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디모데후서 2:24 / 까닭없는 구원 / 160212 본문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6012a (까닭 없는 구원)―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2장 24절부터 하겠습니다.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면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죠. 주의 종이라는 사람이 실제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 주의 종과 아닌 사람이 차이가 나겠죠. 어떻게 나는가? 출처가 다릅니다. 주의 종은 어디와 연관 되어 있느냐 하면 주의 종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쫓아가게 하는 일 또는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는 일, 이 일은 주의 종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결과죠. 주의 종이 없으면 이런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종의 출처하고 그 다음에 회개해서 진리를 알아서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인 사람과 출처가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출처가 동일하겠죠. 같은 출처를 가지겠죠.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 현실에서 주의 종이 꼭 필요하다고 그것을 요청하는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의 종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벗어나 사로잡힌 자는 꼭 필요하다고 기대하는 현실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사람 없어도 잘만 잘 돌아가는 현실이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정말 주의 종이 없어 못 살겠다! 뭐 이런 현실입니까? 아니면 개성공단 없으면 못살겠다! 하는 이런 현실입니까? 어느 쪽이 우리 현실에 가까운 거예요? 아, 나는 주의 종이 없으면 못살겠다! 마귀에서 풀려나서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어디 없나? 그렇게 찾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우리 현실이 그런 현실이 아니죠.
그래서 본문에서 내린 결론은 간단해요. 주의 종과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없다! 이게 결론이에요. 그런 자는 없어야 돼요. 만약에 주의 종이 있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현실을 구성한다면 뭐도 현실에 개입이 되느냐 하면 바로 마귀도 이 현실의 구성원의 일부로 참작을 해 줘야 돼요. 고려해 줘야 돼요. 마귀도 구성원의 일부로 참작을 해 주려면 누구도 참작을 해 줘야 되느냐 하면 천사도 참작을 해 줘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져요.
차를 타고 가다가 사람만 조심하면 안 돼요. 혹시 천사를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구역부터는 천사가 출몰하는 지역이니 속도를 저속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막 나와야 된다 말이죠. 우리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빈 공간으로 여기는 현실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의 우리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내가 만든 게 아니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서 나에게 강요한 것입니다.
너는 이러한 주체관, 이러한 자아 관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너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수 있다고 그렇게 교육된 겁니다. 그 주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나 되게 하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는 그분들이 좋아 하지 않는 이야기는 알아서 삭제해 줘야 됩니다.
사장에게 결재를 받는데 과장, 차장, 부장, 상무, 사장 이렇게 있는데 그 중간에다가 천사! 이런 결재란을 만들게 되면 그것은 사장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는 그만 오늘부로 나가지! 왜 우리 현실에서 천사를 고려해야 됩니까? 자네 이리 와봐! 우리 회사에서 천사를 왜 고려해야 돼? 그러면 그 사람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히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 회사 나오지 마!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던지 우리 회사는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천사에게 사로잡힌 자가 하는 말이 “정말 사장님은 악하네요! 정말 이렇게 악할 줄 몰랐습니다.”그러면 너는 어디 출신이야? 너로 너를 너와 같은 주체를 만들어 낸 지난날의 너의 환경이 사람의 환경이 어떻게 너 같은 희한한 주체를 형성하게 됐는지 내가 참 궁금하다! 참 기이하다! 너 같은 인간 난 지금 까지 못 봤다! 지금 까지 너 같은 인간은 우리회사에서 없어! 이러잖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요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온 내용의 사람은 없는 겁니다. 없다고 치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없다고 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야 성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주체가 편해요.
열왕기상 22장 19절에 보면 “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미가야 라는 선지자, 미가야 라는 주체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4백 명이 되는 동료 선지자들이 동의를 했습니까?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동의하지 않았죠. 무려 4백 명이 되는 사람 중에서 미가야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아, 그것은 진리이고 복음적으로 옳다고 동의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죠.
그러면 그 4백 명의 주체 자들은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임금님이 우리를 모아놓고 전쟁에 나갈까? 말까? 전쟁이 승리 하냐? 안 하냐? 할 때 이미 우리 4백 명은 이야기가 끝났어! 승리할 테니까 나가세요! 라고 이야기했으니까 너는 그냥 거기에다가 가표 하나 추가 하라고 압력이 들어온 거죠. 그렇게 4백 명이 되는 그 선지자가 한결 같이 그렇게 이야기를 할 때 제 3자인 우리가 볼 때 어느 쪽이 현실입니까? 4백명 쪽이 현실이에요? 아니면 미가야 선자가 한 사람 쪽을 진정한 현실이라고 우리가 간주합니까?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에이 뭐 혼자서 고집하면 되는 게 아니고 4백 명인데 그만 오케이 하세요! 우리가 그렇게 부추기면 미가야가 하는 말이 나는 봤는데! 뭘요? 천상회의를 봤는데! 그러면 4백 명 쪽이 하는 말이 왜 하나님은 너한테만 보여 주고 왜 우리한테는 안 보여주는데? 라고 한다면 미가야가 하는 말이 그것은 내가 알바가 아니죠. 이게 오늘의 주제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미국에서 온 전화인데 간단해요. 목사님, 자유가 뭡니까? 단방으로 물었어요. 단방으로 물었으니까 구구절절 이야기하면 안 되죠. 단방 답 했어요. 자신의 행동과 선택과 결심과 행위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 겁니다.
현실은 자신이 하는 행동과 선택과 결심과 결단,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는 것을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고 아무 것도 본 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은 주체, 자아가 만들어 져요. 처음에 자아라는 것은 자아의 내용은 안 만들어 지고 자아를 느끼는 시점이 와요. 그것을 바로 보면서 저게 누구지? 저게 나일까? 그렇게 오인하면서 그것을 자아로 봐요. 그 다음에 그 자아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은 어린 애가 1년 6개월 사이에 거울을 보면서 그 움직이는 것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부터는 그 자아는 텅텅 비는 자아는 무엇으로 채워지느냐 하면 주변의 부모와 주변의 일가친척으로 이 자아가 채워지는 겁니다.
이제 너 라는 터를 잡아 놨으니까 네가 어떠한 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가르쳐 줄게! 이것을 가지고 양육이라 합니다. 교육, 양육. 사실 정답은 이겁니다. “조련”하는 겁니다. 이럇 뛰어! 당근하나 더 줄게! 뼈다귀 하나 더 줄게! 이런 식으로 조련하는 겁니다. 어디에 맞춰서? 명령과 지시를 내리는 그 집안의 분위기에 합치 되는 또 하나의의 구성원으로 제조하고 생산하게 되어 있어요.
그 내용을 채우면 그 내용은 내 것이 되는 아닙니다. 연결되는 것이지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엄마! 이 만큼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 다음에 뭐해야 돼? 돌아본다 이 말이죠. 나중에 시집을 가야 하는데 남자가 세 명인데 어느 남자랑 해야 돼? 이 남자하고! 알았어! 남자가 진도 나가려 하는데 어디 까지 나가야 해?
