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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59 -바보의 흔적 / 160704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59 -바보의 흔적 / 160704

정인순 2016. 7. 4. 15:22

음성                     동영상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9 - 바보의 흔적 
                                                                                 
                                                         

16,06,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러면 여기서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지혜가 외칠 때, 어리석은 자는 거역하고, 지혜로운 자는 반기게 되는 겁니다. 지혜가 유일한 기준입니다.


◈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 !!

여기서 어리석은 자를 먼저 썼는데, 이게 출발하는 순서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슬기로운 자가 없으니 말이다.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 슬기로운 자가 나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똑똑한 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똑똑한 자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여기에 지혜가 주어지게 되면, 어리석은 자는 거역하게 되어있고 슬기로운 자는 반기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가 나타나려고 하면, 그 전제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지혜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잠언서를 하고 있는데, 그 잠언이 곧 지혜인데 말이다.


◈ 지혜가 나타나게 되면 !!

그 지혜를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그 지혜가 나타나게 되면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가 구분된다는 말이다. 지혜자는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고 말이다. 이것이 결코 말장난이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만약 지혜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가 구분이 되겠는가?

그게 구분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를 지혜롭다고 자처하기 때문에 말이다. 심지어 깡패들도 자기가 지혜롭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나의 지혜를 인정해주어야 하고, 심지어 하나님도 인정해주어야 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물론 지혜가 없을 때는 자기 팔을 자기가 흔들고 다녀도 되는데, 그렇게 사람은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지혜가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거역하는 사람, 혹은 반항하는 사람, 무시하는 사람, 배척하는 사람, 모두가 같은 말인데 말이다. 그렇게 지혜를 거역하고 거부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는, 보통 그것을 어떻게 결정하는고 하니까, 자기 눈에 보이는 남을 보고, 즉 타인을 보고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지혜로운 자가 불쑥 튀어 들어오게 되면, 인간들은 남을 보지 않고 새로운 지혜로운 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들이 다 나를 박사라고 한다" 라고 하는 현장에, 즉 박사들이 모인 현장에 예수님이 불쑥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들 박사이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자처했는데, 그런데 거기에 막상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박사들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도 우리만큼 알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관건은, '예수님이 등장하는가?' 라는 것 !!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을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박사들의 집단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한다고 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집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박사들이 누구인가? 바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관건은 "예수님이 등장하는가?" 라는 문제인데,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는 2,000년 이전이었는데, 그러면 지금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등장해서 하늘로 가시고 지금은 계시지 않는데, 그러면 그 이후는 어떠하냐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사도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사도들이 다 늙어서 죽고 없다는 말이다.


◈ 저주를 받는 무서운 책 !!

지금은 사도들이 적은 글이나 편지가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다들 알지 싶은데 말이다. 거기에서 더하거나 빼면 저주를 받는 무서운 책인데 말이다. 신문기자가 글을 쓰면서 글을 더하거나 뺀다고 해서 특별히 무슨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는데, 소설을 쓰면서 생략하고 해도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지만 노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물 심판을 받는데, 천사의 말을 듣지 않던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이 내렸다는 것이다. 하물며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신약성경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12제가가 썼는데, 그런데 그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서 제거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무서운 책, 그것을 베드로전서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썼다고 하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의 편지도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더하거나 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러니 물리학 박사든 철학 박사든 그 어떤 박사가 되던 간에,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박사학위 논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감히 보고 있는 이 성경, 이 성경말씀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경이나 코란과 같은 것은 참고로 하면 되는데,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그러면 성경말씀을 보고 난 다음에 우리는?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았다면 이제 제가 하는 질문에 답변을 해줄 수 있지 싶은데 말이다. 성경이 곧 지혜인데, 그러면 이 성경말씀을 보기 이전에 우리는 어리석은 자인가? 지혜로운 자인가? 물론 어리석은 자인데, 그러면 성경을 보고 난 다음에 우리는 지혜로운 자로 등장해야 하는가? 어리석은 자로 등장해야 하는가? 역시 어리석은 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방금 제가 지혜를 반기면 지혜로운 자가 되고 거부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고 난 뒤에 반기게 되면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는가? 어리석은 자가 되는가? 그렇게 성경말씀을 반기면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기 이전에는 모두가 어리석은 자들인데, "누가 누가 잘났나?" 라고 하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고 나면,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이면서 자칭 지혜로운 자로 자처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보람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들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말이다.

예수님이 등장하면 우리는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면 성경을 봐도 지혜로운 자는 없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경을 보고서 반기면 지혜로운 자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되니 도대체 어리석은 자인지 지혜로운 자인지, 여기서 혼선이 일어나고 만다는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 !!

이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드리겠는데, 이렇게 지혜가 등장할 때, 즉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그 예수님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을 아들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누구를 몰고 오는고 하니, 자기 아버지를 몰고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없는 자는 아버지도 역시 없다는 말이다. 즉 "나를 보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느니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반드시 아들이 먼저 등장해서 아버지를 끌고 온다는 말이다. 즉 "내가 있는 곳에만 아버지가 있다" 라는 것이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버지가 없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가 다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이제 성경말씀을 반기고 알아들었으니, 그러니 나는 지혜로운 자야" 라고, 그런 행세를 하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말이다.


◈ 아버지로 인해서 내가 있다 !!

