이 나옵니다. 케이블선이 나오게 하려면 방사통을 돌리면 돼요. 십자가만 슬슬 반복하게 되면 여기에서 인류의 역사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죽음이지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죽음은 “꼼짝마라.”가 죽음인데 “꼼짝마라”가 아니고 본격적인 역사의 핵심이 되고 역사의 활동력이 되는 거에요. 그 증거가 뭐냐? 모든 인간은 태어나도 결국은 죽잖아요. 증명이 되었잖아요. 태어나는 힘보다 죽는 힘이 더 세요. 로마서 5장에 “아담 위에 죽음이 왕노릇한다”라고 했듯이 죽음이 왕노릇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어렵습니다.) 그 죽음이 더 힘을 발휘해서 산 것을 포괄한다, 또는 다른 말로 함몰한다, 덮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살고자 아등바등 애를 쓰고 사업을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뭘 해도 몸이 망가지고 뭐가 망가지고 결국은 죽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으면 그게 끝인 줄로 알고 있는 거에요. 끝이 아니고 자기는 원래 자리, 원래 시작점에 태어나서 살았기 때문에, 내가 활동하기 때문에 놓치고 몰랐고 가리워졌고 찾아갈 수 없던 그것을,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의 자리로 찾아가주시는 겁니다. 본래의 자리가 뭡니까? 죄가 왕노릇하는 자리, 죄는 통치하는 왕이 되고 우리는 죄의 통치를 받는 그 위치, 그 자리가 인간, 아담의 후손들의 자리입니다. 그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일반적인 인간의 자리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도 보통 전환이 되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다 스트레스 받아 살 일입니다. 죽고자 해야 이 스트레스가 풀리지, 왜냐하면 역사는 죽음에서 나와 죽음으로 가는데 우리는 역사를 거슬려서 안 죽을 것처럼 아등바등 기껏 살 것처럼 그렇게 애를 쓰잖아요. 영화가 다 그래요. 어벤저스도 그렇고 원더우먼, 배트맨.. 배트맨이 (싸움)하다가 죽었다고 하면 이 영화를 누가 보러 옵니까? 안 보러 옵니다. 죽을 뻔했는데 기적적인 힘을 발휘해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이렇게 나오잖아요. 스파이더맨, 슈퍼맨이 전부 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되고 싶은 희망을 대리해서 그 영화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공중을 난다거나 거미줄을 쫙 쳐서 난다는 것은 어릴 때 남자아이들의 꿈입니다. 이상이에요. 그 높은 건물을 쫙쫙 뛰어다니는 것을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은 책상 위를 뛰어다니는 것으로 똑같이 흉내를 내요.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모르겠습니다만, 7살, 8살 남자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보세요. 완전히 만화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야부야, 두두두.” “으어어.” 아빠한테 와가지고 막 총을 쏘고 심지어 목사한테도 와가지고 애가 (목사) 죽으라고 “탕, 탕, 탕.” 하고 그러면 나는 또 “윽.” 죽는 척을 하고요. 이 바보 같은 애들이 죽음이 끝이 아닌데 평소에 들은 것대로, ‘사는 것은 정상이고 죽으면 불행이다.’라고 생각을 한 거에요. “아이고 고마운 꼬마 애들아.” 목사인 나를 보고 총을 쏴가지고 나로 하여금 본래의 내 자리를 찾아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어요. 역사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죽음으로 가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간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이 두 갈래 선이 있는 거에요. 하나는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보여줄 십자가와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보여줄 십자가가 있는데 지옥에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공의와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 이쪽(천국에 가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해서), 둘 다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해서 양쪽 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시작과 끝이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인류의 역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밑거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눈에 보기에는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른 거에요.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이하고 놀랍고 낯설고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만 여기 마르다가 이야기한 것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래, 원래 그게 자연스러워. 네가 오해해서 그렇지, 원래 이 스케줄이 이 스케줄이고 원래 프로그램이 이 프로그램이야. 원래 이런 거야. 너는 살아있으니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안목이지만 그것은 네가 아직까지 안 죽어봐서 그래.” “내가 너희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네 오빠를 죽이겠느냐?” 