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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디모데후서 3:6 / 예수님의 여자 / 160408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모데후서

디모데후서 3:6 / 예수님의 여자 / 160408

정인순 2016. 4. 9. 20:33

 

 

음성1                      음성2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60408a (예수님의 여자)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6절 보겠습니다.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왜 인간 세상에 유인하는 자들이 있고 더 신기한 것은 왜 유인을 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왜 사기를 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있어 사기를 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기당할 수밖에 없는 어떤 허점들을 가지고 있기에 사기꾼에 낚이는지 오늘 본문은 돈 문제가 아니고 여기 유인한다는 것은 진리문제 가지고 언급을 하는 겁니다.

 

진리문제에 대해서 낚였다는 말은 그 어리석은 여자가 자기 인생관이 뚜렷하지 않다는 뜻이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며 왜 살아야 되며 왜 태어났으며 죽고 난 뒤에 어디에 가게 되느냐,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느냐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만나느냐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정리정돈이 잘 안되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을 까요? 어떻습니까?

 

이런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 진리를 가지고 유인하는 자들을 나름대로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겠죠. 진리를 제대로 알면 남을 그렇게 유인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강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유인하지 않는다. 그러면 유인한다는 것은 제대로 진리가 정립이 안 되었기 때문에 남을 속이려고 그렇게 시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시도에 의해서 걸려든 여자도 진리에 대해서 정립이 안 된 거죠.

 

그렇다면 지금 까지 강의 한 것을 이렇게 정립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전체는 비진리다. 이렇게 정립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뭐냐? 그 증거를 대라고 하면 여기서 유인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세상이 전부 다 진리라면 유인할 필요가 있을까? 없을까요? 모든 인간이 진리라면 그런 세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세계는 천국이잖아요. 천국이 유인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천국은 유인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그림을 세상은 비진리다 할 때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을 이렇게 둘러싸면 되겠죠. 천국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이 세상은 지옥같은 비진리를 허용을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은 무엇이 아직 아니다? 천국이 아직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유인하는 나쁜 짓을 허용을 하고 허락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천국에 속하고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됩니까? 이 세상이 유인하는 것을 그냥 눈 감아 주자! 그런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세상아! 너희들끼리 마음껏 유인하고 유인 당해버려라! 라고 이런 마음을 갖겠죠?

 

세상이 엉터리라는 것을 제발 좀 너희들이 모든 생활면에서 팍팍 보여 다오! 라는 그 여유, 그 용기, 그 자유로움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진리에 속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36절에서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러면 안 돼! 그런 세상에 살면 안 되지, 우리는 열심히 방어해야 되고 우리는 줄 훈련시켜서 두 번 다시 유인 받지 않도록 해야지! 라는 식으로 이 성경 대목을 볼 수 있다 이 말이죠.

 

우리 의존교회는 아무도 유인 받지도 않고 다 같이 유인도 없는 그런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다 같이 힘을 합쳐서 경건을 유념해서 들어서 유인 받지 맙시다! 라고 나온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유인하게 하셨다는 그 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하셨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 세상에 이단과 비진리가 이렇게 횡횡 거려도 어떻게 이것을 방치하시고 그냥 묵인하실까? 아이, 하나님 믿을 것이 못되네, 역시 우리의 실력 외에는 믿지 못하겠다!" 이런 식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믿읍시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디모데후서 36절의 말씀이 곳곳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안 일어나야 돼요? 마땅히 일어나야 되죠. ? 이렇게 일어나라고 적어놓은 글이거든요. 그렇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 진리를 가지고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그런 더러운 부류가 있다는 자체를 즐깁시다. 거기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감사할 것이 없어 오죽 없었으면 이것까지 감사한지 모르겠지만 이단들이 설치고 신천지가 설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합시다. 그리고 한국 교회 전체가 이단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합시다. 우리가 이 시대에서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도록 조치를 해 주시니 이런 친절한 하나님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의 할 것이 있어요. 36절에서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그 인간은 정말 나쁜 놈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죠? 그 나쁜 인간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이단들이 설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합시다. 단 조건이 있어요. 세상에 대해서 비진리로 설치고 있는 그들 중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감사합시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진리로 일한다할 때에 따로 나와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안에서 진리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 세상은 전부 뭐라 했습니까? 비진리죠. 이 비진리에서 혹시 진리가 느껴지고 천국이 느껴지거든 감사합시다. 그리고 비진리를 감사할뿐더러 그 감사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디모데후서 36절처럼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계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겠죠.

 

비진리로 세상이 유인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지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똑똑해서 우리만큼은 비진리를 가지고 살지 않고 우리 빼 놓고 남들은 전부 다 비진리다 그렇게 해서 감사하면 안돼요. 이것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우리를 비진리에 집어넣고 우리도 비진리로 남을 유인하는 그 유인을 행세하는 그 비진리적 인간 속에 집어넣고 그렇게 집어넣은 그 전체에 대해서 그런 조치를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감사를 할 때 비로소 이 디모데후서 3678절 말씀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똑똑해서 진리대로 산다면 디모데후서367절 이것은 신천지 이야기이고 여호와증인 이야기이고 한국교회 이야기이지 우리 이야기가 안 돼 버려요. 우리가 이야기 안 되어 버리면 이것은 무서운 결과가 나오죠. 뭐냐 하면 나의 세계는 주의 말씀이 스며들지 않고 나의 세계는 따로 존재함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우려했던 비진리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제 하나의 결론이 나왔죠. 비진라가 뭡니까? 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했다고 자부하는 것이 비진리에요. 따라서 비진리에 속한 사람이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한다는 말은 너는 나한테 배워야 돼! ? 나는 이미 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너는 모르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배우면 나처럼 완전해 질 수 있어!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허용한 비진리의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보고 진리가 뭡니까? 하면 가만 있어봐, 내가 알려줄게 하지 말고 진리가 뭐냐 하면 당신으로 하여금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어보도록 나한테 찾아오게 하신 그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됩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이 진리가 무엇입니까? 할 때 내가 한 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나처럼 진리를 아세요가 아니라 당신이 비진리적일 수밖에 없는 나에게 항상 돌아서면 나의 세계, 나만의 독자적인 세계, 나만의 확고한 세계를 추구하는 우리 자신에게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어 보도록 조치하신 그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면 그 진리 안에 무엇이 포함됩니까? 내가 진리 아니요, 나는 길도 아니고 나는 생명도 아닙니다를 포함시키는 거죠. 그게 진리 증거예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할 때 왜 12제자를 대동 했는지 아세요? 아무리 너희들이 배워도 결코 진리 아니고 길 아니고 생명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살았느냐 하면 자기 이름으로 살아요. 자기 이름은 뭐가 생성이 되느냐 하면 자기 위한 과거가 뒤에 줄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어디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어디 나왔고 중학교 어디 나왔고 공부를 어떻게 했고 직장생활은 이렇게 했고 죽 이렇게 해서 이것이 오늘날 나입니다. 할 때 그 모든 것은 자기 이름을 거기다가 뒤집어씌운 거예요.

