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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60513a (핍박)―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10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 좋은 일인데 왜 핍박을 받죠? 이것은 그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 거짓이 전제로 되어 있어요. 거짓말이 지배층에 유통되는 세계에서 성령 받은 주의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거짓에다가 진리를 전하니까 여기서 나오는 반응들이 있는데 그 반응을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핍박이라고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거짓을 만나서 핍박을 나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무엇을 테스트하고 싶으냐 하면 나도 과연 진리에 속했느냐? 구원받았느냐를 테스트를 하고 싶어서 이 거짓된 세상을 향하여 진리를 한번 전파해 보는 거예요. 전파해 보면 이 핍박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고난이 나와요? 안 나와요? 뭐 별 핍박이 안 나와요. 별 고난도 안 받아요.
사도 바울은 돌로 침을 당하고 쫓겨나고 막 이런 현상이 있는데 우리가 같은 성령 받은 성도라고 자부하면서 복음을 전하니까 저 쪽에서 세상쪽, 안 믿는 쪽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야, 내가 뭐 잘못 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죠. 거기서부터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진리를 전할 생각은 안 하고 핍박 받을 아이디어만 자꾸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상한 핍박이 왔을 때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나는 성도 맞구나!”라고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확정 짓고자하는 시험이 유발될 수가 있습니다. 상당히 주위 해야겠죠. 핍박 자체를 자기가 성도됐는가 안 됐는가의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ccc에 있는 선교단체에 있는 애들이 일부로 거지꼴을 해서 돈도 없이 복음 전하면서 내 쫓김을 당하고 소금을 뿌리고 그럴 때 마다 어떤 개인적 기쁨을 느끼면서 주여!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저와 같은 동일한 고난을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 자학적인 쾌락의 일종이에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마귀적인 술책, 전략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무엇으로 확인하려고 하느냐 하면 형식을 통해서 내용이 진짜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우리 인간이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핍박받는다는 것이 형식적인 핍박을 받게 되면 그래,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했기 때문에 이런 핍박을 받는 거야! 하고 스스로 자위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말이죠. 그런데 이 핍박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화 될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가 등장하겠죠. 몇 대를 맞아야 핍박이고 슬쩍 건드리면 그것은 핍박 아니고 그런 식으로 양적으로 정해 질수 있겠습니까? 가해지는 에너지 양, 또는 고통의 양으로 이것이 핍박이고 핍박 아닌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욕설을 언제까지 들어야 욕설이고 어디까지 들어야 욕설이 아닌 것을 스스로 판정해 버리면 벌써 기준 자체가 자기가 끄집어낸 것이 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용은 형식을 부정함으로서 내용이 주어지는 겁니다. 형식이 깨지는 거예요. 형식이라는 말은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동일한 양적인 모양새를 유지하는 것을 형식이라 합니다. 여기서 복음전하다가 세대 맞은 것이 이쪽에 가서 세대 맞으면 똑같은 복음을 전한 것이 될까요? 이것은 아니죠.
여기서 침 뱉음을 당했는데 똑같이 저쪽에 가서도 침 뱉음을 당해야만 그게 복음을 전한 것이 됩니까? 아니죠. 이런 것이 사도가 핍박받고 고난 받았다고 하니까 소위 흉내 내는 것, 형식화시켜서 나도 사도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을 스스로 성급하게 주려고 하는 것은 어디서 잘못 되었느냐 하면 반복되는 예수님의 사건에는 형식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반복할 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할 때 그 십자가를 주께서 반복할 때 동일한 형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 다르고 시간마다 세월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양의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남에게 고통을 받는다 하기 전에 먼저 전제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따로 내 자아 성을 형성하려고 했늘 때는 어떤 핍박도 거짓말입니다. 내 자신이 따로 형성이 되어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으니까 나는 성도 맞다고 따로 이렇게 자아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시도 하게 되면 어떠한 주님의 핍박도 그것으로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이 거짓된 세계에 복음을 전하니까 핍박이 왔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된 세계에서 자기는 빠져 있다고 선입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아 물러가라 하면서 본인은 이단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당연히 이단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이단들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핍박하고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남을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하는데 네가 거짓됨에서 벗어난다는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거예요?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정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자신은 여기서 빠지고 싶은 겁니다.
자아를 만들 때 자아의 내용을 채워야 되는데 형식 가지고 자아를 구축해 버리는 거예요. 형식가지고 자아를 구축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기억입니다. 옛날에 내가 이렇게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기도하가 응답 받았기 때문에 그 과거의 기억들을 주워 모으면 이것은 나한테 스스로 생각하기에 형식화 되어 있는 나의 주체성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있는 한 항상 십자가의 복음의 가리게 되어 있고 훼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있는 이상은 복음을 어떻게 설명해도 그 복음은 나한테 유리하고 나를 정당화 시키고 나 잘남을 인정해 주는 복음이라고 왜곡되게 내가 자꾸 강요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는 보람으로 살아가도록 주께서는 나에게 경려 해 준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의한 핍박은 나는 세상이 핍박했다 하지 말고 내가 나를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하고 있는지 아닌 지를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까 이만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그것이 곧 내가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고 가리는 짓이 되는 겁니다. 복음을 이만큼 전했으니까 이만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그 사고방식이 결국은 주님을 위한 걸까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것일까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거죠. 나는 오래 살아야 돼! 나는 안 아파야 하고 나는 안 죽어야 돼! 나는 힘든 일이 없어야 돼! 왜? 이것은 이유가 없죠. 왜? 나니까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돼? 나는 불편함이 없어야 되고 나는 유쾌해야 되고 행복해야 된다. 남들이 묻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 그 이유를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너는 안 그래? 왜? 나니까 그게 해답이에요.
나는 나니까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아무 이유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복음을 위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안을 다 뜯어보면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그것만 달랑 들어있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환란과 핍박과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너의 생애가 아니고 예수님의 생애에 참여하고 동참하는 그러한 능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 신직수 성도님 계시는데 예를 들어 주님이여! 저에게 주님의 복음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라는 인생을 버리고 신직수 성도님의 인생에 합류하게 하옵소서! 하는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게 우리 힘으로 안 돼요. 왜냐하면 나는 나니까, 나는 나다워야 되니까 나 빼놓고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애쓰는 수고는 고난이 아니고 고생한 거예요. 마음 고생한 거예요. 불안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행복을 향하여 그야말로 아주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 가짜입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세계에 참여하려면 하나만 알면 됩니다. 내가 나답게 나만 챙긴다는 사실이 이게 허구라는 것을 감잡아야 됩니다. 이게 분명히 헛빵이라는 겁니다. 어디에 비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 하고 내가 지금 소망하는 것, 내가 잘되는 것 하고는 분명히 헛바퀴가 도는 거예요. 안 맞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진짜 귀신이 옵니까? 진짜 귀신이 와서 식사를 해서 절 한번 하고 나니까 사과에 이빨 자국 나고 그럽니까? 아니죠. 아무리 절을 해도 사과는 멀쩡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이여!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구원을 주셨죠! 아무리 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없는 귀신이 자꾸 헛바퀴 도는 짓인 거예요. 아무리 그렇게 소원하고 기도해 봤자 모든 만사는 주님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앙탈 부리고 주님께서 은혜를 안 주시면 저는 예배당 유리창 깹니다. 해도 유리창 깨 봤자 주님은 간단해요. 그거 네가 깬 게 아니고 내가 너보고 깨게 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허락한 적도 없고 인정한적도 없고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헛꿈을 꾼거예요.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헛꿈을 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것은 핍박도 아니고 뭐냐 하면 전부 다 이것은 고생하는 겁니다.
무슨 고생?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그런 악바리 같은 그런 고집 때문에 생긴 헛짓이 헛짓이 아니고 그게 마치 목숨을 걸 일인 것처럼 착각에서 온 고생담입니다. 결국은 죽게 되면 자기의 손을 놓게 될 것을 진작 손을 놓지 그 무슨 낙을 보겠다고 결국 죽을 인생을 안 죽을 것처럼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겁니까? 죽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죽이신다고 생각하시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주께서 매일같이 조금씩 죽이시는 거예요. 어쩌면 갑자기 죽을 수도 있지만 죽어가면서 죽음의 흔적을 들어내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주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우리한테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없다는 노래 있잖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물론 그 뒤에 말이 좀 수상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요. 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고의 발상입니다. 발상의 전환이죠.
아무 문제없는데 왜 자꾸 본인이 문제를 유발합니까? 아기가 태어날 때 피부가 참 곱잖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피부가 아주 고와요. 토실토실 그런데 애가 손톱을 길어서 자기의 다리를 긁는다면 자기가 자기의 피부를 긁게 되면 여기에 상처가 붉어져 오죠. 이거 문제 생기잖아요. 본인이 본인을 긁는 거예요. 사람은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면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서 탈출하기 위해서 분투노력할 겁니다. 그런데 억압이 없다면 노력을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래 나한테 문제가 있어! 이 문제를 내가 해결을 하고 말리라!
문제가 있다고 본인도 그렇게 착각해 놓고 문제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니까 문제가 있게 되어 버린 거예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이 문제를 해소해서 문제에서 벗어났다고 신나게 외치고 싶은 희망을 본인이 억지로 문제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드디어 나는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미래의 상황까지 예측을 해서 그 상황을 끼어 맞추기 위해서 부질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가 사도 바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무슨 문제 있습니까?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내게 능력이 없앤다 는 말이거든요. 내게 능력 없앤다는 말은 더 솔직하게 말해서 주여! 저한테 능력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 뜻이다 말이죠. 그런데 교회 와서 능력 주시옵소서! 하는데 받으면 뭐할 건데? 받아서 뭐 할 건데? 문제를 해결하겠다. 무슨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해결합니까? 뭐 문제꺼리가 있어야 문제를 해결하죠. 아, 문제꺼리 있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아프고 뭐 애가 성적이 떨어지고…….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주님의 그 가치보다도 나의 딴 가치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라는 자기의 본색이 들통 난 거예요. 교회에서 철야하면서 교회를 부흥되게 해 달라고 하는데 그게 왜 기도의 제목입니까? 부흥이 안 된다는 거예요. 부흥이 안 된다는 기준을 누가 정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 건진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6장에 분명히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했죠. 자기 백성을 어떻게 한다?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 말아닙니까? 잃어버리지 않죠. 누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죠. 분명히 맞죠?
그러면 우리가 농땡이 부리면 잃어버립니까? 안 잃어버립니까? 농땡이 부려도 안 잃어버리죠. 그러면 열심히 하면 잃어버린다? 안 잃어버린다? 열심히 하나 농땡이 부리나 아무 상관이 없어요. 잃어버리지 않죠. 우리는 자아도취에 빠져요. 마치 내가 주님한테 협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자아도취에 빠진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이럴 것 같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하면 되겠네! 아무 것도 안 해 보세요. 본인이 못 참아요. 뭘 해야 될 것 같아요. 아무 것도 안 하니까 너무 이상해요. 이럴 수는 없어! 아무 것도 안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지금 것 태어나서 무엇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인지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걱정이라도 하고 뭔가 꿈적거리기라도 하고 물론 그게 나중에 말씀이라는 결과가 떨어지겠지만 자기가 자기의 다리를 긁어보는 거예요. 안 긁을 수가 없어요. 뭔가 긁어야 돼요. 이것을 안 긁으면 할 짓이 없어요. 뭔가 긁어야 된다니까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할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본인은 내용만 있고 형식은 없어요. 왜?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지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굉장히 바빠요.
남들은 사도 바울이 어떤 형식을 갖추고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사도 바울을 흉내를 내요. 커닝 하듯이 배겨 쓰는 거예요. 무시로 기도, 나도 무시로 기도해!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복음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능력을 덧입는 거예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굉장히 바쁜데 남들은 너는 왜 그리 바쁘게 일하나? 하는데 본인은 안 바빴는데? 나 아무 것도 안 했는데를 말하면서 열심히 살아 내는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 가는 그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 방법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것도 안한 것이 되면서 남들한테는 전혀 논다는 느낌이 보이지 않으면서 부지런히 설치는 것, 이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갔던 길이에요.
제가 강의를 하면서 어떤 기준점 같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천국에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해요. 저 사람이 지금 당장 주께서 재림하셔서 오셨다 할지라도 같이 주님과 함께 천국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최고지 그 외에 딴 것 있습니까? 그러려면 누구같이 되면 됩니까? 사도 바울 같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교회 몇 개 있었습니까? 없어요. 자기 소유의 교회 없죠? 사도 바울이 부인도 없었는데 자식도 물론 없고 사도 바울의 재산이 얼마죠? 동산이 얼마 이고 부동산은 얼마였습니까? 차는 뭐 타고 다녔죠? 없죠.
그러면 사도 바울의 목표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영 안에서 천국 생활을 시작 하거든요. 사도 바울이 나를 본 받으라 했으니까 그것이 모델이라면 모든 성도들이 교인들이 사도 바울처럼 되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일한다는 거예요. 능력 받아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일하는 모든 것이 그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남 보기에는 이상하던 관계없이 그게 주의 능력의 결과물이고 능력의 솜씨를 보여 준다는 거예요. 어떤 형편에 처하던지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되어 있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쭉 항목이 나오잖아요. 사도 바울이 이것을 한다고 하면 우리도 안 자고 철야해서 기도 하고 매 맞아야 된다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우리에게 없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거짓말 하는 것처럼 여기는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어떤 능력에 휘말려 있는 거예요. 휘말려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동산을 얼마 가지고 있었습니까? 없죠. 그러면 동산은? 현찰은? 없죠. 뭐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고 우리는 우리지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천국에 누가 가느냐, 어떤 내용을 가지고 천국을 가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거든요. 당신 교회에 교인이 몇 명이냐는 이것은 아무 문제꺼리도 안되고 지금 성경으로 돌아가야 돼요.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까? 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안돼요.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답답한 일이 생긴다? 안 생긴다? 생긴다는 거예요. 생기는데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기에 그 능력을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답답한 일을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그 뒤에 보면 더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6장 9절에 보면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부럽냐? 이 말입니다. 이 상태가 부럽냐? 이 말입니다. 아우 부러워 미치겠어! 정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갑니까?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 오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허사로다! 이런 것을 학교 과제로 내겠습니까?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늘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정도로 이것은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문제에요.
제가 강의 처음부터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도 핍박 받는다고 마시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 십자가의 고귀함을 가리고 있다 이 말입니다. 뭔가 일이 잘못되면 깜짝 깜짝 놀라요. 경기 일어나고 이 답답하고 컬컬한 일을 어떻게 하냐? 왜 이렇게 놀랍니까? 그동안 얼마나 십자가를 가렸으면 그런 일을 가지고 놀라겠어요?