조정 받고 있죠. 조정을 받는데 그게 기분이 안 나쁘냐 하면 이미 그 자아는 조정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다 컸는데 엄마한테 조정을 받겠어요? 라고 하겠지만 그 중간에 엄마 말만 들어오는 게 아니고 친구의 말도 들어오거든요. 그때부터는 친구한테 조종 받아요. 하여튼 나라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남의 것입니다. 남의 것으로 꽉 차있는 겁니다.
오늘 디모데후서에서 의문점을 가져야 돼요. 어떤 의문점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왜 주의 종이 있어야 되느냐 하는 의문점을 가져야 돼요. 왜 주의 종이 있어야 되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난 사람이 왜 있어야 되고 왜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왜 등장해야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 왔던 나의 자아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왜 필요한지? 그게 어디에 쓸데가 있는지?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아무 쓸데가 없어요.
미가야가 하나님이 천상회의를 하는 것을 봤다 칩시다! 그래서 미가야가 이 세상에서 자기인생에서 어디에 쓸데 있습니까?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아무 짝도 쓸 데 없는 거예요. 밉상만 받고 나중에 뺨따귀만 맞았을 뿐이에요. 어떻게 하나님의 신이 우리를 떠나서 너한테 갈 수 있느냐? 다시 해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너만 보여 주고 우리는 안 보여 줄 수가 없지! 찰싹! 짝! 뺨만 얻어맞았죠. 뺨만 맞았다고 해서 죽고 때린 사람이 졸지에 죽고 그런 일 없습니다. 아무 일 없어요.
그것은 우리가, “나”라는 것이 어디에 익숙해 졌느냐 하면 남들이 현실이라고 하는 거기에 너무나 푹 젖어 있고 거기에 잘 짜여 있어요. 그것을 “규격화”라고 하고 그 규격화시키는 권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앞서서 규격의 권력이 상당히 어려운 용어이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나오는 거예요. 그 전에 18세기에 서양에서 나온 권력은 왕의 통치 권력이었습니다. 왕의 통치 권력이니까 왕만 쳐다보는 거예요. 왕이 시키는 대로 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왕이 사라지고 난 뒤에 모든 것이 네가 똑바로 안하면 너만 손해지! 라는 시대가 들어갔습니다. 내가 똑바로 안 하면 나만 손해다 이 말입니다. 나만 손해라는 것은 네가 원하는 너의 희망을 주위에서 도와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금지만 생각하는 것이 권력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침 안 뱉고 담배 안 피는 것만 권력이 아니고 선보러 가서 상대방 부모님에게 친찬 받을 수 있도록 행동을 자제하는 것도 이게 자체적으로 스스로 자기를 절제하는 자생하는 권력이 될 수 있다 말이죠.
잘 보이고 싶은 권력, 잘 보이고 싶은 그런 결과를 낳는 권력. 이것은 임금하고 복종하고 개성공단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자기 주위에 있는 주변 모든 환경이 나의 욕망과 희망에 유리하도록 작용하도록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하면 되는 그러한 규격, 이것을 우리가 원한다. 누가? 내 주체가 내 자아가 원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강의를 이런 쪽으로 몰아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이 현실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종도 필요 없고 마귀에서 올무 벗어나는 것도 싫고 내가 사로잡히는 것도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은 따로 있어요. 이 사회가 나를 인정하는 것, 나의 존재 가치를 높여 주는 것, 딱 그것만을 원하는 거예요. 그런 주체를 원하는데 이 성경이 우리한테 왜 필요한데? 아무 짝에도 필요 없는 거예요.
이것이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천상회의를 본 사람 외에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여기 나오는 주의 종 외에는 없어요. 우리가 보통 여기 성경을 보고 우리의 교회 목사님은 주의 종이 돼야 돼 라고 하잖아요. 그 주의 종은 여기 성경에 나오는 주의 종이 아니에요.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주의 종은 온유해야 된다. 잘 해야 된다. 이런 말은 뭐냐 하면 그 교회가 만드는 규격화되는데서 스스로 자기가 주의 종답게 행세해서 교인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규격을 권력화에 예속된 주체가 되는 겁니다.
딸이 가출했다, 아빠 엄마가 합세해서 때렸다. 허벅지가 퉁퉁 부어서 죽어 버렸다. 왜 때립니까? 왜 때린 거예요? 뭐 하겠다는 겁니까? 너는 우리 집안에 내가 원하는 규격에 맞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거 하기 싫으면 나가! 쫓아 내렸어요. 네가 나 없이 사는가 보자, 내 말을 듣던지 안 그러면 나가던지 안 그러면 맞아서라도 내 말을 듣던지 조련하는 거죠.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자유가 뭐라 했습니까? 일체 책임을 지지 않는 겁니다. 왜? 봤으니까 봐 버렸으니까 남이 날 욕하던지 또라이라고 하던지 뭐 어떤 소리를 하던지 간에 내가 거기서 남들이 나 보고 미친 인간이라고 한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입장이 못돼요.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자아가 아니고 저 위에서 원하는 자아상으로 연결 지어 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미친놈이라고 한다고 할지라도 신경 쓰면 안되죠.
그래서 주의 종이냐 아니냐를 판별하는 판별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인간을 사람 만들려고 애쓸 때는 100% 주의 종이 아닙니다. 교인이 교인답게 신자는 신자답게 목사는 목사답게 나서서 우리 제대로 합시다. 이거 아닙니다. 이거 가짜입니다. 복면가면 백날 써봐야 가짜입니다.
주의 종은 어떤 누구한테 설득을 하지 않습니다. 강요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이 현실세계에서 없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속해 있는 그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마귀가 다스리고 통치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싸우지 않고 마귀를 대상으로 모든 일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원수가 네 발등상에 굴복될 때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는 그 대목이 나오죠.
그 대목을 보면 하나님은 누구를 상대합니까? 우리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누구랑 상대해요? 그런데 주의 원수는 인간이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왜? 자기는 자기 모습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모습밖에 몰라요. 자기를 왕따 시키고 자기한테 욕하고 그것밖에 모르지 자기가 주가 아닌 이상은 주의 원수가 누구인지 몰라요. 나중에 주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요. 내가 주의 원수입니다. 바로 각자 본인들이 주의 원수였습니다. 왜냐하면 본들의 주체가 마귀로부터 만들어 진 주체이기 때문에 주의 원수노릇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한 순간도 놓친 적이 없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남한테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중요해요. 거기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고 나의 선택이 나에게 어떤 책임감으로 돌아오고 나의 어떤 이익으로 돌아오나 그것을 한 순간도 잊어 본적이 없어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할 때 우리 아버지, 우리 집안이 나로 인하여 어떤 욕을 먹고 어떤 피해를 보느냐를 한 순간도 잊어 본적이 없습니다. 우리집안은 오씨 집안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마귀가 오 씨한테 넘어갑니까? 마귀는 이 현실 세계에서 조금도 누구한테 떨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 여기에 사로잡힌 자는 이 현실 세계에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선지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까 미가야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때 사람보고 있다고 하면 안돼요. 그때 있다고 할 때 있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원천, 출처가 등장합니다. 개인이 등장하기 이전에 개인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출처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전쟁할 때 일본 남쪽 오키나와에 비행기가 떴다! 비행기가 한 대가 출몰했습니다. 어떤 일본 사람들도 비행기 한 대가 미국을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비행기를 보고 뭐로 아느냐 하면 이 근처 항공모함이 이 근처로 온 것으로 알아요. 그렇잖아요. 그 당시에는 비행기 급유를 미국에서 올 때까지 그렇게 많이 못 넣거든요. 그래서 항공모함에 싫어서 항공모함에서 오키나와까지 왕복할 수 있는 기름을 넣고 정찰비행기를 한다 이 말이죠.