 

나는 그렇게 노력했고 내가 원인이죠. 내가 내 인생 이만큼 되기까지 원인을 내 쪽에서 제공했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 이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12제자의 만남에서 주의할 것은 12제자의 어떤 이름으로 살지 않도록 그들은 주께서 제거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12제자가 받은 축복입니다. 과거 자기 인생이 있는데 그것도 다양하게 있는데 그 어느 인생도 너의 인생 없고 나의 인생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인생도 너의 인생도 없고 나의 인생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의 인생이 있죠? 다시 이야기하면 디모데후서 36절에서 유인하는 자가 있고 유인당하는 어리석은 여자가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문제를 이렇게 했죠. 왜 유인당하는 어리석은 여자가 왜 발생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자 이 말이죠. 인생을 어떻게 살았기에 왜 유인을 당해! 왜 속임을 당하느냐?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바로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았던 거예요. 지나 온 모든 과거가 내가 이만큼 힘들고 이만큼 애써서 이 만큼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과거는 누구의 이름으로 명찰이 붙어 있는가? 전부 다 내 이름이다. 나의 이름, 누가 길에서 당신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면 내가 이렇게 했고 제가 이렇게 했고 내가 자꾸 들어가잖아요. 결국은 아무리 뭘 해도 자기 이름으로 중심으로 구심점이 맞아진 거라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만나면 12제자의 각자의 자기 이름이 있죠. 그러면 12명의 제자면 이름은 몇 개입니까? 12개죠. 그런데 예수님은 12개를 쳐주지 않고 뭐로 포함시킵니까? 기도 할 때 어떻게 기도 하라? 이제부터 너희들은 누구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 이름으로 그러면 그 전에는 누구의 이름으로 했다는 말입니까? 그 전에는 자기가 기도 하니까 옛날에 내가 8살 때 9살 때 내가 알아서 공부했고 부모한테 어떻게 효도했고 부모에게 어떻게 순종했고 모든 것을 자기 이름으로 하듯이 그 이름중의 하나가 헌금을 할 때 내가 이렇게 헌금했고 전도할 때 이렇게 했고 기도 할 때는 이렇게 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이렇게 하나님이여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 12제자 하다 보니까 12제자가 다양하죠. 동일하지 않잖아요. 만약 그런 식으로 가다가는 지상에서도 싸움할 판인데 나중에 천국 가서 한 바탕 싸움 할 거예요. 주님은 그 이름을 뭐로 바꾸십니까?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바꿔서 하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12제자가 주님을 찾아온 모든 경로에 속속들이 무엇이 스며들어있어요? 내 원인, 내 이름, 내 노력이 스며든 것이 아니고 누가 들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알아서 스며 주신 거죠. 그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나니 라는 말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택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 예수님과 12제자의 만남은 하나의 시범 케이스가 돼요. 모델케이스가 됩니다. 어떤 모델케이스냐, 자기 이름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 그 과정을 시범적으로 보여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뜻이에요.

 

최종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지 말고 뭘 봐야 된다는 겁니까? 내 이름에서 주의이름으로 들어가게 된, 그렇게 흘러가게 된 프로세스, 그 과정에 주목해야 돼요. ?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까 구원은 받았는데 구원받은 것이 평소에 나만 위해서 나의 가치를 위해서 살던 내가 마지막 구원의 정점은 뭐였습니까? 내 이름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고 누구의 이름으로 사는 존재다? 주의 이름으로 사는 존재로서 최종적으로 천국에 살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어떤 일이 일어난 겁니까?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바뀔 수 없는 내 중심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뀌어 버릴 때 주님께서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죠?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목표점을 증거해 버리면 이것은 주의 이름이 아니고 이것은 나의 이름이 또 들어가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되어 버려요. 내 이름은 구원받았다가 되면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면 나는? 이렇게 되겠죠. 그러면 구원에 있어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구원받은 사람의 숫자개념대로 전부 다 구원받은 셈이 돼서 영광 돌리고 찬양 받아야 되고 가치 있는 이름들이 한 두 개가 아니고 수백 개 수천 개가 되어 버려요. 나의 이름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에 주목하라 하는데 어떤 과정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필요하다고 조치를 했을까요? 딱 두자입니다.

 

영어로 "death" 우리말로는 죽음입니다. 그냥 달려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정보를 입력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그냥 나의 이름을 죽입니다. 나의 이름을 죽이면서 주의 이름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나의 이름을 죽이죠. 그러면 주의 이름 안에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주의 이름은 포클레인 같아서 뭔가 물었다 하면 그 물린 대상이 죽어버리는 능력이 주의 이름으로부터 방출이 돼요. 쏟아져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어령 교수의 간증을 믿지는 못해요 그냥 인용만 한다면 딸이 미국에서 판사 했죠. 그런데 시력이 안 좋았는데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수술해서 안 된다고 했는데 이어령 교수가 안 된다 치고 그냥 수술 해 달라고 했는데 수술 성공해서 눈이 좋아졌어요. 기적이라 했는데 얼마 안 가서 눈은 됐는데 이번에는 또 암이 걸려버렸네요. 이어령 교수 딸과 제가 아는 선교사가 굉장히 가깝게 지내서 저한테 여러 번 이야기를 했어요.

 

암 걸려 죽게 되었어요. 그 쯤 돼서 이어령 교수가 일본에 학회 때문에 발표 때문에 호텔에 있는데 갑자기 묵상가운데서 빛이 확 들어왔다는 거예요. 제가 이런 간증 안 좋아하는 거 잘 아시죠? 그 사람 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그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죽음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빛이 들어왔을 때 지금 남들은 뭐냐, 딸이 왜 그리 됐느냐? 당신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는데 이어령 교수는 고백하기를 이것은 내가 믿음생활을 잘하면 주를 따르면 낫겠다는 어떤 노림수, 어떤 기대감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딸은 암에 걸렸으니까 이제 죽어도 그만이고 이 말은 뭐냐, 빛이 들어왔을 때 그냥 내 마음속에 빛이 왔다 그뿐 이에요.

이것 왔으니까 이제 기도하면 기도빨 받겠지 하는 어떤 노림수 같은 것은 그 앞에서 용납이 안된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그래서 이어령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내가 그동안 아무리 예수를 믿으려고, 딸이 그렇게 됐으니 내가 예수 믿어줄 테니까 하나님께서 딸을 살려주세요. 이렇게 흥정하는 식으로 아무리 해도 그것은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데 그것은 주께서 먼저 찾아와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찾아와줘야 하고 자기는 수동적이 되고 주는 능동적으로 찾아와야 되는데 중요한 것은 찾아오실 때 그 현상이 나는 죽겠다! 이게 아니고 나 자체가 생각이 나지 않아야 된다는 거예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로 구분하겠어요. 주님이 찾아와서 나를 죽일 때 주의 이름으로 나를 죽이지 않으면 천국을 못 갑니다. 주의 이름으로 죽일 때 1번 힘들다. 2번 나에게 신경 안 쓰인다. 어떤 것입니까? 이어령 교수의 말이 맞는다면 어느 쪽이겠습니까? 빛이 왔을 때 아, 힘들다. 아니면 나는 기쁘다. 누가복음 2장에서 광야에 목동들이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늘에 천사들이 내려와서 빛을 비췄잖아요. 그 목동들이 아, 힘들어 죽겠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어떻게 해요? 그냥 환하고 기쁘죠. 양은 있는데 내일 아침 되면 다 풀 먹여서 보내야 되는데 양 숫자나 늘려주지 쓸데없는 빛은 왜 주나? 이런 생각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이런 생각이 안 들죠.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이 정답이죠. 그런데 2번이 안될 때는 사람들이 억지로 뭘 보느냐 하면 1번 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예요. 부족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가슴을 치면 아프지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 팔아서 교회에 헌납하고 전도한다고 돈 있으면서 없는 척하면서 촌에 가서 구걸하면서 마태복음 10장 싫어한다고 온 동네 민폐 다 끼치고 아프니스칸 가서 걸려서 25만 불 나라 돈 나가게 생기고요. 그것은 힘들죠. 선교한다고 배타고 가서 멀미하면서 헉헉토하면서 이것은 주께서 주신 고난입니다.

 

선교하는데 비 오는데 비 맞아가면서 예수 믿으세요! 했다. 하여튼 드라마를 써요. 온갖 괜찮아 보이는 것은 다 동원 시켜요. 멋있어 보이는 것 자학적인 것, 그 자학적인 것도 쾌락이에요. 최고의 쾌락은 자학에서 오는 거예요. 환자에서 나오는 고름을 받아내어 먹기도 하고 소위 천주교의 성자라는 사람들이 쓸데없이 먹을 것이 없어 그런 것을 먹어요.

 

왜 그런 객기를 부려요? 한 마디로 성령 안 받아서 그래요. 믿음은 없어 그렇습니다. 믿음은 없지 티는 나야 자기 이름의 가치가 지속되어야 하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라도 자기의 가치를 구성하려고 할 때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인하는 자입니다. 그게 어리석은 자들이 유인하는 짓거리가 바로 1번입니다.

 

주님을 본받아서 힘들게 살아가자. 주님도 십자가 지셨으니까 우리도 십자가 지자. 사기꾼들입니다. 제가 제시한 십자가 고난 여러분 아시죠? 시속 한 200으로 광주에서 대구까지 달려보는 것, 3초 만에 시속 100으로 달려요. 고난 많이 받았습니다. 왜 그게 고난이냐 하면 나에 대해서 생각이 안 나니까 고난이에요.

