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61 - 불연속성 / 160808 본문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1 - 불연속성 16,08,0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디서 배우는가? 일년에 세 차례, 즉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에 세미나를 열죠. 가야산에서 세미나를 열 듯이 여는데, 성전에서 아버지 전체를 모아놓고, 즉 가장들을 모아놓고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가르쳐서, 그 가르친 것을 아버지는 가정에서 교육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만큼 "그것은 내 아들이다" 라는 겁니다. ◈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디서 배우는가? 지금 우리가 잠언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 잠언서는 성경전체 안에 들어있는데, 그러니 이 잠언서를 알려고 하면 성경전체를 알면 된다는 것이다. 잠언서를 하면서 성경전체와 연관을 시켜주어야 하는데, 잠언서의 이야기와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이 다르다면, 그것은 틀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창세기를 하든 출애굽기를 하든 잠언서를 하든, 성경의 어느 곳을 이야기하든 간에 동일한 것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최종적인 동일한 것이 어떤 것인고 하니, "천국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그 천국 백성들을 이 땅에서 만드시고, 그들을 소환해서 불러내시고 모집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런 내용으로 요약하게 되면 그리 틀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일단 천국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천국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데 말이다. 성경전체의 내용을 쉽게 해보면, 첫째로 "천국이 있다" 라고 한다면, 이 천국은 말 그대로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 아들의 나라, 혹은 성령 안, 예수 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 그러면 성경은 이 천국을 설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땅, 혹은 땅의 나라, 인간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대비시켜놓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가 대조가 되고 대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찰을 일으키고 투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대조와 대립이 되는 나라 !! 옛날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를 보게 되면, 인간의 나라는 하늘나라의 눈에 보이는 하나의 분점으로서, 하나의 그런 지점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즉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되지" 라는 식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한다고 했는가? 대조, 혹은 대립이 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서로 충돌이 되고 다툰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조가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 땅의 나라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 다음에는 죽어서 가는 공간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에게 그 공간은 하늘나라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이 땅의 나라를 하늘나라의 일종의 분점으로 생각하는, 그런 부담이 없는 하늘나라와 실제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늘나라는 서로 같겠는가? 그게 아니면 서로 대조가 되겠는가? 당연히 서로 대조가 되고 대립이 된다는 것이다. 강의 초반부터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전혀 별개의 내용들이 나오는데 말이다. 이 땅에 살면서 교회나 성당에서 사람들을 모집하면 거기에 가서 자기가 그리워하던 하늘나라에 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내용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한 하늘나라와 진짜 하늘나라와는 대립이 된다고 하면, 그러면 인간들이 생각한 하늘나라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지옥이고 사탄의 나라라는 말이다. 인간의 나라인 땅의 나라와, 그리고 자기들이 생각한 하늘나라, 그것을 내세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내세를 만들어서 그것을 둘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천국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착하게 살면 그 공로로 천국에 가고, 반면에 악하게 살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그게 인간이 구상할 수 있는 한계이고 전부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런 아이디어는 진짜 하늘나라와는 전체적으로 대립이 되고 대조가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고 지옥에 간다 !!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 라는,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고 지옥에 간다" 라는 멘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지가 중요하고, 그리고 그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인지, 그게 중요한 것이지,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간다" 라고 편하게 생각하게 되면, 자기가 소속되어있는 세계에, 자기가 이미 예상하는 세계에, 그런 세계에 죽어서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지옥에서 와서 지옥으로 간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늘나라가 많겠는가? 땅에서 이야기하는 하늘나라가 많겠는가? 즉 땅의 나라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내세의 입장에서의 하늘나라가 말이다. 과연 어느 쪽을 이 세상에서 많이 이야기하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두 번째인데, 그런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고 하니까, 그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의 장례식을 할 때 나오는 멘트들인데, 천주교와 기독교와 불교에서 골고루 다 하는데,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신부와 목사와 중들이 나와서 뭐라고 하는가? 그 범위가 바로 여기 두 번째인데, 땅의 나라의 연장선으로서의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에 나오는 죽을 때의 장면이나, 신문기사에 나오는 내용들이 무엇인가? 아이를 세 명이나 키우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엄마가 있다고 하면, 그 아이들이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가? "우리 엄마는 좋은 나라에 갔을 거야" 라고 하는데, 바로 그 좋은 나라가 바로 여기 두 번째의 나라인데, 즉 사탄의 나라라는 것이다. ◈ 연속인가? 불연속인가?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인간들의 생각은, 이 땅의 나라와 내세가 연속적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성경은 그게 불연속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십자가 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라는 것인데,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렇게 오직 십자가로만 천국에 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그 당시에 누구에게 이야기를 했는가? 천국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천국도 믿고 여호와 하나님도 믿는 그들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 심지어 12제자들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소를 마련해서 다가오셔야 한다는 말이다. ◈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간다' !! 그러니 인간들은 들어가는데 실패하고, 반면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은 성공이 되고, 이 두 가지 사실이 십자가 사건에 담겨있다고 하면, 그러면 십자가는 무슨 의미인고 하니,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것과 '들어간다' 라고 하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목사들이 할 수가 없는데, 그렇지 않아도 오랜만에 교회에 나왔는데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들은 "그러면 들어간다고 하는 교회에 가란다" 라고 하면서 나가버리면, 교회가 그만 텅텅 비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꼬드겨야 하는데, "세례를 받으시고 성만찬에 참여하시면 그 이름이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아무튼 간에 사람들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미지, 굿판 !! 