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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11장 17절(가락-세계관)
160621a-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움직이십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이미 죽은 겁니다. 그런데 오빠가 죽었으니까 자기의 가정에 죽은 사람이 있지요. 죽은 사람이 있고 자기들은 살아 있게 되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병든 오빠를 살려내는 것과 예수님이 방문하는 것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렇게 기대를 했어요. ‘오빠는 아프다. 죽어서는 안 돼.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안 되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어가는 오빠를 살려내 주셔야 돼.’
그런데 오빠는 돌아가셨잖아요. 이미 죽었잖아요.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오셔야 될 이유도 같이 날아가 버린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 게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생각은 우리(마리아와 마르다)를 빼놓고 오빠를 살리는 것과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 있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빠가 이미 죽은 입장에서는 이제 와서 예수님이 오실 때는 그냥 위로 삼아 오시는 것 외에는 그다지 연관이 없다고 보는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본격적으로 할 일이 생긴 겁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예수님 됨이라는 것은 죽음이 완전히 바탕에 깔려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진가가 발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나사로는 죽었잖아요. 우리의 생각에는 나사로만 죽었다고 생각되잖아요. 나사로가 죽었다와 더불어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실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이 엮여져있다는 사실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몰라요. 오빠만 죽었지 자기들은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빠의 죽음을 통해서 살았다고 여기는 자도 너희가 생각하는 죽음 현상에 사실은 같이 묶여져 있다고 보는 겁니다. 숨을 쉰다고 산 게 아니고 숨이 끊어졌다고 죽은 게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이 예상하고 있는 범주의 바깥까지 포함을 시켜서 예수님과 관련을 지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그리면 쉬운데요.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고 오빠는 죽어서 누워 있습니다. (뿅 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생각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은 사람과 관련이 되어 있다. 자기는 건강하니까 아플 때 오시면 되고..’ 그러면 마리아와 마르다 쪽은 삶이 되고 나사로는 죽음이 되겠지요.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우리가 평소에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죽음과 삶의 구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확산시켜서 살았다고 여기는 마리아와 마르다까지 포함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부 다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산 자가 되는 방식 외에 다른 영생을 얻는 방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 가족들, 예를 들어 오빠가 죽든지 남편이 죽든지 누가 죽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이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는 걸로 봐야 돼요. 그걸 성령께서 그렇게 조인트를 해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것 섬길까요, 십일조 낼까요, 복음 전할까요, 선교 할까요, 봉사 할까요?”라고 하다가 성령이 딱 와버리면 ‘죽은 놈이 뭘 해도 의미가 없어.’가 되는 거에요. ‘이미 죽은 자인데..’ 안 받습니다. 죽은 자든 뭐든 안 받아요. 주께서 필요한 것은 죽은 채로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죽은 채로 바치게 되면, 살고 안 살고는 누구의 소관이냐 하면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주도권 안에 있지,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죽은 척을 하면서 한 쪽은 실눈을 뜨고 한 쪽은 눈을 감고서 ‘어떻게 주께서 나한테 어떤 조치를 하는지 한 번 구경해볼까?’라고 하면 안 돼요. 온전히 죽음 자체를 주께서 생명(산 자)로 바꿔줍니다.
그러고 난 뒤에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살았다고 여겼던 시절도 사실은 죽은 시절이구나.’ 하는 것을 소급해서 해석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창세 전부터까지 내려가요. 창세 전부터 우리는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창세 전부터 산 자라는 말 가운데에 사실은 뭘 넣어야 되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서 택했다”가 돼요. 그게 에베소서 1장 4절입니다. 태초부터 주 안에서 산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뭘 한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계속 작업을 해오신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해석을 해드렸는데 이렇게 해석을 하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무엇을 놓치고 있고 무엇을 잘못 보고 있고 무엇을 빠뜨리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또 이것 때문에 그 다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만남의 이야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할 때 마르다가 크게 오해한 게 뒤에 나옵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마지막 날”. 마지막 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못 된 거에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알았던 지식을 동원해서 예수님한테 내놓았더니만 예수님이 그걸 옳은 것으로 수용했습니까, 거부했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내가 지금 말 한 취지가 그게 아니야.”라고 하신 거에요. 그 예수님과 마르다와의 만남에서 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아직도 (나사로의 죽음과 자신들의 죽음이) 예수님에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걸 끊어서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는 나에 대해서 내가 알아서 주님한테 한 수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열심히 배워서 구원을 받는데 그 중에 배운 것이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라’예요. 이것 주님께서 평소에 설교 하셨잖아요. 저는 그 말씀을 믿나이다”라고 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의 그 생각은 일방적 생각이고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기 때문에, 네가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야 된다는 고집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도 판정할 수 있는 판정의 기준이 없어요. 자기가 아는 것 전부가 그런 쪽으로 알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연구해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리 연구해봐야 모든 게 헛돼요. 예수님의 조치가 주어져야 되지 본인이 연구해서 본인이 죄를 뚫어서 구출되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세계관이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은 기존의 내 세계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유, 나는 뭔가 잘못되었어. 그러니까 예수님하고 서로 소통이 안 되지.. 뭔가 잘못되었어.’ 그런데 잘못되었다는 말을 할 거라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되고, 더 나아가서 잘못된 데에서 달라져야 되는데 달라진 상태가 어떤 수준이 될 때 드디어 달라짐에 도착했음이 확인이 되느냐, 이 두 가지를 다 아셔야 되겠지요. 첫 번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했지요.
한국 교회 교인들의 (제가 보기에는) 제일 근본 문제가 자기가 잘못된 줄을 본인은 모른다는 거에요. 그냥 옷을 입는 것처럼 위선의 껍데기만 자꾸 입는 거에요. 목욕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옷만 입게 되면 자기에게 때가 있는 것이 안 보이지요. 그걸로 안심을 하는 겁니다. 그걸로 된 줄로 알고 그걸로 하나님께서 기뻐함으로 받는 줄로 아는데 옷을 입을 게 아니라 반대로 옷을 벗어야 돼요. 그런데 옷을 벗으면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 강제로 옷을 벗기십니다. 속살이 나오도록 벗겨요. 어디까지? 다윗까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고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죄 속에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런 고백이 나올 때까지 강제로 옷을 벗기십니다. 그러면 또 안 벗으려고 굉장히 발악을 하는데요. 옷을 벗게 되면 어떤 상태에 놓여있고 그걸 고치게 된 이후의 상태는 어떤 세계관이냐에 관해서 이제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의 이야기를 하려면 세계관이 변화된 실제의 예를 들어야 되겠습니다. 1665년이 무슨 해냐 하면은 (물리학자들에게는 중요한데요.) 뉴턴이 만유인력을 선포한 해가 되는 겁니다. 1665년 영국에서 뉴턴이 페스트라는 전염병 때문에 대학교를 못 다니고 자기 집에 있으면서 연구를 한 것을 발표했어요. 만유인력을 발견했는데요. 그러면 뉴턴이 있던 그 자연과 지금 2016년의 자연이 같은 자연일까요, 다른 자연일까요? 똑같은 자연, 똑같은 우주지요? 전혀 달라진 게 없지요.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뉴턴의 생각과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다르다는 게 문제에요. 뭐가 다른가 하면은 똑같은 대자연의 법칙에 의해 그냥 묵묵히 달은 돌아가고 해가 뜨는데 세계관이 다르니까 세상을 해석하는 해석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런데 뉴턴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있는데 그 사람의 우주관도 달라요. 갈릴레이 갈릴레오 하고 또 다르고요. 그러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은 결국 무슨 싸움이에요? 세계관, 이 우주를 어떻게 보느냐 그 관점이 다른 거에요. 이것은 오늘 요한복음 1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가 죽을 때도 햇빛, 공기, 물을 하나님께 다 받았잖아요. 오빠가 죽기 전이나 죽은 때나 예수님을 만날 때나 똑같아요. 그런데 전에는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시면 “아멘. 아멘.” 하면서 이야기가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떤 계기가 일어나면서, 다시 말해서 오빠가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사랑했던, 내 사랑을 받아줄 줄 알았던 예수님으로부터 티박이 와버린 거에요. 정면으로 충돌이 되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네 세계관을 바꿔야 된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 거에요. 다른 말로 해서 너희, 마르다와 마리아의 세계관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 네 말대로 오빠가 아플 때 온 게 아니고 다 죽고 난 뒤에 왔고 이것을 계기로 해서 살아있다고 우기는 너희, 마르다와 마리아의 세계관을 바꾸어 주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오빠를 병들어 죽게 하신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하고 이야기가 통하니까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자기가 이쯤 했으면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그 우리의 생각 있잖아요. 그 세계관이 과연 예수님의 세계관과 일치가 되는지를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을 통해서 확인을 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하기 전에 저는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에 있어서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보는 세계관에 대해서 지금 설명해주려고 하는 거에요.