그 정찰 비행기를 보면서 야, 이 비행기는 미국에서 왔다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일본 사령군은 없어요. 뭐가 왔다고 합니까? 미국의 항공모함이 이 근처까지 온 거예요. 이게 원천입니다. 그 비행기 떨어진다고 야, 우리 미국이 이겼다 하는 그런 바보는 없어요. 그 항공모함을 결정한다고 자살 비행단 조직해서 그냥 폭탄하고 떨어져 죽었잖아요.
원천 주의 종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사로잡힌 자가 등장했다는 이 말은 마귀가 통치하는 이 세계에 마귀를 원수라고 지정해 놓은 규정한 다른 원천이 이미 이 세상을 통째로 접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맞아, 내가 목사지, 목사 같으면 온유하게 대해야지 자기 개인에 의한 어떤 성숙이라든지 개인적인 어떤 신앙심을 고취하는 것,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쪽으로 해석이 되어 버리면 이 해석은 다 꽝이다 이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성도는, 다시 말해서 자유인은 무엇에 책임지지 않는다? 자기의 선택이나 자기의 판단 결정에 대해서 일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왜? 항공모함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항공모함에서 발주된 거거든요. 미가야와 같이 너는 어떻게 해서 천상회의에 참석했느냐?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를 묻는다는 것은 의미 없는 물음이에요.
그냥 하늘이 열리면서 봤어요. 본 것을 어쩌라는 말입니까? 법정에 가서 봤는데 정무성이 봤는데 또 돈을 먹여서 너 아버지가 지금 수술하고 있지? 그룹에서 계속을 먹여서 하여튼 돈을 먹여서 전부 다 기억도 안 되는 변호사하고 싸우는데 그저 돈을 먹여서 증인들 죽이고……. 리멤버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할 때 그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 수술비 받고 엉뚱한 증언하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 드라마가 보통 드라마가 아니에요. 그게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내가 내 집안을 살려야지, 또 누가 돈을 주면 넙죽 받고 또 살려야지 라는 여전히 기존의 주체를 유지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리멤버를 봐야 이해하기가 쉬울 꺼에요.
검사가 엉터리로 재판하고 나중에 그쪽의 변호사 되어 버리고 뭐 승진한다고 차장 검사된다 하면 또 배신하고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의 마귀가 지배하는 주의 원수가 지배하는 악마가 지배하는 주체를 이미 우리는 스펀지처럼 흠뻑 젖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온유해야지, 화평해야지 내가 목사로서 바르게 살아야지 남한테 적절한 권유를 해서 그들로 하여금 마귀로부터 벗어나서 주의 종을 만들어야지 하고 백날 해 봤자, 그래서 네가 노리는 게 뭔데? 그래서 네가 어떤 존재가 되려고 하는데? 여기 나오는 주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은 주의 종 되는 문제하고 달라요. 네가 항공모함 다 해라! 네가 발주하는 데도 없고 네가 알아서 네 스스로 예수를 만들고 다 해라! 그런 것 밖에 안 되는 거예요.
25절을 봅시다.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대목은 어느 한 대목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주의 종이 될 때도 자기가 스스로 깨달아 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도된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서 된 것처럼 나 말고 다른 천국 가는 사람에게도 동일한 원칙, 원리가 작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원천 자와의 교류, 관계, 수립 그 원천자는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누구를 상대한다고 했습니까? 주님은 주의 원수와 상대하기 때문에 그 주의 원수에 대해서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모른다고 했습니까? 모른다고 했죠. 왜냐하면 우리는 나한테 해코지하는 원수만 앞서서 우리가 느끼기 때문 우리가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우리가 신경을 쓰다 보니까 주의 원수라는 것이 우리에게 감이 오지 않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베드로가 마지막에 모닥불을 쬘 때문에 어떤 소녀가 당신도 저 예수와 한 편이죠? 할 때에 베드로가 극구 부인했습니다. 나 저 사람 몬다고 했잖아요. 그 순간 베드로의 적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누구 없으면 당당했는데 누구 때문에 지금 베드로가 당황해야 되고 궁지에 몰리는 처지에 왔습니까?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소녀 때문이 아니에요.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 때문이죠.
그래서 솔직하게 저분을 모른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내 주체를 바꿔 주지 않으면 우리는 주체가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어요. 어떻게요? 너의 원천은 뭐냐? 우리의 원천은 아버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거든요. 우리 어머니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육의 원천 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너의 육적인 아버지 말고, 세상에서 현실이라고 하는 것 말고 그것 빼 놓고 이야기해라.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그것을 빼 놓고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어요. 우리 삼촌이 목사인데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우리 삼촌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이건 또 삼촌이 등장하네요? 그 삼촌 말고 누구? 그러면 누가 있나? 숙모인가?
없어요. 아, 내가 알아서 스스로 결심했구나! 그것도 아니거든요. 스스로 결심을 하게 되면 나중에 진짜 재벌에서 돈을 주면 스스로 배신할 가능성이 있어요. 근본적으로 배신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그 원천, 내가 매일같이 배신하고 있으면서 불구하고 매일같이 배신하는 의지마저도 꺾어 버리는 그 원천, 나는 매일같이 주님을 버리고 원망하고 주님을 싫어하고 주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데 도망 못 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원천, 그게 누구입니까? 그런 분이 계셔야 돼요.
그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성경적으로 우리 주님 외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가야 선지자와 누구를 비교하느냐 하면 바로 욥입니다. 구약 761페이지 욥과 비교하고 싶습니다. 욥에 보면 미가야와 욥의 차이가 뭐냐 하면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천상회의 직접 봤어요. 아까 본 이야기를 했죠. 천군천사가 있었다. 그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누가 여기서 아합을 깨워서 그러니까 자기 마귀들이죠. 천사보고 누가 아합왕을 깨워서 길르앗 라못에 가서 아합을 죽이겠느냐? 저요! 저요! 나서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악한 영이 지금 4백 명 입속에 들어가서 일치단결해서 아합왕이여, 전쟁에 나서서시면 반드시 이번에 승리합니다. 제가 기도 열심히 해 보니까 응답 왔습니다. 라고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지금 미가야 선지자가 4백 명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용감하다는 차원에서 하면 안 됩니다. 용감하다, 참 대범하구나! 믿음이 좋구나! 지금 그런 차원에서 그것을 이해하시면 안 돼요.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 놓고 아, 난 참 용감하네! 자기 자신을 죄짓네 하는 게 아니에요. 차라리 누가 옆에서 왜 반대합니까? 미가 입장에서는 아예 안 물었으면 좋겠어요. 안됩니다. 왜? 그것은 이야기 안 할 랍니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데 나는 이야기 안하고 싶은데 하여튼 가시면 안 됩니다. 이유를 대라니까?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나 집에 갈렵니다. 이러고 싶어! 이야기하라니까? 그러니까 이야기를 한 거예요. 봤는데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또라이인 것을 내가 알거든요. 미친 소리라는 것을 아는데, 안 먹히는 것을 내가 뻔히 알거든요. 알지만 내가 본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왕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왜?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내 선택과 내 결정과 내 행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저한테 멱살 잡고 따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답니다. 끝! 철썩 빰을 때립니다. 그래서 미가야가 화를 내서 네가 뭔데? 하고 같이 데 들었습니까? 얻어맞았죠. 때리는 것도 주의 뜻이니까 맞았죠.