그렇게 붙드는 것을 가지고 이번 마태복음 수련회에서 세 글자로 표현했는데, 그런 모든 방식을 두고 '이미지' 라고 했고, 그 이미지로 말미암아 알 수 없는 공포를 누그러뜨리는 것을 무슨 판이라고 했는고 하니, 혹시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기억이 납니까? 물론 기대하는 제가 잘못인데(ㅋㅋ),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재앙이나 저주를 누그러뜨리는 것을 '굿판' 이라고 했는데, 일종의 살풀이라는 말이다.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데, 그렇게 눈이 보이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공포를 누그러뜨리면서 자기가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 굿판을 큰 교회라고 하고 작은 굿판을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사람들이 이왕이면 어느 굿판에 가고 싶어하겠는가? 큰 굿판에 가서 살풀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연속성밖에 없는데, 즉 "여러분, 나쁜 짓을 하지 마세요. 좋은 일을 하시면 복을 받아서 천국에 갑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골치 아픈 신학이나 두꺼운 성경도 필요가 없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다시 내어놓는다는 것이다. 신부나 목사들이 말이다. "여러분, 착하게 살았지요? 조심조심하면서 악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긴장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천국에 갑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이 빠졌는가? 십자가가 그만 빠지고 없는데, "올 수 없다" 라는 것이 말이다. 지금 12제자도 가지를 못하는 나라에 가야만 하는데 말이다. "올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넣어줄 게" 라고 하는 두 가지가 다 결합되어있는 사건이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두고 어리석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해 보인다는 말이다. "아이고, 그것을 누가 믿겠노?"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터무니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 터무니없는 이야기 !! 오늘 강의제목을 '터무니없는 이야기'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그 어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함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따져서 살아가는데, 그래서 그것이 믿을만하다 싶으면 그쪽으로 선택해서 그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믿을만해서 믿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따지는 것인데, 믿음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말하는 믿음은 자기가 평소에 알고 있는 것의 끝 부분에 이어져있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 즉 앎의 복합체이고 앎의 누적이라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음주운전은 싫어 !! 여러분이 버스를 탄다고 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 기사가 모는 버스를 타겠는가? 아니면 술을 마셔서 얼굴이 벌겋게 된 기사의 버스를 타겠는가? 만약에 그러한 버스를 탄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이 분명한데, 그러니 그런 버스는 당연히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버스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인데, 자기의 누적된 경험으로 보면 사고가 날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단절된 게 아니라, "나는 안다. 이 정도는 안다. 더 안다" 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믿는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믿음을 깨보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상 그 정도는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지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대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자기의 지식의 연속성 안에서 성경을 왜곡하고 곡해해서 일방적으로 쓸어서 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성경구절을 많이 외운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라고 하면, 자기가 아는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제 목사가 귀한 줄 알았으면, 월급이나 좀 올려라 !! 그래서 장로님들에게 설교를 해보라고 하면, 목사가 자리를 비우면 종종 설교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 설교를 듣게 되면 교인들이 돌아서서 하는 말이 있는데, "자기의 경험밖에 없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 속에서 수영을 해야하는데, 정작 성경은 아는 게 없으니, 성경구절을 한 절 읽어놓고는 자기가 은혜를 받아서 잘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그래도 30분을 채우는 것이 쉽지가 않는데, 군대 이야기가 들어가면 겨우 채워진다는 것이다. 군대에서의 축구 이야기가 나오면 40분이 넘어가고, 그러다가 6.25 이야기가 나오면 무려 50분이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설교를 하고 내려오면서 "아무리 못나도 목사는 목사야"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나중에 그 소리를 듣고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 라고 하면서 교만의 비틀거림으로 등장하는데, "주의 종을 아무나 하나? 설교를 해보니 힘들지?" 라고 하면서 자기의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가 설교를 좀 한다고 해도 경험의 연속성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데, 사실 목사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제자들도 가지 못한 천국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제자들의 그 불신을 우리 속에서 되풀이를 해줌으로서, "너희들의 믿음으로는 전혀 안 되지? 그러니 내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하는 거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우리 안에서 반복되는 제자들의 불신앙 !!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반복해서 적용을 시키는데,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제자들을 욕하면 안 되는데, "이런 놈들도 제자라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욕하는 그 제자들의 불신앙을, 그것을 지금 우리도 매일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데, 믿음을 연속적으로 붙잡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은 붙잡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믿었으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전을 하시는 분은 주님이지 우리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 복음 자동차 !! 앞으로 자동으로 운전이 되는 자율 주행 자동차가 나온다고 하는데, 빨리 그런 차가 나와서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우리가 운전대를 잡으면, 요즘 같이 더운 날씨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리고 잠시라도 졸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자동으로 운전이 되지 않으니 운전자가 모두 다 알아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동운전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한다는 것이다. 혹시나 시험에 들까 싶어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하면서 용을 쓰고 하는데, 하지만 나이가 들면 모두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젊어서는 그래도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설교시간에 긴장을 해서 듣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 시작한지 5분도 되지 않아서 고개가 저절로 내려가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낮 11시가 평소에 집에 있을 때는 낮잠을 잘 시간이라는 것이다. 