뉴턴의 세계관과 기존의 세계관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은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과가 떨어지잖아요. 사과는 뉴턴 이전에도 많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뉴턴의 생각은 ‘떨어진다는 게 뭐냐?’ 하는 거에요. 떨어지는 게 뭐냐를 생각한 거에요. 정말 이것은 천재적인 발상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면 주워 먹으면 되는데 그걸 왜 따지냐 이 말이지요. 이 사람이 지금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그것은 초등학생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에요.) 떨어진다는 게 뭐냐는 거에요. 뉴턴이 생각하기를 ‘왜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안 떨어지지?’ 이게 포인트입니다. 저 둥근 달은 왜 안 떨어지느냐 말이지요.
뉴턴은 드디어 이걸 풀어나갑니다. 왜 안 떨어지는가를요. 뉴턴이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고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안 떨어지느냐에 대한 힌트를 어디에서 얻느냐 하면은 선배인 갈릴레이 갈릴레이한테 얻어요. 갈릴레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 하고 정지된 것은 계속 정지되려고 한다”고 했는데 이걸 관성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럼 갈릴레이 이전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는 하늘의 법칙이 “따로” 있고 땅의 법칙이 “따로” 있다. 하늘의 법칙은 완벽하고 안전하다. 그래서 모든 해와 달이 규칙대로 돌아가지만 땅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충돌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길도 삐딱하게 가고 자기 맘대로다. 그러나 하늘을 봐라. 달은 늘 그 자리에, 별은 늘 제 자리를 찾아오니까 원리가 다르다고 본 거에요. 그러니까 하늘의 원리와 땅의 원리가 서로 다르다 이 말이지요.
이 하늘을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이 아니고) 천체라고 합니다. 천체의 원리하고 인간이 사는 지상의 땅의 원리가 다른 거에요. 그게 갈릴레오까지 계속 이어져 온 거에요. 그러니까 중세에 뭘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지요.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이데아 세계는 완벽하고 인간은 부족하니까 어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자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자고 하니까 문제가 돼요. 이건 천체에 가는 게 되어 버려요. 성경에서는 어디에 갑니까? 높은 천체에 올라갑니까, 아니면 천국에 갑니까? 천국에 가지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본 거에요. 왜? 하늘 자체에 완벽한 원리(perfect principle)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구약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땅은 모든 것이 무조건 혼돈스럽고 무질서한가?’ 그게 아니라 땅에서 하늘의 원리처럼 변동없이 완벽한 것들이 남아있든데 그게 물, 불, 공기, 흙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이 땅에서 완벽하게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간다? 흙으로 돌아간다. 왜? 흙이 모든 걸 받아주잖아요. 그러니까 안정적이지요. 공기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이 아무리 설쳐도 여전히 새벽공기는 차갑게 오잖아요. 물도 마찬가지고. 불도 마찬가지인 것이 작대기를 가지고 헤쳐봐야 불은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피어오르잖아요. 불이 끊어지면 재가 없어지고요.
이 자체는 일관성 있게 벌어지더라는 거지요. 이게 이 세상의 구성원리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 헬라 철학입니다. B.C. 500년 경에 탈레스가 물이 기본이라고 했지요. 동양에서는 금속이 또 하나 붙어요. (토, 말고) 금이 붙는다고요. 그래서 오행설이에요. 이 오행설이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이제 옛날 사람들을 이해하시겠지요? 변화하지 않는 완벽한 원리는 저 하늘에 있고 우리의 영혼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올라간다고 믿었어요. 영혼은 올라가고 내려가면 흙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흙은 내려가니까 이 완벽한 체제 안에서 인간이 죽으면 땅에 묻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으로 비로소 완벽한 질서 안에 참여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귀신이 죽으면 구천을 떠도니까 49제 해가지고 빨리 하늘로 보내야 돼요. 이게 그 당시 뉴턴 이전의 세계관이었습니다. 뉴턴을 몰라도 해피했어요. 몰라도 굉장히 행복했어요. 여러분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니까 물, 불, 공기, 흙은 이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처럼 완벽한 원리를 일부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이 내려주신 원리이고 이 원리대로 무거운 것은 내려오고 가벼운 것은 뜬다는 것을 우리의 심성으로 삼아버리면 이것이 동양의 주자학이 돼요. 동양철학이 되는 겁니다. 이게 불교가 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되고,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그저 순리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이치다.라고 뉴턴이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떨어지는 게 뭐냐를 묻는 것은 하나님(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면 그건 하나님이 주신 질서이기 때문에 밑에 있는 백정이라든지 못난 사람들은 그 갑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안 돼요. ‘자기는 을이 팔자다.’라고 생각하고 수그러야 되고 굴복해야 되는 겁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니까 여자는 무조건 그냥 참고 남자는 백수 짓을 해도 자기가 돈을 벌어가지고 받들어 모셔야 되는 겁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는 것이 여자가 해야 될 일이고 이것을 대들면 칠거지악에 걸려서 안 됩니다. 이게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겁니다.
달은 완벽한 곳일 수가 있어요. 사과는 썪으니까 이건 불완정한 거지만 달은 항상 그 자리에 있잖아요. 완벽하잖아요. 신을 닮았지요. 그런데 뉴턴에 와서는 이걸 뭘로 다 바꾸느냐 하면은 질점으로 봐요. 에너지 덩어리로 보는 겁니다. 여기에는 달은 인자하다. 해는 온화하다.가 없어요. 다 빼버리고 하나의 물체 덩어리로 여기는 겁니다. 물체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에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오늘 성경공부를 하는지 물리학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세계관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한 번 보세요. 우리가 하는 이 이야기가 우주가 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속임수가 없어요.)
높은 곳에서 공이나 사과를 던지게 되면 반드시 이렇게 (‿) 원상태로 갑니다. 이게 관성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약에 늘어뜨린다면 계속 떨어져서 마지막 올라가는 데까지 올라가는 거에요. 그러면 만약 이것이 계속 펴지지 않고 간다면 그 사과는 계속 굴러가면서 계속 올라가려고 할 거에요. (단, 마찰력이 없는 진공상태인 경우에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원상태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있고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사과를 떨어뜨리게 되면 사과가 떨어지는데 (직선이라면 계속 아래로 가겠지만) 지구가 원모양이고 사과가 그 궤도를 따라 가니까 계속 원으로 그리면서 떨어지는 거에요. 지구가 둥그니까 계속 따라도는 거에요. 이게 떨어지는 방법이에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 딱 맞아요. 지구가 평지로 되어 있는 게 아니고 둥그니까 그것을 따라서 계속 도는 거에요. 지구의 궤도와 인공위성의 궤도 사이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힘에 의해서 계속 가는 거에요. (F=m¹m²/r²) 이것은 달도 마찬가지고 사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사과는 지구의 궤도와 너무 가까워서 (힘이 거리에 반비례하니까) 딱 갖다 붙어버리는 거에요. 지구는 당기지요, 사과는 안 밀리려고 하다가 대번에 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떨어진다는 말은 인간(지구) 자체를 하나의 질점으로 보지를 않고 너무나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감정이고 이성이고 착함이고 윤리와 같은 그런 계급 같은 것을 다 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완전히 복면가왕입니다. 다 떼고 딱 두 개의 물질로 봤을 때 이 세상은 인간의 양심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헌금과 전도도 아니고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니고 순교도 아니고, 오직 아무 가치가 주어지지 않는 힘에 의해서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대로 살면 복이 온다는 그런 망발(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세상관은 바뀌어야 된다.”는 거죠. 내가 착하게 살면 복을 준다는 그런 생각은 뉴턴에는 없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돈의 힘, 물질의 힘이 신을 능가하는 시대가 된 거에요. 그리고 이것이 현실을 제대로 본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모든 인간관계에 다 적용시켜 버린 것이 인문학이라는 겁니다. 자연과학에 기초해서 인문학을 해버리면 형과 동생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땡기고 미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돈의 힘입니다. 얼마나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는가, 용돈을 많이 주는 자식을 배나 사랑하고 세배 받고도 돈을 안 내는 자식은 내쫓아버리는 겁니다. 모든 것, 인간의 양심이나 착함이나 기도나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을 다 떼고 네가 남들을 유인할 만한 그런 자본을 네가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이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드디어 17c에 경제학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 사람으로 안 봐요. 돈을 갖고 있는 하나의 대상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뉴턴은 뭘 몰랐느냐 하면은 왜 서로 당기는지를 몰랐아요. 왜 지구하고 사과하고, 왜 지구하고 달하고 서로 당기느냐 말이지요. 왜 힘만 이야기하는가 말이지요. 물론 달도 지구로 끌려와야 되는데 원심력(바깥으로 나가려는 힘) 때문에 균형을 맞추어서 떨어지지 않는 거에요.달이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면 간단해요. 밀물과 썰물로 대번에 증명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옛날(뉴턴 이전)에는 맨날 해변가에 가가지고 밀물을 봐도 저것이 왜 저런지를 몰랐거든요. 그런데 뉴턴이 달과 지구의 인력 때문에 당기니까, 쭈뼛쭈뼛 살갗에 소름이 돋듯이, 당기면 털 같은 것이 일어나잖아요. 이처럼 일어나다 보니까 해변가에 물이 이만큼 빠지는 거에요. 몰랐어요? 우리는 알잖아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몰랐다니까요. 그 천재적인 똑똑한 세종대왕도, 강감찬도 몰랐어요.