그러면 무엇인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아들의 특징이 "나는 아들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인해서 내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아버지의 영광이고 명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자기 자존심과 체면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키우려고 하는데, "성경을 봐서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즉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똑똑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피조물이라고 하면 아버지에 대해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들다움의 속성이고, 그것이 본성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들은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들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어떠한가? 과연 그러한가? 그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와 자랑거리를 챙기지 못해서 늘 조마조마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은 어느 정도인고 하니까, 아버지에 의해서 버림을 받아도, 아버지가 버림을 받은 아들을 다시 살려냄으로서 아버지의 값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뒤따라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이 있는 자는 예수님처럼 죽였다가 다시 살려내신다는 말이다.   


◈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를 나도 같이 섬기게 되었다 !!

우리는 그 경로를 밟는데, 여기서 지혜가 왔을 때 거부하는 하는 어리석은 자이고, 반기는 자는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결과인데, 이런 결과로 보면 해결은 간단하다는 말이다. 지혜 자체가 아들인데, 아들이 되게 해주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아들이 되었다" 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를 나도 같이 섬기게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는데, 그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데, 즉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도 이와 똑같이 이야기하면 되는데, 즉 "내가 지금 여기에 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태어나야했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라고 말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한 동일한 고백을 진정성이 있게 하게 되는데, 방금 제가 '진정성' 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령을 받는 자는 이제는 종이 아닌 아들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양자의 영인데 말이다. 양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안다고 치고 넘어가겠는데 말이다.


◈ 양자의 영 !!

아들의 영, 즉 양자의 영을 받으면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짖는데, 그러니 아버지가 보기에 "너는 아들이야?" 라고 하면, "예, 제가 아들입니다" 라고 하는 게 아들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당신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왜 그런가?" 라고 물으면, "예수님이 그러했기에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든지 말든지 자기는 독자적으로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데, 즉 전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지혜가 왔는데 반기는 사람은, 여기서 '반긴다' 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지혜롭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같은 아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은 맏아들이고 우리는 양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는 형제인데, 그렇게 같이 아들이 되었으면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를 아버지가 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여기까지는 안다고 치고 넘어가겠는데, 그래도 다시 한 번 적어보겠는데(ㅋㅋ),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 라는 것이다. 아무튼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자꾸 잊어버리는데 말이다. 그렇게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지혜가 등장해야하는데, 지혜가 등장하지 않으면 누가 어리석은 자이고 지혜로운 자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예수님이고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지혜가 등장하면 거역을 하게 되고, 또한 반기게 되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작용하는고 하니,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아무리 예수님이 믿고 싶지 않아도 믿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악마의 힘이 뒤에서 조종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거역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이 세상 신이 마음을 혼미케 하기에 !!

교회에 나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기 때문에, "저 사람은 고집을 세서 예수님을 믿지 않아"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고집이 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지키면 지키는 것이고, 지키지 못한다면 못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그런 것 자체가 무척 안이한 것인데 말이다. 자기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어떤 괴물이 당기게 되면, 그 힘으로 인해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중심이 있습니다 !!

어제 낮 시간에 그것을 이렇게 설교했는데, "인간에게는 중심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중심'을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친구에게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했는데, 저녁도 사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한 달 동안은 다녔는데,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만 교회에 다니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니,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재미도 없고, 또 나를 반겨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무나 냉랭해. 옆에 있는 큰 교회는 분위기도 참 좋은데, 우리교회는 전혀 그런 재미가 없어.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이고, 별로 관심도 없어" 라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 못 말리는 초보권사 !!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장로와 권사들끼리 놀러가기로 했는데, 거기에 40대의 초보장로와 초보권사가 한 사람씩 끼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도 동행을 하고 말이다. 제 아내가 교회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해서 도저히 말을 못하겠는데(ㅋㅋ), 그 중에서 어떤 장로가 자기가 과거에 있던 직장에 가서, 자기들이 이번에 놀러 가는데 찬조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위 공직자 출신이라고 하는 양반인데, 아마 제법 높은 직급에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이 초보권사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장로님, 그렇게 되면 그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된 공금인데, 그것을 왜 우리가 놀러 가는데 사용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왜 그것을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이것은 부당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40대가 70대를 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그 초보권사가 우리네 친척인데, 얼마나 대가 센 여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직장도 꽤 괜찮은 곳에 다닌다고 하는데 말이다. 하루는 자기 시어머니가 사진을 찍어서 뽀샵을 조금 했는데, 그래서 시어머니가 자랑삼아서 며느리에게 자기 사진이 어떠하냐고 물어보니, 대번에 하는 말이 "어머니, 징그럽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ㅋㅋ).

그런 스타일인데, 상대방에게 특별히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격 자체가 곧이곧대로 그 자리에서 바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 초보권사는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나는 이제부터 이 교회에서는 더 이상 봉사할 수 없습니다" 라고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게 바로 '힘' 이라는 것이다. 지혜가 떴는데, 즉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자기는 한 몸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우리의 몸은 결코 한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 힘 속에 놓여있는 인간 !!

우리의 몸은 무엇으로 둘둘 감겨져 있는고 하니, 기존의 이 세상의 힘이 둘둘 감겨져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이고, 공직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다. 퇴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선배가 찬조를 하라고 하니, 할 수 없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힘 속에 인간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고 하는 것이 재미가 없는 차원이 아니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 '세상 신'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4장 4절의 말씀인데,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 신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 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 힘과 힘의 대결상태 !!