주님이 중요해요? 주님이 소중합니까? 내가 소중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돌 맞을지 싶습니다만 가감하게 묻는 겁니다. 눈치 봐서 묻는 거예요. 정답은 알고 있어요. 주님이 소중한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의 정답이고 우리의 실생활의 모든 행위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에서 나오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문제꺼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제꺼리가 없습니다. 그 없음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 바울이 핍박이라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핍박 받은 것을 내가 너희에게 보고 알았거니와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만 보시지 마시고 아까 고린도후서 4장 6장 7절과 연관 시켜 보세요. 사도 바울이 평소의 모든 생활 모습이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 나는 고백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 엉뚱한 곳으로 세고 있어요. 버스를 타야 되는데 엉뚱한 잘못된 버스를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스스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그러한 쪽으로 중간에 노선을 내려야 돼요. 요새는 환승되니까 내려서 또 타면 되지만 지금 빨리 내려야 돼요. 우리가 지금 엉뚱한 곳에 가 있습니다.
주님이 안 보이는 곳, 십자가 안 보이는 곳에 가고 있어요. 십자가 안 보이니까 누가 잘 보이느냐 하면 내가 이만큼 잘나고 인생 잘 살았다는 내 것을 과시하는 쪽으로 나도 이 정도 되는 인간이야 나는 되는 존재야! 그것을 남한테 떠벌이는 그런 확성기처럼 떠벌이는 그런 버스를 타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도 바울은 아스라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저쪽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만날 하는 소리가 핍박받고 있다. 복음을 전하니까 고생을 한다. 본인이 복음을 싫어하면서 무슨 고난을 받았습니까? 자기 혼자 고생을 해 놓고 자기 가치를 지속시키고 연장시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써놓고 말입니다.
제가 노래 중에 특별히 싫어하는 노래가 있어요. 인순이가 불렀던 노래, 거위의 꿈입니다. 싫어요. 거위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발로 물질을 해서 힘들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는데 누가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요? 본인이 힘들어요. 물에 빠지면 되잖아요. 왜 물에 뜨게 하려고 하는데요? 물에 빠지는 것도 주께서 능력을 줘야 빠진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물에 빠지는 것이 가능한 겁니다. 내 식으로 만약에 물에 빠진다면 우리는 빠지면서 주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보고 있습니까? 제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는 것 보고 계십니까? 지금 cctv 돌아가고 있죠.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객기가 이런 객기가 다 있어요? 돈이 없어서 헌금을 10원을 하는데 10원밖에 없으면 10원 내면 되는데 주께서 보고 계십니까? 과부의 두 렙돈을 아끼지 않고 다 귀하게 보시는 주님이여! 동전밖에 낼 것이 없습니다. 뭐 어떻게 하라고요? 그게 잘했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남의 형식을 흉내 냅니까? 내용이 없으니까 형식이라도 흉내 내면서 성경을 모사, 독살을 시도 하는 이 짓, 그 사도 바울이 속해 있던 그 세상과 지금 세상과 똑같은 세상입니다.
남의 가짜를 보기 전에 내속의 가짜를 털어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돼요. 내가 바로 주님을 가리는 주님의 십자가 귀하다 해 놓고 사실은 나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기는 그런 심성으로 지금껏 버티고 살아오고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통곡해야 됩니다. 그러면 핍박이 이게 아니라면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 바로 복음에 의한 핍박이에요. 복음 안에 내장되어 있는 그것이 복음을 전하면서 속에 있는 내장이 밖으로 쏟아지면서 나올 때 그것이 핍박이 되는 겁니다.
나의 가치를 부수고 나의 자아를 찢어버리고 하는 그 능력이 오게 되면 그런 과정이 유출되게 되면 그게 바로 핍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성도는 24시간 핍박받는 삶입니다. 왜? 세상은 거짓이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든 전하지 않던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복음의 결과물이고 복음전파중입니다. 이런 것이 있죠. 위치 추적기가 안에 몰래 달려 있으면 우리는 위치 추적기를 인정하지 않지만 위치 추적기를 단 사람 쪽에서는 신호가 삑삑삑 작동하겠죠. 시그널 신호가 작동하잖아요. 성도가 이런 거예요. 성도가 본인이 무엇을 생각하던간에 우리 안에는 복음의 신호가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할 때는 여러분의 중심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처럼 돼야 구원을 받으니까요.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성령이 있잖아요. 성령이 늘 작용하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을 할 때 자기 사견으로 이야기하는 겁니까? 성령의 외침에 따라서 이야기하는 겁니까? 성령의 외침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마태복음 10장에 나오잖아요. 내가 너희가 핍박받을 때 네가 말하지 않고 네 속에 있는 성령이 이야기를 한다는 그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사도 바울 에게 그리고 모든 성도에게 그런 환경을 주신 거예요.
아예 할 것이 없다니까요. 걱정들 하지 마세요. 할 게 없어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요. 뒤집어 자도 째깍째깍 성령께서 지금 주무시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복음이 있는 이상은 핍박은 자동적입니다. 왜? 세상은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복음의 경계선에서 핍박이라는 것이 늘 유출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핍박 받을 짓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프니까 핍박이다. 아프든 안 아프던 핍박이에요. 목욕탕에 가서 아이고 시원하다! 그것도 핍박이에요. 꼭 남한테 욕을 먹어야 핍박인줄 알아요? 칭찬받는 것도 핍박입니다. 아이고, 성도님 기도도 잘하고!! 핍박하지 마!! 그러면 진짜 기도 잘하는 줄 착각하잖아요. 그게 자기 에게 얼마나 하나의 암세포로 작용하겠습니까? 그래 나는 기도를 잘해! 나는 기도 잘하는 소녀, 이게 빼려면 얼마나 힘들게 수술해야 돼요.
아이고, 참 집사님은 천사 같습니다. 교회만 가면 핍박, 핍박,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헌금하면서 돈을 도로 빼내는 얼마나 나쁜 짓을 해야 천사가 나타나는 그 핍박에 빠지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있는 것 자체가 복음 전파에요. 내 손수건을 수리수리 마수리 이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자기 손수건을 자기가 가져와 덮으니까 그냥 병이 나은 거예요. 졸다가 3층에서 떨어졌다 이 말이에요. 강의를 오래한 모양입니다. 강의를 오래한 것도 자기 뜻이 아니고 졸다가 3층에서 떨어졌고 안수하니까 나았고 또 수건가지고 하니까 나았고 그 다음에 수건으로 해 봤자 소용없어요.
십자가만 되풀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도 바울은 무능력자입니다. 바도 바울의 무능력이 그게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이고 거기서 사도 바울이 되게 바쁘네! 사도 바울이 바쁜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을 바쁘게 굴리시는 겁니다. 누가? 성령 안에서 주님이 사도 바울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되면 우리도 그렇게 되면 되잖아요. 어떻게? 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고백을 털어내 놓게 하는 겁니다.
아이고, 나 이번에 성경 공부를 참석하려고 하는데 바쁜 일이 있어서 참석 못했습니다. 하는데 그러면 일이 없었을 때 참석했다면 자기가 참석하면서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겠습니까? 그것을 빼내야 될 또 암세포입니다. 못 오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참석하실 때는 가게 하신거예요. 교인들이 교회에 빠지는 것도 주의 뜻이고 오게 하시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연연하면 안돼요.
다만 오게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교회 참석함에 대해서 존중해야 됩니다. 주께서 오게 하심의 그 뜻을 존중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 가지가 있어요. 사랑은 육에서 나온 사랑이 있고 성령에서 나온 사랑이 있어요. 육에서 나온 사랑은 어떻게 구분을 하느냐 하면 이게 형식으로 가능합니다. 이게 육적이에요. 어머니의 사랑은 아름다워라! 제가 어떤 분에게 시집을 하나 받았는데 시간이 남아서 이 동네 놀이터에 앉아서 읽어봤어요. 어머니라는 시가 있어요. 모성, 어머니의 노래, 밤낮 불러보는 이름이여! 불러봐도 다시 돌아올 이름이여! 이게 바로 악마적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마적인 시집을 내 줘야 다른 사람이 동감을 해요. 왜? 전부 다 거짓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세계의 특징은 뭐냐? 가능성 하나 보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너도 기도 30분에 하면 나도 30분에 할 수 있어! 이게 바로 거짓된 거예요. 인간의 기도는 육에서 나온 기도는 항상 가능성을 두고 하기 때문에 거짓된 기도입니다. 주여! 주여! 쭉 해 놓고 뒤에 예수님의 이름 아멘 이거 누가 못해요?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하느냐 하면 무시로 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하거든요.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되면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 기도는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안다? 모른다? 모른다 말이죠.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동안 기도한 것은 전부 다 기도인지 뭔지도 모르고 한 거예요. 그래 놓고 기도했다고 우기기요. 성령이 기도한다는 것은 전제가 있어요. 육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네가 할 수 없는 기도를 내가 한다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네가 할 수 없는 불가능을 주께서 기도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서? 우리의 헛된 기도와 더불어서 그래서 참된 기도는 자신의 헛됨이 계속 발산되는 거예요.
기도해도 응답 없다가 헛됨이 아니고 내가 기도하면서 기도 하는 자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는 그 자체가 헛됨인 것을, 기도해도 응답도 없고! 이래서 헛된 것이 아니고 기도 하는 내 모습을 내가 지금 관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헛된 기도라니까요. 오늘 기도빨 잘 드는 것 봐라. 피곤하지도 않네! 오늘 두 시간 신기록 세워야겠다! 이것을 측정을 해요. 심지어 기도하면서 기도를 3분 동안 하게 되면 7시 10분, 참 7시 10분이면 쿠쿠 예약을 눌러야 되잖아! 지금 미리 계산을 다 하고 기도를 해요. 이 기도하고 음식 쓰레기통 빨리 가져오고 이렇게 계산을 다하고 한다니까요. 기도하면서 온갖 생각을 다해요. 기도할 때 7시 20분까지만 하고 20분 다음에 뉴스보고 드라마 재밌는 것 없고 내일은 승리 끝나버렸고 그것까지 계산을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그것도 안 하면 마음이 찝찝합디다. 누가 뭐라 했어요? 그래 하세요.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 주님입니다. 기도 하면서 온갖 신경을 쓰고 기도 하는 자기 모습에 스스로 도취 돼서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것 까지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의 응답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기도하게 하신 속에서 내가 쉴 새 없이 주님의 고귀함을 가로막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왜 자꾸 죄인, 죄인 하느냐 하면 사람이 죄인이 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 때 그것은 돈을 주고 살수 없는 천국의 복을 받고 있는 겁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이 추악하고 악랄한 이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또다시 확인하고 감격하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에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무조건 죄인 되었을 때에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알 때에 내가 죄인주제에 뭘 더 달라 짜증내고 불평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바로 복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죄인 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주께서 복음을 전파시키십니다. 이것을 누가 아느냐? 사도 바울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세상은 거짓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전파되면 그것은 무조건 핍박입니다. 무조건 핍박인데 세상이 나를 핍박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왜냐? 내 자신이 주님을 핍박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해 놓고 내가 전도 한 것 아니고 헌금 해 놓고 내가 헌금한 것 아니고 기도 해 놓고 내가 기도한 것이 아니고 왜? 나는 나쁜 짓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주님의 뜻대로 돌아갑니다. 따지고 보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왜 문제가 어려우냐 하면 내가 십자가를 가로막으니까 문제입니다. 주님, 저 어때요? 저 착하죠? 저 훌륭하죠? 자꾸 주님 앞에 얼쩡거리는 거예요. 스크린을 가로막는 것이 문제이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받은 핍박은 어떤 차원인가? 오늘 디모데후서 3장 11절에 보면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이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는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라고 되어 있죠. 이 세 가지 진입은 사도행전 14장에 나옵니다. 14장은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그 두 사람 바나바하고 둘이 짝을 지어서 전도한다고 성령께서 시켜서 가까운 동네를 한 바퀴 돈 겁니다.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안디옥에서 나와서 섬을 돌아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돌고 다시 온 겁니다. 그런 전도했던 환경입니다. 그러면 우리 보기에는 그 가까운 이웃 동네 한 바퀴 바람 쐬러 갔지 이게 무슨 전도냐? 물론 사도 바울은 바람 쐐러 갔어요. 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릅니다. 예상도 안 해요. 그냥 가는대로 가는 거예요. 가라한 지시도 있었지만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것도 다 뒤 돌아 보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처럼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편해요. 책임질게 없어요? 있어요? 책임질게 없는 이유가 책임질게 너무 많아서 없어요. 뭐 하나 책임지라면 책임 질수가 없어요. 책임 지라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엄청나요. 그래서 10분 쉬시고 사도행전 13장에 무슨 핍박가운데 어떤 핍박이 나왔는지 뭘 했는지 봅시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60513b (핍박)―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했다. 왜 했느냐? 그것은 사도 바울한테 물어보면 안 되고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왜 했느냐는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줬던 혜택을 이방인들에게도 주게 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 주느냐? 안 주면 그만 이지 왜 주느냐? 그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가면서 십자가의 진수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찾아왔던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가면서 여기서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숨겨진 나온 의미가 뭐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것이면 그러면 유대인들은 뭐라 생각했느냐 하면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할 때 박이 달려 있으면 밑에 가만히 있으면 떨어집니까? 뭔가 때려야 박이 열리면서 청군 승리하면서 나오잖아요. “의”라는 박을 유대인들은 이 의를 주신 것이 율법이니까 율법을 그냥 가지면 안 되겠죠. 율법을 실천에 옮깁니다. 실천을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행위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은 위에서 온 것이고 실천은 어디서 온 거예요?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서 실천이 일어나서 그 두 개를 결합해서 의를 이루는 겁니다.
의를 이루는데 의를 왜 이루느냐? 천국이 무슨 나라냐 하면 의의 나라입니다. 죄인은 들어가지 못하는 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의를 누적을 많이 시키면 의를 많이 하게 되면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이 되고 만약에 죄를 많이 지으면 이것은 천국과 점점 더 멀어지는 그런 인식이 있겠죠.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런 인식이 유대인의 인식인데 이런 인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왜 있느냐 하면 우리는 복음을 배웠다고 어설프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외치지만 우리 속의 양심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죠. 좀 대충 알아서 죄를 지어라! 이 쯤 타이밍에서 선을 행해야지! 그리고 좀 양심이 있으면 네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값을 하고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 값을 해야지! 그래야 성도답지 하고 누가 누구한테 설득을 하고 속삭이냐 하면 내가 내 자신한테 설득을 합니다.