그것 몰라도 행복해요. 그러나 뭐가 다르지요? 세계관이 달라요.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이 있으나 없으나 나름대로 행복했을 거에요. 그런 데에다 예수님은 “네가 행복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지금 예수님의 세계가 무슨 세계입니까? 천국이지요. 천국의 이야기를 하는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의 세계관을 고수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세계관이 다르니까 이야기가 안 통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죽임으로써 지금 세계관을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되지도 않는 물리학까지 언급을 하는데요.
이게 맞는 이야기인데 아까 뭘 모른다고 했어요? 왜 당기는지를 모른다고 했지요. 누구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달하고 지구하고 서로 당기는지를 누가 아십니까? 아까 이야기하기를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서로서로 당기니까 그렇다고 했지요. 그 다음 문제에요. 왜 당깁니까? 이런 질문을 아인슈타인이 한 거에요. 이 사람들이 희한하지요. 그런 걸 몰라도 행복할 수 있는데 밥이나 먹고 장사나 잘하고 하면서 살면 되는데 이걸 질문을 하는 거에요. 왜 당길까? 에딩턴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에딩턴이라는 사람이 일식을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태양이 있고 달이 있고 지구가 있어요. 그리고 태양 뒤에 별이 있어요.
그런데 달이 태양을 가려버리면 이걸 일식이라고 해요. 달이 태양을 가려버리면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시커멓게 되어 버려요. 그리고 태양의 주위(모서리)는 약간 빛이 나겠지요. 이걸 금환일식이라고 해요. 그때 안 보여야 되는, 태양의 뒤에 있는 별이 우리의 눈에 보이더라는 겁니다. 원래는 태양의 뒤에 있어서 별이 안 보이는데 이게 보이더라는 거지요. 이게 무슨 원리냐 하면은 (아까 내가 당긴다고 했잖아요. 사과가 떨어진다고 했잖아요.) 이건 당기는 것도 아니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이.
우리가 뭔가 너무나 무지몽매하가지고 표현을 그렇게 한 거에요. 뉴턴은 그걸 몰랐다는 거에요. 서로 당긴다고 하니까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왜 당기는지가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이건 당기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요. 산에 약간의 언덕이 있고 밑에 사람이 있는데 공을 굴립니다. 그러니까 아래에 있는 사람(A)에게 굴린다고 했는데 굴려놓고 보니까 그 사람의 앞 지점(B)에 공이 온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 공을 굴리니까 (A라는 지점에 와야 되는데) B라는 지점에 오는구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왜 A지점에 오지 않고 B지점에 오지? 공이 막 굴러서 왜 B지점에 오는가?’라고 한 거에요.
보통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공이 무거워서 내려온다고 하잖아요.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왜 공이 왜 높은 데서 아래로 내려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게 무거우니까 아래로 내려오지.”라고 해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요. 이걸 몰라도 얼마든지 장사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애 교육 잘 시키고 해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그 세계관은 제한된 세계관이에요. “아이고, 모를 건 모르고 내가 아는 것만 챙겨서 애들이랑 밥이나 먹고 살면 되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사실 인생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에서는 세계관 자체가 바뀌어야 되기 때문에 “아는 범위 안에서 예수님하고 좋게 지내지..” 이건 아니에요. 이러면 천국에 못 가요.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 여기에서 행복하면 된다고 하는 그 세계관 자체가 완전히 뒤집어져야 돼요. 여기 책상을 확 엎듯이 완전히 뒤집어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 세계관이 안 뒤집어지니까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고 “우리 오빠가 아플 때 오시지 죽고 난 뒤에 옵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이야기의 핀트가 안 맞는 거에요. 핀트가 안 맞다는 말은 주님의 천국에 적절하지 않는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런가 하고 아까 산에 있는 언덕을 자세히 보니까 거기에 홈이 파여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공한테 어떤 인격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고 그냥 파인 홈대로 갈 뿐이에요. 뉴턴은 생각하기를 여기에 달이 있고 또 지구가 있고 그 가운데에 힘(이걸 중력이라고 합니다.)이 있어서 이 두 대상이 서로 당겼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힘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고 지구와 달 사이가 구부러져 있으니까 구부러진 만큼 달이 와서 지구 주위를 뱅뱅 돌게 되어 있다고 본 거에요. 구부려져 있으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은 관계에요. (이걸 일반 상대성 원리라고 합니다.)
보이는 별에서 빛이 올 때, 우리는 빛이 생각하기를 빛이 똑바로 간다고 생각하는데 아인슈타인은 그게 아니고 빛은 우리가 보기에 최단거리로 가지만 사실은, 빛은 짧은 거리가 아니고 파인 홈을 따라, 이걸 어렵게 말하면 곡률의 비(구부러진 비율)에 따라 자기 딴에는 최단거리로 오는데 그게 휘어져 오는 거에요. 이게 직선이라면 몰라도 구가 되게 되면은요 최단거리를 펴보게 되면은 이게 구부러져요. 칼기를 타고 미국에 갈 때 보면은 미국에서 북극으로 가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왜 북극으로 돌아서 가느냐 하는데 그게 돌아가는 게 아니고 최단거리로 가고 있는 거에요. 이게 세계관이 다른 겁니다.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의 세계관은 중력이라는 힘의 구조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없지요.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질점이고 질점이라는 것은 에너지 뭉치에요. 그래서 인간의 양심, 윤리, 도덕 같은 것은 일단 배가 부른 자들의 희망사항이고 가장 원초적인 것은 인간은 에너지이기 때문에 뭐만 주면 되느냐 하면은 에너지만 채워주면 돼요. 에너지는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은 곡물, 양고기, 돼지고기에서 나오지요.
그러면 그것을 사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하지요. 그러면 에너지 덩어리를 활용해서 돈을 챙기고 돈을 챙긴 것을 가지고 또 에너지를 집어넣으면 그걸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사는 것이라고 하는 거에요. 북한 평양에 엘리트들이 지금 행복합니까, 행복하지 않습니까? 되게 행복해요. 왜? 평양을 빼놓고 못 살거든요. 사람은 자기보다 못 사는 자들이 있고 자기에게 많은 것이 있을 때 되게 행복해해요. 부부 사이에 산다 못 산다고 다투어도 연예인 누구 하나가 이혼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행복해요. 꼭 남이 아프고 망하고 할 때 건강한 사람들은 덤으로 얻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한 순간은 언제냐 하면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뿐이에요. 그러면 돈이 한 20억 원 있는 사람이 불행할 때는 언제입니까? 돈 5000억 원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요. ‘내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게 사는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이 세상의 세계관은 뭔가 하면은 인간의 윤리, 도덕, 행복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밑바닥은 세포의 움직거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그 세포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에 속하거든요. 생물학 밑에 물리학이 있고 그 물리학 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있습니다. 이 우주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물리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다가 살다가~~· 그래서 제가 주일날 제가 입구하고 출구밖에 없는 아메바 이야기를 했지요. 안에 에너지에 의하면 에너지는 튜브밖에 없다고요.
인생을 사는 것은, 이거에요. 아메바를 생물(생명)이라고 하지 무생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메바의 생명은 어디에서 나왔어요? 입구에 들어온 에너지원에 의해서 잠시 진동할 때 사람들은 이걸 생명이라고 하는(보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오늘 저녁에 밥을 먹었다는 말이거든요. 밥을 먹었으니까 에너지원,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들어왔지요? 세포는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그 단백질을 분해하고 거기에서 atp라는 에너지가 나오면서 그 에너지를 세포에게 공급을 하게 되면 세포는 각자 자기가 맡은 기능을 하면서 우리 몸이 돌아가는 거에요. 그걸 빼앗아 먹는 암세포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돌아간단 말이에요.