오후 3시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다(ㅋㅋ).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기에 몸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시간에 잘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다. 믿음은 자기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율 자동차, 즉 운전대를 비롯해서 모든 것을 자동차에 맡기고 그냥 마음놓고 자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깨어보면 목적지에 도착해있는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그런 자율 자동차가 나와야하는데 말이다. ◈ 자꾸만 미끄러지는 예수님 !! 제자들은 자기들이 걱정되는데, 자기들의 마지막 운명이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메시야는 왔고, 그런데 메시야와 자기 사이에 연속적으로 되기 위해서 뭔가를 붙잡아야 하는데, 그런데 붙잡으면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무슨 참기름을 발랐는지 주님은 계속해서 엉뚱한 소리를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도 악착같이 붙잡으려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한다" 라고 하시는데, 즉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모두가 다 배신자라는 말인데, 오늘날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자기가 아무리 "20년을 붙들었습니다. 목사로서 죽자고 설교를 했습니다" 라고 해도, 그런 것은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달달 외워도 소용이 없는데, 구원은 군데군데 스며드는 십자가의 용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희생의 힘, 그런 용서의 그물망에 걸려서,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말이다. 그렇게 걸려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줄로 꽁꽁 묶어서 ♬" 라는 노래가 있는데, 여기에 계시는 분들은 찬송가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노래는 모양인데, 아무튼 그런 노래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그야말로 용서의 줄로 꽁꽁 묶어서, 그렇게 자율 자동차에 실려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얼마나 이런 단절을 모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굿판을 벌리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즉 사랑의 높이와 깊이가 더욱 더 강렬해진다는 말이다. "아하, 너무 힘 주고 용을 쓰면서 살 필요가 없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동안 자기가 애를 썼다는 것은 사실 오해였는데, 주님께서 그런 상황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뭔가 단단히 착각을 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인간에게는 연속성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을 불연속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연속성을 이미 단단히 붙잡고 있기 때문에 불연속성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경험이 누적된 것만을 믿으려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어리석다. 그딴 것을 누가 믿겠는가? 내 쪽에서 뭔가를 해야만 그것이 믿음직하고 포만감도 생기고 안정감도 생기는데, 그렇게 하면 누가 믿겠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불안 불안해하면서 말이다. 그게 인간의 자기 한계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단절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게 바로 아들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들이 아닌 자는 자력으로 그 나라에 도저히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들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있지 않는가?" 라고 할지 몰라도, 그 아버지는 육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라고 하는, 그게 전부가 다 육과 육의 연결고리인데, 그렇게 육으로 낳기 때문에 육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육이 끊어지면서 연속성도 끊어지고, 우리의 믿음도 끊어지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다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맹탕이고 아무 것도 내놓을 수 없는, 그런 불연속적인 사건이 여기서 일어나 주어야 거듭난 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으로 살아가는데, 하지만 구원은 그런 식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서 "노!" 라고 딱 잘라줄 수 있는, 그렇게 끊어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게 불연속성인데 말이다. ◈ 그렇다면 아버지는(를) 어디서 배우는가? 여기에 대해서 "그런 능력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다시 교재 172페이지를 보겠는데,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디서 배우는가?" 라고 하는데, 표현이 상당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딱 보면 아버지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아들은 아버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육의 아버지밖에 모르기 때문에 영의 아버지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영의 아버지는 어디서 배우는가? 그게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여기 교재 172페이지에 나온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디서 배우는가? 일년에 세 차례, 즉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에 세미나를 열죠. 가야산에서 세미나를 열 듯이 여는데, 성전에서 아버지 전체를 모아놓고, 즉 가장들을 모아놓고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가르쳐서, 그 가르친 것을 아버지는 가정에서 교육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만큼 "그것은 내 아들이다" 라는 겁니다. ◈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라는 것을 가르치는데, 이렇게 이스라엘이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강의 시간을 통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 다시 반복을 해드리겠는데, 그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출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여기 22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장자, 즉 맏이라는 것은 무엇을 대표하는고 하니, 아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아들이 바로 맏아들이라는 것이다.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맏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삭의 경우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에서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라는 것이다. 태어나기는 에서가 먼저 태어났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면 둘째인 야곱이 장자가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야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반면에 첫 번째 아들인 에서는 아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과 대조되고 대립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쪽은 천국백성이고 다른 쪽은 지옥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라는 것도 같은 의미인데,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다" 라고 주장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 담겨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고, 반면에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 성부와 성자 사이에 관련성 !! 