24시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 엄마가 예쁜 애기하고 놀 때입니다. 힘들지? 애기 키우는데? 아니! 고난입니다. 애가 빛이에요. 애를 바라보고 있으면 힘든 줄 몰라요. 이게 고난이에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야야, 힘들지? 하면 그때부터 고난 끝입니다. 그때부터 내 이름으로 살아가요. 아이고, 애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요. 그 때부터 고난이 아니고 자기 영광을 빛내는 거예요.

 

왜 유인하는 자가 나쁜 것이 아니고 왜 유인 당하느냐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이 세상 전체가 독자적으로 자기 이름, 자기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유인 받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마귀로부터 나를 유인해라 하는 식으로 대기되어 있는 상태에 있어요. 지금의 상태가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강의 할 때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해라 이 말이죠. , 그래야 디모데후서 36절이 나까지 적용시키는 귀한 말씀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똑같아!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살게 되면 홀로 살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타인을 내 이름 영향권 속에 함몰시키려고 시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한 마디로 뭐냐? 인생은 게임입니다. 인생은 힘 게임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놀이입니다. 노는 겁니다. 어떤 놀이이냐 티격태격하면서 하는 놀이, 다툼이죠. 다툼을 통해서 자아가 정립이 돼요. 선과 악도 마찬가지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과 악 사이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서 내부적인 다툼이 외부로 등장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 다툼에서, 게임에서 본인을 승자로, 승리하는 자로 확인하기 위한 행위만 내 놓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내 놓는 것이 없어요. 말을 하던지 행동을 하던지 무심코 내 뱉는 꿈속의 모든 이야기도 인생은 자기 게임과 관련이 있어요. 나는 늘 이겨야지 하는 이유를 찾는 그런 게임입니다. 따라서 그 게임을 위해서 양보하기도 하고 고개 숙이기도 하고 아부하기도 하고 뇌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잠시 이보 전진을 위해서 일보 후퇴하고 너무 후퇴해서 나중에 잘릴 수도 있지만 모든 게 게임입니다.

게임에서 승리하면 기쁘고 게임에서 패배했다고 느끼면 슬프죠. 의존교회 재개발 되니까 승리했다는 기분이 듭니까? 패배했다는 기분이 듭니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의존교회 하라고 큰 건물 하나 줬을 때 그게 고맙습니까? 짜증납니까? 그것을 통해서 할 수 있죠. 고맙죠. 그러면 그 건물 없으면 그것은 패배자가 되는 거죠. 말은 안 해도 패배한 자가 되죠.

 

패배한 자이니까 그것을 티내면 신앙 없는 거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게임에서 패배한 것을 한군데로 모아요. 모으고 그것을 억압을 하는데 그 억압을 무의식에다 그것을 집어넣어요. 눌리는데 이게 긴장이 풀리면 용수철처럼 튀어나옵니다. 주님이여, 이것까지 참겠습니다. 주님한테 이렇게 기도 하죠. 주여, 이것마저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인줄 알고 참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이렇게 잘 참는데 옆에서 교회 없다 하면 에이 하면서 폭발해요. 그렇게 잘 참다가 옆에서 건드리면 팍 폭발해 버려요. 안 참았네. 따로 챙겨 놨어요.

 

그게 바로 디모데후서 36절 말씀인데 그게 바로 비 진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이름이에요. 그런데 정답은 알아요. 이게 누가 하셨다? 교회를 옮기게 하신 것이 누가 하셨다? 주님께서 주의 이름을 걸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한테 아직도 내 이름으로 벌리는 게임에서 내가 패자가 아니라 승자가 되려면 누구의 이름이 빛나야 됩니까? 역시 나는 대단해! 내 이름을 빛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상실한 것에 대해서 짜증이 나죠.

 

이런 것은 짜증나는 것으로 끝나지만 제일 짜증나는 것이 뭐냐, 이 몸이 누구 이름이냐 하면 내 이름으로 하잖아요. 그러면 제일 짜증나는 것이 내 몸이 아플 때 패배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안양 강의에서 마침 거기서 벚꽃 축제한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축제한다고 텐트 쳤다가 경찰한테 걸려서 다시 철거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 왔는데 벚꽃 축제 백날 벌려도 이 몸이 감기 걸리고 몸이 아프면 그게 전혀 아름답지가 않아요. 그런데 자기 몸만 아름다우면 벚꽃이 안 펴도 들꽃만 봐도 아름다워요. 그러면 결국 뭐가 아름다운 거예요? 자기 자신이 아름다운 거예요. 자기 자신이 아름다운 거예요. 내가 여기 있음에 그게 제일 아름다운 거예요. 내가 만족스럽게 내가 있을 때 그게 가장 아름다움이에요.

 

그 아름다움을 신봉하고 경배할 뿐입니다. 집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나쁜 일이 하나 생기면 우리는 모든 걸 아이고 재수 없네! 이렇게 하는데 이상하게 좋은 일 하나 생기고 좋은 일 하나 생겨 버리면 이게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낭패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애가 공부를 잘해서 학생회장이 되었다. 아무 도움도 안 줬는데 우리애가 이렇게 똑똑한지 몰랐다. 상을 받아 왔다. 기쁘죠. 그러면 그 날은 기뻐 해야 되는데 좋다고 하다가 또 자전거 타고 가다가 박아서 한 20만원 물어 줬다면 20만원 같으면 상쇄가 되겠네요. 200만원 물어줬다고 하면 오늘은 좋은 날인지 나쁜 날인지 혼동이 되죠. 그 때는 나쁜 소속부터 들려줄까? 좋은 소식 먼저 들려줄까? 이렇게 나오죠.

 

인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이 자기 이름을 걸고 항상 늘 게임을 하는데 게임을 하기 위해서 누구를 찾습니까? 대상을 찾아서 그 대상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시간들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비 진리적 유인이고 그 비 진리적 유인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상대가 되겠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특정 미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나 잘 되기 위해서 나보다 어수룩한 사람을 꼬이고 이용해 먹겠다는 그저 나만 승자만 되면 남이야 어떻게 되던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평소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거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감사하라 했죠. ? 주님 앞에 들켰기 때문에 이것 보다 감사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들켰다는 말은 이미 목표가 구원 받았다는 거예요. 구원 받았으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잖아요. 전에는 우리가 무슨 이름이었습니까? 나의 이름으로 살았죠. 나의 이름으로 산 것에 주의 이름으로 덮쳐서 구원을 시켰으니까 이제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뭡니까? 나의 이름으로 비 진리로 살아가는 그 면면을 내가 계속 살아가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이 즐거움, 그런 즐거움은 돈 주고도 못 사는 큰 행복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 전체와 다 일치되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성경 말씀이 전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과학시대이죠. 과학시대에 뭐가 최고 이냐 하면 수학 공식이 최고입니다. 수학 공식으로 달까지 화성까지 보내잖아요. 그런데 인생은 수학 공식처럼 됩니까? 안됩니까? 알파고가 행복합니까? 이겼잖아요. 구글이 행복하지 알파고, 기계가 행복을 느낍니까? 못 느끼잖아요.

 

인간이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은 계산에 나와 있어요. 핵 개발하려면 프로트론은 어떻게 하고 우라늄을 어떻게 재정리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수학 공식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세상은 모든 것이 수학 공식처럼 그렇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즐겁고 행복하냐? 하는 그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수학 공식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학 공식대로 사는 것이 이게 기계적 존재인데 실제로 인간이 사는 것은 과학 공식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뭐로 사느냐 구조적으로 살아요. 구조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면 내 주변에 어떤 구조가 있고 구조 안에 있는 구조의 원리가 내 안 까지 들어와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연극무대가 여기 있습니다. 연극 연기자들이 여기서 연기를 하는데 공을 주고받고 주고 받고 있습니다. 그럼 물어 봅시다. 공을 주고 받다가 잘못 줘서 관객석으로 떨어졌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관객이 공을 주어서 무대에 도로 집어넣어야 됩니까? 그냥 놔둬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을 주고 받는 연기를 하다가 잘못 던져서 관객석으로 떨어졌으면 관객이 공을 연극 무대에 다시 던져야 됩니까? 가지고 있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야구할 때 파울볼 돼서 다이아몬드 밖으로 공이 나가면 그 볼을 관객이 주고 갑니까? 가져갑니까? 안 주고 가져가죠. 관객이 만약에 공을 집어 던지면 무대가 넓혀져야 돼요.