배가 좀 부르니까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런 거에요. 배가 부르니까 ‘착한 일 좀 해볼까? 부모한테, 시어머니한테 효도를 좀 해볼까?’ 이게 지금 자기가 배가 부르다는 이야기거든요. 배가 부르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에요. 지금 자기 몸이 아파서 고시반에 돈도 못 내고 있는 판에 엄마가 어디 있고 아버지가 죽은 게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아프다고? 자기 몸이 빚을 져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왜 오는데요? 노숙자들이 그렇게 돈이 없다고 하면서도 담배값은 어디에서 나오고 술값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요. 그것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래요. 이것이 아니면 자기를 달랠 길이 없잖아요. 달랠 길이 없다는 게 아니고 그게 배가 고프다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뉴턴에게서 확인된 세계관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는 거지요. 필연밖에 없어요. 좀 냉혹하고 냉정하지만. 그러면 어떤 사람이 뉴턴이든, 아인슈타인의 멱살을 잡고 “네가 어디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어디서 해?” 하고 흔들 수 있어요, 없어요? “이게 어디 사람을 현혹하려고 있지도 않은 원리를 말하느냐?” 하고 흔들 수가 없어요. 개기일식 때면 안 보이던 별이 보이니까요. 별빛은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중력의 패인 홈에 따라서 우회해오는 거에요. 그렇게 우회해오는데 왜 우회해오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세계관 때문에 그래요. 왜? 우리가 빛의 세계관으로 바꾸면 되는데 우리는 뭐든지 빛은 똑바로 온다고 자꾸 고집스럽게 우기다 보니까 ‘별은 왜 자꾸 휘어져서 오지?’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나는 똑바르다.”라고 하는 것, 그것도 사실은 똑바른 것이 아니고 중력이 쳐놓은 관계망의 담요, 푹신푹신한 담요에 그냥 한 지점을 차지했을 뿐이에요. 이걸 아인슈타인의 일방 상대성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일방 상대성원리라고 하는 것은 중력에 관한 것이고 특수 상대성원리는 빛의 속도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빛의 속도가 변함이 없으니까 뭐가 조종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시간과 공간이 줄었다 늘었다, 줄었다 늘었다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100년을 산다고 하지만 100년을 살아봐도 또 다른 데에 가면 1000년을 더 살 것을 우리는 지금 1/10로 손해를 보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면 1000년을 살아요. 괜히 운이 없어서 지구에 살아가지고 100년밖에 못 산다고요. 이러한 뉴턴의 주장을 가지고 화가 난다고 뉴턴의 멱살을 잡고 “어디에서 남을 미혹하느냐,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어디에서 끄집어 내?” 하면서 그 사람을 보고 따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든 게 맞아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뉴턴을 보고 따지지를 못하고 “그냥, 내가 아는 대로 살래.”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냥 나는 이 세계관에 대해서..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기에는 자기 자신이 허무해도 너무나 허무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억지를 부려서 “인간은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행운을 주신대.” 이게 옛날부터 쭉 인습적으로 왔던 거잖아요. “역시 자식이 효도를 하면 자식 대대에 복을 받는다.” 이걸 계속 붙들고 싶은 거에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물리학 위에 서있던 하나의 헛개비 같은 것인데요. 그러면 부모한테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증명이 안 되지요. 그런데 지금 아인슈타인을 통해서 증명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라는 인간을 받아들인 게 아니고 억지를 부려서 옛날에 해왔던 것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미신입니까?” 아인슈타인이 미신이에요, 아니면 그냥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물리학에는 문외한이야. 나는 물리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사는 대로 살래.” 어느 게 비현실적입니까? 기존을 답습하는 게 비현실적이지요. 그냥 답습하는 사람이요. 그것이 그냥 이 세상에서 끝날 문제라면 제가 여기에서 이 물리학을 끄집어내지를 않습니다. 지금 문제는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보는 현실이 옳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는 현실이 옳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옳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는 말은 도통 무슨 말인지를, (마르다와 마리아도 못 알아들었지만) 오늘 우리가 그냥 “편하게 살래,”라고 하는 세계관에서는 예수님의 세계관이 무슨 말인지가 먹히지가 않아요.
그런데 먹히지 않는다는 것에서 문제가 끝이 나는 게 아니고 문제는 그런 마음가짐과 그런 자세로서 천국에 합류를 못해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오늘 본문에 한 번 봅시다. 요한복음 11장 2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했잖아요. 이때 24절 답변에 “마르다가 가로되”라고 나와 있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각자의 이름을 집어넣어 봅시다. 우리의 친오빠가 죽었습니다. 남자라면 친누나가 죽었습니다. 누가 죽었습니다. 죽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오빠가 다시 살리라”라고 하실 때 그 다음에 괄호를 열고 우리가 주관식으로 문장을 한 번 넣어보세요. “예수님, 마지막 날에 우리 오빠(누나)가 다시 살 줄을 믿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게 바로 세계관이 안 맞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그 이야기를 요한복음 11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하유,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데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네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우리가 묻기도 싫어요. 왜? 그걸 만약 예수님이 수정하려면 우릴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느냐 하면은 “오빠 잘 죽었어. 그래, 주의 뜻이야.” 그게 선뜻 동의가 되어야 되는데 문제는 머리에는 억지로 박혀도 마음은 동의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에 동의가 안 되면 내가 불행해진다니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이야기를 하면 “우리 교회는 복음을 몰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이러고 말아요. “지금 그게 옳습니까?”를 묻는 게 아니고 “숫자가 많이 모이면 되잖아. 예배당 크고. 그러니까 예배당이 크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교회다.” 그런 뜻으로 우기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하고 합해 먹은 사람이 몇 명입니까? 끝에는 12명인데 12명이 다 떠났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편은 몇 명이에요? 엄청나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지식은 알아요. 메시아가 온다고 다들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마음을 누가 알랴? 아무도 몰랐어요. 성령이 임해야 알아요. 성령이 임해야 압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려면 성령을 주시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성령을 줄 때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기 위한 작업으로써 성령이 와요. “그러면 성령이 오면 바꾸어지겠네?” 천만에 바꾸어질 때는 내 세계관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주는 작업과 병행을 해서 바꿔준다 이 말입니다. 이걸 제가 강의 제일 처음에 했잖아요.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데다가 덤으로 하나를 더 붙이면 가지고 있는 것에 하나가 더 붙어있는 식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왔다는 말은 내 쪽에서 생각하는 게 다 엉터리라는 뜻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다 엉터리다. 왜 엉터리냐? 나는 나의 행복만 있으면 돼요. 그 행복이라는 것이 인습이고 풍습이고 관습이거든요. 그걸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하던 대로 그냥 살래.” 주께서는 그 가운데에 내가 사랑하는 오빠를 죽이듯이 (제가 아까 늦게 온 사람을 보고 이야기했는데 그 오빠의 죽음에 누가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집어넣어가지고 (그게 보편화되니까요.)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왜 죽었지?’ ‘이렇게 훌륭한 오빠를 예수님이 왜 죽이지?’ (둘의 죽음이)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훌륭한 오빠를 왜 죽이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저렇게 착한 일을 했는데 왜 죽이지?’ 그것은 “네 인생관은 죽음의 힘, 악마의 힘에 근거해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까짓 것, 대충 그냥 몸 편한 대로만 살아왔을 뿐이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를 죽여서까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인생관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요구한 대로 오빠가 아플 때 찾아가지 않고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찾아간 겁니다. 오빠가 문제가 아니고 살아 있는 두 누이동생에게 뜯어고칠 게 많아요. 그걸 고치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오빠를 죽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지요. 이게 이삭의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 본인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치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관에서 일어난 거에요. 이것을 하고 첫째 시간을 쉽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원리에서 이 세계는 중력의 바다요, 중력의 세계입니다. 모든 게 중력에 관계망이고 그 관계망 속에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 중력을 예수님은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은 예수님 중심으로 바꿔놓아버려요. 어떤 것도 예수님의 관계망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요. 오빠가 죽든 살든, 너희들이 나한테 잘못 되었다는 것, 등등 전부 다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그 세계로 바뀐 세계관을 두 자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중심, 아들의 나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뜻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10분 쉽시다.
요한복음 11장 17절(가락-세계관)
160621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서 이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서 모든 것이 해명이 되었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관계망이고 관계망 속에서 에너지가 직결되는데 어떻게 직결이 되면 지렁이가 되고 어떻게 직결이 되면 달팽이가 되고 어떻게 직결이 되면 그건 원숭이가 되고 또 어떻게 직결이 되게 되면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인간이 될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곧 제 3의 인류가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바로 진화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은 말로는 똑바로 가는 것 같은데 똑바로 가는 게 아닙니다. 결국 질서는 회귀한다. 언젠가는 비스므리한 것들이 다시 온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동일적인 것이 계속해서 똑같이 돌아온다. 이것이 불교요 물리학이고 현재 이 세상의 진화론자들의 종교입니다. 무엇이 영원한 게 아니고 영원함 자체가 계속 돌아오는 거지요. 특정 인간이나 물체가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돌아옴이 반복되니까 한 번 돌아올 때마다 거기에 속해있던 인간과 개, 돼지, 자연, 꽃이 전부 돌아오는 거에요.