오빠를 죽여서 다시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본래 인간의 자리가 사는 게 인간의 자리가 아니고 죽는 게 인간의 자리인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죽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 때문에 있어야 되고 따라서 십자가를 위해서 죄는 발생되어야 되고 그 죄가 인간에게 덮쳐야 되고 죄는 인간 위에 왕노릇 해야 되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어야 하고 이런 모든 스케줄이 전부 무엇에 초점이 맞추어 있느냐,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창조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죽은 분이 예수님입니다.”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나사로 가정에 죽은 사건이 일어난 거에요. 이게 사실이에요. 이게. (Believe or not), 믿든지 말든지 그건 모르겠는데 이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설교자가 이 사실을 전하면 교인들이 “미쳤나, 왜 저러지? 우리를 보고 지금 죽으라는 이야기야?” 멀뚱멀뚱해가지고 흔히 하는 말로 소통이 안 된다고 하지요. (욕심이 다르다고 해야지 소통이 안 된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설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 입장에서 ‘아이고 그러면 바꿔볼까?’라고 하는데 바꿔야 될 이유가 없다니까요. 잘못 된 것을 이야기하면 바꿔야 되는데 사실이 그런데 뭘 바꿔요. 바꿔지면 사실도 바꿔집니까? 믿든지 안 믿든지 관계없이 사실이 그런데요. 믿는다고 사실이 되고 안 믿는다고 거짓이 되는 거에요? 그런 거에요?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라면 “그래, 십자가는 복음이야.” 이렇게 하지 말고 그게 왜 복음인지 그걸 중심으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시 한 번 좍 그 중심 부분을 뚫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여기 12장에 보면 나오지요. 미리 한 번 당겨서 봅시다. 12장 3절~5절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7절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는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라고 하셨지요. 뭘 위하여? “위하여” 앞에 □를 넣습니다. “□를 위하여”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시험을 한 번 쳐봅시다. 1번, 주를 위하여 2번, 하나님을 위하여 3번, 교회를 위하여 4번, 성도를 위하여 5번, 죽음을 위하여 몇 번입니까? “죽음을 위하여”지요. 흔히 상투적으로 주를 위하여라고 하는 말은 의미가 없어요. 왜? 주라고 하면 추상적인 멋있는 분으로 자꾸 머리를 삼기 때문이에요. “죽음을 위하여” 그러니까 이 마리아가 구체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주님은 죽으셔야만 됩니다. 왜? 그게 우리의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가 탄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피를 가지고 창조한 자가 성도에요. 피를 가지고. 그래서 우리는 죽더라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가 되는 겁니다. 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죽고 예수의 피를 인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주고 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마르다가 믿었던 거에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답변은 바로 앞에 나온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호응이 되는 답변이에요. 이건 개인구원은 아니지요? 개인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없지요. 그냥 기독론,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만 구원이 되지 그런 예수님을 내 쪽에서 이렇게 믿고 저렇게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활동의 여파, 또는 주님의 트로피로서의 구원(영생, 성도)가 되는 거에요. 전혀 어렵지 않은데 어렵지 않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방사통을 집어넣어서 그렇잖아요. 이 방사통을 설명을 좀 해드려야 되겠는데요. 살다보면 죽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죽음에서 태어났기에 죽음으로 꺼져야 되고 사라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누가? 우리의 운명이.. 누구 팔자가? 우리의 팔자가.. 해가 지평선에 떴습니다. 낮 동안에 찬란히 빛나다가 해가 지잖아요. 해가 죽었습니까? 내일 또 떠요. 안 뜰 수도 있지만 하여튼 내일 또 뜬단 말이지요. 그러면 지평선 넘어가면 해가 해 아닙니까? 그냥 애들 자장가처럼 “햇님도 벌써 잠을 자요. 너도 잠자야지..” 햇님도 잠을 자니까 우리도 잠잘까요? 애들 자장가는 그럴 수 있어요.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잊어라”는 말과 똑같은 식이지요. “우리 산 사람이 최고이고 산 사람끼리가 현실이지 죽은 사람은 찾을 필요가 없다. 죽은 귀신은 제사 드릴 필요가 없다.”라는 말은 원래 우리의 원천을 몰라서 그래요. 사도 요한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 뭘 생각했겠어요? ‘도대체 이 이야기를 누가 알아듣겠나?’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누가 알아듣겠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면 “저는 주를 믿습니다.”