가지고 있는 재주 한번 피어봐라 갖고 있는 실천력 능력을 보여 봐라! 그냥 머리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줘 봐라! 그러면 행동으로 보이기 위한 어떤 실천을 하잖아요. 그러면 행동을 해 놓고 끝납니까? 이제는 어떻게 하느냐? 이제는 채점을 합니다. 채점을 하면서 이것은 이웃 사랑에 해당됨, 이것은 아님, 자기가 문제를 내고 자기가 채점하고 다 해요. 그렇게 혼자 노는 재미가 있어요.
그게 유대인들이 했고 유대인 가운데도 누가 혼자 노는 재미를 누가 많이 했느냐? 별 직업 없이 그냥 말씀만 들여 다 보고 사는 사람들이 곧잘 해요. 별 직업이 없으니까 잔업이 없는 사람, 야간 근무가 없는 사람이 앉아서 만날 성경 보면서 어디 까지 왔나 그것만 하는 거예요. 그것을 혼자하면서 의심스러울까 싶어서 교회에 나와서 구역예배하면서 한번 또 확인하고 이게 바로 유대인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가 하는 이 방법에 대해서 하자가 있다고 생각할까요? 없다고 생각할까요? 없다고 생각 했죠. 없다고 생각할 때 이게 바로 거짓이 되는 겁니다. 거짓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로마서 10장에 보면 자기 의라고 합니다.
네가 생각하는 율법을 지켜서 생기는 그 의가 어디로 계속해서 누적이 되고 쌓이는 의냐 이 말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0절에 보면 지금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면서 했던 사도 바울이 일하게 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했다는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내용을 증거했는가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죠.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 바울이 지금 유대인들이 행했던 것들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멍에로 봤어요. 목에 씌우는 멍에인데 11절에 보면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려면 반드시 멍에지고 있는 그 거짓된 그 항상 뒷배경으로 반드시 깔려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찾아가야 되는 겁니까? 라고 질문 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유대인같은 양심을 타고 났어요.
뭐 율법대로 사는 저 유대인을 보라! 하면서 멀리서 찾지 마세요. 우리 자신에게서 찾으면 돼요. 우리 자신에게 나쁜 짓 해 놓고 또 착한 일 해 놓고 얼마나 의시대고 얼마나 좌절하는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실천해서 그것이 내가 이루었습니다. 하고 큰소리 칠 수 있는 그런 의를 수집하고 생산하는데 얼마나 몰두하고 그것이 우리의 자존심으로 구축되어 있는지를 우리 자신이 그것을 속일수가 없습니다.
보람찬 하루하루의 삶이 뭐냐 하면 오늘도 죄를 적게 지었고 죄를 지을 때 마다 그것을 피해 버렸고 사단이 죄를 지으라고 부추겨도 장렬하게 희생하면서 안 지으면서 오는 승리감,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지 않습니까? 과제를 주고 과제를 풀었을 때 오는 자아도취 이런 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유대인을 통해서 이방인을 안다고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방인이라는 것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 유대인은 율법을 줬죠.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방인한테는 양심을 줬다 했습니다. 양심이나 율법이나 전부 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면 주여! 저를 제발 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하나님이여! 제발 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이 악한 세대에서 독하게 잘못 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그야말로 분투노력하면서 사투를 벌이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더 이상 저를 자꾸 떠 밀지 마세요. 제가 힘듭니다. 더는 못합니다. 정말 여기서는 더는 바르게 못 삽니다. 지금 이정도 버티는 것도 헉헉 거립니다. 주일에 한번 씩 교회에 가죠. 껌벅 졸면서 설교도 듣고 하는 것,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 많이 해 본 것 아닙니까?
힘들죠. 교회에 오게 되면 머리가 빠개진다는 사람도 있어요. 얼마나 본인의 생리와 안 맞았으면 본인의 자연스러운 생리와 얼마나 충돌이 되었으면 그 얼마나 용을 쓰면서 억지를 했으면 머리가 빠개지겠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평소에 하는 행위와 교회에서 하는 행위와 교회에서 듣는 이야기가 얼마나 차이가 났으면 그것을 듣고 해석하고 자기한테 적용하는 그 작업이 사실은 평소에 안 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폭발직전입니다. 참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악마가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편하게 아멘하고 받아드린다는 겁니다. 네가 인기가 있고 세상 모든 것을 점령할 수 있다. 이런 쪽으로 희망을 갖게 하고 비전을 갖게 하고 꿈을 갖게 하는 것은 전혀 머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도 힘들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서 억지춘향으로 신자 흉내를 내는 것은 더 힘들어요. 안 믿으면 되는데 또 안 믿으면 후한이 두렵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율법 플러스, 실천력, 실천력이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실제로 말씀을 행동으로 도입해서 자기 의를 세우는 이것이 분명히 옳지 않다고 했죠. 그러면 이방인들은 율법 자리에 뭐가 들어간다? 양심의 소리가 들어가요. 물론 양심이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초자아의 음성이라 하는데 정신분석 론에서 아버지와 부모님과 같이 자기 보다 먼저 선지하는 자들이 가르치는 것이 포괄적으로 하나의 윤리 도덕으로 자리를 잡아서 우리한테 계속해서 벌칙을 내리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안 하면 너는 벌 받는 다. 벌이 뭔데요? 스스로 이야기합니다.
벌이 뭐냐, 벌이라는 것은 어릴 때 네가 가지고 있는 불쾌감을 기억하고 있지? 그 불쾌감이 이런 범죄자라는 불쾌감이 되풀이 나온다. 그러면 그거 싫어요. 그러면 유쾌하게 하라! 유쾌하게 하려면 내 말을 지켜라! 이게 양심으로 계속해서 우리한테 알려 주는 겁니다. 양심이라 게 깡패라도 있어요. 도둑놈이고 누구에게나 양심이라는 게 다 있어요. 이것을 저는 4자로 나름양심이라 합니다. 북한에 김정은도 있습니다.
율법+실천력, 이것이 유대인들이 잘못 됐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동의하시죠? 동의 한다고 치고 질문 드리겠습니다. 율법자리에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여기에 넣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이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아요? 옳지 않죠. 옳지 않으면 사도의 지시와 명령은 왜 했습니까?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을 취하라는 복음의 갑주로 무장하라는 이야기를 왜 했습니까? 육을 위해 살지 말고 영을 위해 살아라! 이런 이야기를 왜 했습니까? 형제를 돌보라, 서로 동정하는 자가 돼라, 무례히 행치 말고 사랑은 온유하고 이런 지시와 명령을 왜 했습니까? 실천해서 하나님의 자기 의가 아니라면 그러면 이것은 왜 들어갔죠? 플러스가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이죠.
우리의 실천력은 사도의 말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실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온 거 아니에요? 전에 성령을 못 받았을 때는 우리의 죄 때문에 율법을 못 지켰다면 이제는 성령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실천력을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 받아서 실천력 강화돼서 이미 확보된 능력 가지고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지키면 나오는 게 뭘까요? 지키면 의가 나올까요? 자기 의가 나올까요? 둘 중에 어떤 겁니까? 자기 의가 나오죠. 그런데 이 자기의가 아닌 것이 뭐냐 하면 이게 누구의 의냐 하면 예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것은 자기 의로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의를 가지고 구원받아요. 그러면 뭐는 삭제 돼야 됩니까? 자기 의는 삭제되어야 되겠죠. 삭제를 하려면 생겨야 삭제될 것이 아닙니까? 자기 의가 있어줘야 삭제가 되잖아요. 그런 자기 의가 생겨나려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주님의 지시와 명령에 대해서 그것을 듣고 가만히 있을 위인이 없죠. 나서서 주의 명령과 지시니까 성령을 받았으니까 성령의 능력 받은 티를 내보자 해서 성경 말씀을 보고 큐티하고 하루 종일 살아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4장 말씀을 보고 난 뒤에 갑자기 누가 띵동 와서 전에 아주머니 몰래 장독의 된장을 퍼 갔는데 용서해 주세요! 라고 왔을 때 그렇다 하나님께서 큐티를 했더니 네가 큐티를 실천하는지 안 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된장 훔쳐간 아주머니를 보냈구나! 그러면 우리는 주께서 나를 사랑한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네가 몇 푼 되지 않는 것을 네가 큰 것을 용서받아 놓고 몇 푼 되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악한 놈아, 들은게 있어서 이것은 아주 배짱 좋게 용서해야 돼! 라고 용서를 합니다. 아이고 뭐 이웃간에 제가 장을 잘 담그니까 탐이 날 수가 있죠. 그런데 얼마나 가져 갔습니까? 이게 묻는게 아닌데 지난 2년간 계속 퍼 갔습니다. 참을 수 없다! 이상하더라! 이상해! 참을 수 없어! 그럴 때 우리가 뭐라 합니까? 베드로처럼 주여! 몇 번을 용서하야 됩니까?
인간에게는 사도의 지시와 명령이 오기 전에 우리 성도에게 먼저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귀함을 가려버리는 나의 고귀함으로 자꾸 얼쩡거리면서 내 가치로 가로막는 죄인의 모습으로 들통 나는 겁니다. 이 죄인이라 할 때는 죄를 더 져서 죄인이 아니고 무슨 말씀이 와도 자기 의로 유발, 생산해 내는 그러한 매카니즘이 작용하는 그 죄를 말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태생이 유대인이라는 거예요. 이방인도 마찬가지이고 태생이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절대로 포기를 못하는 이것은 죽을 때 까지 육이 있는 이상 계속 가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성령이 임해서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 본인은 아파야 됩니까? 안 아파야 됩니까? 무슨 짓을 해서 아픕니까? 사실은 안 아파야 된다고 생각 되는데 아프죠. 아플 때 그냥 그래 아프다고 참았어요? 아픈 것을 가지고 기도했습니까? 그것도 한번 했습니까?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아픈 것을 가지고 악마가 심어준 가시 두뇌에 뭔가 총알의 파편이 박혀서 만지면 어지럽고 낮에도 어지럽고 지금 아버지죽인 원수는 복수를 해야 되는데 자기는 태국에 가서 총알을 맞아서 미스터 블랙이라고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급할 때 손발이 중풍처럼 떨리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망가진 거예요. 십자가 백날해도 그 십자가를 듣는 순간 그것이 나에게는 뭐로 변합니까? 나는 십자가를 아는 괜찮은 성도라는 자기의가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방인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의 행함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했죠. 나는 매일 사라지고 매일 나타난다. 나는 매일죽고 매일 산다. 죽음과 삶이 계속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주님이 생각하는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고 날마다 이것이 끊어진다. 이것이 느껴진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나인데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내가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고 여기는 그 나를 주님의 나라고 자꾸 엮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설명 해 드릴 겁니다. 이제부터 몇 분 동안 어려울 건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감내해야 되는 겁니다. 정신과 물질의 중계는 자아입니다. 자아에서 중계가 됩니다. 인간의 물질이라 하는 것은 정신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닌 것을 정신이라 해요. 정신적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비가시적인 것이라 하잖아요. 물질이라 하는 것은 정신 빼놓고 다 물질이죠. 그러니 말 하나 마나에요. 물질은 뭐냐? 정신 빼놓고 정신은 뭐냐? 물질 빼놓고 슈퍼는 어디 있느냐? 미장원 앞에, 미장원만은 어디 있느냐? 수퍼 앞에, 이것은 말을 하나 마나에요. 어떤 실체가 전혀 들어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병원에 가면 CT 촬영하고 엑스레이 촬영을 하죠. 그런데 의사들이 친절을 베푼다고 베푸는 것인지 약을 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 환자분 보세요. 사진을 한번 보세요. 지금 당신의 간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썩었죠. 그런데 치료하시면 낫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 사진을 아무리 봐도 어느 대목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일반인들은 몰라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정상적인 사진이라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인간들이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우리는 부딪쳐서 결과로 알지만 사전에는 미리 알 수가 없어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거든요. 주님 저기 있다 찾아가자!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주께서 이렇게 살게 하셨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또는 소급해서 우리가 아는 겁니다. 원판이 뭔지 모릅니다. 원판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유사 원판을 내가 만들고 그 원판에 스스로 차이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원판 따로 있고 차이 따로 있는데 내 자신을 스스로 경려하고 자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자기 에게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판이라는 것은 일단 짐작하고 그것과 차이 나는 것을 띄워서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자아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물질세계에서 예수님이 관여를 해서 물질세계를 만드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에서 주님의 은혜로 물질로 해와 달과 별과 우리의 몸과 신체를 만들 되 그 만들게 되면 거기서 유사 원판과 차이를 가지고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해서 분투노력하는 자아가 등장하도록 주께서 매일같이 유발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는 어디 있느냐? 진짜 자아라 하는 것은 복음에서 이런 작업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연결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게 되죠. 만들어 내게 되면 주와 연결된 자아와 내가 생각한 자아의 차이점이 뭐냐? 주와 연결된 자아가 되면 우리는 이 자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님의 의인됨을 드러내는 죄인으로 이렇게 자기를 느끼게 돼요. 그런데 내가 만든 자아는 나름대로 분투노력했기 때문에 결국은 뭐냐 바뀌느냐 하면 자기 의로 귀속 됩니다.
자기 의를 담는 곳이 어디냐? 자아에다가 자기 의를 담아버려요. 그래서 자기 속을 끄집어 보면 늘 착해, 늘 신앙생활 잘하고 훌륭하고 그래요. 따라서 이런 내가 이 땅을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주께서 나에 대해서 조치를 잘못 내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나같이 착하고 바르게 살고 말씀대로 사는데 왜 이렇게 이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이것은 주께서 뭔가 조치를 잘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보다 못난 사람이 부자 되고 재벌되는데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앞 일을 미리 예상하면 캄캄하기 짝이 없죠.
이러다가 굶어죽지 않으냐? 굶어 죽어봤자, 거지 나사로한테 지지요. 거지나사로는 아프면서 굶어 죽었죠. 그러면 우리도 아프고 굶어죽으면 되느냐? 그것도 안 돼요. 거지는 아프고 죽으면서 앞집에 부잣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프고 굶어 죽으면서 슥 기어가서 부자 집 앞에 죽으면 되느냐? 그것도 안 돼요. 거지 나사로는 아프고 굶어죽고 부자 집 앞에서 개들이 와서 핥았거든요. 그러면 개보고 여기 여기 와서 핥어대면 그러면 우리는 괜찮은 자가 됩니까? 그게 바로 유사, 모사, 거짓으로 꾸며내는 자아를 우리는 날마다 생산하면서 주님의 복음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을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게 성도에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그것을 몰라요. 성령을 안 받으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못난 맛에 살아갑니다. 아까 빵을 드셨죠. 못난 나에게 빵을 주셨잖아요. 회비 냈다고 주고 안 주고 하는 그런 것 없어요. 세상이 이렇게 인생이 가벼울 수가 있습니까?