지구도 깨졌다가 다시 지구가 될 수도 있고, 달도 없어졌다가 다시 만들 수 있고, 이게 현대 천문학입니다. 지금 학생들은 그렇게 배우고 있어요. 모든 것은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러한 물리학의 바탕 위에서 인간들이 만든 인문학, 윤리, 도덕, 경제학, 사회, 양심 이런 것들은 어떤 사고방식이냐 하면은 모든 게 힘이니까 그냥 모을 때 바짝 모으고 호강하다가 죽을 때 그냥 죽으면 그만인 거에요. 그걸 제가 아메바라고 했지요. 아메바하고 똑같아요. 뭔가 꿈틀거릴 때는 생명인 줄로 알았지만 장례식에 가 봤지요? 죽고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 동안 잠시 몸을 움직인 것이 80년이거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고 했어도 옛날 사람이라 지금은 흙이 되어 가지고 있잖아요. 모든 인생은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생물학에서 보면 딱 한 가지만 중요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번식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보편적인 거에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입각한 우주관에 있어서, 모든 질서들이 뭉치고 흩어지고 뭉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번식이라고 하는데 이 번식을 하기 위해서는 짝짓기가 필요해요. 이 짝짓기를 사랑이라고 하고 이 사랑이 드라마의 주제가 되고 우리가 이것을 보고 재미있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이것은 자기 종을 번식하는 겁니다.
이걸 도킨스는 번식이라고 하지 않고 DNA의 자기 확산이라고 했습니다. 도킨스는 말하기를 인간이 DNA를 갖고 있는 게 아니고 DNA가 자기의 티를 낸다고 인간이라는 바깥의 단백질 덩어리를 만들어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도킨스의 멱살을 쥐고 흔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마음에 안 들면 애기가 있을 때 DNA를 끄집어내가지고 태아의 DNA를 바꿔치기 하게 되면 천재가 돼요. 그러니까 도킨스의 말이 맞는 거에요. 이제는 맞춤 DNA를 할 거에요. 왜 그렇게 못하지요? 돈이 없어서 못하는 거에요.
또 돈이에요. 결국 돈이 없는 사람은 맨날 바보가 되고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태아를 조사해가지고 천재적인 DNA로 바꿔치기를 해가지고 짜깁기 인간을 만들 거에요. 그걸 제 3의 인류라고 합니다. 인간이 기계를 이용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자진해서 기계가 되는데 그냥 우리가 생각하기를 ‘기계’라고 하면 딱딱한 느낌이 들잖아요. 그 기계라는 말 대신 맞춤 DNA를 집어넣으면 기계도 아니면서 이미 조작된 인간이 인간을 위하여 지금 다니고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요. 그것은 이윤이 남아야 돼요.
그러니까 자본 시장에서 그런 연구도 돈이 될 때에만 그게 연구거리가 돼요. 거기에 무슨 예수 복음이 필요하고 기독교나 교회가 왜 필요해요? 그런 게 아무 필요가 없어요. 그냥 DNA 알고 돈 벌고 그냥 사는 대로 살다가 아메바처럼 죽으면 그만이에요. 나쁜 짓은 안 들키면 돼요. 들켰다면 검사장에게 돈 1억을 먹이면 되는 겁니다. 뭐든지 다 돈으로 때우면 돼요. 돈으로 말이에요. 내가 흥분할 것이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24절에 보니까 “마르다가 가로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예수님은 이 시대를 “마지막”으로 봐요. 그러나 이런 종말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서는 안 나온다는 겁니다. 종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받았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계시 안에 종말이 들어있어요. “마지막 때”.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마지막 때는 비극적이고 겁나는 거에요. 왜? 살아있는 것의 존재를 무가치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이 희망이 있느냐 하면은 고저고저 마지막 때가 오기만을 기다려요. 왜? 그날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잘못 생각했지만, 잘 생각했든 잘못 생각했든 간에 그들의 희망은 마지막 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에요. 그것은 유대인들도 그렇지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지요.
그러면 제가 여기에서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지금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셨잖아요. 그러면 인생관(사고방식)을 바꿔야 되는데 어떻게 바꿔야 됩니까? 그냥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삽시다.”가 아니라 (오빠가 마지막 날에 살리라는 그런 시간 개념의 마지막 때가 아니고) 예수님은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세계관으로 지금 바꾸기 위해서 오빠를 죽인 겁니다. “다니엘에도 보면 마지막 때에 무덤에 있는 자들이 무덤을 열고 나오잖아요. 우리도 그 정도는 압니다. 오빠가 죽었지만 마지막 때에 부활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그 이야기가 잘못 된 거야. 지금 예수님이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때야.” 도대체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예수님의 이 말에 대해서 동의가 될 수 있겠어요? 뭐부터 바꿔야 되겠지요? 그것 바꾸기를 지금부터 한 번 시작을 해봅시다. 이제부터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해봅니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습니다. 언약이 완성이 되게 되면 그 안에 이사야의 예언이 들어 있어요. 이사야의 예언에 보면 사자와 소가 어린아이와 같은 굴에서 놀고 라고 되어 있어요. 이사야 65장도 그렇고 이사야 21장 마지막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한 모든 개념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은 에덴 동산을 모델로 삼았어요. 에덴 동산처럼 만들어준다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앞에 조건이 있어요. 죄가 없어야 되는 조건이 있어요. 그렇게 보게 되면 이사야가 그런 예언을 할 때 마지막 때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마지막 때는 나중에 오는 게 아니고 마지막 때라고 이야기하는 그 말씀 안에 이미 들어있는 거에요.
이것이 들어있는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바람이 없는 원형 풍선 안에 옥수수 한 알을 넣었다고 합시다. 바람이 안 들어갔습니다. 옥수수 알은 그대로 있고요. 여기에서 바람을 휙 불었다면 바람이 들어가니까 풍선이 커지겠지요? 풍선이 커지면서 옥수수 알은 그대로 있겠지요? 이렇게 풍선에 바람이 안 들어갈 때는 2차원이 됩니다. 그리고 2차원은 안과 밖이 성립이 안 돼요.
그런데 풍선에 바람을 넣으니까 (옥수수 알은 분명히 풍선 안에 들어있습니다.) 풍선이 커짐으로 말미암아 풍선 밖은 밖이 되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 안과 예수 밖이라는 복음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은 공생애 십자가를 지기 전이기 때문에, 2차원적인 옥수수 알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들어오신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고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니까 (마태복음에 성령이 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성령이 임해서 해석해야 되는 것이고) 이때는 예수님 중심으로 새로운 안과 밖을 조성하지를 못하는 거에요.
조성하지 못한다는 말은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세계관에 그냥 예수님이 한 명 더 추가해서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당신이나 우리나 똑같으니까..’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하고 2차원으로 한 통속이니까 같이 봅시다. 땅 위에 예수님이 사시고 사람들이 섞여 있고 시장바닥에 열두 제자가 같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언약대로 이루어지게 되면 땅 위의 나라는 천국이 된다.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심지어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천국을 기다린 거지요. 아까 천국이 뭐라고 했습니까? 두 번째 강의 제일 처음에 했는데요. 마지막 때만 되면 그 동안 고생한 것이 다 씻어지는 거라고 했지요. 왜? 이사야 21장과 65장에 보면 그 멋진 나라가 있으니까 모든 이 땅에서 고생한 것, 설움 받는 것을 깔끔하게 다 잊어버리는 거에요. 특히 시편 말씀에 보면 “할렐루야 마음껏 찬양하고 하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복을 받고 그래서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세상 밖의 천 날보다 나으니라“라는 시편 84편 말씀이 있잖아요. 그리고 시편 23편에 보면 뭐라고 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사투리 버전으로 해가지고 돌아다니는 모양인데요. 부흥사들이 그걸 경상도 말로 하고 전라도 말로 하고 이북 말로 해가지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게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뭘 기대한다는 거에요? 언젠가는 우리의 왕이 되신, 다윗의 자손, 우리의 메시아가 오게 되면 여기 시편 23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누구의 것이 된다? 우리의 것이 된다는 거지요. “마지막에 내 상이 흘러 넘치리라” 세상에, 상다리가 흘러 넘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동안 아무리 수모를 당하고 이방인에게 억압을 받아도 무슨 믿음만 있으면 된다? 오신다. 오신다. 누가 오신다? 다윗의 혈통, 다윗의 자손이 오면 된다. 다윗의 자손의 계통이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왕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다 유다의 혈통이라고요. 그리고 유다 혈통이 다 하고 난 뒤에는 사독부터 해서 이미 피가 섞여가지고 혼혈아가 되었거든요. 혼혈아들인데 억지를 부려요. 그래도 유다지, 유다 자손에게.. 자꾸 찾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한테 “네 고향이 어디냐?”라고 묻는 겁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느냐?” 적어도 메시아가 나오려면 유다의 고향에서 나와야 돼요. 유다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지 저 강원도 촌 동네에서 메시아가 왜 오시지? 그래서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또 배척한 거에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기존의 그들의 세계관이 이미 짜여져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돼요. 오늘날 21세기 현대인이 성경을 보니까 왜 이것이 충돌이 되는 말이고 왜 이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되잖아요.