그런데 욥은 보세요. 욥은 그 천상회의에 대해서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안 봤죠. 보지도 않고 본적이 없는데 욥에게 일어나는 정황은 본인이 어때요? 이것은 이상해요.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요. 자식 다 죽고요. 다 날아갔어요. 뭔가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재산도 서서히 날아간 게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다 날라갔어요. 애들도 하루아침에 다 죽었어요. 딸도 이뻤는데 다 죽었어요. 너무 낯설어요. 그리고 그 이유도 모르겠어요.
욥이 감 잡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내 행동과 내 결정과 내 선택에 의한 결과는 아니다. 미가야나 욥은 그런 점에서는 같은 자유인이죠.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미가야는 그것을 이미 알고 욥은 그것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런데 오늘날 욥과 우리 성도들도 똑같아요. 하는 일 족족 안돼요.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심지어 내 뜻대로 안 되게 해 보려고 애를 써도 일부로 내 뜻대로 안되려고 애를 쓰면 그때는 내 뜻대로 돼요. 옳구나 싶어서 이제 안 되는 척하면서 내 뜻을 기대해 보니까 또 안돼요. 도대체 내 인생 자체가 없어요. 저는 그것을 그림자 없는 존재라고 표현을 하고 싶은데 몸체는 있는데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몸체는 있는데 그림자가 없는 사람, 욥의 심정에 이른 겁니다. 나는 있는데 나로 인한 나는 아니야 내가 원천인 나는 아니야 왜냐, 본인이 선택을 하거나 결정하거나 본인이 행동을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식으로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림자가 있는데 자기 그림자가 아니에요. 그림자가 있긴 있는데 이 그림자는 내가 아니에요. 그러면 무슨 그림자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그림자죠. 이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혹시 그림자가 나오면 그림자는 네 그림자가 아니고 내 그림자인줄 알아라! 이것은 주님의 그림자, 주님의 인생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라 하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의 행동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원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원천에 관한 문제인데 미가야처럼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마치 뭐 같다고 했습니까? 욥처럼 되는 거예요. 이유도 모르는 채 15분동안 군만두를 먹는 사람처럼 우리가 올드보이에요.
이유도 모르는 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어디로 튈지 어디로 갈지 그리고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합니다. 우리는 다 가로 막혀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미래에 대해서 뭘 채우느냐 세상이 나를 육신으로 만들면서 생겼던 그 주체가 예상하는 미래가 우리는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되죠.
그런데 그것은 이미 그 원천은 어디 입니까? 하나님이 원천이 아니고 마귀가 원천이죠. 마귀에 의해서 만들어 진 주체가 나올 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것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돌이 떡이 되게 하고 인기가 넘치고 결국은 노리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 내가 좋아하고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같이 좋아하는 것, 남들이 그렇게 됐네! 아이고 부러워라,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 나도 같이 덩달아서 숟가락 얹어서 나도 같이 좋아하는 것 그게 우리의 미래상, 그 미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사로잡힌 자는 원천이 다르죠. 그러면 그러한 희망과 꿈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필히 주님에 의해서 그 내 꿈과 희망은 엉망진창이 되겠죠. 완전히 좌절되겠죠. 실패로 끝나겠죠. 그럴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종자가 다르고 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달라요. 다른 분이 다른 그림자를 내 실체를 통해서 뻗어내고 있어요. 그게 바로 주의 종이라 할 수 있어요.
없는 존재가 나로 하여금 원천 자가 되셔서 나는 믿지만 내 있는 원 대로 되지 않고 없는 분이 나한테 붙어서 그 나한테 붙으신 없는 분이 자기의 계획대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얻는 것이 뭐냐,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택을 하고 결정을 했으면 하나님 쪽에서 얻는 게 있어야지, 나를 이렇게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얻고 자 하는게 뭐냐? 그것은 바로 마귀와의 전쟁에 승자가 우리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우리를 쓰십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논쟁을 하는데 결정을 못 지어서 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성령 받았다는 게 그게 어떤 결과, 어떤 현상을 두고 성령 받았다고 이야기합니까? 그렇게 질문이 짧게 왔어요. 그래서 저도 짧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면 성령 받은 겁니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게 되면 그것은 성령 받은 게 아닙니다. 왜 그런 전화를 했느냐 하면 성령 받으면 온유해야 되고 성령 받으면 화평해야 되고 성령 받으면 인간돼야 되고 성령 받으면 남한테 베풀어야 되고 사랑을 해야 되고 온갖 좋은 것은 다 성령 받은 티를 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고 이런 것을 성령 받은 것으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숙제, 과제가 너무 많아지는 겁니다. 과제가 많아지게 되면 이게 양적이 돼서 이것은 퍼센트를 따지게 돼요. 미진한 것은 내일하고…….
이게 성령이 질이 아니라 양이 되어 버려요. 하나님, 이만큼 했으니까 성령 받은 것으로 쳐 주세요. 뭐 이런 식으로 된다니까요. 성령 받은 것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착해 질 수 있느냐가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죠.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자유는 내 행위가 내 결정과 내 선택을 절대 책임지지 않는 겁니다. 일체 나는 거기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게 자유함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원수, 악마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게 집어넣은 겁니다. 그 다음에 성령 받은 것은 뭡니까? 우리의 원천, 예수그리스도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강의의 두 가지의 핵심입니다.
사로잡혔다고 해서 가끔 미쳐 가지고 방언한다고 랄랄랄라 하고 기도 한다고 주여! 주여! 사로잡히게 하옵소서! 하는 이게 무당세계에서 사로잡혔다 하는 것을 본 게 있기 때문에 그게 주체의 내용이 되었거든요. 사로잡히면 정신 나간 짓을 해야 사로잡힌줄 알고 있어요. 멀쩡해도 사로잡힐수 있는데 정신 나간 짓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 귀신에게 사로잡히면 이순신 장군 이야기하고 단군에게 사로잡히면 단군 귀신 이야기하고 점치고 자꾸 이런 쪽으로 우리의 주체 안의 내용이 그동안 세뇌 받은 것, 양육 받은 것, 교훈 받은 것 우리가 한 수 배운 것, 이런 쓰레기가 가득차 있으니까 성경을 들여다봐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욥을 생각해 보세요. 욥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는지 본인이 몰라요. 사로잡힌 거죠.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6012b (까닭 없는 구원)―이 근호 목사
여러분이 욥을 보면서 욥의 일장에 나오는 그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뭐냐 하면 사단이 하는 이야기에요. 까닭 없이 욥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는 거예요.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믿을 인간들, 위인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주체가 형성되어 있고 그 주체는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조건하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합당한 타고난 존재입니다. 라고 마귀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마귀가 똑똑합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마귀는 이미 간파하고 있어요. 이유 없이 이익 없이 어떤 들어오는 것 없이 내가 기대하는 지금 보다 내가 멋있게 되는 그런 조건 없이 하나님을 믿을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까닭 없이 라는 말을 주께서는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까닭 없이 아버지께 버림 받은 분이 있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 빼 놓고 다 죄인입니다.