너무 가벼운 거예요. 못난 재미로 사는 겁니다. 엄마 성적 또 내려갔어! 괜찮아! 괜찮아! 옛날 노래에 잘했군. 잘했어! 하춘하 노래가 있잖아요. 영감, 왜 불러! 영감 불러 이야기해 보니까 전부 다 하는 짓꺼리가 희한 한 짓거리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잔소리를 해야 되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뭡니까? 잘했군 잘했어! 여보! 왜 불러! 차타고 가다가 박았어! 잘했군! 잘했어! 벌금 얼마 나왔어? 50만원 나왔어! 잘했군 잘했어! 다친데 없어? 여기 금 갔어! 잘했군 잘했어!
왜 그러냐? 죄인은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 주소서 하는 권리가 없어요. 그것을 권리의 박탈이라 합니다. 죄인은 이미 요구할 수권리가 박탈됐어요. 요구할 수 없는 권리가 박탈된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기도를 안 함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함으로서 알 수가 있어요. 제가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기도를 안 하면 되겠네! 만날 기도를 안한다고 삐져요. 기도를 해 보게 되면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의 내용을 무엇을 채우겠어요? 그동안 꼬깃 꼬깃 숨겨놓은 자기의 한이 나옵니다.
그 한이 누구에 대한 한이냐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그 기도를 통해서 다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온유하신 하나님, 이 멘트를 딱 할 때부터 이제는 당신 나한테 당해 보세요. 이런 뜻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 정말 말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 같으면 뒷말은 하지 말아야 돼요. 왜? 전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아서 잘 처리 해 준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전능함으로 끝나야 돼요. 예를 들어서 훌륭하신 아버지 알아서 잘 일해 주시고 모든 것을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가 거기까지만! 그게 진정이라면 거기까지만! 이렇게 아버지가 알아줬으니까 유산을 크게 달라는 그런 소리도 하지 마!
잠시 하나님! 교회 터는 어떻게? 성전의 터는 어떻게 해 주시고, 아파트 평수는 좀 넓혀 주시고 이렇게 나온다는 말은 앞뒤가 배신하는 겁니다. 그것은 거짓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를 안 하면 죄인의 한은 싸여 있죠.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터져버려요. 결국은 하기 마련입니다. 안할 수가 없어요. 이런 입장에서 주님의 지시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전도를 하게 되면 결국은 누구를 만나겠습니까? 세상 전체가 유대교이고 유대교라는 말은 세상 전체가 자기 의로움으로 무장한 그 입장에 있다 이 말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먼저 씨를 뿌려 놓고 열매 찾아 가는 거예요. 주께서 먼저 율법이나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뿌려놓고 그 양심과 뿌려놓은 그거에 대해서 마귀에 속한 너희들의 마음이 어떠한 열매, 어떠한 가라지를 내 놓는지를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다음 차례로 사도 바울을 전도하는 모습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이 복음으로 실시가 되어 있음을 확인차 가는 거예요. 구원 받은 사람은 없어요. 없지만 복음에 의해서 스스로 자라나는 구원받는 자가 있을 거예요. 그것을 구경하러 사도 바울이 갑니다. 전도여행은 사람 꼬이려 어디 보험회사 영업사원 한 구찌 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회원 모집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일은 주께서 하시고 참여하지 않는 자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동하지 않은 자가 추수에 참여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가는 거예요. 그런 전도 우리도 하면 되잖아요. 빈 깡통 들고 아무 것도 안 하고 덜렁덜렁 가는 거예요. 어떤 의도 없이 또는 몇 명 꼬여 예수 믿게 해 볼까 하는 그런 기획 없이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러면 선교사 가는 사람가운데 그렇게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습니다. 내가 선교해서 선교헌금 얼마나 확장했는지 미리 계산해서 자기 돈 받은 것하고 몇 명 꼬여서 학교 짓고 병원 짓고 사진 찍고 돈이 규정에 맞는지 늘 체크하고 그런 것을 신경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의, 자기의 능력, 자기가 주의 종으로서 목회자로서 주 앞에 인정받았다는 대외적으로 떠벌리고 알리는 그런 노림수를 갖지 않고 선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뭔데 그렇게 단정하느냐? 선교지가 바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입니다. 어디 간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평소에 선교를 안 했기 때문에 남들이 안했다고 욕할까 싶어서 선교하는 티를 내러 가는 겁니다. 그러면 멀리 가는 사람 없습니까? 가요. 캄보디아 가자. 가게 되면 한국에서 캄보디아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캄보디아가 내가 원래 있던 자리라고 생각하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캄보디아 사람으로서 캄보디아에 선교한 것이 되기 때문에 선교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죠. 바다 건너 선교가 안 되죠. 애초부터 논리상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자꾸 한국에서 왔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업적을 자꾸 알리려는 거다 이 말이죠.
캄보디아 가면 캄보디아 사람이 돼야 되고 파키스탄에 가면 파키스탄 사람이 돼 버려야 돼요. 자꾸 한국 와서 돈 찾아 가지 말고 그 나라 사람이 되면 돼요. 그러면 목사님, 저도 선교하겠습니다. 하고 가는 사람이 꼭 잘 사는 나라, 복지시설 잘 되어 있는 노르웨이, 애 공부 잘 시킬 수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로 갑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장소가 그게 바로 주께서 나를 통해서 선교하는 장소에요. 여기에 내 목숨을 묻겠습니다. 하는 그 장소가 그게 선교지에요.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라고 하는 것은 이게 판이 달라요. 사도는 터키에서 안 하느냐? 사도는 사도 거든요. 이런 것이 다른 데 아까 엑스레이 이야기해 봅시다. 엑스레이 폐 사진이 두 개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똑같아요. 보세요. 환장의 이 대목에 문제있죠? 보이죠? 이게 약 먹고 호전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봐도 몰라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의사는 원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판은 뭐냐? 사도바울의 판이 이렇게 있다면 사도 바울의 원판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도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원판은 그냥 얼룩만 있어요. 사도 바울은 얼룩에 대해서 원판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해석을 하는 겁니다. 무슨 해석? 현재 처해 있는 여러분의 상황이 바로 복음대로 말씀대로 되어진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썼던 그 상황입니다. 라는 것을 해석을 해 주면 되는 겁니다.
해석할 때 그 끝은 뭡니까? 모든 것이 복음대로 하자 없이 된 겁니다. 라고 해석해 주는 겁니다. 그런 예를 고린도후서 1장 19절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돼요. 아니요가 없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잘되고 있어요. 지금 일이 아주 잘되고 있다 말이죠.
그것에 대한 더 정확한 것은 2장에 나와요.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지금 다른 말로 한 거예요. 똑같은 말로 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악취로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향수로 보는 거예요. 아, 냄새 좋다! 이거 아카시아 냄새 정말 멋지다! 이런 사람이 있고 어디서 똥 냄새를 피우나! 이런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했어요? 똑같은 말로 했어요.
17절에 보면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현재 있는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서 해석을 해 버린 거예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 주님 중심으로 하는 것을 주님이 했어요? 사도가 했어요? 사도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홀로 했어요. 사도는 뭘 합니까? 뒤 따라 가서 그냥 행색만 할 뿐입니다. 이것도 주께서 하신 겁니다. 저것도 주님이 하신겁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아 정말 이것은 오랜만에 라일락 향수 최고의 향수입니다. 라고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솜씨의 입니까? 그것은 사도의 솜씨가 아니고 주께서 이미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여러분들 다 믿습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선교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은 세상을 해석하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은 판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믿어진다면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은 누가 꼬였다? 안 꼬셨다? 사도가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심지어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전도는 친히 누가 하십니까? 전도든 선교든 누가 하세요? 예수님이 알아서 해요. 추수는 누가 합니까? 주님이 해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뒤따라가면서 우리는 추수에 참여하는 자가 될 뿐이에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은 해석은 성경을 통해서 한다고 하죠. 이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성령으로 해석하세요. 어떻게? 확인만 하시고 해석만 하세요. 기도는 해야죠? 기도는 주님이 알아서 하고요. 전도는? 전도는 주님이 알아서 하고요. 헌금은? 헌금은 주님이 알아서 해요. 성경말씀은? 그것도 주님이 알아서 해요. 우리는 알아서 한 결과물로서 해석만 할 뿐이에요.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주께서 그렇게 솜씨를 부리신 겁니다.
추석에 송편을 만든다고 하죠. 송편을 할 때 남자들이 어설프게 1년에 한번 해서 잘 안돼요. 그냥 잘하는 사람, 명장은 다 잘 하거든요. 송편을 만들어 찝니다. 솔잎 넣어서 찌어서 끄집어내면 만들 때 힘들지만 먹으면 찰 져서 윤기나고 맛있죠. 이것은 누가 만들었어? 이렇게 하죠. 송편 만들 때는 우리가 가능성이 있어요. 딸 애가 이것은 내가 만들었어! 이것은 엄마가 만든 것, 이것은 할머니가 만든 것 다 표가 나잖아요. 그러면 선교는 누가 만들었어요? 김 권사가 만든 것? 이것은 이집사가 선교한 사람, 이게 드러납니까? 안 드러납니까? 전혀 드러나지 않아요.
전부 다 누가 하신 겁니까? 주님이 하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누가 한 겁니까? 주님이 하신 거죠. 우리 교회 목사가 전도한 게 아니죠. 주님이 하신 거죠. 목사는 다만 복음으로 해석만 할 뿐이죠. 여러분도 그렇게 하세요. 안 믿는 가정을 위해서 믿더라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되 여러분들은 해석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석하는 이것을 해석을 할 때 자연적으로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핍박을 느끼게 되죠.
핍박이란 사랑이 왔을 때 진리죠. 사랑이 왔을 때 주변에 생기는 것이 핍박입니다. 사랑이 찾아와서 생기는 거예요.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 필연적으로 사랑이 등장했을 때야 저주가 성립이 돼요. 안타까운 것은 코앞에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들어오지 않을 때 제일 안타까워요.
흔히 유행가 가사에도 그런 것이 있지만 세속적인 것에 이런 것이 있죠. 우리 이번에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합니다. 연예인들이 그런 말을 했죠.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서 친구로 살기로 했습니다. 진정한 저주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을 나에 대한 미움으로 간주해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립니다. 그게 바로 저주가 저주답게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트에요. 사랑은 사랑만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저주와 한 커플이 되어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 저주가 저주 값을 해요. 이게 미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을 하면서 뭐을 전했느냐 하면 전도를 누가 하신다?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알아서 전도를 하신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거기에 왜 왔습니까? 주께서 가라고 했죠. 왜 가라 했습니까? 유대인들만 있어 안 믿는 성도가 없어요. 없는데 세상에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믿는 것이 사도 바울이 본인도 놀라울 지경이에요. 모든 사람은 율법적이에요. 모든 사람은 양심적이고 어떻게 자기 의를 자기가 포기를 해요. 미쳤어요? 그것을 왜 포기 해요. 사는 보람이 뭡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건데요.
전부 다 자기가 잘난 사람인데 그것을 어떻게 포기해요? 우리는 매일같이 포기 하지 안합니다. 잘난 맛에 살아가요. 그런데 그게 죄인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께서 나에게 그런 해석을 주셨고 해석과 더불어 그런 안목이 왔고 안목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장에서 사도와 같이 이게 파키스탄이고 이게 아프리카이고 이게 전도의 현장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주님의 복음에 대해서 향수를 느낍니다.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이런 결과로 주어졌다는 것이 기쁨으로 왔을 때 이게 사랑 안에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무엇을 유발하느냐 하면 핍박을 유발합니다. 정말 사랑으로 다가갔는데 그냥 내 일을 한 것뿐이에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어요. 그냥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어요. 단지 이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저쪽에서는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진짜 나는 다른 것은 좋은데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때 마다 정이 떨어지더라. 아이고, 형님 왜 그러십니까? 형님이라는 말 하지 마! 그런 소리 안 하면 내가 너하고 사귈게! 이런 미움도 받을 때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상스럽게 흉내낸 핍박이 아니잖아요. 복음 전한다고 땀을 찔찔 흘리면서 문전박대 받으면서 문전박대 받을 때 마다 주여! 감사합니다. 복음을 전했더니 사도행전처럼 문전박대하는 군요. 그때는 네가 먼지를 털어라! 먼지 터는 것 찰칵 찍어 주세요.
이것은 내 속에 자학적인 쾌락입니다. 쾌감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남들이 안 알아주니까 성경대로 속에서 자기 가치를 회복시켜서 내 잘난 맛에 한번 살아가면서 내가 스스로 내가 성도됨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그거 가짜입니다. 분명히 가짜인데 그 가짜가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가짜가 수시로 분수처럼 우리 속에서 샘솟아 올라 오는지 이게 바로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 멋있게 폼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우리가 지울 길이 없습니다.
이 욕망에 대해서는 언젠가 제가 다음 달 부산 강의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을 할 겁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발전시킨 락캉에 대해서 언급을 할 겁니다. 프로이드와 락캉을 하면서 인간이 어떤 구조가 되었기에 이렇게 날마다 자기 잘난 맛에 폼 내는 재미로 사는가 날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 마귀의 음성인데 그게 계속해서 우리 속에 일어나는 이유가 뭔가 다음 달 넘어가면 너무 지루하니까 1분 동안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죽음충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짜증나니까 에이 판을 팍 엎어버리잖아요. 뭔가 션찮으면 에이씨하고 엎어버리는 것, 욕이라는 것은 남한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욕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자를 스스로 파멸하는 죽음충동에서 내뱉어지는 것이 욕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천심으로 오랫동안 착하게 살아도 치매 걸리면 어디서 배웠는지 욕이 막 나와요.
심지어 곱게 온실 속에 키우듯이 키워도 내가 분명히 착하고 착한 유치원에 보냈는데 엄마 말을 안 하니까 어디서 배웠는지 낯 설게 느껴지는 욕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는 실망스러워서 아이를 잡죠. 이 못된 것 어디서 배웠어! 애는 무심코 나온 거예요. 자기는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 속에 하다하다 안되면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그게 인간에게 깔려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발입니다. 내 인생인데 왜 내 뜻대로 안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한 반발, 이게 죽음충동, 이것은 우리 육신이 다 끝날 때까지 동반자로서 같이 갈 수 밖에 없어요. 이런 죄인을 십자가로서 구원해 주신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묘하게 복음전하고 핍박받는 것도 욕심이라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 계속해서 주께서 있게 하시고 일시키시고 행하게 하시는 그 주님을 드러내는 세상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러한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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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60513a (핍박)―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10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 좋은 일인데 왜 핍박을 받죠? 이것은 그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 거짓이 전제로 되어 있어요. 거짓말이 지배층에 유통되는 세계에서 성령 받은 주의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거짓에다가 진리를 전하니까 여기서 나오는 반응들이 있는데 그 반응을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핍박이라고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거짓을 만나서 핍박을 나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무엇을 테스트하고 싶으냐 하면 나도 과연 진리에 속했느냐? 구원받았느냐를 테스트를 하고 싶어서 이 거짓된 세상을 향하여 진리를 한번 전파해 보는 거예요. 전파해 보면 이 핍박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고난이 나와요? 안 나와요? 뭐 별 핍박이 안 나와요. 별 고난도 안 받아요.