이제 성경의 내막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성경 속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까, 힘이 있고, 그리고 성경밖에도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개인이 믿고 말고 할, 그러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힘과 성경 밖에 있는 힘이, 그렇게 힘과 힘의 대결상태를 성경은 문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내가 20년을 믿었다" 라고 하게 되면, 여전히 자기는 단독자로 있는 것처럼 되는데, 하지만 성령이 와서 믿게 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도저히 내가 믿을 수 없는 세계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누군가가 떠밀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가 나를 강제로 집어넣었다" 라는 말이다.


◈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그래서 자기는 발을 빼고 싶어도 도저히 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센 힘이 밀어 넣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게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데,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라고 말이다. 즉 "누가 주님보다 더 강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아무도 주님보다 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고전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이렇게 힘과 힘의 만남이라고 하면, 우리가 갑자기 수월해지고 마음이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자기 행동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천국에 들어가고 말고 하는 것은 자기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떠밀어주면 가는 것이고, 반면에 강제로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방치해놓으면, 전혀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고집이 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천국에 가지 못하게 붙드는 힘에 의해서, 그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 성경말씀에 대해서 반발할 수밖에 없는 힘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개나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힘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구원의 힘은 성경자체에서 나온다 !!

그래서 정리하면, "구원의 힘은 성경자체에서 나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히브리서 4장에서는 "말씀은 살았고" 라고 하는데, 즉 말씀자체가 활동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해서 믿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목사가 믿게 한 것이 아니라, 목사는 혀를 놀리는 도구에 불과하고,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그 사람 속에 집어넣으니, 그 말씀에 동의가 된다는 것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렇게 동의가 되는 동시에, "이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는데, 그러면 그것을 알았을 뿐인데, 그것을 통해서 모든 성경말씀을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한 구절로 인해서 통달을 !!

그렇게 통달하게 되는데, 이 통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쪽으로 모든 것이 통달되는데, 그것은 성경말씀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온 그 모든 자국들이 주님이 떠밀어서 되었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조금 전에 고린도전서 10장 22절의 말씀을 찾지 못했는데,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님보다 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자기가 알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기가 예수님보다도 더 강하다는, 즉 "예수 당신을 믿는 것은 내 마음에 달렸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결코 창조자가 아닌데, 그러니 피조물과 창조자의 관계는 무엇이든지 창조의 능력이 개입된 상태로 그 관계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창조의 능력으로, 즉 물이 갈라지고 또한 물 위를 걷는 능력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자기의 능력이지만, 주님이 믿게 하시는, 즉 주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천지를 창조한 능력으로 우리를 꽉 잡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게 된 것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하신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여러분이 다 이해를 했다고 여기고, 그러면 자기 제가 다시 질문을 던지겠는데 말이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가는데, 대구에서 출발해서 영천을 거쳐서 부남, 청송, 진보를 갔다가,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방금 언급한 것이 바로 여행지인데, "대구, 영천, 부남, 청송, 진보, 다시 대구" 라는 것은 바깥의 여행경로라는 말이다.


◈ 청송에는 왜 갔는데?

그래서 "당신은 어디를 갔다왔어?" 라고 하면, "대구, 영천, 부남, 청송, 진보를 갔다왔어"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것을 해도 무엇이 나오지 않는고 하니, "왜 갔는데?" 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갔는지는 나오지만, "청송에 왜 갔는데?" 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디 교도소에 면회를 갔는가? (ㅋㅋ)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나는 이렇게 이렇게 살았다" 라는 것은 보여주는데, "나는 어디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어쩌고" 라는 것은 보여주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은, 사실은 그것은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는 말은 되는데, 남들은 그렇게 어렵다는 공부가 자기는 왜 쉬운지, 거기에 대해서는 자신도 모른다는 말이다. 심지어 "나는 여자로서 이렇게 살았어" 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는데, 그런데 "너는 왜 여자인데?" 라고 하면, 그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바깥에 있는 이것을 외부권력이라고 하는데, 이 외부권력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았다" 라고 말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내부권력에서 나오는데, 바깥에 나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서, 그렇게 자기 안에 들어있는 외부권력은 미지라는 말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Why Me? My Way !!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죽고자 할 때 뭐라고 하는가? "신이시여, 왜 나의 사업을 이렇게 망하게 하십니까?" 라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렇게 "왜?" 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팝송 가수인 크리스 크리스토프슨이 부른 노래가 있는데, 'Why Me?' 라고 말이다. "왜 하필이면 저에게?" 라는 의미인데 말이다.