지금 욥도 죄인이거든요. 그 죄인을 주의 나라에 보내시는 겁니다. 어떻게? 욥의 그 본심을 마귀를 파견 시켜서 욥을 엉망진창 만들어서 그 엉망진창 속에서 죄인이 천국 가는 이유, 까닭에 대해서 주님께서 심어주시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욥은 끝까지 자기의 고난이 온 이유를 몰라요. 까닭은 몰라도 돼요.
누구만 알고 있습니까? 욥을 구원하신 주님 자신만 그 까닭을 가지고 있으면 구원 받는데 넉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누구를 안 믿고? 예수 믿는 나를 절대로 믿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나를 절대로 믿지 않고 예수님을 소망한다는 나를 믿지 맙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믿지 맙시다. 주를 믿는다는 나를 믿지 합시다. 그런 것은 다 까닭이 있어요. 마귀의 말이 맞아요. 이유가 있어요. 어떤 이유? 예수 믿고 천국 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되지도 않을 꼼수 이것은 아주 싹을 잘라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까닭 없이, 우리에게 까닭을 알려 주지 않고 욥처럼 건져 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피 흘리시는 그 자체가 유일하고 이유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을 품고 있는 그 이유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이나 선택이나 결정이나 어떤 것도 우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라가 90세가 넘도록 임신을 못해요. 그 책임을 사라에게 묻지 않습니다. 안 물었잖아요. 그냥 불임 여성이 될 뿐이에요. 이유가 없어요. 뭐 전생에 업보가 있어서 불임이다, 뭐 이런 이유 없어요. 아무 이유 없어요. 주님이여! 저는 왜 남자입니까? 아무 이유 없어요. 까닭을 찾지 마세요. 그것은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까닭을 찾는다는 것은 내 속에는 까닭과 까닭으로 층층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뜻밖에 안 돼요. 모든 것은 이유 없는 행동은 없었다.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거운 쇳덩어리 짐을 지고 가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왜 치매에 걸렸는가? 이유가 뭐냐? 없어요. 치매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뭐 DNA가 어떻고 그런 억지로 까닭을 유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 받았으면 됐지 까닭을 왜 알아야 됩니까? 그렇잖아요? 내 그림자는 왜 이렇게 길지? 까닭 없어요. 주님의 자기 그림자가 긴 거예요. 까닭 없어요.
여호수아가 전쟁하는데 태양이 왜 멈추는가? 우리는 이유를 뭐라 합니까? 태양이 멈춰야 조명이 있을 때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까닭이 될 수 없어요.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왜? 그 해가 지기 전에 미리 다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잖아요.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돌았다. 이유가 뭐냐? 이유 없어요. 그냥 이왕 무너 질것 확 뭉개 버리면 되지 왜 일곱 바퀴를 돕니까? 그 이유는 없습니다. 그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이 이유가 돼요. 왜? 그래야 까닭을 자기 쪽에서 찾지 않고 이것은 나 말고 다른 분이 구원의 까닭과 이유를 소유하고 있음을 우리가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한테는 우리의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까닭과 이유도 없게 되는 겁니다.
제가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는 어떻게 된다고 했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는 뭐를 찾습니까? 욥기를 통해서 뭐를 찾는다? 까닭 없이 믿을 리가 없습니다. 항상 이것을 찾는 겁니다. 항상 이유가 없어요.
단이는 왜 키가 클까? 이유가 없어요. 농구선수하고 비하면 키가 작은 건데요. 이유가 없다니까요. 없는 이유를 왜 욥은 10명 다 죽었습니까? 이유가 없어요. 끝까지 욥은 이유가 안 나와요. 왜 고난을 받는지 이유가 안 나와요. 욥이 아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죠. 내가 이런 까닭을 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책임 질 것이 아니니까요. 다른 분이 책임을 졌기 때문에 그 무거운 짐을 내가 도로 가져갈 이유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12제자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무슨 재주로 고쳤고 쫓아냈습니까? 이유 없어요. 그냥 바보 같은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병을 고친 겁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3장에서는 알죠. 나의 능력으로 고친 것이 아니고 이 현장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이 직접 관여해서 앉은뱅이 낳게 했다고 사도행전 3장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전에는 이유를 몰라요. 내가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어서 낳았는지 몰라요. 주께서 다 하신 거예요. 인간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때에? 네가 사로잡힐 때에 네가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네가 말하는 이유는 네가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성령이 친히 너 대신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나빠요? 사실은 기분 별로 안 좋죠. 왜? 우리는 쪼다가 되니까요. 우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잖아요. 그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야 우리가 주의 증인 노릇을 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 이런 이야기를 했죠. 예수님 십자가 강도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강도가 바로 나라는 거예요. 십자가가 세트로 되어 있어요. 중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양쪽에 지옥가기 위해서 죽어야 할 십자가, 하나는 천국에 동참하기 위해서 죽어야 할 십자가, 그 예수님을 빼 놓고 양쪽에 있는 그들이 우리가 바로 나에요. 왜 한 쪽은 지옥을 보내고 한 쪽은 천국을 보냅니까? 그 까닭을 나라는 주체에서 끄집어내면 우리는 마귀 올무에서 빠져서 사로잡혀는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전에는 그 까닭을 찾던 그 주체에서 이제는 이유를 안 찾아도 되는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게 되는 그런 주체로 이미 우리가 달라진 겁니다. 원천 자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하게 하고 어떤 노림수가 없습니다. 그냥 외쳤더니만 저쪽에서 온유했고 외쳤더니만 저 사람들이 잘 가르친다고 이야기했고 그냥 외쳤더니만 그 사람이 하나님께 회개해서 진리로 돌아서게 되고 이것은 주의 종, 어떤 까닭이 없습니다. 그냥 주의 종은 쓰임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종이라 하는 것은 성령 받은 모든 사람을 주의 종이라 하는 거죠. 다 그렇게 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디모데후서 2장 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은 전쟁판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빠져 버린 전쟁판, 악마와 뱀과 그리고 주님과의 전쟁판에서 있다는 그것을 우리가 현실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던 것, 첫 번째 것과 지금 두 번째 한 것을 직접 연결시키면 우리가 아는 현실에서는 마귀도 없고 주의 종도 필요 없고 다만 이 현실은 우리 주체가 잘 되기 위한 현실,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서 이게 바로 현실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미가야가 빠져 번린 세상은 미가야가 있음으로서 미가야 없는 현실 스스로 자기가 악하다고 봅니까? 선하다고 보겠습니까? 그들 400명은 대단히 착하다고 보겠죠. 그런데 거기에 미가야가 섞이는 순간 졸지에 그들은 극악무도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그 미가야만 빠지면 다 사람들 괜찮고 집에 가면 훌륭한 아빠이고 아침에 부모한테 효도하고 점잖은 사람입니다. 미가야가 들어가니까 천상회의에 들어 가보니까 졸지에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 편에, 마귀에 편에 속했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진실이 확 노출, 폭로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령 세례를 주시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은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존재가 보통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뭐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살면 알아서 주께서 주변 정리를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알아서 주변 정리가 되도록 한 쪽은 마귀에 속한 자, 한 쪽은 성령에 속한 자가 되도록 그렇게 주께서 활용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행동도 책임 안 지는 그런 큰 배짱, 어떤 의미에서는 참 뻔뻔하죠. 많이 뻔뻔 합시다. 뻔뻔의 극한을 우리가 추구합시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할 정도로 너무나 뻔뻔하게 삽시다! 그게 자유입니다.