성경은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기대하던 바, 그것은 언약이 이루어지는 그날, 그 마지막 때가 되게 되면 자기 나라 이스라엘 백성을 빼놓고 다 지옥에 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나라하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할례를 받은 자는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약속에 말이에요. 아브라함에 속한 자손은 할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할례 하고 또 에스겔에 보면 뭘 합니까? 안식일은 영원해요. 그 두 가지만 하면 돼요.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면 되는 거에요.
만약에 이방인들이 천국에 가고 싶다면 두 가지만 하면 돼요. 그것은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을 보고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이 두 가지를 꼭 지켜야 된다고 해요. 그런데 골로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할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또 뭘 해? 안식일? 복음 앞에서 그걸 왜 지켜야 되는데?” 이렇게 나와요. 제 말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2장에 나와요. 그것은 다 허물어져야 될 거야. 그것은 부숴버려야 돼.“ 부숴버려야 될 것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교회를 보세요. 주일 성수하지요. 부숴버려야 될 십일조를 지키지요. 갈라디아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들이 그런 것을 지키면 내 복음이 헛될까 하노라”라고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완전히 가슴을 치는 거에요. 귀한 것을 줬는데 그들은 깔고 앉는 거에요. 완전히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개국 초기에 서양 사람에게 요강을 선물하니까 요강에다가 밥을 말아먹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복음의 용도를 몰라요. 복음은 이런 것(안식일, 할례)을 다 버리라고 준 용도인데 그들은 십자가에다가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도 하고 율법도 다 지키고 (그것을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도) 사도 바울이 지키라고 했으니까 그것을 다 지킨다고 해요.
토정선생 이지함이 길을 갈 때 머리에다가 솥을 이렇게 쓴 것을 봤지요? 옥중화라는 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솥을 왜 머리에 씁니까? 기인이지요. 참 이상하지요. 이게 모자가 아니잖아요. 밥을 하는 솥인데.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은 내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지, 십자가를 소유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주의 능력은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 앞에 소유당해야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예는 비일비재하게 많습니다.
남편이 술만 먹으면 늘 아내를 개패듯이 패가지고 아내는 멍이 퍼렇게 들어서 눈에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 그 아내가 밖에만 나가면 “우리 남편 돈 많고 우리 남편 장이고..”라고 자랑질을 하는 거에요. 제가 한 이것이 무슨 비유인지 아시겠습니까? 곧 죽어도 자기 남편을 자랑하는 거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말은 내 소유의 남편이 잘났다가 아니라, “너는 내 남편(우리 주님)을 모르지? 나는 주님 앞에 가면 인간도 아니야.” 그걸 이야기하라고 하는 거에요.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자립하잖아요. 독자적으로 살아요. 그러나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독자적인 그런 건덕지가 없어요. 모든 것이 주님 허락 하에서 움직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내 소유가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맨날 십자가에서 얻어터질 정도로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케하는 겁니다. 계속 해봅시다. 이렇게 한다고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언약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의 완성자가 이미 들어와 버렸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언약을 기다리는 이 세계관이 제대로 된 세계관이라는 말입니까,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이게 잘못된 거에요. 왜냐하면 기다리지 말라는 겁니다. 왜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까? 기다리게 되면 기다림이 우상이 되고 이게 욕심 덩어리가 돼요. 기다림이 죄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데 그 이유는 뭔가를 기다리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아우,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해야 되는데.. 이번 시험에 합격해야 되는데..’ 그것에 집중해서 보다 보니까 그런 것이 없어도 구원을 받았다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오히려 가리워지는 겁니다. 아까 금환일식을 이야기했지요? 달이 태양을 다 가려버렸어요. 그러면 태양하고 달하고 맞장을 뜨면 누가 큽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다 가리니까 달이 대단한 듯 보이지요. ‘내 아들은 이번에 반드시 성적이 올라야 돼.’ 하는 순간, 십자가의 공로를 다 가려버려요. “그런데 왜 자식이 공부를 잘해야 되는데?” “내가 자식을 키운 보람을 맛보기 위해서..” “보람을 왜 맛보아야 되는데?” “그때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게 마리아와 마르다가 되는 거에요.
“오빠는 아파도 안 죽어야 돼.” “왜?” “오빠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께서 어서 오셔서 우리 오빠를 살려줄 거야.” 우리 가정만큼 주님을 잘 섬긴 적이 없어요. 오면 거기에서 숙식이 해결되거든요. 마르다는 잡채한다고 바쁘고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꼬지 말라고 해도 다리를 꼬고 앉아서 성경을 듣고 있고.. 그 정도로 섬겼는데 오빠가 아프니까 이제는 예수님께서 스케줄 만사를 다 제쳐두고 오셔가지고 “아이구 내 새끼 아팠어요? 어디 한 번 보자.” 이렇게 해줄 줄 알았는데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왔다는 거지요. 이게 고치기 전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세계관이에요.
예수님 때문에 뭔가 좋은 것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목표와 목적은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겁니까? 본인이지요. 본인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해되신 예수님을 본인이 달이 되어서 가린 거에요. 구원을 안 받을 사람이라면 그냥 놔둬버려요.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놔둬버리는데 마르다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사실은 주님이 나사로 가정을 더 사랑해요. “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라고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이 더 사랑하기 때문에 모가지를 꺾습니다. 손을 댑니다. 한 번 당해보라고요.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목사님, 복음도 알고 예수도 믿는데 왜 일이 잘 안 됩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감히 달이, 달 주제에 해를 가려? 비켜.”라고 치우는 과정입니다. 치우실 때 우리는 막 안 치워지려고 하지요. 왜 그런가 하면은 나름대로 음흉하게 노리는 목적이 있어요. 복음을 알아서 나중에 사회에서 내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희망이에요. “나도 봐. 인간이잖아. 나도 잘났잖아.” 그걸 은근히 노리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치워버립니다. 망해야 비로소 보이는 게 십자가입니다. 나는 목적과 희망을 가질 자격조차 없음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죄 속에서 태어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요.
“그럼 목사님 진짜 망해야 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망한다는 말을 하게 되면은 제가 말을 실수한 거에요. 망한다는 것은 그게 아니고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망하는 것이 기세등등이었습니다. 뭐를 하는 데에 기세가 등등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정도의 권력자로서 기세가 등등한 그 순간이 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손만 대면 황금이 들어오고 돈이 잘 벌리고 자식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하면서 밤 새지 말라고 그렇게 말려도 공부를 해서 전교 2등을 하니, 전교 3등을 하니 이게 바로 망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못해야 됩니까?” “아니요. 잘하세요. 잘하시고 돈 버세요.” 그리고 이것만 알면 됩니다. “이게 망하는 거구나.” 이걸 하나 추가하시면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공부 잘하고 가정에 아무 문제가 없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또 미장원에 가면 머리는 왜 그리 잘 나오는지 몰라요. 젊어보이고요. 그러니까 그럴수록 점점 더 ‘다 이게 예수님 믿고 복음을 아는 댓가로 오는 것이구나. 복음의 댓가가 행운이구나.’라고 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계속해서 창출하고 만들어내요. 그 다음에 ‘드디어 높이뛰기의 수준을 한 번 올려봐?’ 그러면서 바를 1m 50cm까지 올리지요. 계속 올려나갑니다. 그것 하나하나가 망하는 순간이에요. 우리 가락교회 성도들은 전부 다 망하고 있는 중이에요. 전부 얼굴이 너무 좋아요.
사도 바울은 기세가 등등할 때 그게 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찾아오실 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핍박이라는 말은 못 살게 구는 거에요. 못 살게 군다는 것은 필요치 않다는 거에요. ‘나는 뭐 그렇게 주님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안 듭니다.’ 이 순간, 만사가 잘 될 때, 남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고 나한테 겁을 집어먹을 때, 사회적으로 내가 갑이 되고 을이 되지 않을 때, 주님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고 없어도 살 것 같아요. 내 힘으로 살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반대입니다. “오빠가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예요. 오빠가 있는 자리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없어버린 그 오빠의 자리를 누가 차지했습니까? 주님이 들어와 버렸어요. 나중에 알게 돼요. 오빠가 아파서 죽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의도적으로 죽이셨다는 사실을요. 그러니까 원인 제공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이유는 간단해요. 사랑하기 때문에 죽여버립니다. 뭘 바꾸기 위해서입니까? 네가 아는 기존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 마지막 날 부활의 이야기가 마르다의 입에서 나오도록 유도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기에서 산다는 개념을 마지막 날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으로 바꿉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지금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가 하면은 죽은 오빠 나사로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네 눈에는 지금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보이느냐? 저게 사는 거다.” 살고 죽음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사는 거에요. 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예수님의 그물망, 예수님의 관계망이기 때문에.