 

지금 여기기 경계선 칸막이가 있어요. 무대는 새로운 현실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구경만 해야지 가담하면 안돼요. 만약에 어떤 나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착한 여인을 구박할 때 구박한 자체가 연극의 일부인데 그것을 보고 어떤 노인네가 와서 이 나쁜 놈하고 멱살을 잡아 버리면 연극의 범위가 관객까지 이어져버리잖아요. 그러면 그 노인네는 그런 식으로 연극을 깰 것이 아니고 그 다음 연극 타임에 그 노인을 불러서 그 연극을 시켜 줘야 돼요. 이 타임에 당신이 뛰어 나와서 이렇게 해라 이렇게 된다 말이죠.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쪽 구조와 이쪽 구조가 통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통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통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면 이 쪽 구조는 예수님이 알고 있는 세상 구조에요. 그런데 이 쪽 구조는 예수님을 모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빼 놓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빼 놓고 인간들끼리 노는 하나의 연극 무대라는 말이죠. 예수님과 하나님을 빼 놓으니까 이 연극 무대를 연극 무대라 하지 않고 현실 그 자체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이 늙어 죽는 역할이에요. 아담으로 난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다 늙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구조에서 확정된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의 구조를 차 버리니까 우리가 왜 늙지? 머리가 왜 희어지지? 우리는 왜 몸이 아프지? 왜 암에 걸리고 왜 죽음의 효과가 자꾸 들어나지?”모르는 거예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저 과학적인 공식과 의료만 발달시켜서 자체적으로 폐쇄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36절에서 유인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여자 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세계, 하나님의 구조를 전혀 모르고 이 쪽 안에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게임하고 놀자! 이 구조에 국한되기 때문에 이 쪽 세계에서 볼 때는 비진리요 유인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제 사도바울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어리석은 자를 유인할 때 비진리라고 했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디 가 있어요? 이 쪽 구조에 있으면서 저 쪽까지 예수님의 전부 다 예수님의 무대로 생각한 사람에게만 이런 관점과 안목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에게 너도 같은 안목이냐고 물으면서 이 디모데후서 36절을 설명하는 겁니다. 어떻게 연극무대를 넓힐 의향이 없습니까? 연극 무대를 넓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지상파 방송에서는 뉴스시간에 세상눈에 보이는 것으로 다 스톱을 시켜 놨어요. 북한의 핵폭탄, 쿠바하고 미국하고 서로 교류한다, 중국에 시진핑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 그것을 사람들이 듣고 그들이 생각하는 무대는 뭐였습니까? 예수님 생각합니까? 하나님 생각 안하죠?

 

그러면 뭐만 생각합니까? 그래, 세상은 힘 있는 자가 승리하는 거야! 이게 진리야! 라고 자체적으로 주님을 확정 시켜 버리겠죠. 바로 그 세계에서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울이라 하는 사람은 공놀이 하다가 공이 튕겨져 나와서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이런 놀이 하다가 힘이 있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였는데 그때 갑자기 외부에서 공이 날아왔네요. 공이 날라오니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이 뭐라 했느냐 하면 주여! 주여! 누구십니까? 그랬죠. 이 공은 무슨 공입니까?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핵심적이에요.

 

나는 예수다가 아니에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러면 이 공, 인간 현실밖에 없는 이 구조 전부 안에 이 낯선 예수님의 세계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겁니까? 안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이미 활동을 하고 있어요? 안 하고 있어요? 엄연히 활동을 하고 있었죠. 인간들이 이것을 깨버렸잖아요. 인간들끼리 중국 시진핑 오바마 그들이 모여서 현실로 봤다 이 말이죠. 일본 아베 총리, 김정은 이런 사람들을 현실로 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요. 뉴스시간에 띵 예수님께서 이런 것 안 나옵니다.

 

그런데 공이 나를 핍박하는 예수라 하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얼룩이에요. 어떤 얼룩이냐 상처 받은 얼룩으로 너희들이 너희들의 세계, 현실이라고 고집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억울함을 당하는 얼룩으로서 지금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 쪽 세계로 공들이 날아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뭡니까? 다른 사람과 성도의 차이는 다른 사람은 이 얼룩을 없애 버리죠. 성도는 그 얼룩을 유발시키는 유발자가 바로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 핍박을 통해서 사울과 예수님은 관계가 맺어져 있습니다. 네가 핍박함으로서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으로만 들어내는 숨겨진 세계가 유효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공의 이름은 뭐냐 십자가죠. 십자가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주님을 핍박하는 그런 요소들이 주님을 핍박하는 얼룩, 다른 세계와 내 세계가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네라고 확인할 수 있는 사연들이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를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 세상은 게임입니다. 게임의 승자는 힘이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의 현실이라는 것은 출렁이는 힘들의 세계이고 힘들의 세계에서 패자가 되지 않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 힘의 중점으로 흩어져 모이는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어디서 힘이 많은지 누가 힘을 갖고 있는지 어느 회사를 취직하면 연봉이 많은지 어느 곳에 가면오래 건강하게 힘을 유지 할 수 있는지 행동을 합니다.

 

옛날에 제가 학교 졸업하고 취직한 공장은 매연 덩어리 공장이었어요. 월급치고 사람이 거기 한 달만 있어도 완전히 속이 연탄 되겠어요. 그래서 거기 회사직원은 만날 끝나고 난 뒤에 속에 시커먼 거 끄집어 낸다고 삼겹살하고 소주 먹으로 가는 게 하루 일과에요. 이거 끄집어 난다고 완전히 알콜중독자 되겠어요.

 

그러면 왜 환경자체를 왜 하느냐? 돈을 타게 되면 그 회사가 힘을 엉뚱한데 소비가 되는 겁니다. 노동자들은 죽이고 그 모은 힘 가지고 더 힘 있는 공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참으라고 하는 거예요. 싫으면 나가고 너 아니라도 일꾼 많으니까 그러니까 보세요. 이 세상이라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그냥 말이 현실이지 힘의 울룽불룽한 힘의 균형상태를 계속유지 해 가는 힘들의 세계에요. 그게 비진리이고 거기에 유인을 당해요? 유인을 당하기는커녕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돼요.

 

나도 게임에서 승자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 집안 꼴이 엉망인데 내가 하나 출세해서 우리 집안을 확 한번 일으켜보자. 뭐로? 힘으로 공부 잘해서 판사, 검사 돼서 힘으로 그게 바로 비진리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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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60408b (예수님의 여자)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6절에서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이런 경우를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윤리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고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모르고 예수님의 세계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르고 그냥 인간세계에서 성공하면 그게 다야 그게 출세한 거라 라는 쪽으로 유인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형편이라 이 말이죠. 그렇게 봐야 되는 이유가 유인당하는 여인이 있다는 게 주님을 그리워 했는데 유인 당한게 이아니에요. 유인당하는 그 사람은 유인당할 만한 환경과 현실의 그 안에서 그 일부로서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이 디모데후서 36절의 이 말씀이 오늘날도 말씀이니까 반드시 이 말씀대로 되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말씀대로 되어 가기 때문에 바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일어날 때에 유인하는 것도 생각해야 되지만 왜 유인 받을 만한 그러한 마음들을 갖게 되었는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여성과 남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누구나 동의 하는데 왜 성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 서로 차이 나게 만들었냐?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속 시원하게 답변을 들을 수가 없죠. 왜냐하면 본인들이 그런 답변을 관심있어야 그런 답변을 기대하는데 관심이 없으면 그런 답변을 기대안하거든요.