여기에 반대가 되는 노래가 있는데, 'My Way' 라고, 프랑크 시나트라가 부른 노래인데 말이다. 이것은 자기 자랑을 하는 노래인데, 즉 "죽음의 커튼이 걷어졌을 때,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길' 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산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My Way' 라는 노래는 자기 내부를 향해서 하지만, 'Why Me?'는 외부를 향해서 한다는 것이다. 'My Way' 라는 노래는 자기가 자기를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는 말이다. 그런데 'Why Me?' 라는 것은, 즉 "주여, 왜 그렇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말이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라고, 즉 "왜?" 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는 경로로 사용하십니까? 그러니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나의 경로는 내가 하기 나름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렇게 정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게 정하셨습니까? 그러니 할 수만 있으면 피해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압니다. 그러니 그것을 인정하겠는데, 그래서 이 잔을 마시겠습니다. 그러니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 즉 'Why Me?' 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My Way'를 포기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오늘 강의제목을 'My Way'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여기서 '나의 길' 이라는 것은, 남에게 "나는 이런 인간이야. 그러니 나를 무시하지마" 라는 것인데, 'Why Me?'는 그런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정도야. 이런 인간이야. 그러니 나를 무시하지마"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곧 내부의 힘 때문에 그러한데, 여기서 힘을 포기하지 않으면 남들이 이해하는 '나' 라는 것만 달랑 남게 되는데, 하지만 그 힘을 포기하게 되면 누구만 남는가? 주님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여, 오늘은 청송을 갔다가 진보를 갔다가, 내 인생을 왜 이렇게 하십니까?"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내부의 힘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강의가 어디까지 왔는고 하니, 처음에는 슬기로운 자가 되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믿씁니다!' 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슬기로운 자가 되려고 시도를 하지만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슬기롭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가짜라는 말이다. 진짜 슬기로운 자는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아들 되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는 것이다. "아하, 내가 똑똑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천국은 골로새서 1장에 나오듯이 '아들의 나라' 라는 것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겠는데, 지금 우리가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힘인데 말이다. 그 힘에는 내부의 힘과 외부의 힘이 있어서, 외부 힘은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고, 하지만 내부의 힘은 주님께서 자기 내부에 작용하는 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고 되는데, 장래가 어떻게 될지 자기도 모르는데, 다만 지나온 것은 흔적일 뿐이고, "아하, 이런 과정을 밟았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자기가 주님의 힘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아들 됨을 믿는다고 하면,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입장에서 자기가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면, 살아온 그 모든 구비구비마다, 그것이 자기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 궁지와 둥지 !!

그것을 두고 '궁지' 라고 하는데, 즉 "주님께서 궁지에 몰아넣었다" 라는 것인데, 자기의 선택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주님이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한 평생을 말이다. 지난 번 대전강의에서 이 '궁지' 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때 제가 무엇은 아니라고 했는고 하니, "둥지는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둥지는 남진의 노래에 나오는데, "둥지를 틀어라" 라고 말이다(ㅋㅋ). 

우리는 자기 둥지가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런데 과거를 돌아보니, 주께서 "너는 그렇게 살아야 마땅해.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너는 너의 뜻대로 살면 안 돼. 내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해. 그래야만 골인지점이 천국이 되는 것이야" 라고 말이다.

우리는 천국까지 자기 혼자서 가는 줄로 알고 있지만, 그런 일을 있을 수 없는데,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천사가 천국의 문을 닫아서 걸어버리고 마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면 열 자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그러니 동행하는 분이 열어주어야 하는데, 자기가 "똑똑, 계십니까? 문을 좀 열어주세요" 라고 문을 두드리고 한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힘에 의해서 이렇게 가게 되는데, 즉 힘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힘에서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흔적' 이라는 것이다.


◈ 두 가지의 힘 !!

다시 정리하면, 힘에 의해서 흔적이 생겼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흔적이 있는데, 힘에 의해서 말이다.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는 지옥에 갈 흔적인데, 즉 지옥에 갈 노선이 있고, 또한 천국에 갈 노선이 있다는 것이다. 이 흔적은 힘에서 나왔고 말이다.

그러니 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배격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이는 힘인데, 이 둘은 다 예수님의 아버지에게서, 저는 그냥 아버지라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아버지' 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다. 왜냐하면, 그냥 아버지라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부르는 경향이 생기는데, 우리와 아버지 사이에는 반드시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중보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데, 불교이지 말이다. 심지어 힌두교에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러니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있어서는 아들과 함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배격하는 힘과 받아들이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지옥에 갈 흔적과 천국에 갈 흔적을 말이다. 이것은 결코 어렵지 않은데, 여기까지는 다 안다고 치고,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그러니 자기가 지옥에 갈 흔적을 남겼다고 하면 지옥에 가야하고, 천국에 갈 흔적을 남겼다고 하면 천국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의 존재 자체가 '흔적' !!

그런데 여기서 제가 왜 흔적이라는 말을 했는고 하니까, 결코 자기가 결심해서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흔적인데, 자기가 살아온 것이 말이다. 물론 "대구, 영천, 부남, 청송, 진보, 다시 대구" 라는 것도 흔적이지만, 현재 자기가 이렇게 있는 것도 내일이 되면 흔적이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강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는다고 하면, 그것도 내일이 되면 역시 자기가 지나온 하나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흔적은 장소만이 흔적이 아니라, 자식을 둘 낳고, 사업을 하고, 그리고 어느 교회에 다니고 하는 것도 역시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 전에 이야기한 처조카의 경우에도, 그만 신분을 밝히고 말았는데(ㅋㅋ), 그 사람도 역시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두 번 다시 이 교회에 봉사하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성질도 참 좋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 그 흔적을 구분하는 방법 !!

그러면 이제는 그 흔적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는데, 지옥에 갈 흔적인지 천국에 갈 흔적인지 말이다. 그것은 남을 비판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는 모습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흔적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살펴보자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근호 목사 당신은 어떻게 지옥에 갈 흔적과 천국에 갈 흔적을 장담하는가?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인가?"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데, 우리가 천국에 갈 흔적을 안다고 하면, 그것을 빼면 다 지옥에 갈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요?


◈ 그것이 곧 '예수님의 공생애' !!

그것이 곧 '예수님의 공생애' 라는 것인데, 그것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다가 가셨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혼자 가신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누가 오셨는가?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오셨는데, 그러면 '성령+예수님' 이라는 것이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작게 표현하겠는데,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작은 예수님인데, 그러면 그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우리가 똑같이, 여기서 '나' 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라는 것이 더 적합한데 말이다.