사도 바울은 돌로 침을 당하고 쫓겨나고 막 이런 현상이 있는데 우리가 같은 성령 받은 성도라고 자부하면서 복음을 전하니까 저 쪽에서 세상쪽, 안 믿는 쪽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야, 내가 뭐 잘못 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죠. 거기서부터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진리를 전할 생각은 안 하고 핍박 받을 아이디어만 자꾸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상한 핍박이 왔을 때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나는 성도 맞구나!”라고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확정 짓고자하는 시험이 유발될 수가 있습니다. 상당히 주위 해야겠죠. 핍박 자체를 자기가 성도됐는가 안 됐는가의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ccc에 있는 선교단체에 있는 애들이 일부로 거지꼴을 해서 돈도 없이 복음 전하면서 내 쫓김을 당하고 소금을 뿌리고 그럴 때 마다 어떤 개인적 기쁨을 느끼면서 주여!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저와 같은 동일한 고난을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 자학적인 쾌락의 일종이에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마귀적인 술책, 전략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무엇으로 확인하려고 하느냐 하면 형식을 통해서 내용이 진짜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우리 인간이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핍박받는다는 것이 형식적인 핍박을 받게 되면 그래,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했기 때문에 이런 핍박을 받는 거야! 하고 스스로 자위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말이죠. 그런데 이 핍박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화 될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가 등장하겠죠. 몇 대를 맞아야 핍박이고 슬쩍 건드리면 그것은 핍박 아니고 그런 식으로 양적으로 정해 질수 있겠습니까? 가해지는 에너지 양, 또는 고통의 양으로 이것이 핍박이고 핍박 아닌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욕설을 언제까지 들어야 욕설이고 어디까지 들어야 욕설이 아닌 것을 스스로 판정해 버리면 벌써 기준 자체가 자기가 끄집어낸 것이 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용은 형식을 부정함으로서 내용이 주어지는 겁니다. 형식이 깨지는 거예요. 형식이라는 말은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동일한 양적인 모양새를 유지하는 것을 형식이라 합니다. 여기서 복음전하다가 세대 맞은 것이 이쪽에 가서 세대 맞으면 똑같은 복음을 전한 것이 될까요? 이것은 아니죠.
여기서 침 뱉음을 당했는데 똑같이 저쪽에 가서도 침 뱉음을 당해야만 그게 복음을 전한 것이 됩니까? 아니죠. 이런 것이 사도가 핍박받고 고난 받았다고 하니까 소위 흉내 내는 것, 형식화시켜서 나도 사도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을 스스로 성급하게 주려고 하는 것은 어디서 잘못 되었느냐 하면 반복되는 예수님의 사건에는 형식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반복할 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할 때 그 십자가를 주께서 반복할 때 동일한 형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 다르고 시간마다 세월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양의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남에게 고통을 받는다 하기 전에 먼저 전제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따로 내 자아 성을 형성하려고 했늘 때는 어떤 핍박도 거짓말입니다. 내 자신이 따로 형성이 되어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으니까 나는 성도 맞다고 따로 이렇게 자아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시도 하게 되면 어떠한 주님의 핍박도 그것으로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이 거짓된 세계에 복음을 전하니까 핍박이 왔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된 세계에서 자기는 빠져 있다고 선입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아 물러가라 하면서 본인은 이단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당연히 이단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이단들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핍박하고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남을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하는데 네가 거짓됨에서 벗어난다는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거예요?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정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자신은 여기서 빠지고 싶은 겁니다.
자아를 만들 때 자아의 내용을 채워야 되는데 형식 가지고 자아를 구축해 버리는 거예요. 형식가지고 자아를 구축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기억입니다. 옛날에 내가 이렇게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기도하가 응답 받았기 때문에 그 과거의 기억들을 주워 모으면 이것은 나한테 스스로 생각하기에 형식화 되어 있는 나의 주체성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있는 한 항상 십자가의 복음의 가리게 되어 있고 훼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있는 이상은 복음을 어떻게 설명해도 그 복음은 나한테 유리하고 나를 정당화 시키고 나 잘남을 인정해 주는 복음이라고 왜곡되게 내가 자꾸 강요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는 보람으로 살아가도록 주께서는 나에게 경려 해 준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의한 핍박은 나는 세상이 핍박했다 하지 말고 내가 나를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하고 있는지 아닌 지를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까 이만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그것이 곧 내가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고 가리는 짓이 되는 겁니다. 복음을 이만큼 전했으니까 이만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그 사고방식이 결국은 주님을 위한 걸까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것일까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거죠. 나는 오래 살아야 돼! 나는 안 아파야 하고 나는 안 죽어야 돼! 나는 힘든 일이 없어야 돼! 왜? 이것은 이유가 없죠. 왜? 나니까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돼? 나는 불편함이 없어야 되고 나는 유쾌해야 되고 행복해야 된다. 남들이 묻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 그 이유를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너는 안 그래? 왜? 나니까 그게 해답이에요.
나는 나니까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아무 이유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복음을 위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안을 다 뜯어보면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그것만 달랑 들어있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환란과 핍박과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너의 생애가 아니고 예수님의 생애에 참여하고 동참하는 그러한 능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 신직수 성도님 계시는데 예를 들어 주님이여! 저에게 주님의 복음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라는 인생을 버리고 신직수 성도님의 인생에 합류하게 하옵소서! 하는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게 우리 힘으로 안 돼요. 왜냐하면 나는 나니까, 나는 나다워야 되니까 나 빼놓고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애쓰는 수고는 고난이 아니고 고생한 거예요. 마음 고생한 거예요. 불안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행복을 향하여 그야말로 아주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 가짜입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세계에 참여하려면 하나만 알면 됩니다. 내가 나답게 나만 챙긴다는 사실이 이게 허구라는 것을 감잡아야 됩니다. 이게 분명히 헛빵이라는 겁니다. 어디에 비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 하고 내가 지금 소망하는 것, 내가 잘되는 것 하고는 분명히 헛바퀴가 도는 거예요. 안 맞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진짜 귀신이 옵니까? 진짜 귀신이 와서 식사를 해서 절 한번 하고 나니까 사과에 이빨 자국 나고 그럽니까? 아니죠. 아무리 절을 해도 사과는 멀쩡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이여!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구원을 주셨죠! 아무리 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없는 귀신이 자꾸 헛바퀴 도는 짓인 거예요. 아무리 그렇게 소원하고 기도해 봤자 모든 만사는 주님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앙탈 부리고 주님께서 은혜를 안 주시면 저는 예배당 유리창 깹니다. 해도 유리창 깨 봤자 주님은 간단해요. 그거 네가 깬 게 아니고 내가 너보고 깨게 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허락한 적도 없고 인정한적도 없고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헛꿈을 꾼거예요.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헛꿈을 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것은 핍박도 아니고 뭐냐 하면 전부 다 이것은 고생하는 겁니다.
무슨 고생?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그런 악바리 같은 그런 고집 때문에 생긴 헛짓이 헛짓이 아니고 그게 마치 목숨을 걸 일인 것처럼 착각에서 온 고생담입니다. 결국은 죽게 되면 자기의 손을 놓게 될 것을 진작 손을 놓지 그 무슨 낙을 보겠다고 결국 죽을 인생을 안 죽을 것처럼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겁니까? 죽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죽이신다고 생각하시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주께서 매일같이 조금씩 죽이시는 거예요. 어쩌면 갑자기 죽을 수도 있지만 죽어가면서 죽음의 흔적을 들어내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주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우리한테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없다는 노래 있잖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물론 그 뒤에 말이 좀 수상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요. 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고의 발상입니다. 발상의 전환이죠.
아무 문제없는데 왜 자꾸 본인이 문제를 유발합니까? 아기가 태어날 때 피부가 참 곱잖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피부가 아주 고와요. 토실토실 그런데 애가 손톱을 길어서 자기의 다리를 긁는다면 자기가 자기의 피부를 긁게 되면 여기에 상처가 붉어져 오죠. 이거 문제 생기잖아요. 본인이 본인을 긁는 거예요. 사람은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면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서 탈출하기 위해서 분투노력할 겁니다. 그런데 억압이 없다면 노력을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래 나한테 문제가 있어! 이 문제를 내가 해결을 하고 말리라!
문제가 있다고 본인도 그렇게 착각해 놓고 문제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니까 문제가 있게 되어 버린 거예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이 문제를 해소해서 문제에서 벗어났다고 신나게 외치고 싶은 희망을 본인이 억지로 문제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드디어 나는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미래의 상황까지 예측을 해서 그 상황을 끼어 맞추기 위해서 부질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가 사도 바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무슨 문제 있습니까?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내게 능력이 없앤다 는 말이거든요. 내게 능력 없앤다는 말은 더 솔직하게 말해서 주여! 저한테 능력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 뜻이다 말이죠. 그런데 교회 와서 능력 주시옵소서! 하는데 받으면 뭐할 건데? 받아서 뭐 할 건데? 문제를 해결하겠다. 무슨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해결합니까? 뭐 문제꺼리가 있어야 문제를 해결하죠. 아, 문제꺼리 있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아프고 뭐 애가 성적이 떨어지고…….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주님의 그 가치보다도 나의 딴 가치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라는 자기의 본색이 들통 난 거예요. 교회에서 철야하면서 교회를 부흥되게 해 달라고 하는데 그게 왜 기도의 제목입니까? 부흥이 안 된다는 거예요. 부흥이 안 된다는 기준을 누가 정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 건진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6장에 분명히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했죠. 자기 백성을 어떻게 한다?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 말아닙니까? 잃어버리지 않죠. 누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죠. 분명히 맞죠?
그러면 우리가 농땡이 부리면 잃어버립니까? 안 잃어버립니까? 농땡이 부려도 안 잃어버리죠. 그러면 열심히 하면 잃어버린다? 안 잃어버린다? 열심히 하나 농땡이 부리나 아무 상관이 없어요. 잃어버리지 않죠. 우리는 자아도취에 빠져요. 마치 내가 주님한테 협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자아도취에 빠진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이럴 것 같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하면 되겠네! 아무 것도 안 해 보세요. 본인이 못 참아요. 뭘 해야 될 것 같아요. 아무 것도 안 하니까 너무 이상해요. 이럴 수는 없어! 아무 것도 안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지금 것 태어나서 무엇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인지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걱정이라도 하고 뭔가 꿈적거리기라도 하고 물론 그게 나중에 말씀이라는 결과가 떨어지겠지만 자기가 자기의 다리를 긁어보는 거예요. 안 긁을 수가 없어요. 뭔가 긁어야 돼요. 이것을 안 긁으면 할 짓이 없어요. 뭔가 긁어야 된다니까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할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본인은 내용만 있고 형식은 없어요. 왜?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지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굉장히 바빠요.
남들은 사도 바울이 어떤 형식을 갖추고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사도 바울을 흉내를 내요. 커닝 하듯이 배겨 쓰는 거예요. 무시로 기도, 나도 무시로 기도해!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복음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능력을 덧입는 거예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굉장히 바쁜데 남들은 너는 왜 그리 바쁘게 일하나? 하는데 본인은 안 바빴는데? 나 아무 것도 안 했는데를 말하면서 열심히 살아 내는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 가는 그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 방법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것도 안한 것이 되면서 남들한테는 전혀 논다는 느낌이 보이지 않으면서 부지런히 설치는 것, 이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갔던 길이에요.
제가 강의를 하면서 어떤 기준점 같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천국에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해요. 저 사람이 지금 당장 주께서 재림하셔서 오셨다 할지라도 같이 주님과 함께 천국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최고지 그 외에 딴 것 있습니까? 그러려면 누구같이 되면 됩니까? 사도 바울 같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교회 몇 개 있었습니까? 없어요. 자기 소유의 교회 없죠? 사도 바울이 부인도 없었는데 자식도 물론 없고 사도 바울의 재산이 얼마죠? 동산이 얼마 이고 부동산은 얼마였습니까? 차는 뭐 타고 다녔죠? 없죠.
그러면 사도 바울의 목표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영 안에서 천국 생활을 시작 하거든요. 사도 바울이 나를 본 받으라 했으니까 그것이 모델이라면 모든 성도들이 교인들이 사도 바울처럼 되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일한다는 거예요. 능력 받아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일하는 모든 것이 그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남 보기에는 이상하던 관계없이 그게 주의 능력의 결과물이고 능력의 솜씨를 보여 준다는 거예요. 어떤 형편에 처하던지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되어 있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쭉 항목이 나오잖아요. 사도 바울이 이것을 한다고 하면 우리도 안 자고 철야해서 기도 하고 매 맞아야 된다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우리에게 없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거짓말 하는 것처럼 여기는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어떤 능력에 휘말려 있는 거예요. 휘말려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동산을 얼마 가지고 있었습니까? 없죠. 그러면 동산은? 현찰은? 없죠. 뭐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고 우리는 우리지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천국에 누가 가느냐, 어떤 내용을 가지고 천국을 가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거든요. 당신 교회에 교인이 몇 명이냐는 이것은 아무 문제꺼리도 안되고 지금 성경으로 돌아가야 돼요.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까? 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안돼요.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답답한 일이 생긴다? 안 생긴다? 생긴다는 거예요. 생기는데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기에 그 능력을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답답한 일을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그 뒤에 보면 더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6장 9절에 보면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부럽냐? 이 말입니다. 이 상태가 부럽냐? 이 말입니다. 아우 부러워 미치겠어! 정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갑니까?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 오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허사로다! 이런 것을 학교 과제로 내겠습니까?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늘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정도로 이것은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문제에요.
제가 강의 처음부터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도 핍박 받는다고 마시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 십자가의 고귀함을 가리고 있다 이 말입니다. 뭔가 일이 잘못되면 깜짝 깜짝 놀라요. 경기 일어나고 이 답답하고 컬컬한 일을 어떻게 하냐? 왜 이렇게 놀랍니까? 그동안 얼마나 십자가를 가렸으면 그런 일을 가지고 놀라겠어요?