라고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이 말은 지금 예수님이 말하시는 취지를 마르다가 알아챈 거에요. 실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주의 은혜지요. 그런데 이 점을 여러분들이 이해했는가 하고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까 이해한 얼굴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하겠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흘러갑니다. 흘러가는데 이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돌출부가 탁 뛰어올라요. 뭔가 돌출되는 게 있어요. 역사와 상관없이 시간의 흐름 자체를 무시하는 어떤 계기가 있어요. 그게 원칙이라는 거에요. 역사는 지나간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어떤 원동력을 가지고 어떤 엔진을 가동시켜서 가느냐 휘발류를 집어넣느냐, 가솔린을 집어넣느냐 (가솔린이 휘발류네요.) 뭘 집어넣고 가느냐 역사라는 기관차를 돌리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마르크스는 노동력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 노동력도 아니에요. 프로이드는 인간 무의식의 욕망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원칙과 원리가 튀어나와 버린다고 했는데 이것이 튀어나올 때 여러 사람이 같은 게 튀어나오는데 이것을 종합해보면 이렇게 돼요. 역사는 죽 수직선(→)으로 가고 이것은↱ 이렇게 간다고요.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고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묵시가 되어 버려요. 여기(→)는 역사이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묵시(↱)는 원칙이기 때문에 원칙은 2000년도의 미래나 50000만년 후의 미래나 동일한 원칙이 돼요. 그 원칙이 아까 우리가 봤던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원칙과 똑같은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입니다. 이것은 세월이 바뀌어도 상관이 없는 원칙이 되는 거에요. 이 “원칙”이라는 말을 이 속(역사와 묵시)에 집어넣읍시다. 역사를 이렇게 선으로 했지만 역사를 하나의 원통(파이프)으로 봅시다. 이걸 전에 주일 낮 설교 할 때 롤케이크으로 봤지요. 이 원통이 연필이라면 연필 안에 뭐가 들어있지요? 연필심이 들어있지요. 연필심이 이렇게 연결되는 거에요. 그러면 연필심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원칙만 나타나지요. 새카만 거요. 이게 바로 죽음인데 무슨 죽음이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특수한 죽음인데 이걸 우리는 십자가 죽음이라고 해요. 마리아는 이걸 알고 향유를 뿌려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게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마리아라는 개인의 구원에 관한 어떤 생각, “예수님,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저 살려줄 거죠?”라고 되어 버리면 그것은 역사에서 이탈한 게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이 살아있다는 게 역사의 원칙이 아니잖아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버지가 유언하면서 자식들을 모아놓고 “내가 죽더라도 너희가 나를 기억해야 되고 나에게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말고 항상 내 생일도 지키고 내가 죽는 날도 제사 지내야 된다. 알겠느냐?” 이렇게 한다는 말은 본인이 원칙이라는 말이거든요. “나는 죽어도 너희는 계속해서 이 아버지를 잊지말아라.” 김일성도 아니고.. 그런 뜻이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원칙은 내가, 내가 구원 받는 게 원칙이 아니에요. “나 아무개인데 나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 이게 원칙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아니고 뭐가 원칙입니까? 누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으면 우리의 원칙, 내 안에 있던 내 원칙을 뭐로 바꿔줘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꿔줘 버리면 십자가가 나의 연필심이 되고 나는 거기에서 발생된 연필심을 둘러싼 나무 부분이 된다 이 말이지요. 나무 껍질.. 제가 주일 오후 때인가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요. 결이라고 했지요. 아니다. 대구 강의에서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보통 나무판자를 보면 그 나무의 결이 있잖아요. 결을 대패로 깎아봅시다. 그래서 밀어서 이만큼을 깎았습니다. 깎아버리면 결이 사라집니까, 아니면 그대로 나옵니까? 그대로 나오지요. 더 깔끔하게, 말끔하게 나오지요. 또 깎아봐도 또 결이 나오지요. 이처럼 결은 하나의 원칙 같아가지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깎아도 깎아도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게 일반 종교인 같으면 “나는 구원 받았다.”가 될 거에요. 그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에 내가 구원 받았다는 대목이 없어요. 성경은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너는 구원 받았다.”로 보는 게 아니고 “너는 죽었다.”로 보는데 그 결이 우리한테 있어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런 결이 우리 안에 있어줘야 이 사람이 성도가 되는 거에요. 