3장 더 봅시다. “너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말세에 고통 한다고 했죠. 오늘 설교 제목을 “고단함”으로 하겠습니다. 고단한 인생, 이 고단함은 무엇과 같은 말이냐 하면 “고생”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항상 의미라고 하는 것은 그 반대말을 통해서 의미를 알게 되어 있어요. 그 차이가 있어요. 그 차이를 통해서 의미를 알게 되는데 지시하는 대상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는데 옛날에는 그 지시하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고 보편화 된 대표적인 것이 되는데 강아지라고 하면 강아지가 뭐가 강아지인지 강아지가 세분화가 되면 여러 강아지 중에서 보편화 된 명사가 강아지거든요. 강아지와 강아지가 아닌 것의 차이를 통해서 강아지를 선별하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이게 뭐냐? 이게 강아지라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요새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에게 강아지라고 말한 이유가 뭐냐? 이렇게 됩니다. 강아지는 아무 것도 아니고 당신이 나에게 꼭 말해야 되는 이유는 뭐냐? 당신이 강아지 발을 발고 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반드시 모든 언어는 마이크 선풍기 뭐를 이야기하던 간에 실제로 모든 의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그것을 변형시키기 위해서 의미가 들어오게 됩니다.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이야기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없고 항상 차이를 두게 하는 겁니다. 철수가 있다면 “어이 철수야!”하면“내가 철수인데”이렇게 안 하죠. “왜 나를 부르는데?” “너 철수 아니야?” “철수 맞는데 왜 불렀는데? 나를 왜 불러 세우는데?” “왜 바쁜 나를 불렀는데? 친척이야?” “아니요.” “그럼 왜 불렀는데?” “철수 맞는가 싶어서”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관계의 망을 염두에 두어 둬요. 너와 나의 관계를 형성할 것이냐 취소할 것이냐 평소에 관계가 어떤 관계이냐 이런 것을 하기 위해서 의미를 준다 말입니다.
그래서 고단함의 반대말을 알아야 됩니다. 고단함의 반대말은 “고난”입니다. 고단함의 같은 말은 뭐라 했습니까? “고생”고생, 고단한 인생을 실감나게 하려면 이런 단어 뒤에 뭐가 붙어야 됩니까? 고단한 그 뒤에 “나”가 있어야 되죠. 그런데 고난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고난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붙어 있어요.
고생, 고단함의 같은 말은 고생입니다. 누가 고생하고 누가 고단합니까? 내가 고생하고 고단할 때 우리는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고난이라는 말은 보통 인간세계에서 고난이라 하는 것은 보통 인간에게 하지 않고 안중근 의사처럼 남을 위해서 희생할 때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걱정할 때 힘든 결정을 하시고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공동체, 또는 국가를 위해서 몸을 버리겠다는 안철수 같은 본인은 고난 받고 있다고 생각하겠죠.
고생이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이 그냥 찌든 자기만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 천박하게 고생하는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넘어서 초월하여 남을 살리기 위해서 본인 하나를 희생할 때 고난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것이 성경에서 인간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을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이것은 고통 하는 때니까 이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과 인생의 고단함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이것은 복수에요. 둘 이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보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대해서 보복하고 있는 중이에요. 보복의 경로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었거든요. 이방 나라에 대해서는 손도 안 댔습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살던지 방치 해 버리고 이스라엘에게 관여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을 줬는데 그 사랑에 대해서 배신하고 배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칩니다. 징계하고 보복하듯이 쳐요. 그러면 다른 민족은 어떤 짓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겠다고 난리가 납니다. 그것을 환란이라 해요.
환란인데 신약적으로 하면 그게 바로 고난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 중에 부르신다. 이렇게 돼요. 애굽에서 그들을 부르셨잖아요. 그들은 고난 받았습니다.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누구를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방적으로 개입함으로 벌어진 그러한 안 좋은 일, 그게 고난이거든요. 그래서 고난은 항상 뭔가 낯설다는 감이 많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까닭이 없다. 어이가 없네! 아무 까닭이 없는 거예요. 왜 우리가 당하는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바로 왕이 미쳤나? 아들 낳으면 다 죽이라 하는가? 그래서 아들 있는 집이 다 뺏겨서 전부 다 울고 불고 난리 났어요.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베들레헴에 예수님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던 2살 밑에 애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헤롯 군대가 와서 2살 밑에 애들을 다 죽여 버렸죠. 그럴 때 그 부모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통곡을 하죠. 자기 아들이 그렇게 죽어야 될 까닭과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는데 헤롯은 알고 있죠. 왜 2살 밑에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까? 누구 찾아 죽이려고? 아기 예수 찾아 죽이려고 그렇게 한 거죠.
다멕섹 군대가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35만인가 38인가 하여튼 엄청난 군대가 와서 포위 했잖아요. 포위했는데 천사가 와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 군대 하루아침에 다 죽었죠. 그 군대의 장정들이 고향에 하면 다 훌륭한 자식들이고 귀한 자식들이에요. 그런데 천사한테 다 맞아 죽었어요.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어요. 예루살렘을 왜 건드리느냐 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한 거예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일반 현실에서는 하나님이라는 게 없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전부 다 우상이고요. 자기 주체 잘되게 하기 위해서 교회 나가서 비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 낯섦과 고난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마음이 아파다는 것을 전달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참 이해하기가 힘들죠. 주님이 찾아와서 하나님이 자기 이스라엘 백성을 어렵게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못살겠습니다. 자기 힘들다고 하잖아요. 사실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 본인을 친 거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겁니다.
쓴잔을 마시는 거예요. 자기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해서 그게 우리 눈에 안 보이잖아요. 우리는 느껴지지 않아요. 우리는 자기 밖에 모르기 때입니다. 나만 고생한다고 느껴지지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이 고생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못하죠.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이 고통에서 성령도 면제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께서 기도 할 때 어떻게 기도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히히 웃으면서 기도 합니까? 헤헤 웃으면서 기도해요? 어떻게 기도해요? 탄식하면서 기도하죠. 탄식할 때 주로 어디를 때리느냐 하면 등짝을 때립니다. “이 놈의 자식아! 난 못살겠다!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엄마, 왜 그러는데?”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것을 가지고 당구 친다고 돌아 다니냐? 이놈의 자식아!” 척척 치듯이 “아이고 아파요! 때리지 마세요!” “야야, 그게 어떤 돈인데 안 때리게 됐냐?”형 등록금 낼 돈인데 동생이 당구 쳐서 돈 날리고 이놈아! 하고 또 때리죠. 탄식이죠.