주님이 중요해요? 주님이 소중합니까? 내가 소중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돌 맞을지 싶습니다만 가감하게 묻는 겁니다. 눈치 봐서 묻는 거예요. 정답은 알고 있어요. 주님이 소중한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의 정답이고 우리의 실생활의 모든 행위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에서 나오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문제꺼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제꺼리가 없습니다. 그 없음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 바울이 핍박이라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핍박 받은 것을 내가 너희에게 보고 알았거니와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만 보시지 마시고 아까 고린도후서 4장 6장 7절과 연관 시켜 보세요. 사도 바울이 평소의 모든 생활 모습이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 나는 고백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 엉뚱한 곳으로 세고 있어요. 버스를 타야 되는데 엉뚱한 잘못된 버스를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스스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그러한 쪽으로 중간에 노선을 내려야 돼요. 요새는 환승되니까 내려서 또 타면 되지만 지금 빨리 내려야 돼요. 우리가 지금 엉뚱한 곳에 가 있습니다.
주님이 안 보이는 곳, 십자가 안 보이는 곳에 가고 있어요. 십자가 안 보이니까 누가 잘 보이느냐 하면 내가 이만큼 잘나고 인생 잘 살았다는 내 것을 과시하는 쪽으로 나도 이 정도 되는 인간이야 나는 되는 존재야! 그것을 남한테 떠벌이는 그런 확성기처럼 떠벌이는 그런 버스를 타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도 바울은 아스라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저쪽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만날 하는 소리가 핍박받고 있다. 복음을 전하니까 고생을 한다. 본인이 복음을 싫어하면서 무슨 고난을 받았습니까? 자기 혼자 고생을 해 놓고 자기 가치를 지속시키고 연장시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써놓고 말입니다.
제가 노래 중에 특별히 싫어하는 노래가 있어요. 인순이가 불렀던 노래, 거위의 꿈입니다. 싫어요. 거위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발로 물질을 해서 힘들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는데 누가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요? 본인이 힘들어요. 물에 빠지면 되잖아요. 왜 물에 뜨게 하려고 하는데요? 물에 빠지는 것도 주께서 능력을 줘야 빠진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물에 빠지는 것이 가능한 겁니다. 내 식으로 만약에 물에 빠진다면 우리는 빠지면서 주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보고 있습니까? 제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는 것 보고 계십니까? 지금 cctv 돌아가고 있죠.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객기가 이런 객기가 다 있어요? 돈이 없어서 헌금을 10원을 하는데 10원밖에 없으면 10원 내면 되는데 주께서 보고 계십니까? 과부의 두 렙돈을 아끼지 않고 다 귀하게 보시는 주님이여! 동전밖에 낼 것이 없습니다. 뭐 어떻게 하라고요? 그게 잘했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남의 형식을 흉내 냅니까? 내용이 없으니까 형식이라도 흉내 내면서 성경을 모사, 독살을 시도 하는 이 짓, 그 사도 바울이 속해 있던 그 세상과 지금 세상과 똑같은 세상입니다.
남의 가짜를 보기 전에 내속의 가짜를 털어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돼요. 내가 바로 주님을 가리는 주님의 십자가 귀하다 해 놓고 사실은 나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기는 그런 심성으로 지금껏 버티고 살아오고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통곡해야 됩니다. 그러면 핍박이 이게 아니라면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 바로 복음에 의한 핍박이에요. 복음 안에 내장되어 있는 그것이 복음을 전하면서 속에 있는 내장이 밖으로 쏟아지면서 나올 때 그것이 핍박이 되는 겁니다.
나의 가치를 부수고 나의 자아를 찢어버리고 하는 그 능력이 오게 되면 그런 과정이 유출되게 되면 그게 바로 핍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성도는 24시간 핍박받는 삶입니다. 왜? 세상은 거짓이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든 전하지 않던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복음의 결과물이고 복음전파중입니다. 이런 것이 있죠. 위치 추적기가 안에 몰래 달려 있으면 우리는 위치 추적기를 인정하지 않지만 위치 추적기를 단 사람 쪽에서는 신호가 삑삑삑 작동하겠죠. 시그널 신호가 작동하잖아요. 성도가 이런 거예요. 성도가 본인이 무엇을 생각하던간에 우리 안에는 복음의 신호가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할 때는 여러분의 중심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처럼 돼야 구원을 받으니까요.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성령이 있잖아요. 성령이 늘 작용하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을 할 때 자기 사견으로 이야기하는 겁니까? 성령의 외침에 따라서 이야기하는 겁니까? 성령의 외침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마태복음 10장에 나오잖아요. 내가 너희가 핍박받을 때 네가 말하지 않고 네 속에 있는 성령이 이야기를 한다는 그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사도 바울 에게 그리고 모든 성도에게 그런 환경을 주신 거예요.
아예 할 것이 없다니까요. 걱정들 하지 마세요. 할 게 없어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요. 뒤집어 자도 째깍째깍 성령께서 지금 주무시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복음이 있는 이상은 핍박은 자동적입니다. 왜? 세상은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복음의 경계선에서 핍박이라는 것이 늘 유출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핍박 받을 짓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프니까 핍박이다. 아프든 안 아프던 핍박이에요. 목욕탕에 가서 아이고 시원하다! 그것도 핍박이에요. 꼭 남한테 욕을 먹어야 핍박인줄 알아요? 칭찬받는 것도 핍박입니다. 아이고, 성도님 기도도 잘하고!! 핍박하지 마!! 그러면 진짜 기도 잘하는 줄 착각하잖아요. 그게 자기 에게 얼마나 하나의 암세포로 작용하겠습니까? 그래 나는 기도를 잘해! 나는 기도 잘하는 소녀, 이게 빼려면 얼마나 힘들게 수술해야 돼요.
아이고, 참 집사님은 천사 같습니다. 교회만 가면 핍박, 핍박,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헌금하면서 돈을 도로 빼내는 얼마나 나쁜 짓을 해야 천사가 나타나는 그 핍박에 빠지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있는 것 자체가 복음 전파에요. 내 손수건을 수리수리 마수리 이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자기 손수건을 자기가 가져와 덮으니까 그냥 병이 나은 거예요. 졸다가 3층에서 떨어졌다 이 말이에요. 강의를 오래한 모양입니다. 강의를 오래한 것도 자기 뜻이 아니고 졸다가 3층에서 떨어졌고 안수하니까 나았고 또 수건가지고 하니까 나았고 그 다음에 수건으로 해 봤자 소용없어요.
십자가만 되풀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도 바울은 무능력자입니다. 바도 바울의 무능력이 그게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이고 거기서 사도 바울이 되게 바쁘네! 사도 바울이 바쁜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을 바쁘게 굴리시는 겁니다. 누가? 성령 안에서 주님이 사도 바울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되면 우리도 그렇게 되면 되잖아요. 어떻게? 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고백을 털어내 놓게 하는 겁니다.
아이고, 나 이번에 성경 공부를 참석하려고 하는데 바쁜 일이 있어서 참석 못했습니다. 하는데 그러면 일이 없었을 때 참석했다면 자기가 참석하면서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겠습니까? 그것을 빼내야 될 또 암세포입니다. 못 오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참석하실 때는 가게 하신거예요. 교인들이 교회에 빠지는 것도 주의 뜻이고 오게 하시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연연하면 안돼요.
다만 오게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교회 참석함에 대해서 존중해야 됩니다. 주께서 오게 하심의 그 뜻을 존중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 가지가 있어요. 사랑은 육에서 나온 사랑이 있고 성령에서 나온 사랑이 있어요. 육에서 나온 사랑은 어떻게 구분을 하느냐 하면 이게 형식으로 가능합니다. 이게 육적이에요. 어머니의 사랑은 아름다워라! 제가 어떤 분에게 시집을 하나 받았는데 시간이 남아서 이 동네 놀이터에 앉아서 읽어봤어요. 어머니라는 시가 있어요. 모성, 어머니의 노래, 밤낮 불러보는 이름이여! 불러봐도 다시 돌아올 이름이여! 이게 바로 악마적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마적인 시집을 내 줘야 다른 사람이 동감을 해요. 왜? 전부 다 거짓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세계의 특징은 뭐냐? 가능성 하나 보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너도 기도 30분에 하면 나도 30분에 할 수 있어! 이게 바로 거짓된 거예요. 인간의 기도는 육에서 나온 기도는 항상 가능성을 두고 하기 때문에 거짓된 기도입니다. 주여! 주여! 쭉 해 놓고 뒤에 예수님의 이름 아멘 이거 누가 못해요?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하느냐 하면 무시로 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하거든요.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되면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 기도는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안다? 모른다? 모른다 말이죠.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동안 기도한 것은 전부 다 기도인지 뭔지도 모르고 한 거예요. 그래 놓고 기도했다고 우기기요. 성령이 기도한다는 것은 전제가 있어요. 육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네가 할 수 없는 기도를 내가 한다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네가 할 수 없는 불가능을 주께서 기도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서? 우리의 헛된 기도와 더불어서 그래서 참된 기도는 자신의 헛됨이 계속 발산되는 거예요.
기도해도 응답 없다가 헛됨이 아니고 내가 기도하면서 기도 하는 자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는 그 자체가 헛됨인 것을, 기도해도 응답도 없고! 이래서 헛된 것이 아니고 기도 하는 내 모습을 내가 지금 관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헛된 기도라니까요. 오늘 기도빨 잘 드는 것 봐라. 피곤하지도 않네! 오늘 두 시간 신기록 세워야겠다! 이것을 측정을 해요. 심지어 기도하면서 기도를 3분 동안 하게 되면 7시 10분, 참 7시 10분이면 쿠쿠 예약을 눌러야 되잖아! 지금 미리 계산을 다 하고 기도를 해요. 이 기도하고 음식 쓰레기통 빨리 가져오고 이렇게 계산을 다하고 한다니까요. 기도하면서 온갖 생각을 다해요. 기도할 때 7시 20분까지만 하고 20분 다음에 뉴스보고 드라마 재밌는 것 없고 내일은 승리 끝나버렸고 그것까지 계산을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그것도 안 하면 마음이 찝찝합디다. 누가 뭐라 했어요? 그래 하세요.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 주님입니다. 기도 하면서 온갖 신경을 쓰고 기도 하는 자기 모습에 스스로 도취 돼서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것 까지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의 응답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기도하게 하신 속에서 내가 쉴 새 없이 주님의 고귀함을 가로막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왜 자꾸 죄인, 죄인 하느냐 하면 사람이 죄인이 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 때 그것은 돈을 주고 살수 없는 천국의 복을 받고 있는 겁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이 추악하고 악랄한 이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또다시 확인하고 감격하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에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무조건 죄인 되었을 때에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알 때에 내가 죄인주제에 뭘 더 달라 짜증내고 불평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바로 복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죄인 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주께서 복음을 전파시키십니다. 이것을 누가 아느냐? 사도 바울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세상은 거짓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전파되면 그것은 무조건 핍박입니다. 무조건 핍박인데 세상이 나를 핍박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왜냐? 내 자신이 주님을 핍박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해 놓고 내가 전도 한 것 아니고 헌금 해 놓고 내가 헌금한 것 아니고 기도 해 놓고 내가 기도한 것이 아니고 왜? 나는 나쁜 짓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주님의 뜻대로 돌아갑니다. 따지고 보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왜 문제가 어려우냐 하면 내가 십자가를 가로막으니까 문제입니다. 주님, 저 어때요? 저 착하죠? 저 훌륭하죠? 자꾸 주님 앞에 얼쩡거리는 거예요. 스크린을 가로막는 것이 문제이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받은 핍박은 어떤 차원인가? 오늘 디모데후서 3장 11절에 보면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이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는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라고 되어 있죠. 이 세 가지 진입은 사도행전 14장에 나옵니다. 14장은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그 두 사람 바나바하고 둘이 짝을 지어서 전도한다고 성령께서 시켜서 가까운 동네를 한 바퀴 돈 겁니다.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안디옥에서 나와서 섬을 돌아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돌고 다시 온 겁니다. 그런 전도했던 환경입니다. 그러면 우리 보기에는 그 가까운 이웃 동네 한 바퀴 바람 쐬러 갔지 이게 무슨 전도냐? 물론 사도 바울은 바람 쐐러 갔어요. 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릅니다. 예상도 안 해요. 그냥 가는대로 가는 거예요. 가라한 지시도 있었지만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것도 다 뒤 돌아 보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처럼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편해요. 책임질게 없어요? 있어요? 책임질게 없는 이유가 책임질게 너무 많아서 없어요. 뭐 하나 책임지라면 책임 질수가 없어요. 책임 지라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엄청나요. 그래서 10분 쉬시고 사도행전 13장에 무슨 핍박가운데 어떤 핍박이 나왔는지 뭘 했는지 봅시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60513b (핍박)―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했다. 왜 했느냐? 그것은 사도 바울한테 물어보면 안 되고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왜 했느냐는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줬던 혜택을 이방인들에게도 주게 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 주느냐? 안 주면 그만 이지 왜 주느냐? 그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가면서 십자가의 진수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찾아왔던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가면서 여기서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숨겨진 나온 의미가 뭐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것이면 그러면 유대인들은 뭐라 생각했느냐 하면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할 때 박이 달려 있으면 밑에 가만히 있으면 떨어집니까? 뭔가 때려야 박이 열리면서 청군 승리하면서 나오잖아요. “의”라는 박을 유대인들은 이 의를 주신 것이 율법이니까 율법을 그냥 가지면 안 되겠죠. 율법을 실천에 옮깁니다. 실천을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행위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은 위에서 온 것이고 실천은 어디서 온 거예요?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서 실천이 일어나서 그 두 개를 결합해서 의를 이루는 겁니다.
의를 이루는데 의를 왜 이루느냐? 천국이 무슨 나라냐 하면 의의 나라입니다. 죄인은 들어가지 못하는 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의를 누적을 많이 시키면 의를 많이 하게 되면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이 되고 만약에 죄를 많이 지으면 이것은 천국과 점점 더 멀어지는 그런 인식이 있겠죠.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런 인식이 유대인의 인식인데 이런 인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왜 있느냐 하면 우리는 복음을 배웠다고 어설프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외치지만 우리 속의 양심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죠. 좀 대충 알아서 죄를 지어라! 이 쯤 타이밍에서 선을 행해야지! 그리고 좀 양심이 있으면 네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값을 하고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 값을 해야지! 그래야 성도답지 하고 누가 누구한테 설득을 하고 속삭이냐 하면 내가 내 자신한테 설득을 합니다.