그 앞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25절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포인트에 접어들었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영어로 “I AM”이라고 하지요. “나는 부활이요” 그 다음에 뭡니까? “생명”이지요. 부활이 되려면 전제 조건이 뭡니까? 죽어야 되지요. “나는 부활이요”라는 말의 뜻은 “나의 부활 안에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거에요. 이 죽음을 전제로 하는데 이 죽음이 곧 부활을 이루는 장이 되는 거에요. 하나의 알갱이가 되고 핵심이 되는 거에요. 부활을 이루는 중심 액기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빠 나사로가 어쩜 그렇게 예수님의 가는 길을 빼다박았는지, 미리 앞당겨서 오빠가 죽고 오빠가 죽은 그 상태가 부활된 상태이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입니다. 이제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세계관 안에 산다, 죽는다는 개념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개념의 중심은 현재 자기 자신을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나온 개념이에요. 그런데 오빠는 숨을 거두었잖아요.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잖아요. 숨을 쉬고 있는 나는 살았고 오빠는 그 반대로 숨이 끊어졌으니까 죽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개념에 대해서 이의를 건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전부 다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아까 2차원의, 바람이 들어가기 전의 풍선이라고 했지요. 똑같아요. 바람이 들어가기 전에 풍선 안에 옥수수 알맹이가 들어온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어요. 옥수수 알맹이가 들어오든, 모래가 들어오든 관계가 없어요. 똑같아요.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이 풍선을 불어버립니다. 훅 하고 불어버려서 여기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효과가 거대한 풍선이 되어버리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나는 부활이요 나는 생명이니”의 효과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좋습니다. 이해가 안 돼도 조금 참으세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산다, 죽는다는 개념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은 개체(본인)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 생명이라는 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했으니까 예수님 개인에게서 나와요. 예수님 개인에게서 바람을 불어버리니까 개체에서 나오는 의미는 이 개인에 “종속”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나는 믿습니다.”가 아니라, “이 예수님의 관계망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아까 배웠던 뉴턴을 해봅시다. 뉴턴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달이 있고 지구가 있고 이 둘이 서로 당긴다고 했지요. 지금 뉴턴이 억지를 쓰는 게 아닙니다. 왜? 밀물과 썰물을 봐서 알 수가 있잖아요. “아이구, 목사님 나는 물리학을 몰라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물리학을 알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밀물, 썰물의 이치를 아십니까?”를 묻는 거에요. 지금 뉴턴이 새로운 어떤 미신이나 희한한 이론을 억지를 부려가면서 집어넣은 게 아니고, “당신이 돈 벌고 밥 먹고 살려고 바쁘다 보니까 지금 이 전체를 모르잖아요?” 그런데 뉴턴은 전체를 알아요. 뉴턴이 이걸 알고 난 뒤에 형편이 나아진 것도 별로 없어요. 하여튼 사과가 떨어진 게 아니었다는 거에요. 지구가 사과를 당긴 것이지 떨어진 게 아니에요.
다이빙 선수가 떨어지는 게 아니고 지구가 다이빙 선수를 당기는 거에요. 이렇게 말하니까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이것이 마찬가지가 아닌 이유가 있어요.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신분제도에서 시민사회로 바뀐 겁니다. 옛날에는 당신은 임금하고 나는 종을 하는 것이 팔자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뉴턴의 발견 이후에 과학적 사고방식이 바뀌면서 너나 나나 똑같은 질점이고 둘 다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누구나 돈을 많이 가지면 귀족이 될 수 있어요. 귀족이 누리는 문화를 바로크 문화라고 합니다. 바로크 문화를 누리던 그것을 이제는 평민도 돈만 가지면 귀족들의 삶을 살 수가 있게 되었고, 그 때부터 바로크 문화가 발달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크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급스러운 서양풍 장식이 된 의자 같은 것을 말하거든요. 돈깨나 있다고 티를 냈을 때의 문화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그런 것을 다 하잖아요. “대통령 당신 월급 얼마입니까?”라고 나온다니까요. 대통령은 훌륭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은 “교사는 참 보람있다.”라고 하는데 옛날에 우리 나이 때 젊은 교사들은 교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삼성, 현대에 사원을 모집하는데 교사의 월급하고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났어요. 그래서 사우디에 가고 이랬어요. 돈을 많이 버니까요.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이 물리학이라니까요. 물리학이에요.
뉴턴은 두 물체가 서로 당긴다고 봤는데 아인슈타인은 그게 당기는 게 아니고 관계, 중력이 만들어내는 곡률, 또는 관계망, 중력의 철렁거리는 (써커스 할 때) 그물망 가운데 우리는 그냥 이 정점(교차점)에 놓여있는 거에요. 왜 부모는 날 낳았습니까? 아인슈타인은 말합니다. 부모가 있는 지점의 관계망(결혼)에서 네가 그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왜 그 지점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 질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고요. 이것은 문제를 없애버리면서 저절로 해답이 되어 버렸어요. 모든 것이 얽히고섥힌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어쩔 수 없으니까 이제는 개인적이 신분의 차이는 없는 거지요. 밀고 당기는 게 아니고 그냥 철렁거리는 거기에 그냥 태어났다가 다시 사라질 뿐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뉴턴의 사고방식이 똑같은데, 아까도 했잖아요. 뉴턴 때 세상이 바뀐 게 아니고 아인슈타인 때에 세상이 바뀐 게 아니고 맨 똑같은 세상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안 바뀌다 보니까 사회에 대한, 구성의 질서 자체가 또 바뀌는 거에요. 조선 시대 양반 상놈하고 과학 시대인 우리 나라가 차이가 나잖아요. 그 이유가 뭔데요? 이 과학적 사고방식 때문에 그래요. 지금 제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처럼 어떻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이들의 세계관이 예수님의 세계관으로 바뀐 거에요. 뉴턴은 대상인 너와 나가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너와 나가 없어요. 쌍둥이라도, 있는 지점에 따라서 같은 쌍둥이인데 한쪽은 달나라 가고 우주에 갔다 와가지고 젊었는데 한쪽은 할아버지가 된 거에요. 아인슈타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논리를 따져서 빈틈이 없이 이야기를 하는데 거짓말을 한다는 거에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입니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면 시간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한쪽은 다른 데에 가니까 시간이 빨리 가고 한쪽은 늦게 가는 거에요. 그리고 시간이 늦게 가니까 (동생은 하루를 살아도 빨리 늙고 형은 그냥 늦게 늙으니까) 형님, 동생 하던 사이가 나중에는 동생이 더 늙었어요.
이게 드라마가 아니고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 있는 세계가 그런 세계에요. 물리학이 어렵기 때문에 물리학이 많이 전도가 안 되어서 살던 대로 사는 것이지, 만약에 물리학이 많이 전도가 되어서 살아버리면 (참, 세상 말로) 세상은 정말 자기 요령대로 살다가 완전범죄해서 안 들키면 되고, 이런 식으로 그냥 막 가는 세상이 될 거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마는 예수님의 세계는 “내가 믿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관계망이 믿음의 세계에요.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거기에 나는 없어요. 나는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냅니다. 나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관에서 만들어낸(조성된) ‘나’가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제가 대구 공부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삭의 이름이 뭐지요? 웃음이지요. 그래서 제가 앞에 있는 권사님한테 물었어요. “이삭이라는 이름은 무엇 때문에 생겼습니까? 아버지가 안 믿고 비웃어서 이삭이 생겼지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웃어서 이름이 이삭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웃음을 가져가게 되면 이삭의 이름이 뭡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나는 권사님이 모를 줄 알았어요. 70세 가까이 되신 분이신데요. “이삭의 이름은 없지요.”라고 하거든요. 그게 정답이에요. 왜 없습니까? 개체가 없으니까 없는 거에요. 독자적인 게 없으니까 없는 거에요.
독자적이 있다는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개인으로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물로 믿음을 줘버려요. 믿음만 선물로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관계망,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그물망이 (몽땅 다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있었던 거에요. 창세 전부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요.) 이미 그렇게 짜여져 있음을, 돌아보니까 그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선물)다.” 내가 여기에 있음 자체가 누구의 선물이다? 주님의 자기 선물이고 주님의 자기 작품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자기 구원할 자”를 누가 만든다? “예수님 본인이 만들고 본인이 정한다”고 하잖아요. 내가 지금 이걸 이야기하면서도 “도대체 누가 이걸 믿었으리요”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걸 누가 믿겠어요. 진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밖에 못하겠어요. 왜? 개체를 없애버리니까요. 평생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오잖아요. 나밖에 없다고요. 이건 이기주의지만요. 어쨌든 간에 모든 것을 나만 챙기고 살아가는데, 글쎄 그 나가 주님의 나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임시땜방으로 나라는 것이 주어진 거에요.
여기에서 자기와 자아를 구분해야 됩니다. 이 말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내가 그냥 말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요. 자아라는 것은 자기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자아는 ego이고 자기는 self,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자아는 착각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안다고 하지만 나는 주워모을 것을 대충 주워모은 것을 가지고 자아를 만들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기타를 좀 치면 자기가 자기 동네에서 기타를 제일 잘 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너는 뭐야?”라고 물으면 “기타 잘 치는 나.”라고 대답한다고요.