우리가 기도할 때 주여! 하면 기도하는 우리 보고 등짝을 때리면서 그딴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놈의 자식아! 하면서 때리는 거예요. 그거 아니면 뭐 기도할 것도 없는데요. “진짜 자꾸 때리면 아예 기도 안 합니다.”그래서 우리교회는 기도를 전부 다 다양하죠.
탄식한다는 말은 기도 안 한다고 탄식 안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 하고 있어요. 철도 없어요. 철도 어지간히 없어요. 인간이 원래 그래요. 일당 150만원 준다고 하니까 도대체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중학생 보고 일당 150만원 준다고 하니까 얼씨구나 하고 전화를 걸었어요. 그게 뭐냐? 보이스피싱 하고 있었어요. 꼭 우리 모습 같아요.
우리는 코앞에 내 이익이 되는 일이면 이것은 불이든 죽이든 뭔지 몰라요. 무조건 야, 이 일이다! 해 보자!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등짝을 때리죠. 어째서 그것을 모르냐? 하면서 등짝을 때리죠. 때릴 때 손바닥을 아프게 때리잖아요. 왜 그리 아프냐? 성령께서 우리의 등짝을 때릴 때 왜 그리 아프냐 하면 손바닥에 글씨가 써져있어요. 그 글씨가 2절에 나옵니다.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참 우리의 등이 벌게요. 목욕도 못해요. 너무 많이 맞아서요. 특히 그 첫 번째, 두 번째는 사람이 환장을 해요. 사람들이 누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두 번째도 만만치 않습니다. 뭐를 사랑합니까? 일당 150만원, 오늘 뉴스에 나왔어요. 중학생에게 150만원 주고 보이스피싱, 일당 15원 줄게! 중학생 안 합니다. 일당 150원 줄게! 안합니다. 150만원 줄게! 했어요.
이게 뭔 뜻입니까? 뇌물 10만원 줄게 뇌물 안 받습니다. 천만 원 줄게 갈등을 일으킵니다. 2천억 줄게! 받습니다. 평생 살아도 못 벌 돈, 주께서 탄식할 만 합니다. 우리가 천억 짜리 뇌물을 아직 까지 못 받는 초라한 행색이라 그렇지 우리가 몇 백억 만질 수는 그 자리에 올라서게 되면 그 뇌물을 마다할 수 있는 위인은 몇 안 됩니다.
뇌물 받아 먹어 놓고 그리고 결국은 들통 나서 관악산 올라가서 장로가 자살한 성완종 있죠. 욕할 것 없어요. 우리는 아직 까지 관악산 가본적도 없고 그 만큼 뇌물을 만지는 그런 하급, 삼등 시민이에요. 1등, 0.01%에도 못 들어가고 우리는 75%, 60%에 속하기 때문에 푼돈, 길가의 돈도 보면 웬일인가 싶을 정도에요.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이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고마운 것은 그런 일들이 있어야 뭐가 성립이 되느냐 하면 말세가 성립됩니다. 말세가 구성요소를 이루면 여기에 고통 하는 것도 있어야 되고 여기에 자녀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도 있어야 되고 이런 것들에서 돌아서라는 성령의 외침, 말씀도 같이 있어야 되고 이런 것들이 형성될 때 말세의 마지막이 되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하면 우리가 여기서 바르게 살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세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우리도 이미 가담되고 하나님께서 거기다가 가담시켜 줬다는 것을 믿읍시다. 하는 겁니다. 그 현실을 제대로 보자는 겁니다. 나는 빼주세요! 그게 아니고 내가 살겠다고 빠질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구성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모든 것을 말씀대로 모든 것을 구성하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나 혼자 빼는 것이 일이 아니고 너 혼자 거기서 빠져 나오면 너 혼자 구원해 줄게 이게 주의 일이 아니고 말세라는 것을 구성해서 말세가 말세답게 우리가 그것을 감 잡는 사람이 될 때 그때 그게 성도에요. 나는 빠지고 가 아니고 나도 똑같네가 동의가 돼야 돼요.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 안 합니까? 다 고생하고 있잖아요. 다들 다 고단한 삶을 살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다 그렇게 보이는데요. 고단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말씀대로 고통 하는 삶이 되잖아요. 돈이 있다고 고통 안하는 게 아니에요. 돈이 있다고 고통 없는 게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욕심나고 또 누가 가져갈까 걱정하고 두려움이 생기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주님의 입장에서 알자는 겁니다.
그게 뭐냐, 주님의 고난에 의해서 보복 당하는 시대, 마치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 놓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고 보복하는 시대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범위 내에서만 해당되는 그것이 마지막 때에는 모든 지구상 모든 민족에게 증인이 되는 그러한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제 성경이 제대로 보이죠. 마지막 때에는 나까지 포함해서 구성 돼야 돼! 이렇게 보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하면 그렇지 이게 바로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네! 돈을 사랑하고 하면 딱 나네! 그 다음에 자긍하며 자긍이 뭡니까? 스스로 자기를 긍지를 가지고 있죠. “Boys be ambitious" 네가 스스로 긍지를 가지고 살아라! 네가 너를 사랑해서 않으면 아무도 너를 사랑해 줄 사람이 없어! 이게 어디서 나오는 멘트이냐 하면 마포대교에서 자살하는 사람한테 하는 멘트이거든요. 주로 마포경찰서 여자 경찰이 하는 이야기에요. 왜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생명의 전화에서 상담원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왜 당신은 남들에게 휘둘립니까? 본인이 본인을 사랑해야죠. 왜 남들의 평가에 휘둘려서 스스로 귀한 당신을 버리려고 합니까? 이제는 당신을 사랑하세요.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자살 면해서 살아봤자 죽어요. 살아봤자 어떻게 합니까? 그게 복음도 아니고요.
그 다음에 교만하며, 이 교만이라는 말은 이게 누구한테 쓰느냐 하면 이사야에 보면 두로와 시돈, 마귀한테 하는 이야기에요.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하는 이야기 있어요. 이 땅에서는 나 외에 신은 없다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하고 같은 뜻이에요.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신이 있다면 내 안의 신들이지 내가 골라, 왜냐 하면 자가 선택하니까 신을 선택하는 자가 신보다 더 높은 법이에요.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는 내 밑에서 노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무서운 데에요. 마귀를 모아놨는지 자기가 예수를 믿게 돼요.
자기가 예수를 믿고 자기가 주님을 만나러 교회가면 만나지는 거고 바빠서 교회 못가면 예수도 자기를 못 만난 거예요. 예수가 뭐 그런 분입니까? 자기가 가서 만나줘야 되고 안 만나 주면 삐지고 그런 겁니까? 하나님은 사무엘상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2장 30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했는데 제가 이것을 대전에서 설명하면서 뭐라 했습니까? 엘리아 아버지가 자식들을 미워 한 게 아니에요. 자식을 나물했거든요. 하지만 만날 나물해도 내 자식이 하나님 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엘리 제사장은 품고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빌어도 예수께 빌어도 내 자식이 예수보다 하나님보다 더 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또 슬그머니 구원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 구원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해야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해야 되는 이유가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고생해야 돼요. 좀 덜 고생하려고 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마지막 때에 고생하도록 만들어 놨어요. 그리고 등짝을 때리면 그 등 쪽 속에 뭐가 있다? “왜 이렇게 잘난 체해!” “왜 이렇게 교만해!”그러면서 때리는 거예요. 그렇게 얻어맞을 때에 구원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등짝 때려 주는 분이 없을 때, 그 탄식하는 성령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자기 혼자 사는 사람이고 그게 자만이고 그게 교만이에요.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치 아니하며”만약에 제가 지금 몇 가지입니까?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지금 까지 7가지했거든요. 7가지를 일반 부모가 애들에게 7가지를 이야기하면 애들 벌써 문 닫고 나갔어요. “엄마! 고만 해라! 엄마, 1절만 해라! 다 알아 듣다! 아이고 내가 이러니 집구석을 못 들어오지!”벌써 문 닫고 나갔어요. 돈이나 줘! 이러면서 벌써 나갔어요.