가지고 있는 재주 한번 피어봐라 갖고 있는 실천력 능력을 보여 봐라! 그냥 머리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줘 봐라! 그러면 행동으로 보이기 위한 어떤 실천을 하잖아요. 그러면 행동을 해 놓고 끝납니까? 이제는 어떻게 하느냐? 이제는 채점을 합니다. 채점을 하면서 이것은 이웃 사랑에 해당됨, 이것은 아님, 자기가 문제를 내고 자기가 채점하고 다 해요. 그렇게 혼자 노는 재미가 있어요.
그게 유대인들이 했고 유대인 가운데도 누가 혼자 노는 재미를 누가 많이 했느냐? 별 직업 없이 그냥 말씀만 들여 다 보고 사는 사람들이 곧잘 해요. 별 직업이 없으니까 잔업이 없는 사람, 야간 근무가 없는 사람이 앉아서 만날 성경 보면서 어디 까지 왔나 그것만 하는 거예요. 그것을 혼자하면서 의심스러울까 싶어서 교회에 나와서 구역예배하면서 한번 또 확인하고 이게 바로 유대인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가 하는 이 방법에 대해서 하자가 있다고 생각할까요? 없다고 생각할까요? 없다고 생각 했죠. 없다고 생각할 때 이게 바로 거짓이 되는 겁니다. 거짓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로마서 10장에 보면 자기 의라고 합니다.
네가 생각하는 율법을 지켜서 생기는 그 의가 어디로 계속해서 누적이 되고 쌓이는 의냐 이 말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0절에 보면 지금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면서 했던 사도 바울이 일하게 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했다는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내용을 증거했는가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죠.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 바울이 지금 유대인들이 행했던 것들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멍에로 봤어요. 목에 씌우는 멍에인데 11절에 보면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려면 반드시 멍에지고 있는 그 거짓된 그 항상 뒷배경으로 반드시 깔려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찾아가야 되는 겁니까? 라고 질문 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유대인같은 양심을 타고 났어요.
뭐 율법대로 사는 저 유대인을 보라! 하면서 멀리서 찾지 마세요. 우리 자신에게서 찾으면 돼요. 우리 자신에게 나쁜 짓 해 놓고 또 착한 일 해 놓고 얼마나 의시대고 얼마나 좌절하는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실천해서 그것이 내가 이루었습니다. 하고 큰소리 칠 수 있는 그런 의를 수집하고 생산하는데 얼마나 몰두하고 그것이 우리의 자존심으로 구축되어 있는지를 우리 자신이 그것을 속일수가 없습니다.
보람찬 하루하루의 삶이 뭐냐 하면 오늘도 죄를 적게 지었고 죄를 지을 때 마다 그것을 피해 버렸고 사단이 죄를 지으라고 부추겨도 장렬하게 희생하면서 안 지으면서 오는 승리감,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지 않습니까? 과제를 주고 과제를 풀었을 때 오는 자아도취 이런 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유대인을 통해서 이방인을 안다고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방인이라는 것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 유대인은 율법을 줬죠.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방인한테는 양심을 줬다 했습니다. 양심이나 율법이나 전부 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면 주여! 저를 제발 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하나님이여! 제발 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이 악한 세대에서 독하게 잘못 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그야말로 분투노력하면서 사투를 벌이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더 이상 저를 자꾸 떠 밀지 마세요. 제가 힘듭니다. 더는 못합니다. 정말 여기서는 더는 바르게 못 삽니다. 지금 이정도 버티는 것도 헉헉 거립니다. 주일에 한번 씩 교회에 가죠. 껌벅 졸면서 설교도 듣고 하는 것,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 많이 해 본 것 아닙니까?
힘들죠. 교회에 오게 되면 머리가 빠개진다는 사람도 있어요. 얼마나 본인의 생리와 안 맞았으면 본인의 자연스러운 생리와 얼마나 충돌이 되었으면 그 얼마나 용을 쓰면서 억지를 했으면 머리가 빠개지겠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평소에 하는 행위와 교회에서 하는 행위와 교회에서 듣는 이야기가 얼마나 차이가 났으면 그것을 듣고 해석하고 자기한테 적용하는 그 작업이 사실은 평소에 안 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폭발직전입니다. 참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악마가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편하게 아멘하고 받아드린다는 겁니다. 네가 인기가 있고 세상 모든 것을 점령할 수 있다. 이런 쪽으로 희망을 갖게 하고 비전을 갖게 하고 꿈을 갖게 하는 것은 전혀 머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도 힘들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서 억지춘향으로 신자 흉내를 내는 것은 더 힘들어요. 안 믿으면 되는데 또 안 믿으면 후한이 두렵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율법 플러스, 실천력, 실천력이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실제로 말씀을 행동으로 도입해서 자기 의를 세우는 이것이 분명히 옳지 않다고 했죠. 그러면 이방인들은 율법 자리에 뭐가 들어간다? 양심의 소리가 들어가요. 물론 양심이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초자아의 음성이라 하는데 정신분석 론에서 아버지와 부모님과 같이 자기 보다 먼저 선지하는 자들이 가르치는 것이 포괄적으로 하나의 윤리 도덕으로 자리를 잡아서 우리한테 계속해서 벌칙을 내리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안 하면 너는 벌 받는 다. 벌이 뭔데요? 스스로 이야기합니다.
벌이 뭐냐, 벌이라는 것은 어릴 때 네가 가지고 있는 불쾌감을 기억하고 있지? 그 불쾌감이 이런 범죄자라는 불쾌감이 되풀이 나온다. 그러면 그거 싫어요. 그러면 유쾌하게 하라! 유쾌하게 하려면 내 말을 지켜라! 이게 양심으로 계속해서 우리한테 알려 주는 겁니다. 양심이라 게 깡패라도 있어요. 도둑놈이고 누구에게나 양심이라는 게 다 있어요. 이것을 저는 4자로 나름양심이라 합니다. 북한에 김정은도 있습니다.
율법+실천력, 이것이 유대인들이 잘못 됐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동의하시죠? 동의 한다고 치고 질문 드리겠습니다. 율법자리에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여기에 넣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이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아요? 옳지 않죠. 옳지 않으면 사도의 지시와 명령은 왜 했습니까?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을 취하라는 복음의 갑주로 무장하라는 이야기를 왜 했습니까? 육을 위해 살지 말고 영을 위해 살아라! 이런 이야기를 왜 했습니까? 형제를 돌보라, 서로 동정하는 자가 돼라, 무례히 행치 말고 사랑은 온유하고 이런 지시와 명령을 왜 했습니까? 실천해서 하나님의 자기 의가 아니라면 그러면 이것은 왜 들어갔죠? 플러스가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이죠.
우리의 실천력은 사도의 말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실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온 거 아니에요? 전에 성령을 못 받았을 때는 우리의 죄 때문에 율법을 못 지켰다면 이제는 성령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실천력을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 받아서 실천력 강화돼서 이미 확보된 능력 가지고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지키면 나오는 게 뭘까요? 지키면 의가 나올까요? 자기 의가 나올까요? 둘 중에 어떤 겁니까? 자기 의가 나오죠. 그런데 이 자기의가 아닌 것이 뭐냐 하면 이게 누구의 의냐 하면 예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것은 자기 의로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의를 가지고 구원받아요. 그러면 뭐는 삭제 돼야 됩니까? 자기 의는 삭제되어야 되겠죠. 삭제를 하려면 생겨야 삭제될 것이 아닙니까? 자기 의가 있어줘야 삭제가 되잖아요. 그런 자기 의가 생겨나려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주님의 지시와 명령에 대해서 그것을 듣고 가만히 있을 위인이 없죠. 나서서 주의 명령과 지시니까 성령을 받았으니까 성령의 능력 받은 티를 내보자 해서 성경 말씀을 보고 큐티하고 하루 종일 살아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4장 말씀을 보고 난 뒤에 갑자기 누가 띵동 와서 전에 아주머니 몰래 장독의 된장을 퍼 갔는데 용서해 주세요! 라고 왔을 때 그렇다 하나님께서 큐티를 했더니 네가 큐티를 실천하는지 안 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된장 훔쳐간 아주머니를 보냈구나! 그러면 우리는 주께서 나를 사랑한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네가 몇 푼 되지 않는 것을 네가 큰 것을 용서받아 놓고 몇 푼 되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악한 놈아, 들은게 있어서 이것은 아주 배짱 좋게 용서해야 돼! 라고 용서를 합니다. 아이고 뭐 이웃간에 제가 장을 잘 담그니까 탐이 날 수가 있죠. 그런데 얼마나 가져 갔습니까? 이게 묻는게 아닌데 지난 2년간 계속 퍼 갔습니다. 참을 수 없다! 이상하더라! 이상해! 참을 수 없어! 그럴 때 우리가 뭐라 합니까? 베드로처럼 주여! 몇 번을 용서하야 됩니까?
인간에게는 사도의 지시와 명령이 오기 전에 우리 성도에게 먼저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귀함을 가려버리는 나의 고귀함으로 자꾸 얼쩡거리면서 내 가치로 가로막는 죄인의 모습으로 들통 나는 겁니다. 이 죄인이라 할 때는 죄를 더 져서 죄인이 아니고 무슨 말씀이 와도 자기 의로 유발, 생산해 내는 그러한 매카니즘이 작용하는 그 죄를 말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태생이 유대인이라는 거예요. 이방인도 마찬가지이고 태생이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절대로 포기를 못하는 이것은 죽을 때 까지 육이 있는 이상 계속 가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성령이 임해서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 본인은 아파야 됩니까? 안 아파야 됩니까? 무슨 짓을 해서 아픕니까? 사실은 안 아파야 된다고 생각 되는데 아프죠. 아플 때 그냥 그래 아프다고 참았어요? 아픈 것을 가지고 기도했습니까? 그것도 한번 했습니까?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아픈 것을 가지고 악마가 심어준 가시 두뇌에 뭔가 총알의 파편이 박혀서 만지면 어지럽고 낮에도 어지럽고 지금 아버지죽인 원수는 복수를 해야 되는데 자기는 태국에 가서 총알을 맞아서 미스터 블랙이라고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급할 때 손발이 중풍처럼 떨리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망가진 거예요. 십자가 백날해도 그 십자가를 듣는 순간 그것이 나에게는 뭐로 변합니까? 나는 십자가를 아는 괜찮은 성도라는 자기의가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방인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의 행함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했죠. 나는 매일 사라지고 매일 나타난다. 나는 매일죽고 매일 산다. 죽음과 삶이 계속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주님이 생각하는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고 날마다 이것이 끊어진다. 이것이 느껴진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나인데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내가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고 여기는 그 나를 주님의 나라고 자꾸 엮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설명 해 드릴 겁니다. 이제부터 몇 분 동안 어려울 건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감내해야 되는 겁니다. 정신과 물질의 중계는 자아입니다. 자아에서 중계가 됩니다. 인간의 물질이라 하는 것은 정신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닌 것을 정신이라 해요. 정신적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비가시적인 것이라 하잖아요. 물질이라 하는 것은 정신 빼놓고 다 물질이죠. 그러니 말 하나 마나에요. 물질은 뭐냐? 정신 빼놓고 정신은 뭐냐? 물질 빼놓고 슈퍼는 어디 있느냐? 미장원 앞에, 미장원만은 어디 있느냐? 수퍼 앞에, 이것은 말을 하나 마나에요. 어떤 실체가 전혀 들어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병원에 가면 CT 촬영하고 엑스레이 촬영을 하죠. 그런데 의사들이 친절을 베푼다고 베푸는 것인지 약을 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 환자분 보세요. 사진을 한번 보세요. 지금 당신의 간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썩었죠. 그런데 치료하시면 낫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 사진을 아무리 봐도 어느 대목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일반인들은 몰라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정상적인 사진이라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인간들이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우리는 부딪쳐서 결과로 알지만 사전에는 미리 알 수가 없어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거든요. 주님 저기 있다 찾아가자!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주께서 이렇게 살게 하셨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또는 소급해서 우리가 아는 겁니다. 원판이 뭔지 모릅니다. 원판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유사 원판을 내가 만들고 그 원판에 스스로 차이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원판 따로 있고 차이 따로 있는데 내 자신을 스스로 경려하고 자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자기 에게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판이라는 것은 일단 짐작하고 그것과 차이 나는 것을 띄워서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자아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물질세계에서 예수님이 관여를 해서 물질세계를 만드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에서 주님의 은혜로 물질로 해와 달과 별과 우리의 몸과 신체를 만들 되 그 만들게 되면 거기서 유사 원판과 차이를 가지고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해서 분투노력하는 자아가 등장하도록 주께서 매일같이 유발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는 어디 있느냐? 진짜 자아라 하는 것은 복음에서 이런 작업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연결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게 되죠. 만들어 내게 되면 주와 연결된 자아와 내가 생각한 자아의 차이점이 뭐냐? 주와 연결된 자아가 되면 우리는 이 자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님의 의인됨을 드러내는 죄인으로 이렇게 자기를 느끼게 돼요. 그런데 내가 만든 자아는 나름대로 분투노력했기 때문에 결국은 뭐냐 바뀌느냐 하면 자기 의로 귀속 됩니다.
자기 의를 담는 곳이 어디냐? 자아에다가 자기 의를 담아버려요. 그래서 자기 속을 끄집어 보면 늘 착해, 늘 신앙생활 잘하고 훌륭하고 그래요. 따라서 이런 내가 이 땅을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주께서 나에 대해서 조치를 잘못 내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나같이 착하고 바르게 살고 말씀대로 사는데 왜 이렇게 이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이것은 주께서 뭔가 조치를 잘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보다 못난 사람이 부자 되고 재벌되는데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앞 일을 미리 예상하면 캄캄하기 짝이 없죠.
이러다가 굶어죽지 않으냐? 굶어 죽어봤자, 거지 나사로한테 지지요. 거지나사로는 아프면서 굶어 죽었죠. 그러면 우리도 아프고 굶어죽으면 되느냐? 그것도 안 돼요. 거지는 아프고 죽으면서 앞집에 부잣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프고 굶어 죽으면서 슥 기어가서 부자 집 앞에 죽으면 되느냐? 그것도 안 돼요. 거지 나사로는 아프고 굶어죽고 부자 집 앞에서 개들이 와서 핥았거든요. 그러면 개보고 여기 여기 와서 핥어대면 그러면 우리는 괜찮은 자가 됩니까? 그게 바로 유사, 모사, 거짓으로 꾸며내는 자아를 우리는 날마다 생산하면서 주님의 복음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을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게 성도에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그것을 몰라요. 성령을 안 받으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못난 맛에 살아갑니다. 아까 빵을 드셨죠. 못난 나에게 빵을 주셨잖아요. 회비 냈다고 주고 안 주고 하는 그런 것 없어요. 세상이 이렇게 인생이 가벼울 수가 있습니까?