 

그러면 남성과 여성으로 이 땅에 살면서 궁극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뭐로 끝나느냐 하면 하늘나라 가면 전부 다 천사와 같다고 했어요. 그러면 여성과 남성은 어디에 국한 되는 성의 차이냐 하면 이 세상에만 활용될 의미 있는 남성과 여성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가면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는 천사와 같이 되니까 영적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그 관계, 그리고 그 연결, 이런 것을 통해서 세상에 그 실체와 본질이 드러나는 거예요.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기를 무엇의 후손이라 했죠? 여자의 후손이 누구를 이긴다? 뱀의 후손을 이기죠.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이긴 것이 아니에요. 여자는 뱀의 후손을 이깁니다. 그러면 남자 어디 갔습니까? 여기서 남자의 기능, 남자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싸운다고 되어 있을 때에 정작 현실적으로 여자가 상대가 하는 것은 뱀입니까? 남자입니까? 여자가 어디 뱀 찾아서 다닙니까? 여자가 자기가 여자라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 앞에서 여자죠? 남자 앞에서 여자잖아요. 남탕 안 가고 여탕 가잖아요. 우리가 현실 구조에서 여자 남자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구조는 뭐로 되어 있습니까? 여자와 뱀과 연결시켜 놨어요. 그러면 뱀은 어디서 온 뱀이냐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여자하고 남자하고 플러스 뱀하고 같이 산다고 할 수 없어요. 집에 개는 있지만 뱀은 없잖아요. 집에 뱀을 키우는 집은 별로 없어요. 집에 개를 키우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것은 여자와 뱀으로 구성된 세상이에요. 이게 어렵습니까? 성경 창세기 315절의 약속인데 여자가 뱀으로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뱀의 후손은 우리 눈에 있어요? 없어요? 우리 눈에? 뱀의 후손이 안 나타나잖아요. 안 나타나는 온전한 주님께서 생각한 그 구조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감을 느낄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평소에는 뭐냐 하면 여자는 누구 앞에서 여자 이냐 하면 남자 앞에서 여자에요. 그러면 뭐가 되냐? 남성과 여성으로 되는 겁니다. 남성과 여성에 의해서 세상이 구성이 되면 거기서 나온 세상이 올바른 현실이냐 할 때 올바른 현실이 아니죠. 뭐가 빠졌습니까? 남성과 여성으로 할 때 뭐가 빠졌죠? 남성과 여성으로 되어 버리면 뭐가 빠져요? 원래 진짜 현실은 창세기 315절이잖아요. 그런데 남성과 여성으로 되어 버리면 뭐가 빠져요? 뭐의 후손이 빠져버립니까? 뱀의 후손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 하고 누구 후손하고 싸운다고요? 뱀의 후손하고 싸우는데 구조가 남성 여성으로 된 이 구조에서 뱀의 후손과 여성이 사는 구조로 전화되면서 실제로 하나님이 생각한 세상이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남성과 여성이 만남으로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식이 생깁니다. 자식이 생긴다면 여기에 자식에게 누가 관여를 하느냐 하면 남성도 관여하고 여성도 관여해서 자식이 생겼다고 되어 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이 생각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약속과는 틀어져 버리는 그 노선과 안 맞는 그러한 생각이 되어 버려요.

 

결국은 남자, 여자, 자식 이게 전부 한 마디로 육의 세계죠. 약속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여기 누가 등장해 줘야 합니까? 뱀이 등장해 줘야 이게 제대로 하나님이 원하는 약속의 세상이 되거든요. 지금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그렇게 싸운다고 해도 막상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뱀의 후손의 존재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다시 천천히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세기 315절에 근거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제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뱀의 후손이 여기서 등장하지 않고 뭐만 등장하느냐,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이 상황만 반복해서 계속 이어져 가고 있어요. 지난 수요일에 그것을 패턴이라 했죠. 자식을 낳는 거예요. 자식을 낳아 버리면 이 자식에는 어떤 요소, 남자의 요소와 여성의 요소가 들어가서 자식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한다면 원래 성경에서 말하는 창세기 315절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야 하는데 뱀의 후손은 날아가 버리고 나타나지 않고 그냥 남자 여자만 있으면 현실이 갖추어 지니까 이 현실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현실과 같아요? 달라요? 이게 다르다 이 말입니다.

 

다르게 되어 버리면 구조적으로 이것은 비진리가 되어 버려요. 비진리가 되면서 여기에 속한 사람들 전부 다 유인 받을 수 밖에 없는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 진리에 대해서 모르니까요. 진리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것을 알아야 진리인데 상식적으로 남자, 여자 결혼해 자식 있으면 끝나는 문제이거든요. 가정 이래 살잖아요. 사람 사는 게 이렇지 뭐 있어요? 별거 있어요? 남자 여자 결혼해서 애 놓으면 그게 가정이지. 그럼 뱀은? 그러면

뱀 하나 키울까요? 그러면 조건이 충족되는 겁니까?

 

남자 여자가 자식을 낳을 때 이 자식은 남자 여자만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이에요. 여성과 남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개입돼서 여호와가 개입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인간들이 알 수 없었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 관한 내용과 정보를 가지고 여자와 동침을 해 버리면 자식이 나와 버리고 이 자식에게는 뱀의 후손의 요소가 품어진 자식을 낳게 됩니다.

 

이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 하와가 아담과 동침하매 자식을 낳아서 이름을 얻었다. 가인입니다. 주께서 약속대로 개입하셨고 개입한 결과가 가인이었다고 생각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화와의 이름이 생명이거든요. 생명에서 난 자식이니까 그것이 여자의 후손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또 생겨 버렸어요. 또 생기니까 어떻게 됩니까? 둘 중에 누가 누구인지 모르죠. 내 여호와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둘중에 하나님는 허무해져 버려요. 아벨이 갑자기 얻었다고 좋다고 하다가 갑자기 둘째의 이름이 허무하게 된겁니다.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 자식을 낳으면서도 아담의 자리에 여호와로 말미암아 자식을 낳게 해서 남자 여자 말고 여호와의 개입, 여호와의 개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개입으로 자식이 나왔을 때 이 자식, 두 명의 자식, 자식은 하나가 아니고 1인이 아니고 몇 인입니까? 2, 2인 같으면 여기서 뭐가 존재합니까? 1인과 1인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면서 하나는 가해자가 되고 하나는 피해자가 되죠. 피해자는 누구를 말하죠? 아벨이고 가해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가인이죠. 그 관계에서 피가 흘려져 있고 이 관계가 뭐하고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이 관계 속에서 여자의 후손이 싸워야 될 뱀의 후손의 정체가 여기에 적용되게 되는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아벨을 죽였죠. 그러면 아벨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소멸되는 겁니다. 소멸 된다는 것은 부재에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사라진 겁니다. 그러면 존재는 뭐냐? 뭐만 존재합니까? 가인만 존재하죠. 그래서 가인을 어떻게 합니까? 가인을 하나님께서 지켜 줘서 계속 가인의 자식을 팽창 시켰죠. 최초의 도시, 최초의 음악, 최초의 철기문화, 모든 것은 어디서 나왔어요? 가인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 가인의 문화에서 추구하는 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겁니다. 있는 것들을 결합시키는 힘은 권력의 힘이에요. 그러나 정작 여자의 후손은 부재에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앞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또 관여 해야 되죠. 여호와께서 또 관여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기존에 있던 존재가 뱀의 후손과 관련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뭐냐? 여자의 후손은 존재의 범주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있음에 의해서 핍박받고 학대 받고 죽었는데 그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기능으로서 여자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 저는 구원 받은 백성 맞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여자의 후손에 속한 백성이 맞습니까? 라고 하려면 나로 인해서 예수그리스도가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였으면 좋겠다는 속성을 경유하고 그 속성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으려고 해도 못 찾았던 뱀의 속성과 연관성이 드러나면서 거기에 주의 은혜가 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확인되는 겁니다.