응팔에서는 문 닫고 나가지만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간단해요. 성경을 안 보면 돼요. 성경을 안 펼치면 돼요. 펼치기만 하면 이게 나오거든요.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에잇 후딱 닫아요. 성경을 안 보면 되지! 그러면 성경을 안보지만 우리의 고단한 인생은 어떻게 할 건데요? 고단한 인생에 대해서 그 의미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게 왜 고단한 인생인지 피하라고요? 아니에요. 고단했으니까 행복해 줄 수 있다고? 아닙니다. 왜 고단한데요? 이게 말세라 그럽니다.
주께서 곧 오시는 세계라고 말세라는 것은 많이 탐닉하고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건방진 행동을 하게하고 거에 대해서 잔소리하면 듣기 싫어하고 성경 덮어버리고 엄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잔소리 많이 들었다고 엄마한테 대들고 용돈만 주세요! 하면서 말 안 듣는 그런 인간으로 점점 더 엇나가게 되죠.
불신자나 우리나 마찬가지에요. 잔소리를 하게 되면 우리는 반항 끼가 있어서 점점 더 어긋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긋나면 우리는 지옥가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왜 탄식하시는데? 우리의 모든 뜻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내 선택, 내 결정, 내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일체지지 않아요. 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반발, 반항, 삐짐, 분노, 격발, 그것마저 주께서 하게 하심으로서 다시 한 번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그 강도의 모습과 오버랩 되기 위해서 남보고 욕할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강도가 바로 나에요”라고 오버랩 하면서 십자가에 감사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같이 고난 받고 같이 말씀에 살면서 성도인 자와 성도 아닌 자와의 차이입니다.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합니다. 절대로 우리는 훌륭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 중에서 괜찮은 것만 뽑아서 지금의 내 주체의 내용을 채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기억의 존재입니다. 기억이 자기의 자아를 알아봐요. 기억 중에서 안 좋은 기억은 버리고 좋은 기억만 모아서 지금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자신의 기획 때문에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우리는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다 나올 수 있고 조금씩 나올 수도 있고 그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 다릅니다. 제가 이쯤 하면 어떤 사람은 짜증나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만 증거하면 된다니까요. 왜 그렇게 못 알아듣는지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만 증거하면 됩니다. 자꾸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뭔가 전보다 나아진 오늘, 오늘 보다 나아진 내일을 자꾸 그것을 기대하시는데 그것은 마귀한테 사로잡혀서 그런 거예요. 그러지 마세요. 낫기는커녕 나이 들어 보세요. 점점 정신없습니다. 나이 들면 점점 더 자기 이기주의 밖에 없습니다.
안양 강의에서 어떤 분이 자기 어머니를 소개했는데 세상에 자기를 돌봐준 며느리가 돈을 가져갔다고 봐도 욕을 하고 안 봐도 욕을 계속한다는 거예요. 치매 걸려서 며느리가 고생하면서 돌봐줬는데 고맙기는커녕 내 돈을 다 가져갔다! 만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조직이 나이에 관계없이 벌써 나옵니다. 잘되면 다 내 탓이고 못되면 다 남의 탓이고, 다 남 탓이 겹겹이 쌓여서 우리의 기억 속에 남 탓하고 싶은 충동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나이 들어서 두뇌회로가 잘못돼서 다 나오는 겁니다.
계속 보시면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사납다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자신이 사자 새끼 같아요. 세파트같이 뭐 좀 하면 물려고 달려들어요. 얼마나 사나운지 그 앞에 “무정하며”무정하며 알죠. 무정 부르스, 2절 가사 자꾸 바라보면 미워지겠지 이렇게 하는데 무정하게 이제는 정을 준 것도 보상받고 싶어, 정을 준 게 아까워 죽겠어 차라리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을 때 이제는 돌아서야지 그저 자기 아름다움, 자기 추억만 마지막에 챙기잖아요.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하여튼 연세 많은 사람 원통함을 풀지 못해요. 탑골공원 가면 원통함을 풀지 못해요. 만날 안 온다, 전화 안 온다, 용돈 안 준다, 자식 원망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어요. 원통해 미치겠어요.
그 다음에 “참소하며” 만날 고소해요. 강용석 고소대장이라 만날 고소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절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전혀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틈만 나면 삐져나온다는 겁니다. 차를 타고 보세요. 좌석에 보면 욕을 못해서 환장한 사람들이 주르륵 다 있어요.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배신자, “팔며 조급하며”는 이익을 얻는다는 거죠. 어떤 이득을 생각한다는 거죠. “자고하며”스스로 높이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쾌락의 대표적인 것이 쇼핑이죠. 리모컨 들고 올렸다 내렸다 사지도 않으면서 또 보면 사고 싶어 하고 샘플 주면 좋아 보이고 또 사요. 39,900원 완판, 30분 내외 사시면 사은품 더 드립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혈압 높아도 괜찮아요. 이게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거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당연하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쇼핑은 눈에 보니까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종교적인 흉내는 내죠. 왜, 타인의 시선이 있으니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부인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착해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거죠. 나한테 착해서 이익이 없는데 내가 왜 착해야 되냐? 나만 바보 되지“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돌아서기는요? 한 패인데요. 왜 돌아서요? 돌아 설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15가지 아니 19가지 온갖 선이 있는데 그것은 헤아려 보면 되고요.
중요한 것은 이것은 하나의 계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약의 율법을 토라라 하는데 토라가 법이 아니고 가르침이라는 말이 있어요. 율법은 법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법이 아니고 가르침입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어요. 소위 신학교 나온 사람들 중에서요.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이런 취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맵매, 때리기 위해서 법을 만들어 놨다. 지켰어? 안 지켰어? 맞아! 그저 때리기 위해서 금지하고 때리기 위해서 하는 그것은 자애로운 스승, 자애로운 아버지답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토라라는 것은 뭐냐, 마냥 때리는 그 재미로 만든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한번 사람 만들어 보자! 잘 가르쳐서 양육하고 훈계하기 위해서 토라가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틀렸습니다. 토라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하고 상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죠.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 나는 너하고 안 논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안 놀아요. 우리를 가지고 놀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기대를 한다든지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 세상이라는 것은 엉망진창이구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것을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주여! 저 사람이 바로 저에요. 주여! 오늘 밤에 낙원에 가도 좋습니다. 라고 어떤 우리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지 않는 자유에 선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친히 주께서 친히 새롭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만들어 졌다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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