너무 가벼운 거예요. 못난 재미로 사는 겁니다. 엄마 성적 또 내려갔어! 괜찮아! 괜찮아! 옛날 노래에 잘했군. 잘했어! 하춘하 노래가 있잖아요. 영감, 왜 불러! 영감 불러 이야기해 보니까 전부 다 하는 짓꺼리가 희한 한 짓거리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잔소리를 해야 되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뭡니까? 잘했군 잘했어! 여보! 왜 불러! 차타고 가다가 박았어! 잘했군! 잘했어! 벌금 얼마 나왔어? 50만원 나왔어! 잘했군 잘했어! 다친데 없어? 여기 금 갔어! 잘했군 잘했어!
왜 그러냐? 죄인은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 주소서 하는 권리가 없어요. 그것을 권리의 박탈이라 합니다. 죄인은 이미 요구할 수권리가 박탈됐어요. 요구할 수 없는 권리가 박탈된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기도를 안 함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함으로서 알 수가 있어요. 제가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기도를 안 하면 되겠네! 만날 기도를 안한다고 삐져요. 기도를 해 보게 되면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의 내용을 무엇을 채우겠어요? 그동안 꼬깃 꼬깃 숨겨놓은 자기의 한이 나옵니다.
그 한이 누구에 대한 한이냐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그 기도를 통해서 다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온유하신 하나님, 이 멘트를 딱 할 때부터 이제는 당신 나한테 당해 보세요. 이런 뜻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 정말 말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 같으면 뒷말은 하지 말아야 돼요. 왜? 전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아서 잘 처리 해 준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전능함으로 끝나야 돼요. 예를 들어서 훌륭하신 아버지 알아서 잘 일해 주시고 모든 것을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가 거기까지만! 그게 진정이라면 거기까지만! 이렇게 아버지가 알아줬으니까 유산을 크게 달라는 그런 소리도 하지 마!
잠시 하나님! 교회 터는 어떻게? 성전의 터는 어떻게 해 주시고, 아파트 평수는 좀 넓혀 주시고 이렇게 나온다는 말은 앞뒤가 배신하는 겁니다. 그것은 거짓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를 안 하면 죄인의 한은 싸여 있죠.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터져버려요. 결국은 하기 마련입니다. 안할 수가 없어요. 이런 입장에서 주님의 지시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전도를 하게 되면 결국은 누구를 만나겠습니까? 세상 전체가 유대교이고 유대교라는 말은 세상 전체가 자기 의로움으로 무장한 그 입장에 있다 이 말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먼저 씨를 뿌려 놓고 열매 찾아 가는 거예요. 주께서 먼저 율법이나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뿌려놓고 그 양심과 뿌려놓은 그거에 대해서 마귀에 속한 너희들의 마음이 어떠한 열매, 어떠한 가라지를 내 놓는지를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다음 차례로 사도 바울을 전도하는 모습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이 복음으로 실시가 되어 있음을 확인차 가는 거예요. 구원 받은 사람은 없어요. 없지만 복음에 의해서 스스로 자라나는 구원받는 자가 있을 거예요. 그것을 구경하러 사도 바울이 갑니다. 전도여행은 사람 꼬이려 어디 보험회사 영업사원 한 구찌 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회원 모집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일은 주께서 하시고 참여하지 않는 자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동하지 않은 자가 추수에 참여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가는 거예요. 그런 전도 우리도 하면 되잖아요. 빈 깡통 들고 아무 것도 안 하고 덜렁덜렁 가는 거예요. 어떤 의도 없이 또는 몇 명 꼬여 예수 믿게 해 볼까 하는 그런 기획 없이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러면 선교사 가는 사람가운데 그렇게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습니다. 내가 선교해서 선교헌금 얼마나 확장했는지 미리 계산해서 자기 돈 받은 것하고 몇 명 꼬여서 학교 짓고 병원 짓고 사진 찍고 돈이 규정에 맞는지 늘 체크하고 그런 것을 신경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의, 자기의 능력, 자기가 주의 종으로서 목회자로서 주 앞에 인정받았다는 대외적으로 떠벌리고 알리는 그런 노림수를 갖지 않고 선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뭔데 그렇게 단정하느냐? 선교지가 바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입니다. 어디 간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평소에 선교를 안 했기 때문에 남들이 안했다고 욕할까 싶어서 선교하는 티를 내러 가는 겁니다. 그러면 멀리 가는 사람 없습니까? 가요. 캄보디아 가자. 가게 되면 한국에서 캄보디아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캄보디아가 내가 원래 있던 자리라고 생각하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캄보디아 사람으로서 캄보디아에 선교한 것이 되기 때문에 선교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죠. 바다 건너 선교가 안 되죠. 애초부터 논리상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자꾸 한국에서 왔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업적을 자꾸 알리려는 거다 이 말이죠.
캄보디아 가면 캄보디아 사람이 돼야 되고 파키스탄에 가면 파키스탄 사람이 돼 버려야 돼요. 자꾸 한국 와서 돈 찾아 가지 말고 그 나라 사람이 되면 돼요. 그러면 목사님, 저도 선교하겠습니다. 하고 가는 사람이 꼭 잘 사는 나라, 복지시설 잘 되어 있는 노르웨이, 애 공부 잘 시킬 수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로 갑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장소가 그게 바로 주께서 나를 통해서 선교하는 장소에요. 여기에 내 목숨을 묻겠습니다. 하는 그 장소가 그게 선교지에요.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라고 하는 것은 이게 판이 달라요. 사도는 터키에서 안 하느냐? 사도는 사도 거든요. 이런 것이 다른 데 아까 엑스레이 이야기해 봅시다. 엑스레이 폐 사진이 두 개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똑같아요. 보세요. 환장의 이 대목에 문제있죠? 보이죠? 이게 약 먹고 호전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봐도 몰라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의사는 원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판은 뭐냐? 사도바울의 판이 이렇게 있다면 사도 바울의 원판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도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원판은 그냥 얼룩만 있어요. 사도 바울은 얼룩에 대해서 원판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해석을 하는 겁니다. 무슨 해석? 현재 처해 있는 여러분의 상황이 바로 복음대로 말씀대로 되어진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썼던 그 상황입니다. 라는 것을 해석을 해 주면 되는 겁니다.
해석할 때 그 끝은 뭡니까? 모든 것이 복음대로 하자 없이 된 겁니다. 라고 해석해 주는 겁니다. 그런 예를 고린도후서 1장 19절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돼요. 아니요가 없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잘되고 있어요. 지금 일이 아주 잘되고 있다 말이죠.
그것에 대한 더 정확한 것은 2장에 나와요.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지금 다른 말로 한 거예요. 똑같은 말로 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악취로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향수로 보는 거예요. 아, 냄새 좋다! 이거 아카시아 냄새 정말 멋지다! 이런 사람이 있고 어디서 똥 냄새를 피우나! 이런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했어요? 똑같은 말로 했어요.
17절에 보면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현재 있는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서 해석을 해 버린 거예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 주님 중심으로 하는 것을 주님이 했어요? 사도가 했어요? 사도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홀로 했어요. 사도는 뭘 합니까? 뒤 따라 가서 그냥 행색만 할 뿐입니다. 이것도 주께서 하신 겁니다. 저것도 주님이 하신겁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아 정말 이것은 오랜만에 라일락 향수 최고의 향수입니다. 라고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솜씨의 입니까? 그것은 사도의 솜씨가 아니고 주께서 이미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여러분들 다 믿습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선교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은 세상을 해석하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은 판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믿어진다면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은 누가 꼬였다? 안 꼬셨다? 사도가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심지어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전도는 친히 누가 하십니까? 전도든 선교든 누가 하세요? 예수님이 알아서 해요. 추수는 누가 합니까? 주님이 해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뒤따라가면서 우리는 추수에 참여하는 자가 될 뿐이에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은 해석은 성경을 통해서 한다고 하죠. 이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성령으로 해석하세요. 어떻게? 확인만 하시고 해석만 하세요. 기도는 해야죠? 기도는 주님이 알아서 하고요. 전도는? 전도는 주님이 알아서 하고요. 헌금은? 헌금은 주님이 알아서 해요. 성경말씀은? 그것도 주님이 알아서 해요. 우리는 알아서 한 결과물로서 해석만 할 뿐이에요.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주께서 그렇게 솜씨를 부리신 겁니다.
추석에 송편을 만든다고 하죠. 송편을 할 때 남자들이 어설프게 1년에 한번 해서 잘 안돼요. 그냥 잘하는 사람, 명장은 다 잘 하거든요. 송편을 만들어 찝니다. 솔잎 넣어서 찌어서 끄집어내면 만들 때 힘들지만 먹으면 찰 져서 윤기나고 맛있죠. 이것은 누가 만들었어? 이렇게 하죠. 송편 만들 때는 우리가 가능성이 있어요. 딸 애가 이것은 내가 만들었어! 이것은 엄마가 만든 것, 이것은 할머니가 만든 것 다 표가 나잖아요. 그러면 선교는 누가 만들었어요? 김 권사가 만든 것? 이것은 이집사가 선교한 사람, 이게 드러납니까? 안 드러납니까? 전혀 드러나지 않아요.
전부 다 누가 하신 겁니까? 주님이 하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누가 한 겁니까? 주님이 하신 거죠. 우리 교회 목사가 전도한 게 아니죠. 주님이 하신 거죠. 목사는 다만 복음으로 해석만 할 뿐이죠. 여러분도 그렇게 하세요. 안 믿는 가정을 위해서 믿더라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되 여러분들은 해석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석하는 이것을 해석을 할 때 자연적으로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핍박을 느끼게 되죠.
핍박이란 사랑이 왔을 때 진리죠. 사랑이 왔을 때 주변에 생기는 것이 핍박입니다. 사랑이 찾아와서 생기는 거예요.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 필연적으로 사랑이 등장했을 때야 저주가 성립이 돼요. 안타까운 것은 코앞에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들어오지 않을 때 제일 안타까워요.
흔히 유행가 가사에도 그런 것이 있지만 세속적인 것에 이런 것이 있죠. 우리 이번에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합니다. 연예인들이 그런 말을 했죠.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서 친구로 살기로 했습니다. 진정한 저주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을 나에 대한 미움으로 간주해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립니다. 그게 바로 저주가 저주답게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트에요. 사랑은 사랑만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저주와 한 커플이 되어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 저주가 저주 값을 해요. 이게 미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을 하면서 뭐을 전했느냐 하면 전도를 누가 하신다?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알아서 전도를 하신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거기에 왜 왔습니까? 주께서 가라고 했죠. 왜 가라 했습니까? 유대인들만 있어 안 믿는 성도가 없어요. 없는데 세상에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믿는 것이 사도 바울이 본인도 놀라울 지경이에요. 모든 사람은 율법적이에요. 모든 사람은 양심적이고 어떻게 자기 의를 자기가 포기를 해요. 미쳤어요? 그것을 왜 포기 해요. 사는 보람이 뭡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건데요.
전부 다 자기가 잘난 사람인데 그것을 어떻게 포기해요? 우리는 매일같이 포기 하지 안합니다. 잘난 맛에 살아가요. 그런데 그게 죄인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께서 나에게 그런 해석을 주셨고 해석과 더불어 그런 안목이 왔고 안목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장에서 사도와 같이 이게 파키스탄이고 이게 아프리카이고 이게 전도의 현장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주님의 복음에 대해서 향수를 느낍니다.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이런 결과로 주어졌다는 것이 기쁨으로 왔을 때 이게 사랑 안에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무엇을 유발하느냐 하면 핍박을 유발합니다. 정말 사랑으로 다가갔는데 그냥 내 일을 한 것뿐이에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어요. 그냥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어요. 단지 이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저쪽에서는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진짜 나는 다른 것은 좋은데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때 마다 정이 떨어지더라. 아이고, 형님 왜 그러십니까? 형님이라는 말 하지 마! 그런 소리 안 하면 내가 너하고 사귈게! 이런 미움도 받을 때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상스럽게 흉내낸 핍박이 아니잖아요. 복음 전한다고 땀을 찔찔 흘리면서 문전박대 받으면서 문전박대 받을 때 마다 주여! 감사합니다. 복음을 전했더니 사도행전처럼 문전박대하는 군요. 그때는 네가 먼지를 털어라! 먼지 터는 것 찰칵 찍어 주세요.
이것은 내 속에 자학적인 쾌락입니다. 쾌감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남들이 안 알아주니까 성경대로 속에서 자기 가치를 회복시켜서 내 잘난 맛에 한번 살아가면서 내가 스스로 내가 성도됨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그거 가짜입니다. 분명히 가짜인데 그 가짜가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가짜가 수시로 분수처럼 우리 속에서 샘솟아 올라 오는지 이게 바로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 멋있게 폼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우리가 지울 길이 없습니다.
이 욕망에 대해서는 언젠가 제가 다음 달 부산 강의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을 할 겁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발전시킨 락캉에 대해서 언급을 할 겁니다. 프로이드와 락캉을 하면서 인간이 어떤 구조가 되었기에 이렇게 날마다 자기 잘난 맛에 폼 내는 재미로 사는가 날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 마귀의 음성인데 그게 계속해서 우리 속에 일어나는 이유가 뭔가 다음 달 넘어가면 너무 지루하니까 1분 동안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죽음충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짜증나니까 에이 판을 팍 엎어버리잖아요. 뭔가 션찮으면 에이씨하고 엎어버리는 것, 욕이라는 것은 남한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욕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자를 스스로 파멸하는 죽음충동에서 내뱉어지는 것이 욕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천심으로 오랫동안 착하게 살아도 치매 걸리면 어디서 배웠는지 욕이 막 나와요.
심지어 곱게 온실 속에 키우듯이 키워도 내가 분명히 착하고 착한 유치원에 보냈는데 엄마 말을 안 하니까 어디서 배웠는지 낯 설게 느껴지는 욕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는 실망스러워서 아이를 잡죠. 이 못된 것 어디서 배웠어! 애는 무심코 나온 거예요. 자기는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 속에 하다하다 안되면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그게 인간에게 깔려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발입니다. 내 인생인데 왜 내 뜻대로 안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한 반발, 이게 죽음충동, 이것은 우리 육신이 다 끝날 때까지 동반자로서 같이 갈 수 밖에 없어요. 이런 죄인을 십자가로서 구원해 주신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묘하게 복음전하고 핍박받는 것도 욕심이라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 계속해서 주께서 있게 하시고 일시키시고 행하게 하시는 그 주님을 드러내는 세상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러한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