그런데 기타를 잘 치는 큰 동네에 가보니까 자기가 치는 기타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너 뭐야?”라고 물으니까 “나 기타 못 치는 거.” 이렇게 된다고요. 이렇게 자기의 내용이 바뀌지요. 그러니까 자기의 내용이 바뀌면 자아가 또 바뀌어요. 그러면서도 주체는 그대로 있어요. 아침에 양복을 입고 아들이 출근을 했다가 퇴근할 때 츄리닝을 입고 퇴근하면 자식입니까, 자식이 아닙니까? 자식이지요. 양복을 입으나 뭐를 입으나 자식이잖아요. 주체는 같은데 그 놈의 주체를 자아가 알아챌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이상하지요. 아무리 해도 제 2의 자아, 제 3의 자아, 엉터리 자아든지 뭐든지 계속해서 내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위선적으로 꾸며나가는 자아만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반복될 뿐이지 진정한 주체는 영원히 우리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를 영원히 몰라요. “나는 저러고 싶어.”, “나는 저 사람이고 싶어.” 이런 것만 있지 영원히 몰라요. 엄마는 착한 엄마, 그런데 착한 엄마면 뭐 합니까? 나중에 죽을 때가 되어가지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요. 이 착한 엄마가 언제까지 갈 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요. 나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그럼 뭡니까? 아메바에요. 그냥 본능대로 배고프면 밥을 먹을 줄 알고 또 돈이 떨어지면 돈 벌줄 알고 아프면 돈을 써서 병원에 갈 줄 알고 그것도 돈이 없으면 보험(15억)에 들어가지고 남편 실종신고해서 돈을 타내서 유흥비로 쓸 것이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메바가 할 수 있는 그것이 다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우리에게 위기적으로 안 다가오느냐? 전부 다 같은 아메바이기 때문에 너나 나나 사는 게 똑같거든요. 똑같으니까 따라잡을 일만 있지 대단한 사람은 없어요. “부처(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는 4대 성인이에요. 그래도 난 스티브 잡스, 그 사람이 부럽지 다른 사람은 안 부러워요.” 이런 식으로 간다고요. 모든 게. 중국이고 북한이고 한국이고.. 그런데 그 중에 누가 있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도 똑같아요.
“저는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자아가 믿는 것은 안 받아준다니까요. 그러면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주님이 알고 있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놓았는데 이 주체는 단독적으로 따로 뗄 수가 없어요. 주님과 관련이 된 주체에요. 살든지 죽이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에요. 이 자아가 그런데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요. 그런데 자아의 내용은 뭐냐 하면 자기가 소유한 것을 집어넣고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여성분들은 어릴 때 인형을 많이 갖고 놀잖아요. 껍데기는 사람의 모습인데 뜯어보면 솜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걸 솜이라고 하지 않아요. 애들은 무조건 그게 인형이라고 보지 “이, 솜덩어리야.”라고 보지를 않는다니까요.
나는 “나.”라고 하지 나는 “돈덩어리.”라고 하지를 않는다니까요. 나는 무조건 “나.”라는 거에요. “나”가 있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판사도 되고 의사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 껍데기는 진짜 돼지 껍데기하고 똑같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소유가 모여서 자아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소유가 끊어지면 이 사람은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해요. 내가 장담하건데 김성수 목사님은 힘들어서 자살했어요. 왜 힘이 드느냐? 자아가 따로 있고 자아에 합당한 내용을 그때그때 채우려고 하니까 그래요. 설교를 한 시간 반씩 하려면 공부(조사)를 얼마나 해야 돼요? 그걸 계속 요구하고 있지, 그걸 채우려고 하면 사람이 미치는 거에요. 밑천은 떨어지지요. 뺏기면 되는데 뺏기지도 않고 물론 다 뺏겼지만.. 힘들어 죽는 거에요. 그러니까 편히 쉴 곳은 뭐밖에 없습니까? 자살밖에 없지요. 이 자아를 쉬기 위해서.
그런데 자아가 없어요. 이건 피부 세포지 자아라는 게 없어요. 인간은 자아를 몰라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아가 날 살린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살려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 주님의 은혜를 누가 막는다? 달 행세를 하는 우리가 자아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지금껏 내가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하고 금환(개기)일식처럼 완전히 주님을 다 가리고 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사울입니다. 자기 기세가 등등해서 가려버린 거에요. “어디 핍박을 하느냐?” 하고 차버리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돌아본 거에요. 그때 살았어요. 그때 살았다고요.
오늘 본문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언제 살았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기대하고 목표로 잡고 행복하게 살았던 그 오빠를 주께서 죽여버렸을 때 찬스가 온 겁니다. 네가 알고 있던 믿음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어라. 네가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바로 부활이고 생명이다. 내가 줘야 받는 것이다. 내가 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주셔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뭐다? “죽어도 살리라” 죽지만 나사로가 살았다는 말은 나사로의 삶은 나사로 본인이 애써서 얻은 게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금 나사로가 죽은 거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나사로는 아파본 적도 없었고 처음부터 나사로는 죽어본 적도 없었던 거에요. 창세 전부터 나사로는 아파본 적도 없고 죽어본 적도 없었는데 누가 애를 태우고 있느냐 하면은 믿음이 없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닦달을 내고 애를 태우고 난리를 한 겁니다. 그냥 잠을 자고 있었는데요. 하여튼 오빠가 잠도 못 자고 고생하게 만들었어요. “이제 깨우러 가자.” 깨우러 가잖아요. 이 본문을 보면서 제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1장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저도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게 아니라고요.
왜 아니냐 하면은 자기의 세계관이 안 바뀌었잖아요. 자기는 지금 뉴턴이에요. 예수님을 대상으로 세우고 나는 여기에 있고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뭐를 하면 된다? 내 앞에 있는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거에요. 이것은 주고받는 힘이지, 하나의 중력의 관계망이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겠습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없다고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주체가 누구여야 됩니까? 자연적으로 누구를 등장시켜야 돼요? “나. 내가 믿었습니다.”가 등장돼야 돼요. 내가. “오빠가 마지막 날에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믿나이다)” 이게 마르다의 한계에요.
사도 바울은 네가 주 안에서 먹고 마신다고 했어요. 이 말은 먹고 마시고 까불고 찧는 것이 주 안에서 이루어지면 그 안이 뭐가 되느냐? 생명이 되고 부활이 되고 의가 된다는 겁니다. 할 게 없다니까요. 풍선 안에서 하나의 강냉이 알처럼 누리면 되는 거에요. 발걸음도 세시잖아요. 머리카락이 아침에 빗으면 빠지는데 그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부터 해가지고 우리가 늙어서 숨이 끊어지는 것까지 전부 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우리는 머리 손질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에요. 그게 아니고 주께서 머리 손질할 시간을 안 준 거지요. 돈 번다고요.
모든 발자국과 모든 행세가 주님께서 손을 안 댄 곳이 없습니다. 아이구 내가 정말 목이 쉬려고 하는데요. 목이 쉬는 것도 주의 뜻이라니까요.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거든요. 주의 것을 목이 쉬게 한들, 숨이 넘어가게 한들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없는데 그것은 내가 없기 때문에 내 것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체는 있잖아요? 주체는 있는데 모르지요.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이 땅에 만들어내십니다. (그런데 나는) 만들어낸 자가 만들어낸 내 모습을 몰라요. 다만 육신이 있기 때문에 남들을 보면서 “나, 저 사람처럼 될래.”하고 자아가 생긴다니까요.
그 자아는 본인이 어릴 때부터 부모가 그렇게 강요한 거에요. “너는 나중에 판사가 되어라. 어는 것 집을래? 마이크 집어. 그래, 아나운서 돼.” 돌잔치 할 때부터 이미 공작이 가해집니다. 실을 잡아야 오래 살고 성경책은 아예 처음부터 치워버려요. ‘그건 알아서 예정대로 구원 받겠지..’ 하고요. 이 부모로부터 “너는 우리 집안에 일원이 되어야 돼.”라고 하는데 그 부모의 가정 자체가 하나의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자아처럼 행세를 하는 거에요. 우리 가정은, 우리 가문은..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우리 엄마가 보기에 부끄럽구나. 아빠가 보기에 부끄럽구나. 그런데 거기에 뭐는 안 들어갑니까? 우리 주님이 보기에.. 이것은 안 들어가요.
그저 당장은 내 동생 보기에, 오빠가 보기에, 내 누이(누나)가 보기에, 내 자식이 보기에 부끄럽구나. 이게 더 급한 거에요. 이게 해를 가리는 달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주님을 믿고자 하는 그걸 다 치워버리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라는, 자아라는 덩치를 좀 치워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가려놓으면서도 복을 안 준다고 닦달하고 짜증을 내는 우리들, 엉터리 자아 대신에 주님이 우리의 자아의 자리를 차지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