◈ '나'가 아닌, '우리' !!

왜냐하면,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구원이니 말이다. 즉 '나'를 보고 성령을 주신 게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가 되어라" 라는 의미에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해야만 몸도 하나고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고 소망도 하나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말을 하나 할 때도 성경전체를 보게 되면 조심스러울 수밖에는 없는데, "여러분, 구원을 받고 싶습니까? 이렇게 하시면 받습니다" 라고 쉽게 내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개인구원은 없는데, 즉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게 없다는 말이다. 집단인데, 즉 "서로 사랑하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작게, 성령은 크게 !!

그러니 우리는 작게 성령은 크게,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성령을 더욱 더 크게, 우리는 더욱 더 작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 더 작아진다는 것이다. 이게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이것이 마음에 별로 닿지 않는다고 하면, 어제 낮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즉 자기를 사랑하신 분이 크면 클수록, 그러면 자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크면 클수록 자기는 그만 쪼그라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자꾸 자기 자랑을 하고 대단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은, 점점 더 자기가 사랑할 대상자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니 모든 것이 귀찮다는 말이다.


◈ 아쿠쿠쿠쿠, 우리 손녀가 왔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점점 더 커지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때 벨 소리가 나면서 손녀가 찾아왔다고 하면, 그렇게 근엄하게 폼을 잡고 있던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오는가? "아쿠쿠쿠쿠, 우리 손녀가 왔어요?"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순간 손녀는 커지고 할아버지는 작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옆에서 보고 있던 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버지도 참 주책이야. 손녀 앞에서 그것이 무슨 짓이야? 손녀가 재롱을 떨어야지, 왜 아버지가 재롱을 떨어?" 라고 한다면, 그래도 할아버지 뭐라고 하는가? "너는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나는 손녀가 너무 좋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의 존재감이 그만 쪼그라든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존재감이 쪼그라들면 무엇도 같이 쪼그라드는가? 근심, 걱정과 같은 미래에 대한 염려도 같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 살면 안 되는데,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키우든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배우자가 죽으면, 그래도 연애를 하든지 해서 자기를 쪼그라들게 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참 좋은데, 아니 70이 되어서 성령을 받게 되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복 중의 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있는데, 나이 70까지 목사로 있으면서도 성령을 받지 못해서, 결국 "나는 목사다" 라고 하면서 비참하게 죽는 경우도 있는데, 의외로 굉장히 이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나를 건드리지마 !!

처음에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예수님을 믿으니 저런 설교가 나오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자기 관리에 바빠서 아무도 사랑할 대상이 없는데, 그러니 사랑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가 자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하면 "나를 건드리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자기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숨이 막혀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배우자가 치매에 걸리고 하면, 물론 처음에는 자기 의지로 돌보고 하는데, 하지만 나중에는 그만 숨이 막혀서 "니 죽고 내 죽자" 라고 해서 같이 자살을 시도하는데, 그러면 자기는 그만 약을 적게 먹어서 또 살아나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다는 것 자체가 숨이 막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랑을 만나지를 못해서 그러한데, 그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햇빛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지금도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있다는 말이다. 그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분명히 나오는데, 그런데 마귀가 그것이 사랑인 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저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마귀는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만 훼방질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셔도 고마운 줄 모르고, 그저 살아도 감사한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산다고 여기는데, 그래서 자기만 건드리면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운전할 때 그런 현상이 잘 나타나는데 말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바로 여기에 대한 유일한 표준적인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래서 그 어느 누구라도 이 흔적을 도저히 모방하거나 따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모방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코 일치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성령은, 우리의 흔적을 주님의 흔적으로 !!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아마 여러분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라고 나오지 싶은데, 보통은 "성령이 오시면 나는 기쁘다. 나는 편안하다" 라고 하면서, 어떤 개인적인 행복과 관련을 시키려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성령은 어디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고 하니, 우리의 흔적을 주님의 흔적으로 바꾸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흔적을 버리고 주님의 흔적으로 가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흔적은 흔적대로 그대로 깔아놓고, 그 위에 주님의 공생애의 흔적을 겹치게 하시는데, 그런 방법을 주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의 흔적을 없애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문경의 놀이동산에서 !!

하루는 제가 문경에 갔는데, 거기서 어떤 골짜기로 들어서니 마을 나타나는데, 옛날 광산지역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철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보니 발로 저어서 그 철로 위를 타고 가는 조그마한 기구를 만들어놓았는데, 물론 저는 돈이 아까워서 타지 않았는데 말이다. 무려 2만원을 달라고 해서 사진만 찍고 왔다는 것이다(ㅋㅋ).

그 철로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데, 우리는 평생 죄만 짓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마귀를 벗어나서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는데, 우리는 이 몸이 있는 이상 죽을 때까지 자기 몸만 챙기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마귀가 그렇게 우리에게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위를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그래, 너는 이미 죽었어" 라고 하면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모시고 와서는 그 위를 밟고 지나가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죄의 흔적 위에다가 의의 흔적이 새겨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흔적이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로마서를 공부하다가보면 제일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바로 5장인데,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이 사도바울이 쓴 주님의 뜻이 분명하고, 그러니 목사로서는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문장 하나 하나가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는 말이다.

여기서 일단 로마서 5장 12절에서 14절을 살펴보자.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왕 노릇 !!