 

어떤 사례가 있느냐 하면 간단하죠. 월급날 통장에 돈 들어오니까 기쁘다. 기쁘죠. 돈이 빠져야 기쁩니까? 보이스피싱 당해야 기뻐요? 돈 들어오면 좋죠. 월급 따박따박 들어오면 돈 좋죠. 그러면 주님이 시비 걸죠. 돈이 좋으냐? 내가 좋으냐? 시비를 걸 때 찬송가에 나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돈이 귀해? 내가 귀해? 물으면 주께서 만약에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 해야 됩니까? 돈을 주시는 주님이 좋죠. 라고 이야기를 한다 말이죠. 꼼수를 써서 말 한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돈을 뺏어버리면 그것도 좋으냐? 할 때 욥식으로 하면 좋아야 되는데 제가 욥처럼 믿음이 안 돼서 좀 봐주세요. 이렇게 된다 말이죠. 믿음 없으니까 봐주세요. 이 돈이 있어야 우리 자식들이 살건 데 좀 봐주세요.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 말은 뭐냐, 이런 말이에요. 독자적인 나의 세계, 변두리로 나가 주세요. 라고 해요. 독자적인 나의 구심점에서 저쪽으로 한 곳에 가 있어요. 라고 밀어내는 거예요. 이게 남성의 세계입니다. 남성의 세계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을 구축하는 게 남성의 힘이에요.

 

끊임없이 최고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남성은 완벽한 최고가 될 때 까지 그 모든 시도를 멈추거나 쉴 의사가 없어요. 달리고 또 달리고 계속 노력합니다. 최고가 될 때 까지 모든 것을 가질 때 까지 그리고 그것이 나의 세계에 최종점이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내 달리게 되어 있어요. 그게 남성의 세계입니다. 남성의 세계는 남성만의 세계가 아니죠. 남성의 세계에서 모든 여성도 뭐로 양육 받습니까? 남자 같은 여자로 전부 다 양육 받아요.

 

제가 내일 주례가 있는데 주례사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제발 여자를 남자로 만들지 마라! 준비한 멘트가 있습니다. 여자를 남자로 만들려면 이미 구심점은 여자일까요? 남자일까요? 남자를 세워놓고 너는 나를 협조하고 도와주는 쪽으로만 여성이 돼야 돼! 너는 나를 돕는 자잖아 배필자잖아! 그러니까 남성 위주로 너는 돕는 자가 돼야 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여성이 아내가 해야 될 모든 경향성,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누구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예요? 여자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남자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보안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겠죠. 그러면 진정한 여성성은 날아가 버려요. 그런데 뱀하고 사는 것인 남성이 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산다? 여자의 후손입니다.

 

남자의 후손은 자체가 없어요. 어디 안에? 여호와의 약속 안에, 어디 안에? 여호와의 기능 안에 누구 안에? 여호와 안에 여호와 안에 누가 없어요? 남자가 없어요. 여호와의 세계는 남자가 없는 세계에요. 독자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 독자적으로 용납을 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가면 누가 12제자 중에 누가 높습니까? 이게 독자적인 거예요. 12제자가 서로 경쟁하는 그런 하늘나라에 하나님 우편 누가 앉느냐?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겠느냐 라고 경쟁하는 그런 심보 그럴 때 예수님께서 누구를 내세웠습니까? 어린 아이를 내세웠죠.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남자는 없다는 말은 남성적인 그런 경향은 여호와 하나님한테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있어요. 이 세상은 뱀이 주도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뱀이 주도하는 줄을 사람들은 모르고 뭐가 주도하느냐 하면 여성이 남성을 주도한다고 본 거예요. 창세기 423절을 봅시다. “라멕이 아내들에게라멕의 아내가 아니고 아내들이죠. 그러면 라멕은 한 사람인데 아내는 몇 명이에요? 두 명이죠. 그러면 라멕의 아내가 두 명이 아니고 아내들이 돼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라멕의 아내들이 두 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에게는 둘이라는 숫자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냥 라멕의 아내들이에요. 한 백 명이다. 그러면 백이라는 숫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에게 숫자를 붙이는 게 아니고 여자 하나가 독자적이 돼요. 독자적인 것은 남성을 경유해서 남성에게만 붙이는 것이지 여자한테는 붙이지 않습니다. 이 많은 여자들은 누구 독자에게 속한 숫자 1에 속하느냐 남성을 경유한 여성이지 여성을 독자적으로 그 의미를 묻는 세계가 아니에요. 남자 될래요? 여자 될래요?

 

남자가 이렇게 여성을 많이 거느리는 것은 힘의 증거입니다. 힘이 그 만큼 모았다는 겁니다. 그 만큼 먹여 살릴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랍 세계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힘 있는 부자인 남자한테는 아내가 많이 달려야 되고 가난한 남자한테는 여자가 없어도 그만이고 왜? 그래야 여자도 골고루 밥 먹고 사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랍에서는 너무 한다 싶어서 네 명까지는 봐준다고 그러는데 4명까지 하려면 아랍세계에서도 상위 10% 안에 들어야 살 수 있어요. 여자 하나당 차 벤츠 하나씩 4대를 다 사주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사줄 수 있어요?

 

남성이라는 것은 독자적인 세계, 하지만 그 안에는 결핍이 있어요. 결핍을 위에 꼭대기에 두고 그 자리를 비워두고 계속 추구하는 거예요. 그 결핍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그래서 남성은 전부 다 미쳤어요. 아무리 가져도 결핍이 생기기 때문에 만족함이 없습니다. 남자한테는 만족함이 없어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아내를 가져도 많은 토지와 포도를 생산해도 다 헛되고 허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여성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결핍의 한계를 밖에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결핍을 자기 안에 두는 겁니다. 나는 뭘 해도 결핍 되었으니까 누구를 의존해야 되고 의지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여성성이에요.

 

남성은 뭐라 했습니까? 독자성이죠. 나는 어떤 경우라도 못 먹어도 고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내 자존심을 포기 하지 않고 있는 내 힘으로 살리라! 만약에 못 살 것 같으면 마포대교나 한강대교에 가서 뛰어 내려야 된다. 남자가 되었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나는 그렇게 못 산다. 나는 나를 위해서 남자의 이름으로 사는 가장 멋있는 모습이다. 이상의 목표가 있지만 여자한테는 무슨 목표가 있어! 여자는 목표가 없어! 좋은 남자만나서 시집가면 그만 이야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안에 마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이것을 누구한테 일임을 하느냐 남성한테 못다핀 꽃 한 송이를 그냥 받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의존적인 거예요. 우리 교회를 가지고 뭐라 하죠? 예수님의 신부, 예수님의 여성이에요. 예수님의 여자가 교회입니다. 교회의 특징이 뭐냐? 자기 완결성입니까? 아까 제가 안양 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했지만 지적 할 것이 없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님 앞에 늘 인도 받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입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남자 같으면 지적 받을 일이 없기를 바래요. 자기가 독자적이니까요.

 

그런데 만약에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이 남자하고 나는 여자 하면 되잖아요. 그게 바로 이 땅에 등장하는 뱀을 이기는 유일한 승자가 여성들, 여자의 후손이에요. 그 여자의 특징은 자체적 완전을 완결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예 포기를 하죠. 가기 안에 구멍이 뚫려있고 자기 안이 결핍됐다는 것을 일찍부터 인정하고 자인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남자가 못난 놈, 못난 놈 하는 것은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잘 넘기면 되겠습니다. 하는 그런 바람 같은 것, 욕구 같은 것을 작용한다면 여자가 생각하기는 나는 못난 것 하는 것은 그냥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은 어느 쪽을 원할까요? 남성성을 원할까요? 여성성을 원할까요? 당연히 여성성을 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있는데 자기가 남편 노릇하면 안 되잖아요. 남편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남편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5장에서 바로 남자들이 이야기하면서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님에게 복종하듯이 하고 남편 된 자는 아내에게 사랑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몸을 받친 것처럼 사랑하라! 그 이야기를 들으시면 전부 다 이혼 하려고 서류준비 해요. 이거 봐라 당신 말만 남편이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무슨 남편이냐! 그러면 남자 쪽에서 너는 아내라고 할 수 있어! 이거 봐 이게 매뉴얼인데 이 매뉴얼대로 했어? 싸움 하고 난리죠. 싸움을 방지하는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이것은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토를 달아 버리죠.