아무리 개망신을 당하고 아무리 세월에 깎이고 사업이 부도나고 망해도 그래도 내 안에 있는 이 결은 (내 재산이고 내 아파트가 결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은 욥에 나와요.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고 “대패로 한 번 밀어봐라. 욥 안에 뭐가 나오는지..” 욥 안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나옵니다. 왜? 마지막에 욥이 제사해서 누구를 용서합니까? 친구를 살리지요. 그게 바로.. 욥도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줄을 몰랐어요.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는 줄을 몰랐지요. 나중에 알고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지요. 내 결대로 오실 분이 있다는 말은 포괄되었다는 의미에요. 내 안에 이런 물이 튀었다는 말은 조금만 더 살아보게 되면 댐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 미레의 댐이 미리 터져가지고 나한테 물방울을 날리고 나를 포괄시킨 거에요. 함몰시킨 거에요. 그렇게 설명을 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가 설명이 안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로 끝이 나요. 그걸로 끝나 버리면 자기의 구원을 자기가 관리해야 돼요. 그러면 바리새인처럼 되어 버렸어요. 자기의 구원을 자기가 하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신빙자료나 업적 같은 것을 자꾸 찾아다녀요. “주여, 제가 신앙인이지요. 그러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저를 아들이라고 한다면 기도에 응답하시고 따라서 내가 기도한 사람은 암에서 낫게 하옵소서.” 이 사람은 자기가 마귀의 시험에 들어가지고 자꾸 테스트를 하는 거에요. 내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또 테스트해보고.. 십일조를 하면 창고를 채워주신다고 했으니까 창고부터 짓고 창고까지 지을 것 없고 그냥 통나무집 하나 개설해놓고 그 다음에 바쳐보는 거에요. 삼십 배, 육십 배가 오는지를.. 정 그게 안 되면은 애가 그 대신 공부를 잘하든지.. 돈이 안 생기면 다른 쪽으로 좋은 일이 생기는지를 테스트해보는 거에요. 그 좋다는 게 뭐에요?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같은 거잖아요. 그런 것으로 대치해서 오는지를.. 자꾸 그러한 실적과 업적을 억지를 부려서 끌어모으려고 하는 겁니다. “주여, 기적을 베풀어주옵소서. 기적을 베풀어주옵소서.” 진정한 기적은 내가 대패로 깎이는 거에요. 내가 그러한 구닥다리, 어줍지 않게 신앙인이라고 냈던 그 티들을 주께서 대패로 확 밀어버려요. “그런 것, 이런 것 안 일어나도 괜찮아. 내가 준 믿음은 오직 십자가로써 끝났어.” 십자가 더하기 뭐가 아니라 그냥 십자가로 끝난 거에요. 죽어도 삽니다. 무릇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요. 그런데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죽이십니다. 어떻게 죽입니까? 점점 늙어죽지요. 보톡스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주사발도 별로 안 받고.. 온 몸이 다 멍들고 백날 정신 차려봐도 다 잊어버려서 이제는 차도 못 타겠고 나중에 75세 되면 운전도 못 하겠고. 조금 과로하면 쉬어야 되고 낮이 되면 낮잠 자야 되고.. 벌써 한 65세쯤 되면 낮잠 한숨 자 줘야 산 것처럼 돼요. 하루 일과가 낮잠자기에요. 노인네들은. 숙제가 낮잠자는 거에요. 아침먹고 낮잠, 낮잠, 점심먹고 낮잠, 낮잠, 저녁먹고 낮잠, 낮잠.. 녹즙 먹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그냥 낮잠인 거에요.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잤거든요. 아침먹고 낮잠자고 점심먹고 낮잠, 저녁먹고 저녁잠, 아침먹고 또 주무시고.. 그 DNA가 저한테 다시 오는 거에요. 왜냐? 포괄이기 때문에..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의 흔적입니다. 잠이 온다는 것은 죽음의 흔적이에요. 집사님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옥을 봤기 때문에 감당할 능력이.. 제목을 결로 하고 싶은데 결로 해야 되겠네요. 결이 더 낫네요. 주께서 환난과 곤고와 핍박을 줘가지고 계속해서 이 결이 도도라지게 나타나게 하시는 겁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이 말의 뜻은 “결국 네 속에 내 것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내 원칙이 들어있고 역사의 핵심과 심지를 나와 네가 공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함께 하고 있는 거에요. 함께. 어떤 브로마이드 잡지에 보니까 제목이 공유에요. 그래서 문방구에서 한 번 봤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영화배우 공유 이야기에요. 그래서 글자는 “공유를 공유하라.”에요.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한테 이런 결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 나타난다는 것은 결이 아예 없다는 거에요. 안 믿어지고 자기한테 결이 없으니까 기적을 행해서 병이 나았다느니, 기도했더니만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느니, 설교했더니만 3000명이 회개했다느니 온갖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 재산을 바쳐서 착한 일을 했다느니, 금식을 했다느니 하는 것들로 채우는데 그것은 쓰레기입니다. 그 쓰레기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쓰레기가 있다는 것은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쓰레기를 가지고 앞장세우는 교인이나 설교자나 목사들은 이미 그 자체가 “나는 쓰레기입니다.”라는 뜻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것을 티내고 있는 거에요. 