그러면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담겨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라고 유일하게 인정하신 분에게 내린 것이 있는데, 그분이 성자 예수님인데, 즉 성부와 성자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관계성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인 예수님 사이의 관계성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인데, 즉 약속이라는 말이다. "내 피와 내 살로 새 언약을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즉 "유월절의 피로 말미암아 너를 용서하겠다" 라고 하는 관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유월절을 지켜라 !! 그게 교재 172페이지에 나오는 유월절인데, 그러니 "유월절을 지켜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구성되는 그 언약 관계를 미리 앞당겨서 거기에 넣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형이니 말이다. 그렇게 진짜로 숨겨져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라. 그러면 용서해주겠다" 라는 것이다. (출 12: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참으로 쉬운데, 구원이 정말 쉽다는 말이다. 천국에 가기 정말 쉬운데, 여기에 보면 어려운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자 놋뱀 지팡이를 만들어서 뭐라고 했는가? "누구든지 이 지팡이를 보기만 하면 낫는다" 라고 했는데,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쳐다본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데, 그런데 왜 쳐다보지 않는가? 놋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나의 헌금, 나의 기도, 나의 성경공부, 나의 직분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라고, 그러한 자기의 모든 신앙생활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 모든 것들이 다 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만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세리, 강도, 창녀, 거지 나사로 !!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어떤 자들만 십자가를 바라보는가? 세리, 강도, 창녀, 그리고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만만했으면 개들이 와서 핥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밑바닥 인생을 살았는데, 그런데 그것은 전반전이 이야기고, 후반전은 완전히 대반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생살이가 요즘 날씨처럼 그야말로 무더운데, 그야말로 좀비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냥 죽지 왜 사노?" 라고, 그런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 땅에서의 삶인데, 완전히 파장 분위기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활기는 하나도 없고, 이제 여기 저기에 쓰레기만 굴러다닌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황야의 무법자인데,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것이다. ◈ 산장의 여인 ♬ 그것이 껍데기가 벗겨진 진짜 알맹이만 남은 우리의 모습인데, 아무도 찾아오지를 않는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외롭다고 느끼지만, 나중에 정신마저도 혼미해지면 외로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찾아오는 이가 없는, 그것을 다섯 글자로 '산장의 여인' 이라고 하는데, 가족도 없이 혼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어떤 아줌마의 이야기인데, 어릴 때 그 노래를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말이다(ㅋㅋ). --------------------------------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그러니 인생이란 것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데, 사랑도 실패하고 돈도 실패하고 말이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자식에 전화를 해도 나중에는 다 귀찮은데, 결국은 혼자라는 말이다. 그것이 진짜인데, 그런데 그 동안 가짜에 얼마나 속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결국은 예수님도 강도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진 그 모습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쪽에 강도, 저쪽에 강도, 중간도 결국은 강도인데, 그러니 예수님도 강도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쓸모가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돈을 버는데 예수님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어디 십자가를 팔아서 장사를 할 일이 있는가? 예수님은 그 어디에도 필요가 없는, 어리석고도 미련한 멘트만 날리신 분인데,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되었다고 하면, 즉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다니, 주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 바로 그러한 것을 유월절에 배우는데, 그리고 나서 맥추절에는 무엇을 배우는고 하니, 유월절에 배우는 것은 "너희들이 온 땅은 보통 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땅이니, 말씀 속에서 유월절의 정신을 발견해라" 라고 하는 것을 배운다는 말이다. 그러면 맥추절은 무엇인고 하니까, 유월절이 시작이라고 하면 맥추절은 과정이란 말이다. 즉 "그 모든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유월절을 마련해주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카페트에서 너희들이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그야말로 봄여름가을겨울의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만약에 팔을 다쳐서 깁스를 하게 되면 어떻게 설거지를 마음대로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잠을 자는 것, 화장실에 가는 것, 그리고 밥을 먹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그 희생의 능력이 하나의 과정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 번째 수장절은 무엇인고 하니, 마지막 절기인데, 그래서 주께서 시작한 것이 작품이 되어서 "아이쿠, 나의 귀한 양들아!" 라고 하시면서 그 양들을 거두신다는 말이다. 즉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라는 것이다. 주께서 친히 기르시고 수확도 친히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여호와는 목자이고 너희는 양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기에 !! 그것이 바로 자율 자동차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주님이 우리를 험한 인생 길로 집어넣지만,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시는데, 즉 지키신다는 것이다. 엉뚱한 길로 가지를 않도록 말이다. 그러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방향을 돌리게 되는데, 그게 바로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했던 징계라는 것이다. 물론 징계는 아무에게도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아들에게만 징계를 하시는데, 그러니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그쪽은 아니야. 거기로 가면 안 돼!" 라고 하시면서 징계를 주셔서, 이 세상은 그야말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화려했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게 했고, 짜증나게 했고, 스트레스를 받게 한 그 모든 과정들이, 그것이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 가셨던 길을, 그렇게 예수님이 고생을 하시면서 가셨던 그 길을 우리보고 뒤따라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양이 되어서 "에엥" 하면서 목자가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영생이 있다는 말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니 출발과 과정과 그 마감까지 모든 것이 주님이 깔아놓은 그 카페트를, 말이 카페트지 사실은 좁은 길인데 말이다. 그런 울퉁불퉁하고 힘든 좁은 길이지만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동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이 세상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이 대립의 장으로서 !! 그동안 우리가 알던 이 세계가 하나의 대립이고 충돌이고 유혹의 장으로서, 그렇게 마귀가 테스트를 하고 있는데, 그런 사상이 온 천지에 퍼져있다는 것을, 창가를 통해서 우리가 마음놓고 구경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시편 23편 5절에 보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만 부어도 되는데 하나님의 의가 계속해서 부어져서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불연속적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즉 처음부터 육을 끊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육을 끊어주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라는 것이다. 