 

아하, 교회에 대해서 그렇구나! 가정이라 하는 것은 완전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해요. 가정에서 완전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남성의 생각일거에요. 이왕 결혼한 것 완벽한 남편감이 되고자 독자적으로 시도하게 될겁니다. 어느 날 내가 지금 이만큼 왔는데 90% 왔는데 10%만 마저 채우면 내가 완벽한 남편깜이 된다고 목적을 두고 그 목표를 위해서 매진하는 것과 여자는 포기해라! 남편 따로 있다! 이게 여자거든요. 예수님이 남편이 되지 네가 꼭 남편 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 이게 남자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남성성 여성성을 이야기한다고 했죠.

 

이 말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전부 다 독자적으로 가는 경향을 보여 주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멀쩡한 남자라도 산 도둑 같은 남자라도 주 앞에서는 엉엉 울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 그 산 도둑이 성도에요. 자기 안에 구멍을 발견한 거예요. 이 결핍은 매 꾸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생 자체가 나는 결핍되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을 때 그 내 자식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상에 어떻게 구체화 되는가와 관련된 자식 낳음입니다. 가인과 아벨, 어떤 사람은 아담이 낳은 자식이 둘 밖에 없느냐? 라고 하는데 왜 둘만 있겠어요? 많이 낳았죠. 하지만 여호와로 말미암아 관계된 것은 가인과 아벨 밖에 없어요. 그래야 가인이 다른 여자 하고 또 살죠. 다른 동네 가서 살죠. 성경은 인류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약속이 어떻게 펼쳐지느냐와 관련된 것만 골라서 한 거예요.

 

크로마뇽인이 어디 있어요? 크로마뇽인이 왜 나오는데요? 크씨 집안이 왜 있는데? 그런 거 없어요. 호모사피엔스 그쪽 진화론에 의하면 5만 년 전에 나온 거, 네안데르탈인은 20만년전 크로마뇽인은 15만년전 그 중에 백만년 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직립보행 이런 것, 그런 것을 시도 한 자체가 이게 남성성이라니까요. 과학이라는 뭡니까? 과학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결핍은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향성 자체를 진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완전한 진리는 따로 있겠지만 그 진리로 인하여 그 간격을 좁혀가고 있는 이 시도, 이것이 오늘날 문명과 가인의 문명을 이룬 거예요. 그런데 그 시도를 할 때 누구의 힘으로 했습니까? 남성의 힘으로 해요. 남성은 무엇의 기호이다? 힘의 기호에요. ? 여성을 지배할 수는 무슨 자격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들이여!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 남성은 남성 자체가 배후에 숨어있는 악마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남성 자체는 몰라요.

 

그러나 그 남성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식으로 여성이 등장할 때 비로소 남성은 없고 그 자리에 뱀이 내 자리를 차지해서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보면 애들이 잠자러 갈 때 알프스 산에서 목동들이 나무 인형을 가지고 잠자러 갈 때 하는 꼭두각시 인형 노리 있죠. 그게 뭐냐 하면 악마가 여성의 후손과 싸움 하는 자체를 묵살시키기 위해서 남성을 인간의 대표로 잡아서 남성 가지고 조정하고 협력하면서 이 세상을 이루고 온 겁니다.

 

남성이 뱀의 후손과 관련된다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여호와의 개입으로 나타난 사실입니다. 남성은 자식을 낳는데 하나님이 개입해 버리면 이 남성이 자식을 낳을 때 남성의 자식이 아니고 여성의 자식이 되는 식으로 방향 틀기가 여호와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식이 누구였죠? 처음에 어느 자식을 낳았습니까? 이스마엘을 낳았죠. 이스마엘은 누구에게 속하느냐? 아브라함에 속하죠. 그런데 이삭은 누구한테 속합니까? 아브람에 속하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된 것은 누가 개입해서 그렇습니까? 천사 3명이 개입했죠. 여호와 쪽에서 파견 근무한 여호와 쪽에서 개입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되어서 이삭이 되었죠.

 

그렇다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누구의 자식? 개입하신 여호와의 자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누구한테 바치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아 네 손으로 자식을 여호와께 받쳐라! 여호와께 바쳐버리면 이 아브라함의 자리에는 아브라함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남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여호와가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여호와가 등장할 때 어떻게 등장합니까? 여자의 후손으로 등장하죠.

 

죽었던 사래가 무에서 유가 되고 죽었던 태가 살아나잖아요. 죽었던 자가 살아나서 그 자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스마엘 계통의 남성 계통의 세계를 이기고 여기 틈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진행 시키는 그런 놀라운 기적들이 나옵니다. 성경 자체가 그렇죠.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남성은 독자적이라 했죠. 자기만 있으면 살 수 있어요. 여성은 뭐라 했습니까? 독자적의 반대말이 뭡니까? 의존적이라 했죠. 그러면 이것을 하나의 구조로 늘어보자. 독자적인 구조로 늘어 보면 이것이 짐승의 세계가 되고 여성 논리를 구조화 시키면 이것은 언약의 나라,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삭의 자식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죠. 왜냐, 리브가가 애를 못 낳으니까요. 그런데 누가 개입을 해요? 리브가가 이삭을 만날 때 약속이 있었습니다. 라반이 뭐라 해요? 네가 시집가거든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된다 했죠. 너 자손의 원수의 성문을 열리라 했죠. 이것은 창세기 3장의 뱀의 후손과의 전쟁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을 누구보고 합니까? 리브가 보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천만인의 어미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개입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개입하면 왜 남성이 드러나는가? 여호와 하나님 자체가 신랑이기 때문에 이 땅에 뭐만 남았어요? 이 땅에 신부만 만들어 내면 돼요. 이삭이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리브가에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자식이 생겼습니다. 몇 명 생겼습니까? 자식이 하나이어야 되는데 두 명이 생겼죠. 두 명이 생겼으면 두 명은 필히 한 명으로 바뀌어야 되겠죠. 여자의 후손은 한 명이니까요. 축복권이 한 명으로 돼야 되겠죠.

 

되게 될 때에 먼저 난 자가 최후의 한 명입니까? 나중에 된 자가 최후의 한 명입니까? 나중 된 자죠. 그러면 이삭의 첫 남자가 누구이냐 하면 에입니다. 나중 된 자가 누구냐 하면 야곱입니다. 그런데 에서가 먼저 났으면 장자이고 장자이니까 축복권이 있고 야곱은 차자이죠. 나중에 났죠. 그러면 장자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야곱이 축복권이 없고 둘째인줄 알면서도 왜 자꾸 첫째 자리를 넘봅니까? 이유가 뭡니까? 이 세상은 먼저 난 자기 맏이에요. 맏이라는 것은 육적으로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확정된 사실을 야곱은 순순히 안 받아 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 왜 나는 동생 영원토록 그렇지! 왜 안 받아들이고 호시탐탐 뭘 노립니까? 저거 내 자리인데 저 맏이 자리가 내 자리인데 야곱의 소원이 남북통일이 아니에요.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노려요? 맏이자리를 노리는 거예요.

 

상대적으로 에서는 장자의 자리를 우습게 본 거예요. 에서는 장자의 자리를 우습게 본 것이 아니고 안목이 한 번 장자이면, 맏이면 맏이라고 확정 지었지 우습게 본 게 아니에요. 얼마나 그 장자 자리가 확정적이었으면 팥죽 받아먹기 전에 그래 너 형해라! 넙죽 팥죽 받아먹고 또 형 노릇 하겠어요? 이 말은 뭡니까? 팥죽으로 바뀔 장자 같으면 이것은 말이 안된다는 거예요. 팥죽 먹고 난 뒤에 에서가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아이고 나는 엉터리야! 망쳐놨어! 이제 나는 둘짜가 됐어!”이렇게 했습니까? “저거 야곱 바보 아니야!”팥죽으로 먼저 난 자를 바꿀 수가 있어요? 없어요? 바꿀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바뀌게 했죠. 에서가 하는 말이 같은 하늘같으면 이 쪽 축복을 줬으면 좀 나누어 주던지 같은 자식이니까 축복을 주려고 하는데 왜 저쪽에 축복을 다 가게하고 왜 이쪽은 요만큼도 준것도 없이 저주만 오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개인을 앞장 세우는 배후에 구조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구조는 이 땅에 이 세상 자체가 처음부터 역전된 거꾸러져 있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 자체가 거꾸로 되어 있는 거예요. 거꾸로 되어 있는데서 거짓말은 진리가 되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거짓말을 했죠. 거꾸로 된 세상에서 거짓말이 진리이고 참말이 거짓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believe or not

 

개인으로 생각하면 거짓말이 맞아요.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개인적인 이기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구조로 생각한다면 원래 자기 자리 찾아가는 그 모습이 남들 보기에 거짓말해서 뺏아온 것으로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어요. 나중에 얍복강가에서 천사가 왔을 때 제가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던가요? 얍복강에 천사가 와서 야곱이 천사를 만나고 난뒤에 그때부터 환도 뼈가 깨지면서 힘이 원천이 깨지면서 에서는 없었다고 말 했죠. 그러면 그 깨지기 전에는 누구를 의식을 했다? 형을 의식해서 형과 싸워야지 하는 투쟁을 생각했는데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힘에 있어서 투쟁하는 게임을 생각했는데 여호와 사자한테 얻어맞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그 앞에서는 자기가 라이벌이 없어 졌습니다.