얼마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부끄러웠으면 예배당을 짓고 비젼센타를 지어가지고 그 허점을 가리겠어요? 여러분 비젼센타 압니까? 교회 목회 절차가 그래요. 어느 예배당이 있으면 그 옆에 비젼센타를 세우는 거에요. 예배당을 해놓고 교인들이 온다 싶으면 주차장을 만들어요. 주차 용도가 아닙니다. 비젼센타 터전이 되기 위해서 미리 주차장을 해놓고 그 다음에 비젼센타를 짓고 그 다음에 또 주차장을 하는데 그 주차장은 주차장이 아니에요. 건물 하나를 더 짓기 위한 대지 마련입니다. 그게 절차에요. 주님은 예수님의 특수성의 기이함을 알리기 위해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종교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깔아놔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뭔가 번쩍번쩍하는 실적이 있는 종교적인 성과를 깔아놔줘야 믿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아는 자만이, 그야 말로 지금 죽어도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 까짓것 뭐 쓰레기지..”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33절을 봅시다.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그들이 하는 그 모습들이 주의 뜻에 맞다는 거에요, 안 맞다는 거에요? 안 맞다는 거에요. 안 맞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역사의 본래 중심을 그들은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시고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사람을 사귀려고 온 것이 아니고 ‘어휴 저 사람들, 참.. 죽는 것이 원래 인간의 자리인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인간이 돼요. 십자가에 함께 죽고 십자가에서 함께 살아나야 그 사람이 인간이 돼요.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 안 받아 줍니다.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데 그 사람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은 마귀의 종이지 인간이겠습니까, 괴물이지.. “아이고 나는 천국 안 가도 인간이다.” 그러려면 지옥에 가서 돌아다니면서 그런 소리를 하든지요. 누가 알아줍니까? 지옥에 가서 “물, 물!” 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인간이야.” 부딪히기 바빠서 서로 부딪히면서도 “나는 인간이야.” “너만 인간이야? 나도 인간이야.” 그게 오늘날 세상에 길거리에 부딪히는 것하고 똑같잖아요. 이 세상이 지옥이잖아요. 공통점이 있는데 한결같이 본인은 “나는 인간”이라는 거에요. 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아니거든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마귀의 종들이에요. 마귀의 종들이라니까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인정해줘야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두 자로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일한 사람, 유일한 아담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람 대우를 받는 거에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람이 아닙니다. “까짓것 아버지라고 부르지..” 아니에요. 그렇게 부르는 것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에요. 그러면 그냥 부르는 것하고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은 뭐가 다르냐? 주께서는 가짜를 들통내기 위해서 환난을 줘버립니다. 환난을 주기 위해 대패를 가지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결을 한 5cm 정도 밀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없어요. 맨땅입니다. 아무 무늬가 없어요. 남의 거름을 지고 장에 간 거에요. 교회에서 철야 하면서 “아버지, 주여.”라고 하니까 따라한 거에요. “아버지, 주여.”부터 밀어버리니까 욕밖에 안 나오잖아요. 그 사람은 아들이 없어요. 그 다음에 보세요. 36절(~37절)이 중요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에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런 것들이 다 예수님을 민망케 하고 예수님을 통분케 한 이야기들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비난한다는 것은 뭘 모르고 있는 겁니까? 자신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 있는 나를 한 번 살려봐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거에요. “나사로가 예수님을 사랑했는데 소경은 눈을 뜨게 하면서 왜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섬겼던 나사로는 죽이는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능이 없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사고방식은 “나는 살았고”가 기반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산다”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서는 “산다”는 게 없어요. 그저 심판이고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도 울 게 아니고 그 동안 살아온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지 무슨 욕심에 더 살겠다고 그렇게 울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님 덕분에 나흘 만에 살아났지요? 