어린양의 피로서 시작을 하는데, 마감은 주님이 하시고 말이다. 그렇게 수확해서 하늘나라의 곡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알곡이 되어서 말이다. 그러면 이런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 대해서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요즘 말로 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보겠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왜 쓸데없이 그런 짓을 하는가?"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고생해서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했으면 자기 공로로 돌려야지, 왜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입니다" 라고 하면서 영광을 돌리느냐는 것이다. ◈ 아주머니는 정신병원에 가보세요 !! 하루는 우리교회 성도님이 진지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자기 가게에 온 손님이게 말이다. 그분은 무엇을 해도 진지하게 하시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 듣고 나서 손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주머니는 정신병원에 가야하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거든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증거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분은 장사를 하시면서 찾았다는 말이다. 자기는 상대방이 굉장히 젠틀하다고 여기고 전했는데, 그런데 상대방의 안에는 그만 뱀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정신병원에 가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자기는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도 과거에는 그랬었었던 자들이었는데 말이다. 즉 "모든 것이 연속되어있다. 그러니 착하게 살았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 라는 것, 그것이 납득되고 용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십자가, 즉 "오지 마라. 내가 가서 건져주면 천국에 간다" 라고 나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니 말이다. 보통 교회에 가면 "헌금을 열심히 하면 복을 받아서 천당에 갑니다" 라고 하면서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십자가 마을은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오지 못하는 자를 오게 합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일방적인 능력이지 우리의 능력은 전혀 가미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목사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도 하나의 과정 !! 그러니 예배당을 짓는데 헌금을 한 것은 돈을 날린 것인데, 사기꾼에게 당했다는 말이다. 물론 기분은 괜찮을 수도 있는데, "주님이 아시고 다 채워주시겠지" 라고 여기니 말이다. 그러면 돈을 많이 내면 상급을 많이 받는가? 바로 그 논리가 통한다는 것이다. 돈을 천원 내고 30배를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인데, 돈을 놓지 않으면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만원을 헌금하면 3억이 되는데, 꽤 괜찮은 장사라는 것이다. 그래도 주저주저하면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지금 믿음이 없어서 그러한데 한 번 해보세요. 따지지 말고 하세요. 주님은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원하십니다. 천만원을 하면 최소 3억이 들어옵니다. 한 번 해보세요"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이 참에 돈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측정해볼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한 번 정도는 다 있지 싶은데, 그런 조희팔을 다들 만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ㅋㅋ). 그런 것도 하나의 과정이고 절차인데, 그러니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째째하게 내면 믿음이 없고, 목돈을 왕창 내면 믿음이 있고, 그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많이 속아넘어갔느냐는 것이다.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남들에게 보란 듯이 헌금을 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교회에서 기가 죽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자존심을 얼마나 귀신 떼들이 이용해먹는지 모르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이용을 당하고 말이다. ◈ 똥보다 인간 !! 여기에 제가 글을 하나 복사를 해왔는데, '송민선' 성도가 이번 수련회를 마치고 나서 십자가 마을에 올린 글인데, 제가 강의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글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데 말이다. 너무 귀해서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특히 초반에 보면 내용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여기에 보면, 돼지 다음에 똥이 나오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무엇이 나오는가? 인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 뒷자석에 앉아서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물론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 거기에 뒷자석에 자리가 3개이니 아마 주님이 가운데 앉아 계셨지 싶다는 말이다.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인간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예례미야서 17장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구약의 예레이먀서를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말이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그래서 송민선 성도님이 풀이를 하는데, 그 똥에 더럽다고 할 때, 그 똥이 처음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본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 들어있었는데, 그러니 인간은 실상 똥과 같은데, 그렇게 더러우면서도 깨끗한 척을 하고 있으니, 인간은 똥보다 더욱 더 지독하게 더럽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 수련회 강의는 다 마스터한 것인데, 그것이 '살(殺) 처분'과도 다 관련이 된다는 것이다. 어제 낮 설교시간에 "생활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찾아낸다" 라고 했는데, 즉 촘촘한 십자가의 거물망인데, 그게 평소에는 우리 눈에 뜨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남들에게 행세를 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가 밟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이다. 남들에게 잘난 체를 하는 것이 몸에 베여있기 때문에, 그렇게 송민선 성도님처럼 끄집어낼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보면 "생명 있음에서 없음으로, 권리 있음에서 없음으로, 알 수 있음에서 없음으로, 할 수 있음에서 없음으로" 라고 하는데, 그 자리가 원래 없는 자리가 아니라 있는 자리인데, 우리가 너무 잘난 척을 하기에 현실이 그만 왜곡이 되어서 우리는 마치 환상처럼, 그런 가짜 현실을 짜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둥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그분이 시험에 들 것 같아서 이 정도로만 하겠는데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 172페이지를 보자. ** 악한 자들이 얼마나 악한지 자꾸만 대비시키는 겁니다. 지혜가 없는 자를 알아야지, 지혜가 없는 자의 어떤 행색과 지혜를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 악한 자를 찾는 것은 너무 쉬워 !! 이것이 바로 지혜자가 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인데, 즉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악한 자를 찾고 발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악한 자를 어떻게 발굴하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악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에게 두 가지 자아가 있는데, 악하면서도 착한 척을 하는 악함이 있고, 그리고 주님이 새로 만들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해주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어느 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아가는가? 