 

? 야곱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싸움 할 대상이 없습니다. 여유만만이에요. 삼성을 응원하네, 삼성이 100으로 져도 괜찮고 한국하고 일본하고 축구하다가 한국 팀이 30으로 져도 괜찮고 어떤 게임에서 독자적인 자기의 주장, 자기의 세계가 없어요. 이제는 역전된 모든 인간을 한 편으로 잡으면 모든 인간에게 버림받으면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로 말미암아 거꾸로 역전이 되고 만다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세계는 없고 나기 이름은 없고 누구의 이름으로 산다? 이제는 주의 이름 만든 그 세계 안에서 거꾸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여러분은 부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유인하는 자가 돼야 됩니다. 디모데후서 36절에서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라고 되어 있죠.

세상 적으로 봐서는 비진리가 비진리 값을 한다고 역시 진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해서 같이 죄를 짓고 죄를 뒤집어쓰는 그런 말씀이라면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면 이 말씀이 이 세상에 우리 인간 세계에서 적용되는 말씀이라면 거꾸로 된 세상에서 이것을 적용한다면 결국은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을 빼 내는 유인하는 유인책이 된다 이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죠.

 

야곱이 맏이가 되겠다는 것은 욕심입니까? 아니면 정당한 겁니까?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거니까 정당한 거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여러 가지 갈라디아 전도한 것이 정당한 겁니까? 유인한 겁니까? 정당한 거죠. 그렇잖아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안 전하면 뭐하겠어요? 여러분 그동안 속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게 진리입니다. 이게 유인하는 겁니까? 아니면 속임수를 쓰는 겁니까? 정당한 겁니까? 정당한 거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뭐가 없느냐, 선과 악이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성립이 됩니다. 선과 악을 만드신 그분이 의도적으로 선과 악을 대립 시켰다. 이것은 맞아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서 선하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악하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인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참 선한 분이야 죽이자! 이렇게 된 겁니까? 저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죽이자 이렇게 되는 겁니까? 악하기 때문에 죽인 거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말은 악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들이 악하고 악함을 당한 예수님은 선한 분이 되는 거죠. 성령께서 오신 이유가 그거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는 선한 사람이네! 이런 논리가 나올수 있습니다.

 

그 논리가 잘못 됐다는 거예요. 선과 악을 내 중심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게 바로 남성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남성이 돼 버리면 뱀의 후손과 결부가 안돼요. 우리는 뭐가 되느냐 우리는 여성이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뱀의 두 손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거든요. 그러면 여성이 되려면 우리가 사용하는 남성은 숨어 있어야 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 돼야 되고 우리는 신부가 돼야 되죠.

 

여성성의 특징이 뭐라 했습니까? 내 안에 결핍이 있고 이것은 채울 수 없는 죄가 있고 그 다음에 이것을 그대로 누구에게 의존 한다? 나의 신랑 되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의지 하게 되면 우리가 속해 있는 결핍 속에 있는 이 세상이 뱀의 짐승의 세계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작업이 마무리 되고 완성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바로 구조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마치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죠. 세상은 과학적으로 수학적 공식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했죠. 모든 수학적 공식으로 되어 있다 했죠. 공식에 맞추면 달에도 가고 화성에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게 수학적 공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수학적 공식으로 되어 있다면 이것은 아주 뭔가 냉혹한 힘과 힘의 게임의 싸움이 됩니다. 북한에서 핵미사일 만들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돼요? 핵미사일을 또 만들어야 힘의 균형이 맞춰지겠죠. 이게 수학적 공식으로 힘과 힘의 논리로 만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힘과 힘이 눌려 버리면 오늘 본문에서 어리석은 여인을 유인하는 그러한 남성들 어리석은 여인을 유인하고 약한 여자를 유인하는 그 힘의 세계가 그대로 되풀이 되겠죠. 이 싸움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항상 배우고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왜 이것은 대적이고 싸움 이고 게임이고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힘과 힘의 싸움 지식과 진리의 싸움은 이것은 그저 이 세상일 뿐 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제가 두 번째 시간 끝에 뭐라 했습니까? 이 자체가 개인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이 자체가 구조적이라 말이죠. 그러면 이 세상은 무슨 구조, 남성성으로 돌아가는 구조 안에 우리가 이 땅에 태어 난 거예요. 남성성이 뭐라 했습니까? 독자적으로 나만 잘되면 되고 나만 성공하면 되고 나만 승자가 되고 내가 승리하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히 사는 보람이 충분히 얻게 되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게 남성의 세계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는 남성의 세계가 아니고 남성은 빠져 버리고 무엇과 무엇의 대결이다? 남성은 없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죠. 문제는 뱀을 어디서 찾느냐는 겁니다. 뱀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뱀을 어떻게 찾는다고 했습니까? 뱀은 바로 여자의 후손이 나타날 때만 뱀이 나타나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누가 개입할 때? 여호와가 개입해야 돼요. 여호와가 개입해야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요. 여호와가 개입을 하니까 야곱이 거짓말을 해 버리죠. 아브라함의 사라는 애를 못 낳는데 여호와가 개입해서 애기를 낳죠. 아브라함은 졸지에 누구를 여호와 앞에 누구를 바쳐야 돼요? 사랑하는 자식을 바쳐야 돼요. 얼마나 예쁜데 그것을 바치다니 미운 자식을 바치는게 아니에요. 사랑하는 자식을 바치는 거예요.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 이 세상이 뱀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을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야 아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우리는 평소에 어떻게 살아갑니까? 평소에 어떻게 사는지 간단하죠. 독자적으로 내 이름으로, 주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 위주로 살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뱀에 이끌려 산다는 것을 티를 내는데 티를 내는 방법이 어떤 것이 있겠어요? 전적으로 의지 할 수밖에 없는 여성성 같은 요소를 우리 인생에서 발췌해 내고 그것을 우발적으로 등장시키죠.

 

기도해도 안 돼. 헌금해도 안 돼. 울부짖어도 안 돼. 점점 더 내 안에 결핍과 죄만 느껴 질 때 그때는 독자적인 내가 뭐로 바뀝니까? 의존적으로 바뀌죠. 어떻게?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제 힘으로 아무리 해도 내 자체가 문제 있기 때문에 문제 있는 인간이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알고 주님이 알잖아요. 그러니까 문제성 있는 것을 주께서 마음대로 가지고 부수던지 어떻게 다루던지 마음껏 가지고 놀고 나는 주님의 여성, 여자로서 만족합니다. 라고 날 때 비로소 뭐가 밝혀집니까?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세상, 예수님의 진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그림 하나를 그리고 마치겠습니다. 강의 처음 할 때 한 이야기입니다. 비진리가 설치는 세계에서 유인하고 있는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어요? 감사해야 된다고 했죠. 감사해야 되는데 뭐가 뚫려 있습니까? 진리의 구조를 위해서 안에 결핍이라는 구조가 우리를 가지고 지금도 마음껏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감격하고 감사합시다. 빛이 들어 왔을 때 내가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그냥 죽던지 암에 걸리던지 살던지 말든지 이게 내 소관이 아니고 그것은 저한테 빛을 주신 주님의 소관입니다. 하고 맡길 수 있는 주님의 신부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유인하는 나쁜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내 독자적으로 내 이름을 구축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꼬이고 유인했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듣고 그런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