나사로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잖아요. 그러면 죽었던 나사로는 어디 안에 있습니까? 죽어도 누구 안에 있어요? 예수님 안에 있잖아요. 그게 우리의 자리라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의 자리거든요. 나사로가 우리의 인생을 다 보여준 거에요. 죽었다가 깨어나도 주님 안에 있으면 사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그것은 큰 차이가 없는 거에요. 주님이 보시기에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죽어서 믿는 자도 살고.. (주님이 위로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은 지금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죽어도 내 안에 있으면 산 것이고 살아서 내 밖에 있으면 그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것이고..” 주님께서는 편하게, 자연스럽게 “너는 그런 거야.”라고 그냥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저 살려주지 않으면 전부를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울고불고 짜증내고 원망하고 난리가 난 거에요. 그래서 제가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한 번 답변해보세요. “왜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기는가?” 강의를 이만큼 들었으면 답변해보세요. 모든 범죄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 왜 건드리느냐?” “건드리면 왜 안 되는데?” “건드리면 자기 생명에 위협을 느끼니까.” “위협을 느끼면 죽으면 되지.” “그러면 억울하잖아.” “왜 억울한데?” 그런데 죽는 게 왜 억울하지요? 억울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한테 조치를 잘못(엉터리로)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엉터리라면 자기가 생각하는 엉터리가 아닌, 본래의 자기의 일은 뭡니까? 자기는 계속해서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이건 창세기 3장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든 말든 간에 무조건 내 앞에 생명나무 열매를 내놓아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안 내놓고 생명나무를 치워버렸지요. 그게 억울한 거에요. 그런데 그 심보가 누구한테 유혹을 받아서 나온 심보의 연속입니까? 누가 그렇게 했어요? 뱀이 그렇게 했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입을 놀려도 입을 놀리는 게 자기의 입이 아니고 뱀의 혓바닥을 놀리는 거에요. 인간은 뱀의 다양성입니다. 뱀 중에서도 이쁜 뱀들이 많습니다. 고소영, 잘 생긴 뱀, 장동건. 최수종도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빼줄까요? 얼마나 많은데요. 송중기 뱀, 송혜교 뱀, 예수 믿는지는 모르겠으니까 안 믿는다고 치고. 뱀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아까 기차 타고 오는데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스마트폰을 보거든요. 스마트폰을 보는데 얼굴에다가 원숭이 뽀샵을 해가지고 자기의 얼굴인데 원숭이하고 합성을 하니까 바깥은 원숭이인데 안은 자기 얼굴이에요. 이렇게 찍고 저렇게 찍고 네 명이 전부 다 셀카 찍은 게 다 있어요. 뱀의 다양성이에요. 그렇게 예쁘게 찍어놓는데 왜 찍어놓는지를 아십니까? 죽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이렇게 예쁜데 만약 죽으면 억울하다는 거에요. 모든 드라마의 내용, 모든 신화와 동화, 소설의 내용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죽으면 억울하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리라. 전부 복수의 내용이에요. 선과 악이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를 더 살려내는 조건이 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짜증나는 드라마가 착한 일을 했는데 나쁜 놈한테 총맞아 죽는 겁니다. 이게 제일 억울해요. 돈내놓으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역시 고생고생 하면서도 낙을 본다고 결국은 악당들을 물리치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결혼하면 드라마는 끝이에요. 결혼하면 행복이 절로 오는 것처럼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았더라는 거에요. 70대 이야기는 안 나와요. 하여튼 결혼으로 끝나 버려요. 이 요한복음 11장이 드라마라면 이렇게 끝나면 안 돼요. 나사로가 나중에 결혼한 것까지 나와야 돼요. 그래서 당대에 제일 이쁜 사람하고 결혼해야지요. 만약 성경에 그게 나왔다고 하면 기도할 때 사람들이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이쁜 여자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감수할 거에요. 욥기하고 비슷합니다. 욥이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에 딸 세 명이 이쁘고 갑절로 갑부가 되었다는 그게 미끼 상품이 되어서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려고 하는데 그건 오기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기필코 차지하겠다는 욕심입니다. 어쨌든 간에 소경을 눈 뜨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경을 눈 뜨게 한 것을 사랑이라고 봤는데 나사로에게는 그 사랑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울었습니다. 