여기서 사람들이 제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14절의 '왕 노릇' 이라는 것인데, 그것도 '죄의 왕 노릇' 인데 말이다.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서 설명을 해주어도 듣는 사람들은 그냥 멍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왕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물론 왕은 사극을 보면 나오지만, 그것은 재미로 보는 것이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방금 결혼식을 마쳤는데, 그런데 왕이 지나가면서 그것을 보고, "저 여인을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처녀로서 나에게 시중을 들도록 하라" 라고 하면, 그러면 요즘 같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는데, 왕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소위 '민주주의'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사극에 보면 "저 여인을 나의 하녀로 들여서 수종을 들게 하라" 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런 소리를 내뱉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왕이 무엇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다. 즉 "왜 나의 소유인 아내를 당신이 가지고 가는가?" 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왕을 때릴 수도 없고 말이다.


◈ 현대인의 주체의식 !!

그런데 옛날 조상님들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밤 중에도 나라님을 욕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게 잠언서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이불 속에서도 나라님을 욕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요즘 현대인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데 왜 그런가?

무엇이 바뀌었다고 하는고 하니,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주체의식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왕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살아가는데, 즉 '왕 밑의 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왕과 관련된 '나' 라는 것인데, 하지만 지금은 왕이고 삼촌이고 간에 다 찍어서 잘라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나로 인해서 존재하는 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주체의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데,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는 인류가 무려 6천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나는 나로 인하여 나다" 라고 하는데 6천년이나 걸렸다는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는데, 여기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있는데 말이다. 모든 것이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인데, 그래서 저는 저 북한을 나라로 보지 않고 종교단체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통일교이고, 구원파이고, 여호와의 증인이고, 장로교이고, 그렇다는 말이다.

그들은 밥을 먹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어버이 김일성 수령으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주체사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화로서 푼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북한은 종교단체가 아닌가?

종교단체란 것은 종속된 것인데, 반면에 남쪽은 소위 민주주의 국가이고 말이다. 그러니 서로 주체가 다른데 무슨 대화와 소통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남쪽까지 다 긁어모아서 종교단체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니 무슨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아는 자들도 있는데, 그것은 북한의 일부 엘리트 계층인데, 그들은 민중을 속여서 자기들만 배불리 먹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그런 것인데, 종교의 지도자들은 어리석은 민중들을 끌어 모아서 배부르면 되는데, 그게 그들만의 행복이고 그들만의 나라이고 제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보면 김정은이 나오면 울고 하는데, 무슨 나훈아 팬클럽도 아니고 말이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남쪽에도 반신반인으로 추앙을 받는 분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체제가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들은 또 다시 섬길 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탈북자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어른을 섬기면서 배급을 받고 하던, 그렇게 살던 버릇이 있어서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통령이든 수령이든 간에, "모든 인간은 죄를 섬기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너무 어려워서 제가 뭐라고 바꾸어서 이야기했는고 하니,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프로이트의 '욕망' 이야기 !!

지금부터 그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는데 말이다. '프로이트' 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즉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욕망은 어디에서 나왔는고 하니, 아들들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에서 나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아들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의 아들들이 한 사람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 모든 인간 욕망의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에 관한 정신 분석학 이론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프로이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니 사람들이 그를 향해서 욕을 하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뭐라고 하는가? "죽이지 못해서 한이 맺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한이 자식이 부모를 죽이지 못한 것, 그렇게 억눌림을 당해서 생긴 것이 무의식인데, 그런데 죽이고 싶지만 그렇지 하지 않고 "저는 부모님을 사랑해요. 존경해요" 라고 하는 것을 의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식과 무의식은 그 대상을, 즉 "아버지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라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프로이트가 이런 주장을 했을 때, 알아듣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는데, "저것이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라"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이 나오지 이제 10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그런데 지금은 조금 배웠다는 인간은 모두가 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게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기에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체제 이전에 왕이 있었는데, 왕은 그 나라 백성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왕을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태어나기를 거기에서 태어났기에 고분고분한 것인가? 고분고분해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왕 체제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이후에 무너지면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분배가 되었는데, 그게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려고 하면 분배된 것을 모아야 하는데, 즉 투표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수결의 원칙인데, 그렇게 해서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의 실질적인 행사는 투표라는 말이다. 교회에서도 투표가 있고 국회에서도 투표가 있는데, 회사에도 있고 말이다.

물론 북한에도 투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있으나마나한 것인데, 거의 100퍼센트이니 말이다. 투표를 하는 현장에서 지키고 있으니 누가 자기 소신대로 제대로 투표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구성되는 체제인데, 그게 북한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비로소 존재감을 느끼는 주체인데, 그것을 모르고는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인민들이 김정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영원한 아버지가 될 때, 북한은 영원한 제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습제이고 말이다.


◈ 통합하는 힘이 곧 이데올로기 !!

그러면 아들들이 아버지를 죽였으면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인가? 그게 아닌데, 그래서 프로이트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였으니 미안한데, 그래서 그 아들들인 형제들을 통합할 때, 거기서 잘난 아들이 나오는 게 아니라, 형제들은 형제들대로 있는데, 자기들 손으로 죽인 아버지의 이미지가 형제들을 통합하는 힘으로서 작용을 하는데, 이것을 '이데올로기', 즉 '이념'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힘인데, 그러니 이 세상의 힘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인간의 욕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방금 보았듯이 로마서 5장 24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죄가 왕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래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여러분, 죄가 왕입니다" 라고 하면, 그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죄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만 죄가 되고, 반면에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죄가 아닌데, 그러니까 죄는 내 밑에 있지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목사님은 이상하게 왜 저렇게 죄가 왕이라고, 우리의 머리 위에 있다고 설교를 하시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마음을 굳게 먹고서 남에게 구제를 하면 그것은 선이 되고, 반면에 열을 받아서 길을 가다가 깡통을 차면 그것은 죄가 되고, 그러니 죄를 짓고 말고 하는 것은 내 손에 있는 것이지, 어떻게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라고 하는, 설교를 하면 얼굴에 그런 표정들이 역력하다는 것이다(ㅋㅋ).