어설프지만 남에게는 절대로 들키지 않는 자아를 가지고 나선다는 말이다. 남들과 대화할 때나 모든 것을 할 때 말이다. 특히 사돈이 될 사람들끼리 상견례를 할 때, 그게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할 당사자들도 상견례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제 숨을 좀 쉬겠다" 라고 하는데, '아이가 다섯' 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 아이가 다섯 !! 시청률이 30프로이니 제법 인기가 있는데, 상견례가 그렇게 힘이 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가짜 패를 들고 진짜처럼 버티기를 하니 그게 쉬울 리가 없다는 말이다. 서로 상대방 자식을 칭찬하는데, 억지로 하고 있으니 그게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는 것이다. "댁의 아드님은 멋있고 잘생기고, 참으로 잘 키우셨군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댁의 따님은 참으로 얌전하고, 마음씨도 백옥같이 예쁘네요" 라고 하면서 응수를 한다는 것이다. 양쪽에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혼사가 깨지면 안 되니 말이다. 그리고 서로 식사를 하면서, 평소에는 대충 이렇게 손으로도 집어서 먹고 하는데,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바쳐가면서 먹는데, 그러니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상견례를 마치고 나면 서로가 힘이 들었다고 하면서 한 숨을 내쉬는데, 그게 바로 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자기 의로 마중을 나와서 상대방을 이용할 것은 다 이용을 해먹는, 평생을 그런 식으로 다들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만약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거룩한 분이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부자청년이 주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저는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섰는데, 그러자 주님은 완전히 그의 약점을 정통으로 공격하셨는데, "너의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 부자청년에게만 하신 말씀인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잘난 척을 하니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데, "너희들은 그냥 오너라. 내가 용서해주겠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부자청년은 자기 자랑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한 통속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부순다는 것이다. ◈ 먼저 악한 자의 통로로 들어가서 !! 그래서 악한 자를 발굴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주님께서 날마다 잠언서의 말씀을 통해서 악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겸해서 말씀해주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하, 선한 자는 이렇구나. 지혜로운 자는 이렇구나. 영생을 얻는 자는 이렇구나" 라고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악한 자의 통로로 먼저 들어가서, 그 다음에 선한 자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악한 자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하는 행동이 악한 자의 행동인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한 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의로우신 분이 당겨주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바로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을 이야기하면서 동행하시는, 물론 이스라엘 그 당시의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잠언서를 주시는데, 이 잠언서를 통해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면서, 선한 자에게서 악한 자로 넘어오는 것은, 그것은 이스라엘이 매일같이 드려야하는 제사가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그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 잠언서를 통해서 십자가를 접촉하라 !! 그런 의미에서 잠언서은 언약이지만 언약의 핵심은 아닌데, 언약의 핵심은 언제나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는 것인데, 즉 제사장이 있는 곳이 언약의 중심이고, 삶의 지혜는 잠언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잠언서를 통해서 십자가를, 즉 진정한 제사를 접촉하라"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다시 교재 172페이지를 보자. ** 악한 자들이 얼마나 악한지 자꾸만 대비시키는 겁니다. 지혜가 없는 자를 알아야지, 지혜가 없는 자의 어떤 행색과 지혜를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잠 4:16)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 악한 자들은 왜 이런 짓을 합니까? 아들이 아니어서 그렇고, 지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실은 똑같은 인간이죠. 같은 인간인데, 아들은 특별히 지혜를 주심으로서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지혜에 끌려가는 내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악한 자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가? 여기에 보면 "악한 자들은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 다음 내용을 모른다고 치고 여러분이 대답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질문은 굉장히 간단한데, 그러니 "저 인간은 정말로 성질이 더럽다" 라고 하지 말고, "저 인간은 왜 그럴까?" 라고 해보자는 것이다. "저 사람은 지옥에 가야해" 라고 하지 말고, "왜 지옥에 가야 하는가?" 라고 하자는 말이다. 거기에 대한 해답이 교재 173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똑같은 인간인데, 즉 '악한 자(者)' 라는 것이다. 악한 자가 무슨 뜻인가? 당연히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러니 여기 잠언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누가 악한 자인가?"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은 모두가 다 악함에 해당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성령의 열매와 육의 열매 !! 그런데 '지혜 자(者)' 라는 것은, 그 속에서 악함만 나오는 게 아니라 놀랍게도 악함과 대조되는, 불연속이 되는 선함이 나온다고 하면, 그러면 뭐라고 하겠는가? "어머, 이게 웬 일이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 그게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그 사람의 열매인가? 아니면 성령의 열매인가? 분명히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그러니 성도는 성령과 동행하는 자인가? 헤어지는 자인가?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사람인데, 그런데 그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이 말씀하신다" 라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성령께서는 죄인을 통해서 죄가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나오게 하시는데, 물론 죄와 더불어 나오기에 성령의 열매인데 말이다.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면 육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게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나오는데, 항목이 참 많은데 말이다. 지뢰가 많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만 밟는 사람도 있지만, 여러 개를 다 밟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하나만 걸려도 지뢰는 다 폭발하고 마는데, 그러면 "그러니 니가 육이잖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죄인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현장이 곧 성전 !! 그러니 육이라는 것은 홀로 있다는 것인데, 즉 성령이 동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육인데, 그런데 성령이 동행하게 되면 우리를 통해서 육의 열매도 나오고, 또한 성령의 열매도 역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서 연속적인 것도 나오고 불연속적인 것도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감사하게 되는가? 