여러분 소경이 눈을 뜨면 구원 받습니까? 아닙니다.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돼요. 원래의 자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그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는 인력으로 안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돼요. 주님께서 자기의 원래 자리로 가게 하려면 그 가는 당사자가 주님한테 그렇게 원망, 원망을 털어놔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조기에 청춘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를 믿었으면 뭔가 낙을 보고 가야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게 한 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왜 너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기느냐? 이 인간아.” 이게 자기만의 단독자 의식입니다. 나는 독립했다는 거에요. 이제는.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내가 알아서 믿겠다는 거에요. 이 단독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나라는 단독자를., 좋은 것 주시면 좋은 것을 받겠는데 나는 건드리지 마라는 거에요. 나를 건드리면 뭐든지 억울하게 느껴진다는 거에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악마가 쳐놓은 가상이거든요. 이걸 뚫고 들어오시는 능력은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이걸 뚫고 들어와야 돼요. 뚫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우리의 빈 공간에 (이걸 중심이라고 하는데요) 이 중심은 비어 있어요. 공백인데 왜 비어있는가. 주님의 자기 자리이기 때문에 이 자리가 비어있어요. 그런데 이 중심 바깥에 있는 우리가 이 단절을 넘어서서 공백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것에 밀려야 돼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내 중심이고 나 잘난 중심이기 때문에 밀려야 돼요. 밀리고 주님께서 이 공백에 들어오시면 이 공백에서 힘이 나와서 밀렸던 우리로 다시 중심을 보게 하는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이게 낯선 사건이에요. 낯선 사건입니다. 하필이면 우산을 안 가져온 날, 비가 왕창 오는 것 같은 것도 낯선 사건이에요. 하여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를 말로 때울 수 있는 게 아니고 진짜 말로 때우는 순간 그것이 나한테 실제로 와 버려요. 내가 보기에도 내 인생이 희한한 인생이에요. 낯설게 가는 인생. ‘내가 이런 생각을 다 할 수 있다니..’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중심 부분을 주님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차지하는 데에서 요한복음 11장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1장만 나온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 말씀 전체가 나온다는 뜻이에요. 성경 말씀으로 호출합니다. “너의 중심은 네가 그리는 저 바깥에 사람들이 있는 데가 아니고 예수님, 내가 죽는 모습이 진짜 네가 탄생한 본래의 자리이다.”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무덤이 있지요.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자, 묻습니다. 묻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모였습니까? 무덤 앞에 모였지요. 이게 복음이잖아요. “결혼식, 잔칫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무덤 앞에 다 나오라는 뜻이에요. 이게 전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무덤 앞에 나오라. 거기에 꼭 너를 빼닮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야.” 나사로가 나왔지요. 그리고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힘으로 풀 수는 없고 누가 풀어주니까 뒤뚱뒤뚱하면서 이제 돌을 옮겨놓고 나왔습니다. 44절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진수가 보여지는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바로 무덤 앞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면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온다? 주님의 무덤에서. 무슨 무덤? 빈 무덤에서. 빈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죽으셔야 했고 이제는 수퍼맨처럼 그걸 가지고 모든 성도에다가 그 빈 무덤을 우리 앞에 떨어뜨려놓습니다. 우리 안에 집어넣습니다. 전부 다 하나씩 꿰어 찼어요. 주님의 십자가, 주의 빈 무덤을 꿰차고 다닙니다. 그 빈 무덤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래서 무덤이라는 엔진이 가동되어서 우리를 살리고 죽음이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주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이 내가 살아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 속에 있었는데 죽음과 우리 사이에 연결 고리가 십자가 피였던 것을 우리가 늘 지금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세상보다도 주님 만나는 것을 더 희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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