"여러분, 성경에 보면 죄가 왕 노릇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러합니까? 여러분은 그 무엇을 해도 그것이 다 죄가 왕이 되어서 시켰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라고 하면, "아니오!" 라고,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앉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로마서의 말씀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데,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되어서 말씀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데, 죄가 왕 노릇을 하고 있고 우리는 그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 프로이트 말하는 '죄책감' !!

방금 이야기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다음 주 화요일에 부산강의에서 하겠는데, 그 프로이트의 이론을 여기서 조금 더 추가해서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은데 말이다. 아버지의 이미지를 형제들이 고분고분하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양심의 가책이 있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일단 투표해서 결정이 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그 순간 죄책을 느끼고 고분고분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원리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알다시피 무슨 일이 있으면 투표를 해서 결정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다수에 표를 던졌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의 뜻이란 말이다. 그런데 일단 그렇게 해서 세워놓게 되면, 그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자기보다도 더 월등한 힘으로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 대해서 프로이트 이외는 아무도 그것을 간파한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바로 그것은 인간내부의 무의식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가 결정을 했으면 바꾸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일단 결정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만 신처럼 붕 뜨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식구들은 밤 10시 이후에는 다 들어와" 라고 하면, 그런 법을 만든 아버지조차도 순종해야하는데, 그렇게 자기 머리 위에 뜬다는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는 왜 11시에 옵니까?" 라고 하면, 아버지는 "아임 소리"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내가 결정했으니 까불지마" 라고 나오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결정해놓고도 그것이 두려워서 벌벌 떠는 이유가 무엇인가? 참으로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밝혀내지 못했는데, 그런데 프로이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죄책감이 있어서 그렇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는 행동은 죄책감이 없는데, 그런데 여러 명이 모여서 결정한 행동에 대해서는 비록 자기가 찬성표를 던졌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선택은 그만 끝나버리고, 이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자기는 굴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모르는데, 그것을 동양철학에서는 '운명'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모호한 개념이고 말이다.


◈ 다시 로마서 5장으로 와서 !!

이제 로마서 5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죄가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하는데, 물론 주님의 뜻인데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 증거를 대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방금 이야기를 했지만, 죄라는 것은 자기가 지으면 죄고 착한 일을 하면 상쇄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인데 말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고 하니, 그 근거를 대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죽음' 인데,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죄가 왕 노릇을 해서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은 다 죽어. 죽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란 말이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누구든지 다 죽는다는 것이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간에 말이다. 박정희도 죽었고 김일성도 죽었다는 것이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이게 뭐야?

여기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면, 사람이 죽기 전에는 죽음에 대해서 겁을 내는데, 그런데 막상 죽음을 앞두게 되면 무슨 말이 나오는고 하니까, "이게 무엇이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다는 말인가?" 라고 말이다.

의사가 와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제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오늘밤을 넘기기가 힘듭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라도 의식은 살아있는데, 그것을 잔상이라고 하는데, 축적된 기억과도 같은 것이 말이다. 그런 잔상이 있을 때는, 남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하는데, "내가 왜 이렇지?" 라고 말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중심이고, 그래서 항상 누구만을 사랑한다는 말인가? 자기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육이 있는 이상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데, 죽음의 순간까지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왜 이렇지? 내가 죽는다고? 죽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 라고 말이다.


◈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미지의 것 !!

그러니 사람들이 괴로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을 다 아는데 자꾸만 빠져나가는 것이 있으면, 즉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미쳐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음인데, 알고 죽으면 괜찮은데, 하지만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미지의 것이란 말이다.  

물론 자기도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는 "죽으면 천국에 간다. 죽은 것은 잠자는 것이다" 라는 것을 목사를 통해서 많이 들었는데, 그래서 남의 장례식에 가서는 유족들에게 그렇게 위로도 하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는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죽음과 멀리 있을 때 이야기이고, 문제는 이제 자기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끝까지 '바보' !!

남의 죽음은 몰라도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정작 자기의 죽음을 자기가 모른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몰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바보이어야 하는데, 오늘 강의제목은 '바보'로 하겠는데 말이다. 인간은 끝까지 바보인데, 죽음을 모르는 이상은 말이다. 제 아무리 박사학위가 많고 설교를 하고 상담을 하고 해도, 자기 죽음을 모르면 바보라는 것이다.