자기 속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회개하게 되는데, 즉 "주여, 또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화를 내었군요" 라고 하게 되는데,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음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때가 되면 또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인을 붙들어서 주님의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현장이 곧 성전이고 또한 성령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율주행 자동차인데, 즉 우리는 자고 있었는데 자동차가 알아서 움직여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성령의 능력이고, 또한 십자가의 능력이란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죄에 대해서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오직 한 번, 즉 십자가에 의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자기 죄를 씻으려고 수완을 부릴 필요가 없는데, 꼼수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니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을 자기 쪽에서 해소하려고 선한 것을 동원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말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나오듯이, "지혜에 끌려가는 내 아들이 되어야 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여기서 정리를 좀 해보면,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였고, 반면에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나라에는 정작 아들이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독생자의 나라인데,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이 죽어서 가는 나라에는 그만 이 독생자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즉 아들이 빠진 나라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살 때까지 살다가 죽으면 그곳으로 가면 된다고 여기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 누가 있는지는 사실 관심도 없고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약속으로만 될 경우에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한데 말이다. 그런데 그 언약이 바깥으로 나와서, 그래서 그게 유월절이 되어버리면, 이제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서, 그것이 역사 속에서 언약의 구체적이고도 최종적인 것이 되는데, 즉 '피' 라는 것이다. ◈ 피, 피, 피 !! 신약에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인데, 그래서 히브리서 9장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피로 말미암아서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피가 나온다는 말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런데 피를 흘렸다는 것은 그 상대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상대자가 얼마나 못났기에,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12제자를 의미하는데 말이다. 즉 12제자가 얼마나 못났기에, 주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올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 즉 "내가 일을 다 하고 나서 너희들을 다시 데리러 오겠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세 글자로 '십자가'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얼마나 못났기에 예수님 쪽에서 십자가의 피를 흘려야하고, 거기서 능력이 나와야하고, 그래서 그 대속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찾아올 경우에만, 그래야만 우리와 언약관계가 수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문제로서, "그러면 제자들이 얼마나 못났는가?" 라는 것인데,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못났다기보다는 스승님을 존경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랐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의 청춘을 버리고 말이다. 그 정도면 괜찮은 자들이 아닌가? 베드로의 경우에는, 자기가 지키겠다고 하면서 자진해서 예수님의 호위무사가 되려고 했는데, 그러니 얼마나 의리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갈 수 없다는 말이다. ◈ 어둠에 푹 젖어있는 제자들 !!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알았던 여호와 하나님이나 율법 등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이미 그 동네에서 통했던 사고방식에 그만 완전히 푹 젖어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은 착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내세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많이 지킨 사람은 많이 착해서 천국에 가고,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설령 천국에 가더라도 저 변두리에서 울면서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것 같으면 진작에 착한 일을 많이 할 것을,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할 것을, 봉사를 많이 할 것을, 모두가 내 잘못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식으로 통용되는 인간의 세계에, 그들은 이미 흡수가 되고 통합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잠언서를 집어넣으셨는데, 즉 "그것은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아들이라고 하면 악함을 버리고 온전히 의롭게 되어야만 하는데, 잠언서에 의하면 우리는 그게 안 된다는 말이다. 잠언서의 말씀대로 우리가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을 낼 수밖에 없고 악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악한 자는 이렇다" 라고 할 때, 우리는 잠언서의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는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는데, "아하,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구나" 라는 것이다. 잠언서를 통해서 보니,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잠언서에서 말하는 악함과 같은 것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벽하고 온전하게 해야하니, 우리는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대비를 통해서 우리는 누구와 대비가 되는고 하니, 진짜 아들이 되시는 주님과, 그리고 악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와 대비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가 여기까지 와있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73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잠언서 4장 19절에 보면, 불의한 자는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무 것도 보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만 의식합니다. 그게 바로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잠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것이 요한복음 1장에도 보면 나오는데, 즉 "이 세상은 빛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어둠인 줄 알지 못했는데, 그런데 어둠이 오니 이 세상은 자기가 바로 어둠이라는 티를 내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잠언서에서 말하는 악하고 어리석은 자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가나 혼인잔치 !! 그러면 여기서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어두운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는데 말이다. 결혼식에서 그만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포도주를 주문해서 빨리 가지고 오게 한다. 2번, 축의금만 받고 그냥 돌려보낸다" 라는 것인데, 우리에게 3번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선택은 제한되어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것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즉 "3번, 항아리에 물을 담아서 내놓는다" 라는 것이 가능한데, 이 중에서 과연 몇 번이 정답이겠는가? 우리는 1번이나 2번을 선택하지, 3번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둠이니, 우리는 무지하니 말이다. 우리가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면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참 선하고 착하게 사시네요. 손님도 대접할 줄 알고, 참으로 인간성이 좋네요" 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악한 자가 되는가? 지혜자가 되는가?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악한 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지혜롭고 선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참 훌륭하게 잘살았군요" 라는, 그런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3번을 던지시는데, 물을 주시면서 포도주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수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말이다. ◈ 예수님의 때 !!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왜 물이 오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를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때' 라는 것이다. 즉 "내 때가 되면 물이 포도주가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게 바로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이 올 때인데, 그러면 여러분이 "목사님, 이미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이미 포도주가 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가나 혼인잔치에서 이미 포도주가 물이 되었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예수님의 할 일의 끝이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결혼식에 포도주가 없어서 그것을 만드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닌데, 그것은 "예수님의 때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환으로서, 우리 인간이 제 아무리 눈을 뜨고 봐도 할 수 없는 항목을 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포도주를 만드시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물을 떠서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을 떠서 마시니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여자여,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포도주 이야기를 하십니까?" 라고 하시는데, 즉 "예수님의 때가 되었을 때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가나 혼인잔치를 이용해서 약간의 맛보기를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기적' 이라고 하지를 않고, "이것이 예수님이 첫 번째 행한 표적이다" 라고 하는데, 즉 '표적' 이라는 것이다. 몸이 아픈데 낫기를 원하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기적을 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표적은 무엇인가? "아파서 죽어도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그게 바로 표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어도 살려주시니 말이다. 즉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때' 라는 것이다. (요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이해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살고자 덤벼드니 그렇다는 말이다. 반면에 주님을 "제발 좀 죽어다오"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과 영이 전혀 핀트가 맞지 않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고자 덤벼들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는 것인데, 그게 바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살고자 하는 것이 묵살되고 거부를 당할 때, 우리는 "아하, 주님이 아들로 쓰시는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 아하, 바로 '나' 자신이 문제로구나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어둠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슨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게 되면 어둠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즉 "아하 내가 평소에 살고자 몸부림치는 모든 것이 다 어둠이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잠언서 4장 19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캄캄해져도,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주여,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간절하게 기도해도,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자빠지고 엎어지면, 그것을 주님의 탓으로 돌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즉 "내가 나의 욕심에 걸려서 넘어진다" 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 자신인데, 그런데 뭐라고 하는가? "나는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십일조도 하고 봉사도 했는데, 그런데 왜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따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너는 무엇 때문에 기도했는가?"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서 보다 잘 살게 해달라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아, 내가 마태복음 6장에서 이야기를 했잖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이야. 너희의 몸은 단순히 참새가 아닌데, 그런 것들은 먹고 마시면 끝나지만, 너희 몸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내가 만들어놓았어" 라고 하시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입이 또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래 준다. 필요한 것만 주지" 라고 하시는데, 하루에 세 끼 정도 말이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는 것이다. 그 정도만 허락하시는데, 정작 우리가 원하는 성공과 출세는 없다는 것이다. 즉 "그 나라의 그 의만 구해라. 그러면 필요한 것을 주겠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 나라와 의를 계속해서 구하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딱 필요한 것만 !!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문둥병 환자가 나오는데, 그가 나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재벌이 되었는가? 주님이 딱 주신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문둥병에서만 나았다는 말이다. 그 다음 소식은 없는데, 그가 나아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주님은 과부를 재벌로 만들지 않는데, 흉년에 필요한 것만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주님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데, 딱 필요한 것만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그렇게 필요한 것만 공급을 받아서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다. 정말로 딱 필요한 것만 공급을 받아서 말이다. 그러면 "목사님, 저 사람은 재산이 70억이나 된다고 하는데요?" 라고 하신다면, 그 사람은 70억이 딱 필요하고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 사람은 딱 그것이 필요한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노인연금이 딱 적당하다는 것이다. 한 달에 20만원만 말이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그 나라와 그 의가 보물이지, 생활비가 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살아서 유월절을 주시고 맥추절을 주시고 수장절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 개입의 의미도 모르고 엉뚱한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주셨으면 우리는 다 받은 것인데, 그런데도 더 달라고 하는 우리 자신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런 가운데서 우리를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징계를 내리심으로서,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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