◈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 바보를 두고 에스겔서 37장에서는 '바짝 마른 뼈' 라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를 외곽에서 힘으로 살려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바보로 만드는데, 로마서 5장에서는 이것을 바보라고 하지 않고, 바보의 내용을 '표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오늘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는데,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는데 말이다. 인간은 왜 바보인고 하니, "내가 나를 알려고 하기 때문에 바보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무엇을 빠트렸기 때문인데, "나는 누구누구의 상징물이다" 라고 하는, 즉 누구의 표상이라고 하는 그 관계성을 놓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가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런데 평소의 버릇, 즉 "내가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신다" 라는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지만, 그러니 죽이는 것도 주님이 죽이시는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이것이 뭐지?" 라고 하면서, 자기 죽음을 알려고 하니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즉 "나의 죽음이란 이것이다" 라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끝까지 오실 자의 표상이기 때문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상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죽음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목사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답변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오실 자의 표상, 즉 예수님의 표상이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자기에 대해서 깨달아야 하는데,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요즘은 교회도 불교가 다 되었는데 말이다. 목사가 강단에서 "여러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알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데, 때가 되매 주님이 알아서 죽이시고,  때가 되매 알아서 살리시고, 그렇게 살고 죽는 것이 주의 뜻인데, 로마서 14장의 말씀처럼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그러면 '표상' 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표상인데, 그러면 도대체 '표상'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로마서 5장이 참으로 어려운데, '왕 노릇' 이라는 말도 그렇고, 그리고 이 '표상'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표상이니 말이다.

쉬운 예를 들어서, 태극기가 우리나라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표상인가? 표상인데, 태극기를 밟으면 우리나라가 망하는가? 망하지 않는데, 그러면 자기가 죽으면 주님의 나라가 망하는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우리는 표상이니 말이다. 이것을 아까 흔적이라고 했는데, 오늘 강의제목이 바보는 그렇고 이 흔적으로 해야하겠는데, 합쳐서 '바보의 흔적'으로 하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살기 위해서 주님이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살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부담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내가 더 살아야 하겠다" 라는 욕심을 빼자는 말이다.


◈ 우리는 밤송이의 가시 !!

이제 표상에 대해서 설명하겠는데, 이것은 이 점선 안에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것인데, 즉 진짜 덩어리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은 전부가 아니라 끝머리인데, 마치 밤송이의 가시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시 하나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이고, 부활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 안에 더불어 부활이 된다는 말이다. 즉 몸체가 부활이 되니 가시도 같이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전혀 어렵지가 않은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을 마치고 돌아서면 가시가 그만 몸통 행세를 한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가진 육의 본성인데, 죽을 때까지 간다는 것이다. 가시인 주제에 몸통 행세를 하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주여, 죽겠습니다. 몸이 아파서 죽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주님이 아프게 하셨는데 말이다. 그러니 자기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 실체는, 예수님의 행위 !!

따로 실체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실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실체가 대해서 로마서 5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담은 오실 자인 예수님의 표상이다" 라고 했는데, 그 실체를 바로 예수님의 행위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 그것이 15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

여기에 보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라고 하는데, 이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겠는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아무리 친절에 친절을 베풀어서 설명해도 합당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데, "아담이 죄의 왕 노릇을 해서 다른 사람도 죄로 인해서 다 죽었구나" 라고 말이다. 이것은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기껏 설명한 것이 프로이트를 빌려서, "인간의 욕망은 아버지로부터 온 욕망이다" 라고 했는데, 그 아버지의 욕망을 자기의 형제들을 아우르는 추상적인 새로운 욕망으로 걸어놓고,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늘 충성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욕망에 불과한데, 즉 육적인 혈육의 욕망이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껏 아는 것이 그 욕망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형, 사업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돼. 그러면 아버지가 형을 싫어하실 거야" 라고 하면서, 죽은 아버지를 거론해서 형제들과의 화합을 도모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아빠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어. 엄마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어" 라고, 그렇게 항상 추상적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16절과 17절에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죽은 것 같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의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실체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여기서 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가 등장하면 그 의가 왕 노릇을 하기 때문에, 왕을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권력을, 즉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롬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예수님 본인의 명예 !!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의 힘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떠밀어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명예가 아니고 예수님 본인의 명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우리의 떠밀어서, 예수님 자신의 행하심, 즉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심을 믿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의 레일 위를 자전거를 타고 깔면서, 그렇게 밟고 지나가신다는 것이다. 즉 말씀이 타일로 우리를 그렇게 입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흔적 위에 말이다. 


◈ 타일과 스티커의 차이점은?

이제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타일과 스티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답변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타일은 망치로 부수기 전까지는 떨어지지 않는데, 그런데 스티커는 물만 묻으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타일이 되어야 하는데, 물론 성령이 동원되어야만 가능하지만 말이다. 그래야 한 몸이 될 수 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스티커를 붙이려고 한다는 말이다. 

스티커라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몸이 아파서 할머니를 보고 파스를 붙여달라고 해서, 그렇게 붙여서 시원하게 잘 자고 일어났는데,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게 신신파스가 아니라 중국집 전단용 스티커였다는 것이다(ㅋㅋ).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했으면 그랬겠느냐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할머니가 만져주기만 하면 아픈 것이 다 나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할머니의 경우에는, 심심하면 할아버지가 그렇게 해달라고 하니, 그만 귀찮아서 아무런 딱지나 붙여주었는데,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개운하고 시원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플라시모 효과' 라고, 우리말로 '위약효과' 라고 하는데 말이다. 약도 아닌데 심리적으로 해서 낫는다는 것이다.


◈ 주님의 행하심에서 나오는 힘으로 !!

사실 우리는 스티커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에다 타일을 붙이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장식하기 위해서, 그래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죄만 더덕더덕 붙은 죄인을 하늘나라의 타일로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능력이고 힘인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이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즉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게 바로 성경전체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그 힘도 모르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오해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의 행하심에서 나오는 그 힘에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